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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빨래>(2017)와 소설『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문학동네, 2020),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나는 뮤지컬 <빨래>(2017)와 마르크 로제의 소설 『그레그아르와 책방할아버지』,(윤미연 역, 문학동네, 2020), 정찬의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에서 어떤 정서적 상관성을 읽는다. 추론하기를, 서로 다른 이 세 장르는 우리 시대에 대한 따뜻한 공감과 위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 공감은 ‘슬픔을 삶에 대한 경이로운 위로로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시인 이해인 수녀는 ‘빨래를 하십시오’라는 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빨래를 하십시오>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날이

소리내며 튕겨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애인이 그리운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물 속에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웃을 거예요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몇 차례 빨래를 헹구어내는

기다림의 순간을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예요

<이해인·『작은 위로』, 열림원, 2002>

 

시인은 삶에서 가장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빨래를 가장 숭고한 의식으로 이끌어가도 좋겠다는 마음을 싯구에 담았습니다. 자칫 종교성에 함몰될 위험도 보이지만 말입니다. 사실, ‘빨래’를 시의 소재로 삼아 노래한 시인들은 여럿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대체로 사람이 자기 손으로 ‘빨래’를 해내야 할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해도 지금은 사라져버린 ‘빨래’라는 의식이 어쩌면 우리 몸 어딘가에 아직도 움트고 있는 인간에 대한 어떤 애틋한 희구를 상징하는 것임을 시인들은 간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뮤지컬 <빨래>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일 것입니다.

 

2.

뮤지컬 <빨래>는 학생들의 졸업작품으로 제출된 이후, 올해(2020) 코로나19로 인해 예기치 않게 공연을 잠정 중단해야 할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 5000여회 이상 공연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빠르게 달리면서 어제 입은 옷은 벗어던지고 곧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경쟁 중에 있습니다. 그 틈에 ‘79년생 서나영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하늘아래 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빨래>는 이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손편지같습니다. 

<빨래>는 탄탄한 작품입니다. 등장인물 관계, 대사, 노래, 춤 그리고 미장센 등이 조밀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소극장 공연에 최적입니다. 인물들의 동선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무대는 변형을 자제합니다. 미장센은 거의 고정되어 있습니다. 정형화된 무대와 달리 다양한 페르소나(persona)를 활용합니다. 1인 다중역이 그것입니다. 페르소나는 고대 배우들이 가면을 사용해 다양한 등장인물을 보여주었던 기법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극단의 인적환경과 관련있다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의도된 연출이라는 점에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다중역을 통해 극을 더욱 활력있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함께 이 <빨래>를 보면서 나는 다음 요소들을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첫째, 공간과 시간이며, 둘째 움직임(動)과 멈춤(止)입니다. 이 요소들은 극을 수직과 수평으로 분할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틈에 다양한 페르소나는 이 구조를 더욱 긴밀하게 이어주며 긴장감을 유발시킵니다.

 3.

<빨래>에서 주목할 첫 번째 요소는 ‘변형된 시공간’입니다. 극을 구성하는 기본틀입니다. 마치 기호학적 분할이라고 할만큼 정교합니다. 공간은 ‘위-아래’로, 시간은 ‘이미-아직’입니다. 공간과 시간은 긴밀하게 엮어 있습니다. ‘위-아래’는 곧 ‘미래-현재’입니다. 특이하게 회상이라는 과거는 연상으로 충분합니다.

 

먼저, ‘위-아래’라는 구조를 관찰해야겠습니다. ‘위’는 구체적으로 ‘옥상’입니다. ‘아래’는 땅의 쪽방’(지하방)과 주인공 서나영의 일터인 서점입니다. 옥상은 ‘빨래를 널어두는 곳’입니다. ‘아래’인 땅의 방은 ‘빨래를 하는 곳’입니다. 서점과 공장은 궁극적으로 땅의 방과 연장선에 있습니다. 극이 전개되면서, 위-아래라는 공간은 점차 시간을 투영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옥상은 미래이며 긍정입니다. 반면에 쪽방들과 그 연장 공간(서점, 공장)은 현재이며 부정입니다. 미래로서 옥상은 아름답고, 행복한 감성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현재로서 땅의 방들은 다툼과 갈등, 그리고 숨겨둔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옥상은 그 자체로 사랑과 희망을 내포한 공간이며 시간입니다. 반면 땅은 치열한 생존의 장이며 시간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땅의 투쟁을 지나야 옥상에 널린 행복과 맞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빨래’가 그 상징입니다.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넌다’는 것입니다. 잘 마른 그것을 정갈하게 개고, 정리하는 행위는 이 극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관객의 상상 속에 그냥 남겨졌습니다. 이처럼 이 극은 위-아래(옥상-땅의 방)를 수직구조로 표현합니다. 

 4.

눈을 좀 더 ‘옥상’에 멈춰봅시다. 이 곳에서는 사건전환에 결정적인 행위가 있습니다. 젖은 빨래를 너는 장면입니다. 젖은 빨래는 땅에서 일어나고 겪은 여러 일들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옥상에 오르면, 그 곳에는 바람이 불고, 햇살은 화사합니다. 정갈하게 널려진 젖은 빨래는 당연히 잘 마를 것입니다. 만약, 날이 흐리고, 비가 온다면, 빨래는 마를 수 없습니다. 젖은 빨래만 쌓여 갈 것입니다. 젖은 빨래를 널어두는 행위 뒤에 그것이 잘 마를 것이라는 희망이 서려있다는 것을 짐작해 봅니다. 옥상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연출됩니다. 만남입니다. 인물들은 수줍은 태도로 만납니다. 우연이었고, 낯선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둔 만남입니다. 느린 대화와 어색한 표정, 상대를 조심스럽게 응시하는 시선 만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이제 관객은 그들이 서로 ‘말하는 것’과 그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나누는 말은 바싹 말라가는 빨래 뒤로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아직 아무 것도 손에 잡힌 것이 없습니다. 옥상에서 내려서는 땅, 그 현재는 치열한 전장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합니다. 옥상은 그 미래를 향한 메타포를 극적으로 그려냅니다.

 

5.

이제 한 인물이 부각됩니다. 빨래를 들고 옥상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위-아래를 이어주는 매개자입니다. 서나영입니다. 그는 ‘슬픔’ 속에서 삶을 버텨내는 사람입니다. 한계가 많은 인물입니다. 옥상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땅에 내려서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집니다. 이질적인 고향과 출생,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동시에 동질인이기도 합니다. 무지개를 찾아, ‘서울의 달’을 쫓아 자기 터전을 떠나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겪는 현재는 아직 절망과 아픔, 고통입니다. 그 속에서 그들이 나누는 어눌한 대화는 사랑과 희망을 향해 전진하는 미래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희망은 여전히 ‘아직’ 오지 않은 가치입니다. 놀랍게도 처음부터 그 사랑과 희망은 ‘이미’ 그들 사이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아직-이미’는 이 극에서 시간관념이 변형되는 지점입니다. 서나영은 그런 시간 변화을 촉박하는 매개자입니다. 가만히 보면 옥상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것입니다. 옥상은 곧 미래이며, 땅의 방은 현재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이 옥상은 아직 오지 않은 현재입니다. 땅의 방은 이미 와 있는 미래입니다. 달리보면, 젖은 빨래를 들고 옥상에 오르는 서나영의 현재 행위는 생존을 위한 분투 그 자체입니다. 그 분투가 이제 사랑과 희망이라는 미래가치로 치환될 것입니다. 생존은 옥상이 아니라 땅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치열하게 분투하는 땅에서 옥상을 향해 오르고, 젖은 빨래를 너는 행위는 자기의지를 넘어서는 신앙의식에 버금가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충분합니다.

 

6

이 극에 내재된 또 다른 기호가 있습니다. 움직임(動)과 멈춤(止)입니다. 극 속에 등장하는‘움직이는 사람들과 멈춘 시계’였습니다. 옥상에서 지극히 정제된 행동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땅의 방들에서는 카오스(chaos)같은 삶을 겪습니다. 땅의 방과 방 사이는 문과 문으로 닫혀 있습니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저녁 주인할매의 수상쩍은 행동은 그 감춰지고 닫힌 세계를 정미하게 묘사합니다. 직장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적이고 성공적이며, 진솔하게 보이는 상사의 말에서도 혼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옥상과 달리 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비가 오고, 우산을 들고, 복잡한 마을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든 인물들은 이 카오스같은 세계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물들의 동선은 모두 수평적입니다.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옮길 뿐 누구도 옥상을 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의 사람들입니다. 치열한 사건은 모두 땅에서 일어납니다. 이 모든 행위들을 압축하는 것이 ‘빨래를 한다’입니다. 이 극에서 빨래는 슬픈 현실을 버텨내려는 분투의 집약이며 자신을 다독이는 자기대화의 시작입니다. 빨래는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자기 존재를 삭히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현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땅에서 등장인물들은 쉼없이 움직입니다. 그들은 능동적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피동적이며, 수동적인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1년, 2년, 5년, 15년, 30년이라는 숫자는 무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수동적 세계에서도 능동적으로 생존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떠밀려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습니다. 비오는 날, 우산과 버스, 그리고 도시사람들의 사연은 그런 이미지를 극대화해 줍니다. 그 속에서도 세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벨을 누르고 난 뒤 내리기가 허용된 후에나 가능합니다. 아무데서나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워 올라타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온 몸을 움직일 수 없이 갇힌 이들이 ‘79년생 서나영들’입니다. 이들은 멈추는 순간 삶이 끝나는 게임에 불려나온 사람과 같습니다. 어느 한 순간,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는 순간, 그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건은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극은 생존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빨래입니다.

 

7

빨래는 이 극을 지탱하는 중추적 기호입니다. 또한 빨래는 ‘생존’을 주도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이불빨래는 중요한 메타포라고 생각합니다. 손으로 가볍게 할 수 없고 발로 짓이기듯 밟아가며 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겨울, 차가운 물을 담고 작은 통 안에 맨발로 들어가 묵혀진 때를 빼내는 행위는 전진과 맴돎이 함께 일어나는 상징입니다. ‘전진과 맴돎’은 구분되는 행위가 아닙니다. 느릿한 나선형 길이 떠오릅니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쉽지 않아도 길을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쉬지않고 발로 밟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편, 쉼없이 전진하는 이미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1인 다중역입니다. 다중역할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배역은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역할로 극 중에 등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가는 힘에 분투하듯 적응하고 있다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그 다중배역을 보며 방금 전 그가 누구였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그 배역을 그 사람으로 인식하고 주목합니다. 그 사이에 고정배역도 물론 존재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생존하기 위해 쉼없이 움직이고 있는 중에 단 하나 멈춘 것이 있습니다. 벽시계. 누군가 그 시침과 분침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해진 시간 그대로 멈춰 있을 것입니다. 시계가 멈춘 것처럼 빨래를 멈출 날도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입니다. 그 날은 옥상에 올라갈 일도 없습니다. 결국 마음 속에 그리운 사람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진 것입니다.

 

8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땅에 널려 있는 빨래’입니다. 사실 극이 시작되고 마치는 순간까지, 그 안에는 전진하려는 이들과 맴도는 이들이 긴장상태를 유지합니다. 전진하려는 이들은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하고, 삶을 더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맴돌고 있는 이들은 삶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이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 땅에 널려 있는 빨래입니다. 옥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자기가 머물러 있는 땅에 빨래를 너는 사람들. 그들은 전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면서 여전히 맴돌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맴도는 이유는 소용돌이 때문입니다. 극중 주인할매와 구씨를 연민하는 희정씨는 그 긴장을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그 두 사람이 이불빨래를 하며 나누는 대화는 삶의 긴장을 초래한 원초적 원인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에게 윤리적 통념을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이해해야 할 당위성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땅에’ 빨래를 널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삶을 전진시키지 못한 채 맴도는 상황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땅’은 그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터전입니다.

 

이렇게 전진하는 듯 맴돌고 있는 것. 그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이 극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극의 절정은 이 긴장관계를 과감하게 깨뜨리고 앞으로 한걸음을 더 내딛는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라는 노래는 옥상이 아니라 땅에서 시작됩니다. 곧이어 땅의 노래에 맞춰 옥상의 빨래가 힘차게 나부낍니다.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보면”, “20대에 뭘하고 살았는지”, “구씨 양말 빨 때”라는 자기 고백이 땅에서 솟구치면 옥상에 널린 빨래는 환호합니다. 이 장면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옥상에 널려 있는 빨래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장면과 땅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자기선언이 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한 사진을 떠올립니다.


9.

사진작가 빌 콜만(Bill Coleman, 1925-2014). 그는 미국 청교도 공동체인 아미쉬(amish)를 사진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사진 속 아미쉬는 문명단절과 전통고수라는 닫힌 공동체라는 이미지에서 시대로부터 엄격한 자기절제를 이뤄내고 있는 열린 사회라는 이미지를 상상하게 돕습니다. 나는 그의 사진 중 유난히 빨래를 널어둔 장면들을 물끄러미 본 적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마당에 마냥 펄럭이는 색색 빨래가 실감나게 담겨있습니다. 빨래들은 가지런하면서도 자유롭게 날리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더욱더 그들이 절제를 자유로운 삶을 향한 디딤돌로 여기는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문명을 스스로 거절하고 있으니 그들이 내건 빨래는 모두 자기 손으로 직접 빨았을 것이고, 햇살 좋은 날 푸른 하늘 아래 널었을 것입니다. 조금 거창한 말로 하자면, 그 나부끼는 빨래를 보고 있으면 세계 안에서 빨래가 내재한 슬픈 사회사적 흔적이 엿보입니다. 아직도 인도에는 도비라는 천민계층이 있습니다. 그들은 빨래만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숱한 빨래들을 발로 밟고 손으로 비틉니다. 널어두고 마르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그 빨래하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빨래를 계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삶은 사회적 천대라할만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빨래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빨래는 종교의식에서도 엄격하게 다뤄졌습니다. 의식에서 재현되기도 했습니다. 티벳에는 ‘타쭤’가 있습니다. 기도문을 오색천에 담아 하늘에 펄럭이도록 내걸어두는 의식입니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서 이 천들은 마치 빨래를 널어둔 것처럼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나부낍니다. 더 소급하면 고대 사람들에게 빨래는 인간내면을 정화하는 상징의식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빨래를 정결제의 상징으로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빨래는 가장 평범한 일상 행동이면서도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답지하는 무시할 수 없는 의식으로까지 승화되었습니다.


10.

뮤지컬 <빨래>는 ‘땅의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식(儀式)이라 할만합니다. 몇 년 전 회자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을 넘어 이 시대에 마치 내가 극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79년생 서지영들’의 등을 토닥여줍니다.

79년생 서나영’. 꿈이 있어서 도시를 동경하며 삶의 터전을 떠나온 사람입니다. 5년이 지났지만 몇 개의 봇짐과 책 한권을 손에 들고 도시를 방랑 중입니다. 그는 속절없이 서울의 달빛 아래를 걷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시절부터 그는 나처럼 그렇게 이 시대 어딘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빠르게 달리면서 어제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빠르게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경쟁 중에 있습니다. 그 틈에 ‘82년생 김지영’들과 함께 ‘79년생 서나영’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하늘아래 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빨래>는 이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손편지를 읽어주는 의식같습니다. 나는 이 점에서 마르크 로제의 소설을 연상합니다.(3-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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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잔인한 4월'이 5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숨어있는 바이러스는 사라질 줄 모르고 깊이 잠복해있다. 아직 건재하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 지리한 싸움이다. 물론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다행히 계절은 한결같다. 5월에 들어서면서 날이갈수록 다른 ‘바람이 분다’. 몸에 닿는 바람이 거칠고, 뭉특하다해도 나는 애써 밀어내고 싶지 않다. 시샘하듯 스산해도 오히려 친근하게 맞아주고 싶다. 나에게 바람은 계절 전령사같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들에 나는 가볍게 산 길을 오르거나 강 길을 내달린다. 높이 올라 멀리 내다보고, 길게 내달려 크게 둘러본다. 어느 길에서나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온다. 기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사뭇 달라지는 바람이 내 삶에 여러 갈래로 스며들어 움츠렸던 삶을 움트게 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바람부는 날 나는 높고 먼 길에 내 몸을 띄운다. 마치 채무를 갚아내야 할 사람같이 길로 나선다. 아침 햇살이 아직 바래지기 전 서둘러 길에 들어선다. 아주 짧은 시간 아니면 해가 저물 때까지 숲 길을 걷거나, 강 길을 달린다. 바람이 부니 삶이 움직인다.


2.나는 관습처럼 시인 유하가「‘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연작시를 기억한다. 시인은 이질적인 문화가 뒤섞이던 그 시절, 그 거리를 걸었다. 그는 그 거리에서 숲과 나무, 풀과 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콘크리트같이 굳어있고, 기계같이 무덤덤하게 돌면서 시대의 변곡점을 관찰했을 뿐이다. 바람이 부는 날, 그 거리는 텁텁했다. 그는 슬픔과 아픔, 회한의 언어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람이 부는 날 탁한 거리를 씁쓸하게 걸었던 모양이다. 바람이 부는 날 그는 가볍게 시대에 절망한다.


3. 바람이 부는 날, 시인 폴 발레리가 남긴 말도 떠오른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읽

을수록 가볍지 않은 싯구다. 이 구절은 습관처럼 해마다 봄의 끝 즈음에 불어오는 바람과 같이 살아난다. 시인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S. 말라르메)는 비극적인 싯구에 대응한 모양이다. 마치 저항같다. 시인은 자기 시「해변의 묘지」《해변의 묘지 Le Cimetière marin, 1920》의 끝구절까지 바람이 분다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관통해야 할 20세기 초 격동의 시간들에 물러서지 않고 몸으로 부대껴 살아내겠다는 의지다. 그는 이 고백을 반복하여 새겨둠으로써 절망을 희망으로 견인하려는 시인의 책임을 다하려했을지 모른다. 시인에게 ‘바람이 분다’는 미세하지만 견고한 희망 전령인 셈이다.


4.바람이 부는 길을 걷고, 달리다보면 자연스럽게 노래하나가 떠오른다. 그 노래는 계절과 감정이 절묘하게 만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같은 경험과 기억이 서로 다르게 공유된 슬픔을 아련하게 풀어내는 듯하지만, 나는 이 노래에서 회한을 담고서도 자기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려는 사람을 떠올린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나는 달라져 있다’는 대목은 어둑어둑해진 삶의 자리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흔들리면서 사라지는듯한 고백이다. 이 구절이야말로 이 노래가 단지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 문제만에 갇혀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오히려 바람이 흔들려 자유롭게 요동하다가 안전한 항구에 안착하는 배와 같은 삶을 본다. 바람은 언제나 자유롭게 거침없이 분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아픔이든, 치유이든 무엇이든 마침내 삶을 ‘희망’ 종착점으로 안내해 줄 선물이 분명하다.


5.‘바람이 분다’는 말 속에는 또 기억할 것이 있다. 언젠가 바람이 불던 날, 가까운 동산에 올랐다. 어렵지 않게 산머리로 오르는 길에 늘 있던 숲이 사라졌다. 검고 퇴색된 채로 타다 남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다. 언제 일어난 화재인지 기억도 없다. 짙푸른 녹색이어야 할 산길이 그을린 불의 흔적으로만 가득하다. 잠시 길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바람이 분다 風立ちぬ』(かぜたちぬ)가 이런

현장에 잘 어울릴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진으로 땅이 붕괴된 이들에게 하늘을 나는 비행기 모티브를 이어주고 싶은 매개는 ‘바람이 분다’였던 모양이다. 미야자키는 이 명제를 통해 전후 전범일본이 살아야 할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폴 발레리의 저 싯구를 자기 편으로 은근히 이식하는데 동의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전쟁의 악행과 그 상흔, 그리고 갈라진 땅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다시 두 다리에 힘을 얻고, 두 손을 움켜쥐게 하며, 마음에 화색을 돌게 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모양이다. 그에게 ‘바람이 분다’는 전후 폐허가 된 땅에서 좌절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상상해내는 힘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칠 수 없는 것도 있다. 비행기 ‘제로센’는 그들에게는 희망이었으나 훗날 어떤 이들에게는 미화될 수 없는 비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다 했지만, 역사는 ‘카미카제’라는 당대 불의한 비극을 결코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희망을 선택했지만, 어떤 이에게는 ‘분노’이며 ‘절망’의 단초였기 때문이다. 의식과 이념은 현실에서 돋아날 때 비로서 실체다. 그는 자기 슬픔만을 정의롭게 치유하느라 역사의 진실한 아픔을 외면하는 듯한 협착한 태도를 자기도 모르게(아니 알고서도) 견지했을지 모른다. 그에 의하면,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희망이자 어떤 절망이다.


 6.그을린 산머리를 지나 산아래로 내려오다가 한묶음의 ‘별꽃’을 만났다. 이들은 불어오

는 바람 속에서 그 낮은 자리에 머물러 고요하게 별처럼 빛난다. 이들에게 ‘바람’은 생존 근거다. 이 꽃은 들판에 낮게 깔려 피어있다. 그 꽃 위로 바람이 분다. 순간, 그 작은 꽃 위에 바람이 머물면 꽃은 ‘생명’을 감지한다. 이 땅 모든 사물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바람’을 통해 경험한다. 우리가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이 그렇듯 나무와 꽃 사이를 부는 ‘바람’은 그들의 숨결이다. 바람이 불면 꽃이 핀다. 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지고, 이어 나무에 싹이 돋고 줄기가 나온다. ‘숨’을 쉬며 모든 사물은 자라간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7.

올해 4월바람은 지난 겨울부터 여전히 내 삶을 괴롭힌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여느 해와 달리 5월바람도 4월을 아직 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계절 역사를 겪어오며 나는 확실히 내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월 바람은 따스하고 정답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5월 바람은 마침내 감싸안 듯 다독여줄 것이다. 그러니 나는 5월이 지나가기 전, 어느 한 날이라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보려한다. 맞바람에 한걸음 내딛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거친 바람 속에 한발 한발 내딛다보면 바람 속에 생명과 회복이 가득 담겨 있음을 잊고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바람은 슬픔과 희망과 자유와 사랑과 그리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저 곳에서 이 곳으로 자유롭게 불고 있다. 나는 그 즐거운 방랑을 온 몸으로 맞딱뜨릴 것이다.


 나는 시인들과 음유가수가 들려준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그들이 노래한 ‘바람이 분다’는

절망이면서 희망이며, 죽음이면서 생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기억한다. 바람은 방향없는 듯해도 생명의 길을 선명하게 열어주는 피조세계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또한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힘이며, 결국  이 시대를 살아낼 희망가득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는 것을. 

 오늘도 어디서나 그 ‘바람이 분다’. 나는 그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간다. 눈을 들어보라.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회색 도심 어디서든 낮고 작은 꽃들이 희망처럼 피어 있으리라. 절망을 다독여 이끌어가는 희망이 꽃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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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 그림집(회화집)을 선물받았다. 안금주 작가의 『내안의 풍경 The Scenery in My Mind』(헥사곤, 2016/2019년에 2권이 출간되었다)이다. 동해, 남해, 서해 바다와 강, 늪을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펼치면 곳곳에 바다가 있고, 파도가 있으며, 노란 일출이 지면을 가득채운다. 늪의 아침이 있으며, 동행이 있고, 바다소리가 있다. 이른 아침 산책이 있고, 비내리기 직전 예감이 스며있다. 그저 무념하게 바라보면 바다가 떠오르는 책이다.


2.

저자는 서양화가다. 여러 번에 걸친 전시회를 가졌고, 다양한 작품활동을 했다. 작품설명을 곁들여 물끄러미 바라보면, 인상적인 몇 장면들이 있다. 푸른 바다와 흰 파도, 등대, 바닷가 모래, 낮고 푸른 구릉이다. 구도에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고, 잘 어우러져있다.


3.

책 맨 앞, 비평가의 말 속에 그의 그림에 대한 총평이 있다.

"그의 바다에는 어떤 의도적 장치나 수식도 없다"

무슨 이야기인지 의아하다. 첫 번째 짙푸른바다를 시작으로 드디어 책 맨 끝에 작가가 남긴 노트에 닿았다.

"거의 무채색의 텅 빈, 그건 그냥 내 모습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비평가가 말한 '장치나 수식없음'이 작가가 말한 '무채색의 바다'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채색의 바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이 말을 어느 정도 풀어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강릉 경포길, 해변가를 걷고 나서다.


3-1

2018년 10월 나는 강릉 바닷길을 걸었다. 도착하자 날은 흐렸고,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거셌고, 길은 갈수록 어둑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파릇한 소리들만 화사하다. 그 틈을 헤집고 거슬러 걷고 또 걸어서 바다에 겨우 도착했다. 비바람이 한번 휩쓸고 간 다음 다시 먹구름이 바다를 가둬버렸다. 비만 피하려고 사들었던 우산은 거센 바닷 바람에 순식간에 살이 부러져버렸다. 쓸모는 없었겠지만 쓸 일은 있었다. 비오는 날 사진 소품으로 안성맞춤이다. 내려걷는 바닷가 모래해변으로 파도가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걷다가 멈춰섰다. 맑은 날이라면 선명했을 수평선이 먹구름 속에서 뭉개져버렸다. 바다와 하늘은 경계가 없어졌으며, 파도와 구름은 닮아버렸다. 나는 한동안 그런 바다를 눈에 담고 있었다.


3-2

그 후, 바다가 그려진 이 그림집을 보다가 문득 그 날 본 거 같은 바다가 그림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 비바람을 뚫고 남겨둔 나의 사진을 몇 장 다시 찾았다. 닮았다. 그림은 그 흐릿한 동해바다인 모양이다. 제목(바람부는 날 2)을 보지 않더라도 그림만 보면 아마도 작가는 나처럼 비가 내리는 날 그 바다를 찾았던 모양이다. 작가는 작가답게 그 흐릿한 바다에서도 구름 넘어 실재하는 맑은 날을 떠올리고 있다. 다시 작가가 남긴 말을 읽어본다.

.

"사람없는 바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 별 요동을 칠 줄도 노래할 줄도 몰라 보이는 파도는, 맑은 날 정오의 수면이나 모래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남기고 간 것들. 그래서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거의 무채색의 텅 빈, 그건 그냥 내 모습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92쪽)

나는 작가가 말하는 '무채색의 텅 빈'을 읽고, 내가 걸었던 그 바다를 겹쳐놓는다. 문득 작가가 남긴 말, ‘무채색의 텅 빈’이 오히려 '가득찬 텅 빔'으로 눈 앞에 떠오른다. 바다는 어떤 모습이든 바다다. 옳다. 


4.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주로 ‘모순어법’으로 풀어 쓴다. 이 말 자체가 일단 모순이다. 그리스 어원에서 Oxy가 똑똑한 사람을 일컬었던 반면, Moron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켰다. 얼핏 봐도 어울릴 수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적절한 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주 쓰는 몇 몇 예가 있다. ‘작은 거인’, ‘조용한 함성’, ‘풍요로운 빈곤’(J.베커), ‘따로 또 같이’ 등등 문학가들이 종종 극적 효과를 위해 쓰는 표현들이다. 이로써 묘사하려는 대상을 안과 겉을 총합적(holistic)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5.

나는 이 그림집이 마치 옥시모론같다. ‘거친 잔잔함’, ‘충만한 텅빔(fully empty)’, ‘어두운

광명’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에 담긴 바다 그림들의 매력일지 모르겠다. 사실, 살아가는 일들 중에 자주 모순된 일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다. 삶이 유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확고한 믿음, 즉 확신(確信)이라는 말 자체도 우리가 겪는 삶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둑한 구름, 바람 거센 바다 너머에 푸르고 맑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연함이 우리가 겪는 삶을 이해하는데 유익할지 모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증을 얻어내기보다 하루하루 겪고 있는 자기 삶에 대한 유연한 여백을 채우려는 고달픈 마음노동일지 모르겠다.


생각해서 책을 선물해준 이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강릉 경포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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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행 20자*10행=200자 원고지. 70-80매. 이것은 대체로 단편소설 분량입니다. 출판에 유용하도록 글의 분량을 측정하는 도구는 원고지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659년 일본 도쿄의 겐지로상점에서 그 유래를 겨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특이한 종이형태는 가로쓰기보다 세로쓰기에 최적화된 바둑판모양의 격자에 글씨를 넣어 쓰면 출판사는 그 글을 따라 조판합니다. 대체로 원고지 한 장이 소책자 1쪽에 해당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원고지는 본래 세로쓰기를 즐겼던 일본식 글 처세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행정과 서식에 관한 문물을 일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넘겨받았던 우리에게 원고지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어린시절 학교 국어수업에서 원고지 쓰는 법을 연습했던 지루한 경험이 있습니다. 출판사에 필요한 교정기호들을 외우고 적용해보는 시험도 버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추억같은 것이 남아 있어서 어쩌다 빈 원고지가 눈에 띄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괜히 ‘연필’을 들고 끄적거려봅니다. 지금도 그 이름을 널리 떨치는 유명한 작가들도 얼마 전까지(아니 지금도) 손으로 원고지에 직접 글을 써서 출판했다는 후일담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런 정황들을 보면, 이 원고지는 우리 사회에서 글쓰는 멋과 아주 긴밀하게 공존했던 흔적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우리말 쓰기는 원고지와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고지가 사라진 것은 당연한 변화이지만, 추억마저도 사라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2. 계간지「창작과 비평」2008년 여름호에 특집 기사 하나가 실렸습니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의 미발표원고였습니다. 당연히 지워지고, 교정된 흔적들로 가득한 원고지였습니다. 이 글 발표 이후, 미발표원고들이 발견될 때마다 사람들은 이제 원고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 원고가 초판 원본인지, 교정본인지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초판과 교정본을 견주어보는 일은 글을 이해하는데 중요했습니다. 일단 시인의 처음 생각이 무엇이었고, 그 다음에 바뀐 것은 무엇이며, 왜 그랬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원고지에 실린 원본과 교정 내용들은 한 글에서 시인의 생각의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추이를 살펴보는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단순한 맞춤법 교정이라면 그것은 국어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시어를 변경했다면 그것은 시인이 그 시에서 지향하는 글의 방향이 어떤 변화를 겪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변화들의 흔적은 남아있는 종이, 원고지가 제공합니다.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인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출전 『거대한 뿌리』,1974년)라는 육필원고를 보자면, 그는 원래 기름 덩어리'와 '설롱탕'으로 탈고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원고지에는 당시 맞춤법에 맞게 '기름덩어리'와 '설농탕'이라고 수정한 흔적이 있습니다. 최종교정자가 삽입한 단어였습니다. 그 바람에 그 육필원고는 원본이 아닌 교정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어떤 과정이든 원고지에 남겨진 흔적들은 기계로 글을 쓰는 시대가 오기 전, 아니 지금도, 한 글지기가 무슨 생각과 어떤 이야기를 어떤 과정을 거쳐 담아냈는지를 한눈에 알아보게 만드는 글의 사상궤적이라 할만합니다.


3.오래 전 서재 짐을 정리하다가 컴퓨터로 출력한 글들 사이에 한동안 묵혀있었을 원고지 뭉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어느날 우연히도, 어느 분이 짐을 정리하면서 버릴까 하다가 혹시 내가 쓸지도 모른다고하면서 주고 간 원고지가 있었습니다. 이 원고지 뭉치를 보니 습하고 어두웠던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습작처럼 써두었던 글들을 서로 돌려보고, 원고지 위에 이런저런 교정기호들을 그려가며 웃고 떠들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교지한권만드는데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수정과 편집이 간편해진 오늘날, 키보드 글쓰기는 솔직히, 어떤 점에서는 사고의즉각성을 키울 뿐, 사고의 점진성은 약화되기 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고대 사람들의 책을 읽다보면, 한 글이 완성되기까지 고치고, 다듬고 흘러왔던 사고 궤적이 유적처럼 남아있는 글뭉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떤 사람들이 이 단어를 어떤 식으로 수정했는지, 또 한 표현을 어떻게 다르게 옮겨 적었는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 글이 완성되기까지 수정 흔적과 변형의 예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4.200자 원고지 1장에는 150자 정도의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원고지 10매(400자 원고지 5매)정도를 손으로 쓰면 그것은 평균 A4 한장(10pt, 줄간격 160인 경우, 장평0) 정도  될 듯합니다. 글 완성 속도에 사활을 거는 요즘 글쓰기 작업 환경에서 보면 원고지 10매를 손으로 쓰는 것은 두 손으로 자판을 두들겨 A4 한 장 작업 능률에 비할 것이 못됩니다.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것은 수정에 대한 부담, 단어 하나의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 글을 이리저리 편집하려면 조판과정을 다 거쳐야 하거나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귀찮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오타에 대한 부담도 없고, 바로바로 수정이 가능한 키보드 작업은 글쓰기 부담을 훨씬 경감시켜 주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일도 거의 무감각적으로 이뤄져서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자판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구가 무엇이든 상관없다해도, 가끔 자기 손으로 직접 글씨를 그려보고, 엮어보며 한 편 글을 써내는 일도 지나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로서 문학은 자신의 손으로 남긴 글씨와 글들의 조합으로서 자신의 사유를 확정짓습니다. 동시에 문학의 사회적 자리를 고려한다면, 문학은 그 글을 통해 그 글의 완성되기까지 작가의 감정과 의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더 나아가 그 글에 당대 정황들이 오롯이 담아낸다면 좋을 것입니다.


5. 사이토 다카시는 그의 책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루비박스, 2005)에서 사고의 무한 전개는 원고지 10장을 자기의 손으로 쓰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실용적인 제안을 합니다. 우리 사고가 자기 손으로 직접 써놓은 글을 통해 더욱 더 진솔하게 발전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튼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문학은 글쓰기로서 일단 세계에 자기 존재를 드러냅니다. 이를 위해서 빠른 자판도 유익합니다. 그와함께 손으로 썼다지워가며 눌려낸 글도 좋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짧더라도 자기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원고지에 담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든 한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 원고지 앞에서, 키보드 위에서 어떤 시간 골똘히 고민해 낸 결실이 뭉그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기 손때가 묻은 글자들로 엮인 한 글은 곧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결실입니다. 자기 글을 씀으로써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자신이 어떻게 엮여있는지를 반추해볼 수 있는 생생한 방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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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략>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 미래사, 1991년 판/2002-


2.

시인은 묵직한 소리에 목청을 높여 절규하듯 노래한다. 그 슬픔 속에 정주하는 ‘서울의 예수’가 있다. 그를 바라보며 슬퍼하는 자들이라면 그는 더욱 슬퍼지리라.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서울의 예수’는 저 유대 땅 혁명의 예수와는 사뭇 달라진 것일까? 죽음을 이겨 마침내 본향에 다다른 예수와 이 서울의 예수, 이 본향의 예수와 저 서울의 예수 사이에는 어떤 심곡이 자리하고 있는 것인가? 그 이질감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밀려 들어오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일이 그릇되었던 것일까? 비록 시인의 하소연같지만 서울의 예수가 술 한잔과 담배 한 모금에 마음을 위로받아야할 만큼 도대체 어떤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서울의 예수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그저 허공에 흩날리는 바람같은 소망일 뿐일까? "~하고 싶다" 왜 그는 아무 것도 손에 잡을 수 없었는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정호승 시인의 신간이 여럿 있지만 나는 20년도 지난 이 시가 늘 마음에 걸린다. 그가 남기고 채색한 시의 언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괜한 생각이 든다: 이 불안한 시어들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그에게 찾아왔을까? 밑도 끝도 없이 공중에 흩어질만한 언어들이 어떻게 자근자근 다듬어져 시라는 삶의 자리에 내려앉았을까? 시인에게는 어떤 연유가 있길래 이 시상이 그가 살아온 삶의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솟구쳐 올랐을까? 진실로 저 시어들은 저 하늘로부터 계시처럼 내려와 이 장을 비집고 들어가 터를 잡았나? 하는 것 말이다. 기실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달리 있다. ‘서울의 예수’는 무슨 이유로 이처럼 슬픔의 전위에 서 있을까?말이다. 그로 말하자면, ‘역사적 예수’이든 ‘현존의 예수’이든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할 것없이 기쁨의 춤을 추었다는 사실이 무성하고, 그를 만나는 이는 누구랄 것도 없이 옛속성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난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도대체 그는 무슨 이유로, ‘서울에 터를 잡고 산 이후부터’ ‘슬픔’ 속에 자신을 던지고 있을까 말이다.


3.

나의 시대는 역행하고 있다. 삶은 번화해졌지만, 사색은 가벼워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화려한 겉

과  달리 안으로 깊어지는 절망이 죽순처럼 발아하는 것 같다. 시대는 오늘도 절망의 계곡을 위태롭게 걷는다. 파편같은 역사는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찌르고 있다. 예수는 기뻐할 수 없다. ‘애통하는 자들’을 보고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시인에게 묻는다. 이 시어들은 정말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그 시어들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나는 이 시 안을 거닐다 문득 슬퍼하는 ‘서울의 예수’가 역설적이게도 희망스럽다는 것을 감지한다. 시인의 언어 속에 다독여진 그의 길을 따라가다보니 우리 시대가 여전히 의미있는 ‘오늘’을 관통하고 있다는 소망을 관망한다. 우리는 슬픔과 눈물로 서울을 걷고 있는 예수가 흘려놓은 그 소망의 잔해들을 따라 함께 걷는 것이다. 하비루(출애굽 당시 광야로 내몰렸던 사람들)들을 끝내 사랑했던 그들의 신 야훼의 길을 따라 함께 걷는 것이다.


나는 상상한다. <서울의 예수>가 무척이나 슬픈 모습으로 한 여름같은 역사 한복판을 걷고 있다. 그는 슬픔으로써 슬픔을 씻어낸다. 나는 본다. 내가 내 삶에 함몰되어 어기적거릴 때, 그 슬픈 도시는 처절한 생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도시 한복판에서, 그의 어깨는 한낮 뜨거운 기운에 젖어 쳐진 듯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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