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를 얘기하자면 수하르토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공적, 도살자 -공산당의 쿠데타를 빌미로 미국의 지원하에 집권한 이래 32년에 걸쳐 아체, 동티모르, 파푸아, 탄중피낭 등 인도네시아 전역을 학살의 피로 물들였다. 그럼에도 그의 아주 평온한 죽음(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가)앞에 인도네시아인들은 정치적 사면을 얘기한다. 결국 여전히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패거리들의 나라다. 

인도네시아는 742개 종류의 다른 언어 또는 방언을 사용하는 300여 종족으로 이루어져있다.
네덜란드에서 독립할 당시 수카르노는 '다양성의 통합'이라는 모토 아래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국민국가의 건설을 주창했다. 그리고 그 구호는 어느 곳보다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쩌면 종족과 언어, 문화, 종교, 역사의 차이가 국민국가와 같은 더 큰 단위를 지향하는 통합의 과정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인도네시아에 아체와 자유파푸아운동처럼 종족 또는 지역간 갈등이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근원은 종교,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유전, 천연가스, 금과 구리와 같은 천연자원의 존재와 이 자원을 둘러싼 부정과 부패, 독점적 수탈이다. 수하르토 시절 군부는 다국적 석유 메이저들과 결탁해 아체의 유전과 가스 광산지대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에 나섰고 그 경제적 이익을 독식했다. 

오늘의 인도네시아를 보여주는 사건 하나
2001년 2월 중부 칼리만탄의 항구도시인 삼핏에서 이주민인 마두라족에 대한 다약족의 대대적인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목재산업을 위해 무분별한 벌목이 벌어지면서 다약 원주민들은 숲과 땅을 잃었으며 심한 박탈감에 빠졌다. 마두라족은 이런 벌목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주해온 빈곤층이었고.... 그러면 왜 같은 어려운 처지의 마두라족이 다약족의 표적이 되었을까?
이 책에서 마두라 이주민 학살의 주범은 칼리만탄에서의 지역 패권을 겨냥한 다약 지식인들을 지목한다. 19세기 말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원주민 출신의 도시 중간계급들은 수하르토의 집권하에서는 군부독재와 야합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취하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수하르토의 퇴진 이후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이들은 이권에 뛰어들어 불법벌목, 금광개발, 습지 개발 등에 개입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치권을 강화하기로 했고 그 수단으로 마두라 이주민에 대한 인종학살이 이루어졌다. 2001년 이들은 중앙정부에 마두라 이주민들을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 책임을 물었다. 중앙정부는 무력했고 이들 다약 엘리트 그룹은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다. 인종주의는 신기루와 같다. 존재하지 않지만 필요한 자들이 엮어 만들어 다중을 현혹시킨다.  

말레이시아
부미푸트라=말레이계 무슬림의 나라.
말레이시아에서 부미푸트라는 교육과 공공기관 취업, 자본취득 등 모든 분야에서 제도적인 우대를 보장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부미푸트라가 아닌 이들은? 중국계와 인도계, 그리고 이슬람이 아닌 말레이인.
네덜란드 식민주의가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인 이주민들을 원주민들과의 사이에 두고 식민통치의 중간 계급으로 삼은 것과 달리 술탄군주제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말레이시아의 영국 제국주의는 중국인과 인도인을 식민통치기구에 중요하게 배치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말레이시아의 공산당은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다. 가장 최하에 있는 이들이므로...
영국은 말레이시아의 좌익을 초토화시킨 1957년에야 말레이시아를 독립시켰다. 1946년 창당한 반공우익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이른바 암노에게 권력을 안겨준것.
술탄 왕족 출신이 장악한 암노는 말레이계의 주도권과 기득권을 주창했으며 비말레이계의 참여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인종정당이었다. 
영국의 식민지 인종분할 지배 정책 - 영국은 공산주의 운동을 중국인의 운동으로 호도함으로써 말레이계의 경계심을 심화시켰다. 또한 술탄 군주제를 존속시키고 암노와 같은 반봉건적 정치세력을 육성해 전면에 내세우고 지배세력화 했지만 우세한 인종주으로, 저항없이 말레이계 대다수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중국계와 인도계는 단지 부르조아계급의 포섭만으로 불만을 희석화 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인종주의는 말레이시아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 이데올로기였다.
오랜 기간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인종주의적 구도에 금이 가기 시작함을 보여주는 사건, 2008년 총선 - 암노의 인종주의 정책, 특히 부미푸트라정책을 반대하는 정당들의 약진을 보여준다. 말레이시아는 과연 인종주의를 청산할 수 있을까? 두고 볼일이다. 

필리핀 
450년 동안의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손에 넣은 지 6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필리핀의 최대 현안은 지금도 토지개혁이다. 지주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 계급이 외세에 의존해 여전히 상층계급을 이루고 있으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 무력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은 필리핀의 현재와 미래를 불안과 분노 안에 가두고 있다. 필리핀 공산당과 신인민군이 여하튼 40년동안 입지를 상실하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부 루손 신인민군 최고정치위원이라는 60대의 여성은 말한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단순한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족들이 몸을 누일 집이 있는 그런 세상이지요. 그게 뭐 대단한가요. 꿈이랄 것도 없지요. 필리핀의 다음 세대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겁니다." - 아 정말 이 대단치 않은 소망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인지... 
필리핀의 이멜다는 마르코스 사후 1991년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그녀의 구두를 모아 박물관을 열었고 대통령선거에서 출마하고 하원의원에 당선도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은 주지사에 딸은 시장이 되었다. 요컨대 전 세계를 열광케 했던 피풀파워이후의 필리핀은 불행히도 변한게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필리핀 정치는 250개 가문이 지배하는 패밀리 비즈니스이다. 가문 대부분은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 통치 아래 부를 누려 온 이른바 하시엔테로스, 즉 대지주 가문이다. 베니그노 아키노, 코라손 아키노, 마르코스, 이멜다, 현재의 대통령 아로요까지 이들이 모두 대지주가문 출신이다. 이들 가문은 대통령 자리뿐만 아니라 중앙의회와 지방의회, 관료 군부할 것 없이 모두 이들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 필리핀은 공화국이지만 사실은 귀족 계급이 지배하는 봉건사회와 다를 바 없다.  
인구의 80퍼센트인 6천9백만명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해야 하는 빈곤층에 속하며 60퍼센트가 1달러 이하인 절대빈곤층에 속하는 필리핀의 오늘은 이 극악한 봉건적 지배체제의 온존이 빚은 결과이다.  

베트남
지난 10년간 베트남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도이모이(개혁, 개방)정책.
그러나 그 이득은 한줌의 무리들에게 독점되었다. 일당독재와 무력에 기반한 철권통치는 요동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는 세계 최악이다. 그 핵심에 베트남 공산당이 있다.
베트남에서 식민지 독립전쟁 특히 미국과의 전쟁은 베트남 공산당의 정통성의 뿌리였으며 전후 체제유지의 근간이었다. 특히 호치민 사후 그를 대신할만한 인물이 부재한 가운데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했던 집권세력에게 전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치민의 우상화와 함께 체제의 정통성을 지킬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전쟁 이후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소련의 편에 섰던 베트남은 중국과의 불화와 전쟁, 캄보디아 침공과 등 끊임없는 전쟁으로 각을 세웠다. 그 결과 베트남의 대내적 지배체제는 강화되었지만 전후 사회주의 국가건설은 도외시되었고, 그 대신 독재의 강화와 민주주의의 약화, 경제의 피폐화 과정에서 인민의 고통은 배가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 도이모이는 스탈린주의적 개인 숭배 사회주의 체제의 베트남 인민을 천민적 강탈자본주의의 지옥으로 빠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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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5-1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돌아왔어요... 바람돌이가... ^^
댓글이... 뭥미? ㅠㅜ

바람돌이 2009-05-18 22:16   좋아요 0 | URL
정말 댓글이 뭥미???? ㅎㅎ 돌아오긴 뭘 돌아와요? ㅎㅎ

글샘 2009-05-20 14:02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가 책먹고 있는 그림이요. ㅋ

바람돌이 2009-05-22 23:48   좋아요 0 | URL
아 서재 이미지 바람돌이...
제가 이렇게 아주 가끔이지만 띨하게 못알아 들을때가 있어요. 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05-19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록 대동아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은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일리안자야의 아체족들과 접촉했다는 것을 읽고 정말 놀랐어요.그 옛날에 그 밀림 속으로...
<일제하의 동남아시아>(한국외국어대 출판부)도 괜찮아요.
다약족과 마두라족의 갈등을 보니 정말 착잡하네요.

바람돌이 2009-05-22 23:50   좋아요 0 | URL
실록 대동아전쟁? 옛날 우리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무지 오래된 책 아닌가요? 하여튼 이런 책 인용하는 노이에님보면 정말 너무 대단하다는 감탄밖에는... ^^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은 워낙에 복합적이라 함부로 뭐라 못하겠어요. 역시 공부해야겠죠? ^^

노이에자이트 2009-05-23 00:28   좋아요 0 | URL
그 책 좋아요.10권 짜리.제가 헌책방에서 구한 뒤로 광주에선 안 나오더라구요.
동남아 현대사 공부하려면 결국 영,불,화란 제국주의와 일본제국주의의 충돌을 공부할 수 밖에 없지요.바람돌이 님 정도면 도전해볼 만한 분야입니다.

바람돌이 2009-05-23 01:30   좋아요 0 | URL
노이에님이 권하는 책은 알라딘 검색에 안뜬다는 단점이... ㅎㅎ
칭찬은 감사하지만 제가 괜히 잡식성이겠어요? 공부도 어찌나 얕은지 하나를 지긋이 오래 붙들고 못한답니다. 늘 이것 저것 얕게 얕게 훑고 다니는게 천성인지라.... 아마도 동남아역사도 여기저기서 이렇게 찔끔거리고 보는게 다겠죠..ㅠ.ㅠ
 

 

 

 

 

 

 

1.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속설 - 한양에 새 도읍을 정한 후 둘레의 원근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모양이다. 그래서 눈이 쌓여 생긴 울, 곧 '설(雪)울'이라는 말이 생겼고 그것이 '서울'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삼한시대의 '소도'에서 유래 찾기 - 소도의 '소'와 새벌의 '새'가 지닌 음가의 유사성에 주목, 고어에서는 '새' '소' '쇠'가 모두 같은 뜻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그 말은 솟다나 솟대에서처럼 높이 솟아있음, 또는 신성함의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서울'이란 '솟은 울, 즉 솟벌, 솟울에서 온 말이 된다. 근대 이전 수도는 정치의 중심일뿐만 아니라 종교, 이데올로기의 중심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수도를 신의 땅, 신의 울로 부른것은 당연하리라..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의 '신시'와도 통한다 하겠다. 

2. 정도전의 서울과 이방원의 서울
새 수도의 건설에서 정도전은 <주례>의 가르침을 최대한 따르고자 했다. 전조후시(궁궐을 중심으로 앞쪽에 조정을, 뒷쪽에 시장을 두는 것,) 좌묘우사(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제후칠궤(궁궐앞 도로 폭은 마차 일곱대가 지날 수 있는 너비)같은 것. 또한 서울의 모든 공간요소를 공적으로 분배하고 관리하고자 했는데 그 의도가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궁역(왕과 그 일족의 사적공간)과 궐역(왕과 신하들의 공적공간)이 명확한 경계 위에서 구분된 궁궐이었다. 중앙의 축(한 가운데 중전을 중심으로 왕의 침전, 편전, 정전으로 이어지는)을 경계로 하여 동편에는 세자궁(동궁)과 대비전이 들어서 궁역이 되었으며, 서편에는 궐내각사가 들어선다. 중전의 뒤편은 후궁으로 왕을 위한 사적공간이었다.
정도전의 경복궁은 궐역을 위한 배려가 많은 곳이다. 경복궁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은 근정전이지만 개념상 가장 큰 건물(즉 건물의 칸수)은 궐역의 수정전(세종때 집현전)이다. 왕의 사적공간인 후원의 향원정이 아담하다면 왕과 신하의 합동연회장인 궐역의 경회루는 웅장함을 자랑한다. 결국 왕권에 위축되지 않는 신권, 재상에 의한 정치를 표방했던 정도전의 생각이 집약된 곳이 경복궁인 것이다.  

이방원은 이런 정도전의 생각을 밟고 왕 중심의 수도를 구상한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고 서울로 환도한 이후 창덕궁을 짓고 종로에 행랑을 건설하여 시전을 만든다. 결국 정도전의 원칙, 전조후시니 좌묘우사의 규칙은 여지없이 무너진 것. 어쩌면 이방원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 권력을 바란 것인지도..그에겐 왕의 사가 곧 공이었다.
창덕궁은 이런 이방원의 생각이 잘 드러난 궁궐이다. 창덕궁에서는 궁역과 궐역의 구별이 쉽지 않고 궐내 각사는 왕의 전각에 부속되어 있다. 또한 왕의 후원은 무척 넓고 잘 가꾸어져 있지만 신하들을 위한 공간적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창덕궁후원이 그렇게 넓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데는 이런 이유가....  

3. 서울의 거지들
조선시대 서울에서 거지의 집단화, 직업화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양란 이후부터였다. 그 이전에도 거지가 있었지만 일시적인 경우가 많았고 오랫동안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거지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문제는 전란의 휴유증의 그럭저럭 수습되고 더 나아가 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거지와 함께 서울의 인구증가는 폭발적이었다.
이것은 전란 이후 생산력의 향상과 결부되어지는데 즉 농업노동력에서 잉여노동력이 발생하고 그들이 바로 서울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 이 시기의 거지는 빈곤화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빈부격차확대의 산물이라 하겠다.  거지들은 주로 다리밑을 주거지로 해서 살았는데 영조대에 이루어진 준천은 새로운 거지 '땅거지'를 만들어낸다. 즉 준천을 통해 개천바닥에서 퍼 올린 흙을 마땅히 처리를 못해 청계천 수문 근처에 쌓아두었는데 하다보니 두개의 산이 되어 버린 것. 결국 다리 밑을 차지하지 못한 거지들이 이 산에 땅굴을 파고 살기 시작했고 이들을 땅거지라고 불렀다. 영조는 이들을 방치할 경우 심각한 치안문제가 생길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줄 심산으로 뱀을 잡아파는 독점권을 주었다. 여기서 땅꾼이란 말이 생겼고, 1960년대 청계천변의 무수한 뱀탕집의 유래가 여기서 시작된다.   

4. 도시와 농촌의 시간적 구분짓기 - 촌뜨기
근대 이전 도시와 농촌은 공간을 달리하고 삶의 양식을 달리할 뿐 서로 다른 시간대에 위치한 공간은 아니었다. 즉 촌뜨기라는 말에서 풍기는 후진적인 세련되지 못한이란 의미는 없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적 구분은 근대의 산물이다.
18세기부터 권력자들은 더 이상 낙향하지 않는다. 서울에 무조건 남아 경화거족이 되어 권력과 부, 사회적 지위를 세습적으로 독점했다. 이 독점을 위해서 온갖 불법적인 방법(과거제의 폐단 같은 것)이 동원되었지만 심지어 합법적인 방법을 만들기까지 했다. 즉 17세기 중반부터 서울 문체와 시골문체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 - 사륙변려체라고 해서 중국 육조와 당에서 유행했던 4자의 구와 6자의 구를 대구로 배열하는 문체를 쓴 과거 답안만을 급제시킴으로써 원척적으로 농촌출신을 배제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서울과 시골 사이에 시간적 장벽이 쌍여갔다. 

5. 서울의 정자문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시와 은폐의 변주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조물이 바로 정자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한강 줄기를 굽어볼 수 있는 강안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위치 자체가 아주 '과시적'이었던 것.  하지만 이러한 입지는 과다한 노출 역시 피할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어 그 안에서 노는 사람들은 주변의 눈을 의식, 스스로 삼가하는 행태를 보여야 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왕실붙이들의 정자가 많았었는데 대관들 역시 정자를 지었다. 하지만 압구정이니 효사정같은 건물들은 과시를 위해 건물의 선 모습은 오만하게 짓되 자리잡은 터는 왕실의 눈치를 보아 나름대로 겸손한 아래쪽에다 짓는 절제된 과시를 보여준다.
이후 한동안 정자문화는 주춤하다가 18세기에 들어서 다시 활기를 띤다. 이 때의 정자는 세도가들이 주로 지었는데 달라진 점은 주로 강가보다는 산속에 자리잡는 정자가 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정치가 공적관계보다는 사적관계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세도가들이 왕권을 허구화시킨 채 사적관계를 통해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행태가 일반화하면서 , 그런 행태를 담을 수 있는 공간적 담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공범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 - 궁궐 근처 가까운 산의 산속 정자말이다. 이 시기 이런 식의 정자문화는 근대의 요정문화나 현대의 호텔 밀실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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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라는 이름의 식민지 - 반투스탄
오늘날 팔레스타인을 가리킬 때 쓰는 '반투스탄'은 원래 남아공 백인정권의 인종분리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흑인자치구를 가리키는 용어다. 남아공은 전 국토의 13%에 불과한 땅에 10개의 흑인 자치구르르 만들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협조적인 자들에게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자치는 이름뿐이고 그곳의 흑인들은 어떤 시민권도 인정받지 못했으며 반투스탄은 정치경제적으로 백인 남아공에 예속된 신종 흑인식민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치정부는 예외없이 부정하고 부패했다.
그 반투스탄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부활했다. 특히 1995년 오슬로 협정(이 지역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2개의 국가건설을 인정하고 팔레스타인에 자치권을 인정한 협정)이 체결된후 등장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남아공흑인자치정부와 별로 다르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은 자치라는 환상하에 부패한 자치를 온존시켜 그들의 방패막이로 삼고자 했고 거의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의 압승은 바로 이 팔레스타인 반투스탄적 자치에 대한 불신이자 항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부패한 자치정부는 비싼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가자가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는 와중에 하마스 조직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진심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의 합병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자기 땅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완전히 밀어내기를 원하는 것도 전혀 아니다. 이스라엘의 바람은 값싼 노동력과 종속된 시장이다. 오늘 서안과 가자가 분리장벽에 의해서 감옥이 되고 있는 이유는 이 두 역할을 완벽하게 실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체 노동력에서 서안과 가자의 노동력은 7%를 차지했고 특히 건설업에서의 비중은 45%정도를 점령지인 서안과 가자에서 충당하고 있다. 또한 점령지에 들어가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충실히 증가시켜 주고 있다.  

하마스
팔레스타이니 자치정부의 부패와 은밀한 이스라엘, 미국과의 연대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는 매국이며 배신이었다. 이것이 2006년 선거에서 하마스의 집권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다. 하마스가 집권하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즉각 팔레스타인 경제봉쇄를 실시하여 하마스를 압박했다. 동시에 이전의 자치정부 -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파타)에 대한 은밀한 지원이 시작되었다. 결국 분리하여 통치하라라는 고전적 식민주의가 관철된 셈이다. 그 결과 하마스는 민주적 선거에 이기고서도 가자에 고립되었고 이스라엘의 폭격이 지금도 가자에 집중되는 것은 바로 이것때문이다.  

분리장벽
테러리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서안과 가자에 건설한 높이 8미터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과 온갖 첨단시설로 무장한 철조망.
이 장벽의 건설로 팔레스타인사람들은 땅과 우물을 뺏기고 집이 헐렸다. 또한 농지를 장벽 너머에 둔 농민들은 어렵사리 허가를 얻고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가족들이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고도 모자라 가자의 하늘에는 24시간 무인정찰비행선이 떠다닌다. 적어도 가자에 관한 한 어떤 정보위성도 이 비행선의 감시능력을 앞지르지 못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문제의 해결은 가능한가?
오슬로 협정은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2국가안을 추진했다. 말 그대로 서안과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자치(이후 독립??) 이스라엘 하는식으로... 하지만 이 2국가안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2개의 국가가 들어서면 서안과 가자 뿐만 아니라 인근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등에 흩어져있는 난민캠프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난민으로 살아야 한다. 이 2개의 국가안이 비판받는 이유다.
또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공존을 기반으로 한 1국가안이다. 남아공의 예를 따르는 것. 두 민족의 평화와 공존을 통한 민주주의 실현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1국가안이 진정한 이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합리적인 안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현실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1국가안이든 2국가안이든 문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변화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든 저것이든 다 립서비스에 불과하며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노예상태로 두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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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18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투스탄에 대한 정보가 매우 유용합니다.이스라엘의 전정한 의도가 그런 것이었군요.

바람돌이 2009-01-19 00:13   좋아요 0 | URL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없앨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 그들의 목적은 하마스의 괴멸이지 팔레스타인사람들 자체는 아니라는 것, 더더욱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희망이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집중된 곳- 마음이 많이 아파요.

글샘 2009-01-1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나 더 괴롭히는 건 같은편이죠. ㅠㅜ

바람돌이 2009-01-19 22:25   좋아요 0 | URL
그게 더 비감하죠... 이제 같은 민족끼리도 싸워야 한다는건 정말 얼마나 힘을 빠지게 하고 비참하게 할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레디 
- 초정통파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
이스라엘의 하레디는 유대인 집단 중에서 가장 빈곤한 계층이다. 유대인의 토라의 율법이 살인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군복무를 거부하는 집단. 그러나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서는 랍비들의 교육기관인 예시바의 학생신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하레디들은 예시바를 떠날 수 없고, 병역을 자원하지 않는 한 노동할 수 없는 인간이 된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40세가 될때까지 예시바의 학생신분을 유지하게 되면 학교를 나온 후라도 이들이 취업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업게 됨으로써 가장 가난한 유대인 집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 내 유대인 인구의 8-11%로 유대인 내에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자가 돼 버린 것.
진짜 큰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들을 서안지구의 점령촌 이주민으로 이용해먹는 다는 것이다. 위험한 서안 내 점령촌에 왠만한 유대인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가장 빈곤층인 이 하레디층을 몇가지 특혜를 주면서 점령촌으로 이주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 주류층이 치루고 있는 전쟁을 결국 최전선에서 대신 치뤄주고 있는 셈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
- 1950년 이스라엘은 '부재자 자산법'을 실시하다. 1947년 11월 29일에서 1948년 9월 1일 사이에 이스라엘 영토에 거주하고 있지 않은 아랍인의 토지와 가옥, 금융자산 등을 아무런 보상없이 몰수하는 법. 이 9개월은 유엔이 총회에서 이 지역을 유대-아랍국가 분리안을 선언했으며 이에 반발한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전쟁 즉 1차 중동전쟁 기간이다.
이 기간에 대략 36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고 전쟁이 끝나고도 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엑소더스 1947의 비밀
- 헐리웃 영화 <영광의 탈출>로 잘 알려진 사건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자들은 무장조직을 동원해 불법이주를 금지한 영국에 맞서 투쟁을 벌였고, 풍부한 자금으로 대형 화물선과 상선들을 구입해 서유럽으로부터 유대인을 옮기는 대대적인 밀항작전을 펼쳤다.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엑소더스 1947.
1947년 7월 12일, 4515명의 유대인들을 태운 미국 국적의 증기선 워필드호가 팔레스타인을 향해 프랑스의 마르쎄유항을 출발. 엿새 뒤 워필드호는 팔레스타인 해안에서 40킬로 떨어진 공해에서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항구도시 하이파로 예인. 이들은 다시 프랑스, 독일을 거쳐 결국 영국군 점령지의 난민수용소로 옮겨졌다. (워필드 호가 영국군에 나포되자 유대인 무장조직인 하가나는 배의 이름을 '엑소더스 1947'로 고쳤다) 나포 당시 무력 충돌로 3명의 희생자가 생겼지만 그 이후에는 수용소 이송까지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 사건을 모티프로 만든 영화가 <영광의 탈출>이며 이 영화는 사실을 전혀 다르게 왜곡함으로써 할리웃이 우회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던 태도(십계, 벤허같은 영화들)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시온주의 옹호로 선회할 수 있게 한다.  

홀로코스트
-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이 독점해버림으로써 인류의 비극에서 유대인의 참사로 절하되었고, 급기야 시온주의자들의 음모따위로 전락해버렸다. 또한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의 감옥에 가둠으로써 나찌가 응당 받아야 할 형벌을 턱없이 감해주었다. 나찌 인종주의자들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집시, 장애인,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다. 인류는 이런 나찌의 인종주의를 심판대에 올려야 했으나 유대인이 독점한 홀로코스트는 그것을 무산시키고 이스라엘을 탄생시켰고, 범죄자들은 터무니없이 값싼 면죄부를 얻었다. 전후 독일은 유대인에게 사죄하고 보상함으로써 집시와 장애인과 러시아와 동유럽인,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에 대한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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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9-01-13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의 배경을 들으며 분개했는데 ... 자산까지 몰수했었군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레디, 홀로코스트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야기에요.

바람돌이 2009-01-13 23:45   좋아요 0 | URL
팔레스타인 내부의 상황, 레바논, 요르단 등 주변의 상황으로 가면 더더욱 기가막혀지네요.
 

알라디너들 사이에 인기있는 작가중 한명이 김연수씨인것 같은데....
나는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던 편.
일단 책 제목이 너무 멜랑꼬리하지 않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란 제목에서는 약간은 공지영씨를 연상케 하면서 조금 더 많이는 대책없이 낭만적 내지는 뜬구름이나 잡고 있을듯한 분위기랄까 하여튼 그런게 느껴진다. 문제는 내가 지금 말한 이런것들을 다 별로 안좋아한다는 것. (이건 물론 순전히 나의 주관 이며 심정적인 편견인것은 당연하다. )

하여튼 별 관심도 없던 이 작가의 책 한권을 손에 든건 순전히 또 제목 때문이다.

여행할 권리라니?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을 권리로 선언한다는건 또 다른 문제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 것, 아니면 그래서 무시당하는게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책 제목에 여행자가 들어가거나 아니면 여행기라고 하면 일단 관심을 가지고 왠만하면 보는 내가 아니던가?
근데 이 책에서 만난 김연수라는 작가. 글빨이 심상치 않다.
제목을 붙이는 방법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의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 등등.....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게 보고 있다는 것.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찾아서 꼭 봐야겠구나 하며 급 호감상승중.
근데 김연수라는 이름으로 알라딘에 검색을 하다보니 이 작가의 신작이 예약판매중이다.

 

 아직 이미지도 안떠는 예약판매 상품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라는 작가의 글빨도 기대가 함뿍되지만 그것뿐이라면 기존에 나와있는 책을 읽지, 굳이 예약판매쪽을 뒤적거릴건 아닌데...
중요한건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930년대 만주 간도 지방에서 일어났던 [민생단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
여행할 권리에서 중국쪽을 얘기하면 신작소설에 대한 얘기를 간간히 하고 있기에 궁금증이 살짝 일었었는데 책 소개를 보니 정말 호기심 급 상승이다.
<민생단 사건>은 1932년 간도지역에서 일어난 우리 독립운동사의 최대의 비극이라 할만한 일이다. 원래 <민생단>이란 이 지역의 친일정치조직의 이름이었는데 사실상 결성 8개월만에 해산된 별로 한 일도 없는 별볼일 없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보면 사소한 사건
1933년 5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순시원으로 간도에 온 반경유(潘慶由: 조선인으로 본명은 李起東)가 훈춘유격대 정치위원 박두남(朴斗南)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반경유를 살해한 박두남은 혁명근거지를 탈출하여 일제에 투항하고는 일본군의 길잡이가 되어 혁명근거지의 파괴에 앞장섰던 것.
그런데 이것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조선인 독립군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의심이 커져가게 되고 결국 일본의 간첩 내지는 민생단이라는 누명을 씌워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사살하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거의 2,000명 이상의 조선독립군을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 사건의 원인과 추동력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일국일당주의를 주장하던 당시 국제공산당운동의 분위기에서 조선인과 중국간의 미묘한 어긋남과 당시 공산주의 운동의 좌편향을 들수도 있다.
하지만 한홍구 교수의 경우 당시 간도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당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에 깊이 경도되어 있던 점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즉 당시 일제에 끊임없이 밀리고 있던 간도지역의 한인소비에트의 실패를 몇몇을 간첩으로 지명하여 희생시킴으로써 책임을 전가하고 동시에 당의 무오류를 입증하려던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이 커지고 복잡해졌다는 것.
어찌됐든 민생단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어이없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같은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동지들로부터 살해당했다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다.
김연수씨의 글을 쓰는 스타일로 봐서 뭐 <밤은 노래한다>라는 소설이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거나 사건에 집중할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이 부분이 어쩌면 더 관심을 가게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엄혹한 그리고 어이없는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철저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의 내면은 어땠을까?
그들이 내면이 부디 김연수씨의 펜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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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생단 사건을 다룬 소설이 나온다니 기대하겠습니다.원래 민생단은 총독부와 간도 일본영사관이 후원하여 용정에서 친일 조선인들을 내세워 만들었죠.당시 만주에서 한중연대로 항일운동을 하려는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결국 일본 의도대로 되었죠.중국공산주의자들이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첩자로 의심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으니까요.

바람돌이 2008-09-18 11:42   좋아요 0 | URL
여행할 권리를 본 결과 김연수라는 작가가 민생단 사건 자체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 같지는 않을것 같고요. 다만 그 시대와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관련된 인물들의 내면의 풍경을 찾아가는 소설? 뭐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하여튼 이 쪽은 워낙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라 기대가 많이 되네요. ^^

BRINY 2008-09-1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BS 테마여행 이번주에 김연수작가의 몽골기행입니다!!!

바람돌이 2008-09-18 11:42   좋아요 0 | URL
시간대가 참.... 집에서 제일 바쁜 시간입니다. 애들 숙제시키고 씻기고 재우고... ^^

BRINY 2008-09-19 13:38   좋아요 0 | URL
일요일 오후에 4편 몰아서 재방송합니다!

바람돌이 2008-09-19 23:09   좋아요 0 | URL
일요일 오후?? 제가 tv를 볼수 있을지... 애 키우는 엄마에겐 아이들이 깨있는 시간은 다 똑같답니다. 그렇다고 우리집 애들이 낮잠을 자는 애들도 아니고...ㅠ.ㅠ

kaka 2008-09-2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작가랑 공작가는 좀 그렇네요^^ 완전히 다른..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훨씬 먼저 나왔지요.

김연수는 사람(글을 통해 짐작컨대)이나 글이나 대단히 사려 깊고 성숙해요. 말과 행동을 아끼면서 지성적으로 천착하는 듯해요. 내 언행에 다른 욕망은 없나, 객관화시켜 진위를 이성적으로 자꾸 캐보기도 하고, 분석하고..어떤 작가 언행의 경우, 유명세 타고 주목받으려는 허영심이 쎄구나, 이런 거 느껴지는데, 이 작가는 전적으로 신뢰가 와요. 깊고 투명하고 이지적이라는..! 그러니까 매스컴 앞에서 하는 설익고 과장된 자기 감정적 멘트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왜? 왜 안되는데? 내,외면에서 진보의 가능성도 따지고, 물론 나아가 행동도 하고...제 견해로는 그렇습니다. .

문학성이야 기왕에 알려진 것이지만요.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블루오션으로 부상할 사람이라고 봅니다. 베스트셀러 만들어, 마케팅용 카피로 나오는 '한국의 대표작가' 이런 것 말구요. 문단 안팎이나 독자들도 그의 행보를 유심히 주시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런 작가 있어서 아주 다행이다, 행복하다, 이런 생각도 한답니다.

바람돌이 2008-09-18 11:44   좋아요 0 | URL
김연수씨를 읽기전에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거죠 뭐... ^^;;
막상 읽어보니 정말 다르네요. 한권 읽고 뭐라 결론내기는 그렇고요. 앞으로 충분히 주목해서 보고싶은, 그리고 기왕에 나와있는 책들도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08-09-18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밤 김연수 씨 나오는 몽골기행 봤어요.안경쓰고 순박하게 생겼네요.말타는데 되게 무서워하네요.조금 귀여워요.

바람돌이 2008-09-18 21:31   좋아요 0 | URL
조금전에 마지막 장면 잠깐 봤어요. 애들 재우고 나니 뭐 끝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