예술은 사유하게 한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까지 예술의 일부이다. (18쪽)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현대의 질문에 이 책은 사유라고 대답한다. 인간과 자연 세계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사유의 촉발이다. 영화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기존에 알고있던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것, 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라는데 동의한다. 이 책은 그런 전제하에 영화와 미술을 종횡무진하며 이 시대의 예술이 어떻게 다른 사유의 힘을 보여주는지를 찬찬히 읽어나간다.
한국사회의 자살률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통계수치로 보여질 때와 예술로 보여질 때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사는게 증발하거나 죽는 것보다 행복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영화나, 굳이 상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우리 앞으로 끌어내서 보여주는 것도 결국 예술의 힘이다.
카프카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예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내게 그런 충격적 각인을 가장 강렬하게 안겨준 것은 아주 오래전 봤던 이안 감독의 영화 <결혼 피로연>이었다. 1993년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부서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야 이 영화에서 말하는 동성애코드는 그야말로 너무나도 평범할 뿐만 아니라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했던 당시는 달랐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동성애자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대였고, 기본적으로 정보 자체가 없었던 시기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 진보를 자처하던 나 역시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고, 뭔가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정도에 머물렀다.
그 때 본 이 영화가 나의 내면을 깨뜨리는 도끼가 되었던 것은 "아 동성애라는게 특별한게 아니구나! 저 사람들(물론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서겠지만) 정말 그냥 사랑을 하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듯이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도 그냥 사랑을 할 뿐이구나, 이상하거나 다른게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게 동성일수도 아니면 이성일수도 있는거였구나"
이 영화는 적어도 내게는 나의 내면의 얼어붙은 동성애 혐오코드를 깨뜨리는 도끼였던 것이다.
이안 감독이 있었기 때문일까? 대만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물론 대만 사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은 듯하다. 내가 대만여행을 갔을 때 한창 총통선거기간이었다. 한국어가 약간 되던 택시기사에게 당신은 누구를 지지하느냐라고 하니 국민당을 지지한단다. 이유가 뭐냐니까 민진당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해서 싫다고 딱 잘라 말했었다.
그러나 결국 민진당이 선거에서 승리했고, 대만의 작은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주변 나라에도 영향을 미칠테다. 근거없는 혐오에 바탕을 둔 차별들이 없는 세상은 이런 노력들에 의해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겠지라고 하면 지나친 낙관일까?
뱅크시가 자신의 작품을 웹에서 팔면서 문제를 냈다.
<먼저 '예술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50단어 이내로 대답해야 했다. 좋은 답을 쓰면 무료로 물건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물론 결제를 해야 했다.(스톰지 조끼를 원했던 변호사 친구는 '예술은 생각하게 하고 토론을 유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둘 다 사회에는 대단히 중요하다'라고 썼다. 불행히도 우편 배달원은 찾아오지 않았다. - 221쪽>
아쉬운건 이 온갖 대답이 가능한 질문에서 당첨된 대답이 무엇인지 책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뱅크시와 그의 작품을 떠올리면서 계속 머리속을 맨도는 것은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예술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이었다. 그가 웹에 냈던 문제와 같은 질문을 뱅크시를 좋아하는 기간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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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뱅크시는 소더비 경매에서 자신의 그림 '소녀와 풍선'이 낙찰되는 순간 액자에 설치되어있는 자동 파쇄기가 작동하면서 그림이 파쇄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뱅크시쪽의 입장으로는 그림이 반만 파쇄된것은 기계의 오작동이었고, 원래는 모두 파쇄하려 했다지만 실제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이 퍼포먼스는 뱅크시가 기존에 보여주었던 예술에 대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뱅크시는 이렇게 말했다. "갤러리에 간 당신은 단지 백만장자들의 장식장을 구경하는 관람객에 불과하다."라고.....
윌 엘즈워서-존스라는 어려운 이름의 영국인이 쓴 이 책 <뱅크시 - 벽 뒤의 남자>는 어찌보면 뱅크시 덕후가 그의 작품활동의 궤적을 꼼꼼하게 추적하면서 쓴 일종의 안내서이다.
뱅크시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이런 작업을 안하니 할 수 없이 누군가가 대신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뱅크시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꽤 유용하다.
또한 뱅크시의 작품이 이후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경매에 올려지고 그것을 둘러싼 온갖 논란들에 대해서도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뱅크시를 둘러싸고 있는 논란을 들자면 정말 끝이 없다.
아무 설명없이도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쉬운 그의 그림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앞에서 말했던 사유를 촉발하는 힘으로서의 예술을 생각하면 뱅크시의 그림은 당연히 예술이며 그것도 뛰어난 예술이다.
그는 온갖 사회의 권위에 대해 뻑큐를 날린다. 부당한 팔레스타인 장벽에 장벽 너머의 삶에 대한 꿈을 보여준다. 환상의 디즈니랜드가 아니라 현실의 삶을 보여준다. 무엇을 보여주든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그 외에 나머지 문제들은 사실상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뱅크시가 돈을 얼마나 벌었든, 그가 하드 그래피티계에서 말하는 그래피티계의 배신자든 아니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참고로 뱅크시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또한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으며, 실제 뱅크시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은 뱅크시의 그림이 그려진 벽을 떼어가서 경매에 붙이고 하는 이들이다.)
뱅크시의 그림을 보겠다고 영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일부러 가기는 힘들고, 실제 뱅크시 그림이 어떤 식으로 어떤 장소에 그려졌는지를 실제 모습으로 보려면 이 책이 유용하다.
이 책은 뱅크시라는 화가의 100% 진심 덕후인 저자가 "거리의 예술은 거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12쪽)라는 확고한 신념하에 뱅크시의 그림이 실제 그려진 영국 곳곳의 장소를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심지어 가는 방법도 있다.(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뱅크시의 이 그림들이 대부분 없어졌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에 의해서 희미해지다가 없어진 경우도 있고, 공무원이나 주인에 의해서 벽이 다시 칠해지면서 없어지거나 다른 그래피티 화가가 덧그리거나 심지어는 건물 주인 또는 벽을 사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철거되어 경매장으로 가거나 등등)
지금은 볼 수 없는 그림들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은 거리의 예술가로서의 뱅크시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뱅크시의 작품들을 제대로 된 도판으로 보고자 하면 이 책이다.
애초에 화집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도판들이 훌륭하다.
뱅크시의 그림은 머리 아프게 골머리 싸매며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보는 순간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바로 느낄 수 있다.
또는 아 이건 뭐지 하면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계의 이면을 바로 깨달을 수도 있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는 것이 맞다. 뱅크시에 대한 구구절절한 어떤 해설보다도 그의 작품이 그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글자가 얼마 되지 않는 이 책에서 가장 웃겼던 뱅크시의 이야기는 그가 일반적으로 스프레이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래피티에 스텐실 기법을 쓰게 된 계기를 적은 에피소드다.
<열여덟 살 때, 난 친구들과 밤새 열차 벽면에다 커다란 은색 물방울 무늬 글자로 '또 지각이야'라고 쓰고 있었다. 경찰이 나타나자, 나는 가시덤불 사이를 헤치며 도망을 쳐야 했다. 나머지 녀석들은 차를 타고 급하게 도망쳤지만, 나는 덤프트럭 밑에서 흘러내리는 엔진오일을 얼굴에 맞으며 한 시간도 넘게 숨어 있어야 했다. 나를 쫓는 경찰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림 그리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든지 아니면 애초에 그림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연료탱크 밑에 스텐실로 새겨진 글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식으로 따라하면서 글자 크리를 90cm정도로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일이 있은 후, 집으로 돌아온 난 조용히 여자친구가 누워있는 침대로 기어들어가, 어젯밤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친구는 심장에 안 좋으니 마약을 그만 하라고 했다. -15쪽>
위의 책과 같은 책인데 약간 편집이 다르다.
이 책이 가장 먼저 나온 책인데 책 가격을 생각해서 편집을 조금 손보고 책의 판형을 줄여 나왔던 것 같다.
내게는 뱅크시를 처음 알게 해준 소중한 책이지만 제대로 도판을 보려면 위의 책을 보는게 맞다.
문제는 최근에 나온 뱅크시 - 벽뒤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절판이라는 건데 중고 가격이 최소 2배에 이른다. 아 진짜....
그러나 나는 이 절판된 책 3권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페이퍼는 결국 자랑질 페이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