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는 산 자들의 나라였다. 초나라에서 죽음과 죽은 자들은 금세 잊혔다. 죽은 자들은 마을에서 먼 강가나 초원의 먼 가장자리에 묻었다. 묻은 자리를 꾸미지 않고 흙이 들뜬 자리에풀을 옮겨 심고 가랑잎을 덮어서, 무덤이 늘어나도 초원은 평평했고 별일 없어 보였다. 죽은 자를 묻는 일도 별것이 없었다. 죽은 자들을 벌거벗기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를 벌려서햇볕에 말렸다가 들것에 신고 초원으로 갔다. 가죽옷을 벗기고 햇볕을 쬐어주는 가벼움은 죽음이 가져오는 사치였다. 사체를 실어낼 때 촌장이 대열을 인솔했고, 그 앞에서 수탉이높이 울어서 죽은 자의 퇴거를 나하에 고했다. 선왕들의 정벌과 치적의 일부가 후대에 구전될 뿐, 초나라 사람들은 죽은자의 살았을 적 일을 입에 담지 않았고, 죽은 자를 위해 돌을쌓지 않았고, 죽어서 땅에 묻히는 일을 슬퍼하지 않았다. 축음은 산 자의 마을에 얼씬댈 수 없었다.
- P15

모든 휘두름은 닥쳐오는 휘두름 앞에서 덧없다. 수와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수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어긋난다. 모든 공과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 그러므로 공에서 수로,
수에서 공으로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엎어지고 뒤집히는 틈새를 사람의 말로는 삶이라고 부른다.
고 시원기』에 적혀 있는데, 수네 공이네 죽음이네 삶이네 하는 언설들은 훨씬 게을러진 후세에 기록된 것이다. - P23

산맥 위로 초승달이 오르면, 말 무리는 달 쪽으로 달려갔다. 밤은 파랬고, 신생(新生)하는 달의 풋내가 초원에 가득 찼다. 말들은 젖은 콧구멍을 벌름거려서 달 냄새를 빨아들였고,
초승달은 말의 힘과 넋을 달 쪽으로 끌어당겼다. 초승달이 뜨면 젊은 수말들은 몸을 떨면서 정액을 흘렸다.
- P48

추는 오리나무 밑동에 말고삐를 묶었다. 추가 말의 엉덩이를 두드리자 말은 무릎을 꿇었다. 추가 칼을 뽑았다. 백산 쪽 하늘에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총총은 고개를 들어서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총총의 이마에박힌 초승달 무늬가 하늘의 초승달을 향했다.
추는 칼로 총총의 목을 내리쳤다. 칼 지나간 자리에서 피가솟구쳤다. 총총은 쓰러져서 네 다리로 허공을 긁었다. 총총의머리는 세 번 칼을 받고서 떨어져 나갔다. 추는 웅덩이 물에칼을 씻었다.
- P63

춘분날 열병식에서 토하가 왕자 표를 태우고 목왕 앞에 나갔을 때 왕은, 말을 타고 달리는 자는 세상을 안다. 세상은 넓고 세상은 좁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좁아서 멀리 달려가면세상은 넓어지고, 거기가 또 좁아서 더 멀리 달려간다. 말에올라타면 비로소 세상이 보이는데, 세상의 끝은 보이지 않고출발한 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 P82

금칠로 바다의 저녁 빛을 끌어들여 어둠을 휘젓는 소행을목왕은 추하게 여겼다. 저녁이 어둡지 않으면 저녁이 아니고들뜬 빛에 별들이 주눅 들고 풀과 말의 잠이 어수선해서 초원은 무너질 것이었다. 목왕은 초원의 어스름 속에 번뜩이는 빛을 더럽게 여겼다. 목왕은 여생의 짧음을 한탄했다.
- P86

서물은 전하지 않지만 그 문장을 읽은 자들의 기억의 파편몇 개가 후세에 전한다. 「토만평양육서」의 골격은 나하를 야만의 남진(南進)을 막아주는 은혜의 강물로 신성시하면서, 나하를 또한 세상을 둘로 갈라놓은 단절의 강물이었다고 쓰고,
이제 단의 상서로운 힘이 산하에 가득 찼으니 물 건너 북쪽에서 삶을 땅 위에 앉히지 못하고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 금수 축생으로 떠도는 무리를 무로 평정하고 문으로 쓰다듬어서 왕의 은혜로 목욕시켜 새롭게 태어나게 하니, 나하는 비로소 가지런한 세상의 줌심을 흐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언사가 낡았고, 옛글의 조각을 끌어모아서 꿰맨 자리가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꿰맨 솔기가 터져서 너덜거렸다. - P96

기록들은 쓴 자들의 마음에 쏠려서 허무했고, 후세에 쓴 글들은 서로 부딪쳐서 옮길 만한 문장이 없었으나, 이야기들은팔풍원의 꽃씨처럼 바람에 날려서 초원과 산맥에 흩어졌다. 홀어진 자리에서 돋아나고 퍼져 나가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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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작가의 책이 새로 나왔다. 책 뒷날개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글에 대한 소개를 이렇게 정확하게 하다니.... 역시 김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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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안나 씨.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
"말했잖은가. 기다리고 있는 걸세.
안나의 시선이 창밖의 우주를 향했다.
"언젠가는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지. 언젠가는 이곳에서 우주선이 출항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슬렌포니아 근처의 웜홀통로가 열리지 않을까………. 자네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붙잡지 못해 아쉬운 기회비용이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아니라네."
- P177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P181

"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근데 막상사면 아까워서 한 번도 안 뿌려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 P205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
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 P264

가윤은 이 우주에 와야만 했다. 이 우주를 보고 싶었다. 가윤은 조망대에 서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까지 천천히 우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젠가 자신의 우주 영웅을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우주저편의 풍경이 꽤 멋졌다고 말해줄 것이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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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평생 동안 유리를 수집했다. 할머니의 서재를 채우는 유리 수집품은 무척 다양했다. 유리로 만든 공예품에서 프리즘, 렌즈, 거울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는 그 유리들로 책이나 그림을 들여다보기도하고, 손전등을 그 위에 비추기도 했다. 유리를 모으는 이유를 할머니가 직접 말해준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해보곤 했다. 빛을 모으고, 분리하고, 보통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게 하는 도구, 할머니가 행성에 머물며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들은 아마 그런 도구들이었을 것이다.
- P79

- 잘 자.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예전에는 몰랐다.
- P82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분석할 것이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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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 P19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 P52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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