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뭐, 그만둘 만한 가벼운 직장을 그래서 택한 거니까.
"전전 직장은 그만두기 전에 불성실하다고 잘려버렸고말이지. 직업윤리 없는 사람은 다른 윤리도 엉망이야. 진짜라니까?"
"음, 아시아인들이 지나치게 성실한 편이니까 그걸 감안하면 지구 평균은 되지 싶은데…… 진득하게 하고 싶은 분야를 찾으면 달라지겠지."
- P18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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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축제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끝이 났고, 모든 전투는 이 노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주마프와 네르빈덴의 결전에서도 연대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방법이라고는 나누어주던 술의 양을 두 배로 늘리는 것밖에 모르는 적의 장군들은 이 무시무시한 노래의 폭발적인 위력에 어쩔줄 몰라 했다. 이 노래가 수천의 병사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와 철썩이는 파도처럼 자기들 진영을 향해 몰려들 때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의 모든 전선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죽어가던 그 전쟁터에서 〈라 마르세예즈)는 날개를 단 승리의여신처럼 하늘에 떠돌았다.
- P138

오직 역사만이만들어낼 수 있는 참으로 기막힌 역설이지만, 이 혁명 찬가의 지은이는 이제 혁명 동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저 불멸의 노래를 지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혁명을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던 그 사람이 이제 온 힘을 다해 혁명을 가라앉히고 싶어했다.
- P139

인간의 삶에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이런 위대한 순간은, 잘못불려나와 그 운명의 순간을 장악하지 못한 인간에게는 모질게 복수하는 법이다.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 같은 소시민적인 미덕들은 저 위대한 순간의 불길 속에 아무런 힘도 없이 녹아내리고만다. 위대한 운명의 순간은 언제나 천재를 원하고 그에게는 또 불멸의 모범이라는 명예를 안겨주지만 유순한자에게는 그렇지 못하다.오히려 경멸하며 밀쳐버린다. - P164

현재 암스테르담, 모스크바, 나폴리, 리스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파리에서도 알 수 있게 된 이후로 세계는 정말로 변화해버렸다. 이제 최후의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되었다. 그러면 지구상의 서로 다른 부분들은 저 거대한 연결망에 뒤엉키게 되고, 전인류의 공통된 의식이 생겨날 참이었다.
- P518

하나의 기적이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이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굽히지 않는 용기야말로 학자들의 망설임에 창조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 P220

그러나 새로 시작된 20세기는 초조하게 손길을 뻗쳤다. 실험실에서 새로운 무기들을 다듬고, 위험에 맞설 새로운 갑옷을 고안해냈다. 자연의 온갖 저항은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더욱부채질했다. 새로운 세기는 모든 진실을 알고자 했으며, 이미 처음 10년 동안에 그 이전 수천 년 세월이 도달하지 못한 것을 넘어설 참이었다. 개인의 용기에 국민 간의 경쟁심이 합류했다. 단순히 남극 자체만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 맨 먼저휘날리게 될 국기의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 P299

영국인들의 경우 천재성조차 의무를 이행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이런 스콧 같은 부류의 사람은 영국 역사에서 이미 수없이등장했다. 그런 사람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이름 없는 섬들을 정복하고,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고 세계에 대항해 전쟁을 해냈다.
언제나 강철 같은 에너지와 동일한 집단의식 그리고 똑같이 냉정하고 감정을 억누른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 P300

3월 29일, 그들은 어떠한 기적도 자신들을 구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불운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보다는 다른 모든 불행을 견뎌냈듯이 이제 죽음을 견뎌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각자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그들의 마지막 고통은 바깥세상으로한숨 한 번 새어나오지 않았다.
- P317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다. 이제 이 사람, 블라디미르 일리치울리야노프가 밖으로 나왔다. 그제만 해도 구두 수선공의 집에 은둔해 있던 이 남자는 수백의 손으로 들어올려져 장갑차 위에 세워졌다. 그 장갑차 위에서 그는 군중을 향해 최초의 연설을 시작했다. 거리는 진동했다. 곧이어 ‘세계를 경악하게 한 열흘‘이 시작되었다. 탄환이 날아가 한 나라, 한 세계를 날려버린 것이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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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453년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최후로 시작한다.

예전에 터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이것 저것 봤던 것이 생각나 그냥 끄적 끄적 정리를 해본다.

 

1.

동서로마의 분열 이후 서로마제국은 100년을 채 못버티고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동로마제국은 1,000년을 유지한다. 이 기간동안 한 때는 지중해를 온전히 품은 제국을 유지했지만 마지막 시기에 이르면 지금의 이스탄불(당시의 비잔티움) 유럽쪽 영역으로 한정된다. 그야말로 성채로 둘러싸인 아주 좁은 지역이다.

하지만 오랜 제국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도시 내의 경제력은 풍요로웠고, 도시를 둘러싼 3중의 방벽은 여전히 도시를 굳건히 지켜주고 있었다.

 

 

당시의 비잔티움은 이런 거대한 성벽을 3중으로 두르고 있었다. 저 성벽안으로 들어가면 꽤 넓은 폭을 두고 비슷한 두께의 성벽이 다시 둘러져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저 내성과 외성의 성벽 사이 공간에 까페도 만들고 결혼식장으로도 쓰고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시대 저 성벽들은 도시의 생명이었으며, 도시를 지키기 위해 동로마의 역대 황제들이 1,000년에 걸쳐 만들어온 흔적이다.

 

 

2.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의 지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9살(우리 나이로는 20살)

말 그대로 저런 정치판에서라면 핏덩이다.

하지만 세계사는 가끔 정말로 저런 핏덩이들이 사고를 친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이 되자 말자 자신의 스승을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스승님! 저는 도시가 가지고 싶습니다."

여기서 도시란 지금의 이스탄불, 즉 당시의 비잔티움이다. 당시 비잔티움은 그냥 도시라고도 불렸다.

생각해보면 알렉산더가 제국을 이룬 것도 20대 때였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지기도 하지만, 잃을 것이 너무 많아지기도 하므로 무모해지기 힘들다.

젊은이다운 무모함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고야 말겠다는 저 단순한 열정이 1,000년의 제국을 흔든다.

 

3.

이 책에서는 메흐메트에 대해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이 있다.

즉 메흐메트가 술탄이 되고 난 이후 다른 경쟁이 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는 대목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건 메흐메트라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정치가 원래 그러했다.

모든 술탄은 즉위하면 자신의 형제를 죽이는 것에서 시작했고,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이것은 술탄의 권력 강화를 위한 관행이었고, 모든 술탄이 그러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 후반기로 가면 이 제도의 맹점이 드러나게 되는데, 한 술탄이 후사 없이 갑자기 죽거나 해버리면 다음 대 술탄을 구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위기가 몇번 오면서 오스만제국 후대로 가면 술탄의 형제를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게 진짜로 웃긴데

후계자를 빼고 술탄의 아들들을 모두 하렘에서 키우는 것이다.

하렘 안에서만 키워서 세상도 모르고 정치도 모르고 그야말로 엄마의 치마폭안에서만 자라는 도련님들로 만드는 것으로 술탄의 경쟁자를 견제하였다.

그런데 어쩌랴?

현 술탄이 키운 후계자가 똑 떨어지면 그 하렘에 있는 도련님이 다음 대 술탄이 되어야 하는 것을....

오스만 제국 말기에 유능히 무능한 술탄이 연거푸 등장하는 건 바로 이 이유때문이다.

 

 

4.

어쨌든 이 책에서 얘기하는 대로 메흐메트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비잔티움을 공격한다.

저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헝가리인 우르반이 만든 대포를 앞세우고...

 

 

이스탄불의 1453박물관에는 이 대포와 대포알을 복원한 것이 전시되어 있다.

저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포탄을 앞세우고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비잔티움은 정복되지 않는다.

 

 

 

5.

이 때 메흐메트는 기상천외한 한 수를 생각해낸다.

제노바의 용병들이 지키고 있던 만 골든혼으로 군함을 띄워서 적의 허를 찌르겠다는 것.

그러면 골든혼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골든혼의 입구는 커다란 쇠사슬로 막아져 바다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배를 산으로 보내는 것

아래 사진처럼 육지에 레일을 깔고 숲을 갂아서 배를 옮기고 골든혼 안쪽으로 내려보낸다.

이 작전은 비잔티움 공략전의 승부가 갈리는 지점이다.

 

 

그리고 운명의 날

누군가 실수로 닫는걸 깜박한 작은 개구멍.

그것이 비잔티움, 1,000년의 도시를 마지막으로 이끈다.

 

6.

이스탄불에서 택시를 탔다가 아주 유쾌한 택시기사님을 만났다.

안되는 영어로 - 그분도 짧은 영어, 나도 짧은 영어, 우리는 단어로만 충분히 대화가 가능했다. -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참 인상적이었던게 이분이 1453년의 비잔티움 함락에 대해서 너무 너무 자랑스러워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순신장군 학익진, 명량대첩 이런거 얘기할 때 나타나는 표정이 그분의 얼굴에 떠올랐던 것.

이후 여기 저기 다닐때마다 1453년의 흔적을 찾고 다녔는데 생각보다 많았었다.

유럽인인 츠바이크가 보는 전쟁과 오스만의 후예, 터키인들이 보는 전쟁은 다르겠구나.

 

7.

이후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명실상부한 중심이 된다.

지금은 수도가 앙카라이지만, 그리스와의 영토분쟁에서 터키는 이스탄불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터키 남부 코앞 바다의 많은 섬들을 그리스에게 내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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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 출판사에서 나온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진작부터 관심이 갔었는데 이제야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여러권의 책을 같이 읽기도 한다지만, 나는 일단 손에 잡은 책을 다 읽어야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건 이런 시리즈물에서도 1권을 읽기 시작하면 순서대로 시리즈를 읽어줘야 한다.

이건 일종의 강박증이지 싶다.

단점은 시리즈의 1권이 마음에 안들면 그 다음은 자동 아웃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르떼 출판사의 이 시리즈 1권이 셰익스피어라는건 나름 성공적인 마케팅이었다.

 

 

누구나 아는 작가

이름만 아는게 아니라 그의 작품의 내용을 대부분이 알고 있고 읽었다고 착각하는, 하지만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제대로 읽은 적은 없는 작가.

여기서 중요한건 읽었다고 착각하는이다.

 유명하고 이름을 아는 작가는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람의 작품을 읽은건지 안읽은건지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 착각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사람 - 셰익스피어를 읽었다고 착각하지만 읽은 적은 없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바로 나같은 사람.

아 정말 다시 생각해보니 난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읽은 게 단 하나도 없는거였다.

그러면서 집에는 무려 3권의 셰익스피어 작품이 있다.

 

 

 

 

 

 

 

 

 

 

 

 

 

 

 

 

 

아 정말 나 뭐야....

이 책을 쓴 작가의 진정한 바램은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하나라도 읽어줬으면 하는것일거다.

이 책 전체에서 그런 뽐뿌가 막막 느껴진다.

그리고 귀가 얇은 나는 정말 작가에게 유혹당했다.

이 책에서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문장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유혹적이던지.

그래 셰익스피어를 읽어야지!

저기 먼지 쌓인 책을 이제야말로 읽어줘야지.

난 정말 집에 있는 저 3권의 책을 다 가지고 와서 먼지를 털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햄릿부터 들고 한 50페이지까지 읽었다.

근데 회의가 드는거다.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이 장광설은 정말 너무 견디기가 힘들어.

아 정말 셰익스피어는 내 취향이 아니야.

그러니 나와 셰익스피어의 만남은 황광수씨의 이 책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거야.

 

 

여행과 작가라는 컨셉도 무척 좋다.

셰익스피어의 자취를 따라가며 전문 도슨트의 안내를 받는 느낌이다. 그것도 굉장히 훌륭한 도슨트의..

이 책으로 셰익스피어를 아예 모르는건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싶은 나같은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책이다.

 

이 시리즈는 1권의 독서가 성공이었으니 앞으로 꾸준히 챙겨서 순서대로 - 이게 중요하다 - 읽어나갈 계획이다.

이 또한 출판사의 기획의 성공이었던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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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9-08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리즈를 참 좋아합니다!ㅎ
최근에 레이먼드 커버편 읽고 나서 대성당을 보고 있는데 몰입도나 느낌의 폭이 한결 커지는것 같아요! 바람돌이님께서 세익스피어 작품으로 하시는 꼬리물기 독서도 응원할께요!ㅎ

바람돌이 2020-09-08 17:08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책들은 다시 책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이 시리즈로 쭈욱 읽어보려구요. 니체부터요. ㅎㅎ 레이먼드 커버도 빨리 읽고싶습니다. 대성당은 저의 최애작이거든요. ^^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고 이 멋진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확 늘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이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쇼리>

더군다나 이 작가의 책은 단편집 아니면 모두 시리즈물이고 단행본이 딱 2권인데 그게 <킨>과 <쇼리>인것.

그것도 <킨>은 작가의 명성을 널리 알린 첫번째 소설이었고, <쇼리>는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다.

뭔가 운명적인 게 느껴지지 않나?

어쨌든 <킨>을 읽었으니 "아 그럼 <쇼리>부터 읽고 나머지 <와일드 시드>와 <블러드 차일드>로 넘어가야지"한게 <쇼리>를 읽기 전까지의 생각.

 

이 2권의 공통점을 추린다면

<킨>은 시간여행, <쇼리>는 벰파이어의 세계로 일단 SF적인 또는 판타지를 주요 소재로 한다는 것.

2권 모두 이런 소재를 통해 당면한 사회부조리, 젠더의 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 정도 되겠다.

 

하지만 차이점이 더 큰데

일단 <킨>은 흑인인 여주인공이 미국 노예제시대로 타임슬립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이야기의 축으로 하면서 노예제의 진정한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리고 여성 흑인 노예의 입장에서 보는 노예제란 어떤 것인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어 나를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로 입성하게 하였다.

 

그런데.........

 

<쇼리>의 시작은 흥미진진했다. 인간의 나이로는 10살정도밖에 안되보이는(하지만 벰파이어, 이책에서는 이나라고 하는 존재로는 50년쯤 산) 흑인소녀가 동굴에서 만신창이로 깨어난다. 기억을 모두 상실한채...

이후 쇼리라는 이 소녀가 자신의 종족을 찾아가면서, 그리고 왜 자신이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사건을 알아가는게 이야기의 주요 내용인데 이야기의 흥미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한다. 뭔가 뻔하달까?

심지어 그 일이 해결되는 과정도 그리 흥미롭지 못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게 아니다.

내 생각에 작가는 뭔가 새로운 공동체의 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재의 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것과는 다른 절대적으로 선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그런 공동체말이다.

그것이 벰파이어들의 공동체같은데 이건 시작부터 아 이건 뭐야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면 폴리아모리같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 폴리아모리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벰파이어가 어떤 인간을 흡혈하면, 그 인간은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을 경험하게 하고 그 인간에게 묻는다.(여기서 중요한 건 최초의 흡혈경험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는거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

 

<네가 우리 세계로 들어오게 되면 이 느낌을 늘 경험할 수 있고, 덕분에 너는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면서 200년 내지는 300년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네가 내기치 않으면 거부할 수 있어.

일단 우리 세계로 들어오면 너는 나의 흡혈과 나와의 섹스를 통해 항상 황홀한 이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나를 보호하고 나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 수 있어.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아이는 생길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다른 벰파이어와 짝을 지어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어야 해. 물론 인간인 넌 너와 같은 처지의 다른 인간들과 짝을 짓고 아이를 낳는 것도 할 수 있어. 아니면 같은 동성끼리 짝을 짓는 것도 되고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어. 그렇게 벰파이어와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뤄 행복하게 살아가는거야. >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동체는 지극히 폴리아모리적인 세계다.

폴리아모리가 나쁘다는게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르니까 그렇게 사는게 더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자유의지로 내가 결정한 것이 맞냐는거다.

 

인간이 저 훌륭해보이는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일단 벰파이어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그리고 일단 벰파이어에게 동의하지 않은 흡혈을 당해야 한다.

또한 저 흡혈을 한 번 당하고 나면 중독증세가 시작되는거다.

인간이 동의하는지 안하는지 질문하는건 그 다음이다.

 

아니 나는 폴리아모리고 뭐고 싫을 수 있잖아.

근데 내가 왜 선택당해야 하고, 벰파이어의 독에 일단 중독시키고 나서 묻는건 뭐냐고?

그게 정말 차별없는 행복한 공동체가 맞을까?

이 책에서 주요 조연인물이 쇼리가 깨고 난 이후 처음 만난 라이트라고 하는 청년이다.

이 청년은 사실 알 수 없는 이유로 쇼리에게 마음이 끌리고 흡혈을 당하고 섹스를 한다.

그리고 쇼리를 사랑하게 된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 바로 이 라이트라는 청년이 쇼리의 세계를 받아들여가는 과정인데, 내가 보기에 이 과정은 정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다.

라이트는 벰파이어의 공동체 마음에 안든다. 왜냐하면 쇼리를 공유하고싶지 않으니까.

라이트가 상징하는 세계는 기존의 일부일처제 사회다.

하지만 이미 흡혈을 당했고, 쇼리에게 중독되었고, 그래서 사랑을 하고,

또 하지만 쇼리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혼자 쇼리를 독점하는 것은 안되고.....

그래서 점점 자신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고....

 

나는 점점 저 라이트의 입장에 절절하게 동일시하면서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 결과는 도대체 이 빌어먹을 공동체는 뭐야

이게 <킨>의 세계관이 도달한 궁극적 이상향이라면 아 정말 난 동의못하겠다.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냐 폴리아모리냐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소설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벰파이어든 인간이든 완전한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잖은가 말이다. 내가 <킨>에서 만난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벰파이어의 것이다.

심지어 그 벰파이어들은 전부 부자이기까지 하다.

평등하지 못한 관계, 애초의 자유의지가 묵살된 관계위에 성립된 공동체가 정말 이상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만약 작가가 이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상적인 평등한 공동체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면 아마 내가 심각하게 책을 오독한 거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한에서는 그런 비판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살아있다면 구글 번역을 열심히 해서 편지라고 보내고 싶은 기분이다.

 

<쇼리>덕분에 당연히 읽으리라 했던 책 2권 <와일드 시드>와 <블러드 차일드>가 읽을 책 순서에서 확 밀려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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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1-01-03 0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꾸역꾸역 읽다가 리뷰라도 보려고 들어왔어요. 킨하고 블러드 차일드 읽었는데 둘 다 좋아요. 추천합니다. 와일드 시드는 사두기만하고 아직 못 읽었네됴. 쇼리는 으으.. 이제 반 정도 읽었는데 얼른 읽고 치워야겠어요.

바람돌이 2021-01-05 01:0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오랫만이예요. 잘 지내시죠?
킨은 읽고 너무 좋아서 쇼리를 든거였는데 실패. ㅎㅎ 앞에 읽은 킨이 아니었다면 전 중간에 덮었을텐데, 지금은 그냥 덮을걸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블러드 차일드는 대체로 다 평이 좋군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