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찬의 <새의 시선>이라는 단편을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몇 권의 장편을 세심하게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나름 그의 소설 속에 담긴 지향점을 생각해보기도 했습

니다. 예를 들어, 사순절 즈음에 읽어볼만한 <빌라도의 예수>, 5월 광주의 이야기를 담아낸 <광야> 정도만 봐도 그의 소설은 한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겪고 있을 사상 분투를 내면으로부터 추적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의 글은 인상적이었습니다.


2.

이번 글은 제42회 이상문학상(2018) 수상작에 들어있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내가 유려한 다른 작품들보다도 이 소설을 먼저 열어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글은 두 가지 평범한 요소를 토대로 이야기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건'이라는 단어였고, 다른 하나는 '사진'(영상)입니다. 작가는 이 두 요소를 자연스럽게 묶어냅니다. 그는 '시선'과 '카메라'는 이 요소들을 묶는 도구입니다. 짧고 단순한 구조에서 이 소설은 '카메라의 시선'을 세심하게 따라갑니다. 인간의 손에 들려져 제한된 카메라 시선은 어느 사이 자유롭게 날아오릅니다. '새의 시선'으로 전환됩니다. 부감하듯 조망하며 사건과 사물의 속살에 다가갑니다. 비록 한 컷에 고정될 수 있는 카메라 시선일지라도, '새의 시선'은 독자를 더 높이 더 넓은 세계로 이끌고 있습니다.


3.

읽다보니 이 소설에서 작가가 지향하는 시선을 명시적으로 담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주인공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아주 우연히 한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내가 망루 안으로 들어간 것은 카메라가 원했기 때문이다. 난 단지 카메라를 따라 들어갔을 뿐이지. 카메라가 원하는 것을 거부할 힘이 나에게 없었어. 그 카메라를 잃어버렸어. 카메라를 따라간 나도 잃어버린 거지. 그가 어디로 갔는지 난 몰라.가끔씩 나타나기는 해. 새의 영혼이 담긴 카메라를 들고" (286쪽)


예측했겠지만, 주인공이 따라 들어간 곳은 '남일당'입니다.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4층짜리 남루한 건물. 강경한 진압, 망루 화재. 마침내 재개발의 축포를 울리다. 카메라는 그 날 그 현장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 후,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는 그 사건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두었습니다. 그 남긴 흔적들은 시선입니다.


4.

정찬의 이 짧은 소설은 작가 자신이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듯합니다. 나는 이런 질문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에 남아있는 역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사진 한 장에 살아남은 역사는 어떤 시선으로 읽어내야 하는가?' 물론 저자가 직접 답하지는 않습니다. 글의 끝으로 갈수록 한 답을 추론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답을 적어봅니다.


'프레임에 갇힌 그 세계를 새의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


5.

개인 경험이긴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즈음, 나는 이 역사의 현장 앞을 가끔 차를 타고 지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현장을 바로 눈으로 보지 못한 내가 그 날 그 자리에서 피어올랐던 불의 정체를 제대로 알리 없습니다. 다만 그 다음 날부터 나는 그 길을 지날 때 일부러 차에서 내리거나 아니면 차의 속도를 아주 늦춰 슬쩍 눈으로 올려다 보곤 했습니다. 사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가끔 도로를 지날 땐 그 불타버린 채로 남아있던 건물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6.

이제는 그 건물도 사라지고 그 날 역사기억도 흐릿해져 가고 있습니다. 꿈꾸던 대로 그 곳은 은빛 건물들이 촘촘하게 세워져 햇살에 번쩍거립니다. 어디에도 역사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카메라와 시선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남겨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멈춰버렸고, 고정된 한 장의 카메라 사진을 '새의 시선'으로 여러 갈래에서 자유롭게 들여다보려는 나의노력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진 어딘가에 흘러들어와 있을 정의로운 시선을 추적하여 '남일당' 옥상 망루에 스스로 올라가보는 것입니다.


7.

지금도 우리 시대는 '새로운 남일당'이 명멸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솔직히, 나는 치열한 역사현장에 직접 몸으로 뛰어들어 싸우는 운동가는 되지 못합니다. 할 수도 없을 겁니다. 하여 이 역사에 몸을 내던진 이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자리를 많이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기억해두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사활을 걸고 남겨 놓은 사진 한 장, 글한토막을 제대로 읽어내려는 노력은 쉬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이 B급 참여의식에 운신하듯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서 나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8.

이제 정찬의 소설, <새의 시선>은 나를 더욱 기분좋게 채근한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한

장의 사진이라도 그 프레임에 담겨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공의롭게 해독해내는 용기입니다. 나아가 그것에 일조할 <새의 시선>을 따라 가는 지혜를 놓치지 말도록 말입니다. 아직 강남역 사거리 25미터 위에 사람이 있고, 40년 전 5월 광주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인 흔적이 여전합니다. 갇힌 이를 경시하고, 부정의를 위해 총성 뒤에 숨어 역사를 희롱했던 이들이 남부럽지 않게, 부끄럽게 건재합니다. 새의 시선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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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이란 말씀이에요. 척추뼈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자를 쓰는 법이죠."

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척추에 딱 맞는 만년필 밖에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기의 수필 '만년필'의 한 대목입니다. 그가 만년필을 잘 만들어 준다는 가게를 찾아가 주문하는 동안 그 만년필을 만드는 주인이 하루키의 몸을 토대로 만년필을 만드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척추뼈’에 걸맞는 만년필이라는 말이 신선합니다.


2.가끔 어릴 적 만년필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국민학교 시절, 멋모르고 만년필을 갖고 놀다 잉크를 다 쏟아버린 기억도 있습니다. 그 신기한(?) 경험에 이끌려 기회되는 대로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다 빼보는 놀이도 즐겼습니다. 물론 글씨쓰는 법은 서툴렀습니다. 게다가 관리도 잘 못해서 쓰다만 펜을 그대로 묵혀두어서 펜촉이 막혀버리거나 쓰다가 아무 데다 두어서 폐문구로 만들어버린 일도 많습니다. 그래도 무슨 이유인지 만년필은 늘 추억 속에서 내 삶에 다붓하게 살아남아있습니다.


3.어느 해 부터인지,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물어오면 나는 '만년필'을 부탁했습니다. 순전히 내 삶에 각인된 향수 때문일겁니다. 만년필 애호가나 애장가들이 과시하는 고급 필기구에 눈이 흘깃해지긴해도 그저 어린 시절 즐거운 추억을 소환해주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요즘은 아주 가볍게 구입할 수 있는 만년필도 꽤나 여러 종류가 있으니 아주 좋습니다. 어쨌든 손에 딱 잡히는 만년필은 기분좋은 필기구입니다.


4.생각해보니, 내가 만년필을 문방우(文房友)처럼 가까이 두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몇 있습니다. 무엇보다 손에 잡고 글을 쓰면 마치 춤을 추는 것같은 필감(筆感)때문입니다. 짜릿합니다. 적절한 종이와 펜촉, 잉크가 잘 어우러진다면 그 사각사각거리는 필성(筆聲)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듣고 있으면 상쾌해집니다. 개인적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만년필은 세로쓰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한글이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에 알맞다해도 나는 가끔 세로 글쓰기를 남겨둡니다. 힘을 적절히 빼고, 흐늘거리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면 나도 모르게 온 몸이 유연해지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게 시대를 거슬러가는 듯한 행위는 말하자면, '만년필'때문인 것입니다.


5.경험이지만, 만년필은 사람에게 가장 밀착된 문방사우라 할 만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만년필 뚜껑을 가볍게 열고 잉크를 든든히 채운 뒤, 비어있는 종이에 촉을 대고 글을 써내리는 순간은 첫 눈이 내린 날,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을 가장 먼저 걷는 기분 그것입니다. 어떤 때는 가볍게, 또 어떤 때는 휘날리듯, 어떤 순간은 또박또박, 어떤 날은 흐르고 흐르는 대로, 어떤 순간은 한 글자 한 글자 점을 찍어내리듯 마음을 억누르는 글자가 아로새겨집니다. 그 펜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흘러나오는 글씨들은 한방울 한방울 샘솟는 물방울 같아서 어느 새 샘물같은 사상의 저장고로 이끌어줍니다.


6.아쉽지만, 좋은 필기구보다 좋은 입력판(키보드)이 환호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실, 손으로 펜을 들어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되는 시대입니다. 손가락이 펜을 대신하는 인간필기구의 시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바쁘고 빠른 시대에 쏜살같이 달려가며 글덩어리를 양상하는 입력판은 우리 시대에 절대로 필요한 도구입니다. 동시에 물이 흐르듯, 잉크 한 점씩 종이 위에 흘려보내며 느릿하고, 지리한 글자들로 글을 만드는 일도 나름 괜찮습니다. 자판으로는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일을 필기구가 해주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남긴 글을 자기 손에 기억해두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자판을 비껴 두고, 가장 사랑하는 문방우 하나를 들고 유적하게 글을 써보는 즐거움도 누려보려 합니다.


7.사각사각, 그 소리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애성(愛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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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이다."

-손홍규, <문학적 자서전> 중에서.


1.

나는 내심 SNS에서 언제 절필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물론 당장에는 어려울 것 같다. 마치 오래된 가게가 장사여력이 다됐다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남아있을 단골손님이 어쩌다 찾아왔을 때 섭섭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 같다. 그래도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이 공간을 가볍게 떠날 것이라 생각한다.


2.

소설가 손홍규님의 문학적 자서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싶다.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누구나 무언가 하나씩은 잃고 사는것 같았다. 눈에 띄는 것일 수도 있었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148-49쪽.


3.

소설가는 명확한 시선을 가진 자다. 들여다 본 사물과 사건과 사람을 위해 최적의 사상을 투사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언어를 조탁하듯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같지만 실제는 '시선'이다. 눈길이다. 보이지 않는 경계로 만들어낸 프레임이다. '시선'이 살아있지 않는 한 소설은 죽은 것이다. 손홍규는 '절망'이라는 시선을 갖고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보라고 권면한다. 기실, 절망은 희망의 반대편에 터를 두고 있기에 누구도 절망터에 삶을 건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을 삶의 동력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4.

절망은 어떤 뜻일까? 소설가가 이토록 애절한 마음으로 자기 문학의 터로 삼았다는 절망이 나에게는 어떤 뜻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나는 미처 다듬지 못한 이 '절망' 개념을 만지작거린다. 먼저 나는 '절망'이 삶의 필수요소라는 소설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덧붙여 나는 '절망'이 욕망하는 존재, 피조물 인간을 전제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를 읽어 준 히브리인들의 성서는 놀랍게도 '절망'으로써 인간은 욕망을 제어하고, 욕망으로 자유하게 될 것을 권면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절망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욕망을 잘라낼 수 있을 것이라는 권고와 함께 말이다. 하여 '절망'으로써 인간은 비로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증할 것이다. 히브리성서 「사무엘서」를 따르자면, '절망'은 '궁극적 불행'의 다른 말이다.


5.

진정한 '절망'은 '궁극적 불행'이 그러하듯이 신으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따라서 '절망'이

마침내 궁극적 희망으로 전이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절망'은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최후의 힘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삶을 새롭게 출발하는 변곡점을 제공한다. 우리 시대는 '절망'을 삶의 끝으로 여기도록 채근한다. 절망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삶을 조작한다. 굴곡된 시대다. 역설적으로 이를 저항하는 힘은 '절망'하는 용기로부터 나온다. 이 시대에 절망하는 자만이, 새로운 세계로 진격할 수 있다. 나는 믿는다, 인간이 절망할 때, 희망한다는 것을. 시대의 절망은 비극일 수 있으나, 우리에게 절망은 오히려 희극이다. 소설가가 꿈꾸는 절망 너머의 세계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곳은 우리에게 상처를 가진 채라도 걸을 수 있는 희망어린 세계이다.



6.

이제야 나는 뭉특하게 가라앉아있던 글뭉치를 풀어놓을 수 있다. 글을 매듭짓고 밖으로 잠시 나가 길을 좀 걸어본다. 어제보다 바람이 거칠다. 삭풍일지라도 나는 희망서린 길이 이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해가 져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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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미, 『한밤중 개미요정』, 창비, 2016/『개미요정의 선물』, 창비, 2020.


1.‘그림’은 기억을 위한 도구로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대상이 사라져도 언제나 어디서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려는 욕구가 컸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라져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떤 면에서 ‘그림’은 잊을 수 없는 그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내재하는 부득이한 생각저장고일지 모를 일이다.


2.시간이 흘러 그림은 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상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상상을 현실로 끌어들였다. 들여다볼 수 없는 내면을 떠오르게 했다. 이로써 그림은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림은 새로운 경계에 갇혔다. 그림판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현실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이제 고도의 함축과 집중이 필요해졌다.


3.그림은 멈추지 않았다. 갇힌 세계를 확장하는 법을 찾아냈다. ‘글자’다. 글자를 그림 옆에 적어두기 시작했다. 글은 그림 경계를 열어주었다. 그림은 글로써 경계를 넘어섰다. 하지만 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림이 글에 갇힌 것이다. 먼저 그려진 그림이 나중에 덧붙여진 글자에 매여버렸다. 그림 속 상상이 흐릿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대상을 자유롭게 재구성해냈던 그림의 묘미는 여려졌다. ‘글자’는 그림이 가진 상상 세계에 새로운 경계였다. 그림과 글자. 이 둘은 서로 상생했지만, 끝내 그림이 글에 종속되었다.


4.그림은 글자 뒤로 숨겨졌다. 글자가 그림보다 앞서기 시작했다. 하여 글자가 말하면 ‘그림’이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삽화’다. 사람들은 이 삽화들이 연속된 것을 ‘그림책’이라 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그림책’이었다. 비록 그림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글을 앞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림의 시대는 저물었는가? 그럴 리가 없다.


5.다시 그림이 앞서갔다. 사람들이 현실너머 상상세계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사라진듯한 인생그림을 기억하고 싶어했다. 저장고에서 그림을 다시 꺼냈다. 글이 새롭게 덧붙여졌다. ‘그림책’이 소생했다. 다행히 그림과 글자가 알맞게 공존했다.


6.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그저 ‘그림책’이다. 실제인지 상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날들도 많으니 마치 한 편 그림같을 때가 많지 않은가. 비록 우리시대가 ‘글’로서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시대일지라도, 그림의 자리는 더욱 견실해지고 있다. ‘글’의 조합으로 이뤄낸 문학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시대라할지라도, 그림은 물러나지 않았다. 애둘러 그림을 흘깃하고, 글과 말에 집중하기를 권장할지라도, 삶은 여전히 그림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말을 찾아내느라 그림을 잊어버리는 일이 흔하고, 말을 쏟아내고, 글을 쓰고, 첨삭하여 자기 의도를 드러내는데 천착한다해도, 결국 그 말에 곁들여진 그림으로 자기 인생그림책이 기억된다.


7.삶은 그림책이다. 한마디 말/글없어도 충분할 때가 있다. 어떤 삶이든 자기 삶은 훌륭한 ‘그림책’이다. 이 사실을 수긍한다면, ‘말’보다도 ‘그림’에 가볍게 치우쳐도 좋을 일이다. 한권 그림책 속에는 무한한 상상과 사상의 세계가 저장될 수 있다. 그림과 글이 공존한 그림책은 초세계라 할만하다. 그림만으로, 또는 글만으로 존재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가 ‘그림책’에 담겨있다.


8. 이제 주변에 널려 있는 아무 그림책이나 한권 손에 잡아보라. 그 책안에 담긴 그림을 따라 자기 이

야기를 다시 집어넣어보라. 아니면 자기 이야기를 적어보라. 그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적절한 그림을 그려넣어보라. 잘 쓰거나 잘 그리려고 하지 않아되 된다. 그림이 아니라면 사진도 좋다. 무엇이든 자신이 내뿜고 있는 말과 이야기에 어울릴만한 그림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가장 좋은 그림은 온 몸으로 하루하루 살아낸 자기 삶일 것이다. 하루가 끝나는 어느 순건에 지나온 삶을 상상해보라. 그려보라.


9.이 땅에는 ‘말’만이 인생의 전부를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듯하다.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만한 증빙도 여전히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정한 존재가치는 그의 인생이 그려내는 ‘그림’으로써 더욱 부각된다는 것도 지나치지 않으면 좋겠다. 삶을 ‘말’로만 읽어내려는 시대에 차라리 말없이 몸짓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지나가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으리라.


10.글이 그림을 압도하는 시대를 거쳐 이제 그림이 글을 견인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그림처럼 보이는 삶이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설명하고 풀어가며, 덧붙여주는 글자들이 전면에 나타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그림책이 ‘글’이 아닌 ‘그림’으로 말하는 것처럼,(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글이 없어도 그림책이 되니 그림책에는 ‘그림’만 있어도 충분하다) 사람의 삶 역시 그림만으로도 충분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기꺼이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최고 그림책은 ‘그림’으로서 ‘글과 그림’을 모두 표현해내는 것이리라. 자기 생애에 그런 ‘그림책’을 한 권 정도 찾아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가 지나온 삶이 가장 멋진 선물, 그림책이라는 것을 직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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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Morgen und Abend)』, 문학동네, 2019/07


1

모처럼, 오늘 어떤 일을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분 좋습니다. 해야 할 일에 매여

시간에 따라 정해진 아침을 시작하던 때와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나는 아주 느릿하게 아침을 먹습니다, 어제 저녁 남겨 둔 김밥을 풀어 볶습니다. 그 사이에 시원한 우유 하나를 꺼냈습니다, 손움직임이 여유롭습니다, 가볍게 식사를 마칩니다. 그리고 나는 단촐한 차림으로 흐릿한 하늘을 시크하게 올려다보며 집을 나섰습니다, 문을 나서기 바로 직전, 가야할 곳을 정했습니다. 오랜만에 어둑한 조명 아래 책들이 빛나는 서점입니다. 서점에는 책, 소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한 켠 까페에서 책 대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즐기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책들은 서가에 세워지거나 눕혀진 채 마치 뒤엉켜 진 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 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펼치고, 다시 던지듯 내려두는 일을 반복합니다. 새로 나온 책들은 어디에 두나요? 내가 물었습니다, 이 코너는 그런 책을 따로 두지는 않습니다, 갓 들어온 책을 컴퓨터에 목록저장 작업하던 직원이 쳐다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서둘러 서점 저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서점 저 끝에 유난히 한가하고 정갈한 서가가 있었습니다, 나는 책을 하나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선 채로 한참 읽었습니다,『아침 그리고 저녁(Morgen und Abend)』 책값을 치루고 언젠가 다시 올 서점을 나섰습니다,


2.

차에 올라 시동을 켜기 전 책을 열었습니다. 앞날개, 저자 소개를 펼쳤습니다. 노르웨이 출신, 욘 포세(60). 소설가로서 그의 경력이 화려합니다. 하지만, 이런 목록을 나는 읽는 둥 마는 둥 합니다. 곧 책 첫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낯선 대화가 첫 문장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제1부가 끝날 때까지도 마침표가 없습니다. 호기심에 책 끝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도 그렇습니다. 문장과 문장은 모두 쉼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오히려 빈번합니다. 누가 읽어도 피해야 할 글쓰기방식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대화와 대화 사이에 말하는 자와 듣는 자는 뒤섞입니다. 말과 말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인물과 인물 관계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대화는 리듬을 따라가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래처럼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웅얼거리듯 주고받는 비언어도 빼곡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마저도 모두 살아있습니다. 숨소리, 혼잣말, 밑도끝도 없이 툭 던지는 대화, 말과 사이에 난데없이 끼어드는 몸짓들도 의미있습니다. 사건은 긴장없이 평화롭습니다. 오히려 흐릿합니다. 사건보다도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말과 말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호흡인 것 같습니다.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모든 움직임이 글로 남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멈춰서는 모든 것이 언어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흐름입니다. 그것을 따라가다보면 무엇을 말하고, 생각하고, 또 말하고, 생각하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정작 끝내 마침표는 없습니다. 끝까지 쉼표였습니다. 소설은, 고단하지만, 그렇게 살아있는 삶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생은 아무리 힘겨워도,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소설은 아이가 태어나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곧 그의 죽음시간도 같이 흐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1부만 읽은 채 책을 일단 덮었습니다. 나는 소설 끝을 상상합니다. 아침과 저녁이 삶과 죽음으로 치환되어 한 어부의 생애가 아무 사건도 없이 고즈넉하게 강처럼 흘러갈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 내가 겪는 삶이라는 것을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읽기에 쉽지 않은 서사입니다.


3.

무엇보다 나는 마침표 찍지 않은 산문이 여러모로 인상적입니다. 사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현대에 들어서 시쓰기의 전유물이었습니다. 1960년대 시인 김수영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습니다. 시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로써 그는 정형화된 편집문법에 저항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 시들은 이 저항기법을 문법처럼 따랐던 것 같습니다. 문장을 마감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는 삶을 조각조각 얼른 마감해 버리는 습관을 경계합니다.(참조, 심보선 시인의「삼십대」, 『슬픔이 없는 십오초』(문학과지성사, 2008)) 독자에게 열린 문장은 어색합니다. 마침표는 안정감을 줍니다. 하나가 끝나야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당연한 속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한 때 매듭이라는 말로 삶을 조각하기도 했습니다. 얼른 매듭짓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라고 재촉하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는 그 마침표를 욕망을 향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는 그것을 해체해버렸습니다. 시인들은 문장에서 마침표를 없앰으로써 삶을 경각시켰습니다. 어떤 매듭도 쉼표일 뿐, 마침표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삶이 끝없이 저항해야 하는 산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 셈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스스로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삶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최후의 방법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누구든 쉽게 자기 삶에 자기 손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4.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강한 비가 내리기 직전처럼 바람이 한반 크게 붑니다. 차 창밖으로 휘청거리는 나무들이 보입니다. 그 속에 여릿한 나뭇잎들이 쉼표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강에 놓인 징검다리같습니다. 그것들은 흔들림으로써 도드라지 않고 서로 어울려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사건과 사건으로써만 삶을 기억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명확한 기승전결이 우리 삶을 지탱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우리에게 거대한 사건보다도, 도드라지지 못하고, 의미없게 들리는 옹알이, 언어로 들리지 못하는 몸짓, 눈빛에서 생존하는 이야기를 더 크게 주고받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려는 욕구가 숱하게 일어나는 세계입니다. 자기가 정한 문법에 어긋난 몸짓들을 거북해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얼른 마침표를 찍어 삶을 내칠근거를 찾으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삶은 마침표를 찍기 전 쉼표로 이어져가는 거대한 강이라는 것을 한번 쯤 생각해보면 좋을 일입니다. '아침 그리고 저녁. 간은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 반복됩니다, 태어났다가 다시 저물고, 저물었다가 다시 살아나 쌓입니다. 


더운물 더요 올라이,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
거기 부엌문 엎에서 서성대지 멀고 이 사람아, 그녀가 말한다.
네네, 올라이가 말한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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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5-15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밥헬퍼 2020-05-15 18:57   좋아요 1 | URL
아, 여전히 이 서재를 잘 가꾸고 계시네요^^오랜만인데도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써좋으신 글들 새롭고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