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 P44

한영진은 그걸 두번 세번 읽은 뒤에야 자기가 불신한 것이 외국인이나 그의 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외국인, 그는 불순한 의도를 숨기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의도 같은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였어, 하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내가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불신한 건 그 외국인이나 그의 말이아니고 나였어… 네가 그 정도로 매력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김원상의 생각인 것 같았고 한영진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것 같았다. 더러운 거짓말.  - P53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바뀐 것 아니냐고 다른 사람의 아기가 아니냐고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 P73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를 유심히 보고 싶은마음, 다음 표정과 다음 행동을 신기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 찡그린 얼굴을 가엾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있는 마음, 관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인내심…… 모든 게 그 간격 이후에야 왔다.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한영진은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첫번째보다는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지금은 좋아했다. 이순일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한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 P75

망실된 그들의 이름은 이순일의 삶이 끝날 때 비로소 완전한 망이 될 것이다. 이순일이그 문서를 닫은 사람이었다. 이순일은 거기 적힌 이름들이 겪은 일을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로든 기록으로든 사람은 무언가를세상에 남길 수 있고, 남기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 P133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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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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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났다.

저 작은 여인 강주룡이 앉은 지붕 바로 옆은 10여미터 높이의 축대가 쌓여있다.

그 아찔한 곳에서 강주룡은 9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우리는 마흔아홉 우리 파업단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네다. 이거이 결국에는 피양 이천삼백 고무 직공 전체의 임금 감하를 불러올 원인이되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는 것입네다.
이천삼백 우리 동지의 살이 깎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 죽는거이 아깝겠습네까? 내래 배워 아는 것 중 으뜸 되는 지식은, 대중을 위하여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거입네다. 하야서 내래 죽음을각오하고 이 지붕 우에 올라왔습네다. 평원 고무 공장주가 이 앞에 와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 전에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은 없습네다. 끝내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는다면 내 고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입네다.
기러니 여러분, 구태여 날 예서 강제로 끌어 내릴 생각은 마시라요. 뉘기든 이 지붕 우에 사닥다리를 갖다 대기만 하면 내래 즉시 몸 던져 죽을 게입네다.    - P241

 

 

저 지붕위에 오도마니 앉은 그녀의 모습 어디에서도 이런 결기와 용기를 찾아볼 수 없어서 더 슬펐다.

그 시절 많은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힘들고 어렵게 가정에서 사회에서 온갖 차별과 무시와 억압을 그저 감내하면서 살았을 것 같은, 식민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라면 지나가는 사람 1, 2정도로 나올법한 그녀의 모습.

어쩌면 사진이 좀 더 선명해서 그녀의 눈빛과 꽉 다문 입술이 좀 더 정확하게 보이고 투사처럼 보였다면 나의 애잔함이 덜했을려나?

 

역사 기록이란 참으로 냉정해서 항상 중요인물과 부차적인 인물을 가른다.

심지어 한국사회처럼 이데올로기의 우편향이 심한 경우는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 심각하게 역사속 인물들을 잘라낸다.

불과 며칠 전에도 군산에서는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벌였다.

강주룡의 후예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체공남으로 체공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렸던 딸과 비행기를 타면서 "얘 너 나중에 스튜어디스가 되는 건 어때?"라고 그냥 질문했더니 딸 대답이 "엄마, 나는 하늘도 바다도 다 싫어. 무서워. 나는 땅에서 일할거야"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것이었는데, 어린 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인간은 높은 곳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구나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본능적인 공포를 견디며 어딘가를 오르는 이의 마음은 절망의 끝에 아 여기밖에 없구나 바로 그것일게다.

그 마음이 일제시대의 강주룡이나 오늘의 노동자나 무엇이 다를까.

 

저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의 그 절박한 마음과 삶이 조금이라도 알려졌으면 했었다.

그 바램을 이 책이 이루어준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서 이 책은 고맙고 또 고맙다.

 

오도마니 앉은 강주룡이란 여성이 씩씩하게 사랑하고, 싸우고,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있어서 참 다행이다.

당차게 "내처 한마디 덧붙이자면 여러분은 그네들의 사상이 어떤지궁금해본 적두 없을 거입네다. 내심 아녀자의 무학무식이 당연하구, 여러분이 공산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거이니 부인도 도매금으루 공산 부인인 거이 당연하다 여기시디요. 이 말이 옳지 않다면시비 가려주시라요."((202페이지) 일갈 할 수 있는 여성 강주룡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발소리가 온다. 발소리를 들으면 주룡은 곧장 몸을 일으키곤 했다. 등을 곧추세운 채로 발소리를 맞는 것이야말로 굶주린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가장 나중 된 저항의 몸짓이라고 여겼다."(8페이지)

끝끝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꺾지 않는 그녀를 되살릴 수 있어 참으로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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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1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사두고 아직 안읽은 책들중 한 권인데 곧 읽어야겠어요!! 불끈!!

바람돌이 2020-10-12 10:27   좋아요 0 | URL
분량이 그리 많지 않고 가독성도 좋아 읽는데 시간은 얼마 안걸려요. 항상 불끈하지만 우리가 읽는 속도보다 보고싶은 책이 더 빨리 늘어난다는게 문제예요. ㅎㅎ
 

오래 주렸다.
씹어서 연하게 만든 것이 목구멍을 지나가는 느낌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침만큼은 아직 나지만 넘어가지 않고 입술 양옆에 고이기만 한다. 목구멍이 거칠어져 일부러 마른침을 삼켜보려 할 때마다 부대끼고 거슬린다. 주룡은 나무를 떠올린다. 손을 넣어 만져볼 수 있다면, 우선 식도를 지나갈 때 죽은 나무의 좁은 옹이구멍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듯한 통증을 느낄 것이고, 내장들은 손이 스치는 대로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이다. 그대로 뒷구멍까지 손을 밀어 넣어 뽑고 어깨를 구겨 넣고, 머리도, 나머지 한 팔도넣으면..
배가 부르겠지. 나는 뒤집히겠지. 그런 상상을 하는 주룡의 얼굴에 희박한 웃음이 돈다. 나를 삼켜서 뒤집어진 나는 또 배가 비겠지.  - P7

발소리가 온다.
발소리를 들으면 주룡은 곧장 몸을 일으키곤 했다. 등을 곧추세운 채로 발소리를 맞는 것이야말로 굶주린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가장 나중 된 저항의 몸짓이라고 여겼다.  - P8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네다. 내 손으로, 어서 그래하고 싶었습네다. 동무들하고 약조한 바도 약조한 바이지만은,
- P36

내 모르갔습네다, 악인이란 거이 수차례 들었지마는 눈앞에 있는사람을 내 손으루 쏘자니 가슴이 떨려 내가 더 죽을 것만 같았시요..
광운은 잠자코 주룡의 말을 들어준다.
영감이 총 맞구는 오짐을 지리더이요. 맞기 직전에 지린 거인가맞는 순간에 지린 거인가는 모르갔습네다. 다만 아, 요거이 사람이고나, 요괴 귀신 도까비가 아인 사람이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네다. 요전 날 나와 같이 말입네다.
- P72

소위 구여성 차림 그대로 카페에 앉아 있자면 종종 여급들이 저를 본체만체하거나 대놓고 괄시를 하는 것을 느낀다. 저보다 늦게들어온 사람들의 주문을 먼저 받거나 주문한 음료를 한참 만에야생각났다는 듯이 갖다주거나 하는 식이다. 그 애들은 돈을 얼마나벌까. 나도 여급이나 해볼 것을 그랬나. 양장 맞출 날은 요원하니 나도 머리부터 산뜻하니 단발로 잘라볼까. 머리가 단발이면 옷이야어떻든 모단 껄 시늉은 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
- P133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것은 아니다.
자기가 모단 껄이 아니라는 것, 모단 껄 되고 싶은 심정이 언감생심으로 보이리란 사실은 주룡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언제나 그것에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으니 도무지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장 때문은 아니다.
반장 같은 것은 모단 껄 되기에 요만큼도 방해가 될 수 없다.
구남성의 박해를 받았으니 이는 도리어 모단 껄 되기의 제일보에진입한 것이다.
주룡은 그런 생각으로 남은 업무를 버티고, 기어이 집에 가서 울음을 터뜨린다.
- P140

간도에 갈 여비만 모으면 그만두려던 공장 일을 여태 하고 있는것도 평양에 계속 머무르게 된 것도 이런 생각과 멀지 않으리라.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주룡은 평생 처음으로 제가 고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을지 옷을 벗고 머리를 풀지를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부모를 따라서 이주하고, 시집을 가래서 가고, 서방이 독립군을 한대서 따라가고, 그런 식으로 살아온 주룡에게는 자기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저 자신이 정하는 경험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다. 고무 공장 직공이 되는 것 말고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일말 서러운 일일지언정.
- P153

조합원 교육에서 배울 적에는 많아야 예순 명이 잘 모르고 웅얼웅얼 입속말로 부르던 노래를 이제 수백 명이 다 외워서 부르니 절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입을 모아 같은노랫말을 부른다는 것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만은 한뜻이 된다는것이 벅차고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국제가는 조선만이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만은 작은 나라의 작은 공장의 보잘것없는 여자 직공 하나가 아니라, 세계 모든 노동자와 어깨동무를 한,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평등한 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실감이 든다.
다음 노래는 고무 공장 큰아기다. 간혹 국제가>를 다 외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라도 고무 공장 큰아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평양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라도 다 부르는 노래다.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 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 P183

내처 한마디 덧붙이자면 여러분은 그네들의 사상이 어떤지궁금해본 적두 없을 거입네다. 내심 아녀자의 무학무식이 당연하구,
여러분이 공산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거이니 부인도 도매금으루 공산 부인인 거이 당연하다 여기시디요. 이 말이 옳지 않다면시비 가려주시라요. 틀렸다 하신들 여러분이 부인에겐 이런 배움의기회를 주지 않고 혼차서 예 와 있는 것은 변하지 않습네다. 부인들께선 아일 적부터 배운 법도대루 남편에게 순종하여 집을 지키고있는 거이 아닙네까.
- P202

우리는 마흔아홉 우리 파업단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네다. 이거이 결국에는 피양 이천삼백 고무 직공 전체의 임금 감하를 불러올 원인이되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는 것입네다.
이천삼백 우리 동지의 살이 깎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 죽는 - P240

거이 아깝겠습네까? 내래 배워 아는 것 중 으뜸 되는 지식은, 대중을 위하여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거입네다. 하야서 내래 죽음을각오하고 이 지붕 우에 올라왔습네다. 평원 고무 공장주가 이 앞에 와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 전에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은 없습네다. 끝내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는다면 내 고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입네다.
기러니 여러분, 구태여 날 예서 강제로 끌어 내릴 생각은 마시라요. 뉘기든이 지붕 우에 사닥다리를 갖다 대기만 하면 내래 즉시 몸 던져 죽을 게입네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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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기 2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신혼 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지아코모 데이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나폴리의 모든 공간도얼어붙을듯 차가운 2월의 창백한 햇살도아버지가 내뱉은 문장까지도나만 혼자 그곳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그리고 지금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내게 완성된 이야기를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글은 혼란일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그저 구원 없이 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지금 글을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 P9

 

 

소설의 첫 문장인 저 대목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지식인 중산층 가정의 조반나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은 누구보다 훌륭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부모로 인해 충만하다.

하지만 그 부모의 세상이 거짓으로 곳곳에 균열이 가 있는 걸 발견하는 순간 아이의 유년은 끝나버린다.

아버지의 저 한 마디로 조반나는 부모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찾게 된다.

 

나폴리는 우리 나라의 일반적인 도시와 전혀 다르게 산비탈 고지대에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나 주택, 상류층의 저택들이 존재한다.

조반나가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그 언덕길을 내려와야 한다.

같은 도시 안에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나폴리의 거리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거리 어디쯤에서 조반나는 빅토리아 고모라는 다른 세계를 엿보기 위해 달려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가 이미 예상하듯이 세상은 사춘기 소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갖가지 이유로 어른들은 모두 서로를 속이고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고 살 뿐이다.

또 한편으로는 모두가 상처입은 영혼들이다.

어른의 정신 세계라고 해서 그다지 아름답거나 훌륭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더 타인과 자신에 대한 기만으로 똘똘 뭉쳐 있다.

게다가 이 소설석 어른들의 일탈 내지는 기만은 사실상 한 술 더 뜬다.

사춘기 소녀에게 아버지의 외도와 그로 인한 부모의 이혼, 이후 혼자 남은 엄마의 이해하고 싶지 않은 집착과 자기 기만이 작은 일은 아니지 않은가?

더더군다나 아버지의 새로운 상대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이고,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이라면... 에휴~~~

게다가 새로운 롤모델로 잠시 떠오른 고모 역시 기만적인 어른인 건 마찬가지다.

유년기에 알았던 것처럼 주변의 어른들이 전혀 존경할만하지 않고,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건 정말 아 싫다.

그저 어른들이 내가 생각했듯이 대단한게 아니네,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저런 단점도 있네 수준이 아니잖아.....

 

그래서 조반나의 사춘기는 격렬할 수밖에 없다.

그 격렬한 사춘기의 심리와 감성을 정말 이 책은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반나는 당연히 어른이 아니므로 어른의 거짓된 삶에 저항하는 방식도 생각도 세련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는 생각과 행동, 문득 문득 튀어 나오는 하지말아야 할 행동과 말들, 후회하지만 그 후회조차도 합리화해가는 모습, 그리고 비틀어지고 절대화되는 짝사랑의 감정들

아 정말 난 엘레나 페란테가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천재소녀가 아닌가 생각했다.

 

조반나가 어른들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지점에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알을 깨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조반나는 이제 알을 깨고 한발을 내딛었다.

이 소녀의 새 출발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디 어른들의 거짓된 삶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된 삶에 안착할 수 있기를....

지금도 어른들에게서 상처받는 모든 아이들에게 위로는 되지 않을지라도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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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0-0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물 사진이 멋진데요!ㅎ 조르주 브라크 그림의 감각이 있는듯 해요!

바람돌이 2020-10-04 10:52   좋아요 0 | URL
나폴리의 도시계획은 브라크가 한걸까요?ㅎㅎ
 

집을 떠나기 2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 신혼 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산 지아코모 데이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폴리의 모든 공간도, 얼어붙을듯 차가운 2월의 창백한 햇살도, 아버지가 내뱉은 문장까지도나만 혼자 그곳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내 글은 혼란일 뿐,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저 구원 없이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 P9

고모와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보다 더 강렬했다. 나는 그때처음으로 짧은 순간에 모든 감정을 욱여넣을 수 있는 공간이 내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통난 거짓말에 대한 부담감, 부모님을 배신했다는 수치심, 그들이 받았을 상처로 인한 괴로움은 어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철로 만든 새장 같은 엘리베이터 유리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건물 입구를 지나 차에 들어가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빅토리아 고모 옆에 앉는 순간, 나는 생소한 감정을 경험했다.
- P91

고함을 치는 고모의 눈빛은사납고 비통해 보였다. 입안에 고인 하얀 침이 가끔 입술에 튀었다. 빅토리아 고모는 내가 고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깨닫게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고모를평생 좋아해주고 감사한 마음으로 노년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를바란 것이었다.
- P246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네 아빠는 너보다도 어려. 너는 그새 자랐는데 그이는 여전히어린애 같아. 네 아빠는 평생 자라지 않을 거야. 놀랍도록 똑똑하고 자신만의 놀이에 심취한 아이로 남겠지. 그래서 잘 돌봐주지않으면 다칠 거야. 어렸을 때부터 그런 네 아빠의 특성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가 더 성숙해 보였지."
어머니는 자신이 아버지를 잘못 봤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데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 P287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든 검은 베일이 드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눈이 멀어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부딪힐 수 있다. 어떠한 한계를 넘어가면 모든 사람이 앞을못 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만 그러는 걸까. 인간의본모습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때 드러나는 걸까, 아니면 증오나 사랑처럼 농도가 짙고 무거운 감정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질 때 드러나는 것일까. - P376

이렇게 보니 평범해 보이네."
나는 로베르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그의 수많은 재능 중에는 자신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도 있는 거야."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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