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섬세한 사랑의 아름다움’. 누가 생각했을까? 늘 들어도 마음에 간질간질한 꽃말이다. 먼 옛날 이집트 사막 앞에서 어느 사람이 이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런 감정을 느꼈던 걸까? 하와이 모래해변 해 지는 저녁, 온 바다에 붉은 물감 풀리듯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이런 마음을 가졌던 걸까? 슬픔 삼킨 오키나와, 어느 농장 상쾌하나 쌀쌀한 바람부는 날, 틈을 헤집고 붉은 꽃잎을 거둬들이는 손 끝에 촉촉하고 세밀한 사랑이 닿았던 걸까?

속설은 속설을 낳는다니, 어느 날 이 붉은 꽃이 거친 들에 아름답게 피어난 샤론의 장미, 다시 또 어느 날, 하루살이 역경에도 영원과 진정한 충성을 향해 살아내는 무궁화(Hibiscus syriacus L)꽃으로 재생했다. 저 달콤새콤한 사랑만으로는 아쉬웠을테다. 마음깊이 각인하는 운명같은 사랑을 꿈꿨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 저 꽃잎 곱게 말려 뜨겁지 않은 물을 붓고, 붉은 빛이 물 속에 퍼져 알맞게 살아난 붉은 물빛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붉그스름 안에서 상쾌하게 신 맛이 솟아난다. 이 맛을 섬세한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히비스커스(Hibiscus)가 붉그스름한 향을 풍긴다.


2.

언젠가 미얀마 이야기로 세상이 어두워졌을 때 한 소녀가 상사화를 불렀다. ‘사랑을 넘어선 사랑’, ‘보지 못하고도 사랑하는 사랑이다. 들을 때마다 깊은 한을 내리 누르기도 하고, 끌어올리기도 했다. 애틋한 가사도 첫 구절에 마음 빗장을 열어버릴 때가 많다. 사랑이 묻혀버린 마음이라면 금방이라도 사랑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그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아름답게 당당하다노래는 삶이 실릴 때 짙은 향기가 되는 모양이다. 노래는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 저만치 혼자서 흐르다가 개여울을 만나 휘돈다. 낮은 절벽에서도 낙수로 쏟아지다 잔잔하다 살랑인다. 살랑하다 보슬보슬하고 그러다 아침이 오면 윤슬이 내려앉는다. 빛구슬을 이고 물은 계곡을 따라 다시 저만치 혼자서 미끄러지듯 떠내려간다. 그러니 보는 이의 시선으로만 저 상사화를 슬퍼하거나 떠내려가는 노래를 안타까와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길을 당당하게 흐르는 삶과 노래를 응원함이 마땅하다.

 

3.

소설가 김훈 님의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2022, 문학동네)를 읽었다. 실린 글들은 2013년 이후 계간지 문학동네에 먼저 소개된 것들과 미발표작 <48GOP> 등 일곱 편이다. 책 제목은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명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의 특징을 얼핏 살펴볼 수 있는 흔적들이 있는데 우선 광고용으로 사용하는 책 띠지에 새겨진 문장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 또 다른 하나는 작가가 책 말미에 덧붙인 <군말>이다. 에필로그가 아니라 각 소설들이 생겨나게 된 실제 사연이다. 사연과 소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군말>은 각 소설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만하다. 그러니 이 소설읽기의 순서라면 <군말>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작가가 보여주는 문체, 문장의 의도적 수려한 수사가 장점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좀 더 강하게 들었다.


4.

이 소설집을 펼치기 전에 나는 소설집의 제목 저만치 혼자서를 생각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 김소월이 남긴 산유화」 중의 한 싯구다. 소설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는 이 제목부터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월의 시 산유화는 이미 알려진 대로 산 어디나 있는저 꽃을 노래한다. 시를 해석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일이니, 이 시가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라든지, ‘저항을 상징한다든지 하는 것은 독자 누구에게나 열린 결론이다. 무엇으로 읽든 그리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관점이든 저만히 혼자서라는 말에 대해서는 좀 더 유의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쉽지만 본래 소월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직접 알아볼 방법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니 어떻게 이해해도 나의 주관에 불과할 것이지만, 이 소설의 작가가 저 제목을 소월의 시에서 가져왔다고 밝혔으니(214) 아무래도 이 소설집을 잘 읽기 위해서는 저 시 구절을 다시 한번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래도 그것이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고 가능하다면 이 소설집 전체를 한데 묶어내는 주제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굳이 주제를 하나로 엮어 읽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가능성은 작가가 이미 밝힌 한 사람의 이웃으로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미리 정리하자면 저만치 혼자서에 대한 작가의 제목 설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긍정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되새겨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5.

우선 나는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잘 읽기 위해서는 작가의 말대로 이웃으로 썼다는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하는 인물들, 다루는 소재들, 생각하는 주제들이 모두 저자의 이웃들일 수 있는 사람들의 경험이자 그들에 대한 관찰이며 그들을 통한 자신의 성찰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웃이라는 관점이 선명하다. 작가가 자기 주변 삶에 대해 오랫동안 겪어온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이웃으로 썼다는 말은 이 소설집이 진솔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다. 이런 관점은 소설집에 실린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읽는 이에게 유익한 점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보여주는 이웃으로서 관찰은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이에게 나도 이웃처럼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선험’(先驗, transzendental)이 아니라 대신 체험하게 돕는 추체험(追體驗, Nacherleben)’을 제공한다는 장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혹시라도 이 세계에서 나의 이웃이 겪는 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일말의 가책을 느끼는 이에게, 또는 이 세계의 아픔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의 상사화같은 심정에 내면의 해갈을 해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늘 이것을 김훈 소설의 유익한 점이라 여긴다. 이것은 마치 그의 소설이 대리 고해성사같은 장점이 선명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에 더해져 문학적 수려한 수사가 어우려서 읽는 이에게 기호에 맞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 같다.

 

6.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 제목과 그의 소설에 대해 이번 만큼은 독자로서 스스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두려 한다. 우선, 나는 이 소설집에 실린 작가의 시점이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이웃이라는 부제를 염두에 두면 특히 그렇다. 게다가 소월의 싯구가 남긴 그 속뜻을 추론해볼 때도 그렇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과 소월이 남긴 싯구 저만치 혼자서가 조금 다른 뉘앙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월은 저만치 혼자서당당한 존재자로 본 것같다. 그 존재는 관찰의 대상도 아니고, 심지어 그리움의 대상도 아니며, 홀로 피어 외로울 거라는 연민의 대상이라하기에는 당당함이 짙게 묻어난다. 내가 읽기에 소월의 산유화는 이 산 저 산 어디에서나 자기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핀 을 노래한 것이지 그 에 대한 측은지심을 발휘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의 작가는 저 제목을 토대로 쓴 일곱 째 소설에서도 그러하고, 나머지 여섯 편의 이야기에도 이웃으로서 자기 이웃에 대한 쓸쓸한 연민이라는 작가 중심적 시점을 한결같이 유지한다. 각 소설이 나오게 된 시점이 달라서 그 시절을 반영하는 다양한 소재들이 제시되지만, 작가의 관점은 의도적으로 일정하다. 사회적 아픔을 소재로 삼았지만, 이웃으로서 바라보는 어느 시점들은 시대가 지나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스스로 채근해야 할 것은 이웃으로서 그들을 보는 어떤 관점은 작가의 반대편에서 이웃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태도로 보인다. 작가는 모든 상황에서 이웃으로서, 연륜깊은 소설가로서 관찰하는 태도를 잘 유지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어떤 면에서 자녁 내기 장기를 두는 사람 주변에 서 있는 훈수 두는 사람과 같은 경우도 보인다.

 

7.

나는 어느 작가든지 전작주의를 선호하지 않는다. 다만, 책이 나오면 자주 사서 읽어두는 작가들은 있다. 소설가 김훈 님도 그 중 한 분이다. 이유라면 문체가 나에게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몇 편 글들은 만족스럽다. 그의 소설이 말해주는 것처럼 오늘도 세계는 격동하고, 삶은 깊은 한숨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계속된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히비스커스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상사화를 상상한다. 그것마저도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작가가 이웃으로서 썼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저만치 혼자서라는 말이 이웃에 대한 위로부터 연민이 아니라 그들도 당당하게 자기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간다는 아래로부터 공감으로 읽는 것은 나의 몫인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소설도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까

태백 산맥이 해안을 바싹 압박하면서 가파른 경사로 물에 잠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