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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
나카무라 일성 지음, 정미영 옮김 / 품(도서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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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코로나 이전 몇 번 다녀온 이 곳은 교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치(우지)시에 있다. 녹차밭이 유명한 그 땅 어느 한 모퉁이에 교토 군전투기비행장공사 강제이주자들의 집촌이 웅크리고 있다.


20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오사카에서 홀로 배낭을 짊어진 채 버스와 기차, 그리고 뙤약볕에 길을 걸어 그곳을 찾았다. 하늘을 맑았고 바람은 가벼웠지만 마을은 오래되었고 한적했으며 무거운 적막이 나그네 발걸음을 잡았다 놓았다 했다. 입구에서부터 이곳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울타리 삼아 살아가는 곳이라는 글귀를 경전삼아 마을로 들어선다. 낯선 단독자가 몸하나 배낭하나 메고 느닷없이 찾아온 방문이 그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노로의 책임자는 온 몸으로 환영해주었다. 마을을 둘러보도록 안내해주는 손과 발에서 누군가는 이 마을 안의 이야기를 마을 밖으로 꺼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흐르는 듯했다.


그 짧은 방문 이후 나는 두 번 더 그 마을을 방문했다. 그 틈에 마을 어른들은 더 보이지 않고 그 마을의 지도자가 노로의 어른에서 젊은 지도자로 새롭게 바뀌었다. 나의 마지막 직접 방문은 이후 초등, 중학교 아이들과 '세계관학교'라는 제목으로 함께 다녀온 것이었다. 그 때 이 평범한 마을에서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솔깃했고, 그곳의 어른들은 이 고국의 어린 아이들이 이 마을을 찾아온 것에 대해 혈육이 방문한 것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 때 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쉼없이 감사하다며 말해주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하고 찾아주었다는 것그것이 전부였다.


그 후로도 몇 번 영상과 이야기로 그 곳 소식을 간간히 전해 들었다. 거주지 강제 이전 문제와 보상 문제는 난항을 겪고 있었고, 우리 정부와 일본 기업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도 일본쪽으로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을은 그대로이고, 역사도 그대로인대 그 당연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사람과 기업만 더 비겁한 방법을 찾고 있다. 나는 그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마음이 아프다. 아니 숱한 철거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며 잘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슬픈 일이다. 어쩌면, 그 땅을 되팔고 사들여 자기 세계를 견고히 하려는 이들은 시간이 흘러 이 지역이 자연스럽게 도태되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우토로 관련 방송이 나오던 날, 함께 보던 아이도 슬프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었다. ‘저 곳을 다녀왔는데 기억하냐?’. 아이는 기억이 날 듯, 아닐 듯 하단다. 너무 어릴 적 기억이라서, 그래도 이제 청년이 된 아이는 그 날 그 방문에서 보았던 마을 구석구석을 잊지 않고 있다. 방송에서야 숱한 구호들이 빠진 낭만의 장소만이 흐르고 있을 때 그 방송 너머 드러나지 않았던 슬픈 장소들을 아이는 잘 기억해주고 있었다. 뙤약볕에 마을 골목을 걸으며 마을 우물과 하수구, 공사장 식당의 스러진 지붕, , 굳게 닫힌 문 등이 마치 나의 집처럼 선명하다는 듯 잘 떠올려주었다. 오래전부터 철저히 망각의 장소이자, 고립의 장소를 살려내는 일은 기억이라는 것도 아이들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그곳을 다녀온 후, 홀로 그 기억들도 찾아보고, 공부도 해 봤지만, 그것 이상으로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다. 아쉬운 채로 그 기억만을 유지한 채 이제까지 흘러왔을 뿐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유투브같은 매체에 우토로라고 한번 치기만 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나의 망각의 강은 여지없이 깊고 길게 흐르고 있지만.

 

최근 반갑게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글 나카무라 일성, 정미영 옮김. 도서출판 품, 2022)가 출판되었다. 표지부터 내가 걸었던 그 길, 그 옛 기억을 되살려준다. 그 속깊은 사정을 내가 다 알지 못해서 늘 아쉬웠지만, 그 마을을 책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책 내용은 인터뷰를 기본으로 한 우토로마을의 역사다. 증언과 취재가 어우러져서 글은 고발문 같이 건조하지만, 이 마을에 얽힌 역사를 생각하자면, 이것도 매우 아름다운 고발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일교포 3세인 저자가 마을을 드나들며 애쓴 흔적들이 역력하다. 저자의 이런 말은 이 책에서 우토로를 다시 기억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집필을 마치고 사람은 말로써’, 특히 먼저 떠난 이들에게서 받은 말로 만들어지는 존재임을 새삼 느낀다. 집필 작업은 그, 그녀들과 나의 한 갈무리를 의미한다. 그 헛헛함이 집필 지연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문자로 다시 태어난 증언들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남겨진 이로서 그 분들에게 받아든 말을 자아내 가고 싶다.”(314)

 

마지막 표현 자아내다는 안에 들어있는 것을 실을 뽑듯이 뽑아낸다는 뜻이니 채록하고 들었던 글들을 더욱 생생하게 수를 놓을 일을 다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모든 역사는 증언자와 채록하는 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말과 글의 조각보로 이어지는 것 같다. 우토로의 역사를 전혀 모르던 내가 그곳을 찾아가겠다는 마음이 든 것도 누군가의 글이었으니 말이다. 이 짧은 글도 나 역시 이 책에 담긴 우토로의 이야기가 조금 더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덧붙인다면, 이런 책이 남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토로 마을을 살리겠다는 뜻 너머 세계 어디서든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명이 생명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우토로 마을이야기에 담긴 우토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읽는다.

 

"너희들도 말이다. 더는 기죽지 말고, 고개 들고 앞을 보고 걸어.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가게 돼. 우리도 쭈-욱 그렇게 살아왔어. 이제부터라니까, 안 그래?"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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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부력 - 2021년 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승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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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 이승우님의마음의 부력(문학사상, 2021)'보았다.' 그런데 나는 평소 그의 소설들을 일부러 찾아 읽는 것은 아니다. 그가 등단한 이래 몇 권 읽어보긴 했지만 아직도 낯설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관념'을 현실처럼 써내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을 관념처럼 써낸 글은 어느 정도 따라 읽어낼 수 있지만, 관념을 애써 현실로 바꾸어 매조지한 글은 아무래도 나의 독서 습관만으로는 잘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나의 현실과 무관하다 싶으면 굳이 따라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앞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써냈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의 작가들은 이런 평가가 달갑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사소한 비평이라도 소설이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써내는 것도 쉽지 않고 내 마음에 있는 어떤 뭉특한 감정을 살갑게 글로 입혀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것을 읽는 내가 괜한 이질감을 느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소설이라고 평가받을 때 가장 슬픈 듯하다. 이번 글도 처음에는 사실 그랬다.

 

2.

소설 마음의 부력은 계간문학과사회(33(1), 2020. 봄 호, 68-97.)에 게재되었던 단편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부력'이라는 말이 한참 마음에 걸렸다. 얼핏 보아도 '부력''뜨는 힘'이다. 물론 '뜨게 하는 힘'일지, '떠 있는 힘'일지를 판단하긴 쉽지 않다. 혹시나 뒤이어 덧붙여진 평론(소설가 정용준)을 따라 '중력에 반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뜨려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부력'을 자기 방식으로 잘 해석해낼 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지점에 안전하게 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이 끝났을 때 더는 그런 해석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력은 '뜨게 하든', '떠 있든', '뜨려 하든'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중력에 반하는 거센 저항이라한들 상관없었다. 소설에서 이 부력은 가라앉는 마음을 오히려 수직으로 끌어올려 주는 힘, 삶을 떠받쳐주는 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력'을 위로 끌어올려주고 아래서 받쳐주는 힘', '아래로 끌어 당기려 힘을 거슬러 위로 향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했. 무엇보다 이 부력은 몸을 뜨게 하는 힘이 아니라 마음을 그렇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낯설었으나 곧 의심없이 공감했다.

 

3.

나는 이승우님의 소설이 어떤 '관념'에 뿌리 깊은 터를 두고 있다고 생각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 그 관념이 무엇인가보다도 그것의 소재/재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관념은 '사랑'을 다루는 것 같다. 특히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작품이 단지 소설 아닌 소설인 이유도 신이 베푼 사랑을 인간의 관점에서 쓰려는 의지가 강한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런 쓰기는 아마도 그 몸 속에 형질이 되어버린 '신학'과 그것이 육화된 '철학'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는 그가 천착하는 소재 중 하나인 것 같다. 이 고대 글에 나타나는 신과 그가 선택한 사람들의 사랑 관계가 그의 관념을 바닥으로부터 지배함으로써 오늘날 자기 글로써 이 시대의 '인간'을 다독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작가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4.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편애받으면서 편애하며 자기 존재감을 강화하는 것 같다. 동시에 누군가의 편애를 자신이 받아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면서, 반대로 누군가를 편애해야 하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도 같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도 편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존재이리라. 아쉽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는 이는, 자기 때문에 누군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사람을 사랑한다. 그 순간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짐을 중력처럼 갖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한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이는 사랑을 받는 자의 부채감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랑받는 이가 사랑을 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부채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랑으로 인해 사랑받는 이가 마음의 중력에 짓눌려 살아간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야곱과 에서라면 사랑받는 야곱이 가진 짐이 그러하고, 야곱과 에서와 리브가라면, 야곱을 사랑해 준 어머니 리브가가 짊어진 부채가 그럴 것이다.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삶의 얼기설기 엮어 놓은 야훼 하나님이 에서에게 가진 사랑빚은 또 어떠할까. 그렇베 보면 소설 마음의 부력은 그런 사랑받는 이가 가진 채무 같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은총이다. 작가는 작은 가족을 상정하고 그 단순한 관계 속에서도 강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의 채무''그려낸다. 무엇보다, 그는 '사랑을 받는 자'가 갖고 살아가는 빚을 자유롭게 하고, '사랑을 베푸는 자'가 스스로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채무도 아예 해방시키고 싶어한다.

 

5.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먼저 삶을 마감한 나의 가족들이 떠오르는 것은 나이 탓일지 모른다.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마치 내가 살아가는 어떤 이야기와 다르지 않고, 그들 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나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날 어떤 사건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이제는 이 세계를 떠나 귀천한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가지고 있을 그 어떤 '부채감'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도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보다도, 그가 나에게 모든 것으로 다 사랑했어도 아직도 사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을 가진 채 저 하늘로 돌아갔을 것 같은 생각이 마음을 휘저었다. 사랑받는 이가 가질 수 있는 부담이야 그렇다해도, 사랑하는 이가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갔던 그 사랑 부채를 나는 왜 한 번도 살며시 들어 올려주지 못했는가 말이다. 그 마음을 들어 올려 줄 힘을 조금만 베풀었더라도 그는 어쩌면 가장 자유로운 몸으로 이 세계를 떠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6.

나는 소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일은 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관념 가득한 소설이 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직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저자가 새겨 둔 관념이 슬픔 가득한 이야기였지만, 소설을 읽고 나니 오히려 그 슬픔이 나를 떠받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작가가 2021년 이상문학상(44)을 수상한 직후 남긴 글에서 나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위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의 부력>은 남긴 말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남은 사람들, 그 말들에 붙들려 상실감과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 이들의 마음을 훑어본 소설입니다. 남은 사람들이 남긴 사람에게 늘어놓는 뒤늦은 변명 같은 소설입니다. 그러나 남긴 사람을 향한 이 변명들이 실은 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어찌 감출 수 있겠습니까?"(116)

"나는 되어진 일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활동을 주목하는 성향의 사람입니다. '애쓰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애쓴 것이 반드시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세상의 이치'를 모르지 않습니다. 애쓴 만큼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애쓴 것보다 더 얻기도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의 의무지만, 그 일의 성취는 일한 사람의 권리가 아닙니다."(116)

 

하여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변명 같이 늘어놓은 이야기에 오히려 감사한다. 내 마음에 남아있을 어떤 부채감을 수용하고 그것을 갚아내는 삶을 열심히 산다는 것이 내가 건강하게 살아지는 힘이며, 멋지게 사라지는 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인 이상을 생각하면 이 문학상이 더 진중하게 발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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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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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세한 사랑의 아름다움’. 누가 생각했을까? 늘 들어도 마음에 간질간질한 꽃말이다. 먼 옛날 이집트 사막 앞에서 어느 사람이 이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런 감정을 느꼈던 걸까? 하와이 모래해변 해 지는 저녁, 온 바다에 붉은 물감 풀리듯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이런 마음을 가졌던 걸까? 슬픔 삼킨 오키나와, 어느 농장 상쾌하나 쌀쌀한 바람부는 날, 틈을 헤집고 붉은 꽃잎을 거둬들이는 손 끝에 촉촉하고 세밀한 사랑이 닿았던 걸까?

속설은 속설을 낳는다니, 어느 날 이 붉은 꽃이 거친 들에 아름답게 피어난 샤론의 장미, 다시 또 어느 날, 하루살이 역경에도 영원과 진정한 충성을 향해 살아내는 무궁화(Hibiscus syriacus L)꽃으로 재생했다. 저 달콤새콤한 사랑만으로는 아쉬웠을테다. 마음깊이 각인하는 운명같은 사랑을 꿈꿨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 저 꽃잎 곱게 말려 뜨겁지 않은 물을 붓고, 붉은 빛이 물 속에 퍼져 알맞게 살아난 붉은 물빛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붉그스름 안에서 상쾌하게 신 맛이 솟아난다. 이 맛을 섬세한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히비스커스(Hibiscus)가 붉그스름한 향을 풍긴다.


2.

언젠가 미얀마 이야기로 세상이 어두워졌을 때 한 소녀가 상사화를 불렀다. ‘사랑을 넘어선 사랑’, ‘보지 못하고도 사랑하는 사랑이다. 들을 때마다 깊은 한을 내리 누르기도 하고, 끌어올리기도 했다. 애틋한 가사도 첫 구절에 마음 빗장을 열어버릴 때가 많다. 사랑이 묻혀버린 마음이라면 금방이라도 사랑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그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아름답게 당당하다노래는 삶이 실릴 때 짙은 향기가 되는 모양이다. 노래는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 저만치 혼자서 흐르다가 개여울을 만나 휘돈다. 낮은 절벽에서도 낙수로 쏟아지다 잔잔하다 살랑인다. 살랑하다 보슬보슬하고 그러다 아침이 오면 윤슬이 내려앉는다. 빛구슬을 이고 물은 계곡을 따라 다시 저만치 혼자서 미끄러지듯 떠내려간다. 그러니 보는 이의 시선으로만 저 상사화를 슬퍼하거나 떠내려가는 노래를 안타까와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길을 당당하게 흐르는 삶과 노래를 응원함이 마땅하다.

 

3.

소설가 김훈 님의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2022, 문학동네)를 읽었다. 실린 글들은 2013년 이후 계간지 문학동네에 먼저 소개된 것들과 미발표작 <48GOP> 등 일곱 편이다. 책 제목은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명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의 특징을 얼핏 살펴볼 수 있는 흔적들이 있는데 우선 광고용으로 사용하는 책 띠지에 새겨진 문장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 또 다른 하나는 작가가 책 말미에 덧붙인 <군말>이다. 에필로그가 아니라 각 소설들이 생겨나게 된 실제 사연이다. 사연과 소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군말>은 각 소설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만하다. 그러니 이 소설읽기의 순서라면 <군말>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작가가 보여주는 문체, 문장의 의도적 수려한 수사가 장점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좀 더 강하게 들었다.


4.

이 소설집을 펼치기 전에 나는 소설집의 제목 저만치 혼자서를 생각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 김소월이 남긴 산유화」 중의 한 싯구다. 소설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는 이 제목부터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월의 시 산유화는 이미 알려진 대로 산 어디나 있는저 꽃을 노래한다. 시를 해석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일이니, 이 시가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라든지, ‘저항을 상징한다든지 하는 것은 독자 누구에게나 열린 결론이다. 무엇으로 읽든 그리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관점이든 저만히 혼자서라는 말에 대해서는 좀 더 유의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쉽지만 본래 소월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직접 알아볼 방법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니 어떻게 이해해도 나의 주관에 불과할 것이지만, 이 소설의 작가가 저 제목을 소월의 시에서 가져왔다고 밝혔으니(214) 아무래도 이 소설집을 잘 읽기 위해서는 저 시 구절을 다시 한번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래도 그것이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고 가능하다면 이 소설집 전체를 한데 묶어내는 주제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굳이 주제를 하나로 엮어 읽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가능성은 작가가 이미 밝힌 한 사람의 이웃으로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미리 정리하자면 저만치 혼자서에 대한 작가의 제목 설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긍정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되새겨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5.

우선 나는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잘 읽기 위해서는 작가의 말대로 이웃으로 썼다는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하는 인물들, 다루는 소재들, 생각하는 주제들이 모두 저자의 이웃들일 수 있는 사람들의 경험이자 그들에 대한 관찰이며 그들을 통한 자신의 성찰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웃이라는 관점이 선명하다. 작가가 자기 주변 삶에 대해 오랫동안 겪어온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이웃으로 썼다는 말은 이 소설집이 진솔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다. 이런 관점은 소설집에 실린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읽는 이에게 유익한 점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보여주는 이웃으로서 관찰은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이에게 나도 이웃처럼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선험’(先驗, transzendental)이 아니라 대신 체험하게 돕는 추체험(追體驗, Nacherleben)’을 제공한다는 장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혹시라도 이 세계에서 나의 이웃이 겪는 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일말의 가책을 느끼는 이에게, 또는 이 세계의 아픔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의 상사화같은 심정에 내면의 해갈을 해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늘 이것을 김훈 소설의 유익한 점이라 여긴다. 이것은 마치 그의 소설이 대리 고해성사같은 장점이 선명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에 더해져 문학적 수려한 수사가 어우려서 읽는 이에게 기호에 맞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 같다.

 

6.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 제목과 그의 소설에 대해 이번 만큼은 독자로서 스스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두려 한다. 우선, 나는 이 소설집에 실린 작가의 시점이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이웃이라는 부제를 염두에 두면 특히 그렇다. 게다가 소월의 싯구가 남긴 그 속뜻을 추론해볼 때도 그렇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과 소월이 남긴 싯구 저만치 혼자서가 조금 다른 뉘앙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월은 저만치 혼자서당당한 존재자로 본 것같다. 그 존재는 관찰의 대상도 아니고, 심지어 그리움의 대상도 아니며, 홀로 피어 외로울 거라는 연민의 대상이라하기에는 당당함이 짙게 묻어난다. 내가 읽기에 소월의 산유화는 이 산 저 산 어디에서나 자기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핀 을 노래한 것이지 그 에 대한 측은지심을 발휘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의 작가는 저 제목을 토대로 쓴 일곱 째 소설에서도 그러하고, 나머지 여섯 편의 이야기에도 이웃으로서 자기 이웃에 대한 쓸쓸한 연민이라는 작가 중심적 시점을 한결같이 유지한다. 각 소설이 나오게 된 시점이 달라서 그 시절을 반영하는 다양한 소재들이 제시되지만, 작가의 관점은 의도적으로 일정하다. 사회적 아픔을 소재로 삼았지만, 이웃으로서 바라보는 어느 시점들은 시대가 지나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스스로 채근해야 할 것은 이웃으로서 그들을 보는 어떤 관점은 작가의 반대편에서 이웃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태도로 보인다. 작가는 모든 상황에서 이웃으로서, 연륜깊은 소설가로서 관찰하는 태도를 잘 유지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어떤 면에서 자녁 내기 장기를 두는 사람 주변에 서 있는 훈수 두는 사람과 같은 경우도 보인다.

 

7.

나는 어느 작가든지 전작주의를 선호하지 않는다. 다만, 책이 나오면 자주 사서 읽어두는 작가들은 있다. 소설가 김훈 님도 그 중 한 분이다. 이유라면 문체가 나에게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몇 편 글들은 만족스럽다. 그의 소설이 말해주는 것처럼 오늘도 세계는 격동하고, 삶은 깊은 한숨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계속된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히비스커스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상사화를 상상한다. 그것마저도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작가가 이웃으로서 썼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저만치 혼자서라는 말이 이웃에 대한 위로부터 연민이 아니라 그들도 당당하게 자기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간다는 아래로부터 공감으로 읽는 것은 나의 몫인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소설도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까

태백 산맥이 해안을 바싹 압박하면서 가파른 경사로 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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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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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7)

 

1.

밥 한 그릇에 담긴 밥알 수보다 많은 말을 주고받으며 산다. 어떤 날은 한마디도 안하고 살고 싶어도 수 만 마디 말이 들려오고, 다른 날은 무한한 많은 말을 쏟아내고 싶고 또 설령 그렇게 해낸 뒤에도 단 한마디 다시 들려오지 않는 날이 있다. 사실, 어떤 날에는 수많은 말이 내 삶에 밀려와도 단 한마디 말도 남지않고 가볍게 흘러나가기도 하며, 다른 날은 단 한마디 말도 수 만 마디 말같은 무게로 내 삶에 걸쳐 꼼짝하지 않고 짓누르기도 한다. 받아들일 수 없도 버릴 수도 없는 말이 내 몸 어딘간에 나도 모르게 생채기를 내고 있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지나가는 날도 허다하다. 매일 이렇게 밥 먹는 것 이상으로 말()을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고 다시 먹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주워담지 못하고 어떤 싹이 날지도 모르면서도 쉼없이 뿌리고 있다.

말이 남기는 흔적은 몸 사이거리에 반비례해서 어쩌다 만나지도 못할 먼 친척이 던지는 말보다, 한 공간에 몸길 겹치며 밥알 주고받는 사람에게서 강력하다. 그 최근접거리에서 날아오는 말화살에 속수무책으로 상처를 껴안아야 할 때가 태반이다. 어떤 말은 흘려보내야 좋은 것이 있고, 어떤 말은 쓸려가지 못하게 여울목처럼 꼭 남겨두면 유익한 것이 있다지만, 말이란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지 모른다. 말하기는 손에 잡히는 모양은 없어도 밀물과 썰물처럼 내 삶을 두드리며 드나든다. 무엇보다 내가 나에게 내던지는 말은 하루에도 수만번 나를 절벽까지 밀었다 고공까지 들여올렸다 한다.

 

2.

전업 작가인 은유의 글쓰기는 자가 상담에 버금간다. 최근 그의 책, 다가오는 말들: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2019)(이하 다.)이 더욱 그렇다.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수집하여 묶은 에세이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의 글은 연결이 모토다. 연결이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도록 돕는 과정이며, 사람이 연결될수록 강해지는 삶을 기대하는 작가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글의 소재는 다가오는 말들이다. 다분히 누군가의 이며, 누군가 겪고 있는 이며, 누군가 남긴 이다. 을 한데 묶어 상징하는 한 표현이 다가오는 말이다. 그의 글은 다가오는 말을 자신의 삶에 담아 사유하고 응답하는 결과물이다.

나는 그의 글이 글쓰기 치유, 글쓰기를 통한 자가 상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은 자신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상담과 같아서 그의 글과 글쓰기는 자신이 자신에게 처방하는 치유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그의 글쓰기는 자신에게 전방위적으로 다가오는수많은 말들 속에 담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말에 대해 더욱 예민하게반응하는 것이다.

 

3.

<.>은 여든 한 편의 글이 실려있다. 글마다 상황과 시점과 대응하는 방식, 관련된 인물이 다르지만, 결국 주제는 일관되고, 말하고 싶은 바도 명확하다: 약한 자들, 변방에 있는 자들, 드러나지 않는 자들, 애써도 수고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 같은 일을 해도 엄격히 다르게 대우 받는 이들, 자기 삶보다 다른 이를 위해 무한 수고해야 하는 이들. 그들이 글쓰기로서 자기 존재감을 스스로 개척해간다는 것개척이라는 내 표현은 조금 진부하다. ‘재발견이자 쟁취라고 해야겠다. 이 모든 글 속에는 한 여성이 이 세계에 태어나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과연 자기다운 삶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자기 권리를 당연히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글 끝마다 말끝마다 실려 나온다. 이 책 속 글쓰기의 특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런 말이 될 것 같다.

 

태어나면서 여성은 침묵하는 법을 익히고 남성은 감정을 도려내는 법을 배운다. 말하기를 익히지 못한 여성이 공감을 배우지 못한 남성과 동료 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맞추어 살자니 공부가 끝이 없다.”(202)

 

생각해보면, 이 글에서 무한 반복하는 여성은 그저 여성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 글에서 풍겨 나는 여성의 여성스러움을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말로 예단해도 변명할 수 없을 정도지만, 오히려 이 글은 남성으로서 이 시대의 여성의 상황에 직면한 사람을 위한 글이라고 해야겠다. 예를 들면, 아직 어른 나이가 되지 않은 남자 청소년, 군 입대를 앞둔 청년, 취업 준비생, 이제 막 신입으로 일터에 내몰린 사원, 21세기를 살아도 19세기 사랑관이나 인간관에 머물러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도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 등등 여성 아닌 남성으로서 약자로, 변방에 있는 자로 자리하는 사람들 말이다. 설령, 그들이 누구인지 이렇게 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다 해도, 이 책이 그들에게 다가가 삶을 다독이고, ‘나는 나로서 당당하다는 말을 나에게 남길 수 있는 용기를 주기에는 충분하다. 굳이 여성 투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이 선천적이며 무노동으로 당연하게 누리는 남성권을 자랑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 이 책을 덮으면서 떠오른 나의 생각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대적 약자이며, 스스로 돌보거나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유랑하기 좋은 본성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여성의 모든 상황은 곧 남성의 상황이기도 하며 살아있는 것들이 함께 대면해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4.

 교회에서 함께 읽기로 추천했던 이 책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줌이라는 매체와 저녁 시간이라는 현실 상황, 또 참여자 중 한 분이 긴급한 일이 생겨서 오래 진행하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다. 참여자의 미묘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또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름 다가오는 말로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재생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조금 설익은 듯해서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정리한 바를 몇 마디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우선, 이 책의 장르다. 나는 이 책이 글쓰기를 토대로 한 상담 또는 타인의 세계를 글쓰기를 통해 이해해보려는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말하듯 글을 통한 연대와 연결은 글쓰기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이들이 갖는 궁극적 지향점 중 하나겠지만, 이것은 평소 가볍게 글을 쓰는 나같은 이들도 새겨두면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나의 글쓰기가 타인 중에 가장 타인인 와 내가 연결되는 좋은 도구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째, 이 책의 주제다. 이 책은 글쓰기를 통해 사람이 자기 속상처에 새살을 돋아나게 하는 영양분을 얻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글쓰기의 최대 독자가 자기 자신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자기 글은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목적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누구든지 잠자던 나의 글쓰기에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을만하다. 오늘도 수많은 말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고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 책의 성과다. 당연히 글쓰기에 대한 격려다. ‘글을 씀으로써 자기 치유를 경험한다는 말을 신뢰해보자는 것.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해 글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를 말하기보다 오히려 글을 왜 쓰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글쓰기가 외부로, 바깥으로, 의도적으로 다듬어져 생산되는 것이 대세지만, 아주 소중한 글은 자기 안으로, 자기에게, 자신의 삶에 남겨두는, 자신이 유일한 독자인 글이다. 그 글들은 자기라는 타인을 위로하며, 자기 밖의 타인을 마음에 두면서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점검하는 자기 의식(儀式)이라 할만하다.

 

넷째, 기독교 삶의 방식에 유익하다. 신앙이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 글쓰기는 기독교 삶의 방식의 기본이다. 날마다 다가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에 대한 의 당연한 반응이 글쓰기다. 예를 들어, 아침 성경 한 구절에 대한 나의 글쓰기가 나의 삶의 터전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다. 어떤 경우이든, 히브리 전통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은 한 마디 다가오는 말에 대한 자기 반응을 글로 남기는 일을 권장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을 참고한다면, 신앙의 글쓰기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을 사유하는 하루의 삶이다. 달리 말하면, 아침에 다가 온 한 구절 을 기억하고, 나의 하루가 지나가는 동안 겪는 모든 일에서 되새기고, 저녁에 그 삶을 지나온 나에게 내가 말해두는 것이다.

 

5.

한 권 책은 한 저자가 남긴 글쓰기의 집합이며, 자기 삶의 결정체라고 할만하다. 모든 책이 세상으로 나와 탁월하고 고급스럽게 보인다면 좋은 일일 테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에게 남기는 글은 그 외형과 기법과 명예와 상관없이 세계에서 유일한 자기 위로와 격려의 선물이다. ‘다가오는 말에 대한 나의 즐거운 응답을 선물처럼 남겨보자.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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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아이에서 평범한 아이로 - 자폐 아들의 ABA 치료 이야기
권현정.이은창 지음 / 캥거루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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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마지막 단락을 읽고 말없이 중배전으로 로스팅된 원두를 갈아서 내린다.

책을 읽고 커피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는 일은

내가 방금 읽은 책을 아직 끝내지 않았다는 작은 습관이다.

희고 작은 머그에 담긴 진한 향기와 묵직한 흑갈색 커피는

책 이야기와 이리저리 뒤섞여 생각보다 목넘김이 좋다.

오늘 내가 선택한 원두는 신맛이 강하지만 끝이 달고, 묵직한 바디감이 좋다.’

저 책이 이 커피를 닮았다.

 

2.

이 책은 아들이 자폐라는 판정을 받게 된 그 가족 재난의 날부터 하루도 포기하지 않고 이 특별한 질병에 저항해서 끝내 평범한 일상이라는 궤도의 출발선에 다시 서도록 도운 가족의 인생 분투기다. 그리고 자폐는 결국 끝나는 날이 온다는 확신을 함께 갖자고 제안하면서 그 적절한 대응 방식을 자신이 지나온 죽음 계곡같은 이야기로 희망적으로 제안하는 지침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단 하나의 해법일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너무 많은 치료 방법의 숲에서 링원더링(ringwandering)’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기력으로 그 상황을 빠져나가기를 포기한 어떤 가족들에게는 그래도 그 빛나는 출구가 어디쯤에 반드시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3.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경험을 이론처럼 정갈하게 정리해서 수월하게 읽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통극복경험담에 그치지 않고 자기 경험을 체계적으로 재서술해서 누구나 객관적으로 주목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글 전체에서 저자들은 자기 감정을 적절하게 조율하며 자신이 겪은 상황과 자폐 원인 분석, 그 대응 방식을 적절하게 서술함으로써 마치 자폐를 겪는 이들 누구나 안심하고 펼쳐볼 수 있는 매뉴얼 기능을 충실히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런 고통을 이겨냈으니 공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가족들만의 지난한 싸움에 처해있는 어떤 이들에게 함께 이겨내는 전술과 전략을 공유해보자고 응원하며 권면하는 것이다.

 

4.

이 책은 나 같은 사람이 읽어도 유익하다. 나는 자폐가 무엇인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친구의 가족에게서 또는 방송과 책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전부일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이 행동의 직접 당사자가 겪는 고통은 아예 모른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족들의 힘겨움, 함께 머무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괴로운 일이라는 것 정도는 조금 이해할 뿐이다. 그러면서 이런 일을 내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 강하게 붙잡는다. 그러다보니 이런 삶이 끝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 자폐로 인해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하는 이들의 악기 연주와 탁월한 과학 수학 능력을 들으면서 힘겹긴 하겠지만 대단한 사람들이군이라는 생각을 습관처럼 하거나 야스퍼거 증후군을 겪으면서도 천재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호기심 가득 만끽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폐라는 말이 특별하지 않고 자폐스펙트럼장애라는 명칭처럼 일반적이고  아주 넓은 범위에서 다양하게 이해해야 하고, 또한 그 원인에 대한 가족들의 자책보다 그것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정도로 평범한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돌아보니 내 친구의 아들이 겪고 있고, 한번 건너 내 지인의 자녀가 겪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 문제가 나에게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일이 결코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했다.


5.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의 제목인 특별한 아이에서 평범한 아이로는 이 일을 겪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담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말은 생각보다 흔한 말이어야 하지만, 기대만큼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고통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도 언제나 그 행복을 쟁취한 이들의 승전가이자 성공담일 때만 가능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삶에서 평범한 기적’, ‘특별한 일상이라는 옥시모론(Oxymoron)을 흔한 말처럼 되새겨 볼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일어날까?싶다. 그도 아니라면 돌아보니 모든 것이 신의 은총이었다고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일들이라도 일상처럼 일어날 수는 있을까?라는 무기력한 생각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제목은 승전가가 아니라 이 일을 겪는 이들을 위한 가까운 미래의 축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 일이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평범한 경험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부디 누구에게나 저 제목이 평범한 경험이 되길 바란다.

"나 역시 유원이의 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 유원이가 특별한 아이로 성장하는 것이 나와 남편의 가장 큰 바람이기 때문이다. 유원이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하지 않고 힘겨운 치료를 견디며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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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6-16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축사! 너무 뭉클하네요!

밥헬퍼 2022-06-17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디 이런 좋은 결실이 다른 분들에게서도 잘 나타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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