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부 - 숭고의 미 현인의 공간 - 조선중기의 산수화

  조선 중기 산수화에는 비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듯한 구도와 산수 표현, 붓질마서 몹시 성글고 거친 산수화면들이 적지않다. 기이하고 육중한 산이 번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산이야말로 진정 은거자가 거할 만한 깊고 깊은 공간이며 그 속에* 머무는 객은 분명 속세에서 멀리 떠나온 은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감상자는 이러한 그림속에서 깊은 산수 속 은자의 정신적 경지를 만끽하고,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경건하게 다잡는 수양의 매개물로 삼았다.
  결국 16-17세기 조선중기 문인사회에서 즐겨 감상된 단순화되고 과장된 산수형상과 거친 필치의 산수 이미지는, 물질을 초월한 정신적 소탈함과 꾸밈없는 소박함의 요소로 받아들였졌던 것이다.

1.산수인물도 - 산수는 뜻 높은 이의 은일공간으로 기호화하고, 산수보다는 산수속 인물의 높은 정신세계가 더 중시되었다. 이 때 인물의 대부분은 중국의 옛 현인들이며 이런 그림에는 중국의 성현을 전통으로 삼으려 한 조선 문인들의 이상과 사림의 도학적 이상이 서려 있으며, 한편 이상이 실현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도 반영되어 있다. (탁족도, 어부도, 기려도, 관폭도, 수면도 등)

2. 무이구곡, 주자선생 머물던곳 - 도학적 정신수양수단으로서의 산수화. 무이구곡도같은 그림과 감상은 조선중기 사림의 내면에서 주자철학이 종교적 차원에 가깝게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3. 관료문인들의 모임, 계회도 - 조선 중기 사림들에게서 유난히 성행하였던 그림. 이는 16세기 사림의 정계진출 및 그들의 정치 문화가 학문풍토와 관련을 맺으면서 크게 성행한 풍조임을 짐작케 한다.

  조선 중기 산수화는 엄격한 사림학자들에 의해 설정된 산수이미지였다. 현실이 혼란하면 마땅히 돌아가 몸을 깨끗이 보신해야 하는 공간이요, 현시로가 격리된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은 은자가 거할 만한 깊은 산이거나, 은자가 보란 듯이 버티고 앉은 공간 혹은 주자와 제자들이 노니는 무이산이엇다. 정작 실제 계회를 그린 계회 산수도에도 이런 산수 분위기가 표현되었던 것은, 그들이 산수관이 여실히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제 4부   체험과 소유, 서정의 산수경 - 17세기 후반-18세기의 산수화

1. 진경산수화의 뜻 - 진경산수화의 내용을 보면 문인들이 노닌(遊)산수와 또한 그들이 머문(居)공간이라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즉 진경산수화는 대부분 문인들의 산수유람이 기록된 산수화이거나 문인들의 저택이나 사당을 그린 그림, 또한 정자나 누대 등의 별장을 그린 그림들이다. (이는 민족적 자각으로 우리 산천의 실경을 그렸다라는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이상과 산상의 산수 관념에 유람과 거주의 체험을 반영하는 것이며, 문인들의 자기표현 욕구였으며, 나아가 우리 산천을 발굴하고 표현하는 열정의 과정이었다.

2. 유람을 기록한 산수화 - 18세기는 산수유람문화의 유행기였다. 동시에 그들의 관심역시 이전 시기처럼 명성이나 종교적 의미에 있지 않고 오로지 빼어난 산수풍광을 즐기고 느끼는데 유람의 목적을 두었다. 그 가장 큰 대상이 바로 금강산이었다.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면 그것은 화가의 눈에 비친 금강산의 한 장면이 아니라, 금강산 속 유명 명승지들을 한눈에 보이도록 재구성한 화면이다. 이는 유람을 즐긴 문인들이 방안에 앉아 유람의 추억을 되살려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외 단양, 동해, 한강의 뱃놀이등)

3. 머문곳을 기리는 산수화 - 이런 그림의 경우 외형은 산수와 건물이 어우러진 완연한 산수화이지만, 그림의 제화시를 통해 보면 그림의 주제는 대개 건물의 주인이었다. 조선중기의 이런 그림은 그곳의 실경보다는 학풍과 인덕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하는 명분이 더 중시되었다.
이런 산수화의 전통, 즉 산수화의 고상한 정신이라는 인식은 문인 개인이 경험한 공간 혹은 자신의 모습을 그러한 위상속에 담아 그림으로써, 스스로의 풍취를 세상에 보여주고 또한 그 풍취를 스스로 소유하는 만족의 표현이라고 할 수있다.

4. 아취있는 모임을 기념하는 산수화 - 조선 중기의 계회도속 문인들은 아소 경직된 자세로 질서 있게 앉아있는 반면 아회도 속 문인들은 자유로운 자세와 위치를 점하여 느긋하게 예술을 즐기고 있다.이런류의 그림은 모임의 체험과 개최된 실제 공간을 보여주고있지만 그 주제는 이상적 아취를 표현한느데로 치우쳐갔다. 이런 양상은 아회의 주인공이 중인층으로 확산되어가면서 더 두드러지게 된다.

5. 서정을 표현한 산수화 - 실경이 아닌 산수화들 중에 조선 후기에 새롭게 부상한 것으로 시의도(詩意圖)를 들 수있다. 이것은 유명한 시구를 회화로 표현한 그림인데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들이 철리적 이상으로 완전 무장된 은자의 고차우너적 달관의 세계를 지향하였다면, 시의도에서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감상 혹은 세속에 얽힌 개인 정감도 표현하려 한것이다.  진경산수, 실경산수화가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여 유람의 경험이나 소유의 욕망을 노출하여 보여주었듯이, 시의도 또한 개인 정감의 표출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지닌다. 나아가 조선 중기까지의 문화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경험적 내면이 표출되었다는점에서도 그러하다.

**정선과 윤두서의 차이(노론과 남인의 산수관의 차이)
  노론계는 개인 체험의 자득을 주장하며 산수 유람의 체험을 마음껏 즐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선이 나온다. 하지만 남인계는 절경을 극대화하여 표현한 산수화에 대하여 무익하다 하였고 그보다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그림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윤두서가 대표적으로 그는 새로운 문명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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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2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볼 만 할 겁니다 저도 다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바람돌이 2007-05-0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많이 배우고 좋았어요. 워낙에 무지한 부분이라 정리라도 하자 싶어서 시작했는데 역시 정리도 힘드네요. 역시 공부는어려워요. ^^
 

 

 

 

 

제 1부 산수화에 대한 이해

1. 산수화 발생의 사상적 배경
  동양에서도 생각만큼 산수화의 역사는 길지 않다. 산수라는 거대한 대상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그림으로 옮겨내는 작업은 자연을 조망할 수 있을만큼 문명이 발달하고 정신적 여유가 생긴후에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회화사에서도 인물, 화조, 동물 등의 장르들이 모두 발달하도록 산수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수화 발생의 토대가 된 산수 인식의 양상은
첫째, 고대의 신화에 근거한 산수관(상상속 산수) 
둘째, 유가와 도가 등 철학적 사유에 근거한 산수관(철리적 세계로서의 산수)  - 산수는 그 자체로 최고의 인격적 덕목을 가지며 그 자체로 도가 구현된 물상이며 나아가 고상한 인격의 발휘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라고 확정지어준다.
셋째, 산수문학의 발생과 관련한 산수관(정치적 이데올로기화된 산수) - 위진시대부터 시작. 정치적 혼란기에 산수은둔이 절대적으로 미화되었던 상황과 신선사상의 결합. 이전의 유가, 도가에서 확립된 산수관 등이 결합하면서 등장.

2. 산수화 발생의 회화사적 배경
  본격적 산수화가 발생하기 이전에 산수 표현은 짐승과 인간이 산봉우리보다 크게 배치되었고, 산수는 신비의 공간으로 조형화되거나 다른 주제의 배경으로 처리되었다.
 독립된 산수화는 수나라때 등장한 것으로 보여지며,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의 <산수문전>을 들수 있다.

3. 채색 산수화와 수묵산수화
산수화의 발달과정은 채색산수화에서 수묵산수화로 옮겨가는데 여기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필묵 매체와 문화 권력, 나아가 사상 배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독특한 문화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1) 필묵 그 자체가 지식문화의 상징물로서 암묵적으로 의미화 되어있었다는 것
                         2) 주요 사상의 심미적 지향성이 채색보다는 수묵의 세계와 잘 부합하였다는 것(노자 -"오채가 눈을 어둡게 한다" 공자 "사치스러움보다는 검소한 것을 택하겠다")
   산수와 산수화는 그 자체로 사상의 덕목과 문인의 정신을 표징하는 세계로 등장한 것이기에 수묵은 산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기법으로 자리를 굳혀간 것.

4. 산수화 내용의 이해
  1)북송대 - 커다란 화폭에 거대한 산을 그리는 '기념비적 산수' '영웅적 산수' - 深遠, 高遠, 平遠의 삼원론 과 군신의 질서가 반영된 산악의 구도가 이론화 된다.
 2) 남송대 - 감상적, 시적 분위기로 옮겨가는 드라마틱한 변화 - 새로운 삼원론 즉 넓게 트여 먼 산수(闊遠), 가물거리듯 먼 산수(迷遠), 그윽하게 먼 산수(幽遠) 등 망망한 공간감을 요구하는 산수화들이 등장. 높이 솟은 북송대의 산수와 대비된다.  또한 인물이 자연속에  묻힌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관망하는 주체적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도 달라진점.
3) 송대 이후 중국에서는 화원화가의 작품에 비해 솜씨가 떨어지는 문인화가의 산수화가 더 인정받는 특이한 역사가 형성된다. 결국 문인의 철학과 시인의 뜻으로 그려낸 이미지라는 관념이 등장하는 것. (원나라때부터 크게 성장)
4)명의 대표적인 화풍
    절파 - 화원출신의 직업화가들. 어부나 은둔자 혹은 전설적 인물이 등장하는 주로 상상의 산수, 조선 초기의 화원과 문인들은 대부분 절파의 화풍을 응용
   오파 - 문인화가들. 화가 자신의 문화공간을 그리는 경험산수가 많음. 문인의 자부심과 자기표현의 수단. 조선후깅는 진경산수화의 경우처럼 근원적으로 오파에서 시도된 경험적 주제가 활용됨.
5) 명대 말기 동기창의 남북종론 - 남종은 문인화의 계통, 북종은 화원화풍으로서 남종은 본받을만하지만 북종은 배워서는 안된다는 극단으로까지 나아감.  이후 남종문인화풍의 모방에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고 우리나라 19세기 회화의 배경이 된다. 이후 결국 문인산수화가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게 된다.


 제 2부 영원과 초월의 시간 - 여말 선초의 산수화

1. 푸른 산 흰구름의 영원, 청산백운(靑山白雲)
 <청산백운>이란 일상의 산수경에서 멀리 벗어나 다소 환상적 시공간으로 각인되어온 산수 이미지.
즉 선험적 상상의 관념경이자 다소 과장된 낭만경이다.
극심한 정치적 변혁을 거치는 시기에 이런 지극히 고요하고도 신비한 산수그림이 최고의 인기를 누린것은 '이상사회로 향하는 문사들의 역동적, 긍정적 에너지와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순간을 현현하는 그림으로 청산백운도가 맞아떨어진 것이 아닐까?

2. 계절의 정취, 사시팔경
  사계절을 표현하는 산수화들도 많이 그려졌는데 특히 풍우가 몰아치는 여름, 눈 소복이 쌓인 겨울이 많이 그려졌다. 이는 계절 감각의 극단적 표현이면서 동시에 관념적 계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시도 역시 특정한 지역의 구체적 산수경이 아니며, 각 계절의 에센스를 불변의 이미지로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청산백운을 영원의 자연경으로 감상했던 태도와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또한 조선 초기의 관각문인들이 사시 팔경의 자연 질서와 농촌 겨오간을 즐겨 읊르며 행복한 위정자의 입지를 보여주었던 것을 고려하면, 순조로운 보편질서의 자연향유로서 '사시도'가 그들에게 적절하였으리란 것도 추정할 수 있다.

3. 이국의 정취, 소상팔경
소상팔경이란? - 중국의 소강과 상강이 흘러들어 호수를 이룬 동정호 일대의 경관
8개의 그림이 짝으로 병풍으로 그려지기도 하나 하나씩 떼어 단품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단품으로 그려질 경우 역시 비바람치는 여름밤과 눈 쌓인 겨울 저녁이 애호되는점은 사시도와 거의 유사하다.
   ---- 조선 초기에 그려진 우리 산수 - 산수화의 주된 영역이 아님
      1. 행정적, 외교적 차원에서 그려진 금강산도 -제화시문이 없는것으로 보아 감상용은 아니었던 듯
     2. 관료 문인들의 계회, 야유, 혹은 별장등을 그린 한강 유역의 풍경 -산수풍경이 주제가 아님
     3. 조선초기 문인들의 제화시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박연폭포도

4. 꿈속의 산수경, 몽유도원
1. 일반적인 방향과 반대로 좌에서 우로 진행된다.
2. 안평대군의 글에는 인물이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안견의 그림에는 인물이 없다
3. 화면의 구도가 독특하다. 동굴을 통과하여 도원이 드러났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하여 도원의 사방을 거대한 동굴 입구로 처리한 점. 도원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그렸으나 왼편에는 지평선이 존재하는등 화면의 시점의 왜곡

몽유도원도에 부쳐진 제화시들은 두종류로 구분. 하나는 화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안평대군의 꿈을 유가적, 현실적의미로 해석. 다른 하나는 화면에 없는 장면을 상상으로 읊으면서 안평대군의 꿈을 도가적 사유나 신선세계로 해석하였던 것. 전자는 건국의 분위기 속에서 번영을 도모하던 당시의 건설적 기상이 그대로 그림감상에 반영된 결과라면, 도가적, 상상적 면모는 권력과 부귀를 누리는 관료들이 느껴야 했던 인생과 벼슬길의 낭만적 허망감을 반영하는 이면의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조선 초기 문사들은 유가적 현실과 도가적 환상이 공존하는 낙관적 세계를 살았던 점이 산수화 선택이나 감상에 나타났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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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7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7-04-17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저도 산수화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게 없어서 궁금했거든요. 근데 재밌네요. 밀린책은 저도 장난이 아니옵니다. ㅎㅎ
 

인터뷰어  그날 아침의 사건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토모야시   저는 제 딸아이 마사코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딸애는 일하러 나가는 길이었죠. 전 친구를 만날 예정이었고요. 그때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 전 마사코에게 집으로 가겟다고 했어요. 그애가 말했죠. "전 사무실에 가봐야겠어요." 전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면서 경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렸죠.
침구를 갰습니다. 벽장도 정리하고요. 물걸레도 창문도 닦았지요. 그 때 번쩍하는 섬광이 일었어요. 처음에는 카메라 플래시이겠거니 생각했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소리지요. 섬광이 눈을 찔렀어요.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주변 창문들의 유리가 죄다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저한테 조용히 하라고 쉿 하실때와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전 서있지 않았어요. 다른 방으로 날아가 있었답니다. 제 손에는 아직 걸레가 쥐어져 있었지만, 이젠 바싹 말라 있었어요. 그때 머릿속에는 온통 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이웃 사람 한 명이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꼴로 서 있더군요. 피부가 몸 전체에서 벗겨져 내리고 있었지 뭡니까. 피부가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었다니까요. 저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지요. 그는 너무나 기진맥진한 나머지 대답도 못했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가족을 찾는구나 싶었어요. 저는 생각했지요. 가야 해. 가서 마사코를 찾아야 해.
저는 신발을 꿰어 신고 공습 대비용 두건을 챙겼습니다. 기차역으로 향했지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저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구궁 오징어 비슷한 냄새가 났어요. 저도 혼비백산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가봅니다. 사람들이 바닷가로 쓸려 올라온 오징어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한 어린 소녀가 저를 향해 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애의 피부가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마치 밀랍같았습니다. 그 애는 나지막이 중엉거리고 있었어요. "엄마, 물, 엄마, 물" 전 그 대가 마사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저는 그 애에게 물을 주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마사코를 찾아야 했어요.
저는 히로시마 역까지 내내 달려갔습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지요. 어떤 이들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누워 있었어요. 그들은 어머니를 찾으며 물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저는 토키와 다리로 갔습니다. 딸의 사무실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거든요.

인터뷰어   버섯 구름은 보셨습니까?

토마야시  아뇨 구름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어  버섯구름을 못보셨다고요?

토마야시  버섯구름은 보지 못했습니다. 마사코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인터뷰어   하지만 구름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요?

토마야시  딸애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니까요. 사람들이 저에게 다리를 넘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 딸이 집으로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니기쓰 신사까지 왔을때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뭔가 싶었죠.

인터뷰어  검은 비를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토모야시   전 집에서 딸을 기다렸습니다. 유리는 다 깨지고 없었지만 창문을 열어두었죠. 밤새 뜬눈으로 딸애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다음 날 새벽 6시 30분쯤 이시도씨가 찾아왔습니다. 그이의 딸도 우리 애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는 마사코의 집이 어디냐고 큰 소리로 왜치고 있었습니다. 전 밖으로 달려나갔지요. "여깁니다. 여기예요!" 이시도 씨는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지요. "발리요! 옷가지를 좀 챙겨서 따님한테 갑시다. 지금 오타 강 강둑에 있어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지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뛰었습니다. 토키와 다리에 닿자, 땅바닥에 군인들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히로시마 역 주변에서는 더 많은 시체를 보았습니다. 7일 아침에는 6일보다 더 많았지요. 강기슭에 갔더니,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나는 계속 마사코를 찾아다녔습니다. 누군가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 귀에 익은 목소리였어요. 나는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몰골을 한 딸애를 찾아냈습니다. 그 애는 요즘도 그런 모습으로 내 꿈속에 나타난답니다. 그 대가 말했어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나는 딸애에게 미안하다고 했지요. "최대한 빨리 온거란다." 거기에는 우리 둘뿐이었어요. 어떡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전 간호사가 아니었으니까요. 딸애의 상처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끈적끈적한 누런 액체가 고여 있었습니다. 저는 딸애를 닦아주려고 했지만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어요. 구더기들 천지였는데도 그것들을 닦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손으로 일일이 구더기를 집어내는 수밖에 없었지요. 딸애가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오, 마사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홉시간 후, 딸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터뷰어   그동안 내내 따님을 팔에 안고 계셨습니까?

토마야시   네. 제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딸애가 말했어요. "죽고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넌 죽지 않을 거다." 그랬더니 딸애가, "집에 가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렇지만 그 애는 고통스러워하며 계속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인터뷰어   이런 얘기를 하신다는 것이 참으로 힘드실 겁니다.

토모야시    여러분의 단체가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꼭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딸애는 제 품안에서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군인들이 어떤 제복을 입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좋은 무기를 가졌는가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봤던 것을 모두가 볼 수만 있다면, 다시는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중 258쪽-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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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전쟁의 고통이 또는 핵의 고통이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우리에게 해방이었던 히로시마 원폭투하가 인류에게는 얼마나 큰 재앙이었는지를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건 참 힘들다.
워낙에 잔인한 장면에 길들여져서였을까?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에서는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한다.   때로는 핵폭탄 떨어뜨리면 돼요라는 말을 농담으로 삼기도 하고....
내년 수업 자료에 포함시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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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1-08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에 이런 내용도 나와 있군요. 아........ㅠ.ㅠ

바람돌이 2007-01-0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심글은 아니고 주인공 오스카의 학교 발표문이에요.

rosa 2007-01-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업자료..란 말에 눈이 번쩍 뜨여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몇 줄 적습니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 가운데 열 명 가운데 한명이 조선사람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합천에 원폭피해자 복지회관이 있다는 것, 원폭피해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2세,3세가 여전히 한국땅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함께 얘기해주면 어떨까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한국의 히로시마>란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바람돌이 2007-01-1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osa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국의 히로시마>란 책은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헤바 2009-04-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간은 왜 그래 다른 인간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지 모라겠어요
도대체 줌졌던 그 모든 사람은 어떤 죄를 지절렀어요?
참 인간은 그 비인간적인 행동을 어떻게 하는 지 이해가 통 안 가요

바람돌이 2009-04-14 22:32   좋아요 0 | URL
평범한 상황에서의 보통 인간들은 대부분이 저런 짓을 자신이 저지를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죠. 그런데도 세상에 저런 일은 널려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극이겠죠.
 

 

 

 

 

'고고학자들의 노력과 일반 관광객의 기대는 사뭇 상충된다. 관광객들은 좋은 그림만을 원한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그들은 온갖 문명의 이기를 동원하여 편리하고 한가하게 앙코르까지 여행을 와서 1860년 앙코르를 발견한 앙리 무오가 느꼈을 감탄과 경이로움을 체험하고자 한다. 이들은 시대착오적인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장쾌한 효과가 있는 낭만적인 풍경, 거대한 나무뿌리가 유적을 반쯤 삼키고 있는 폐허다.'(151쪽)

이 책의 저자의 말은 아니고 앙코르 왓트의 완전한 해체 복원을 주장했던 고고학자 모리스 글레즈의 연설문 중 일부란다.
결과는 일부는 해체복원하고 일부는 즉, 영화 <툼 레이더>를 찍었던 따 쁘롬 사원 같은 것은 정글의 나무들이 뒤엉킨 그대로 유지하고 하는 식의 절충으로 갔단다.

근데 읽으면서 뜨끔하다.
온갖 문명의 이기를 동원해 지 몸 하나는 편리함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얼토당토않은걸 요구하는 관광객이라니......
지금 앙코르 와트에 필 꽂혀있는 나를 딱 정확하게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나를 객관화 시켜 보는 눈은 불편하다.
나의 치부를 들킨 듯 부끄럽고 괜히 화끈거린다.

좀더 몸과 마음을 낮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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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1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코르에 필 꽂혀있는 거랑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랑,, 저도 꼭 같으네요..

sooninara 2006-12-1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들 안그러겠어요? 관광하러가면 편하게 놀다 오길 바라게 돼죠.
백제의 수도다 아니다 하면서 싸우는 몽촌토성쪽 보면...사유재산과 공공의 이익에서 저도 재산권이 침해 당한다면 싫을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ㅠ.ㅠ

바람돌이 2006-12-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님도 그러세요? ^^;;
수니나라님/몽촌토성과 같은 경우 개인의 재산권은 국가가 보장해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전과 유물보존을 생각해야지요.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면서 국가가 보전해주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대의를 위해 너 희생하라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어깃장을 놓는 경우도 있죠. 그런 경우도 설득을 해야죠. ^^;;

2006-12-12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6-12-12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넵! 알겠습니다. ^^
 

9.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
* 아나키즘- 정당한 국가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 내의 제도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강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모든 강제적 권위행사를 부정했다. 따라서 아나키즘이 지향한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이 적정규모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연대하여 점차 큰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데 있었다.
흔히 생각되어지듯이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는 188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로서 '무정부혼란상태'라는 혼란이 강조된 의미의 번역어이다.
하지만 권력에 대항한 아나키즘의 목표는 '무정부' 상황에 놓이는것이 아니라 권력의 분산에 그 주안점이 있었다.오늘날 아나키스트는 '자유사회주의', '자유공산주의'등의 용어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우리나라 식민지 시기 조선의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즘과 결합했다.(김원봉, 윤세주 등의 '조선 의열단') 이들의 테러는 테러 그 자체가 아니라 선전수단으로서의 테러의 역할을 강조. 봉기나 총파업같은 민중의 직접행도이 계속해서 일어나서 모든 민중이 참가하게 되면 결국 일제의 식민지 권력과 자본주의 사회는 타도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 아나키스트들이 이후 개인 단위의 테러리즘 대신에 군사훈련을 바탕으로 한 무장투쟁으로 바꾸고 점차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정당형태로 변화해간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오늘날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은 국가사회주의 붕괴이후 전일적 체제로 자리잡은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자치, 민주, 환경드으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해 줄것이다.

10. 반탁은 있었지만, 찬탁은 없었다
흔지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인 신탁통치안에 대해 우익과 좌익이 반탁과 찬탁의 논리로 대응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처럼 통한다. 그것을 상식으로 전파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역시 국정 국사 교과서다.하지만 정확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찬탁이라는 용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좌익이 주장한 것은 모스크바 3상 협정에 대한 지지였지 찬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모스크바 3상협정의 내용인데 그 내용은,
첫째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조선인들로 조직한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의 민주적인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도록 한다.
셋째, 최고 5년을 기한으로 하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미영소중 4개국에 제출한다는 것이다.
결국 당시의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던 한반도의 상황에서 통일정부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인데 주목해야 할것은 셋째항이 절대적인 결정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익은 3항을 절대적인 결정사항으로 왜곡하고 좌익의 의견을 찬탁으로 몰아부쳐 나라를 팔아먹는 것으로 흑색선전을 남발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남북의 분단이라는 상황을 낳고야 말았다. 따라서 찬반탁운동은 찬탁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고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이제 '3상협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1. 한국전쟁/6.25를 기억하는 방식
세상에 전쟁의 시작을 기념하는 나라는 없다. 그것도 내전의 시작을.... 6.25 한국전쟁에 대한 필자의 다른 의견들도 경청할 만했지만 남한의 6.25기념일을 폐지하고 북한의 7.27 전승기념일을 역시 폐지하고 전쟁이 끝난 7월 27일을 남북공동으로 '한반도 평화의 날'로 설정, 전혀 다른 의미로 기념하자는 말이 와닿는다. 아 이런 발상의 전환도 있구나싶은 생각.

12. 외국 국가명 표기를 바꾸자
현재는 우리나라의 공식적 외국어 표기는 인명이나 지명에 대해 소리나는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공포한 바 있다. 하지만 관습적으로 써오고 있는 국가의 명칭에서 한자어로 표기된 것을 음역하거나 의역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 영구, 중국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명칭들은 19세기 말에 대부분 정착된 것들인데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필자는 바로 이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다. 뭐 여러번 얘기된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이라는 이름에 어쩔수 없이 풍겨지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이미지. 중국이라는 말에서 또한 감지되는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의 이미지.... 관습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관습은 또한 만들어 나가는 것. 원래 그들의 발음대로 유에스에이나 쭝궈 같은 용어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동의한다.

13. 간도, 간도출병
문헌에서 '간도'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80년대이다. 이 시기 간도는 두만강 맞은 편의 개간지를 가리키던 것인데 이후 일본이 간도문제에 개입하면서 그 범위가 남만주 일대로 확대된다.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인식은 일본의 간도 인식에 기반해있다.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간도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국수적인 고토 회복 의식은 간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중국측의 입장에 반대하면 할수록 만주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서 간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와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간도문제는 좀더 공부가 필요하다. 지금 현재의 교과서는 아주 애매하게 처리해놓은 상태. 백두산 정계비를 근거로 간도가 우리땅이다라고 하고 일본의 간도협약의 불법성을 강조하지만 교과서 서술 자체가 헛점이 너무 많아 어디서 치고 나와도 무너지기 딱 알맞다.아니 애초에 남만주 일대를 우리땅으로 설정하는 논리 자체가 결국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간도는 독도와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건 그렇고 공부는 해야겠구만....

14. 중국 애국주의의 실체
현재의 중국애국주의를 보는 우리나라의 관점은 '신중화주의론'내지는 '중화패권주의론'으로 보는 관점이 하나다. 주로 동북공정에 피튀기며 분노하는 주류 언론과 한국의 중국 연구자들이 보고 있는 시각이다. 다른 관점 하나는 중국의 애국주의는 아직은 민족주의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중국의 애국주의를 신중화주의나 중화패권주의론으로 보기 위해서는 중화주의의 핵심인 화이사상과 중국중심의 위계적 세계체제의 구성노력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 중국의 행보에는 어디에도 그런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애국주의는 중국민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서구 중심주의와 같은 계서적 차별의식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또한 중국은 미국과 달리 일방적으로 타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거나 자신들이 규정한 민주주의적 가치 실현을 표방하며 군사력까지 동원해 특정한 국가를 자국의 이해관계의 희생물로 삼는 역사는 만들고 있지 않다. 그외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이나 동북공정도 보다 차분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팽창주의적이라기 보다는 발전주의적 제3세계 민족주의에 보다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애국주의는 민족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중화주의로 보는 것은 어쩌면 중국이 중화상상을 가지고 있던 중국의 연속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단절의 역사를 가져왔다는 것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태도일 수 있다. 또한 그 연속선상에서 지나치게 미래에 그러하리라는 추측으로 중화주의라는 딱지를 세우는 것은 성급한 오류 내지는 중국을 미리 견제하고자 하는 진짜 패권주의 국가 미국의 논리를 그냥 따라가는 것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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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9-28 0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정리해주시고 계시네요. 감사해요^^ 전 보관함에 두고 아직 사보지 못했거든요. 리뷰도 기대합니다.

바람돌이 2006-09-2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이 카테고리는 정말로 저의 주관적인 책 정리라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뭐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도 제가 잘 아는 얘기나 아이면 저에게 정리의 필요성이 없는 부분은 다 빼버리니까요. 그래도 뭔가 한가지라도 다른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고요. ^^ 글구 리뷰도 하는김에 어젯밤에 그냥 써버렸답니다. 덕분에 오늘 늦잠자서 아침에 무지하게 허둘거렸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