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 소설의 최고 매력은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의 힘이라고 언제나 생각해왔다.
제일 먼저 읽었으며 나를 오쿠다 히데오의 세계에 열광하게 한 책이자 동시에 아직도 오쿠다 히데오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책은 <남쪽으로 튀어>이다.
한 때 좌파의 전설의 투사였다는 우에하라씨!
소문만 무성하지 자기입으로 말한건 아니다.
이 분의 거침없는 입담을 보라
"세금은 못낸다면 못내"
"학교 안 보내"
"난 일본 국민이기를 그만둘거야"
"그자들이 집을 부순다면 나는 그 답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러주지"
그의 대사들을 읽을 때마다 그야말로 유쾌 상쾌 통쾌하다.
그런 그가 제목 그대로 남쪽으로 튀어 어딘가 먼 섬에서 착취가 없는 삶을 찾아내었을 때 보여주는 그의 반전까지
그야말로 이 소설은 오쿠다 히데오표 캐릭터의 힘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남쪽으로 튀어>를 제일 좋아하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그의 이름을 알린 책은 역시 <공중그네>를 비롯한 이라부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엽기적인 의사 이라부와 그에 못지 않은 간호사 마유미
이라부는 때로 바보같고, 아무한테나 처방이란건 그저 포도당 주사고, 누구에게나 심드렁하고, 어쩌면 애같고...
거기에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마유미는 이라부를 한심해 하면서도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시니컬하면서도 촌철살인을 번갈아가며 날려주시는 이 두 캐릭터의 힘이 이 소설 시리즈를 끌고 가는 힘이다.
이 캐릭터들은 권력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보이는가 하면, 논리고 뭐고 다 필요없어 좀 적당히 어울려서 살아라고도 하고, 또는 쓸데없는 겉치레에서 제발 좀 벗어나서 자신을 찾아보라는 보편적인 얘기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신경증에 시달리는 IT업계의 총아에게 글자찾기 게임을 처방하자, 이 인간은 또 죽어라고 어린아이들에게 이기려고 기를 쓴다.
우리의 마유미는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혼자만 이기면 놀아주는 사람이 있겠어?"라며 한 방을 날려주시고'
시골 섬마을에 간 이라부는 광적인 면장선거에 휩쓸리자
"이봐, 미야자키 씨. 데모크라시라는 건 말이야. 실은 최선의 방법은 아니야. 제대로 기능하려면 일정 이상의 규모가 필요하다고. 1만명 이하의 커뮤니티에서는 옛날 영주 비슷한 존재가 다스리는 쪽이 오히려 더 번창하지 않을까? 크흐흐."
이쯤 보다 보면 남쪽으로 튀어의 우에하라씨와 이라부, 마유미가 모두 겹쳐 보인다.
보통 시리즈물은 뒷편으로 갈수록 캐릭터의 힘이 떨어지고 재미가 없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리즈는 오히려 뒷편으로 갈수록 캐릭터의 힘이 펄펄 살아난다.
공중그네는 공전의 힛트를 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뒷편은 왜 그정도의 성공은 못거두었을까 굉장히 아쉽다.
오쿠다 히데오의 단편집 <라라피포>와 <걸>은 우리 주변을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라라피포라는 제목이 오죽하면 "a lot of people"을 빨리 발음할 때 들리는 소리를 음역한 것일까?
이 소설들 역시 현실적으로 봤을 때 별볼일 없는 인간들의 내면에 손을 내밀고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심드렁한듯하지만 유머스러한 캐릭터는 오쿠다 히데오 소설의 백미다.
하지만 이쯤에서부터였던 거 같다.
오쿠다 히데오 소설이 살짝 지루해지기 시작한게....
이후 <한밤중에 행진>이나 에세이 <오! 수다>를 보면서 이젠 그만봐야겠네라고 생각했으니......
그런데 참으로 오랫만에 오쿠다 히데오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새 소설이 나왔다.
일본열도를 뒤흔든 유괴사건을 소재로 죄의 근원에 도달하는 혼신의 장편소설이란다.(책소개에서)
처음에는 추리소설인줄 알았다. 유괴사건이 소재라고 해서....
아 그런데 전혀 다른 소설이다.
심지어 여태까지의 오쿠다 히데오식 캐릭터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음 굳이 비유한다면 추리가 빠진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또는 논픽션의 혼합이랄까?
때는 1963년 도쿄올림픽 한해 전이다.
올림픽으로 인해 사회가 붕 떠 있는, 어디에서나 공사가 한창인 시절이다.
이런 시절 유괴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일본 열도를 뒤흔든 이유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일단 전화기가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해서 전화협박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사건이 가능해졌다는 것,
그리고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전국뉴스로 보도가 되었다는 것
기술의 발달이 묻혀질 사건을 전국적인 사건으로 만든것일 뿐...
이 소설에는 어린 시절 학대의 피해로 인해 선악의 개념이 없는 우노 간지라는 젊은이, 도쿄 올림픽 열풍속에서도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아사히카와 근방의 동네 산요의 조선인 가족들, 살인사건과 유괴사건의 범인을 쫒는 경찰들과 같이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그 누구도 두드러진 주인공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캐릭터들은 모두가 너무도 평범하여 오쿠다 히데오가 이전에 보인 독특한 캐릭터는 전혀 없다.
그리고 유머도 없다.
모두가 열심히 자기 역할을 한다.
범죄를 쫒는 경찰들의 업무는 지루할정도로 상세하게 펼쳐저 맞아 원래 수사란건 이런 고군분투일 뿐이지 하면서 보게 된다.
어디에도 극적인 인물도 상황도 없다.
독자는 사실 이 소설 속 누구에게든 감정이입할 수도 있고, 모든 인물에게서 거리를 둘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1963년의 일본이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은 일본의 본격적인 부흥의 시작이었는데,전후 본격적인 부흥 직전의 일본사회를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풍경속에는 희망보다는 몰락해가는 좌파들, 사회 언저리의 밑바닥 인생들, 경찰을 통해 보는 경직된 관료제의 완성,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드러난다.
오쿠다 히데오가 캐릭터를 버리고 논픽션식 서술기법을 가져오면서 내놓은 죄의 궤적이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올해 도쿄 올림픽을 보면서 이대로 가면 정말 일본이 몰락하겠구나라고 느낀 사람은 나만일까?
저항하지 않는, 비판하지 않는 일본국민을 보면서 시민이 죽은 사회, 비판받지 않는 권력의 몰락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1963년과 2021년의 일본은 다른 듯하면서 닮았다.
희망에 차 모든 어두운 것들을 덮어버릴 수 있었고, 사회 비판에 대해서도 냉소와 조소를 보낼 수 있었던 1963년이 어쩌면 지금의 일본으로 이어진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남의 나라인지라 그 내밀한 사정까지 느끼기에는 공감지수가 확 떨어진다.
이번 소설 <죄의 궤적>이 100% 공감하고 재미있기에는 역시 일본은 남의 나라다.
새로운 오쿠다 히데오는 이전처럼 나를 열광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선하다.
앞으로 그의 소설을 조금 더 읽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