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치문서와 해방정국 -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년의 한반도
박태균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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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이념대립의 시대였던 해방정국은 우리 자신 역시 그 이념의 프리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미군정의 버치중위라는 다소 특이한 인물이 남긴 자료들은 한 발 떨어져 외부자의 시선에서 해방정국의 풍경과 사람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시각의 편향을 점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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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3-28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셨군요^^ 내부자와 외부자의 시선은 아무래도 다를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뿌리깊은 이념이 한반도에 여전한 지금 다른 시선에서 보는 한반도 정국은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2-03-28 08:51   좋아요 1 | URL
해방정국의 여러 인물들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결국은 외부자의 시선이 필요한 것도 우리 자신의 문제를 더 제대로 보기 위해서가 아닐까싶기도 했구요.
 

김구를 따랐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과격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극우 보수의 선봉대 또는 돌격대라고 할까? 이들 중 일부는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청부 살인 업자들이었던 것 같다. 시키는 사람이 좌익만 아니라면, 누구든 돈만 준다면, 그리고 시후 신분만 보장해준다면,
암살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
- P113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경찰의 세 번째 특징이었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이 극우 테러 청년단과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경찰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버리지 않았다. 왜? "반탁운동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경찰이 군정에충성하는 쪽으로 남음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찰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버치 문서 Box 3) - P131

미군정은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경찰밖에 없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 30일 군성청을 마비시켰던 반탁운동 세력의총파업에서 경찰만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가장 충성심이강한 경찰이 있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운영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 P132

친일 경력의 경찰들은 이승만과 함께 김구를 그들의 경력을 은폐할 수 있는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 때 각 지방의 경찰서에는 이승만과김구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미군정청에서 지방 경찰서에두 사람의 초상화를 붙이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조상화는 1948년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방 경찰서의 중앙 벽면에 붙어 있었다. (코넬리 소령에게 보내는 1947년 9월 10일부터 26일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대한 정치적 조사」, 1947년 9월 29일, 버치 문서 Box 2) - P133

2개의 캠프로 나뉘어 있다. 군정을 지지하는 것은 우익, 아닌 쪽은 러시아에 의해 이용당하는 쪽이다. 어느 쪽도 사회 개혁이나 경제 재건 또는 정치적권리나 자유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항상 권력만을 생각한다. 서울과 평양의 정당 본부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시위에 동원하려고 하고 있으며,
상명하복의 구조를 갖고 있다. 노동자나 농민의 복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않으면서 소수 지도자의 특권과 권위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예외적으로 아주 잘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담장 위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 중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들이지만, 군사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갖고 있으면서 위험을 느끼고 있다.
- P134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제국에 편입되면서 나타났던 식민지 근대화론에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왜곡되었든, 아니면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든 간에 그 결과가 ‘근대‘와 ‘자본주의 시장‘ 이라는 모습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기원을 형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한 모퉁이에서나마 식민지적 근대의 단맛을 느낄 수 있었던 대도시, 그리고 전통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못한 지방 사이의 차이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미친 영향은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다.
- P141

이러한 사회구조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와 보통선거제도를 적용한다면,
결정적인 키를 쥐는 것은 비도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도시보다 비도시 지역에서 더 많은 대표를 뽑을 수밖에 없는 정치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제헌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특이한 형태의 정부 구조를 규정하고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국회의원 선출을 좌우할 비도시 지역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큰 것이었다. 1952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바뀐 이후에도 도시보다 비도시 지역에서 선출되는 사람들의 표심이 더 중요할 수밖에없었다.
- P142

니콜스는 이승만의 지원으로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첩보 부대를 오류동에서 창설했다. 니콜스의 부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 조직들을 파괴하는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7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 1949년 한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숙청과 처형, 그리고 북에서내려오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니콜스의 활동이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있다.
- P156

건의서를 작성한 권태석은,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의 대상이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 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에 따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박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다.
- P167

일부 연구자들은 미소공동위원회나 좌우합작위원회가 모두 미군정의
"쇼" 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찍부터 소련과의 타협보다 미국에 우호적인세력을 중심으로 분단 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이 미국의 정책이요, 미군정의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치의 문서 속에 나타나는, 미소공동위원회에대한 미군정의 대처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단지 하나의 쇼가 아니라실제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있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었던 중이었고, 그 와중에 여운형이 암살된 것이다.
- P217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열강들이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고 한 것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 큰 충격이 되었고,
응당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거족적인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만약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헌장의 초안에 나타난 것과 같이 빠른 시간 내에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고, 통합된 임시정부하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질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든 정치 세력들이 이에 협조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1955년 분할 점령과 신탁통치를 끝내고 독립한 오스트리아와 유사한 운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않을까?
- P227

 일정한 정도의 세금을 낼 수 있거나 해당 지역의 유지들만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46년 중반 이후 지방에서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국민회와 청년단이 그 세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간접선거를 통한 입법의원 선거 결과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그룹의 압도적인 승리로끝났다. 친일 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리와 농지개혁 등 해방 직후 처리해야만했던 문제를 다루는 법안이 입법의원에서 논의가 되었지만, 결국 동과되지못했던 것은 입법의원 내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그룹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 P250

이렇게 미군정기에 형성된 구대 정치의 원형은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있다. 이러한 구태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가까 뉴스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주도한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졌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이 뉴욕 타임스>의 존스톤 기자와 회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박헌영이 조선은 소련의속국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존스톤이 이승만과 연결되어있는 기자라는 점은 버치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 P281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 구도는 개혁과 반개혁의 구도가 되었어야 했다. 민주화를 했기 때문에 그 민주화를 막았던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기득권 언론들은 이러한 정치 구도를왜곡했다. 개혁과 반개혁이 아니라 진보 보수, 좌우의 대립 구도가 된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반개혁 세력은 청산 대상이 아니라 보수와 우익이라는모습으로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 P282

해방 정국의 모습이 비로 이러한 정치 구도 왜곡의 원형을 보여준다. 해방후 한국 사회는 독립운동을 한 진영과 친일 세릭 간의 대립 구도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 뉴스들은 이 구도를 좌우 간의 대립 구도로 만들었다. 한국의 식민지화와 일본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반탁운동을 하는 애국적 우익으로 꾸며졌다.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세력은 소련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매국 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구도 속에서 반독립 세력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우익으로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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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분단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합의안은 단지 합의일 뿐 전혀 실현될 수 없는 방안이었는가?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진정으로 지원한 것인가? 국내에 전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승만이 미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빠른 시간 내에 한국민주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 P20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의 재기용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알면서도 미군정은 왜 이들을 계속 고용했어야 했는가?
- P21

이 지점에서 이승만이 내놓은 구호가 "덮어놓고 뭉치자."였다.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친일 부역자를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들이 뭉치는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정당들은 이러한 무원칙한 이승만의 원칙에 반발하면서 독촉중협으로부터 탈퇴했다. 이승만도 "덮어놓고 뭉지자."라고는 얘기했지만, "덮이 놓고는 수사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중요한원칙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모든 한국인들이 예외없이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라고 언급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의미한다. 결국 "덮어놓고 뭉치자."라는 구호는 그 앞에 "공산주의자와 나를반대하는 사람을 빼고"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했다. - P56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덮어놓고 뭉치자."라고 했지만, 실상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 덮어놓고 뭉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 이승만의 주위에서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미군정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한국민주당이나 안재홍의 국민당이 모두 이승만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승만을 통해 한국내 보수 세력을 통합하고 좌파에 대응하겠다는 계획은 더 이상 가능하지않게 되었다. 이승만을 ‘최고의 애국자‘라고 소개하면서 화려하게 데뷔시켰던 미군정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러한 실패는 이미 1916년 5월부터명백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 을 잘 못 쓴 것이다.
- P72

그의 최고의 약점은 다른 동료들과 협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게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는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매우 외로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반쯤 체면에 걸린 seemihypnotized) 사람들은 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그에게 기꺼이 이글렸다.
그가 지금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그의 능력 때문도 아니고, 그가 성취한 것 때문도 아니다. 단지 지금 경찰과 공무원들에게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1947년 8월 4일, 정치고문단의 D.C. 유스(Youth)가 작성한 이승만 박사의 정치적 배경: 그의 현재 상태의 원인과 이유」, 버치 문서 3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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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 일본 정부는 미국의 일보본토 침공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이 되자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아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발생했던 오키나와 전투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잔혹한 전투로 꼽힌다.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사람들이 죽었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집단 자살을 강요당했다. 미국이일본 본토를 침공하면 과연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미리 맛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집단 자살이었다.
- P506

그러나 이런 계획은 그때까지 줄곧 일본에서 권력이 작동되던 방식에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정치인들이 그동안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선심성 예산을 뿌리던 일을 앞으로 하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정도의단순한 사안이 아니었다. 민주당의 계획이 실현되면 관료들이 그동안 사회 이곳저곳에 정치적·경제적 보호 장치를 임의로 배분해오던 재량을상당 부분 잃게 된다.
- P517

일본은 존 다우어가 미군정의 역사를 다룬 책(패배를 껴안고)에서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미국의 품Ameriein embrace‘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대 말 이후로는 벗어나려는 시도를 사실상 완전히 포기했다. 요즘의 보통 일본인들은 미국에 대해 더 이상 특별한 호기심이 없다고는 해도 대체로 미국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  - P520

일본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영향력 대리인‘들은 갑자기 전례없는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임무는일본 자민당과 관료사회와 재계의 지도부가 관심을 갖고 있는 어젠다를수행하는 것이었다. 이제 이들에게는 그것과 성확히 반대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일본의 새로운 선출 정권을 깎아내리고 잠식하는 임무였다.
- P523

후쿠시마 원전을 둘러싼 문제는 알고 보면 자민당으로 대변되는 전후일본의 구조적 병폐에 그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 민주당이 관료들및 미국 내에서 일본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의 반역에 가까운 행의로인해 사사건건 발목을 잡혔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정치세계에서는 모든 일이 금방 잊힌다. 일본처럼 언론이 국가 질서를 유지하는 세력을 자처하는 나라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일본의 언론은 공정하고도 절제된 보도가 아니라 특정 정치인의 결점을 대서특필해서 이슈화하는 행위를 통해 권력을 감시한다. - P554

달리 말하자면, 핵심적인 문제는 일본이 계속해서 과거를 청산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신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거짓 신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동중국해와 동해 너머로부터 일본을향해 날아오는 위협과 비난이, 어떻게 대처해아 좋을지 모를 마연한 증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베와 극우세력이 전후 체제에 그토록 효과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망상에 사로잡힌 미국이 (때로는 무심결에) 이들을 도와주고 때로는방조했다.
- P598

사실을 말하자면 아베와 그의 무리도 진짜로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수반하는 것들을 갈망한다. 사람들 사이의 열광, 목적의식, 명확함, 위계질서, 경의가 생겨나기를 원하고, 의심과 거리낌과 비판을 일소하기를 바란다. 이런 갈망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사회전체가 빠르게 노화되고 있는 갸루와 초식남과 오타쿠의 시대에, 수백만의 젊은이가 천황을 위해 죽지 못해 안달이던 1930년대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아베는 그 시절의 정신 비슷한 것을부활시키지 못하면 일본이 거침없고 호전적인 중국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중국도 물론 아베의 이런 착각을바로잡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국 또한 국가의 거대한 선전기구를 통해 일본이 모든 악의 근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관념을 중국 국민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해 닝는다.  - P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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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 중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는 경제 모델을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벌써 한 세대가 넘도록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엔저를 무기로 한 수출주도형 기업들이 무한한 자본과인력을 가져다 쓰던 경제 모델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기저에 깔린 만성적 경제 문제가 겉으로 드러날 때마다(그런 일이 과거 반복해서 발생했고 2012년 말에 또 한 번 찾아왔다) 정치 지도자들은 매번 똑같은 낡은 수법에만 의존하려고 했다. 엔화를 크게 평가절하하고, 인구가줄어만 가는 지방에 건설 프로젝트를 다시 돌려대고, 세계가 일본 제품을 더 사주기를 바라는 수법이 그것이다.  - P418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사례가 정치가 부재해도 사회가 정상 기능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은 정치와 권력이 사라진 시장 중심의 사회라는 신자유주의적 환상과는 거리가 먼 국기다. 오히려 일본에서 정치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시장을 간섭하고 동제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정치의 존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 P421

메이지 지도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로, 일본 정치에는 의심의여지 없는 명확한 통치권을 갖는 권력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쟁관계에 있는 권력 집단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온전히 합법적인 판단을 내려줄 제도적인 절차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 또한 공개적인 정치 절차가 없었던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 P424

하지만 전후에 등장한 너그러운 형태의 질서 또한 일종의 정치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외부 상황이 급변할 때 일본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종류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필요로 했던 정치 시스템은 권력에 도전하는 잠재 세력들을 필요에 따라 흡수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는 정치였다. 막강한 정부 부처들 사이에서 또는 그 부처들과 다른 세력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였다.
그리고 해외 국가들에게, 일본이 그들에게 친숙한 정당과 선거와 총리와 법원과 같은 제도를 통해 운영되는 나라라고 안심시켜줄 수 있는 정치였다.
이러한 정치 시스템을 1955년 체제‘라고 부른다.
- P425

자민당은 정책을 결정하지 않았다. 누군가 정책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일본 관료가 오를 수 있는 커리어의 정점인 각 부처 사무차관들의 일이었다. 자민당의 주요 임무는 방해가 될 만한 힘을 가진 모든 주요 이해관계자가 정책을 지지하도록 매수하는 것(자민당은 야쿠자는 물론이고 PTA,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주부들의 연합까지 사회의 모든 주요 그룹과어떤 식으로든 연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지배 엘리트층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완충 작용과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 P434

고이즈미의 연례 야스쿠니 참배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주변국들의 분노를 유발함으로써 얻는 실질적 이득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일본 정치라는 연극무대에서 상징이 샂는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 P482

무역 협의에 방해될까봐 또는 주변국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봐 일본을 위해 순국한 가미카제비행사와 같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못한다는 것은 많은 일본인에게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었다. ‘전범의 위패가 함께 있다고 하는 사실도대다수 일본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3장에서 보았듯이, 도쿄 전범재판은 ‘승자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행사했던 일로 여겨져 그 정당성을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일본인은 누가 전범으로 기소되고누가 기소되지 않았는가는 상당 부분 운의 좋고 나쁨의 문제였고, 실제로 얼마나 책임 있느냐보다는 누가 더 관료사회 내부의 정치에 능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 P483

그러나 아베가 총리로 등극하면서 우파들은 선을 넘고 말았다. 고이즈미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오히려 고이즈미 시절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잊고 만 것이다. 우파의 패권 장악이라는 늑대는 개혁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아베는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고이즈미 때에도 가벼운 립서비스에만 그쳤을 뿐인 일련의 어젠다를 현실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후 헌법의 개정, 사과를 모르는 강한 군대, 일본 주권 체제에서 황실의 중심적 위치 인정, 1930년대 일본의 행위가서양 제국주의 및 동아시아에 무력을 통해 강요된 해외 사상 사회주의,
자유주의)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었다는 견해의 보급이그것이다.
그러나 아베의 이런 어젠다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일본 국민의 대부분은 이 모든 것에 그저 당황했을 뿐이다. 그들의 삶, 그들의 고민과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였기 때문이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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