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ㅡ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울; 정음사, 1974.-


1.

()가 현실을 상상으로 그려내는 메타포라면, 시인 윤동주 님의 은 적절한 한 예가 될 것이다. 그의 다른 시들과는 별개로, 특히 이 시에는 그 메타포가 세 층위로 쌓여있는 것 같다. 나의 추론에 따르면, 맨 아래 현실 사건이 있다. 이것은 일어난 일이며, 경험한 것이다. 그 위에, 해석 사건이 있다. 그 경험된 사건으로 비판하거나 공감하며 분석한다. 마지막 맨 위층에 현실 사건과 해석 사건을 문학 사건으로 마무리한다. 그렇게 작가의 상상을 시의 언어로 변환시켜 현실 사건을 이미지로 만든다. 내가 보기에 이것의 윤동주 님의 시 이을 읽는 한 과정이라 할만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층위를 반영하는 글쓰기는 주전 8세기 고대 히브리인들의 성서 <아모스>서를 남겼던 아모스 저자들의 서술방식과 흡사한 것 같다.

 

2.

히브리 성서 타나크의 두 번째 부분인 <느비임>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으로 구성된 아모스

(Amos)가 들어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760-775년 경에 활동했다는 이 예언자는 남쪽 유다 출신이면서 국경을 넘어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가서 신언(神言)을 전한 사람이었다. 그가 전달한 주된 주제는 사회적 부정과 종교적·도덕적 퇴폐’, ‘부유층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경제 불균형, 사회 정의등을 바로잡으라는 경고였다. <아모스>서를 연구한 로버트 쿠트(Robert Coote, 1909-1982)<아모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이 최종본으로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 내재적 발전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최종본은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해석, 덧붙여 신학적 해설이 발전적으로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 일어났는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해석되었는가, 마지막에는 왜 글을 썼는가?’로 매듭지었다는 것이다. 그가 밝혀낸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세 층은 구분되지 않으며, 하나로 어우러져 예언자의 고유한 사상을 형성한다. 따라서 <아모서>서는 산문같은 사건을 운문(마치 시와 같이)문학으로 남긴 예언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내용으로 보자면 당대 사회에 대한 저항문학이라 할만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예언서는 미래 예견이 아니라 현재에 대해 신이 맡겨놓은() ()을 전달하는 글이다. 미래에 근거해 현재를 해석한 글이다.

 

3.

나의 이 글은 <아모스>서를 읽을 때처럼 윤동주의 시 역시 하나의 예언서(豫言書) 서술방식을 원용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고대 예언서같은 서술방식을 투사하여 문학적 서술기법을 표현함으로써 시대를 저항하는 용기 있는 인간을 묘사한다. 이 시에서 서술하는 인간은 두 가지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는 현재 자기 정체성으로서 슬픈 존재로서 무기력하게 길을 걷는 인간이다. 다른 하나는 새 길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하나로 잘 조화된다. 시인은 돌담길과 하늘을 교차대구하여 그 길에 서 있는 자신이 슬픈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새 길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을 그려낸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 시를 읽는 한 방법으로 기호학적 관찰이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를 구성하는 세 층위가 어우러져 하나의

시로 조물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시어에 활용된 공간과 시간의 기호를 따라 분석해 보는 것도 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가 1940년대 이후 시인 윤동주가 보여준 깊은 감성을 바탕으로 저항적 현실참여라는 자기 태도를 그의 모든 시에 스며들게 하는 전환점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해이다.

 



4.

먼저 이 시의 층위는 모두 세 개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이 시의 기록 연대가 1941년 가을 즈음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인 윤동주님은 연희전문학교에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시절에 그는 북아현동, 옥인동 일대에서 하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대는 요즘도 좁은 골목과 인왕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이니 그 시절에 그의 삶의 환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 층위

이 시의 가장 아래 층위는 그가 어느 날 골목길을 걸었다는 소소한 일상이다. 이 시에서 골목길에 대한 기본적인 묘사를 찾아보면 이렇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이어져 길은 돌담을 끼고 있다

‘(길의)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았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길에는 풀 한 포기 없다

 

그가 살았다는 북아현동 하숙집을 생각하면, 이 시의 배경이 된 그의 길 걷기는 아마도 인왕산 한양

도성길, 서대문 형무소, 조금 멀리는 덕수궁 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가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길을 걷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검열도 심해지고, 그 사이에 시인으로 막 등단한 윤동주에게 졸업을 앞두고 첫 시집을 발간하려 했던 상황들은 하루하루 매우 불안하게 흘러갔던 모양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불안한 그는 지금 돌과 돌이 이어져 있고, 풀 한 포기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채 쇠문으로 굳게 닫힌 골목길을 늦은 오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시간에 우연히 걷고 있다.

 

2 층위

돌담길을 걷는 시인은 그 길을 걸으면서 이 길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이어간다. 가장 먼저 그는 이 길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다고 적는다. 밤새 길을 걸었는지 모르지만 이 구절은 완벽한 시적 표현이다. 독자에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이 길을 걷는 시인을 연상시킨다. 이 시를 쓴 시간이 해가 떠있는 어느 낮(‘그림자가 길게 늘어진)시간이라는 것을 추정하면, 그는 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 심지어 다음 날 아침까지 꼬박 하루를 하릴없이 길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 길을 걷다 눈물 짓는 모습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길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부끄럽게 푸르다’. 그의 시에서 자주 언급되는 부끄러움은 내적 감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감을 일깨우는 특별한 수사어다.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성찰하는 상태에 가깝다. 이처럼 그는 이 길에서 하늘을 보고, 그 푸르름에 부끄러움을 발견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두 번째 층위는 밤새 골목을 걷는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부끄럽다는 자기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3 층위

길을 걷는 자신(1 층위), 부끄러운 자신(2층위)에 이어 마지막으로 문학 사건을 읽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제1연으로서 이 시의 문학적 출발이다. 그는 목적어를 쓰지 않은 채 잃어버렸다라고만 표현했다. 이런 서술은 시 전체를 읽기도 전에 나에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모른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 길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생각이 든다. 시인은 불안한 마음에 두 손을 주머니에 넣어 이리저리 더듬는다그러다 우연히 주머니를 통해 길에 나아갔다’. 이 주머니 속 우연한 길을 헤집고 더 깊이 들어간 시인은 마침내 더 길고 긴 돌담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 시의 문학적 사상은 마지막 연에서 더욱 세밀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에는 그가 이 길을 걷는 이유가 점층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담 저쪽에 내가 있기 때문이. 이어 다른 이유가 이어진다. ‘내가 사는 이유는 다만 잃는 것을 찾는 까닭이다.’ 이 두 이유는 연관성이 있으면서 없다. 연관성 있다는 것은 그가 잃어버린 것이 담 끝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 준다는 점이며, 연관성이 없다면, ‘담 끝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과 별개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골목을 마냥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 3 층위를 따라 읽어보면 시인은 그가 잃어버린 것을 문학적 이중성으로 표현하려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세 층위를 살펴보면 이 시는 어느 늦은 오후 집 근처 돌담으로 길게 늘어선 골목길을 걷던 시인이 자기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사람인 것을 인식하고 부끄러워하다가 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서겠다는 용기를 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선 길 위에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떠나는 이유를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5.

이제 이 시를 기호학적 표기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이 시에서 서술된 공간과 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함께 독자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관찰하는 독법이다.

 

<공간>

이 시는 수평 공간과 수직 공간이 교차한다. 수평 공간은 우선 돌담이 이어진 긴 골목이다. ‘돌담을 끼고 갑니다라는 표현은 이 길이 여느 골목처럼 구불구불하고 휘돌아나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수직 공간은 골목 어딘가 머물러 서서 쳐다본곳이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눈을 위로 올려 하늘을 쳐다본다. ‘긴 골목을 걸어왔던 그가 수평 공간을 지나온 것이라면, ‘하늘을 쳐다보는 그는 수직 공간에 멈춰 있는 것이다. 이 표현들은 전진적으로 행동이 이어진다:‘긴 길을 걷고- 돌담에서 멈춰서서-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다시 길을 걷는다.’ 따라서 걷고-멈추고, 서서-쳐다본다는 일련의 과정은 시인이 점유한 공간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담 저쪽이라는 표현에서 시인이 서 있는 곳이 담 이쪽이라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하면, 그는 담으로 길게 이어진 길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공간이 있다. 그것은 주머니.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서 여주인공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리다 우연히 오즈 대륙에 들어서게 된 것 같다. ‘주머니는 모든 길과 모든 공간으로 이어지는 좁은 출입구이며 최후의 공간이다. 모든 공간들은 주머니에서 이어진 미로처럼 시작한다.

 

<시간>

이 시에서는 시간도 두드러진다. 시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시간을 쓰고 있다. 마치 히브리 성서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의 문학적 표현을 연상시키는 이 구문은 현실의 시간일 수도 있으나 상상의 시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가 지금 돌담길에 서 있는 시간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시간, 즉 낮의 어느 한 지점이다.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이라면, 저녁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 사이에 낮과 밤이 일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두 시간은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은 무한 반복하고 서로 꼬리를 물고 회귀하여 더 먼 시간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아침-저녁-저녁-아침이 통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 구분이 의미없어짐과 같다. 그러니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있고, 돌고 있으면서 흐른다. 마치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돌담을 끼고 가는 것같은 모양이다.

 

<시공간>

앞서 읽은 대로 이 시에서 공간과 시간은 구분되면서 한데 어우러져 있다. 시공간인 탄생한 셈이다. 이런 시공간은 이른바 시의 토포스를 형성한다. 이 단락을 다시 읽어 보자.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시인은 길에서 시간과 동시에 공간을 경험한다. 이 동시 지점은 바로 그가 돌담을 더듬다 눈물지으면서서 있는 자리다. 수평적으로 아침과 저녁 어느 지점이며, 수직적으로 땅과 하늘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신학 용어로 말하자면, 이 지점은 카이로스(kairos)’이다. 신적 은총의 시간이다. 주목할 것은 이 지점에서 그가 보여주는 반응이다. 이 시에 따르면, ‘돌담을 더듬다눈물 짓는다는 연속되는 행동이다. 이 두 행동은 눈물 짓다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시인이 설정한 시공간은 그가 선 채로 눈물짓는 토포스다. 그 눈물은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동인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는 근인이었다. 더구나 이 토포스가 함축한 눈물은 그 자리가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토포스에서 푸르른 하늘풀 한포기 나지 않은 길의 대조 역시 시대 속에서 부끄러운 자아를 더욱 부각시킨다.

 

6.

시인 윤동주 님의 시는 땅에서 하늘을 읽는 예언시다. 운문으로 남겨진 그의 시는 가벼운 노래로 끝날 수 없는 예언이다. 그 예언은 현실에 맞부딪혀 비틀거리면서도 정의로운 길로 걸어가는 자아를 지지하는 하늘의 힘이기도 하다. 그가 가벼운 어투로 스치듯 자기 일상을 소개하는 시조차도 가히 넘볼 수 없는 예언의 힘이 스며있다. 그의 시 에서 우리가 의 상징성만을 주목하는 것은 자칫 이 시가 가진 현실 저항적 예언성을 지나치는 아쉬움을 초래한다. 시인에게 은 공간이며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감춰진 곳이며, 자신이 하늘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인식한 공간이면서, 그 끝이 언제 끝날지 몰라 당황하는 슬픈 자신이 멈춰 서버린 토포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는 결국 돌담 길 어딘가를 반복해서 걷고 있는 부끄러운 자아에게 아직 용기가 남아있음을 말하고 싶은 따뜻한 권면을 굳게 견지한다. 익히 알 수 있는 대로, 윤동주 시에 등장하는 는 자주 슬픈 존재. 슬프다는 것은 눈물을 전제로 하지만, 그 눈물이 그 존재를 결정짓진 않는다. 그는 그 눈물을 인정하면서 그 부끄러운 존재에게 다시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 나설 용기를 다독여주기 때문이다. 그 용기 있는 존재는 강한 용사가 아닌 연약한 젊은이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나는 이 시에서 부드러운 강인함으로 길을 걸었던 청년 예수의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에게 예언이다.

 

7.

나는 그 못지 않게 길에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 많다. 이 시가 노래하는 것처럼 찾아나서기도

하지만, 문득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잊어버려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를 읽으며 나도 용기를 내서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가 담백하게 적어둔 그 1940년대 어느 동네의 돌담을 끼고 늘어서 있지만, 시공간을 넘어 이제 2022년 오늘 나의 삶에까지 이어져 있는 길이다. 그 길 끝에 내가 서 있다. 이 시를 읽은 나는 시인처럼 골목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푸르름에 부끄러움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시인의 말에 힘입어 이 시대를 견뎌낼 용기를 다져보는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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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 인간에 대하여

 

어제의 나에게는 관대하고

미래의 나를 과장하고

현재의 나를 과시한다.

 

동시에

 

어제의 너를 폄하하며

미래의 너를 혐오하면서

오늘의 너에게는 위장한다


정치에서 '우리'란 허상인가?. 

 

신영복 님의 <청구회 추억>(1969)을 읽으면서 

뜻밖에 오늘날 정치의 인간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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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늦은 오후, 산책을 하다가 길걷기가 거의 끝나가는 즈음에 ‘아름다운 가게’에 들렀다. 그 곳에는 특이하게 헌책 코너가 있는데 들를 때마다 서가에 빈틈이 많이 생긴다. 아마도 새로 들어오는 책보다는 빠져나가는 책이 더 많은 듯 하다. 그런데 가끔,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시선이 꽂혀 기분 좋게 바로 꺼낼 수 있는 책이 있다. 오늘 나의 선택은 『느릅나무가 있는 風景』 (최인훈, 1981, 민음사: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다. 운 좋게 2500원을 주었는데 1981년 초판본이 2800원이었으니 적지 않은 세월의 값을 퉁치고서도 더 할인 받아 산 셈이다. 이런 값은 의미 있는 헌 책에 대한 예우 같아서 기분이 좋다. 바람막이 옷 하나와 유기농 건빵 하나를 더 사서 문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바람 세차고 구름 가득한 거리엔, 파란 바다 같은 구름 웅덩이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섬 사람들의 속설에 따르면, 이런 날은 내일 아주 맑은 날이 될 것이다. 기분이 더 좋다. 

2.
길을 마저 걸었다. 이제는 도시의 생경한 풍경마저도 늘 살았던 곳인냥 자연스럽다. 비록 집 한 채 없지만, 열린 바다와 높고 푸른 산, 굽이 도는 길을 내 것인 양 누릴 수 있는 것 만으로도 한 며칠 정도는 충분히 생존 의지가 불타오른다. 버스 정류장엔 서 있는 젊은이들 뒤로 연로한 어른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온기가 몸에 알맞게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 벤치는 이런 날씨에 더욱 안성마춤이다. 버스가 완전히 설 때까지 일어서지 않으려는 몸짓이 자연스럽다. 가볍게 본다면, 삶은 어느 땅이나 비슷해서 불편한 것엔 느릿하고, 편리한 것엔 빠릿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느 땅에서나 삶이 전혀 다르게 대접 받아서는 안될 일이다. 땅과 하늘과 바다와 산과 길이 다르지 않다면, 자기 삶의 바닥에 깔린 생존 욕구는 누구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궂은 날씨에 모두가 아침에 나왔던 자기 삶의 터전으로 저녁이 되기 전에 안전하게 되돌아가길 바란다. 

3.
찬 바람에 몸을 휘둘렸더니 평소보다 조금 피곤하다. 잠시 쉬었다 저녁을 먹고 책 제목이기도 한 단편, 「느릅나무가 있는 風景」부터 펼쳤다. 이 글은 1969년에 발표되어 이후 소설가 최인훈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관한 15편의 이야기 중 첫 번째 글이 되었다. 소설가 구보씨가 매일 겪는 에피소드를 시간 흐름을 따라 소개하고, 그 사이 사이에 구보씨가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엮어준다. 이를 토대로 작가는 작고 미미한 개인을 등장 시켜 세계를 조망하고 연대하는 이야기들을 관념적으로 엮어내고 있다. 내가 이 단편에 호감을 갖는 시시한 이유가 있다. 이 소설 첫 단락의 이 문장 때문이다. 
 
“1969년이 다 가는, 동짓날 그믐께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소설가 구보씨는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는 참에 그의 머리 속에 무엇인가 두루마리 같은 것이 두르르 펼져졌다가 곧 사라졌다. 구보씨는 그것을 곧 알아보았다. '그것은, 오늘 하루 그가 치러야 할 일과였다. 다른 누구도 알아보랄 것 없고 구보씨만 알면 그만 이었던 만큼 그 두루마리는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구보씨는 잠에서 깬 다음에도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는 옮긴이 강조)

하루 일과가 자신만 알면 그만 인 삶을 사는 소설가 구보씨. 소설은 그가 마주하는 일상과 그 사이사이에 그가 생각하는 것, 좀 더 과장되어 그의 끝없이 이어지는 ‘관념’을 서술한다. 구보씨의 관념을 곧 소설가의 관념이며, 최인훈의 사상이며, 소설의 목적이기도 하다. 

4.
소설과 구보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이 겪는 일들에 대해 바로바로 관념에 빠진다. 생각 없는 하루는 소시민인 그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알릴 필요 없는 사소한 일이라도 그 일에 대한 구보씨의 ‘관념’ 행동은 인간의 호흡처럼 중요한 생존 도구라 할만하다. 조금 더 과장해보면, 그의 관념은 평범한 소시민이 이 세계와 ‘연대’하는 방식이며, 자기 작은 삶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 거대한 공감이다. 그것을 미묘한 ‘감수성’으로 제 몸에 각인하는 과정이다. 말이 난해 해서 그렇지 ‘관념’은 ‘잠시 멈추는 것’이며, ‘멍하게 생각 하기’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 마당을 쓰는 정도의 삶이지만, 자기 밖에서 일어나는 일, 벌어지는 사건, 들려오는 소문에 대해 산과 바다와 길과 나무를 보며 자연스럽게 자기 삶을 잠시 멈춰보는 것이며 뜬금없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관념’은 삶에 곧바로 생산적인 결실을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오래되고 깊어질수록 의미 있는 결과에 가닿을 수 있다. 물론 아무 것도 아닌 채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위험도 언제나 존재한다. 결국 구보씨는 누구도 관심갖지 않지만, 없어도 그만 일 듯한 ‘관념’을 디딤돌 삼아 자기만 알아도 충분한 일과로 하루하루를 성벽처럼 쌓아 올리고 있다. 

5.
이 소설의 끝은 이렇다. 우연히 길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어떤 여자가 있다. 잠시 상상에 빠진 구보씨는 자기도 모르게 ‘백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죄인처럼’. 그러자 그 여자가 말한다. “고마워요” 구보씨는 생각했다. 그녀가 ‘비웃음처럼’ 말했다고. 직후 ‘버스가 왔다.’ ‘구보씨는 황황히 이십원 길의 나그네가 되어 밤 속으로 외마디 소리처럼 사라져갔다.’
소설 끝 문장은 70년대로 들어서기 전 시대를 암시한다. 이제 삶은 점점 더 개인이 고립된 사회를 에견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 모양이든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같을 수 없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나의 배려는 그의 ‘비웃음’의 이유일 수도 있고, 나의 간절함은 그의 ‘어색함’이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멍하게 생각 하기’란 언제나 나의 문제이지 그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관념으로 그의 세계가 안정되고 다독여지지만, 누구도 그런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런 생각 없이도 세계는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6.
1969년에 발표된 이 소설 속에는 요즘 시대에는 어설프지만, 다양한 시대 변화가 감지된다. 소설과 최인훈은 당대 삶에 다양한 경험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세심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이자, 추천 등단작인 「라울전」(1959)도 그러하지만, 인간은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자기도 모르게 고립되고, 삶은 왜소해지는 단서가 포착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피폐해지고 자기 중심적 삶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징후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소설 역시 그냥 가볍게 읽어둘 만한 소설이지만, 그의 여느 소설처럼 언제나 가벼운 질문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이로써 한 작은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여 소비한 관념의 시간은, 비록 세계를 뒤바꿀만한 업적은 아니겠지만, 세계가 진격하는데 단단히 한 몫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알다시피, 실시간 삶이 공유되는 세계가 다시 전쟁의 공포에 들어 선지 오래다. 끝도 알 수 없다.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전쟁 여파가 곧바로 나에게 밀려온다. 나와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푸틴의 옛 소련 제국재건을 위한 정치 야망은 끝없고, 우크라이나의 정치 저항은 속절 없어 보이지만, 싸움은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총과 무기로 결정 날 것이다. 전선의 위험이 가중될수록 이 세계는 타국의 위험보다도 경제 정치 실이익을 계산하며 정신없이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그것 만은 아니다. 가깝게는 내 삶을 흔드는 정치가 나의 한 표로 결정되었다는 현실을 보면 나의 삶은 그 때 그 후보들의 삶의 행태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들에 대해 냉정하게 잠깐 ‘멈춰 생각하기’는 나의 미미한 행동이라도 올바르게 결정짓기 위한 중요한 요소였고 앞으로도 그럴 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무엇을 어떻게보다 ‘왜’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신학으로 평생 살아왔기 때문이다. 

7.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가끔 나는, 나의 예수가 관념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민한다. 그가 행동하고 사건을 일으킨 일이 부각되어서 그렇지, 그는 답답할 정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 사소한 일, 아무도 관심 없다고 할만한 그 인간의 일을 ‘관념 한다’. 이유는 한 가지다. 그는 야훼를 사랑하듯, 인간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당연히 매일 매일 인간을 위한 고민으로 자기를 ‘멍하게 생각하는’ 골방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예수를 삶의 풍요롭게 하는 원천으로 여기고 예수가 삶을 지혜롭게 경영하는 법을 전수해준다고 확신하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물질은 더욱 가난해지고, ‘관념’으로 세계와 연대하는 삶은 풍요로와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세계 확장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공감하고 환대 하는 모범에 자기 모든 삶을 쏟아부은 사람이다. 꿈속 이야기같이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나만 알면 그만 인 것’이다. 이제 이 글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바람처럼 사라질 나의 관념이다. 다만, 나의 관념이 무르익어 미미하지만 올바르게, 행동할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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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어떤 소설일까? contra "Faber est suae quisque fortunae."

- "각자 운명은 스스로 만든다."라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 Caesar, B.C10-AD54)의 말에 반하여-















0.

결론으로 말하자면이 소설을 읽고나니 인생은 로망이다에 대한 나의 번역으로서 인생은 ( ) 소설이다라는 괄호에 이렇게 한번 써본다. ‘인생은 (신이 선물로 남겨 준 아름다운 나의소설이다.’

 

( )를 채운다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어떤 재미라 할만하다.


1.

소설 인생.’ 아니 로망 인생이라고 해야 할까? 삶은 신비한 이야기다? 소설 때문일까? 소설가 기욤 뮈소(1974~, 프랑스 작가)의 책은 국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그를 나는 모른다(나로서는 그가 거쳐온 생애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다만 그가 남긴 소설이 내 앞에 있을 뿐이다. 이번 책은 인생은 소설이다(밝은 세상, 2020, 양영란 역)이다. 번역된 제목을 읽다가 곁들여진 프랑스판 제목을 얼핏 찾아보니 인생은 로망이다’(원제. La vie est un roman.)였다.

 

2.

소설이야, 읽고 가벼운 느낌 정도면 충분할지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가끔 소설은 지리할만큼 진중한 해석을 독자에게 기대하는 것 같다. 물론 해석이야, 묵직한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한 비평가들만의 몫이겠지만, 소설은 가끔 그 해석을 평범한 독자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어쩌면, 어떤 소설을 나름 알아보고, 그 이름을 높이 떠오르게 해 줄 독자라면 괜히 거부할 필요 없는 즐거운 의무일 수도 있다. 가끔 소설은 좋아요라는 클릭의 꼬투리를 잡기도 한다. ‘좋은 이유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묻는다. ‘어떻게 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 이윺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오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질문에 담해본다.

 

3.

나의 글은 기욤 뮈서가 로망이라고 써놓은 저 제목이 소설로 옮겨진 것을 조금 자세하게 이해하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그가 사용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가볍게 말하는 그저 소설쓰고 있네는 아니라는 것이다. 저 용어는 이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해석의 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로망은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상상계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금 둘러 말해둘 것이 있다. 일반적인 상식이겠지만, ‘로망에 대응하는 번역어인 우리말 소설은 독자에게 어느 문을 통해 자기 세계로 들어올지 결정하도록 요청할 때가 있다. 그 문은 작가가 미리 남겨두었을 경우가 많지만 동시에 전적으로 독자가 찾아야 할 과제일 때도 있다. 사실, 작가가 소설의 기둥처럼 세워둔 상상력을 독자가 모두 따라가기는 불가능하다. 시험을 출제하는 선생의 의도를 시험에 답해야 하는 학생은 모두 뒤따라갈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소설에는 작가가 남겨놓은 상상력 단서들이 글 어딘가에 생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의 문을 찾아내기 위해 조금 힘을 쓰면 생각보다 힘겨운 일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친절하게도 작가가 자기 글에 대한 해석의 문을 의도적으로 돌출새김해 줄 때가 있다. 그것으로써 작가는 독자와 자기 글로써 이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낯가림하듯 내비췬다.

 

4.

그래서, 개인적으로, 독자인 나는 스스로 해석의 문을 찾아내는 연습을 즐긴다. 정답이야 상관없이 그 의도된 돌출을 손으로 만지듯 직감하는 순간을 기대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촉()이다. 그 직감은 거의 본능이지만, 사실은, ‘자세히 읽음(close reading)'으로써 발견될 여지가 높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의 글 읽기에 감동한 글이 스스로 그 해석의 문을 열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기욤 뮈소의 글이 그러했다. 이 소설이 나를 잡아끌어 그 손에 자기의 문고리를 걸어주었다. 그 촉감은 로망(roman)’이라는 말이다. 그거였다. 이번에는 그의 책 제목을 관찰하는 것이 한 독법(讀法)이며 해석의 문이었다.

 

5

우선 기욤 뮈소가 로망roman’이라 쓴 것을 번역자 양영란은 소설(이라 옮긴 것을 생각해 보자. 기욤 뮈서의 글에 대한 여러 독법 중 나는 로망소설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는냐가 해석의 문이라고 선택한다. 이 말을 토대로 독자인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로망과 우리가 쓰는 소설사이에 적절한 접점이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물론 이 두 단어 사이에 원어와 번역어라는 차이 말고, 어떤 감각적인 간극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학에 문외한이라서 현대 프랑스 문학에서 로망이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치나, 현대문학적 의의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분야다. 다만, 나는 그 로망이 가진 어떤 의도가 그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이 용어가 그의 소설을 해석하는데 어떤 단초를 제공할 것 같은 나의 촉감을 믿고 따라가보기로 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쓴 ‘La vie est un roman.’을 우리말로 옮기면 당연히 인생은 소설이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자인 내가 그의 글을 다 읽고 나니 이 소설의 제목은 두 단어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두 단어 사이를 비워두고 독자가 그 사이를 자기 말로 채워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두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를테면 인생은 ( ) 소설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누구든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이 빈칸을 적절히 채워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이제 나는 이 추론을 좀 더 생각해보기 위해 저 로망roman’소설’’(小說)이라는 단어의 의미범주를 생각해 보려한다. 당연히 원어에 대한 한글대응어로서 두 단어는 거의 손색이 없다. 하지만, 책을 덮고, 막상 두 단어에 다시 손을 대보면 조금 다른 촉감이 느껴진다. 예를 들면, ‘로망은 자주 뭔가 이뤄질 수 없는 헛한 소망을 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소설은 비웃는 어투로서 말도 안되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 문학에서야 여전히 저 앞선 정의로 소설의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해도, 실제 내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 몸에 부딪는 의미는 후자의 의미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문학에서 쓰는 소설의 의미보다는 실제 삶의 자리에서 쓰는 소설의미가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 ‘괜한 소리, 허튼 소리라는 뜻 말이다. 그렇다면 로망도 그런 의미였을까?

 

7.

로망(roman)’. 이것은 이상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시대에 땅의 일에 몰입하며 살아가야 할 나은 자들, 땅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인들이 사용한 이 용어가 발원한 원천을 보자면, ‘romantic 로마식이라는 정서에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차고 넘쳐 흐물대는 낭만(浪漫)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나아가 그런 물렁한 감성을 넘어 보편성과 차별 없는 개방성을 상징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향유될 수 있다는 어떤 평안함도 있었다. 고귀한 이데아에 몰입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 파의 시대가 지배하는 시대에 자기가 발딛고 살아가는 자리에서 누구나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자기 세계가 더 존귀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로망은 흔하고 가벼우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간극과 경계가 사라진 어떤 보편적인 상상계를 열어주기에 충분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망에는 어떤 절망감같은 어감이 스며들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자면, ‘로망일 뿐 현실일 수는 없다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그 속엔 로망을 불가능한 어떤 일에 대한 자조감을 반영하는 용어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점차로 로망은 단순히 이야기’’일 수 없었다. 불가능한 현실이면서 누구나 생각은 하되 손에 잡을 수 없는 어떤 초현실적 이야기를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로망은 점차로 중의적 언어(double Entendre)가 되어 불가분하는 양가 감정이 깊숙이 스며들게 되었다. 절망과 희망의 공존. 나는 그것을 로망이라고 생각한다.

 

8

따라서 나에게 문학으로서 로망은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현실의 이야기다. 아주 오래 전, 일리아드의 서사시가 그 기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로망은 노래같은 산문,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노래는 책이 없던 시절에 듣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기억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최적의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신화에 운율을 실어 들려주었다. 이후 전달방식과 소재는 다양해졌다. 전쟁 소식도 궁금했고, 한 사람이 지나온 발자취가 궁금했다. 글은 희귀했으니 말로써 이야기를 전승하는 일은 좀 더 지속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글자가 회자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이야기를 로 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기억하고 보존하는데 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자는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지난 이야기가 남아있는 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이야기에 다양한 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이야기에 덧붙여지거나 옮겨쓰기, 다시 말하기 등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몸을 변환시키며 불려갔다. 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선명하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는 더욱 정치해졌다. 그럴수록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 구성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그럴수록 결론은 확실해야했다. ‘선이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이야기에서든 당연히 주어져야 할 선()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극적인 로망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고난을 겪어야 했고, 그 위기를 넘어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그 역경 중에도 교훈이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이야기는 궁극적 승리를 위해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직선으로 흘러야만 했다.

 

9.

하지만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사 구조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듣는 이나 읽는 이가 혼란스러울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글을 읽는 즐거움은 더욱 커졌다. 내용은 점차 궁극적 희극만이 아니라 마음 깊이 아련함을 남기는 비극으로 끝나기도 했다. 그렇다해도 서사는 희극의 토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비극마저도 희망의 단초였던 것이다. 이야기 갈래만 복잡해졌을 뿐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단순해졌다.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 그 주인공, 그 영웅이 자기 삶에 찾아들기를 갈망한 것이다. 로망이 현실로 남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은 저 영웅을 손으로 잡아보고 마음에 담아두기에 수월한 도구였다.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욕구가 커질수록 이야기 소재도 더 세밀해지고 미세해졌다. 인간을 둘러싼 바닥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아울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 자체로 들어왔다. 신화와 역사를 넘어, 교훈과 훈계는 물론이고, 나와 같은 신분 속에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감정을 숨김없이 담아내고 싶어했다. 그렇게 환경과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이제는 자신의 속사람을 관찰하게 되었다. ‘로망이라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잘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견인하는 힘이었다. 현실이면서 상상이었고 이룰 수 있는 일이면서도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로망은 현실과 이상을 모두 아울러 인간의 심연을 비추는 한 줄기 빛같은 상상이었다. 그에 힘입어 사람은 로망 속에서 생존하기를 즐겨했다. 로망은 사람들을 시공간에 가두고, 숨죽이며 살아가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로망을 통해 저 하늘을 마음껏 비상하며 자유하면서 생존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추론이라해도 반박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10.

마침내 로망 roman’은 인간이 인간의 욕구를 관찰하고, 그 욕망을 해석하는 것에서 절정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삶의 범주를 저인망식으로 모두 아우르며 점령하듯 전진했다. 성과는 좋았다. 로망은 인간 자체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가감없이 내세우며 더욱 내달렸다. 서술기법은 날카롭고 찌르는 듯 치밀해졌다. 갈수록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변모하는 인간이 나타났다. 인간을 바닥에서부터 훑어내며 새로운 인간을 창출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을 다루는 로망은 인간의 안과 밖을 종횡으로 질주하며 결국 인간 안을 헤집어 들춰내는 전략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렇게 문학사에서 로망은 세계 경계를 넘어 심지어 언어마저도 무력화시키며 논픽션마저 제압하는 픽션으로서 거대한 힘을 유지한다고 할만하다. 이것이 오늘날 그들의 로망이라면 동시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소설이다.

 

11.

우리의 소설(小說)’은 작은 이야기로부터 정의된다. 본래 이야기의 길이가 결정했던 단어였기 때문이다. 단편, 중편, 장편이 그러하다. 단편은 가벼워 보이고, 장편은 거대한 서사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점점 이야기 분량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낮은 자들의 허툴게 보이는 삶, 작고 가치없어 보이는 속설같은 인간 심사를 제대로 꾸며,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로 들려졌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아니라 낮은 땅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소설역시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이 꿈꾸는 세계에 대한 어떤 열망이 담기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소설 역시 인간의 모진 심성들이 가감없이 고스란히 담겼다. 어떤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겨지는 인간 정서가 소설 안에서 정밀하고 강력하게 묘사된 것이다. 소설이 저 서구의 로망을 답습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 이야기의 방향은 같은 길을 보여주었다고 해야한다. 허균이 저 의적 홍길동을 그려낼 때 그것은 영웅과 인간의 희망, 어쩌면 절망을 아우르는 이야기였다. 소설 역시 어디나 어느 시대나 그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절망과 희망의 공존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설 역시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저 영웅 홍길동이 창출해낸 세계를 꿈꾸듯 함께 희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이 어떤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겼다.

 

12.

그런 점에서 인생은 로망이다는 말과 인생은 소설이다는 말 속에는 독자에게 한 가지 큰 해석의 즐거움을 남겨둔다. 독자들은 서구의 로망에서 글이 가진 정서적 희망을 먼저 읽는 다면, ‘소설에서는 절망 너머 현실의 계층의 희망을 먼저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단어가 원어로 번역어로 만남으로써 삶에 대한 우리의 희망에 시너지를 일으킨다. 한편으로 로망이 인간의 내적 이상을 서술함으로서 현실에 대한 희망을 이어간다면, ‘소설은 외적 이상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내적 희망을 공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로망은 가벼운 뜻의 소설이 아니며, 소설은 로망보다 가벼운 말이 아니다. 두 단어는 모두 인간의 내외적 이상을 현실로 그려내고 싶은 작가의 간구가 담긴 용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나는 기욤 뮈소가 한국의 독자가 익숙한 novel(소설)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 로망을 원래 제목으로 쓰고, 그것을 한국의 번역자가 소설이라고 옮긴 것에 나름 만족한다. 그는 자기 글을 대중적인 새로운 글 novel’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하면서 저 중세로부터 이어지는 단어 로망 roman'을 썼기에 나로서는 우리말 소설이라는 번역에서 저 로망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인생은 소설이다라는 말을 작가의 의도와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에 기억할 수 있어서 좋다

브루클린, 2010년 가을
6개월 전인 2010년 4월 12일에 당시 세 살이던 내 딸 캐리 콘웨이가 윌리엄스버그의 아파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도중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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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021)-에 대한 독서나눔 후기

 

0.

지난 2, ..

산길을 오르는데 동행했던 한 분이 내려서는 길에서 거친 숨을 고르며 말을 꺼냈다.

제가 요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습니다.”

"그럼 시간 내서 한번 독서 나눔 시간을 가질까요?"

그렇게 줌으로, 어느 주일 저녁에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이 글은 그 나눔과 나의 후기를 덧붙인 것이다.

...

 

려진 대로 이 책은 삶의 끝을 기다리는 한 사람과

그를 인터뷰하는 사람이 주고받은 말들을 담아둔 결과물이다.

책은 반나절이면 순삭할 정도로 간단하면서도 매끄럽게 읽힌다.

옆에서 지켜보면 더 잘 보이는 훈수가 그러하듯,

죽음을 앞둔 이가 남기는 말을, 아직 삶이

한참 남았을 젊은이가 듣고 있는 옆자리에서, 슬쩍슬쩍 듣는 즐거움이 제법 쏠쏠하다.

내 기억으로는

예전 그가 남긴 여러 말과 글들이 뒤섞여있다는 아쉬움보다는(최근, 지의 최전선, 80년 생각 등)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날을 기다리는 노인의 태도가

모든 평범한 말을 특별하게 빛내주는 것같다.

그에게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는 모멘트의 그림자(‘마벳차라트,2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지만, 서둘러 기다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당당함도 보인다뿐만 아니라 저자는 그 죽음을 해찰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중하게 진지하게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죽음의식memento mori을 삶을 견고하게 하는 토대로서 받아들이며 그는 죽음의 계곡을 전진한다. 


그렇게 봄이 오듯 시간이 왔고,

그는 고요한 중에 레테의 강을 슬며시 건넜다.

요즘같이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낫다'는 코헬렛의 말을 실감하는 시대를 겪지 않고 

돌아갔다는 점에서 그는 생각보다 더 행복한 사람일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삶은 돌아갔고,

우연히 나의 기억은 돌아왔다.


1.

그가 남긴 가장 산드러진 말은 신학은 시학(詩學)이다일 것 같다.

본래 나는 신학에 문외한이었다아니 신학 자체를 반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문학을 즐겼고 커가면서 수학과 원가계산에 몰입했다.

하지만, 압도하는 '우연'이 운명처럼 나를 신학으로 끌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고, 과정도 알 수 없다다행히 신학은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한편 글을 읽으면 서로 다른 삶을 두 편 떠올리게 자극했고,

고대 낯선 언어와 단어들은 늘 마주한 것 같은 생경한 의미를 되살려주었다.

나의 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적절한 비율로 블렌딩된 하우스커피처럼 달보드레했다.

신은 학문을 즐기지 않으셨겠지만그를 바라보는 인간에게는 ()’을 선물로 주셨다.

학자의 혀’(50:4)를 노래한 예언자도 있지만 나는 거대한 학문보다 작은 글 하나라도 디딤돌 삼아

저 높고 깊고 넓은 우주에 편만한 야훼의 옷자락 끝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걸 배웠다.

도달할 수 없는 여정인줄 알았기에 신발을 벗은 채라도, 그 실체에 다가오도록 허락해 준

야훼의 세계를 숲길 걷듯 누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솔직히, 아직도, 나는 그를 알 수 없으며 내가 겪는 삶을 다 이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 동의할 수도 없으며

심각할 때는 그의 이미지가 허상처럼 불연듯 떠올라 크게 당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인식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인간으로 책과 삶에서 신학 언어를 선물처럼 누렸으니 다행이다.

신은 임의성으로 인간을 몰아붙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삶을 모든 이들이 유익하도록

신의 허상같은 품위를 내던지고 오늘도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그 신에게 한걸음 다가갈 방법으로 부족한 필력으로라도

몇몇 개념과 문장을 만들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렇게 신학은 나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2.

신학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어린 시절 뿌리내린 문학에서도 여전히 발을 빼지 않았다.

아니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틈나는 대로, 내키는 대로 한 두 문장 적어두는 것만으로는

문학의 심장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쓰지않으면 퇴색되듯 문학을 자주 내 삶의 변방으로 밀어두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었다.

사라지지 않으면 어느 날 살아나는 법. 

나는 신학에 첫 이야기를 듣던 날로부터

나는 나의 신학이 문학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신학이 사색이라면 문학은 실천이었고, 실체였다.

모든 사고가 글로 표현될 수는 없지만

신학을 신학의 글로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강요받을 때,

나는 신학을 문학으로 결실하는 일은 너무 당연하다는 확신을 다시 가졌다.

저 고대의 글 히브리 성서, 타나크는 신을 향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향한 문학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접한 신학'은 나에게 문학을 요구하지 않았다.

문학에 기웃하거나 받아들이는 일도 허용하지 않았다.

히브리 성서가 고대언어를 토대로 한 문학의 산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있으면서도

여전히 문학에 기대지는 않으려는 자존심으로 나를 붙잡았다.

히브리 시를 시로 읽지 않고그 소설을 소설로 읽지 않으며,

가벼운 수필을 진중한 신앙고백으로만 읽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브리 성서에 쓰인 글들이 인간의 숨결같은

호흡과 리듬을 따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감지하려는 의욕도 크지 않았다.

그것을 애써 설명해줄 마음도 없어보였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신학을 문학에 잇대어 두고 싶지는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은 신학과 다르고신학은 문학으로 평절될 것이 아니라고만 강변했다.

신학의 최종 산물이 문학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고집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어색한 변론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이 다행이다.

 

3.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확정했다.

내가 만난 '본래의 신학'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은 문학으로특히 시학으로 운율있는 산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정의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나름 잘한 일이다.

신학은 문학으로 퇴행한 것이 아니라인간에게 걸맞는 옷을 입고 전진한 것이다.

신학이 신을 바라보기 위해서 존재한다면당연히 신이 이 세계를 항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신이 성육신하듯 신학이 세계에 공존하려면 그에 걸맞은 옷을 입어야 마땅할테니,

문학이야말로 그 적절한 옷이다.

나에게 이런 확신을 확정하도록 결정적으로 채근한 전달자가 

바로 저 한국판 마지막 수업의 주인공, 바로 그다.

삶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운명같은 기억이 떠오를진대,

나의 어린 시절, 나는 저 패기넘친 문학평론가의 현학적 평론을 기회 되는 대로 조금씩 읽어두었다.

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어도

나의 삶은 나도 모르는 어느 한 시간,

나의 삶 어딘가에 세워진 저 이정표같은 글들에 터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가 소설가 이상의 시와 소설에서 상상력을 채굴하고 윤동주의 시들에서 시공간으로 뻗어가는

창조성을 발굴하고시대의 우상들을 향해 벽력같은 문력을 날렸던 것은 그저 스무살의 젊은 치기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에 갇혀 살아갈 위험이 다분한 나에게는 인간의 깊은 지적 세계를 향해

한걸음 내디딜 수 있는 디딤돌이었다.

나는 그의 평론을 호독(好讀)했다그가 식상할 정도로 반복했던 창조와 상상이라는 말을 되뇌였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은 그가 자기 문학에서 신학으로 외연을 넓힌 것이었다.

비록 노년에 주어진 삶이었다하지만 오히려 다행스럽다.

특별하고 개인적인 자기 실존 경험이었지만 사람이 바라보는 신에 대한 긍정적 의구심은

언제나 삶의 머리가 아니라 뿌리를 흔들 때 진실한 것이 되는 법,

그는 간증을 위한 것 아닌가 할만한 세례를 받았고

회심의 진위에 대한 의심도 감수해야했지만,

머뭇하지않고 과감히 신학을 문학으로 해체했다

세계 속에 머물면서도 골방에 들어가 빗장잠그고

세계를 논하는 저 신학을 문학으로 열어 다시 세계로 꺼내주었다.

노인이 자기 세계관을 변화시키기란

세계가 반대로 도는 것만큼이나 쉽지않을 것이다.


4.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학神學에서 받침 하나만 빼면 시학 詩學이 되지 않습니까.

시를 읽듯이 소설을 읽듯이 성경을 읽으면 어렵던 말들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읽을 수 있는 성경,

우리가 쓰러졌다 일어서는 법과 미움을 넘어서는 사랑의 수사법과

등 돌린 사람을 포옹하는 너그러운 몸짓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의 식탁에는 우리의 배를 불리는 밥

만이 아니라 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줄

참으로 눈부신 햇살이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열림원, 2012),11.

 

그가 빼버리면 좋겠다는 은 두 가지다.

누구나 읽을 수 없는 성경’, ‘우리 배를 불리는 밥이나 빵’.

그것을 빼고 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성경이며,

눈과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주는

햇살로 가득 찬 식탁이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고, 이 말은 나의 확신을 확정해준다.

 

5.

신학을 시학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당연히 상상력이다. 신학을 운문있는 산문,

시학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신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창의력이 조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 상상력이 위 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라면,

문학적 상상력은 옆으로 오락가락 하는 모양이다.

마치 야곱이 꿈속에서 오르내렸던 사다리같은 것이

신학적 상상력이라면,

야곱이 벧엘에서 길을 걷기 시작해 광야를 지나갔던

그 걸음은 문학적 상상력이라 할만하다.

이런 상상력 아래서 신학과 문학은

수직과 수평을 그어 벡타로 이행하며

평면은 공간으로 전환될 것이다.

신학이 신을 바라보는 한 지점을 찾기 위한 분투라면,

문학은 그 신학이 찍어준 좌표에

의미있는 토포스를 창발하는 역투다.

신학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현실화라고 한다면,

문학은 그 현실화를 가능하도록

신에게 부여받은 선물같은 도구다.

결국, 신학적 상상력이 아니라면

저 야훼의 실체를 떠올릴 수 없으니

그 떠올린 야훼의 실체를 손에 잡히게

만들어내는 것은

고대로부터 켭켭이 쌓여온 문학적 상상력이다.

신학이 야훼를 향해 들어가는 입구라면,

문학은 야훼로부터 쏟아지는 은총을 세계로 운반하는 출구다.

신학은 필연적으로 문학에 잇대야한다.

그럴 필요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야 할 근거없어 말꺼내마자

토론없이 기각되기 십상이라지만,

나는 이것을 한결같이 몽글한 신념으로

몸 속에 다지고 있다.

 

6.

신학하는 이는 매일 글쓰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 연습의 궁극적 목적은 신의 성육신을 돕기 위해서다.

신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어있을 뿐이다.

글은 스스로 자기 몸을 은폐한 신을 당대에 불러내기 위해 쓰여진다.

돌이켜보면, 운율있는 산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전매특허같은 글쓰기였다.

그들은 매일 아침의 야훼를 묵상하고,

밤의 야훼를 상상하며,

한 낮의 야훼를 글로 그려 남겼다.

글 위에 글을 얹었고,

문장 앞에 문장을, 문장 뒤에 문장을 덧이었다.

댓구와 평행과 말놀이, 반복은 물론이고

심지어 의도적 오류마저도

그들이 즐겨쓰던 기법이었다.

논지와 논거와 논리적 구조를

흐릿한 구성으로 덧씌워버리기도 했다.

한 번에 모든 글쓰기를 끝내지 않았다.

글을 독점하던 사람들의 시대도 있었으나,

그 때도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른 이를 위한 글을 만들어냈다.

모든 글은 읽혀지기 위해 쓰였고,

낭독되고 암송되고 재현되는데

기여하도록 쓰여졌다.

기억을 위한 암송은 노래여야 했고, 시여만했다.

리듬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문학기법이었다.

글에 리듬이 들어가야만했던 필수불가결한 상황이었다.

뿐만아니다.

써놓은 글을 바로 수정하거나 첨삭할 수 없고,

단어도 제한적이었으니,

한 글자, 한 글자를 문장에 메꿔넣듯이

천천히 채워나갔다.

잘못된 표현은 누구나 수정할 수 있었으나

수정의 흔적을 남겨두어야했다.

글자 위에 글자 하나를 덧붙였다.

글자의 총 수를 헤아려두었으며,

어느 글자가 이 책의 한 가운데인지 확인가능했다.

그렇게 글은 기억으로 남아 전수되었으며,

그 글 속에 담긴 야훼의 모습은 퇴색되거나 왜곡되지 않게,

온새미로 있는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런 결실은

매일 글쓰기를 자기 책임으로 알고 지냈던

이들 덕분이다.

그들 덕분에 나는 지금 어디나 계시는 야훼의 흔적을 손에 만지듯 경험하고 있다.

 

7.

이어령 교수의 말을 글로 옮긴 책을 읽고

어느 주일 오후 책나눔 시간을 가졌다.

그 자신도 반성하며 회고했지만 그의 글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기에게로 굽어진 채 쓰여진 것이었다.

그의 글과 말의 세계 속에 조금이라도 겹쳐진 삶을 살았던 나는,

이제 그가 희구했던 문학으로서 신학,

시학으로서 신학이

더 넓은 세계로, 세계공동체로 확장될 날이 오기를 다시 희망한다.

세계는 연대해야한다.

세계는 지금 실시간 시대다.

그의 말대로 지난 생각(thought)이 아니라

지금 생각(thinking)이 유효한 시대다.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더 이상 과거로 회귀할 수 없어야 한다.

과거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결코 돌아가지 않아야 할 세계이다.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더 이상 미래를 대출할 수 없어야 한다.

미래는 희망찰 수 있지만,

결코 먼저 나아갈 수 없어야 할 세계이다.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세계는, '현재' 아름다운 세계여야 한다.

그래야 지난 과거를 아름답게 환송하고

다가올 미래를 아름답게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나는,

또 나를 위해 지금,

나아가 나의 아이들을 위해

어느 날 한 줄이라도 읽을 수 있는 글을 남긴다

내가 무엇을 이뤘는지,

어떤 사명을 완수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여기에 이렇게 해찰한 듯 살아냈다는 것을

남기는 안추르한 흔적으로 말이다.


"내일의 식탁에는 우리의 배를 불리는 밥만이 아니라 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줄 참으로 눈부신 햇살이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열림원, 201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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