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김태우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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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쯤  KBS 가 특별기획으로 방영했던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깜짝 놀란 장면이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 사람들의 생활을 다룬 부분이었는데 그야말로 시골에서는 원시적 동굴생활로, 도시에서는 지하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아래 사진 참고, 모두 KBS특집다큐 한국전쟁 영상에서 캡처한 사진들이다.)

물론 그 전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북한 전역이 초토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접했던 사진들은 대부분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 역시 비참하고 참혹하지만 그런 전쟁의 폐허 모습은 꼭 한국전쟁이 아니라도 1차세계대전 시기 비행기가 전쟁무기로 처음 등장한 이래 모든 전쟁현장에 공통된 모습이었기에 따로이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영상속에 재현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쟁 시기 북한 <지하 인민시장>의 모습이다. 

지하생활이라고 하기에 단순히 방공호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지하에 시장이 섰다는건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하 무기공장의 모습이다. 이곳의 노동력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고 난 이후 북한의 아이들과 여성들은 전쟁물자 생산과 도시 복구에 동원되었다.

이들에게 지하 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시골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혈거생활로 돌아갔다. 아래 사진과 같은 동굴이나 땅을 파고 토굴을 만들어 생활한다.





3년의 한국전쟁 기간 중 1951년부터 53년까지는 고지전 기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전투는 38선 근방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진행되면서, 북쪽이 항공전력이 바닥나면서 남한은 그나마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북한은 3년 내내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

1951년 이렇게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북한지역의 실태 조사를 위해 용감하게 나선 여성들이 있었다.

UN산하 국제민주여성연맹(이하 국제여맹)의 초청에 응한 한국전쟁 진상 조사위원 - 18개국 21명의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북아메리카의 다양한 지역에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출신과 다양한 성향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국제여맹은 당시 전세계 여성의 삶을 조사하는 진상조사단을 각 대륙에 파견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고, 북한 지역에 조사단 파견은 그 활동의 일환이었다. 또한 국제여맹은 평화, 여성의 권리,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를 내세워 기존 여성운동의 주요 흐름이나 당대의 대표적 국제여성단체들에 비해 상당히 진보적인 이념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렇게 역사 속에 묻혀있던 단체와 그 단체에 의한 한국전쟁기 북한지역의 조사결과를 발굴해 냈다는 점에 이 책의 첫번째 가치가 드러난다. 

얼마나 묻혀있었는지 역사를 전공한 나조차도 이 단체에 대해 처음 들어봤다. 

중국까지 이동한 이 여성들은 북한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두 만일의 경우 가족에게 보낼 유서를 미리 쓴다.

실제로 이후 이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보면 낮에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밤에 그것도 차량의 전조등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천천히 도로도 제대로 나있지 않은길을 이동하는 위험천만한 여행이다.

또한 시시때때로 공습경보에 따라 방공호나 지하토굴로 대피하고, 조사과정 중에 폭격의 현장을 목격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녀들을 그곳으로 이끌었던 간에 이렇게 목숨걸고 조사한 기록이라면 당연히 그 중요성이 인정되고 그들의 활동이 역사의 한자락에 기록되어야 마땅할텐데 지금까지 당사국인 우리나라에서 조차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데 역사적 책임과 미안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들의 조사결과는 <우리는 고발한다>라는 소책자로 7개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동시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책자는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소책자의 내용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폭격이 북한의 주민들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둘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 미국의 이해관계,미국의 눈치를 보던 유럽의 상황들에 절대 유리하지 않은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국으로 돌아간 이후 오히려 소련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국익을 그르치는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기존의 자신의 활동기반까지 빼앗기는 불이익을 당한다. 그 중에는 자신의 조국을 떠나 망명을 떠나야했던 사람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21명의 여성들 중 누구도 이 보고서의 내용을 평생동안 부정하지 않았으며, 불이익을 감수했다.

왜 그녀들이 일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지키고자 했는지는 그녀들의 여정을 따라가보면 이해된다. 폭격으로 삶의 기반을 모두 잃은 사람들, 전쟁 중 성폭행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손을 맞잡고 같이 울면서 보고 들었던 것들과 양심을 바꿀 수는 없었던 이들의 정직한 마음에 해답이 있을 것이다. 

정의로운 마음과 말과 행동이 어떻게 지켜지는지에 대해서도 이들을 통해 생각해보게 된다.


대중역사서를 표방하는 이 책은 서술에 있어 약간 독특한 방식을 선택한다.

조사위원으로 파견되었던 여성 중 그나마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영국인 모니카 펠턴이라는 여성의 입을 빌려 그녀의 생각과 행적을 따라가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 책의 두번째 강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모니카 팰턴은 영국인 사민주의자이며 당시 영국 노동당 관료로서 영국 최초의 뉴타운 개발사업 총재직을 맡고 있던 여성이다. 그녀는 반전평화운동은 커녕 2차대전기의 '애국주의적 활동'을 통해 집권여당의 대표적 여성 리더로 활동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북한을 다녀오고 보고서를 제출하고 난 이후 반역죄로 사형되어야 한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부정하지 않고 신념을 지킨다.

이 책은 바로 이 여성, 조사단 내에서 냉정한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조사단 내부의 각국 인물들과도 싸우고, 북한의 의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북한이 보여주는 증인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싶고 듣고 싶은 인물을 선정해 증언을 채취하고자 노력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정했다.

이런 전략은 사실 문학에서는 흔한 전략이고, 츠바이크의 역사서술은 극단적으로 등장인물에 몰입해 1인칭 서술로 이끌어나가는 특징을 보이는데 우리나라 대중 역사서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은 참신한 방법이다. 

그래서 이 책은 딱딱하고 학술적인 온갖 자료들을 모니카 팰턴의 시선으로 따라감으로써 자료에 생기와 현장성을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츠바이크처럼 과도한 몰입으로 인해 역사적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냉정한 역사학자의 시선을 유지한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데 이 책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앞으로 이 한국현대사학자가 또 어떤 대중역사서를 들고 나올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저자 소개에 보면 저자는 자신을 미래 한반도 거주민들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역사학의 내용과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의 저작 <폭격>과 이 책 <냉전의 마녀들> 모두 한국현대사에서는 탁월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고, 자료도 없는 역사의 진실을 찾아 발굴하고 쓰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저자의 다짐이 책을 읽다보면 절로 수긍이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국전쟁기 북한 주민의 피해를 지금에 와서 우리가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보게 되는 한국전쟁기 북한 주민들의 삶은 전쟁의 끔찍함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2차 대전중의 드레스덴 공습이나 도쿄 대공습처럼 단발성의 공습이 아니라 무려 3년간 끊임없이 진행되었던 폭격이란 것의 실체와 공포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현재 북한의 체제를 보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너무 많다.

저들은 왜 저렇게 김일성에 열광하는가? 1인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왜 제대로 조직되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현대사회에서 그것이 세습되고 있는 것을 당연시 하는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지만 책을 보다 보면서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공포! 집단적 공포와  트라우마!

전쟁과 폭격의 기억은 아마도 북한 주민들의 뼛속 깊은 곳까지 트라우마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 공포의 기억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대가 몇번 바뀌는 것 외에는 없을 정도의 지독한 공포!

그것이 현재의 북한을 만든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남한 역시 전쟁 트라우마로 인한 상처, 불합리한 생각들, 비논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을 무수히 가지고 있지만 그 강도에 있어서 북한이 훨씬 더 했던데서 체제의 차이가 극명하게 벌어진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다.

그전쟁의 트라우마를 다시 살피는 것, 그 시기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의 용기와 의지를 되새기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지기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 이 책 정말 좋은데 읽은 분이 생각보다 적다. 나라도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제발 좀 많이 팔리고 읽어달라고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았는데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진짜 이 책 강력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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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8-02 21:3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사실 6.25전쟁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럽습니다. 얼마전 방구석 1열에서 고지전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전쟁의 대부분이 고지전이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어요. 정말 책이라도 많이 읽어 실상을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람돌이 2021-08-03 00:22   좋아요 1 | URL
알아야 할게 얼마나 많은데 한국전쟁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관심사도 다 다르잖아요. 페넬로페님의 문학작품들 소개로 저의 정신세계가 나날이 풍요로워지고 있는걸요. ^^ 한국사 관련 서적들이 어쨌든 저는 직업으로 걸치고 있는 관계로 대부분이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인하고 새롭게 보는거였는데 이 책은 정말 깜깜 모르고 있던 일이었어요. 그래서 더 저자의 노력이 얼마나 지난했을지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런 저자의 노력이 많은 독자들을 통해 보답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습니다. ^^

mini74 2021-08-02 22:0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 분 책 폭격도 저는 참 좋았어요. 전쟁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냉전과 매카시즘 열풍으로 참석한 분들 대다수가 저평가되고 잊혀진 점이 속상했어요 바람돌이님의 강력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ㅎㅎㅎ 리뷰짱 ! 입니다 *^^*

바람돌이 2021-08-03 00:24   좋아요 2 | URL
폭격은 사놓고 서문만 읽고 분량에 눌려서 미뤄둔 책이에요. 대신에 저자가 직접 나와서 소개했던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었는데 굉장히 생각할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폭격도 읽을 예정입니다. ^^ 이 책에 나온 조사단 위원들에 대해 한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붕붕툐툐 2021-08-02 23: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이 이리 강력 추천하시면 당연히 읽어봐야지용~ 순위 앞으로 쭉쭉 올립니당^^

바람돌이 2021-08-03 00:24   좋아요 0 | URL
앗 1명 뽐뿌에 성공!!! 툐툐님 미리 감사해요. ^^

새파랑 2021-08-02 23: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역사 전공자시군요. 그래서인지 내용정리도 완벽한거 같아요. 사진 까지 보니 충격적이긴 하네요~!!

바람돌이 2021-08-03 00:26   좋아요 1 | URL
사진은 제가 수업용으로 가지고 있는 영상들을 캡처한거에요. 내용정리는 일부러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어볼 분들을 위해서요. 부디 많이 많이 읽어주시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국전쟁을 통해 평화의 의미뿐만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부분이 많은 책이었습니다. ^^

희선 2021-08-03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하니 한국전쟁 때 사람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 별로 못 해 본 것 같기도 하네요 남쪽보다 북쪽이 더 살기 어려웠군요 땅속에서 살았다니... 공습이 그렇게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니 그때 사람은 그때 일 잊지 못하겠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더 힘들었겠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글을 쓴 사람이 있었군요 그것도 여성이라니... 그런 게 아주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8-03 01:45   좋아요 1 | URL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근현대사를 보다 보면 정말 그 때 안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전쟁이나 공습의 기억은 그걸 당했던 사람만이 아니라 후대에 그걸 전해듣고 자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의 트라우마를 주는 것 같아요. 아마도 세대가 여러번 교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점으로부터 이어진 넓은 길은 조사위원들을 "절대적 폐허의무(nothingness of absolute ruin)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식은 용암지대와 같은 회색의 돌무더기와 자갈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돌조각과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 여기저기 크게 쌓여있는 돌무더기, 부서진 벽, 불타고 남은 건물 목재, 잿빛의 기둥, 바닷가에서 퍼온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는 자갈들까지 그곳에는 무엇 하나온전한 것이 없었다. 몇시간의 조사를 통해 대략적으로 과거의 건물들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지 그저 추측 가능했을 뿐이다.  - P173

이렇듯 수많은 북한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유쾌하게 웃으면서 지내다.
가도, 언제든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심연으로 급속히 추락하곤 했다. 사실상 이 당시 북한사람들의 상당수가 일종의 정신적 외상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자신의 모든 재산이 한줌의 재로 사라진 상황 속에서, 그리고여전히 폭격기가 일상적으로 머리 위를 배회하는 상황 속에서 정신적건강함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P188

이 감옥들은 전쟁 이전 시기의 물류창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내에서 가장 큰 농산물 보관소나 화약창고 같은 곳이 사람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활용되었다. 응당 이곳에는 화장실이나 세면실 같은 것이 따로 설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이곳에 함께 수용된 수많은 성인남녀와 아이들에게 엄청난 수치심과 모욕감까지 안겨주었다. 마치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를 향해 달려가던 유대인 수송열차 안처럼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행 열차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져 죽고 밟혀 죽고 병들어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황해도의 여러 창고 안에서도 병약한 아기들과 노약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갔던 것이다.
- P194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지역 기독교 인구가 급증하는 데 ‘전쟁‘ 이라는비평화적 상황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전화(戰禍) 속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위해 서양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교회로 몰려들면서 기독교가 평안도와 황해도 각처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기에는 동일한 믿음을 갖고 생존을 위해 교회로 몰려갔던 사람들이 과거와는 달리 비참한 상황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주민들은 미군이 교회를 폭격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집단적으로 폭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들 중 하나였던 교회는 오히려 미군 폭격기의 주요 타깃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펠턴이 노인에게 물었다.
- P196

"당신은 기독교도인가요?"
그는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펠턴은 다시 물었다.
"크리스천이세요?"
노인은 고개를 들면서 펠턴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펠턴은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로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지.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의 노쇠한 몸이 떨리고있었다.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았기때문에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 P197

이렇듯 미군을 학살의 직간접적 주체로 지목하고 있는 증언들은 사실상 국제여맹 조사단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분석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최근 국내학계의 황해도 집단학살에 대한 연구 성과들에 의하면, 학살사건의 명백하고 중요한 가해사 중 하나로 이 지역에 뿌리를 둔 한국인 ‘우이 치안내‘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을 개진하고 있는 논저들은 대체로 한국전쟁당시 황해도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대부분 피란민)의 구술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관련 구술자료는 꽤나 일관성 있고 방대한 편이다. 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에 대한 미군의 직접적 지시나 방조 여부에 대해서는여전히 학계 내의 합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황해도 본토박이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 가담은 부인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 P205

1948~49년 제주4·3사건 당시 진압군을 지휘했던 박진경,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이 그로부터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위와 같은 폭력적군사문화의 일본군 하급 장교였다는 사실은 결코 쉽게 간과할 사안이아니다. 게다가 4·3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948년 여순사건 당시에도 온건한 입장의 송호성(宋, 광복군 출신)을 대신하여 일본군 출신의 백선엽(白善華), 백인엽(白仁壁), 김백일(金山一), 김종원(金宗元) 등이강경진압을 주도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신참변과 난징대학살로 이어진 일본군의 잔혹한 폭력성은 불행히도 해방 직후의친일파 미청산 및 친일군인들의 권력 장악과 함께 한국현대사 속에서부활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펠턴은 산 사람을 생매장하고, 나체로 끌고 다니고, 무차별적으로 신체를 훼손하는 일이 믿기지 않았겠지만, 수년 전 일본군이 점령했던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이 같은 일들은 언제든 현실에서 재발 가능한 악몽이자 트라우마와도 같은 사건들이었다.
- P226

국제여맹의 현지조사 시점은 미공군의 ‘초토화정책 수행 직후의시점이었던 것이다. 1950년 11월 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북한지역내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군사적 목표로 간주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실제 11월 8일 신의주 대공습을 시작으로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불살라버리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1950년 11월 북한 주요 도시들의 파괴율에 대한 미공군 자체 평가에 의하면, 만포진 95퍼센트, 고인동 90퍼센트, 삭주 75퍼센트, 초산 85퍼센트, 신의주 60퍼센트, 강계75퍼센트, 희천 75퍼센트, 남시 90퍼센트, 의주 20퍼센트, 회령 90퍼센트가 완전 파괴되었다고 한다. 폭격 피해에 대한 국제여맹의 주장은 전혀과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 P286

보고서 발표 직후 덴마크의 한 언론은, 이 여성들이 자신의 고국으로돌아오기 전까지 "서방 국가의 어떤 사람들도 한국 민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 P294

그러나 북미와 서유럽에서 위와 같이 국제여맹 보고서에 대해 다소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고서에 반영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철저히 묵살되거나 노골적으로 탄압받곤 했다.
미국정부의 공식적 반응은 철저한 무시와 무대응이었다.  - P295

1951년 매카시즘이 정점에 달해 있던 미국에서 레드콤플렉스를 활용한 특정 세력의 무력화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미국정부는 그 같은 ‘빨갱이‘ 낙인찍기 임무를 미국 내의 보수적 여성단체들에게 위임했다. 정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 대신, 자국 내의 애국주의적 여성단체들을 활용해 좌파적 여성평화운동을 억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P295

그런데 국제여맹은 한국에 조사위원회를 보낸것이 결정적 문제로 지적되어 , 결국 1951년 유엔 내의 모든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16 냉선 초기 가 많은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던 국제여성단체가 한국전쟁 관련 활동을 이유로 유엔 내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했던 것이다.
- P296

수난은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러명의한국전쟁 조사위원들이 북한지역 조사활동을 이유로 끔찍한 정치 · 사회적 탄압을 받았다. 물론 중국,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공산국가출신 조사위원들은 귀국 후 특별한 정치적 조치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P296

명확한 자유주의적 정치성향의 덴마크 조사위원들이 북한여성 원조에 적극적으로 임한 이유는 간명했다. 북한지역에서 다수의 타협할 수없는 진실들" (irreconcilable facts)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펠턴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펠턴은 조사 과정 내내 다양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있었다. 펠턴은 이를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란 "시체가 매일 쌓여갔다"는 것이었다. - P316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전쟁 상황하에 살아가고 있다. 분단체제라는 전쟁과 같은 굴레 아래에서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전쟁의 지속‘과 ‘전쟁의 형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제기했던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쟁이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지, 그 수행 방식은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보아야만할 것이다.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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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평화‘와 ‘인도주의‘의 문제가 전쟁의 발발, 전개, 정전 과정 전반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좌파적 여성주의자들 또한 동시기 평화운동의 적극적 주체로서 세계 모든 대륙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 P12

그러나 최소한 이 책은 1951년 당시 북한지역에 거주하는여성들을 ‘북한여성 (North Korean women)이 아닌 ‘한국여성‘ (Koreanwomen)으로만 호칭하면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제3세계 여성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자 했던 외부세계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보여줄 것이다. 냉전은 이 여성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왼전히 삭제해버리려 했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달냉전의 현실 속에서 국제어맹의활동은 지속적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국 최고의 여성 엘리트였던 이들이 왜 유서를 쓰고 압록강을 건너갔는지, 그리고 그 잿빛 현장에서 여러차례 북한여성들을 부둥켜안고 쏟아낸 굵은 눈물의 의미가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22

그런데 스티버니지 개발계획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추진된 막대한국방비 증액에 의해 그 실행 과정에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노동자들은 자신 앞에 펼쳐졌던 장밋빛 미래가 빠르게 되색되어가는모습을 무력하게 비라보았다. 냉선과 한국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화의 파고가 영국의 정치와 노동자들의 일상을 격렬하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펠턴의 한국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좀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P26

전쟁 승리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던 처칠 정부가 외교와 군사문제에집중할 때, 노동당은 국내문제‘에 대한 주요 책임과 역할을 떠맡았다.
유럽 전역에서 독일이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해나갈 때, 처칠 정부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영국인의 ‘공동체의식‘과 ‘사회개조‘ 의 필요성을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구가 광범하게 유통되었고, 토인비(A. J. Toynbee), 케인즈(J. M. Keynes)와 같은 지식인들이그 같은 기대에 진보적 열정을 불어넣었다. 전쟁 승리는 반드시 진보와동행해야 할 것이었다." 그 같은 진보와의 동행은 『타임즈 ( The Times)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수백만의 보통사람들이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우리의 적보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위한 정책이었다.
- P28

 1951년 4월 북한행 직전의 모니카 펠턴은 영국사회의 정치 - 경제적미래상에 대해 우울하고 비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영국의 ‘희망이 벌써 사라져간다 거나, ‘세계를 향한 우리의 희망의 일부분‘
이었던 스티버니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펠턴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의 발발과 냉전의 심화 과정이 영국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역행시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의 외교와 재무정책은 급속한 변화를 맞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두려움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P30

국제여맹 영국 지부가 한국전쟁 조사단 참여 여부를 의뢰하는 초청장을 나에게 보냈다. 나는 비록 그 이전까지 이 단체와 연결된 적이전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초청에 응하는 것이 노동당 평생 당원으로서 노동운동에 도움을 주고, 노동당의 가장 훌륭한 전통의 일부분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이 나라의 국민들은 북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심지어 지난가을 이래로 남한으로부터 제공된 보고들 또한 점점 디 심하게 검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영국 노동운동의 가장 큰 동력은 언제나 사실에 근거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견해의 기초를 형성하는 일반 당원들의 열정으로부터형성되었다. 나는 한가지 목표만을 갖고 있었다. 그 유일한 목표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진실을 발견할 경우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것이었다. - P35

한국전쟁은 1945년 이래 애틀리 노동당 정부가 추진해온 사회주의적정책을 심각하게 역진시키고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구호 아래 시행된 다양한 사회보장과 주택 정책들이 막대한 국방비 증액에 의해 휘청거렸다. 이에 맞서 노동당 좌파 의원들은 당의 사회주의적 전통에 따라 쉽게 묵과할 수 없었던 미국의 비인도적 공중폭격과 이승만 정부의 잔학행위 관련 보도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과연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영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희망던 사회보장 계획을 퇴보시키면서까지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증액하는것이 적절한 선택인지 논쟁이 일었다. 1951년 4월, 펠턴은 이 같은 논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 P36

국제여맹은 이내 전후 여성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1949년 미국 내의 페미니스트들조차 국제여맹이 "이제껏 세계가 보아온 그 어느 조직보다도 단연 대단한 여성 조직(the most tremmendous women‘s organization)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국제여맹 자료를 가장 광범하게 조사하여 이 분야 최고의연구자로 평가되고 있는 프란시스카 더한(Francisca de Haan)의 표현에 의하면, "국제여맹은 1945년 이후 가장 크고,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여성단체"였다. 1951년 외제니 꼬똥(Eugénie Cotton)의 주장에 의하면, 국제여맹은 전세계 9100만 여성들을 대변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 P57

즉 국제여맹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여성단체들 중에서 진보적 좌파 여성주의에 공명하는 단체들을 전반적으로 아우르고 연결하는 상위의 지붕조직이었던 것이다. 이 진보적 좌파조직의 핵심 주장은 평화, 여성의 권리,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등으로서, 기존 여성운동의 주요 흐름이나 당대의 대표적 국제여성단체들과는 꽤나 상이한 주장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 P58

국제여맹은 그 활동 초기부터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여성 조직들과의 연계를 형성하고, 그곳 여성의 삶을 조사하기 위한 진상조사단(fact-finding mission)을 파견했다. 1946년 국제여맹의 첫번째 진상조사단이 아르헨띠나,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에 파견되어 현지 여성 실태조사와 그곳 여성운동가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그리고이해에 개최된 국제여맹 평의회(council meeting)를 통해, 향후에 개최될 모든 평의회에서 반드시 식민지 여성의 삶의 문제와 인종차별의 젠더적 영향에 대해 논의할 것을 결의했다. 표현 그대로 남아메리카 아시아 · 아프리카 여성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국제여맹 이전의 어떤 국제여성단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중요한 역사적 변화였다.
- P68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유럽에서 파시즘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고,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식민주의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응당 세계 곳곳의 수많은 여성들의 일상에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국제여맹은 이렇듯 파시즘과 식민주의로 고통받는 여성들과의 연대를 공식적으로 천명했던 당대의 유일한 국제어성단체였다. 또한 국제여맹은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시점부터 스페인, 남아메리카, 동남아 등의 지역에 지속적으로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던 세계 유일의 국제여성단체이기도 했다. 1951년 국제여맹의 북한 현지조사단 파견 조치는 결코 이 단체의 역사와 무관한 일회성의 정치적 이벤트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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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서 버마 노동자들은 타이 노동시장의 최하부 공동화를 땜질해왔다. 타이 경제를놓고 보면 버마 노동자들이 빼앗은 일자리가 아니라 떠받친 일자리였다. 허울뿐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같은 거창한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그저 버마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박해의 뿌리가 타이 노동자란 사실에 치를 떨었을 뿐.
닭장차에 실려 온 버마 노동자 수백 명이 경찰 몽둥이에 휘둘리며 모에이강 둑에 무릎 꿇고 추방을 기다리던 그 새벽녘 쓰라린 풍경은 여태 내 심장에 박혀 있다.
- P284

샨해방투쟁이 60년째다. 뒤집어 말하면 버마 정부가 정규군 40만에다 온갖 화력을 투입하고도 지난 60년 동안 산을 무릎 꿇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앞으로 60년 뒤에도 버마 정부가 무력으론 결코 산을 지배할 수 없다. 그 증거가 이 로이따이이다." 못석 말은 우스개가 아니다. 버마 정부군이 총을 내리고 평화를 향해 가야 하는 까닭이다. 그게 소수민족 자결권과 자치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버마연방이다. 그게 버마 정부가 죽어라고 외쳐온 연방제다. 버마 정부는 1948년 독립 뒤부터 30여 개 웃도는 크고 작은 소수민족 무장세력을 단 한 번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결과는 이렇게 뻔히 나와 있다. 선택은 오롯이 버마 정부 몫이다. 소수민족해방조직들은 언제든 총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버마 정부가 총을 거둔다면,
- P306

고백건대, 이게 ‘동무‘가 돼버린 버마전선 취재 30년이 내게 안긴 고민이기도 하여 기사를 쓸 때만큼은 그 얼굴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온 까닭이다. 그렇다고 내 고민이란 게 사실을 꾸미거나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감추는 따위가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내 고민은 적과 동지를 또렷이 구분하는 일일 뿐이다. 기자로서 내게 ‘중립‘ 이란 건 없다. 나는 객관성‘으로 위장해 자본과 권력을 좇는 상업 언론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오직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심장이 내린 명령을 좇을 뿐이다. 하여 내게 진실은 오직내 발에 채인 현장일 수밖에 없다.
기자로서 내 직업적 한계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산 사람들 판단과 샨 역사에 맡길 수밖에.
- P313

그 시절 영국은 까렌, 까레니, 까친, 친 같은 소수민족을 무장시켜 이른바 분할통치로 다수 버마족을 지배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립을 미끼로 그 소수민족들한테 도움받았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약속도 책임도 저버린 채 사라졌다. 여기가 바로 상호 불신감과 적개심을 걷어내지 못한 채 오늘까지 이어지는 버마 민족분쟁의 출발지였다. 영국 식민주의가 낳은 저주의 유산이었다.
- P321

"다시 태어나도 버마가 안 변하면 또 총 들 수밖에. 까레니로 태어난 내 운명이고 내 자존심이고 내 명예야." 까레니 해방투쟁을 이끌어온 비투는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은 내일이다. 1948년 독립 뒤부터소수민족 무력으로 짓밟아온 버마 정부 안 믿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지금껏 맺었던 숱한 휴전협정 누가 깼어? 그게 내 답이야."
믿음 없는 버마 현대사, 평화는 아직 멀기만 하다.
- P332

까렌이 바깥세상에 알려진 건 비극의 현대사를 통해서다. 가렌과까친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앞세워 다수 버마족을 지배한 영국 식민주의자의 이른바 분할통치가 그 비극의 씨앗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립 보장을 미끼로 소수민족들을 총알받이로 써먹고는사라져버린 영국 식민주의자의 배신이 그 비극의 싹이었다. 1948년독립한 버마가 소수민족의 자치와 자결 약속을 깨트리면서 줄기를뻗은 그 비극은 이어진 군인독재정부의 탄압 아래 무럭무럭 자라 결국 버마 전역을 뒤덮은 분쟁이라는 나무가 되었다.
- P335

눈여겨보면 그 국경 충돌이 달아오른 2009년은 타이와 캄보디아 두 정치판이 모두 뒤틀리던 때였다. 방콕에서는 군사정부에 이어군부 도움받아 집권한 민주당이 합법성 시비에 휘말렸고, 프놈펜에서는 장기집권해온 훈 센이 총선 들머리에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게 두 정부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쁘라삿쁘레아위히어를 정치적재물로 삼았던 배경이다. 걸핏하면 국경 긴장을 정치적 연장으로 써먹는 타이와 캄보디아 정치판의 해묵은 수법이었다.
- P409

이 지뢰밭이 외진 국경이 아니라 방콕이라면 어땠을까? 방콕 사람들이 지뢰 밟아 죽어나가도 못 본 척했을까? 방콕에 박힌 지뢰라면 전쟁 끝나고 33년이 지나도록 내버려뒀을까?
이게 국경 현실이다. 이게 국경 사람들 삶이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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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니 받거니 기분 좋은 담배질 끝에 화제를 바꾼다. "그나저나이 마을 내력은?" "여기도 몽족 마을이야. 무장투쟁 접은 1983년, 반롬화파몬Ban Rom Fa Pha Mon 이라고, 라오스 국경과 걸친 도이파DoiPhamon 산기슭에서 여기로 옮겨왔지." "그럼 라오스 사람이구먼?"
"우린 대대로 산속에 살았고, 더구나 그 시절엔 국경선이란 것도 또렷잖았으니, 어디가 타이고 어디가 라오스인지도 몰랐지. 알 필요도 없었고."
- P168

되돌아보자. 지도부나 엘리트 출신 당원들은 먹을거리도 없는 가난한 옛 동지들 심장에 대고 "영혼을 팔아먹었다."며 욕질할 자격이없다. 조직 해체 명령이 없어 총을 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헷갈린 전사들만 덩그러니 산악에 남겨둔 채, 앞다퉈 제 살길 찾아 떠난 이들이 지도부였고 엘리트였다. 그렇게 떠난 이들은 머잖아 정치인으로, 학자로, 예술가로, 사업가로 이름 날렸다. 잘난 것 없는 타이공산당 경력을 적당히 흘려가며 떵떵거리고 살아왔다. 그이들이 못배우고 가난한 옛 동지들 사회복귀나 보상 위해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 P201

그놈의 나라‘가 불러 나라‘ 위해 목숨 걸고 15년 동안 반공전선 달린 마 와릿한테 떨어진 건 꼴난 버스비와 병원비 반값이다.
버스도 없고 병원도 없는 이 깊은 두메산골에서.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이 산골에서는 전직 자경단도 전직 공산당도 시민 대접 못 받긴 다 마찬가지다. 파묻어버린 타이 현대사의 그 밖들일 뿐.
- P215

한참 만에 사하이 사완이 말문을 연다. 1970년대 무장투쟁 시절 이 산악을 타고 다녔지. 다 지난 이야기지만, 세상은 아무도 몰라.
짓누르면 또 일어날 수도 있고, 좋은 세상 못 만든 우리 세대 탓이지만.." 그이 얼굴에 깊은 회한이 묻어난다.
- P251

"당신처럼 라오스에서 태어나 타이에서 살아온 국경 사람들은 두 나라 다툼에 심사가 복잡할 텐데?" "우린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돼. 우리 같은 국경 사람들한테 국적이니 국제법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도시 사람들한테나 필요한 건진 몰라도, 어차피 우리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의무만 있지 권리란 게 없으니까." "두 나라가 여기 땅을 놓고 서로 내 것이라 우겨왔는데, 본디 어느 쪽 영토인지?" "여기 국가란 게 어디 있었어. 서로 전쟁하기 전까진 타이도 라오스도 눈길 한 번 준 적 없었는데, 우리를 봐. 나만 해도 저쪽 라오스에서 여기 타이 쪽을 마음대로 건너다니며 살았잖아. 지금이야 막혔지만."
- P252

그렇다면 롬끌라오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국가 중심의 비무장지대를 시민 중심의 평화지대로 바꾸는 길 밖에 없다. 기술적으로 영토분쟁지역을 공유할 뿐, 두 나라가 영토주권을 포기할 일도 없다.
현실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 잃을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 그동안 두정부의 전략이란 것도 사실은 현상유지정책이었고, 특히 아세안에묶인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 가능성도 사라진 상태다.
. 더구나 교통마저 없는 첩첩산중 이 비무장지대에 경제적 이권을다툴 만한 건더기도 없다. 평화지대로 바꾼들 서로 손해 볼 일이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세계 최초‘로 영토분쟁지역에 평화지대를 창설함으로써 명분도 얻고 이문도 낼 수 있다. 무엇보다 타이와 라오스 정부가 죽기 살기로 매달려온 관광산업에도 그만이다. 그 평화지대는 고유한 전통문화를 지녀온 국경 사람들 중심으로 꾸리면 된다.
이 멋들어진 산악에다 그만 한 관광상품이 어디 있겠는가?
- P253

"전선에서 같이 싸워보니 어땠어요?" "본디 우린 학생이나 지식인 안 믿었어. 그이들은 잠깐 왔다 가는 거니까. 1965년부터 목숨 바쳐 싸운 우리하곤 달랐지.
근데, 나중에 보니 그이들이 타이공산당 상징처럼 되어 있더군, 무슨 지도자나 된 것처럼," "1970년대 학생운동 이끈 지도자로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섹산 쁘라서꾼(탐마삿대학)과 티라분미Thirayut Boonmee(쭐랄롱꼰대학) 말하는 건가요?" "그 둘뿐 아니라숱하잖아. 난 그런 이들 관심 없어. 땅에 발 디딘 공산주의자 아니니까. 많이 배운 그이들은 머리와 입으로 혁명 외쳤지만, 우린 심장과발로 혁명전선을 달려왔어."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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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6-04 1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공부가 많이 될 것 같네요.
마지막의 글을 읽으니 역사 왜곡, 이 떠오르네요. 많은 역사가 왜곡되었을 걸로 추측합니다.
싸움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 것처럼 보이듯이, 역사 또한 진술하는 측이 유리하게 작용할 듯합니다.

바람돌이 2021-06-04 15:17   좋아요 2 | URL
저기 인터뷰하는 분들 모두 정부가 너무 빼앗아가서 굶어죽을 수가 없어 저항을 시작했던 분들이에요. 이런 분들의 역사가 타이에서는 전부 다 묻혔다고 합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죠. 독립운동사조차도 묻힌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남아시아의 현대사를 보면서 우리나라보다 더 가혹하고 복잡한 역사에 마음이 많이 착잡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