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도시 페름. 노동자의 가없는 실존적 투쟁만이 남은 곳, 페름에와서야 수라는 살아온 세월이 전쟁처럼 느껴졌다. 전쟁은 지상에서한 번도 끊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계절은바뀐다. 강은 흐르고 산은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고단함 속의작은 평화, 인생의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수라는 늘 패배한 쪽에 속했다. 마르크와의 결혼이 그랬고 오 신부와의 짧은 사랑이 그랬다. 왜체와 보리스는 패배의 상처 속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 동청철도 변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이미 패배에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 P213

"시인과 혁명가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시인의 예언자적인 정서가 소시민적이고 생기 없는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듯 혁명가 또한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식의 소유자이지요. 시인이 데카당의 추상적인언사를 못 견뎌하듯 혁명가도 자본가의 허위와 부정을 못 견뎌합니다.
저는 사회주의혁명만이 오늘날 러시아의 사회적 모순을 치유할 수 있다.
고 믿어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물론 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는지금 절망의 심연 속에서 신음합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인격을 매장하는모든 체제는 붕괴돼야 해요. 미래에 있을 위대한 변화들을 기대하면서요. 저는 어떤 주의主義를 믿기보다는 인간 현상을 관찰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선이 사회적 우위에 설 그날을 위해 씨우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우랄 페름에서 싸우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뒤를 이어 미래에 무엇이 와야만 하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해요."
- P257

"한인 정탐들은 기호파 출신이 많은데, 이들은 러시아 헌병대의 힘을빌려 서도파나 서북파 인사를 탄압한 사건에 깊게 관련됐고, 이 때문에기호파 수령 격인 이상설이 이주 한인 사회의 비난을 받아왔어요. 이동휘 선생의 체포도 이들 기호파 정탐들이 러시아 정보 당국에 은밀히 고발한 결과랍니다. 결국 이동휘 선생의 체포는 제정러시아와 일본의 동맹 관계를 활용한 일본 관헌의 언론 조작과 연해주 한인 사회의 이동휘반대파의 파당적 음해의 소산이라오.."

<실제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은 치열했다. 어떤 경우 이 싸움은 독립운동 전체의 방향을 둘러싼 양보할수 없는 논쟁이기도 했으나, 많은 경우 단순한 영향력 내지는 주도권을 위한 출신 지역싸움이기도 했다. 그 어려운 독립운동이라는 상황속에서도 쥐뿔만한 권력에의 욕망들을 보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가 차고 한편으로는 절망적이다> - P291

"그들은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어를 배워 일상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들을 의심해선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연대의식이에요. 볼셰비기를 돕겠다는 연대 의식 말입니다. 그들 역시 그들나라에서는 무산계급이었지요. 그래서 우리 볼셰비키를 돕겠다는 것입니다. 국제주의로 뭉친 합동민족적위군이야말로 총알 하나보다 더 힘이셉니다."
- P299

상조회 대표는 의병대를 무장시켜 일본군을 물리쳐달라며 군자금을건네면서, 곡괭이질은 자기들이 할 터이니 한시바삐 총을 사 들고 만주로 돌아가라더군요. 보다이보 금광뿐 아니라 니콜라엡스크 어장에도한인 노동자들이 있으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연금을 모금하라고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어 달 동안 금광이며 어장을 돌아다니며1000루블가량을 모금했지요. 우리는 이만으로 나와서 러시아 신식 보총과 베리단 5연발 총을 한 자루에 탄환 100개씩 끼워 9루블을 주고 사서 중국 밀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독립군들이 그토록 참혹한 환경에서도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때문이었을 것이다.> - P333

 조선 독립은 국제 관계를 잘 이용해 외교를 통해 달성해야 합니다. 조선 독립은 혁명가들이 외국의 정당인 볼셰비키와 연계해 사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민족 단체인 광의단을 중심으로 전개하되 소비에트로부터는 물질적인 방조만 받고 이념적인 도움은 받을 일이 없습니다. 무식한 노동자나 농민이 어찌 혁명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민스크 전선에서 참호를 파던 사람들, 우랄산에서 목재나 자르던 사람들, 담배말이를 하던 사람들은 돈을 벌기위해 갔을 뿐이지, 독립운동가는 아니지 않습니까?"


<3.1운동 이전 명망가 중심의 독립운동이 아직이었던 시절, 그들의 대중운동과 대중에 대한 사고 수준은 실제로 딱 이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P337

한인사회당은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창당한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한인사회당이 설립 초기부터 군사부를 둔데에는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주장한 급진적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당은 정치투쟁과 대중투쟁에 중점을 두는 조직이다. 그런데도 굳이 군사부를 두어 무장 부대를 조직하고자 한 점은 한인사회당의 궁극적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 P348

"전쟁 포로들 가운데는 소비에트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전쟁터로 끌려와 부르주아를 위해 전투를 하다가 포로가 됐으나 소비에트 공민이 되면 개인 재능에 맞는 직업을 보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렵니다. 소비에트체제는 민족 간 경계를 허물고 계층 간 차별이 없는 평등 사회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 P353

하바롭스크 철도국 총회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볼세비기를 지지한다.
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인간이 스스로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능을 갖지 못하면 자유마저도 성가신 부담이 된다. 개인적 책임이 선하다.
면 그들이 소속된 사회적 책임 또한 선할 것이다. 볼셰비키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을 증오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역사 위에서 개인적책임을 회피하는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르 병사니 가사크 아타만 그리고 백위군 병사들은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지 못할 뿐이다. 명령에 따라행동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관에게 기만당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상관 역시 자신이 지시한 일의 역사적 결과를 예측이나 할수 있을까.


<1918년 1월 25일 알렉산드라의 일기> - P379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가 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운다.
- P382

 그녀는 두건을 거부했다.
"나는 두 눈으로 내 죽음을 똑똑히 볼 것이오."
무거운 침묵이 공원을 짓눌렀다. 알렉산드라는 주위를 전전히 둘러보았다.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는 건 없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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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3-15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그래픽 노블로 읽었는데 그림이랑 그녀의 인생이 아주 딱 맞아 떨어지더라구요. 선 굵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알렉산드라 이야기를 조금 더 알고 싶네요.

바람돌이 2021-03-16 11:08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까 그래픽 노블도 있네요. 다봤는데 이 시절의 얘기들은 보고 나면 항상 가슴이 답답합니다. 정말 대단한 여성이고 운동가인데 그 주변 상황이나 당시의 우리 독립운동 내의 상황들을 같이 읽어나가다 보니 고구마 먹다 멕힌 것처럼 또 답답해지네요. ㅠ.ㅠ
 

수라는 검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세 국가를 떠올렸다. 조선, 중국,
러시아, 한복과 치파오와 루바슈카, 수라는 세 국가에 대한 환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하나의 조국이 있다면 원시림의 바다인 시베리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3

"이주 한인 사회가 반목이 심해 서로 원수가 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땅을 분배받은 ‘원호인‘은그들의 땅을 부치는 소작인을 ‘여호인人‘이라고 부르며 조선 시대 양반처럼 살고 있어요. 원호인은 여호인과 서로 혼인하지 않을뿐더러 여호인과 한자리에 앉는 것조차 수치로 여기지요. 여호인의 치지는 더욱비참해지고 있어요. 여호인은 ‘아재비‘나 ‘보토재(고아)‘로 낮춰 불리며 천대를 받아요. 원호인과 여호인 사이에 계급적 모순이 생겨난 것이지요.
- P61

더 큰 문제는 조선의 정치 망명자들이 러시아에 들어와 항일운동 자금 모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주 계층에게 접근하는 모순된 현상이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들은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공동 목표가 있지만 노동자, 농민의 존재를 잊고 있지요. 그들의 이상은 독립된 조국이지만 봉건 체제의 존속, 즉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수 있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어요."
- P62

당시 철도를 건설하는 데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유일한 기구는곡괭이와 삽(광창우), 운반 기구는 밀차(타지카) 인데 흙이나 돌을 가득 싣고 밀고 다니다가 자칫 엎어지면 발목을 삐는 것은 물론 심하면 평생 불구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또 큰 돌을 깨어내는 기구로는 정과 망치가 전부였기에 노동자들의 손은 손톱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고 돌산을 허물어내기 위해 화약을장치해 터뜨릴 때면 떨어지는 돌 뭉치에 맞아 죽거나 꼽추가 되는일이 자주 발생했다.
- P117

"러시아 이주 한인 사회의 갈등은 한인 봉건 세력과 신흥 토호 세력이기득권을 확산하려는 데서 빚어졌어요. 먼저 연해주로 넘어온 함경도,
평안도의 평민 내지 머슴 계급은 러시아로 이주해 와서도 다시 한인 토호 세력의 지배와 천대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됐으니 이게 바로 계급적모순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여기에 차르 러시아와 일본과의 외교적 입장을 교묘하게 이용해 기득권을 보장받으려는 이기주의자와 각종 이해관계가 얽힌 망명 세력이 혼합된 형국이니 연해주 이주 한인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도가니인 셈이에요."
- P141

수라는 ‘미래의 감정‘이라는 대목에 밑줄을 쳤다. 누구나 블로크의시를 사랑하고 암송했으나 수라는 블로크의 시가 자신을 위해 써졌다.
고 믿고 싶었다. 시인의 길과 혁명의 길은 다르지 않았다.
블로크 시집은 수라에게 희망의 거처이자 삶을 지탱하는 어휘 사전이었다. 집회, 토론, 늦은 바람, 바람은 씽씽거린다! 오, 심장이여, 너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오, 이성이여, 너는 얼마나 불타올랐던가! 이모든 어휘가 가정과 거리에서 동시에 솟아올랐다.
- P188

아이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가슴 아팠다. 보리스는이제 다섯 살, 왜체는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엄마 없이 지낼 아이들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한편으론 지금이야말로 공상의 조용한 피란처를 버리고 세상 속으로뛰어들어야 할 때였다. 혁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혁명을 마중하기 위해서라도 서쪽으로 가야 했다.
- P193

세계대전이 발발해 극동에 거주하던 조 중 노동자들은 군수품을 제조하는 우랄 공장 지대의 노동자로 팔려 가는 신세가되었어요. 이들을 우랄로 소개해준 자들은 다름 아닌 한인 부르주아 계층이에요. 그들은 같은 민족의 노동을 싸게 공급해 차르 정부의 환심을사려고 혈안이지요. 이주 한인 사회는 무엇보다도 내부의 적 때문에 붕괴되고 있어요. 우랄 지방에는 전쟁 발발로 인해 유럽 전선에 나가는 러시아 군대에 무기와 군수품을 조달하거나 목재를 공급하는 군수공장이밀집돼 있어요. 그 가운데 우랄 페름 공장 지대는 극동 노동자들이 대거송출되는 곳이에요. 한인 노동자들만 해도 페름 지역에 수천 명이 고용돼 있는 실정이지요."
- P199

기차는 동틀 무렵 다시 멈췄다. 차량에서 노동자들이 눈을 부비며 내렸다. 이번에는 화목이 떨이졌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차량 사령이 나눠준 긴 톱, 짧은 톱을 받아들고 눈에 묻혀 얼어붙은 나무를잘라 기관차 화목을 장만해야 했다.
청년들은 톱을 메고 산으로 올랐다. 잎갈나무, 잣나무, 소나무가 연이어 쓰러졌다. 나뭇가지를 따는 청년, 나무꼭지를 자르는 청년, 슬렁슬렁 톱질 소리에 나무가 뭉텅뭉텅 토막이 돼 썰려나갔다.
"나무통 내려간다!"
위에서는 나무통을 잘라 굴리고 밑에서는 나무통을 받아 톱 틀에올려놓고 화목을 자르느라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하나 둘 셋, 들어라, 올려라!"
화차에 화목을 그득 채우고도 객차의 남은 공간에까지 무던하게 실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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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인코그니타 -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강인욱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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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대목이 있었다.

방랑벽이 있던 아버지는 툭하면 집을 나가 방랑을 했는데 그것이 만주로 간다고 했던가라는 대목이나, 그 시대 여학교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만주로 떠났다는 대목이었다.(그게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니 안타깝다)

그순간 우리 국토가 대륙과 이어져 있던 시기에 살던 사람들의 공간 개념과 섬이 아니면서도 딱 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감각이 얼마나 다를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었다.

또한 그런 공간감각의 차이가 실제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이 책 <테라 인코그니타>를 읽으면서 예전의 저 생각이 다시 들었다.

길은 이어져 있고 그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물자와 생각들이 끊임없이 흘러갔을텐데, 1990년대 초반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이전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섬처럼 단절되어 어디로도 갈 수없는 고립된자로 살았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넓은 세계를 교류의 흐름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사실상 역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살았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말이다.

 

물론 그러한 오류가 우리 자신만의 지리적 입장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사 교과서는 선사시대가 끝나면 세계 4대문명부터 시작된다.

그 4대문명론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이 책은 시작된다.

 

4대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활보할 때에 만들어졌다. 문명이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미개하게살았다는 생각은 몇몇 선진국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대형 신전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2만년 전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 P22

 

4대문명을 배우다보면 마치 그 곳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문명이 없었던 것처럼 저절로 인식이 흘러간다.

그런데 이것이 제국주의시대와 함께 만들어졌다는데서 갑자기 아!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 주어졌던 공간적 한계와 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해 편협하게 그어졌던 인위적 경계가 우리의 역사인식을 국가 영토내로 한정하거나, 세계사적 인식에 있어서도 국가별 지역별 인식으로 한정해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교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의 한계를 가지게 되는데 교류를 끊임없는 흐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행위의 반복으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이런 역사인식의 문제는 무엇일까?

국가별 지역별로 동떨어져서 인식하는 역사인식에서는 불가피하게 나와 타자라는 구별이 먼저 전제되게 된다.

나 이외의 것은 타자가 되고 그 타자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테라 인코그니타(미지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교류와 흐름과 영향이 먼저가 아니라 나와 타자의 구별이 먼저 전제되면 거기서부터 나라는 주체에 대한 과도한 선긋기와 집착이 시작되겠구나싶다.

나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 아무 문제없는 절대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많은 경우 타자에 대한 배제로 흘러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나와 타자 사이의 선긋기가 전제되는 역사를 우리는 계속 배우고 익혀온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나타나는 인종차별, 난민문제에 대한 히스테릭한 반응의 원인이 물론 하나는 아니지만 이런 우리의 역사인식의 한계가 중요한 원인일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와 함께 여태까지 변방으로 여겨졌던 만주와 시베리아와 남미대륙의 역사를 종횡무진 달리면서 우리 역사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독서였다.

또한 민족의 틀에 갇혀있는 역사교육을 교류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역시 내게는 중요한 시사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계를 짓든 실제 역사는 무수히 많은 교류의 흐름속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그 흐름을 파악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은 결국 배제가 아니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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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3-01 08: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독립항쟁 당시 주역들은 기차를 타고 만주, 시베리아 등을 자유롭게 갈 수 있었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까지 구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의 인식은 마치 고구려 멸망 후 남북국 시대의 신라처럼 대륙의 기상을 잃어버린 면이 있다 여겨져서 안타깝습니다...

바람돌이 2021-03-02 01:21   좋아요 2 | URL
대륙의 기상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요. 단지 단절된 공간인식이 우리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편향을 계속 강화하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극복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

scott 2021-03-01 1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 바퀴 언어‘ 라는 책에서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속에 선사시대 문명의 흔적이 녹아 있다고 했는데 터키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동아시아 문명의 흔적이 발견되듯이 민족의 틀넘어 문명 인류사 전체 폭넓은 시각의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바람돌이 2021-03-02 01:23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근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먼저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이 그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교육과정이나 교과서를 제작해야 하고요. 근데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도 별로 없는데 문명 인류사적 시각으로 역사교육 내용을 재편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어요. ㅠ.ㅠ 한국사와 세계사를 통합교육하겠다고 항상 얘기하는데 왜 항상 실패하겠어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학에도 없고 일선 학교에도 없기 때문인걸요. ㅠ.ㅠ

희선 2021-03-02 0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예전에는 꽤 길게 이어졌는데... 실크로드는 신라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있기도 하던데... 아주 옛날부터 다른 나라 사람이 오기도 했는데, 그런 게 끊기고 말았네요 지금은 하늘로 간다지만, 코로나19가 막았네요 가끔 한국 사람인데 혼혈처럼 보이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 보면 오래전 조상에 다른 나라 사람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단일민족이라고 배우는데 그건 아닌 듯해요 그것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역사는 한 나라만 알아서는 안 되더군요 그런 거 알아도 알려고 하지는 않는... 바람돌이 님 글을 보고 그렇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3-03 11:39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단일민족신화가 최근에 와서는 더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요즘 학교 교과서에서는 단일민족 어쩌구 하는 내용은 다 사라졌어요. 하지만 예전에 학교 다니신 분들은 아직도 저 신화를 맹신하는 분들 많죠. 근데 그게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용도로 휘둘러져서 더 걱정이에요. 어제 동두천에 외국인 노동자들 집단 감염 일어났는데 그것도 걱정이지만 또 사람들이 그들을 인간적으로 비하하고 욕하고 할게 더 걱정됩니다. 국수적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코로다보다 더 무서워요.

하양물감 2021-03-02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라는 것이 거의 다 그러한 것 같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기록!!! 자기중심적 사고...

바람돌이 2021-03-03 11:39   좋아요 1 | URL
그런 기록들 중에서도 그래도 아닌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

감은빛 2021-03-02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께서 인용하신 내용과 글에 쓰신 내용들 대부분에 동의합니다.
역사를 어떻게,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 그 관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일 수 있지요.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기존 역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 중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소위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판타지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은 염려스럽고 안타깝습니다.

바람돌이 2021-03-03 11:41   좋아요 0 | URL
환단고기류의 판타지는 언제나 있어왔잖아요. 요즘은 조금 더 세련돼 졌더라구요. 훨씬 더라고 할까?
어쨋든 저런 환타지 역사에 대한 위험도 항상 생각해야 할 듯요.
 

 

 

 

 

 

 

 

 

 

 

 

 

 

 그때 그곳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을까.

 근대 건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삶, 그것을 공간적으로 넓히면 근대건축의 사회문화적 의미가 될 터이고, 다시 시간적으로 늘려 현재에 이르면 화석처럼 축적된 장소성이 될 터이다. -5p

 

건축이란 아무리 멋있어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가 아무리 근대건축의 성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건축학도에게나 그렇지, 인간이 살 수 없어 결국 버려진 집일 뿐이다.

근대 건축물들에 관심이 많다. 아니 모든 건축에 관심이 많다. 한옥에도 관심이 많고, 서양식 근대 건축도 좋아한다. 서양의 교회나 왕궁, 민가들... 그러고보니 다 좋아하는구나. 여행 다닐 때 멋진 건물이 있으면 꼭 들어가보고 싶고, 보고싶다.

예전에 강화도 놀러갔을 때는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성당이 잠겨 있어서 민폐임에도 불구하고 담당자분한테 전화까지 해서 불러내 내부안내를 받았더랬다.

건축의 어떤 부분이 좋은걸까?

내가 뭐가 좋은지도 잘 모르는 얼치기 건축 매니아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사람이 빠진 건축이야기는 관심이 안간다는거다.

사람이 살고, 사람의 손길이 가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는 정말 호기심이 확 땅길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책 소개를 읽으면서 근대건축과 근대소설의 콜라보라니.... 아 이렇게 절묘할 수가!

소개 그대로 이 책은 근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100여년 전 경성의 온갖 건축물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건축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단편 운수좋은 날의 김첨지의 경우, 그와 그의 가족들이 도시로 올라와 전전했을 공간과 마지막 공간인 행랑채의 모습과 환경을 서술하는 식이다. 실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이 시대 하층민들의 삶의 고통이 진하게 전해져 온다.

근대 건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소설과 공간을 오가는 서술은 아주 흥미진진해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책읽기 시간이었다.

 

이태준의 <복덕방>, 채만식의 <태평천하>, 박태원의 <천변풍경><방란장 주인><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성탄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현진건의 <피아노>,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의 <인간문제>, 김사량의 <천마>, 이 책에 동원된 근대소설들이다.

읽은 책도 있고 제목조차 처음듣는 경우도 있지만 소설이란 것이 당대를 가장 리얼하게 그려낸다는 걸 생각하면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 물론 위 작품들을 다 읽었더라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커졌으리라는건 분명하지만.....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 참가하게 되었다.(133p)

 

 

이태준의 <복덕방>에 등장하는 서참위는 1907년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다. 그는 저 치욕의 해산식에 멋도 모르고 참가했다가,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누구는 의병이 되고, 누구는 황실 근위대에 남을 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복덕방을 시작한다. 이런 서참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도시형 한옥이나,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상류층의 새로운 부의 상징으로 떠오른 문화주택(서구식 벽돌집들이다.)을 만나게 되고, 이런 새로운 주거형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태가 펼쳐진다.

도시형 한옥을 사서 첩살림을 하는 이, 영감에게서 집을 뜯어내고 연애는 따로 하는 첩, 부모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면서 문화적인 삶을 가장하기 위해 문화주택을 사고 그 주택을 완벽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피아노를 들이는 젊은 부부(당연히 피아노는 칠줄 모르므로 먼지만 쌓여간다.). 당대 최고의 문화예술 공간이었던 부민관으로 남도소리공연을 들으러 가면서 없는 사람 등이란 등은 다 쳐대는 쪼잔한 영감.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우미관에서 활동사진 속 드레스 입은 무용단원이 인사를 하자 그 무용수의 인사를 받기 위해 어정쩡하게 일어나는 갓 쓴 노인들.... 이 시기 다방과 카페가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방은 차를 파는 곳, 카페는 여급의 술시중을 받으면서 술을 파는 곳이었단다. 카페의 여급들, 시골에서 올라온 공장의 여공들, 한몸 누일 공간이 없어 천변에 토막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

하 이런 사람의 얘기가 공간과 만나면 그대로 그림처럼 100년전이 떠오른다.

 

 

명월관은 1914 인사동 이완용 저택( 순화궁) 빌려 지점을 내고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5 뒤인 3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184p)

 

태화관이 인사동에 있던 청요리집이라는 것만 알고있었는데 그 기원을 보니 기가 찬다. 민족대표 33인의 고민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한 건물이 친일파 거물의 저택에서 요리집으로, 독립운동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김두한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로의 우미관이 무성영화시대 조선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조선인의 공간이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할 때 변사가 어찌나 민족적 울분을 실감나게 묘사하는지 일제 경찰이 상영을 중지해야 했다는 에피소드에서 이 시기 우리 문화의 한 단면과 사람들의 마음을 짚어보기도 한다.

일제가 문화공연장으로 만들었던 <부민관>건물은 서울시 의회로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이 시절 건물들은 개발의 과정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남았다.

 

100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인력거꾼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이 작가분에 대해 관심이 확 생겨 검색해보니 아직 많은 책을 쓴건 아니고 요 2권이 검색된다.

다행히 나의 전작주의에 아주 적당한 숫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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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는 행랑살이나 셋방조차 구하지 못한 빈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날품팔이, 공사장 막일꾼, 행상으로 연명하며 시내와 교외를 가리지 않고 제방, 하천변, 다리 밑, 산림의 공한지, 관유지, 사유지에 움막이나 토막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했다. 움막은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어 조그맣게 지은 것이고, 토막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을 얹은 다음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의 집이었다.
토막민에 관한 기사는 신문이나 잡지에 심심찮게 나왔다. 상왕십리에 사는 어느 할머니는 반쯤 쓰러진 컴컴한 토막에서 열다섯 살손자와 단둘이 살았다. 살림살이라곤 귀 떨어진 항아리 한 개, 쭈그러진 양철 대야 한 개, 석유 한 상자였다. 다 팔아도 오십 전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할머니는 양철 쓰레기통을 줍는 손자와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간다고 했던가. 13 - P49

과연 그랬을까? 명창대회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윤 직원은 경성에서 하는 명창대회라면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날 윤 직원이 명창대회를 보는데 쓴 돈은 95 전이었다. 춘심이를 데리고 정상적으로 봤으면5원은 썼을 것이다. 윤 직원이 별난 취미를 즐기려고 부민관을 오가는데 여러 사람이 손해를 봤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만석꾼에다 은행에 10만 원을 예금한 윤 직원이 쉽게 등쳐먹는 상대는 언제나만만한 약자들이었다.
- P90

그러나 사람 욕심 끝이 없다고, 점점 못마땅한 것이 하나둘 늘었고 그 불만은 고스란히 대복이에게 쏟아졌다. 국악방송이 없는 날이면 윤 직원은 왜 날마다 나오는 소리를 느닷없이 못 나오게 하느냐며대복이를 쥐 잡듯 잡았다. 물론 대복이는 그때마다 열심히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그날 프로그램을 다르게 정했으니 집에 앉아서 라디오를 아무리 주물러도 남도소리는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요."
"법이라께? 그런 개 같은 놈의 법이 어딨당가? 어떤 놈의 소리가엊저녁까지 들리던 게 오늘 갑자기 안 들리고? 기생이랑 광대가 다급살 맞아 죽었다덩가?"
- P102

활동사진이 조선 대중에게 널리 공개된 것은 1903년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였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구미 각국의 풍경이나 관광지, 춤 같은 것을 50초 정도 보여준 것에 불과했지만 생전처음 보는 조선인들은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설렁탕 한 그릇 값을 내고 보러 가서 화면이 나올 때마다 놀람과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면 진짜 기차가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줄 착각하고 비명을 질렀고, 드레스입은 여자 무용단원이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갓 쓰고 도포 입은영감들이 그 절을 받으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 P119

 북촌에 활동사진 전용관이 생긴 것은1912년 우미관이 처음이었다. 우미관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관람석에 긴 나무 의자를 두었는데, 빽빽이 앉으면 1000명까지 들어갔다.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 두고 조선말로 무성영화를 해설하는 상설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종업원도 모두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주인은 일체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인의, 조선인에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
- P120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훈련원에 도착하지 않은 대대가 있었다.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1200여 명, 그들은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을도화선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꺼내 시가전을 벌이며 봉기했다.
남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때 이충순은 서소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하기 직전 자결했다.
- P133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되었을 때는 변사가 나라 잃은 젊은이의 슬픔을 얼마나 절절하게 해설하는지그 자리에 임검 나간 일본 순사가 변사를 무대에서 끌어내린 적도있었다.
발성영화는 그런 즉흥적 변주의 맛도 짜릿한 긴장감도 없었다. 발성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너무 바쁘고 피곤해졌다. 영어, 불어, 독어 등 원어 음향이 쾅쾅 나오는데 일본어 자막은 독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장에서는 발성영화에 변사 해설을 붙였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관객의 귀는 동시에 떠들어대는 원어 음향과 해설자 설명으로고막이 먹먹해졌고, 관객의 눈은 영화 장면과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자막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심훈은 조선의 영화팬처럼 가엾은 존재가 없다며 개탄했다.  - P143

그러나 식민 도시 경성의 다방은 낭만적인 문화공간만은 아니었다. 다방은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하루 대부분을 소비하고, 고학력실업자들이 피곤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벽화와 금붕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벽화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이 넘도록 그림처럼 앉아 있는 사람을 말했고, 금붕어‘는 ‘벽화와 반대로 하루 종일 이 다방 제다방을 돌아다니며 물만 마시는 사람을 일컬었다.  - P156

구한말 서양인을 통해 들어온 커피가 대중에게 선보인 것은호텔 다방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하면서다.
개항 직후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대불호텔, 정동의 손탁호텔,
소공동의 조선호텔 다방이 대표적이었다.
서양식 건물 호텔에서 소비되는 수입품 커피는 상류층의사교생활과 선진적인 서구 문물을 상징했다.
- P160

영이는 안방에 누워 마음속으로 그동안의 원한과 증오를 순이에게 쏟아냈다. 내일 아침 순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없이 비웃어주고 싶었다. 영이는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 내일 아침에 순이가 사내를 졸라 가족에게 자장면을 시켜줄지 궁금했다. 그때 순이는 자장면을 더럽다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이는 내일 보란 듯이 자장면을 맛있게 먹을 작정이었다. 영이는 곁에 누워 있는 부모의 얼굴을살펴보았다. 지금 건넌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알면서도부모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영이는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영이는 베개를 고쳐 베고 눈을 감았다. 여윈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마저 집안 식구에게 자장면을 해다 주게 됐니? 너마저, 순이야.
- P177

명월관은 1914년 인사동 이완용 저택(옛 순화궁)을 빌려 지점을 내고, 그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 5년 뒤인 3월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두 달 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 P184

9년 먼저 준공한 <동아일보> 사옥은 대지면적 400평, 건축면적140평, 연면적 470평에, 총공사비 14만 7200원이 들었다. 공사 기간은 1년 3개월이었고,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3층이었다. 두 사옥의 규모와 공사비를 비교하면 〈조선일보>의 물량 공세가 압도적이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조선일보> 방응모는 자가용, <동아일보)송진우는 인력거,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뚜벅뚜벅"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수치였다.
- P192

지주에게 유린을 당한 뒤 버림받고 쫓겨났다. 먼저 당한 간난이가 넋나간 듯 경성으로 흘러와 공장에 들어간 뒤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 노동운동가를 통해 차츰 사회 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자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말 못하던 짐승이 말하는 사람으로 환생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감격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간난이는 그 감동의 자존감을 선비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선비는 간난이를 따라 인천 공장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간난이가 노동운동을 하는지는 몰랐다. 간난이는 자신이 대동방적에서 쫓겨나기 전에 선비가 학대받던 여성에서 단단한 노동자로 변한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간난이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 P222

다. 인텔리의 껍데기를 벗겠다며 노동판에 뛰어들면서 박준구는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인간의 역사에서 기술과 인문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한참 뒤, 오래전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시를쓰기 시작했다. 노동이 룸펜의 무기력을 밀어내자 시는 허무가 아니라 희망이 되었다.
- P258

은 농사꾼…. 100년 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 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 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 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년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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