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새는 두 개의 눈으로 두 곳을 동시에 본다고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 인선이 기르는 앵무새 아미의 이야기다.


귀를 기울이는 듯 꼼짝않고 갓등 위에 앉은 아미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은 벽에서 움직이는 인선과 아미의 그림자를, 다른 쪽 눈은 유리창 밖 마당에서 저녁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114쪽)


작가 한강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 사랑 맞지...

이것이 어떻게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을까?

새가 가지는 두 개의 시야처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또한 참혹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참혹한 경험을 안고 사는 사람은 이렇게 새의 두 눈처럼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겪으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부름을 갔다 돌아오니 가족이 모두 사라져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쌓여있는 죽음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그래서 죽은 이의 몸이 차가워져 맨 빰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경험한 삶.

어린 여동생은 부상을 입은 채로도 도와줄 언니들을 찾아 집까지 기어왔다가 참혹한 모습으로 언니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또 어떤 이는 청년이라는 이유로 홀로 동굴속에서 피신했는데 밤에 돌아와보니 온 마을이 불타고, 그 불꽃을 평생동안 기억해야 하는 삶.

그 삶을 놓지 못해 그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죽은 오빠의 뼈라도 찾고 싶었던 인선의 어머니.

이런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감히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인선과 경하 역시 감히 그 기억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이 잘려나간 고통을 3분마다 다시 겪어야 하는 끔찍함이 필요했고, 경하는 눈보라에 갇힌 제주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매는 순간에서야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어쩌면 나같은 평범한 독자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지만 항상 과거의 기억을 꿈속에서 반복하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끊어내기 위해 이불 밑에 줄톱을 깔고 잠이 들어도 기어이 찾아오고야 마는 기억들.

그래서 결국은 죽은 이들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어떤 곳이든지 달려가 버리고 말게 되는...

인선의 어머니가 대구 형무소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오빠의 흔적을 찾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헤맸듯이, 인선의 아버지가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어린 여동생의 시체가 떠밀려왔을지도 모를 제주 어느 바닷가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듯이, 그렇게 사랑은 고통이지만 그래도 사랑이므로 끊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 개의 시야를 살아가는 새들처럼 늘 사랑과 고통, 현실과 꿈의 세계를 부유한다.

두 개의 세계를 언제나 동시에 살아낼 수 밖에 없는 것일테다.


소설의 제목이 <작별하지 않는다>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도 못한 죽음들에 대한 슬픔, 그래서 작별하고 싶지 않은 가슴속에 꽉꽉 넣어두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지, 그럼에도 너무도 고통스러워 차라리 버리고싶지만 결코 버려지지 않는 강렬함.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작별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작별하지 않는다가 되었지 싶다.

작별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기만 하지만 작별하지 않는 것은 고통이면서 또한 사랑이기에.....


전작인 <소년이 온다>가 80년 광주의 기억을 길어올렸던데 비해,

이번 작품은 1948년 제주 4.3의 땅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주인공 경하는 소설의 첫머리에서 광주를 쓰고 난 이후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오롯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의 소설을 볼 때 이 작가가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지를 느낀다.

이런 사람이 오롯이 광주의 기억을 더듬었던 것은 그 시절을 스스로 살아낸 듯한 느낌이었지 싶다.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치 스스로 살아내는 것처럼 반복했다면 작가의 소설 이후 고통이 짐작가기도 한다.

어쩌면 이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작가에게는 글을 쓰는 과정이 그 경험들을 자신의 경험으로 겪어내는 과정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왜 작가는 이렇게 고통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일까?

책 뒷표지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씨는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 사력을 다한다라는 표현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 중앙에 콱 박혔다.

작가가 정말 사력을 다해 이 글을 썼구나....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작가는 정말 죽을 힘을 다했구나....

그리고 앞으로 오랫동안 또 많이 참 많이도 아프겠구나....

소설 속 인선과 경하, 인선의 어머니가 겪은 그 고통들은 온전히 작가의 고통이겠구나 싶어 이 책을 이리도 쉽게 읽고, 마음이 아프다는 말만으로 맺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작가님이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1-10-10 17: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소년이 온다‘를 넘 힘들게 읽었는데 이 책도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얼마 전 제가 페이퍼 올리면서 한국 작가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많이 써 줬으면 하고 바랬는데 한강 작가가 해주셨네요^^

바람돌이 2021-10-11 20:39   좋아요 1 | URL
저도 소년이 온다를 정말 힘들게 읽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적 완성도에서는 소년이 온다가 좀 더 좋았던거 같아요. 그런 점에서 조금 아쉬움이 남았지만 워낙에 고통을 서술하는 방식이 리얼해서 뭐라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붕붕툐툐 2021-10-10 2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중반쯥 보다 일단 손 놓고 있었는데, 한강 작가는 사력을 다해 쓴다는 말이 너무 와닿네요.. 다시 손에 들어야겠어요~~

바람돌이 2021-10-11 20:39   좋아요 0 | URL
다 보고나면 음..... 우울합니다. 그래도 읽어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

희선 2021-10-14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잊고 싶지만 잊지 못하고 잊을 수 없는 일이겠네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주 4.3 때도 많은 사람이 죽었군요 같은 나라 사람이고 사상 같은 것과 상관없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겠지요 그때에서 시간이 지나고 또 일어났네요 앞으로는 정말 같은 일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10-17 12:41   좋아요 0 | URL
정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죠. 더 문제는 그 후로도 오랜 세월동안 희생자들이 오히려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는 거겠죠. 제대로 작별조차 못하고 추모조차 못하면서 말이죠.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오른쪽 어깨 위, 스웨터 올 사이로 가칠가칠했던 아마의 두 발이 떠오른다. 내 왼손 집게손가락을 횃대 삼아 앉아 있던 아미의가슴털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전까지 내가 닿아보았던 어떤 생명체도 그들만큼 가볍지 않았다.
- P109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같은 걸까.
- P114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자료가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 P316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10-04 0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나온 한강 소설, 바람돌이 님도 오랜만이네요 구월보다 시월엔 가을이 깊어가겠습니다 바람돌이 님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바람돌이 2021-10-04 15:30   좋아요 2 | URL
한강작가님 소설이 오랫만에 나와 기대 잔뜩이었는데..... 읽어내기가 좀 많이 힘들었어요. 독자보다 작가가 더 고통스러워하는 느낌이랄까? 그게 너무 직격으로 느껴져서요.
시월인데 왜 요 며칠 날씨는 여름인지.... ㅎㅎ 희선님도 건강하게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유부만두 2021-10-04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 소설... 힘들 것 같아서 시작을 못하고 있어요. (소년은 온다, 도 못 읽...)

바람돌이 2021-10-04 20:59   좋아요 0 | URL
이 책 각오하고 읽어야 해요. 한강작가님 글 잘 쓰시잖아요. 솔직히 책은 소년이 온다보다 못하고 비유와 상징이 지나치게 복잡한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작가가 느끼는 고통이 너무 절절하게 이입되어서 좀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읽으신다면 소년이 온다를 추천하고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
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이상하지, 눈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인선이 말했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 P55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 P57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 P8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10-03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눈
맞아요
한참 눈에 대해 이야기 했어요
정말 음 뭐라고 할까
조곤 조곤 꼭꼭 다지며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바람돌이 2021-10-04 15:31   좋아요 1 | URL
끊임없이 눈에 대해서 얘기하죠? 눈이 주인공인줄 알았어요. ㅎㅎ
작가님이 고통을 어찌나 꼭꼭 다지며 썼는지 읽다가 숨막히는 줄 알았어요.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 P63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이나, 땅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들, 바다와 호수의 조류,
축축한 곳마다 균사를 뻗치는 균류,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 P82

"세상이 망해가는데, 어른들은 항상 쓸데없는 걸 우리한테 가르치려고 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은 굳이 학고 같은 것을 만든 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 앞에 선 어른들은 늘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 P165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면, 빼곡한 나무들 사이의 작은 공백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 풍경을 볼 때면 이곳이 투명한 스노볼 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아득하게 아름다웠고, 당장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 P215

"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 P226

내가 다음을 모두 주었던 이 프림 빌리지는 영원히 지속될 수없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끝이 결코 오지 않기만을 바랐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도 여기에 내 마음이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평생 동안 붙잡혀 있으리라는 것을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 P244

지수는 밤새도록 바위에 앉아서, 숲을 가득 채운 푸른 먼지들을 보았다. 아름다움 외에는 아무 기능이 없는, 그러나 결국 제거되지 않은 푸른빛들을,
- P327

 언제나 의심하고, 매일 서로에게 물었어요.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프림을 떠난 이후 우리는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프림에서 하던 일을 반복하고 있었죠.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시절이 그리웠고, 그것만이 우리를 잠시나마 과거로 되돌려 보내주었으니까요."
- P349

"시간이 흐를수록, 모스바나가 무엇인지가 제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그냥 그곳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프림 빌리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그런 곳은 오직 프림빌리지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아가게 했으니까요."
- P354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 P378

마음도 감정도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의 물줄기를 맞다보면 그 표면이 점차 깎여나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어떤 핵심이 남잖아요. 그렇게 남은 건 정말로 당신이 가졌던 마음이라고요. 시간조차 그 마음을 지우지 못한 거예요."
- P379

해 지는 저녁, 하나둘 불을 밝히는 노란 창문과 우산처럼 드리운 식물들, 허공을 채우는 푸른빛의 먼지. 지구의 끝도 우주의끝도 아닌, 단지 어느 숲속의 유리 온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깊도록 유리벽 사이를 오갔을 어떤 온기 어린 이야기들을.
- P3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젊은이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앞만바라보았다.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안에서 솟구쳤고,
전쟁 초기부터 쌓인 온갖 고통, 온갖 분노와 함께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일었다. 죽어가는 친구를 보며 느끼는 울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다는 패배감, 영웅주의적인 애국심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공허함으로 그는 운명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심을 품게 되었다.  - P541

보수적인 부르주아들의 가슴속에서도 불타고 있었다. 프랑스는 피와돈이 말라가고 있었다.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전을 고집하는 파리에대한 은근한 반감이 지방 점령지 전역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강베타의 열렬한 선언을 암시하며 결론을 내렸다.
"아니, 아니! 우리가 극렬분자들을 지지할 수는 없어요. 결국 잔혹한죽음에 이르게 되니까 …… 저는 선거를 원하는 티에르 씨를 지지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공화정, 맙소사! 하지만 공화정을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더 나은 게 나올 때까지."
- P625

달리샹 박사가 장을 이륜마차로 부이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박사의 용기와 선의는 끝이 없었다. 바이에른에서 퍼지기 시작한 티푸스가 로쿠르를 휩쓸자 그는 집집을 다니며 환자를 치료했고, 그 외에도로쿠르 야전병원과 레미 야전병원 두 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부상병을 치료했다. 열렬한 애국심, 부당한 폭력에 대한 저항심으로 인해 그는 프로이센 당국에 두 번이나 체포되었다 풀려났다. - P630

수개월의 고통과 기아를 거치며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 이제 무위 속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시민들, 바야흐로 자신이 만든 유령 앞에서 의혹에 빠진 시민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공공연하게 반란의 싹이 텄다. 시민들의 영혼을 헛되이 불태운 뒤 복수와 파괴의 맹목적 열망으로 변해버리는 환멸의 애국주의는 독일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이 끝날 때마다 보이는 정신적 발작 가운데 하나였다.  - P648

 아! 장군들! 그의 뇌리에스당의 장군들이, 그 향락적이고 무능력했던 장군들이 떠올랐다. 장군이 한 사람 늘었든 줄었든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그날 하루의 나머지시간도 똑같은 열광과 흥분, 그의 전망을 완전히 바꿔놓은 열광과 흥분속에서 마무리되었다. 거리의 포석조차 바라는 듯했던 무장봉기가 점점 확산하더니 예기치 않은 승리의 운명 속에서 대번에 사태를 지배했고, 마침내 밤 열시경 시청을 중앙위원회 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자신들이 시청을 장악한 게 믿기지 않는 듯 놀라워했다.
- P651

그러자 말도 안 된다는 듯 격한 몸짓으로 모리스는 장의 손을 놓았다. 두 사내는 잠시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파리 전체를휩쓴 광기의 충동, 즉 저멀리서 온 질병, 황제가 뿌린 병균에서 비롯된질병에 사로잡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노동과 검약의 땅에서 자랐기에 상식과 무지로 무장한 채 상대적으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형제나 다름없었고, 연대감이 더없이 강고했다.
갑자기 군중이 떠밀어 서로 떨어지게 되자, 그들은 무척 아쉬워했다.
- P653

죽음을 모면한 모리스는 패배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프로이센군과 맞붙어 번번이 패한 자칭 합법 정부군이 파리와 싸울 때는 엄청난용기를 발휘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 P655

화염에 휩싸인 주변건물들이 내뿜는 참을 수 없는 열기와 질식할 듯한 공기가 그의 몸을휘감았다. 포석 더미가 쌓인 십자로는 비처럼 쏟아지는 불똥과 함께 화재로 방어되는 진지, 불의 참호로 둘러싸인 진지가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명령이 아니었던가? 바리케이드를 포기할 때는 동네에 불을 지를것, 불덩이 방어선으로 정부군을 저지할 것, 파리를 넘겨줄 상황이 닥치면 파리를 불태울 것. 벌써 화염에 휩싸인 지역은 바크가만이 아니었다. 그의 등뒤로 도시 전체가 불타는 듯 검붉은 하늘이 보였고, 멀리서뭔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 P666

시라도 편히 쉬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끌려와 임의로 뒤섞인 포로 출신병사들은 파리를 향한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코뮌의 만행도 소유와 질서에 대한 존중심에 상처를 내며 장을 격분하게 했다. 온건한농부로서 그는 다시 땅을 일구고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노동할 힘을얻을 수 있도록 그저 평화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화재는 가장 선한천성마저 잠재우며 미치도록 그의 화를 돋우었다. 승리할 수 없다고 해서 집을 불태우고 궁전을 불태우다니, 아. 그건 안 돼, 말도 안 돼! 그것은 날강도들이나 할 짓이었다. 그 전날 즉결 처형을 보고 통탄을 금하지 못했던 그도 이제 자제력을 잃었고, 고함을 지르며 눈이 뒤집힐 정도로 난폭해졌다.
- P667

 마침내 파리가 불타고 있어, 독일군의 포탄이 처마끝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파리가 불타고 있어! 군터는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포위공격으로 인한 격심한 피로, 혹독한 추위, 끊임없이 발생하는 난관 등이 여전히 독일군을 괴롭혔는데, 이제야 그 고통을 보싱빈는 기분이었다. 지방의 정복도 50억 프랑의 배상금도, 그 무엇도 이 파괴된 파리,
사나운 광기에 물든 파리, 청명한 봄밤에 스스로 불타올라 연기 속으로사라지는 파리만큼 승리의 자부심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 P673

그러나 모리스는 불타는 도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힘겹게더듬거렸다.
"아냐, 아냐, 전쟁을 저주하지 마……… 전쟁은 나쁜 게 아냐, 전쟁은자기 할일을 할 뿐이야….."
장이 증오와 후회에 찬 고함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제기랄! 네가 여기에 누워 있잖아, 그게 다 내 잘못인데……… 전쟁이뭐가 좋다고 그래, 전쟁은 더러운 거야!"
환자가 모호한 몸짓을 했다.
"오! 전쟁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이점도 많아!..… 유혈사태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전쟁이란 죽음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이야."
- P6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