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완벽한 일격이었다. 타이밍, 힘, 충격. 모든 게 제대로 들어맞았다. 거기다 놀라움까지 사람들은 머리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다. 인간의 머리는 원래 뭘 박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오래된 유전 인자에 그렇게 새겨져있다. 박치기는 싸움의 판도를 바꾼다. 박치기가 사용되고 나면 싸움은 잔인성과 야만성을 띠게 된다. 갑작스러운 박치기 공격은 칼만 사용하기로 한 싸움에 엽총을 들이대는 것과도 같다. - P116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난 도움이 필요 없어. 난 내가 하는 일을 잘 알고있어. 게임을 하는 법도 물론 잘 알고 난 결코 내 양심을 저버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네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어. 그리고 자네 도움 없이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날 거야." - P128

"당연히 아픔이 있었죠. 슬픔과 상실감도 있었고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체념이었어요. 늘 있어왔던 일이라는 거죠. 만일 미시시피에서 살해당한 여성들이 오늘 밤 무덤에서 모두 일어나 시가행진을 한다면 당신은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아주 긴 행렬이라는 것과 참가자들 대부분이 흑인 여성들이라는 것. 이 지역에서는 가난한 흑인 여성들이 끝없이 살해당하고 있어요. 부유한 백인 여성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 P193

처음부터 치기와 겉멋에 겨운 사내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설치류를 순교자로 둔갑시킬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거룩한 희생을뒤따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 또한 분명했다. 피와 뇌수는 현실이다.
그리고 거짓된 열정으로 뭉친 집단은 현실을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 - P297

나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극히 일부밖에 보지 못한한 국가의 시민이었다. 갈 곳도 있었고 할 일도 있었다. 도시도 있었고 시골도 있었다. 산도 있었고 계곡도 있었다. 강도 있었다. 박물관도 있었고 극장도 있었다. 모델, 클럽, 술집, 간이식당도 있었다. 유명한 전적지도 있었고.
건국과 구국 영웅들의 탄생지도 있었다. 역사도 있었고 이야기도 있었고 전 - P490

설도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친구도 있었고 원하지 않는다면 고독도 있었다.
그 모든 곳으로 데려다 줄 도로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중 아무 도로나 고른 뒤, 한쪽 발만 차도 위로 내디뎠다. 그러고는 한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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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은 여성의 노예제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억압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조직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며 싸운다. 1848년 세니커폴스 대회에서 그녀가 제기한 여성의 선거권은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대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나 세니커폴스선언에 여성의 불평등한 상황과 권리를 표현하고 그것을 자각하게 하는데 기여햇다. 그러나 이 선언은 안타깝게도 흑인 여성과 백인 노동계급 여성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했다.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여성의 관점이자 운동이었다. 그들이 하는 노예제 반대운동은 결국 가진 자의 동정심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인식의 한계는 1863년 이후 링컨의 노예해방령이 발표되고 법적인 노예해방이 실제화되자 바로 여성과 흑인을 대립시키면서 새로운 인종차별주의적인 생각으로 나아간다. 백인 여성보다 흑인 남성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 커지면 안되지라는 생각 또는 ".... 비속한 무지렁이 흑인 남자보다는 학식있는 백인 남성의 노예로 지내는게 더 낫다"라는 발언이라니..... 여기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진보는 멈추고, 오히려 인종차별주의자로 돌아섬을 알 수 있다.   


  여성참정권 운동 내부에서 흑인 참정권투쟁과 여성참정권 투쟁을 합치고자 한 모임에서조차 흑인 남성이 투표하는 것보다는 여성이 투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적인 입장이 표명된다. 

그런데 이걸 이 여성들이 참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그녀들의 한계야라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생각은 분명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통용되는 방식은 만만치 않다.


  흑인은 남녀 모두 투표권이 없고, 백인은 여성의 투표권이 없다. 그런데 노예해방령이 시행되고 나면 흑인 남성에게는 투표권이 생긴다. 그러면 여태까지 여성투표권과 노예해방을 위해 싸웠던 백인 여성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물론 여기서 모두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여기서 흑인이라도 먼저 투표권이 생겨서 다행이야, 이제 그들이 의회에 들어가서 우리 여성의 투표권을 위해 싸울수 있도록 하자라고 말할 수 있다면(물론 이게 정답이다) 당신은 진짜 현자다. 그리고 실제로 이 논쟁의 뒤에 산업자본가들이 주도권을 유지, 확대하기 위한 본질을 파악한다면 당신은 더욱 현자다. 그런데 대부분의 백인 여성, 특히 중산층 여성은 대부분의 흑인 남성들보다 더 잘 교육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우월하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하인이었던 이들을 동정심으로 풀어주자 그들이 오히려 자신의 위로 올라서는 격이다. 운동의 분열과 인종차별주의의 대두는 다시 필연적이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발언은 명백히 틀렸지만, 실제 운동에서는 이것이 현실적인 힘이 된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문제만으로 또는 이론적 정합성만으로 현실의 운동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론을 공부한다. 저 복잡한 감정과 현실을 뚫고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소저너 트루스는 1850년 최초의 전미여성권익대회에서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라는 연설을 통해 새로운 여성운동의 계급 편향과 인종주의를 폭로했다. 그럼으로써 백인여성- 흑인여성- 백인/흑인 노동자 여성의 연대를 위한 강력한 한걸음을 내디뎠다. 다음은 소저너 트루스의 연설 전문이다. (출처는 위키백과)


여러분, 이렇게 야단법석인 곳에는 뭔가 정상이 아닌 게 있음이 틀림없어요. 내 생각에는 남부의 검둥이와 북부의 여성 모두가 권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백인 남성들이 곧 곤경에 빠지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건 전부 뭐죠?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날 봐요! 내 팔을 보라구요! 나는 땅을 갈고,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해왔어요. 그리고 어떤 남성도 날 앞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남성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 게 있을 땐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남성 만큼이나 채찍질을 견뎌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난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 대부분 노예로 팔리는 걸 지켜봤어요. 내가 어미의 슬픔으로 울부짖을 때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이런 일을 사람들이 머리와 관련해 얘기할 때 뭐라고 부르죠?

(청중들이 중얼거렸다: "지성!")

맞아요. 그거예요. 지성이 여성의 권리나 흑인의 권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나의 잔이 1파인트도 담지 못하고, 당신의 잔이 2파인트를 담고 있는데, 당신은 내 보잘 것 없는 절반 크기의 잔을 채우지 못하게 할만큼 야비하지는 않겠지요?

저기 검은 옷을 입은 작은 남자가 말하네요. 여성은 남성만큼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요! 당신들의 그리스도는 어디서 왔죠? 어디서 왔느냐고요? 하나님과 여성으로부터 왔잖아요! 남성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죠.

하나님이 만든 최초의 여성이 혼자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만큼 강했다면, 이 여성들이 함께 세상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지금 여성들이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내 말을 들어야만 해요. 이제 늙은 소저너는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남부 흑인들의 노예화와 북부 노동자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시스템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소저너 트루스라는 이 노예 출신의 흑인 여성은 자신의 삶으로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그것을 폭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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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2-05 0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보기도 못 보기도 하겠습니다 노예 해방운동은 동정도 조금 있었을 것 같네요 그러면서 자신보다 먼저 투표권을 갖는 걸 안 좋게 여기기도 했겠습니다 모든 걸 생각하기 참 어려운 거군요 지금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2-05 23:11   좋아요 2 | URL
인간이란게 자신이 살아온 배경이나 틀 이런걸 벗어나는게 쉽지 않지요. 그래서 늘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또 그렇게 생각하게 되네요. 지금도 이런 비슷한 문제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더 조심해야겠어요. ^^

다락방 2023-02-05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맹렬하게 읽으시네요 바람돌이 님! 저도 어서 읽고 싶습니다! 마지막 인용구는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흑인 페미니즘의 사상>에도 나왔던 구절이에요. 저 안그라도 어제 제임스 볼드윈 책을 읽었는데 인종에 대해서는 우리가 계속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여성과 계급에 대해서도요. 더 알기를 멈추는 순간 인간으로서 퇴보할 것 같아요. 아주 좋은 뽐뿌 주고 계십니다, 바람돌이 님!!

바람돌이 2023-02-05 23:13   좋아요 1 | URL
이번 달 책이 좋아서 계속 맹렬하게 읽고 싶은데 일정이 안 따라주네요. 이번 주 목요일까지 쉬고 금요일부터 다시 달리겠습니다. ^^ 소저너 트루스는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역사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들이 정말 많네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도 크네요.
다락방님 아직 베트남 아닌가요? 즐거운 여행 계속 화이팅입니다. ^^

2023-02-05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5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니커폴스대회에 참석한 여성과 남성 약 300명 사이에서 유일하게 큰 논란을 불러온 내용은 여성의 선거권 문제였다. 참정권 결의안만이 만장일치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 P95

 하지만 백인 중간계급 여성의 딜레마에 대한 자각으로 철두철미하게 응집된 세니커폴스 선언은 남부와 북부 모두에 있는 흑인 여성들의 처지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 여성의 곤경 역시 거의 외면했다. 그러니까 세니커폴스 선언은 이 문서의 성안자들이 속한 사회계급 밖에 있는 여성들의 상황은 도외시한 채 여성들의 여건을 분석했던것이다. - P99

트루스는 네 번에 걸쳐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을반복하면서 새로운 여성운동의 계급 편향과 인종주의를 폭로했다.  - P112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근거로 노예제에 반대하던 가장 급진적인 백인 폐지론자들조차도 급성장중인 북부의 자본주의 역시 억압적인 시스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노예제를 구태의연하게 정의를 거역한, 혐오스럽고 비인도적인제도로 여겼지만 북부의 백인 노동자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신분 역시 남부의 노예화된 ‘노동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집단 모두 경제적 착취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처럼 전투적인 인물도 임금노동자의 조직결성권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리버레이터」창간호에는 정당을 결성하려는 보스턴노동자들을 규탄하는 기사가 실렸다. - P114

 대다수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노예제를 제거해야 할 고약한 오점으로 바라보았고, 대다수 여성 권익 운동가들은 남성우월주의를 이와 비슷하게, 그러니까 그것만 없으면 만족스러워질 사회의 비도덕적인 결함으로 바라보았다. - P115

북부 자체가 인종주의에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전에는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해도 1863년 폭도들의 폭력 행위는 흑인에 대한 적개심이 깊고 넓으며 목숨을 앗아갈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남부가 노예제를 독점했어도 혼자서 인종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 P117

전쟁은 남부의 그릇된 엄살처럼 인종전쟁이, 분파전쟁이, 정당의 전쟁이 아니라 원칙들의 전쟁, 백이든 흑이든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한 전쟁입니다. (…) 이 전쟁에서 흑인은 최초의 피해자였고, 어떤 색이든 노동자가 그 두 번째요, 이제는노동의 권리, 자유로운 발언, 자유로운 학교, 자유로운 참정권, 자유로운 정부를 옹호하는 모두가 (…) 이것들을 지키기위해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이들과 함께, 두 세기 동안 흑인들을 전쟁포로로 잡아두었던 것과 동일한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할 상황입니다. - P118

남북전쟁 이후는 남부의 흑인에게는 비상사태였다. 흑인참정권에 대한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주장의 바탕에는 투표권이 긴급 대응 수단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공화당 내에서 투표권이 갖는 잠재적 힘에 대해 그가 순진했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는 흑인 참정권 문제를 정치적 게임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더글러스에게 투표권은 남부에서 공화당 헤게모니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생존 수단이었다. 숱한 자기 인종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수단. - P135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수정헌법 제15조의 통과를 "우리가 하려는 요구의 절반의 성취" 이자 "성별 제한 없이 동일하게 신성한 권리를 보장하는더 나아간 수정안을 얻어낼 우리의 에너지"를 촉진하기 위한발판으로 바라보았다.  - P138

그리고 새로운 흑인 투표권을 토대로 남부에서 급진적인 재건이 이루어진 10년은 옛 노예들에게도 가난한 백인들에도 유례를 찾을수 없는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 P142

북부의 자본가들이 남부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뒤―자본가의이익을 대변하던ㅡ공화당은 남부 흑인들의 선거권을 체계적으로 박탈하는 작업에 가담했다.  - P142

평등권협회 내 흑인 참정권을 둘러싼 논란의 진정한 비극은 참정권이 흑인들에게 거의 만병통치약 같은 역할을 하리라는 더글러스의 입장이, 어쩌면 여성참정권에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인종주의적 완고함을 부추겼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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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여성 노예의 삶에 대한 일체의 탐구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 P32

국제 노예무역이 폐지되면서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목화 재배 산업의 확대가 위태로워지자 노예 소유 계급은 국내 노예 인구를 보충하고 증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자연적인 재생산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노예여성의 출산 능력에 가산점이 붙었다.  - P34

산업자본주의가 촉발한 가정과 공적 경제의분열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열등함을 확고하게 굳혔다. 지배적인 선전물에서 ‘여자‘는 ‘어머니‘와 ‘주부‘의 동의어가 되었고, ‘어머니‘와 ‘주부‘ 모두에는 치명적인 열등함의 표시가들어 있었다. 하지만 흑인 여성 노예들 사이에서 이 어휘는 어디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노예제의 경제적 배열은 새로운 이 - P41

데올로기 안에 포함된 위계적인 성역할을 부정했다. 그러므로 노예 공동체 내에서의 남녀 관계는 지배이데올로기의 패턴에 부합하지 않았다. - P42

실제로 가정생활은 노예의 사회생활에서 지나칠 정도로큰 의미를 가졌다. 노예들에게 스스로를 인간으로 경험할 수있는 유일한 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ㅡ그리고 흑인 여성들은 남성과 진배없는 노동자였기 때문에ㅡ흑인 여성들은 백인 여성들처럼 가정 내에서의 역할 때문에 펌하되지 않았다. 백인 여성들과는 달리 이들은 절대 단순한 ‘주부‘로 치부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 결과흑인 여성들이 흑인 남성들을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노예생활의 실상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 P47

들판에서 하는 노동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 노예들은 거기에서 그 어떤 유용한 목적도 찾을 수 없었다. 가사노동은 노예공동체 전체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노동이었다. - P48

노예 거주 구역의 가정생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성평등이다. 노예들이 주인의 권력 강화가 아니라 스스로를위해 수행했던 노동은 평등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흑인들은 자신의 가정과 공동체생활의 울타리 안에서 찬란한 위업을 힘들게 달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노예로서 겪는 동등한억압에서 파생된 소극적인 평등을 능동적인 특징으로 바꿔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의 사회관계를 특징짓는 평등주의이다. - P49

노예제 시기에 진행된 제도화된 강간의 패턴을 백인 남성의 성적 충동의 표현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마치 순결한 백인의 여성성이라는 허상이 그것을 잠재울 수 있었으리라는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의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강간은지배의 무기, 억압의 무기였고, 그 내밀한 목표는 노예 여성의저항 의지를 억누르고, 그 과정에서 노예 남성들의 사기를 꺾는 것이었다.  - P57

엘리자 같은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대다수 흑인여성들 가운데 눈에 띄는 별종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인의 채찍질을 감내하고 자기 가족을 위해 일하며 이들을 지키고 노예제에 맞서 싸웠던, 구타와 강간을 당하면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던 모든 여성들의 축적된 경험을 대변하지 못한다. 명목상의 자유를 누리게 된 여자 후손들에게 고된 노동과 인내, 자립의 유산을, 끈기와 저항, 성평등에 대한 굳은 의지를, 요컨대 새로운 여성성의 표준을 제시하는 그런 유산을 남긴 것은 바로 이런 여성들이다.  - P65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있던 노예제 반대 소설은, 노예제와의 전투가 치러지던 정치영역에서 여성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성차별주의적 관념과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적 사고를 고착화시켰다. - P69

 나는 얼버무리지 않을 것이다.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내 목소리를 듣게만들 것이다.  - P75

백인 여성들은 노예제 반대 운동에 몸담으면서 인간 억압의 본성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예속 상태에 대한 중요한 교훈도 얻게 되었다. 이들은 노예제에반대할 권리에 목청을 높이는 과정에서 때로는 대놓고, 때로는 암묵적으로 자신들이 정치 영역에서 배제되는 것에 저항했다.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제기하는 법을 아직 알지못했다 해도, 최소한 억압받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 P78

 그렇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해방투쟁을 하려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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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좋다. 굉장히 깔끔하고 명쾌하다. 쉽게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이론서가 쉽게 술술 읽히면 그것도 문제다.), 읽는 것이 괴롭지 않다. 이건 이론서가 가지기 힘든 굉장히 큰 매력이다. 


여러 장르들 중에서 비평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영화비평이나 문학비평 등등....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다기 보다 어려워서 이해를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거 같다. 사실상 문학이든 영화든 그것이 표현하는 세상은 굉장히 복합적이고 다채로운데 비평의 언어는 다채롭다기보다는 엄격하고 일관된 서사를 적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면 이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많은 비평들이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신의 이론에 작품을 뜯어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을 읽다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에 도착하는데 이런 부분들은 또한 굉장히 현란한 언어유희로 이루어져 있어 독자가 더 알아듣기 힘들어진다. 나같은 어리석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거 제대로 말하기 힘든거 감추려고 알아먹지 못할 어려운 말로 덮어씌운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이론서에 대해 드는 생각 중 요즘 들어 많이 하는 생각이 이론서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막 펼쳐내는데 집중하긴 하는데 그걸 읽을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꽃밭이 펼쳐져도 실제로 그걸 현실에 말로 펼쳐보면 말이 좀 안되네 하는 경험 누구나 있지 않나? 물론 이론서가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저자가 생각하는 이론을 완결되고 풍부하게 다 제시하고싶은 욕망에 휘둘리다 보면 그의 머릿속 꽃밭을 독자가 짐작하기는 어렵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가 자신이 말하는 이론이나 개념이나 소재들을 모두 다 알고있다는 전제하에서 쓰는 것인가 이런 생각 말이다.


솔직히 1월에 읽은 도서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이 내게는 저 두 가지 문제를 다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나의 지적 부족함이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서도 남는 아쉬움이 결국 중간에 저 책을 접게 해버렸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내용을 알고자 하면 나에게는 이미 <페미니즘 철학입문>이라는 훌륭한 책이 있으므로.... ㅠ.ㅠ




이런 내게 2월의 책은 <여성, 인종, 계급>은 굉장히 좋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다. 독자에게 전적으로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친절한 편이다. 

일단 여기까지는 책 자랑과 책 뽐뿌였고, 이제 1장과 2장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그냥 적어본다.



 산업자본주의의 도래에 따라 대부분의 백인 여성들은 생산적인 노동 영역에서 완전히 차단된 영역의 거주민으로 인식되어버렸다라고 한다. (이것은 약간 부가 설명이 따라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중세까지 주생산영역인 농촌사회에서 노동의 성별 분업은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여성과 남성은 모두 뼈빠지게 토지에서 일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의 노동 자체의 폄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고, 가부장제는 다른 형식으로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업자본주의는 가정과 직장을 완전히 분리했고, 그러면서 여성노동을 가정 노동으로 한정지으면서 그것을 여성의 진정한 의무로 규정짓는 한편 여성 노동은 비생산적이므로 열등하다는 신화를 창조한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모두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런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예외적인 것이 바로 미국 노예 공동체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여성 노예 역시 가혹한 노동에 투입되었으므로 성별간의 노동분업이 사실상 의미가 없다. 남녀 노예 모두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은 자신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노동이었던데 반해, 그들에게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노동은 가사노동이었다. 이는 노예 공동체 내부에서의 성평등으로 이어지고, 노예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도 서로가 똑같은 조건에서 맞서 싸우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노예 공동체 사회에서의 성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드는 생각은 또 왜 여성이든 다른 피억압자든 싸울 때는 연대해서 똑같이 싸우면서 싸움이 승리로 끝나고 난 이후 그 결과물들을 나눌 때는 다시 불평등해지는가에 대한 깊은 빡침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부르조아 혁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7월혁명(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이걸 그린 그림이고, 레 미제라블이 7월 혁명 이후의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은 부르조아와 민중들이 똑같이 싸웠지만,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선거권을 가지게 된 이들은 전체 인구의 0.6%에 불과했다. 0.6%는 당연히 세금을 많이 내는 남자, 즉 부자 남자였다. 노예 공동체 사회의 투쟁이 노예 해방으로 이어졌지만, 이후 흑인가정의 운영원리는 성평등이 아니라 백인의 가부장제에 철저하게 포섭되는 결과로 이어졌음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역사에서 왜 좋은 것 훌륭한 것은 늘 배제되는가? 깊은 빡침은 더더욱 깊어만 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희망을 가지고싶다. 그런 희망의 근거, 내 희망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근거를 찾고싶다.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 있던 노예제 반대 소설은, 노예제와의 전투가 치러지던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성차별주의적 관념과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적 사고를 고착화시켰다. - 69쪽


  노예제 반대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었고, 가장 유명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보자. (나는 이 평가에 동의한다.) 이 소설 속 흑인들은 대부분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무방비한 유아적 인물들로 묘사되고, 여성은 모성애의 화신 어머니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들은 모성애를 발휘하여 사랑스러운 아이같은 흑인들을 동정하여 돕고자 하는 것이 되고, 실제로 이 소설은 수많은 여성들을 노예제 폐지운동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이 소설은 노예제 폐지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을까? 해악이 되었을까?



 나의 결론은 이 소설은 발간되어야 한다이다. 이 소설의 나쁜 성차별주의적 관념과 인종주의적 사고는 당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 소설이 없다고 해서 이런 당대의 지배적인 생각들이 약화되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소설의 출간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쨌든 당대의 많은 여성들을 노예제 폐지운동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참여했던 간에 어쨌든 노예제 찬성론자로 남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이런 운동에의 참여가 사람들의 생각을 가장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참여와 운동과 교류속에서 사람들은 변화한다. 허위의 모성애에 기반한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성체제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킨다. 그 속에서 새로운 생각 - 톰아저씨의 오두막이 숨기고 있는 근원적인 가부장제와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자도 나오는 것이다. 비평을 하는 사람은 엄격하게 이 소설이 가지는 문제와 한계를 비판할 수 있다. 동의한다. 그리고 그렇게 엄격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현실의 운동을 하는 이들은 소설이 가지는 한계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가능성에 더 주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노예제가 제도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자명하니까 말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은 논리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감정으로 설득된다. 책이 사람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책이 그 사람안에 있는 동정심이든 어떤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론은 그 감정이 건드려진 다음을 담당할 뿐이다. 



 실제로 노예 또는 노예제라는 단어는 쉽게 여성운동과 결합한다.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는 자신들의 결혼 생활이 노예로서의 생활이었다고 표현하고, 공장의 여성 노동자는 형식적 자유만 있을 뿐 실제 노동과 삶은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공감이 연대를 만들어 내었다. 




프루던스 크랜들은 자신의 학교에 흑인 소녀를 받음으로써 백인 사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와 그녀의 학교는 백인의 실제적이고도 비열한 온갖 공격을 받았고, 결국 본인은 체포 당하고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실제로는 승리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여성교육과 흑인의 교육이 서로 공감하며 손을 맞잡았던 이 사건은 당대 여성운동에도 흑인 노예제 폐지운동에도 모두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 해방투쟁을 하려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 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79쪽)   해제에서 말한 "전 세계의 불안하고 취약한 이들이여 공감하라"라는 말의 예를 여기서 발견한다. 


 노예폐지론자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잡지 <리버레이터>창간호에 "저들이 내 목소리를 듣게 만들 것이다."라고 썼다. 지금 여기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우리들 역시 내 목소리를 듣게 만들게 하기 위한 그 한 발자국들을 열심히 내딛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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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3-02-03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쭉쭉 나가십니다!!
저도 1장 조금 읽었는데 가독성 나쁘지 않다 생각했습니다. 노예제 실상 너무 충격적입니다!!

바람돌이 2023-02-04 00:01   좋아요 1 | URL
가독성 괜찮죠? 제가 지금 마음이 바쁩니다. 빨리 읽고 여행도 가야하고 집안 행사도 많고..... 제2의 성을 읽어야죠. ㅎㅎ

공쟝쟝 2023-02-04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점점 좋은 책과 아닌 책을 갈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종종 뛰어난 저자들이 생각 자체를 다르게 하기 때문에 읽는 과정에서 생각 자체를 다르게 해서 어려운 (새로운 인식방법으로 안내하는 좋은) 책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 책은 어려워도 용서가 되는 데, 대중에게 읽힐 요량으로 만든 책이 그러면 저도 좀…

바람돌이 2023-02-04 13:38   좋아요 0 | URL
정말로 좋은 책은 보통 어렵더라구요. 그래도 계속 읽다보면 그 속에 담긴 뜻이 내게로 오는, 그 때의 희열 아시죠? ㅎㅎ 저는 이제 늙어가기 때문인지 좀 책을 골라요. 책을 읽다가도 좀 마음에 안들면 세상에 좋은 그 많은 책들을 내가 다 읽지도 못할텐데 지금 내게 안맞는 이 책을 내가 왜 노력씩이나 해가면서 읽어야 하는가 뭐 이런.... 그래서 요즘은 읽다가 팽개치는 책들이 제법 됩니다. 그 기준이야 나홀로 기준이니 뭐 남에게 뭐라고 할 얘기는 아니고요.

단발머리 2023-02-0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대한 평가와 바람돌이님의 의견에 저도 동감합니다. 읽지도 않은 책이라 많이 조심스럽습니다만... 한계를 보여준 건 맞지만 결국에 이 소설이 노예제 반대 운동의 도화선이 된 건 확실한 듯 하고요. 그러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참 역사란 것은 신기하구나. 의도와 설정과는 다르게 움직이는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책이 태어난 후에는 자기 운명을 찾아 떠나는 것 말이지요. 자식과 똑같네요 ㅋㅋㅋㅋㅋ

바람돌이님 응원합니다. 쭉쭉 맨 앞에서 달리고 계십니다. 저도 얼른 시작할게요 ㅎㅎㅎ

바람돌이 2023-02-04 13:44   좋아요 1 | URL
역사에서 주최측이나 참여자들이 의도한 바대로 움직여진 경우는 정말 단 한번도 없지 않나가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거대한 흐름은 또 뭔가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신기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의외성때문에 역사읽기를 좋아하지 않나싶어요. ㅎㅎ 책도 자식도 다 자기 운명을 찾아가는데 문제는 책은 어쨌든 돈을 많으나 적으나 벌어다 주고, 자식은 내 돈을 알뜰하게 벗겨먹는다는 것이 차이? ㅎㅎ

아 지금은 제가 맨 앞에서 쭉쭉 달리는데요. 이거 오늘까지에요. 내일부터 다음 주 중반까지 이 책 못읽음요. 저는 어려운 책은 다락방님처럼 지하철에서 읽고 이런거 못해요. 그저 책상앞에 각잡고 앉아서 나 공부한다 티 팡팡내면서 읽어야 된다는..... 집안행사와 가족여행이 오늘저녁부터 줄줄이라 일주일뒤에나 돌아올 듯합니다. 그때쯤이면 여러분들이 저를 앞서나가고 있을듯요. ^^

파이버 2023-02-04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비평가들이 자신의 이론에 작품을 뜯어맞추는 것 같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래서인지 먼~옛날(=지적허영심이 충만하던 시절) 비평집을 읽을 때는 full 집중하고 읽어도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더 공부하고 싶어지는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어려운 글을 읽는 묘미라고 생각하고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ㅎ

[여성, 인종, 계급]은 낯이 익어서 예전에 구입했던 걸까 찾아봤는데, 보관함에만 들어가 있네요 ^^;; 바람돌이님께서 깔끔하다고 칭찬하시니 장바구니로 옮겨봐야겠습니다^^

바람돌이 2023-02-04 23:46   좋아요 1 | URL
공부하고 싶어지는 의욕은 힘들지만 꾸역꾸역 읽었을 때 뭔가 깨달음이 올 때 의욕이 미친듯이 생기지 않나요? ㅎㅎ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인지 모르겟을 때 책을 벽에다 집어던졌던 기억도 있습니다. ㅎㅎ

<여성, 인종, 계급>은 미국에서의 흑인노예해방운동과 여성운동의 역사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좋네요. 여러가지 생각할 지점들이 많이 있어서 지금 의욕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일부터 며칠간 이 책 읽기를 쉬어야 해서 지금 막 아쉬워하고 있는 중입니다. ㅎㅎ

희선 2023-02-05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설이다 해도 그게 다 괜찮은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점도 있고 비판해야 하는 부분도 있겠네요 그런 걸 알아보기도 해야 할 텐데... 하나만 생각할 때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는 여러 가지 보면 좋을 텐데, 쉽지 않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2-05 00:4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젠 진짜 좋은 책만 읽고 싶은데 그런 안목을 키우는것도 여전히 쉽지 않네요. 그래도 또 행운처럼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면 반가운것도 살아가는 데 소소한 기쁨인듯합니다. ^^

coolcat329 2023-02-05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한계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가능성에 더 주목‘ 해야 한다.
일단 인간의 감정을 움직여야하고 그것을 문학이 해냈으니 톰 아저씨 소설은 나오는게 맞다에 저도 동감입니다.
바람돌이님 열독 너무 멋지십니다!

바람돌이 2023-02-05 23:10   좋아요 1 | URL
소설의 한계라는 것도 어쨌든 실현이 되어야 그 한계를 더 또렷이 알 수 있고 또 그 너머를 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또 혼자서 주절주절 합니다. ㅎㅎ
이번에는 좀 앞서서 열심히 읽어보려고 하는데 또 나돌아다닐 일이 자꾸 생겨서 다음 주 중반 이후 다시 이어서 읽으려구요. 멋지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책읽는나무 2023-02-12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정희진샘 해제를 읽고, 바람돌이님 그때 쓰셨던 리뷰 다시 읽어 보려고 찾아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 리뷰를 또 읽었고, 와~ 미친 듯 흥분하며 읽었습니다. 저 금방 커피를 마셔 마구 흥분 중이거든요ㅋㅋ 마지막 문구, 그래서 나는 바람돌이님이 쓰신 글을 읽고 있는 이유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얼른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도 읽고, 이 책도 찬찬히 읽어내려갈랍니다. 지금은 여행 중이시려나요? 다녀오시기 전까지 얼른 진도를 맞춰 놓아야, 또 바람돌이님의 시원시원한 지적인 글을 읽을 수 있을텐데요^^ 3 월이 오는 게 아쉽네요. 바람돌이님 바빠지실테니까요ㅜㅜ 암튼 복직 전 좋은 힐링의 시간이 되셨음 좋겠어요. 집안 행사도 편안하게 잘 마무리 하시고, 얼른 서재에서 또 만나요♡

바람돌이 2023-02-13 22:37   좋아요 1 | URL
와 2월은 정말 나갈 일이 너무 많아서 책 읽을 시간은 없고요. 저 원래 어디 여행가면 책은 거의 안본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책보다는 여행을 더 좋아하는거 같아요. ㅎㅎ 심지어 요즘은 체력도 안되어서 어디 며칠 다녀오면 놀러다닐 때는 괜찮은데 갔다와서 며칠은 퍼져 있게 되네요. ㅎㅎ 나무님 응원을 받아 내일부터 또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아 그런데 도서관에서 빌린 하얼빈부터 읽어야 돼요. 반납해야 돼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