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인코그니타 -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강인욱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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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대목이 있었다.

방랑벽이 있던 아버지는 툭하면 집을 나가 방랑을 했는데 그것이 만주로 간다고 했던가라는 대목이나, 그 시대 여학교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만주로 떠났다는 대목이었다.(그게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니 안타깝다)

그순간 우리 국토가 대륙과 이어져 있던 시기에 살던 사람들의 공간 개념과 섬이 아니면서도 딱 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감각이 얼마나 다를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었다.

또한 그런 공간감각의 차이가 실제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이 책 <테라 인코그니타>를 읽으면서 예전의 저 생각이 다시 들었다.

길은 이어져 있고 그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물자와 생각들이 끊임없이 흘러갔을텐데, 1990년대 초반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이전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섬처럼 단절되어 어디로도 갈 수없는 고립된자로 살았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넓은 세계를 교류의 흐름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사실상 역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살았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말이다.

 

물론 그러한 오류가 우리 자신만의 지리적 입장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사 교과서는 선사시대가 끝나면 세계 4대문명부터 시작된다.

그 4대문명론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이 책은 시작된다.

 

4대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활보할 때에 만들어졌다. 문명이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미개하게살았다는 생각은 몇몇 선진국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대형 신전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2만년 전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 P22

 

4대문명을 배우다보면 마치 그 곳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문명이 없었던 것처럼 저절로 인식이 흘러간다.

그런데 이것이 제국주의시대와 함께 만들어졌다는데서 갑자기 아!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 주어졌던 공간적 한계와 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해 편협하게 그어졌던 인위적 경계가 우리의 역사인식을 국가 영토내로 한정하거나, 세계사적 인식에 있어서도 국가별 지역별 인식으로 한정해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교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의 한계를 가지게 되는데 교류를 끊임없는 흐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행위의 반복으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이런 역사인식의 문제는 무엇일까?

국가별 지역별로 동떨어져서 인식하는 역사인식에서는 불가피하게 나와 타자라는 구별이 먼저 전제되게 된다.

나 이외의 것은 타자가 되고 그 타자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테라 인코그니타(미지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교류와 흐름과 영향이 먼저가 아니라 나와 타자의 구별이 먼저 전제되면 거기서부터 나라는 주체에 대한 과도한 선긋기와 집착이 시작되겠구나싶다.

나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 아무 문제없는 절대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많은 경우 타자에 대한 배제로 흘러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나와 타자 사이의 선긋기가 전제되는 역사를 우리는 계속 배우고 익혀온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나타나는 인종차별, 난민문제에 대한 히스테릭한 반응의 원인이 물론 하나는 아니지만 이런 우리의 역사인식의 한계가 중요한 원인일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와 함께 여태까지 변방으로 여겨졌던 만주와 시베리아와 남미대륙의 역사를 종횡무진 달리면서 우리 역사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독서였다.

또한 민족의 틀에 갇혀있는 역사교육을 교류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역시 내게는 중요한 시사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계를 짓든 실제 역사는 무수히 많은 교류의 흐름속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그 흐름을 파악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은 결국 배제가 아니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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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3-01 08: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독립항쟁 당시 주역들은 기차를 타고 만주, 시베리아 등을 자유롭게 갈 수 있었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까지 구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의 인식은 마치 고구려 멸망 후 남북국 시대의 신라처럼 대륙의 기상을 잃어버린 면이 있다 여겨져서 안타깝습니다...

바람돌이 2021-03-02 01:21   좋아요 2 | URL
대륙의 기상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요. 단지 단절된 공간인식이 우리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편향을 계속 강화하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극복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

scott 2021-03-01 1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 바퀴 언어‘ 라는 책에서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속에 선사시대 문명의 흔적이 녹아 있다고 했는데 터키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동아시아 문명의 흔적이 발견되듯이 민족의 틀넘어 문명 인류사 전체 폭넓은 시각의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바람돌이 2021-03-02 01:23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근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먼저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이 그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교육과정이나 교과서를 제작해야 하고요. 근데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도 별로 없는데 문명 인류사적 시각으로 역사교육 내용을 재편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어요. ㅠ.ㅠ 한국사와 세계사를 통합교육하겠다고 항상 얘기하는데 왜 항상 실패하겠어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학에도 없고 일선 학교에도 없기 때문인걸요. ㅠ.ㅠ

희선 2021-03-02 0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예전에는 꽤 길게 이어졌는데... 실크로드는 신라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있기도 하던데... 아주 옛날부터 다른 나라 사람이 오기도 했는데, 그런 게 끊기고 말았네요 지금은 하늘로 간다지만, 코로나19가 막았네요 가끔 한국 사람인데 혼혈처럼 보이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 보면 오래전 조상에 다른 나라 사람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단일민족이라고 배우는데 그건 아닌 듯해요 그것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역사는 한 나라만 알아서는 안 되더군요 그런 거 알아도 알려고 하지는 않는... 바람돌이 님 글을 보고 그렇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3-03 11:39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단일민족신화가 최근에 와서는 더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요즘 학교 교과서에서는 단일민족 어쩌구 하는 내용은 다 사라졌어요. 하지만 예전에 학교 다니신 분들은 아직도 저 신화를 맹신하는 분들 많죠. 근데 그게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용도로 휘둘러져서 더 걱정이에요. 어제 동두천에 외국인 노동자들 집단 감염 일어났는데 그것도 걱정이지만 또 사람들이 그들을 인간적으로 비하하고 욕하고 할게 더 걱정됩니다. 국수적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코로다보다 더 무서워요.

하양물감 2021-03-02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라는 것이 거의 다 그러한 것 같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기록!!! 자기중심적 사고...

바람돌이 2021-03-03 11:39   좋아요 1 | URL
그런 기록들 중에서도 그래도 아닌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

감은빛 2021-03-02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께서 인용하신 내용과 글에 쓰신 내용들 대부분에 동의합니다.
역사를 어떻게,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 그 관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일 수 있지요.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기존 역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 중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소위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판타지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은 염려스럽고 안타깝습니다.

바람돌이 2021-03-03 11:41   좋아요 0 | URL
환단고기류의 판타지는 언제나 있어왔잖아요. 요즘은 조금 더 세련돼 졌더라구요. 훨씬 더라고 할까?
어쨋든 저런 환타지 역사에 대한 위험도 항상 생각해야 할 듯요.
 

 

 

 

 

 

 

 

 

 

 

 

 

 

 그때 그곳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을까.

 근대 건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삶, 그것을 공간적으로 넓히면 근대건축의 사회문화적 의미가 될 터이고, 다시 시간적으로 늘려 현재에 이르면 화석처럼 축적된 장소성이 될 터이다. -5p

 

건축이란 아무리 멋있어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가 아무리 근대건축의 성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건축학도에게나 그렇지, 인간이 살 수 없어 결국 버려진 집일 뿐이다.

근대 건축물들에 관심이 많다. 아니 모든 건축에 관심이 많다. 한옥에도 관심이 많고, 서양식 근대 건축도 좋아한다. 서양의 교회나 왕궁, 민가들... 그러고보니 다 좋아하는구나. 여행 다닐 때 멋진 건물이 있으면 꼭 들어가보고 싶고, 보고싶다.

예전에 강화도 놀러갔을 때는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성당이 잠겨 있어서 민폐임에도 불구하고 담당자분한테 전화까지 해서 불러내 내부안내를 받았더랬다.

건축의 어떤 부분이 좋은걸까?

내가 뭐가 좋은지도 잘 모르는 얼치기 건축 매니아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사람이 빠진 건축이야기는 관심이 안간다는거다.

사람이 살고, 사람의 손길이 가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는 정말 호기심이 확 땅길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책 소개를 읽으면서 근대건축과 근대소설의 콜라보라니.... 아 이렇게 절묘할 수가!

소개 그대로 이 책은 근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100여년 전 경성의 온갖 건축물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건축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단편 운수좋은 날의 김첨지의 경우, 그와 그의 가족들이 도시로 올라와 전전했을 공간과 마지막 공간인 행랑채의 모습과 환경을 서술하는 식이다. 실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이 시대 하층민들의 삶의 고통이 진하게 전해져 온다.

근대 건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소설과 공간을 오가는 서술은 아주 흥미진진해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책읽기 시간이었다.

 

이태준의 <복덕방>, 채만식의 <태평천하>, 박태원의 <천변풍경><방란장 주인><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성탄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현진건의 <피아노>,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의 <인간문제>, 김사량의 <천마>, 이 책에 동원된 근대소설들이다.

읽은 책도 있고 제목조차 처음듣는 경우도 있지만 소설이란 것이 당대를 가장 리얼하게 그려낸다는 걸 생각하면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 물론 위 작품들을 다 읽었더라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커졌으리라는건 분명하지만.....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 참가하게 되었다.(133p)

 

 

이태준의 <복덕방>에 등장하는 서참위는 1907년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다. 그는 저 치욕의 해산식에 멋도 모르고 참가했다가,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누구는 의병이 되고, 누구는 황실 근위대에 남을 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복덕방을 시작한다. 이런 서참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도시형 한옥이나,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상류층의 새로운 부의 상징으로 떠오른 문화주택(서구식 벽돌집들이다.)을 만나게 되고, 이런 새로운 주거형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태가 펼쳐진다.

도시형 한옥을 사서 첩살림을 하는 이, 영감에게서 집을 뜯어내고 연애는 따로 하는 첩, 부모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면서 문화적인 삶을 가장하기 위해 문화주택을 사고 그 주택을 완벽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피아노를 들이는 젊은 부부(당연히 피아노는 칠줄 모르므로 먼지만 쌓여간다.). 당대 최고의 문화예술 공간이었던 부민관으로 남도소리공연을 들으러 가면서 없는 사람 등이란 등은 다 쳐대는 쪼잔한 영감.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우미관에서 활동사진 속 드레스 입은 무용단원이 인사를 하자 그 무용수의 인사를 받기 위해 어정쩡하게 일어나는 갓 쓴 노인들.... 이 시기 다방과 카페가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방은 차를 파는 곳, 카페는 여급의 술시중을 받으면서 술을 파는 곳이었단다. 카페의 여급들, 시골에서 올라온 공장의 여공들, 한몸 누일 공간이 없어 천변에 토막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

하 이런 사람의 얘기가 공간과 만나면 그대로 그림처럼 100년전이 떠오른다.

 

 

명월관은 1914 인사동 이완용 저택( 순화궁) 빌려 지점을 내고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5 뒤인 3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184p)

 

태화관이 인사동에 있던 청요리집이라는 것만 알고있었는데 그 기원을 보니 기가 찬다. 민족대표 33인의 고민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한 건물이 친일파 거물의 저택에서 요리집으로, 독립운동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김두한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로의 우미관이 무성영화시대 조선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조선인의 공간이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할 때 변사가 어찌나 민족적 울분을 실감나게 묘사하는지 일제 경찰이 상영을 중지해야 했다는 에피소드에서 이 시기 우리 문화의 한 단면과 사람들의 마음을 짚어보기도 한다.

일제가 문화공연장으로 만들었던 <부민관>건물은 서울시 의회로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이 시절 건물들은 개발의 과정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남았다.

 

100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인력거꾼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이 작가분에 대해 관심이 확 생겨 검색해보니 아직 많은 책을 쓴건 아니고 요 2권이 검색된다.

다행히 나의 전작주의에 아주 적당한 숫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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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는 행랑살이나 셋방조차 구하지 못한 빈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날품팔이, 공사장 막일꾼, 행상으로 연명하며 시내와 교외를 가리지 않고 제방, 하천변, 다리 밑, 산림의 공한지, 관유지, 사유지에 움막이나 토막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했다. 움막은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어 조그맣게 지은 것이고, 토막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을 얹은 다음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의 집이었다.
토막민에 관한 기사는 신문이나 잡지에 심심찮게 나왔다. 상왕십리에 사는 어느 할머니는 반쯤 쓰러진 컴컴한 토막에서 열다섯 살손자와 단둘이 살았다. 살림살이라곤 귀 떨어진 항아리 한 개, 쭈그러진 양철 대야 한 개, 석유 한 상자였다. 다 팔아도 오십 전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할머니는 양철 쓰레기통을 줍는 손자와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간다고 했던가. 13 - P49

과연 그랬을까? 명창대회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윤 직원은 경성에서 하는 명창대회라면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날 윤 직원이 명창대회를 보는데 쓴 돈은 95 전이었다. 춘심이를 데리고 정상적으로 봤으면5원은 썼을 것이다. 윤 직원이 별난 취미를 즐기려고 부민관을 오가는데 여러 사람이 손해를 봤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만석꾼에다 은행에 10만 원을 예금한 윤 직원이 쉽게 등쳐먹는 상대는 언제나만만한 약자들이었다.
- P90

그러나 사람 욕심 끝이 없다고, 점점 못마땅한 것이 하나둘 늘었고 그 불만은 고스란히 대복이에게 쏟아졌다. 국악방송이 없는 날이면 윤 직원은 왜 날마다 나오는 소리를 느닷없이 못 나오게 하느냐며대복이를 쥐 잡듯 잡았다. 물론 대복이는 그때마다 열심히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그날 프로그램을 다르게 정했으니 집에 앉아서 라디오를 아무리 주물러도 남도소리는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요."
"법이라께? 그런 개 같은 놈의 법이 어딨당가? 어떤 놈의 소리가엊저녁까지 들리던 게 오늘 갑자기 안 들리고? 기생이랑 광대가 다급살 맞아 죽었다덩가?"
- P102

활동사진이 조선 대중에게 널리 공개된 것은 1903년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였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구미 각국의 풍경이나 관광지, 춤 같은 것을 50초 정도 보여준 것에 불과했지만 생전처음 보는 조선인들은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설렁탕 한 그릇 값을 내고 보러 가서 화면이 나올 때마다 놀람과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면 진짜 기차가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줄 착각하고 비명을 질렀고, 드레스입은 여자 무용단원이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갓 쓰고 도포 입은영감들이 그 절을 받으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 P119

 북촌에 활동사진 전용관이 생긴 것은1912년 우미관이 처음이었다. 우미관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관람석에 긴 나무 의자를 두었는데, 빽빽이 앉으면 1000명까지 들어갔다.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 두고 조선말로 무성영화를 해설하는 상설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종업원도 모두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주인은 일체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인의, 조선인에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
- P120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훈련원에 도착하지 않은 대대가 있었다.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1200여 명, 그들은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을도화선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꺼내 시가전을 벌이며 봉기했다.
남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때 이충순은 서소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하기 직전 자결했다.
- P133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되었을 때는 변사가 나라 잃은 젊은이의 슬픔을 얼마나 절절하게 해설하는지그 자리에 임검 나간 일본 순사가 변사를 무대에서 끌어내린 적도있었다.
발성영화는 그런 즉흥적 변주의 맛도 짜릿한 긴장감도 없었다. 발성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너무 바쁘고 피곤해졌다. 영어, 불어, 독어 등 원어 음향이 쾅쾅 나오는데 일본어 자막은 독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장에서는 발성영화에 변사 해설을 붙였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관객의 귀는 동시에 떠들어대는 원어 음향과 해설자 설명으로고막이 먹먹해졌고, 관객의 눈은 영화 장면과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자막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심훈은 조선의 영화팬처럼 가엾은 존재가 없다며 개탄했다.  - P143

그러나 식민 도시 경성의 다방은 낭만적인 문화공간만은 아니었다. 다방은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하루 대부분을 소비하고, 고학력실업자들이 피곤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벽화와 금붕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벽화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이 넘도록 그림처럼 앉아 있는 사람을 말했고, 금붕어‘는 ‘벽화와 반대로 하루 종일 이 다방 제다방을 돌아다니며 물만 마시는 사람을 일컬었다.  - P156

구한말 서양인을 통해 들어온 커피가 대중에게 선보인 것은호텔 다방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하면서다.
개항 직후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대불호텔, 정동의 손탁호텔,
소공동의 조선호텔 다방이 대표적이었다.
서양식 건물 호텔에서 소비되는 수입품 커피는 상류층의사교생활과 선진적인 서구 문물을 상징했다.
- P160

영이는 안방에 누워 마음속으로 그동안의 원한과 증오를 순이에게 쏟아냈다. 내일 아침 순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없이 비웃어주고 싶었다. 영이는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 내일 아침에 순이가 사내를 졸라 가족에게 자장면을 시켜줄지 궁금했다. 그때 순이는 자장면을 더럽다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이는 내일 보란 듯이 자장면을 맛있게 먹을 작정이었다. 영이는 곁에 누워 있는 부모의 얼굴을살펴보았다. 지금 건넌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알면서도부모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영이는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영이는 베개를 고쳐 베고 눈을 감았다. 여윈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마저 집안 식구에게 자장면을 해다 주게 됐니? 너마저, 순이야.
- P177

명월관은 1914년 인사동 이완용 저택(옛 순화궁)을 빌려 지점을 내고, 그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 5년 뒤인 3월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두 달 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 P184

9년 먼저 준공한 <동아일보> 사옥은 대지면적 400평, 건축면적140평, 연면적 470평에, 총공사비 14만 7200원이 들었다. 공사 기간은 1년 3개월이었고,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3층이었다. 두 사옥의 규모와 공사비를 비교하면 〈조선일보>의 물량 공세가 압도적이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조선일보> 방응모는 자가용, <동아일보)송진우는 인력거,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뚜벅뚜벅"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수치였다.
- P192

지주에게 유린을 당한 뒤 버림받고 쫓겨났다. 먼저 당한 간난이가 넋나간 듯 경성으로 흘러와 공장에 들어간 뒤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 노동운동가를 통해 차츰 사회 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자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말 못하던 짐승이 말하는 사람으로 환생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감격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간난이는 그 감동의 자존감을 선비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선비는 간난이를 따라 인천 공장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간난이가 노동운동을 하는지는 몰랐다. 간난이는 자신이 대동방적에서 쫓겨나기 전에 선비가 학대받던 여성에서 단단한 노동자로 변한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간난이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 P222

다. 인텔리의 껍데기를 벗겠다며 노동판에 뛰어들면서 박준구는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인간의 역사에서 기술과 인문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한참 뒤, 오래전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시를쓰기 시작했다. 노동이 룸펜의 무기력을 밀어내자 시는 허무가 아니라 희망이 되었다.
- P258

은 농사꾼…. 100년 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 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 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 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년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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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에서 혼자 묵독하는 시는 그 감동이 아무리 크다 해도홀로 고독 속에서 적막 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시를낭송하면 그 소리는 낭송하는 인간의 몸에서 빠져나와 타인에게로 향합니다.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소통적이고 타인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 청각이라고 합니다. 소리가 인간을 황홀하게 하는 것은 단독으로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시를 크게 소리 내서 읽어보고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물리적 소리도 들어보고 또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숨겨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 필요하지요. 저절로 시의 리듬에몸을 맡기고 하염없이 그 시의 말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황홀해지겠지요. 그때 위로가 찾아옵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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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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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자 신문기사에는 민경욱이 드디어 백악관 앞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라고 하면서 1인 시위를 하는 사진이 올라왔다.

일단은 쪽팔린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주장할 수도 있고 다 그럴 수도 있는데 왜 시위장소가 미국 백악관 앞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베 수상님 죄송합니다를 외치던 주옥순과 판박이다.

한국의 우익들은 오늘도 이렇게 국민들을 웃겨주려고 열일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저 모든 일이 웃기는 일이 아니게 돼버리는게 우리의 비극이라고 할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평소에 이 문제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일본이 진심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이 필요하고, 그 진지하고도 의미있는 첫걸음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전하는 충격적 진실은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평화주의가 갖고 있는 명확한 한계도 지적했습니다. 자신들이 아시아에 저지른짓에 대해 속죄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본은 ‘일국 평화주의‘에 머무를 뿐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P259

 

전후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도 전쟁의 피해국이라는 집단 최면에 홀린듯 하다.

그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인한 것이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이라는 것이 모든 역사적 죄악을 덮어버린 것이다.

내가 피해자인데 전쟁의 책임이나 반성이 어디에 설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일본의 시민사회가 가지고 있는 평화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입었던 그 피해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필요로서의 평화를 넘지 못하고, 이는 전쟁을 일으켰던 주범들과 그 후예들이 계속 일본 사회 내에서 권력을 잡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토대가 된다.

내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강한 국가의 존재, 전쟁은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국가는 강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현주소인듯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일본의 평화주의의 한계는 너무도 명백하다.

만약 상황이 변하여 내가 피해를 입는다면 전쟁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는 것은 정말 한순간일 것이므로....

 

한국의 우익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존재들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우익들은 강력한 국가라는 환상을 매개로 성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우익의 뿌리는 이승만이 살린 친일파에서 시작되고, 박정희에 의해 광범위하게 다시 살아난 온갖 일제 잔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주적-북한-을 향해서는 강력한 국가를 지향하지만, 우리보다 강한 국가-미국, 일본-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굴종의 모습을 보인다.

저 코미디 같은 민경욱이나 주옥순이 서있는 지점이다.

 

한국에 있어 친일파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이승만 시절에는 사람의 문제와 사회구조, 문화의 문제가 모두 섞여 있었고, 박정희 시대로 오면 친일파 출신이냐 아니냐라는 문제보다는 그들 집권자들이 만들려고 했던 사회구조와 문화가 더욱 문제가 된다.

박정희와 친일파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지적하는대로 박정희 개인의 친일여부가 아니다. 그는 본격적인 친일파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젊었고,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해방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일본 아베 총리의 정치적 지향이자 외할아버지인 전범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에게도 정치적 아버지이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국가의 모델이 바로 만주국이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아주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기시는 사실상 만주국을 설계한 사람입니다. 이런 만주 경험은만주군 장교로 근무한 박정희와 잘 맞아떨어졌지요. 사실 유신 시대의 국방국가 한국은 만주국 모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생겨난 한일 간의 유착관계에는 기시와 박정희가얽힌 만주국 인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 P108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친일잔재의 청산은 단순히 누가 친일파인지를 가려내는게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유산들, 그들이 퍼뜨린 군국주의의 유령들을 몰아내는 것, 그럼으로써 억압적이고 양비론적인 문화를 바꾸는 것이 진정한 친일청산의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인 국민학교를 모르고 다녔다.

아직도 황국신민서사를 본뜬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논의조차도 불가능하다.

한국전쟁 시기 국군이 운영했던 군 위안소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되지 않으며 이런 사실이 자랑스럽게 국방부 공식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에서 우리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서도 여전히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고 있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사진이 하나 있었다.

한 초등학교 교사의 전신문신 사진이었는데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많이 심해서 내아이가 중학생 정도가 아니라 그 초등학교 학생이라면 조금 꺼려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프랑스사회에서는 이 문신 남성이 초등학교 교사로 적합한가 않은가에 대해서 논쟁이 가능하다는 것이 내가 부러운 지점이었다. 우리 사회였다면 무조건 퇴출이었으리라고 본다.

타인에 대한 관용과 다름에 대한 인정 역시 군사주의적인 문화에서는 어렵고도 어렵다.

 

일본은 사실 더 답이 없어보인다. 길이 안보인달까?

혐한을 먹이로 하며 일본 우익은 어떤 악재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고, 오히려 확대되는 듯하다.

지난 9월 아베는 총리에서 퇴임하면서 다시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일본의 우익은 어쨌든 야스쿠니신사를 국가 공식 추도원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공식화시키고자 한다. 이는 결국 일본의 헌법 9조 - 자위대의 무력행사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조항의 개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에 일본의 혐한 우익의 득세, 그리고 자위대의 교전권 인정이 가져올 동북아의 새로운 지형 등 갑갑하기 이를데 없는 일본 내부다.

 

사실 일본의 시민사회에 대해서는 항상 궁금한게 많았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는 일본의 여러가지 해프닝들에 대해서도 우리야 바다 건너라고 웃긴다고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왜 일본 국민들은 저 꼴을 보고만 있을까 의문이 끊임없이 들었다.

이런 일본의 상황을 가져오는데는 전후 일본 시민운동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데 이 책에서 상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결국 1960년 6월 19일 자정이 되어 안보조약 개정안이 자동적으로 성립됨으로써 안보반대 사회운동 진영이패배하게 됩니다. 격렬했던 반대운동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지요. 한국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던 바로 그 무렵입니다. 한국이었다면 개정안이 강행되더라도 곧장 폐기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하고 계속 이어갔을 것입니다. 정권을 바꿔서라도 목표를이루기 위해 투쟁했겠지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단 법이 제정되어 실행되자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포기해버렸습니다. 일본사회운동의 특징일 수도 있는데, 1960년부터 거듭해서 이런 경험을 하며 점점 패배주의가 쌓였고 사회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깊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 P241

 

1970년대 일본사회운동의 몰락은 이후 커다란 구조적 문제를 남겼습니다. 우선 운동세력 내에서 연대에 대한 불신이 강해졌습니다. 전학련, 전공투, 적군파 등 큰 조직에서 발생한 모순과 폐해를목격한 뒤로 수평적 연대를 하지 않는 경향이 생겨났지요. 지금도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은 절대 손을 잡지 않고, 시민운동단체들도독립적으로 활동합니다. 사회운동 조직은 갈수록 작아질 뿐 크게통합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사회운동이 권위주의적 체제 해체나 안보조약 폐지같은 큰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세울 수 있는과제들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여성운동, 원전 반대, 군사기지 반대, 장애인 해방, 소수민족 차별 해소 등으로 사회운동이 세밀하게 분화되었지요. - P248

 

일본이 자랑하는 역사 중에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것이 있다.

2,000년간 천황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한번도 역성혁명을 겪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000년이나 이어졌던 무사정권도 천황을 허수아비로 두었을지언정 천황의 집안을 유지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조선에서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두려워했던 것이 의병의 존재였다.

일본의 경우 어떤 전쟁이든 전투가 벌어지고 우두머리가 항복하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인데, 왜 조선에서는 왕이 도망을 갔는데도 백성들이 싸우냐는 것이다.

강력하고 영원불멸한 권력에의 의지, 그에 대한 복종이 일본인 내면 유전자에 새겨져버린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희망은 결국 일본과 한국의 시민세력이다.

그들의 역사와 현재를 이야기 하는 이유도 한일관계를 제대로 협력과 평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양국 시민사회의 연대 이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일관계의 어려움과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 역시 좋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시민사회에서 No아베로 방향전환을 한것은 옳았지만, 그것이 국민의 전반적인 정서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느낌이다.

많은 이들에게 No아베는 여전히 No일본이다.

지금은 코로나사태로 수면 밑으로 살짝 가라앉아 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그 수면 아래서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와 극일주의 적대적 감정들이 모락모락 키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한때는 시기와 부러움, 증오의 대상이었던 일본이 지금은 약간의 우월감과 냉소, 비웃음의 대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한일 양국에서 저 우익들과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강화되어지는 토양이 될 뿐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의 한일관계에서 일본과 한국의 사람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따라하며 닮아가고 있는듯도 하다.

어디에서부터 이 두 이웃나라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데 결국 희망은 시민사회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결론을 곰곰히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때다.

 

만약 한국이 계속해서 폐쇄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전면에내세운다면 일본 시민사회는 한국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극우주의에 전부 포섭될 것입니다. 그런 흐름은 일본의 헌법개정 및 동아시아 평화의 위협으로 이어지겠지요.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은 갈등과 혐오가 필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한국과 공통점이 많은 덕에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일본을 직시하고 배울 건 배우면서 연대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진정한 과거사 청산은 물론이고 새로운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향해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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