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간, '만물의 영장'이 되다.

기독교(개신교)  - 원래 개신교 자체가 프로테스탄티즘, 즉 자본주의와의 견고한 결탁속에서 성장했다.
프론티어 정신으로 무장하여 지구의 모든곳을 개발하고,
전 인류를 기독교인으로 삼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종교.
(이건 정말 태생적 한계라고 해야 하나? 모든 인류와 세계를 자신과 똑같은 색깔로 칠할 수 있으리라라니...)

한국에서의 기독교(개신교) - 당연히 문명과 근대, 제국의 표상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조선에서 기독교는 미국의 우월성으로 바로 연결됨.
근대 문명에 열광하듯 기독교에 열광하라.
기독교의 원래적 배타성과 선악 이분법은 기독교가 한국의 민족주의와 굳게 결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예를 든다면,
문명과 구국의 길을 가로막는 반민족적인 것들은 모두 마귀로 설정
마귀는 화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피의 응징'의 대상일 뿐...
(결국 적과 나를 완전히 분리하는 이분법 -한국인의 의식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다.)

적과 나의 이분법은 인간과 세계의 이분법에서 유래.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침묵, 배제시키는 원초적 이항 대립을 제시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창조주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 교량은 바로 '이성'이다.
창조주가 인간에게만 부여한,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바로 그 '이성'
(아이들에게 최초의 인간이 왜 원숭이에서 분리되어나왔을까를 물으면 누구도 노동에 주목하지 않는다. 모두 생각을 할 줄 알아서요라는 정해진 대답을 내놓는다. -근대적 의식의 위대함(?)
이러한 사유의 뒷면 - 그럼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은?
당연히 배제의 대상이고 교화(포섭)의 대상이다.
자연역시 인간의 세계로 적극적으로 포섭되지만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다.
자연의 '인간화' - 인간을 위한 은유의 재료, 우화의 재료로서 자연.

결국 인간의 삶만이 유일한 가치가 있다는 철저한 인간 중심주의 - 그 인식론적 원천에 기독교가 있다.

 * 문체 반정 -정조대 노론은 명말 청초 소품문을 적극 수용했고, 남인들은 천주학을 주로 받아들인다.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유교적 윤리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자 정조는 남인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노론층의 문체를 전면적으로 문제삼기에 이른다. 국가의 근간이자 사대부의 전범이 되는 고문의 권위를 뒤흔든다는 명분. 정조의 탕평책을 위해 남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사건.

**18세기 노론 내부에서의 호락논쟁과 다산 - 인물성동론(낙론)의 입장(박지원, 홍대용) : 모두 인간중심적 사고를 와해시키는 한편 物의 지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 다산 정약용의 경우 -  훨씬 근대적이다.
인간과 天에 대해 상제관이라는 아주 명료한 입장을 견지함.
상제관을 표방함으로써 다산의 사상은 인간가 자연사이의 연속성은 해체되고 인간 중심주의 귀결된다.
인간중심주의와 근대성은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인간이 만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 우뚝 설 때, 정신이 육체로부터 이탈하여 그 위에 군림하기 시작할 때, 근대문명은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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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도의 경이, 시공간의 재배치

근대는 시간을 재구성했다.
근대의 시간은 철도와 함께 왔으면 기차를 닮았다.
오직 출발점과 목적점만이 존재하며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해버리는.....
근대의 시간은 속도의 문화를 낳았고 그것은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을 표상한다.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사이의 수많은 주름을 단번에 펴버린다.
이제 밤도 잠도 동양사상의 우주적 변이와 사유의 이동도 모두 부질없는것, 그야말로 폐기처분되어져 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근대적 시공간은 '사이성'이 사라진, 대상간의 위계관계가 확연한 공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주인은 이제 인간이다.
우주와의 공명은 없어졋고 다만 그 우주를 소유하고자하는 욕망만 남는다.

단선적 시간개념은 세상을 진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게 하며, 그 진보는 양적으로 계량화될 수 있다.
기차의 세계관 - 진화론은 이제 세계를 생존경쟁의 틀로 파악한다.
우승열패의 신화가 탄생한다.
이제 경쟁이다. 경쟁만이 진보를 승리를 생존을 보장한다.
역사는 그러한 승리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현재가 과거보다 나았고, 미래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획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는 인과관계를 분명히 하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옛적에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일본 역사논문이나 서적들을 읽으면 그 앞뒤 분명한 논리성과 일관성에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그 도식성에 갑갑한 면이 많았는데 아마도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의 근대성 수용이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수학공식처럼 정리되는 역사라니 웃기지 않는가 말이다.)

시간의 유목주의는 가능한가? - 속도에 대한 신앙체계를 전복할 것. 속도는 빠른 것과 다르며 느림 역시 느리지 않다. 느림 또는 시간의 유목주의란 이 '얼빠진' 근대의 일정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느림 또는 느리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조급증과 결별하여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들을 구성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
 
(음~~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말들. 요 말도 나비일려나?)

 

내적 오리엔탈리즘 - 근대적 시간개념이 낳은 사생아. 현재를 척도로 이전의 시간들을 다 저급한 시간으로 매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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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등장배경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굶주림을 피해 300만의 사람들이 바로 옆나라인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파키스탄의 경우 이들을 위해 이슬람 신학교를 건설하는데 이들이 바로 탈레반이다. 그러면 파키스탄은 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아프간 난민대책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섰을까?

첫째는 듀란드선(line of Durand). 인도로부터 파키스탄이 독립하기 이전, 아프가니스탄은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파슈투니스탄 지역을 둘러싸고 두 나라간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영국은 듀란드 선을 그어 그 지역을 두 나라로 나누면서 백년 후 인도지역의 파슈투니스탄이 아프가니스탄에 반환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 지역은 이후 파키스탄이 된다) 국제법에 따르면 이 지역은 1994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졌어야 했다. 이에 따른 파키스탄의 대책이 바로 굶주린 아프간 무자헤딘을 훈련시켜 그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 따라서 탈레반이 바로 그 백년기한이 끝나갈 무렵에 등장한 것이다.

두번째, 서구와 관련한 파키스탄의 국가적 역할 - 파키스탄은 동측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방의 첫 번째 방어기지였다. 하지만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파키스탄의 전략적 중요성은 떨어지고 이는 파키스탄 내의 실업문제와 관련된다. 즉 이제 파키스탄의 군사력을 어디에 팔아먹을 것인가? 이에 탈레반을 만들어냄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을 보이지 않게 통제하고 파슈투니스탄 지역에 대한 아프간 인의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세번째 탈레반에 대한 아랍국가들의 지원. 사우디 아라비아나 아랍 에미리트 같은 국가들은 이란과 경쟁관계에 있으며 이들은 이란에 맞설만한 종교적 세력을 찾고 있었다. 이들 나라는 자국의 현대적 이익이 이슬람 회귀주의자(이란)들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을 대신해 이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탈레반을 지목, 지원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이란을 경계하는 미국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으리라...

미국의 지원으로 성립된 정부였다는 정도의 탈레반의 성립배경에는 보다 주요한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이제 그 이용가치를 다하고 폐기처분되어진 탈레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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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근대에 대한 바른 이해. 계몽주의나 근대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치적 근대도 이루지 못한 우리같은 나라에서, 더구나 그 근대를 실현하기 위해 한참더 버둥거려야 할 나라의 사람들이 근대를 비판하고 나설때는 신중하고 사려깊은 자세가 필요하다.(사회적 근대란 결국 수직성의 사회를 수평성의 사회로 바꾸고 합리성을 확장하는 일이라고 볼 때 우리 사회는 아직 속속들이 수직서열사회에 머물러 있다.  - 반드시 근대를 통과해야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는 의문시되지만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

한국인, 한국사회의 여러 특징들에 들어가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한국인이 변화에 굉장히 빨리 적응하지만 실제 속으로는(여러가지 이데올로기, 관습같은 것들?) 잘 바뀌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변화에 빨리 적응한다는 것이 분명 적응력이긴 하지만 그게 정말 개체 생존이나 종족 보존에 유리한 적응인가 하는 문제는 남는것.

인간의 탁월성이란? - 첫째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지만 동시에 그 이기적 성향을 거스를 줄아는 존재이다. 둘째, 인간이 '지금 여기'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결박을 넘어 다른 것을, 지금 여기의 '너머'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최재천)

진화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다양성 증가'로볼 수 있다. 근데 지금의 인간의 모습은 바로 이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문제점을 보인다.지금 인간은 자기가 아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는 명민하지만, 모르는 문제들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굉장히 둔감하다. 그러다가 몰랐던 문제가 터지면 그 때 해답을 구하고자 하겠지만 스스로 다양성을 파괴한 상황에서는 그 해답을 찾을 길 자체가 파괴되고 없을 수도 있다.(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의 위력이 세계적이 된것도 생물종의 다양성을 인간이 끊임없이 파괴해온 결과로 볼 수 있다.)

13장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종 다양성이 중요한 것 처럼 인간 세계에서는 문화의 다양성이 중요하다. 이런 문화의 다양성은 지금의 세계화와는 어떻게 관계지어질까? 지금의 세계화는 시장의 원칙이 교육과 언론을 포함해서 사회의 공영역과 사영역을 모두 휩쓰는 것, 따라서 다양성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화를 반대한다고 해서 멈출수 있을 것 같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래도 기대를 거는건 세계가 단일시장으로 간다 하더라도 그 시장속에서는 자연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수한 다양성드링 보존되고 살아 숨쉴 수 있는 구석들이 여기저기에 생겨나고 존재하게 될거라는 믿음이다.(지나친 낙관주의? 하지만 이런 희망이라도 없다면 너무 암울하지 않은가?)

소련 붕괴 이후 현재 세계는 지나치게 단극화 되고 얇은 사회로 나아가는데 생태계에서 이런 사회 - 번식이 지나치게 너무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단다. 그러면 인간사회에도 희망이?

도정일씨가 주장하는 사회는 '두터운 세계' -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이다. 이 3다의 세계를 유지하는데는 무엇보다 '관용의 윤리학'이 필요한데 이때 관용이란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니라 다른 것, 타자, 타인, 차이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 나라는 주체가 타자에 대한 책임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필요한 것.

최재천 -호모 심비우스(공생 인간) -농업혁명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공생이다. 자연에서 혼자 사는 식물들을 데려다 키워주고 그 식물들이 공생을 통해서 굉장한 번식을 이룬 것. 바로 이 공생 덕택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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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1-19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숙제로 내줘도 이런 글 쓰기 싫을텐데....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

2006-01-19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6-01-1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저도 누군가 숙제로 내준다면 절대 못하죠... ^^
이 책이 진짜 대담이다 보니 읽을 때는 읽히는데 도대체가 정리가 하나도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잖아요. ^^
 

10장 섹스(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자연계에서 생물학적 성(sex)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꽃식물들은 처음에는 수컷에서 시작하여 암컷으로나아가며, 산호초에 사는 물고기는 우두머리 수컷이 죽으면 암컷들 중의 한마리가 수컷으로 전화한다. 인간 역시 처음에는 모두 암컷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순간 어떤 조작에 의해서 암컷의 생식기로 발달하려던게 갑자기 수컷 생식기로 발달하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 이러한 생물학계의 발견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동성애에 대해 가하는 주요한 공격 -자연에 위배된다는-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동물계에서는 거의 30%정도까지 개체들이 동성애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물들도 있다면 이걸 비정상/비자연으로 보는 것 자체가 웃기게 되는 것 아닌가? 누가 30%나 되는 개체군을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최재천씨는 조심스럽게 인간은 누구나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것이다라고 제기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사회적 성 (gender) -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신화는 여성의 탄생이 남성의 탄생이후 한참이 지난이후 판도라라는 최초의 여성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여성의 탄생이 아닌 '여성성'이라는 사회문화적 젠더의 탄생에 관한 신화적 처리라고 봐야한다. 또한 이것은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는 것의 시작인데 결국 이 분리는 권력분할의 시작이라고 봐야한다.

11장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인문학에서 프로이트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서구 근대의 합리성/주체 신화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라는 것.

그러나 과학자가 보는 프로이트는 과학의 객관성을 뒤집어썼을 뿐 과학적으로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는 허구의 산물이란다. 프로이트가 과학이라 부르기에는 검증성, 객관성 모두가 과학적이지 못한 비논리의 왕국을 왜 과학의 영토안에 세우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것. -프로이트의 출발점인 이드나 에고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과학 역시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중요할 수 밖에 없고, 그 패러다임 넘기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은 예술적 신화적 상상력과 비슷할 수 있다. 따라서 방법은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하되, 머리는 신화적으로 돌리는게 과학의 묘수가 아닐까? 즉 프로이트의 신화들이 비록 비과학적이라 해도, 거기서부터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이 비상할 수 있을 거라는 것(도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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