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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1919 - 신문기자, 100년 전으로 가다
오승훈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20년 4월
평점 :
우리는 3.1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까요?
예전에 삼일절을 삼점일절이라고 읽는 아이들 때문에 온 나라가 한번 떠들석한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하고도 가슴아픈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명칭말고 아는 것을 얘기해보자면 3분정도를 채우기도 쉽지는 않을듯 보입니다.
여기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삼일운동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실제 계획과 진행과정, 결과, 이후 역사적 의미까지를 씨줄로 하고,
1919년의 한국 민중의 삶의 형태와 다른 나라들의 상황까지를 날줄로 엮어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판을 짜보았습니다.
우리가 3.1운동에 알아야할 거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네요.
1919년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지 10년째에 들어서던 해입니다.
이 해의 시작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 전해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처리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지요.
물론 이건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을 분해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겁니다.
오죽하면 3.1운동 와중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직접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고 있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을까요.
흔히 3.1운동이라는 명칭 때문에 사람들은 이 거대한 운동이 3월 1일 하루 또는 3월 초 며칠간에 걸친 만세운동이었다고 오해들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919년 1월 부터 국내, 중국 상해, 만주, 연해주, 일본, 미국 등 우리 민족이 있는 곳이면 모든 곳에서 독립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민족운동가들은 긴박하게 모이고 계획하고 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민족운동가들이 전국으로 비밀리에 나른 독립선언문과 서울 학교의 휴교령으로 귀향하던 학생들을 따라 지방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실제로 3.1운동은 3월과 4월 2개월에 걸친 거대한 독립만세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군중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 되었다 믿고 만세를 부른다"고 하였고, 또 일부는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니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279쪽)
전북 이리 지역의 교사였던 문용기 선생은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의 칼에 양팔이 잘리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그 자리에서 순국하십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리 절박하게 한 것일까요?
또 무엇이 그들을 그리 용감하게 만든 것일까요?
식민지에서 산다는 것은 그저 나라의 주인이 바뀐다는 형식이 아닐 것입니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 보면 우리 나라 곡창지대인 전북지역에서 추수 직후에 농민들이 하루에 1끼도 제대로 못먹어 굶어죽는 이가 속출한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일본의 쌀 수탈, 태형제, 임금차별 등등 민중들의 생활 곳곳의 변화가 나오네요.
식민지 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생존의 문제였던 것일겁니다.
나와 나의 가족의 생존이 언제 어디서나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구현된다는 것에서 절망이 기본 바탕에 깔렸을 것이고, 그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는데 아마도 3.1운동의 거대함이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을 이야기하고 유관순열사와 같은 학생들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실제 3.1운동에서 일제에 체포된 사람의 반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 도시빈민들이 있었습니다.
3.1운동은 정말 특이한 운동입니다.
초기에 지식인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계획을 했지만, 그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일본 경찰에 스스로 전화해 체포되어버린 이후 이 운동에는 지도 조직도 지도 세력도 없습니다.
만세운동의 전국화에 큰 공헌을 한 학생들도 어떤 특별한 조직을 중심으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조직도 없고, 지도세력도 없는 운동이 2달간을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세계의 어떤 운동도 이렇게 진행된 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 식민지 한국인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감히 짐작해봅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민중대표 48인이 소개됩니다.
소중한 자료이고, 감사한 기획입니다.
그분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보며 그 때 그분들의 마음을 가늠해보았습니다.
3.1운동 이후 우리의 독립운동에 드디어 대중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생깁니다.
이전의 독립운동이 명망가 중심을 벗어나지 못했던데 대해 처절한 반성이 생길 수 밖에요.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민중,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의 민중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거지요.
또한 3.1운동은 그 자체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들어냅니다.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내 정치경력은 3·1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를 통해 세상에 털어놓은 회고담 <아리랑>에서 혁명가 김산은 밝혔다. 정확히 오늘로부터 1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기미년 3월 1일의 싸움이 당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집약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말이다.
- P351
이전에 김학철 선생님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속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3.1운동 때 선생은 겨우 10대의 중학생이었는데 그 길로 어머님이 숨겨두었던 비상금을 훔쳐서 상해로 떠납니다.
그것이 독립운동 투신의 길이었고, 그 분이 고향을 다시 밟는데는 해방이 되고도 40년이 더 흘러야 했지요.
3.1운동을 직접적으로 겪었던 간접적으로 들었던 이후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3.1운동은 그 자체로 정신적 지주였고, 고난을 이겨내는 근원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보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끝까지 싸우게 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존경스럽지만 나라면 그 고통의 세월을 이겨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궁금증입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3.1운동의 기억이 그분들이 그 세월을 이겨내는 큰 힘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인물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3월 1일의 거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노력하는지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또한 역사적 인물들의 여러 면면을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 선생은 30대 초반이었던 그 때에서 참 스마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력거군의 호객행위에 짜증을 내는 조선인을 향해 말끔한 모습으로 "상해에서 모든 조선인은 자신이 외교관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라고 일갈하는 그분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이는 스마트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3.1운동의 준비부분에서 의외였던 인물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인 최린이죠. 나혜석과의 연애로 더 유명한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최린이 보여주는 협상과 기획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준비의 반 이상이 최린의 노력과 능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요.
어쩌면 그의 탁월한 현실감각이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변절입니다.
그나마 해방이후 반민특위 재판에서 최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족 대표에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반민특위에 회부된 친일파 중에서 유일하게 반성한 사람이 최린입니다.
3.1운동은 여성의 역할이 정말 컸던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 중 어떤 사람보다도 3.1운동 그자체라고 할만한 분이 있으니 김마리아선생입니다.
국외에서 3·1운동을 촉발시키고, 운동이 벌어지자 국내에들어와 이를 추동하고, 운동이 지나간 뒤에는 그 가치를 이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김마리아는 남녀를 넘어 3·1운동의 정신에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 P354
아 그리고 이승만을 빼놓을 수 없네요.
이 시기에조차 이승만은 기회주의적입니다. 대학동문인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얘기하자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려서(실제로는 만남조차 거부당합니다.), 조선이 독립할 길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 뿐이라고 헛소리를 합니다. 나아가서는 국제연맹(실제로는 미국이죠)이 일본 대신 조선을 통치해달라는 위임통치를 건의하기까지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을 가리켜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며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일갈합니다.
이승만은 한번도 제대로 된 독립운동가였던 적도 없고, 해방 이후에도 무능하고 잔인한 야심가였을 뿐입니다.
그 무능한 야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는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 뿐입니다.
그런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드는 이들이, 이번 광복절에 친일파 처단을 얘기하니 국론분열이라고 떠드는 이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아직도 3.1운동을 기억하고 독립운동을 되새기며, 친일파의 역사적 처단을 되새기고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앞에 지금도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