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 1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기획 / 북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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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e의 인기에 힘입어 EBS에서 역사e를 만들었다.

지식e만큼의 임펙트에는 조금 미치치 못하는듯 하지만, 자료로 쓰기좋아 관심있게 보고 있다.

결국 지식e와 같은 컨셉이다.

 

숨은 인물과 사건을 발굴하고, 뻔해 보이는 사건을 뒤집어보고, 낯설게 하고 그속에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 것

지식e나 역사e가 기여하는 바는 바로 이런 면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e나 역사e에 열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고....

 

역사e는 독립운동가 이회영으로 시작한다.

인상적인 시작이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예순 여섯 살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 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18 -19쪽)

 

 

조선의 유서깊은 양반가였으며 떵떵거리는 부자였던 이회영 일가는 일제에 의해 주권을 잃어버리자 집안의 재산을 정리해 간도 삼원보로 떠난다. 집안의 6형제가 함께 떠났으니 집안의 가풍을 짐작할만하다.

이 집안의 돈이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무수히 많은 독립군을 배출해냈으며 상해임시정부에 쓰이고.... 돈만이 아니다. 함께 간도로 떠난 6형제 중 해방 이후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건 다섯째였던 이시영 한 사람뿐이었다.

예순 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라......

얼마나 당당하고 오만한 자신감인가?

하지만 이회영이라면 수긍이 간다.

40대에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개화적인 양반에서, 계몽운동가로, 50대에 아나키스트로 자신의 사상을 새롭게 정립해나가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생을 바친 사람의 삶 자체가 답이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답이 될 수 있겠는가?

나이 50에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온몸을 바쳐 투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범인의 경지를 벗어나는 것이리라....

내 나이 60은?

음.... 생각하기 싫다......`

 

 

 

 

 이부자리 개기, 아침인사, 요강비우기, 집안청소....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며 익히는 바른 습관

 단정한 옷차림, 바른 몸가짐, 남을 대할 때의 예의범절... 할아버지를 보며 깨치는 '선비'의 덕목

 봇짐장수, 일가친척, 방랑객... 사랑채에 드나드는 사람들, 사랑채에 앉아 듣는 '세상 공부'

 ........

 할아버지가 손자를 직접 가르치는 최고의 교육법 '격대교육'

 

 

바쁜 부모를 대신해 세대를 건너뛰어 조부모를 통해 이루어지는 가정 교육.

16세기의 사대부 이문건은 손자를 기른 일종의 육아일기 <양이록>을 남긴다. 사화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하던 이문건이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손자를 기르면서 쓴 육아일기다.

손자는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일기의 마지막은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로 맺어진다. 대충 보니 이 때 손자가 딱 사춘기다. 부모 모두 잃고 혼자 남아 귀양살이 하는 할아버지 품에서 자란 손자의 사춘기가 얼마나 극심했을까? 근엄한 성인의 이미지 밖에 없는 율곡 이이도 사춘기때 새어머니와 맞지 않아 가출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닮는다. 아니 조선에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닮았을까?

이후 손자는 할아버지의 뜻대로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지만,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키고 그에 대한 상도 당연한 일이었다며 사양했단다.

결국 부모 또는 조부모의 삶이 자식의 본보기인 것이다.

아이들이 크면서 진짜 사는게 만만찮다. 잘 살아야 한다. 내 아이가 올바른 삶을 살게 하고싶다면.....

 

 

 

 나는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조선 비석을 발견했다.

 .........

 강제로 빼앗긴지 꼭 100년이 되던 해

 "남과 북은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제15차 남북장관급 회담 공동보도문)

2006년 북관대첩비는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오랫만에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당국 회담이 결국 무산되었다.
예상한바라 하더라도 안타까운건 어쩔수 없다.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공방전, 대화의 의지 자체가 없으면서 책임은 피하고 싶은 작태는 가소로울뿐이다.

 

1592년 임진왜란, 일본은 부산에 상륙한지 겨우 20일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60일만에 평양을 함락시킨다.

당시 서울까지 가는 길이 급하게 걸어가면 20일정도가 걸렸던 걸 감안하면 말이 안되는 속도다.

이러한 전세를 뒤집은 것은 이순신의 해전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다.

함경도로는 한번도 진 적이 없어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 2만 2천이 진격해온다.

의병장 정문부는 다른 의병부대와 곳곳에서 연합작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괴롭힌다.

이 책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 2만 2천 VS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 200 이라고 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하면 과장이다.

함경도 지역 곳곳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통틀어 북관대첩이라 하는데 2만2천대 200이라고 하면 마치 전면전을 벌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전면전은 불가하다. 정문부의 의병부대를 비롯한 여타 의병부대가 상황에 따라 연합해가며 기습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럼에도 가토 기요마사의 정규군을 맞아 싸워 결국 그들을 패퇴시키고 함경도를 수복했다는 것은 엄청난 공적임에 틀림이 없다.

 

바로 이 북관대첩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 북관대첩비, 정식명칭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이다.

그런데 이 비석이 1905년 러일전쟁 중 북상하던 한 일본장교에 의해 "이것은 일본역사의 수치다"라는 선언으로 강제로 떼어져 일본으로 건너가 결국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내팽개쳐지게 된 것이다.

 

1979년부터 한국정부는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일본에 요구하였으나 난항을 거듭하다가 2000년대 들어 남북공동외교활동에 의해 결국 2005년, 강제로 빼앗긴지 꼭 100년만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남북이 같이 함으로써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북관대첩비의 글을 읽는 날, 남북회담의 무산이 더욱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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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6-13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께 인사를 드린적이 있는 지 모르지만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넘 반가와요!!!!^^
이 책은 저도 세실님께 받아서 갖고 있는데 [린 인] 다 읽고 읽어야겠어요~~~.^^

바람돌이 2013-06-13 14: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시아님. 음... 저도 인사를 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시아님 서재 가서 해든이란 이름을 보니 분명 인사를 했던듯해요. ^^
닉네임이 원래 시아님이었나요????
하여튼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해요. ^^
 
<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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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여진 한 권의 역사르포!
1755년 11월 1일 기독교 최고의 축일 만성절 신앙심 돈독한 수많은 이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보던 시간 - 리스본에 대지진의 재앙이 일어난다.
(만성절이 뭔지 몰라서 찾아봤다. 켈트족의 새해 11월 1일에서 유래해 기독교에 흡수된 축일, 모든 성자들의 날이란다. 그 전날 10월 31일이 할로윈데이고...) 

<운명의 날>은 바로 이 날이 포르투갈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얘기한다.
역사에서 근대의 시작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사실 참 어려운 문제인데, 포르투갈은 이렇게 자연재해때문에 근대의 시작을 아주 명료하게 설정할 수 있다니... 그것도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 사실상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시대가 거슬러 올라갈수록 당연히 더 심할테고 때로 자연재해는 한 사회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완전히 바꿔놓기도 한다. 

포르투갈이란 나라는 오늘날 유럽내에서는 경제적으로는 뒤처진 편이다.
하지만 한 때는 이 나라도 엄청난 부를 누렸다 .
교과서에서 배웠던 항해왕자 엔리케의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 그리고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발견 등으로 인도항로를 가장 먼저 선점했던 국가이니 말이다.
당대 동양에서 생산되던 향료는 같은 무게의 금과 바꾸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수지가 맞는 장사였다.
거기다 신대륙 브라질에서 들어오던 금, 은까지.....
그렇다면 한때 서구유럽의 아시아, 아메리카 침략에 가장 첫 출발점에 서 있었던 이 나라가 이후 다른 유럽 나라들에 그니까 영국, 프랑스 등에 오히려 뒤처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나치게 많은 부당이익, 상업적 이익은 오히려 이 나라의 발목을 잡게 된다.
즉 다른 나라들이 후발주자로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산업혁명으로 자국 내의 산업을 발달시키고 신흥부르조아지를 성장시키며 근대사회를 향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을때 포르투갈은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책은 이러한 포르투갈의 역사를 아주 잘 정리해놓고 있다. 

그런 포르투갈에 근대국가를 향한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대지진이었다는 것은 역사의아이러니라 하겠다.
대지진 이후 망연자실한 왕실과 귀족들을 대신해 복구과정을 주도한 것은 재상으로 임명되었던 폼발 후작 - 카르발류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진으로 파괴된 리스본의 복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를 통해 구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특히 포르투갈을 중세에 머물게 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헌을 하고 있던 카톨릭세력을 제거한다.
그리고 노예제의 철페(식민지인 브라질은 당연히 제외다) 유대인이나 종교간 차별을 없애고 모든 포르투갈 백성에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한 마디로 근대 포르투갈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실행한 인물, 유럽의 최신 사상인 계몽사상을 포르투갈에 접목시켜 실현하고자 한 인물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저항세력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구귀족세력과 카톨릭세력의 반발이 얼마나 치열했겠는가?
그 반발에 대한 카르발류의 대응은 철저한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한 절대적인 탄압이다. 

여기서 카르발류의 모순점이 드러나게 된다.
계몽사상을 받아들이고 포르투갈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지만 그의 정치체제론은 절대군주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절대군주제를 통해 그의 이상을 이루고자 한 것.
근대사회는 일시적으로 절대군주제를 통과하지만 결국은 모순이 드러나고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사회는 그런 대립이 시민혁명을 통해 폭력적으로 해소되고 정리되게 된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그런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른 자연스런 근대로의 이행과정을 생략하고, 카르발류라고 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의해 강제 이행되고 있다.
결국 사회 내부에서 카르발류를 지지해줄 수 있는 확고한 기반세력이 부재하고, 따라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왕에게 전적으로 기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
결국 이런 상황은 왕의 죽음과 함께 카르발류의 전격적인 몰락과 구체제로의 너무나 쉬운 복귀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카르발류라는 이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책 저자에 의하면 그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대재앙으로부터 수도 리스본을 구하고 재건한 포르투갈의 영웅적인 인물로 기운듯하다.
그렇다면 그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카르발류가 저지른 수많은 정치적 보복과 음모들, 그리고 누구든 저항하는 자는 가리지 않고 국왕에 대한 반역으로 강력처단했던 공포정치는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중세에서 바로 근대를 강제 도입하고자 했던,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리라 확신했던데서 그는 그가 살았던 포르투갈이라는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가 뛰어난 정치인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한 시대의 영웅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을지는 사실 의문스러운 것은 이런 면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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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8-2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르발류에 대한 문제의식은 계몽적 전제군주 모두에 대한 문제의식이기도 합니다.매우 좋은 글인데 댓글이 하나도 없고 추천도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글 남깁니다.

바람돌이 2009-08-27 01:02   좋아요 0 | URL
근대를 지향했던 중세의 군주들, 결코 중세의 특권들을 놓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이들이죠.
매우 좋은 글이라고 노이에님이 말씀해주신 것만으로 저는 오늘 하루 뿌듯할걸요. ^^
 
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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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는 온갖 행사들로 시끌벅적했던게 생각난다.
그 최대 이벤트가 타임캡슐이었던가?
600년을 이어오는 수도라.... 만만치 않은 역사의 무게다.
하지만 오늘의 서울은 그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고 있을까?
가뭄에 콩나듯이 가는 서울이지만 온통 빌딩과 차도들로만 둘러싸인 궁궐이니 남대문 동대문이니 하는 것들이 600년 역사를 온전히 느끼게 하기는 힘들었다.
현대문명에 짓눌려 박제가 되어버린 과거라고나 할까? 

그래 600년 수도 서울이라고 한다면 이 정도 책은 지금보다도 훨씬 일찍 아주 옛적에 나와줬어야 했다. 이제야 나온 것이 안타깝고 안타까울뿐....
뭐라고 한 마디로 이 책을 정의하기는 상당히 난감하다.
제목 그대로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그리고 그 시공간을 살았던 사람들과 삶들, 삶의 조건들 찾아가기 정도? 아니면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근대가 어떻게 이식되고 뿌리내렸는가? 뭐 이런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까?  

책은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되던 순간,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찾는데서부터 시작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맥락만을 추적하지는 않는다.
도시의 역사를 쫒아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먼저 생각해봐야할게 결국 도시론이다.
어떤 지역 내지는 국가에서 도시와 농촌은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며 도시는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그리고 그 역할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가는가하는 물음말이다.
주변의 농촌을 소비함으로써만 성립될 수 있는 도시라는 존재는 그 출발부터 기생성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근대화의 역사는 그러한 기생성을 더욱 더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지방을 배제시키고 소외시키는 과정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서울민국이라고 부르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자조는 이런 맥락에서 발생할 터이다.  

애초에 계획도시로서 질서정연한 정비를 보였던 또는 보이고자 했던 서울이 전란으로 인해 파괴와 전란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인구, 그리고 풍수사상의 영향등으로 중구난방의 도시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렇지만 전근대의 이러한 변화는 또한 부자와 빈자가 일상적인 연대를 이룰 수 밖에 없는 도시구조를 낳았지만 이러한 연대는 근대를 거치고 난 현대에 이르러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부자와 빈자의 철저한 구별, 비단 부자뿐만이 아니라 아파트값 떨어진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아파트에 임대아파트 짓는걸 반대하는 주민들의 출현은 현대 도시의 비인간화가 어느정도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하겠다. 이런 연대의식이 사라진 도시는 대립의 현장일뿐 통합의 공간은 아니다. 

임진 병자 양난 이후 서울이라는 도시는 직업화 집단화된 거지들로 몸살을 앓는다. 이전 시대에도 분명 거지는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일시적이거나 극히 제한적인 상황이었음과 비교하면 새로운 현상이다. 흔히 우리는 거지를 가난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조선 후기 생산력이 회복되고 오히려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수의 거지가 산출되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거지란 가난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빈부격차의 확대에서 오는 것임을 역사적 고증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우리 사회에 노숙자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하여 눈여겨볼 대목이다.
17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늘어나는 서울의 유입인구, 특히 지방출신의 지배층으로의 편입을 막기위한 원천적인 봉쇄가 이루어진다. 과거에서 사륙변려체라고 하는 새로운 문체를 요구하게 되고 이것은 서울지배층의 전유물이 되는 것. 이래서는 지방출신은 어디 과거를 통한 한자리 얻기가 가능하기나 하겠나말이다. 다산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절대 서울을 떠나지 말것을 당부하는 논리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일게다. 서울공화국의 탄생은 이 때부터 시작된것이겠다.  

신분제가 해체되고 상인이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하면서 등장하는 언어의 변화, 이른바 깝쇼체라고 하는 서울방언- 요즘은 어서옵쇼, 어디로 모실깝쇼 등등- 의 등장. 전차, 시계와 함께 들어온 자본주의적 시간관념과 생활방식의 추적,  남대문 동대문 시장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시장의 형성과정, 그리고 근대화의 물결속에서 무수히 만들어지는 새로운 언어들의 등장과 유래까지 무궁무진한 읽을거리들을 담고있다. 그리고 그것이 한때의 읽을거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 이 책의 가치가 더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서울의 지리를 좀 더 알았다면 아마도 이 책읽기가 더 즐거울수도 있었을터이지만 그렇다고 서울로 이사를 갈수도 가고싶은 생각도 없는건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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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표정있는 역사 3
이한수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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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의 <표정있는 역사>시리즈 중 1권
여태까지 이 시리즈는 <조선최대갑부 역관>과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그리고 이 책을 봤는데 꽤 괜찮다.
편하게 쉽게 읽기에 적당한 깊이와 분량, 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주제들의 선택
책 하나하나로 따진다면 그렇게 훌륭하거나 뛰어난 책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빠진 부분들을 콕콕 집어내는 주제들, 한마디로  출판사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책이랄까?
이 외에도 첩자이야기나 조선의 재산상속,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등이 더 나와 있는데 챙겨보고 싶다.  (아 전에 조선의 재산상속이 표절논란에 말렸던게 생각난다. 그래서 절판이로구나....ㅠ.ㅠ)

고려시대 중 근 100년간은 거의 몽고의 식민지였다고 해도 좋은 시절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왕실은 유지했다고 뻔뻔스럽게 우리 민족의 자주성 운운하는건 정말 아니올시다다.
왕실이름만 유지했지 우리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었다고....
백성들은 이중의 고통 - 왕실과 권문세족들의 착취에 대해 몽고의 착취까지 부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 온 천지에서 피맺힌 고통의 울음이 진동을 했거늘....
고려가 그나마 왕실의 이름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건 백성들의 힘이었다. 지배층이었던 무신정권과 왕실이 강화도에서 떵떵거리며 살고있을때 직접 피를 흘리고 고통받고 싸웠던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민중들이었다.
결국 고려는 몽고에 항복했고 운이 좋아서 그 시기가 쿠빌라이 칸이 친족을 죽이고 황제위에 오르는 쿠데타의 시기와 겹친다. 고려의 항복을 천명으로 선전하며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인하는데 이용할 수 있었던 쿠빌라이칸은 기분좋게 고려왕실의 독립을 보장해준 것. 이 과정에서 고려 왕실의 외교력도 한 몫한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몽고 내부의 정치변혁의 시기에 쿠빌라이의 손을 들어준듯한데..... 

그럼으로써 고려는 이제 몽고의 속국이 되고 몽고의 부마국이 된다. 사실상 이것은 몽고라는 대제국속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쿠빌라이 칸의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확연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점령자의 딸로서, 새로운 지배자로서 이 땅에 온 몽고의 공주들은 행복했을까?
기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공민왕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았던 노국대장공주 정도인데 그나마 행복했던건 그녀 뿐인듯하다.
아니 왕의 사랑 대신 권력의 힘을 맘껏 누리며 고려를 쥐고 흔들었던 제국대장 공주도 행복했을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다른 공주들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머나 먼 이국땅에 와서 남편의 사랑이나 정은 거의 모른 채 권력을 추구하거나 질투의 화신이 되어 온갖 이들을 괴롭히고 죽이거나 또는 비밀리에 맞아죽거나....
정복자의 딸들조차도 여자라는 운명앞에서는 그리 순탄하지 않은 것을 보니 한편으로 애틋하기도 하다.  

이런 공주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원 내부의 권력변동이 그대로 고려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과정을 쫒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표정있는 역사시리즈 이 다음엔 고려 공녀들의 이야기도 나왔으면 싶다.
늘 하는 기황후 얘기만 말고 끌려갔던 수많은 평범한 여인들의 이야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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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1-1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의 기획력을 돋보이나 별로 만족스럽지 않으셨던 책인가요? ^^

바람돌이 2009-01-19 22:17   좋아요 0 | URL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쉽게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 하지만 저자의 일관된 관점이나 새로운 해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여기까지에요. ^^
 
박은봉 이광희 선생님의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 10살부터 읽는 어린이 교양 역사
박은봉 외 지음, 김경옥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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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역사책은 생각보다 참 많다.
그런데 종류를 나눠보면 두가지로 나눌수도 있다.
제대로 썼으나 재미는 없는 역사책, 그리고 재밌지만 허황된 역사책(아니 야담류라고 해야할까?)
제대로 쓰면서 아이들이 쉽고 재밌게 볼수있는 그런 역사책이란게 참 말이 쉽지 어디 정말 쉬운 일일까?
박은봉선생은 이런 면에서 어린이 역사책의 새로운 지평을 연 분이라 할만하다.
그런 박은봉선생이 이광희, 김경옥이라는 두 사람을 만나 작품을 만들어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진실 내지는 상식이라고 믿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난한 평민 바보 온달이 울보공주의 이야기, 해골물 마신 원효,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는 최영장군,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감춰왔다는 문익점.......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컨셉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컨셉이 또한 평범하게 서술되어졌다면 이 책의 가치는 반으로 줄어들었을터이다.
컨셉의 참신성과 함께 박은봉선생의 정확한 역사서술, 이광희 선생의 아이들의 눈높이에 딱 맞춘 대화체의 서술, 그리고 김경옥선생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만화들과 삽화, 자료까지.... 
어린이 역사 책이 갖추어야 할 3박자를 모두 제대로 갖추고 있는 모범이라 할만하겠다.

그런데 중간 중간 맘에 걸렸던 점들이 꽤 있었다.
어른들이 볼 책이라면 이건 이 사람의 관점이야 하면서 별 생각없이 넘어갔겠지만 이 책의 독자는 대부분이 어린이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영장군>편에서 고려뉴스라는 꼭지를 두며 최영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요동정벌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다루는 부분은 지나치게 최영에 기울어져 서술되었다. 당시에 있어서 요동정벌이 최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또한 외교로 풀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외교적 노력도 없이 바로 전쟁으로 돌입하는 것이 위정자로서 올바른 판단인가 하는 문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는 직접적 언급은 아니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요동정벌을 명했던 최영의 손을 거의 들어주고 있다. 그 원대한 꿈이 이성계때문에 깨졌다는 식으로.... 적어도 나는 고대의 영토확장이라고 해서 무조건 위대한 우리민족식의 서술을 상당히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쪽이다. 그런 식의 역사서술이 가져오는 폐해쪽이 요즘 너무 크기때문에....
그리고 뭐 웃자고 하는 얘기일수도 있지만 최영이 아버지의 유언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를 지키고 살 수 있었던건 권문세족이었던 최영네 집안에 황금이 많아서가 아니었을까? 청렴함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잘 살았던 것 같은데말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편>
살수대첩의 명성덕분에 귀주대첩이 강물을 이용한 승리였다고 흔히 오해되는 문제를 짚어놨다. 그와 더불어 거란과의 대립과정, 전투과정을 재밌게 서술해 놓은 점도 눈에 띈다. 그런데 과연 귀주대첩이 강물을 이용한 것이었나 아닌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귀주대첩에 대해 흔히 알려져있는 오류 중의 또 하나가 살수대첩이나 한산도대첩처럼 귀주대첩 역시 적은 수의 우리 군사가 많은 수의 거란군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10만 거란군을 맞이했던 것은 소수의 고려군이 아니라 거란군의 4배에 달하는 40만대군의 고려군이었다. 나는 거란대첩의 역사적 평가가 바로 이 부분에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려는 1,2차 침입에서 거란에 대응하기 힘들었을때 어떻게든 외교적 노력을 다하여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그리고 시간을 번 것. 그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다시 있을 거란의 침입에 대한 대비를 확실하게 했던게 바로 귀주대첩의 결과다.
알다시피 귀주대첩은 거란의 3차침입이었다. 이 3차침입이 있기까지 고려가 아무 준비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고려는 망해도 싼 나라가 아니었을까 말이다.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국가와 위정자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아이들과 공감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바로 이 귀주대첩이 아닐까 싶은데 이것은 귀주대첩이 강을 배경으로 싸웠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졌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완전히 비켜가 버린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문익점편>
이 편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역사공부라는 것이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새로운 지식을 추가하는데 거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과 사고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했으면 하는 것이다.
전체 꼭지를 풀어나가기 전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어떨까?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서 왔다는 데 말야. 근데 참 이상하지? 문익점이 목화씨를 숨겨왔다는 것은 원나라가 목화씨가 나라 밖으로 나가는 걸  금지했다는 말이잖아? 근데 왜 그랬을까? 목화씨가 무슨 군사기밀도 아니고 비밀 무기도 아닐텐데 말야. 게다가 당시에 원나라가 우리나라에 목화씨로 만든 솜을 수출했을리도 없고...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무슨 비밀이 있을까? 아니면 혹시 문익점이 목화씨를 숨겨왔다는 것은 거짓말? "
뭐 거칠긴 하지만 이런 질문 하나 정도를 서두에 던져준다면 책을 읽는 어린이들이나 아니면 같이 읽어주는 어른들이 한템포 쉬면서 어린이들의 생각을 한 번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질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잠시의 생각이겠지만 이런 의문과 고민의 여지를 주는 것, 어린이 책이 신경쓰고 갖추어야 할 점이 아닐까 싶어 얘기해본다.  

간단한 의문점 하나
책의 102쪽 - <고려 때는 소나 돼지를 잡는 사람을 양수척 또는 화척이라고 했어요. 양수척은 도살업 말고도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를 만들거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팔며 살아가기도 했는데,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화척이나 재인으로 불리지요.> 양수척이 화척으로 불리운건 맞는데 재인은 흔히 광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양수척들의 일부가 생계를 위해 광대업을 겸업하는 경우도 있었겠고, 그래서 양수척, 화척, 재인이 불명확하게 섞여서 쓰이는 경우가 일정 시기에 있었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뒤쪽으로 오면 보통 재인은 광대로 거의 고정되어서 쓰이는데 이를 양수척과 동일업으로 놔버리는건 혼란의 여지가 있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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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8-12-3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책과함께'에서 드디어 어린이 역사책이 나왔군요!
전에 신간정보에서 박은봉님의 사진과 함께 이 책이 떴을 때 빌려보려고 맘 먹었는데, 요즘 제 사는 것이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었네요. 다음 도서관 가는 걸음에는 잊지 않고 꼭 빌려 볼게요^^

강감찬의 귀주대첩편에 대한 바람돌이님의 탁월한 분석과 설명 잘 들었습니다.
역시 바람돌이님~~^^
바람돌이님도 언젠가 예린이와 해아를 위해 어린이가 보는 역사책 한 권 지어보는 건 어떠실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드네요. 필요하다면 어린이 눈높이에서 조잘거리는 건 저도 도와드릴 수 있는데..^^ 저는 우리애들한테 동화 한 권 써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단편 두어 편 쓴 것 외엔 아무 실적없이 작은 놈 영이가 내년에 중딩이 된다네요~에혀..


바람돌이 2009-01-02 11:05   좋아요 0 | URL
설마요. 책을 읽고 뭐라 주절대는것까지가 제 한계인걸요. 세상의 나무들을 쓸데없는 책 한권을 위해서 낭비할 수는 없어요.
저는 오히려 진주님의 글솜씨라면 가능할 듯한데요.... 혹시 쓰신다면 제가 도움드릴 수 있는길츨 찾아주세요. ㅎㅎ
글구 세월 정말 빠르네요. 윤이 중학교 들어간다고 한게 엊그제 같은데 영이도 이제 중학교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