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잡식성 귀차니스트의 책읽기 (바람돌이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baramdori</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최초의 여성 릴리스, 세계를 떠받치는 힘</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14 Jul 2026 15:45:06 +0900</lastBuildDate><image><title>바람돌이</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53602193481189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baramdori</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바람돌이</description></image><item><author>바람돌이</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바라모를 뽐뿌질한 잠자냥님 보시오.</title><link>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390813</link><pubDate>Tue, 14 Jul 2026 10: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39081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69&TPaperId=173908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76/coveroff/893746496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잠자냥님이 그러니까 100자평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단 110쪽으로 완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음. 민음사는 아이라를 더 내놓으시오!! 라고.....<br><br>이건 100자평으로 사람을 낚는 확고한 기술이다.그리고 낚였다. 나는 원래 귀가 얇다.&nbsp;<br>낚인 결과가 딱히 나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딱히 좋지만도 않고,&nbsp;또 뭔가 새로운 소설양식인듯하다가 좀 더 생각해보면 이른바 예술 감독들의 어이없는 코미디적 상황을 곁들인 한편의 재미없는 영화에서 많이 본듯한 상황이기도 하고......<br>뭔가 계속 주절주절하다가 마지막 한방으로 나를 격동시켜줄려나 했지만 뭐 그것도 없어서 섭섭하다가,아니 없는게 이 소설의 주제지. 그 한방을 기대하는게 여전히 내가 근대 소설 문법에 얽매여있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다가....<br>결국 이렇게 내 마음을 이랬다 저랬다 판단 불가능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듯도 하고....<br>하여튼 스토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또 딱히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이 책에 대한 결론은한 마디로 철저하게 취향을 타리라라는 것이다.그리고 내 결론은 나의 취향은 아니라고 하려다가 아니지 않을까라고 급격히 후퇴하고,.....이로써 오늘의 결론은 잠자냥님에게 낚이지 말자라는 것?&nbsp;<br>아니 그런데 또 잠자냥님이 소개해주는 책들을 보면 취향 저격인 것도 많았는데....결국 결론이 없다가 오늘의 결론이다.소설도 도대체 뭐라고 얘기할지 말하기 참으로 애매하니 모든 결론이 일맥상통한다고나 할까?<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76/cover150/893746496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237611</link></image></item><item><author>바람돌이</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불편한 책이 나를 만든다. - [딸기 이론]</title><link>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382450</link><pubDate>Thu, 09 Jul 2026 13: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38245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49315&TPaperId=1738245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2/96/coveroff/89374493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49315&TPaperId=1738245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딸기 이론</a><br/>김숨 지음 / 민음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여성, 이주, 노동자3가지 중 어느 것이 당신의 정체성에 규정적인 것인가? 당신의 삶에 결정적인 규정을 하는 것은 여성인가? 이주인가? 아니면 노동인가?&nbsp;나를 규정하는 것은 저 3가지의 조건 중 여성과 노동자이다. 저기서 이주 하나가 빠진 것 만으로도 나는 적어도 나의 노동이 나의 여성성을 억압하지는 않는다.&nbsp;<br>자 당신이 한번 떠올려보라. 여성과 노동자가 합쳐진 모습을.... 나의 모습이든 타자의 모습을 떠올리든 사실 일곱빛깔 무지개처럼 다종 다양한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당신이 떠올린 여성 노동과 내가 떠올린 여성 노동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지만 장담할 수 있는 건 당신이든 나든 하나의 모습만 떠올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nbsp;<br>자 그럼 다음..... 저 3개의 조건이 모두 합쳐진 누군가를 떠올려보라. 여성 이주 노동자. 장담하건대 당신이 떠올리는 모습이나 내가 떠올리는 모습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저 3개의 단어가 합쳐진 곳에서 우리는 백인여성인텔리노동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마치 저 단어들이 일반 명사가 아니라 고유 명사인 것처럼 우리는 동남아 어딘가에서 온 갈색의 작은 몸집의 여성을 떠올리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떠올리는 모습에서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지.....<br>나는 딸기를 따며 내 몸을 까맣게 잊곤 해. 내 몸에 자궁이 있다는 것도. 난 내 자궁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내 몸이 출산 적령기의 몸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해. 딸기를 따다 보면 내 몸에 두 손만 있는 것 같아. 딸기를 따는 두 손만. 그럼에도 자궁은 내 몸에 있어.&nbsp;참, 네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내 이름은 샤빼야.&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29~30쪽<br><br>&nbsp;책 속에서 주인공 샤빼의 이름은 고작 2번정도 호명된다. 나도 이름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항변하지만 그 항변이 딱히 힘있지 않음을 상징하듯이 겨우 2번이다.&nbsp; 그리고 샤빼는 끊임없이 딸기딸기딸기하며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모든 순간들을 딸기를 단위로 호명한다.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극악한 노동을 겪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혹한 노동은 인간의 정신을 포획한다. 딸기밭의 샤빼는 저절로 딸기딸기딸기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의 몸이 나의 정신을 규정한다. 노동이 나를 만든다. 그것이 긍정적일 때는 그저 적절한 시간과 강도로 내 삶의 나머지 시간이 보장될 때이지 노동으로만 이어지는 삶은 나의 정신을 파괴한다.&nbsp;<br>&nbsp; 샤빼가 내 몸에 있는 자궁의 존재를 일부러 떠올리려 노력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살고 싶은 삶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고, 어쩌면 그것은 가족을 이루고 서로를 돌보는 그런 평범하디 평범한 삶의 모습일거다. 그러나 딸기밭의 노동이 무시하는 것은 그녀의 존재와 미래이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음으로써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궁의 존재로 상징 되는 그녀가 이룰지도 모르는 미래의 가족, 미래의 삶을 부정한다. 노동은 인간의 삶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지만, 이 노동이 선을 넘을 때는 이렇게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힘이 되어 버린다.&nbsp;<br>&nbsp; 김숨 작가는 늘 과거든 현재든 인간의 생생한 고통의 시간을 지금 여기로 가져왔다.위안부의 삶과 러시아 이주 한인들의 삶과 오키나와 학살 현장의 조선인과 일본인들.... 그리고 오늘 김숨 작가가 우리를 이끈 곳이 바로 지금, 여기 여성 이주 노동자이다.&nbsp;<br>&nbsp; 김숨 작가의 이번 책은 유난히 불편하다. 왜냐하면 작가가 다루는 시간과 공간이 지금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참 교묘해서 작가가 아무리 과거가 과거로 끝나지 않음을 이야기해도, 그럼에도 독자는 과거는 과거로 인식한다. 또한 그 고통의 현장들이 과거의 이야기이기에 안심한다. 지금 우리는 전쟁의 현장에 있지 않잖아. 지금 우리가 위안부로 끌려가는 건 아니잖아.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라는 등의 감정을 우리는 기본적으로 깔고 과거의 시대를 회상하고 글을 읽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연민하고, 타인의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별다른 거리낌이 없고 어렵지 않다. 나의 정의로움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나의 자존감을 충족시켜 준다.<br>&nbsp; 그러나 불현듯 끌려온 지금 여기는 어떠한가? 지금 여기라는 것은 이 모든 이야기에 나는 방관자이거나, 입만 살은 위선자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신문 기사로만 전해지는 삶의 이야기가 지금 당신 앞에 펼쳐진다. 이름을 가지고 매일의 삶을 살아내는 나와 같은 사람의 온기로 그가 다가올 때 방관자가 되거나 위선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나의 양심과 나의 인간됨의 문제가 되는 것이며, 여기서 내가 나의 양심을 지키고 나의 인간됨을 지키고자 한다면 나의 불편함과 나의 시간과 그 밖의 나의 약간의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작더라도 그런 노력이 결국 나라는 인간을 만든다. 내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나라는 인간을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문학이 나라는 인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렇게 불현듯 불쑥 다가온다.&nbsp;<br>&nbsp; 김숨 작가는 항상 인간의 고통이 머무는 곳을 지나치지 않고 관통해왔다. 가장 고통받는, 그러나 전해야 하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김숨 작가가 자신이 그려내는 삶에 녹아들어 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이 모든 문장 속에 스며 있다.&nbsp;<br>&nbsp; 타인의 고통과 삶에 대한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2 가지다.&nbsp;거리 두기와 일체화, 다르게 표현하자면 타자의 삶에 대한 관찰의 치밀함과 공감 능력의 극대화이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독자에게 다가갈지는 결국 작가의 필력에 달렸을 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주 노동자가 아니지만 이 책을 읽는 모든 순간이 불편했다. 샤빼와 보파, 속행은 내 이웃의 삶이었고, 그들이 고통 받는 모든 순간에 나는 방관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김숨 작가가 원하는 것 역시 우리가 그들의 삶을 삶으로 느끼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 그리고 나와 그들의 삶이 이어져 있음을 아는 것이었을 것이다.<br>&nbsp; 누구든 가장 쉬운 것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인생을 글로 쓰면 소설책 몇 권은 쉽게 나오리라는 큰 소리가 얼마나 흔하던가? 그 말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타인에게는 흔해빠진 신파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이야기만으로는 작가가 될 수 없다. 내가 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나는 내 이야기밖에 못하기 때문이다. 나 너머의 삶, 그 삶을 얼마나 핍진하게, 깊이 파고들어 그려낼 수 있느냐에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있지 않을까? 김숨 작가는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인듯 그려온 작가이다. 그 공감의 깊이가 나를 불편하게 하고 그리고 결국......나를 바꾼다.&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2/96/cover150/89374493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229645</link></image></item><item><author>바람돌이</author><category>내가 사는 세상</category><title>약자가 약자인 채로 존중받는 사회 -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277654</link><pubDate>Fri, 15 May 2026 09: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2776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036848&TPaperId=172776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768/57/coveroff/k1220368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036848&TPaperId=172776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a><br/>우에노 지즈코 지음, 노경아 옮김 / 느린서재 / 2025년 02월<br/></td></tr></table><br/>&nbsp;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노동과 돌봄이 분리되지 않았고(정확하게는 분리될 수 없었고) 자본주의는 이 2가지를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분리해버렸다. 시장은 돌봄을 노동(급여를 받아 가치를 창출하는 시장에서의 노동)에서 쫒아내벼렸고, 따라서 돌봄은 가족애라는 신성 명제의 등장과 함께 온전히 여성의 의무로 규정되어 버렸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빠나 남동생의 대학 진학을 위해 딸이 10대 초반부터 공장에 가서 돈을 버는 K장녀 신화의 등장, 며느리가 된 여성이 병든 시부모나 남편을 봉양하는 효부 신화같은 것들이 노동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nbsp;&nbsp;<br>&nbsp; 좀 오래된 이야기인데 내 여동생은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서 치매가 온 시어머니를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10여년간 돌아가실 때까지 돌봤다.&nbsp; 이렇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 구청에서 연락이 왔단다. 효부상을 주고 싶다고.... ㅎㅎ&nbsp; 이 건은 친정어머니의 "그런 상 받으면 뒷말만 많이 나오고 귀찮기만 하다. 니가 뭐 하나만 조금 삐끗해도 효부상 받은게 맞니 틀리니 하는게 사람들이다. 하나도 좋을거 없다"라는 강경한 말씀과 딱히 핅요도 없고 웃긴 상이라는 여동생의 냉소로 결국 여동생은 이 상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웃기는게 이 시대의 이런 상도 친정어머니를 돌보거나 남편이 아내를 돌보는 경우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거 같다. 아니면 그런 경우 자체가 희귀했던거 같다.&nbsp;&nbsp;&nbsp;어쨌든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내가 제대로 아는게 아니었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 이 책에서 아래와 같은 도표를 보았을 때다.<br><br>&nbsp;&nbsp;&nbsp;&nbsp;이 도표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배출하는 산업 폐기물과 노동 시장이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고 더 이상 노동력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때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노인, 환자, 장애인은 동률의 선에 위치한다. 자본주의의 공장들이 산업 폐기물을 아무렇게나 버렸듯이, 쓸모없어 진 노동력도 배출하고 나면 그들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시장은 관심이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시장이 노동력 제공 이후의 삶을 보장해주거나 아니면 그 시장의 세금을 계속 받아먹은 국가가 노동 이후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당연한 거 같은데 시장도 국가도 그럴 생각이 없다. 그렇게 되면 불만이 생길 테니 이 불만은 가장 싼 방법으로 무마한다. 그게 바로 효부상이니 뭐니 하는 장치들이다.&nbsp;국가가 나서서 가족 이데올로기를 알아서 홍보해주고 효부상이니 뭐니 하는 장치를 통해 시장의 잔인함을 은폐하는 것이다.&nbsp;<br>&nbsp; 이 책을 읽기 이전의 나의 생각은 돌봄 노동이 노동으로 취급 받지 못하는 것을 복지 시스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저런 도표 하나로 너무 명쾌해진다. 돌봄 노동이 노동으로 취급되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시장 자체의 원죄였음을.... 결국 산업 폐기물이 지구를 황폐화 시키듯, 임금 노동을 할&nbsp; 수 없는, 또는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한 돌봄의 부재는 모든 인간의 삶을 황폐화 시킬 것이다. 고령화 사회라는 것은 결국 환자와 노인과 장애인이 증가하는 것의 다른 말이니 말이다.<br>&nbsp; 여전히 지금도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밀려난 노동력에 대한 돌봄노동을 가정과 여성의 문제로 밀어내고 있다. 여성의 인권, 정치적 권리, 사회적 평등은 일견 많이 나아진듯하다가도 돌봄노동의 영역에 가면 오히려 더 많은 부불노동(무임금 노동)으로 채워진다. 작가가 말하는 페미니즘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에 공감하게 된다.&nbsp;<br>마지막은(중략) 왜 인간의 생명을 낳고 기르고 그 죽음을 돌보는 노동(재생산 또는 돌봄 노동)이 다른 모든 노동의 하위로 취급되는가 하는 근원적 문제다. 이 의문이 풀릴 때까지 페미니즘의 과제는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27쪽, &lt;가부장제와 자본주의&gt;에서 재인용, 1990<br>&nbsp; 나는 항상 페미니즘은 세상을 보는 시각의 문제라는 생각을 해왔다. 철학은 결국 세상을 보는 시각이고, 페미니즘은 기존의 철학의 시선이 놓친 틈을 기꺼이 벌려서 "자 보라고 이게 사소한 틈이 아니야. 이 틈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해 왔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보자고"라는 말로 느껴왔었다. 짧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페미니즘의 문제를 확인하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명제,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 명제를 확인한다.&nbsp;<br><br>약자가 약자인 채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상이 페미니즘이다. -103쪽<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768/57/cover150/k1220368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7685758</link></image></item><item><author>바람돌이</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오독의 끝에 도달하는 마음 - [절창]</title><link>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242520</link><pubDate>Mon, 27 Apr 2026 22: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baramdori/172425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031678&TPaperId=172425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72/36/coveroff/k662031678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031678&TPaperId=172425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절창</a><br/>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09월<br/></td></tr></table><br/>&nbsp; 글을 쓸 때 힘을 주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힘을 빼는 일이다. 읽는 일도 마찬가지다. 너무 힘을 준 글을 읽을 때 독자는 빨리 지친다. 글이 주는 지나친 무거움, 과잉된 비장함 이런 것이 신경의 피로를 빨리 가져오고, 굳이 이렇게 비장하게 얘기해야 될까라는 질문이 자꾸 떠오르다보면 문맥을 놓치고 산만해지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이 끝까지 그러했다면 아마도 다 읽어내지는 못했으리라.... 이 소설에는 선생님과 아가씨, 2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소설의 초반은 선생님의 진술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좀 훌륭한 문장 쓰기 연습 공책같은 느낌이랄까? 너무 힘을 준 문장들의 연속이어서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인내를 갖고 읽어보자. 2부에서는 아가씨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문장들에 지나치게 들어간 힘이 좀 빠지기 시작하는데 난 오히려 여기부터가 좋았다.<br>&nbsp; 첫 번째 화자인 선생님이 하는 다음 말에서 이 소설의 주제는 이미 제시된다. 이 즈음에서는 독자인 나는 투란도트나 인어공주 이야기의 예를 읽으면서 이 책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한 것인가하고 막연하게 생각한다.&nbsp;&nbsp;&nbsp;&nbsp;어쨌든 이 일의 처음은 '읽는'데에서 비롯했기에, 나는 그 행위의 목적어가 어떤 사태와 사람에 닿아 있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오독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nbsp; - 15쪽<br><br>&nbsp; 그러나 조금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작가가 말하는 읽는 행위와 그 행위에 필연적으로 잠재한 오독은 책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우리도 흔히 마음을 읽는다고 하지 않나? 이 책은 결국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 그 마음을 알아주는 일, 아니 알아도 모르는 척 할 수 밖에 없는 이들과 그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다.&nbsp;<br>&nbsp; 주인공 중 하나인 아가씨는 타인의 상처에 접촉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읽는다. 찔리고 베이고 피가 흐르는 상처를 만지면 그의 기억이 파도처럼 나의 온몸으로 넘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읽어내는 기억, 마음은 거짓 없는, 오독의 가능성이 없는 진짜 마음일까? 기타 선생님의 상처를 통해 기억을 읽어야 할 때 아가씨는 미친 듯이 외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그게 안되면 그냥 상관없는 다른 걸 생각해, 애인 얼굴이라도 떠 올리라고.... 정말로 아가씨는 기타 선생님의 기억을 읽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능력조차도 상대가 마음을 감추려고 한다면, 우리가 읽는 것은 결국 오독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nbsp;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읽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nbsp;<br>&nbsp; 그러나 다시 생각한다면 사람의 마음, 그것도 내 옆에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가씨는 오언에게 " 절대로 네 마음은 읽지 않아"라고 하지만 이미 아가씨는 오언의 마음을 읽고 있다. 그렇게 상처를 헤집지 않아도 그의 표정, 말투, 몸짓만으로도 아가씨는 오언의 마음과 진심을 아는 것이다.&nbsp;<br>&nbsp; 우리의 일상도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아닌지 우리는 다 알고 느낄 수 있다. 흔히 사기꾼의 말에 넘어간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나를 속였는지 모른다"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그 사기꾼이 감쪽같은게 아니라, 그의 사기를 통해 얻을 댓가에 눈이 먼 내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읽고 싶은 마음만 읽은&nbsp; 결과가 사기를 당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진심이면 상대의 진심도 보인다. 아가씨의 너만은 읽지 않겠어는 너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이지. 너의 마음을 몰라가 아닌 것이다.&nbsp;<br>&nbsp; 바로 여기, 안다고 해서 모든 마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데 삶의 괴로움이 있다. 너를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내 삶에 설정한 선을 무너뜨려야 할 때, 너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럴 때 인간은 과연 타인의 마음이 아무리 절절하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삶과 마음을 무너뜨려야 함께 할 수 있는 삶은 과연 끝까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br><br>&nbsp; 읽기의 어려움과 불가능성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읽기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내가 너의 마음을 받아들일지의 여부의 문제라는 평범한 결론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이 소설이 재밌는 것은 그 평범한 결론에 다다르는 여정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진리란 결국 가장 쉬운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아가씨가 돌보게 된 어린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너무 평범하고 가볍다.<br>&nbsp; 그녀는 때린 아이의 어깨를 가만히 붙들고 말한다. 친구를 다치게 하면 안돼. 너 얘랑 친하잖아. 얘도 너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때리고 할퀴고, 상처를 주면 안 돼. 사과할 거지?&nbsp; &nbsp; -344쪽<br><br>&nbsp; 그러니까 이토록 작은 진리에 이르는 것이, 그리고 상처주지 않는 온전한 마음의 교환이 사실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는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실은 쉬운 것이라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다만 그 쉬운 것에 도달하기 위해 무수한 오독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게 사람의 마음인 것인가? 내 마음을 아는 것도 어렵지만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은 더 어렵다. 그래서 초반의 그 힘이 잔뜩 들어간 문장들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사람의 진심에 도달할 수 있음을 작가는 문장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nbsp;<br>&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72/36/cover150/k662031678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172360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