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용어사전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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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서양사학회에서 내는 학술지 [서양사론]에 실릴 {역사용어사전}에 대한 서평입니다.


아직 교열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인 만큼, 이 글에 대해 토론하거나 이 글을 인용하실 분들은 


[서양사론]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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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탈근대성의 교차로에서-{역사용어사전}에 관하여




I. 머리말


  역사학 전공자도 아닌 일개 철학도가 한국 역사학계의 일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용어사전󰡕의 서평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처음 서평을 부탁받은 이후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난 몇 년 간 󰡔역사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역사학계의 동향을 어깨 너머로 관찰한 것 말고는 역사학에 관해 이렇다 할 식견이 없고 사전 제작에 직접 참가한 경험도 없으니, 이중의 의미에서 문외한이라고 할 만한 필자가 이 대작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게 여러 모로 걸맞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글을 써나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역사학계에서 필자 같은 철학도에게 이런 서평의 기회를 준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역사학 전공자들의 힘을 모아 일궈낸 이 성과에 대하여 자기만족이나 자화자찬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엄정한 자기 평가를 통해 앞으로 더욱 좋은 사전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다른 전공 분야 연구자(필자가 적임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의 비평적 시각을 통해 더 객관적인(또는 적어도 더 다양한) 시각을 확보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역사학계에서 더욱 값진 성과를 이룰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동료 인문학자로서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또한 철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언젠가는 한국 철학계도 이런 작업에 버금가는 철학 사전을 만드는 일을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다짐도 이 서평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동기였다. 철학이 역사학만큼 국민국가의 문화적 기획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아니고 따라서 근대 이후 여러 나라의 역사학이 배출해온 만큼의 풍부한 사전들을 만들어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이 개념들을 토대로 삼는 만큼 여러 종류의 사전은 철학 연구의 중요한 자원이자 조건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한국 철학계는 오늘 역사학계가 먼저 성취한 이 역저에서 배울 만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이 서평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그것은 탈근대적인 사전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또는 사전에서 탈근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주지하다시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이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일련의 담론들은 지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이해 국내 학계에 급속하게 수용되어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담론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세심하게 다루어야 하는 주제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필자는 탈근대성이 비가역적인 지적ㆍ문화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제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7호, 2012 및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황해문화󰡕 2014년 봄호,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란 무엇인가?」, 󰡔황해문화󰡕 2014년 겨울호를 각각 참조하라.] 이 책의 「간행사」에서 잘 밝히고 있듯이 근대 이전에도 이미 여러 종류의 사전이 존재해왔으나, 오늘날과 같은 사전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국민국가 체계가 성립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범박하게 말해서 국민국가 체계가 이제 역사적으로 쇠퇴 과정에 접어들었다면, 더욱이 국민국가체계와 연동되어 있는 문화적 근대성(역사학, 철학, 문학 같은 인문학들을 포함하는)의 헤게모니가 와해되어 가고 있다면, 그것을 대체하게 될 새로운 문화적 양식에 대한 모색이 당연히 요구될 것이다. 이것을 역시 범박하게 문화적 탈근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사전이라는 것이 근대 국민국가의 문화적 기획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다면, 탈근대적 성격의 사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교차하는 역사적 시기에 사전을 만들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에 관한 주목할 만한 토론은 Theory, Culture & Society, vol. 23, nos. 2~3, 2006을 참조. 이 학술지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와 관련된 특집호 및 논문들을 싣고 있다. 가령 초학제성(transdisciplinarity)의 방법론을 특집으로 다루는 2015년 vol. 32, nos. 5~6호 참조.

  

그리고 오늘 필자가 서평을 해보려는 이 책 역시 그러한 고민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사전의 위상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에 관해 여러 차례 숙고하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 사전은 근대와 탈근대의 교차로에 놓인 사전이라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지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II. 역사 용어 개념의 독창성


  우선 이 사전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이루는 역사 용어라는 개념에 대해 몇 마디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 이 사전을 접할 때부터 사전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왜 ‘역사학 사전’이 아니라 ‘역사용어사전’일까? 또는 역사학에서 쓰이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사전이 목적이라면, ‘역사 개념 사전’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역사용어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사전 편찬자들을 대표하여 최갑수 교수가 간략하게 제시한 「간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해명만으로는 이 사전의 구상 및 편제의 토대 구실을 하는 ‘용어’ 개념과 그에 입각한 편제의 원칙, 특히 대표제어, 중표제어, 소표제어의 분류 원칙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사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역사용어사전’(영어로 하면 Dictionary of the Historical Terms)은 역사학 분야에서 쓰이는 여러 용어들의 간략한 낱말 뜻을 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가령 日本史用語辭典編集委員會 編, {日本史用語辭典}, 東京: 柏書店, 1979 또는 Chris Cook, 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Macmillan Press, 1983이나 J. P. Michaux, Elsevier's Dictionary of Art History Terms/ Elsevier's Dictionnaire des Termes d'Histoire de L'Art: French/English-English/French, Elsevier Science Ltd, 2002 등에 그에 해당하며, 인터넷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개 언어의 역사용어사전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사전의 경우 내용을 보면 낱말의 뜻풀이를 제시하는 사전(辭典)의 성격도 지니고 있으나, 특히 중표제어나 대표제어의 경우는 어떤 사실이나 주제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사전(事典)의 성격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사전의 기획 및 편집 주체들이 ‘용어’라는 개념에 대하여 상당히 세심하면서 특수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행히 이 사전의 편찬 주체들이 이 사전에서 설정한 ‘용어’ 개념과 편찬 방법을 상세하게 해명하는 논문을 통해 필자는 이 의문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최갑수 외, 「역사용어의 범주와 {역사용어사전}의 편찬방법」, {한국사전학} 제26호, 2015. 출판되기 이전에 이 논문을 제공해준 이동기 교수와 양희영 교수께 감사드린다.] 논문에 따르면 이 사전에서 역사용어 개념은 “역사서술에 자주 등장하는 어휘”라는 일반적인 뜻을 지니되, 문장구조에 입각하여 세 가지 부류로 세분되고 있다. 역사적 설명의 두 가지 부분을 구성하는 주어부와 술어부 가운데 주어부에서는 “인명, 지명, 국명, 민족명, 사료나 저술의 이름, 조약명, 연호, 도량형의 명칭, 특정 제도의 이름, 사건, 풍속, 사상, 집단심성, 특정의 용어”[같은 글, 71쪽] 중, “제도명의 일부 ... 일부 특출한 사건(예컨대 동학농민전쟁이나 프랑스혁명 등)과 특정의 학설(독일의 특수한 길, 동양적 전제주의, 아날학파, 아세아적 생산양식, 가산제국가론 등)”[같은 글, 72쪽]이 표제어로 선정되었다. 술어부 중에서는 “시민혁명, 부르주아지, 근대국가, 절대주의, 봉건제, 시대구분, 노예제, 자본주의, 민족주의, 유럽중심주의, 파시즘 등 보다 특정한 형태의 개념들”이 포함되며, 여기에 더하여 “국민, 문명, 혁명, 국가, 자유, 평등, 법, 계급, 평화, 인권, 화폐, 도시 등 사회과학이나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 에 속하나 과거의 사상(事象)의 이해에 긴요하다고 판단되는 용어들, 예컨대 혁명, 토지제도, 화폐, 도량형, 인구, 계급, 귀족, 도시, 문명, 문화 등”[같은 곳]도 표제어로 포함되었다.

  

논문은 또한 유형에 따라 용어 개념을 분류하고 있는데, 이 경우 역사용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첫째, 과거의 사료에 등장하는 사료용어가 있으며, 둘째, 역사가들이 과거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연구용어가 있고, 셋째, 근현대사 영역에서 주로 서구 용어를 번역한 번역용어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인접학문의 용어들과 접해 있는 인접 학문용어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표제어 선정의 경우 이 사전에서는 주어부에 속한 제도명은 소표제어에 위치시키고, 술어부에 속하는 용어들은 중표제어와 대표제어에 위치시켰다. 이 중에서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에 모두 해당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대표제어에 편성되었고, 그렇지 못한 것은 중표제어나 소표제어에 편성하되, 그 용어가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중 어디에 속하는지 역시 고려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 표제어의 후보가 되는 ‘근대국가, 근대화, 문명, 민주주의, 민족주의, 봉건제, 사회주의, 신분제, 자본주의, 제국주의, 파시즘’ 등은 거의 근대 이후의 역사에 해당하며 사실상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자칫 “유럽중심주의를 여과없이 재생산하거나 후대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시대착오를 범하는 것”[같은 글, 80쪽]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논문을 통해 이 사전의 편찬 주체들이 역사용어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아울러 이 개념에 입각하여 표제어를 선정하고 적절한 집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무척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거니와 ‘역사 용어’라는 개념을 이처럼 세심하게 범주화하고 그에 입각하여 이 정도 규모의 사전을 제작한 것은 여러 모로 볼 때 매우 독창적인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역사 용어는 간단한 뜻풀이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 사전에서는 역사적 설명의 구조에서 그 논리적 근거를 찾고 있을 뿐더러 분야별ㆍ시대별 구별에 입각해 표제어로서의 경중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이 어떤 것인지 총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용어들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이해 방식과 수준이 어떠한지 역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전은, 편찬자와 평자가 언급하듯이 해방 이후 60여 년 간 축적된 한국 역사학계의 지적 노력과 성과의 응축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 이 사전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 역시 용어들의 차원에서 노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은 이 사전의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함께 이야기해보겠다.


III. {역사용어사전}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필자가 보기에 이 사전은 기본적으로 근대성을 지향하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사전이 국민국가 체계를 현재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근대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질서(또는 문명의 단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로 이해하고 있으며, 사전의 궁극적인 의의를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문화적 주체성의 표현에서 찾는다는 사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편, {역사용어사전},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5 중 「간행사」 참조. 이하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 사전의 쪽수는 본문 중에 숫자로 표시하겠다.] 곧 사전은 단순히 자모의 체계에 따라 구성된 지식의 집적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자격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격상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근대 지향적 성격이 다소 과도하게 표현되는 대목도 있으나, 이 사전에 300여명에 이르는 국내 학계의 주요 역사 연구자들이 참여한 점을 미뤄볼 때, 사전다운 사전을 만드는 것을 한국 역사학계의 중요한 과제이자 소임으로 받아들이고, 한국 역사학의 자립성과 성숙성을 측정하는 근본적인 척도로 이해하는 것에 많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사전의 편찬 주체들은 물론이거니와 한 서평자 역시 이 사전 자체를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하지 않고 ‘역사학 대사전’이라는 더 커다란 근대적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한 한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사전의 근본적인 지향이 근대적이라는 점이 명시적으로 나타난다.[이성규, 「소개와 간평: {역사용어사전}」, {역사학보} 제 226호, 2015 참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사전의 근대성 지향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1) 이 사전 기획의 출발점에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로 분리되어 있는 한국 사학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왜 이러한 분리가 문제가 될까? 그것은 우선 용어상의 통일성의 부재 및 외국 학계(특히 일본)의 특수한 용어들의 범람, 부적절한 용어 번역 때문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연구자나 분야별 전공에 따라 상이하게 표현하는 데서 생기는 불편함은 연구의 차원만이 아니라 교육 및 대중적 소통의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고 한국 역사학의 주요 용어들에 대한 통일적인 개념화 및 표준화를 시도하려는 것이 이 사전의 목표 중 하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단지 용어상의 혼동 및 거기에서 생겨나는 불편함에 있다면 그것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더 심층적인 이유는 용어상의 통일성의 부재가 사실은 역사에 대한 인식,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적 시각의 이질성,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편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전 편찬자들이나 앞서 언급한 서평자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이질성 내지 파편성이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및 역사교육)로 분리된 한국 역사학계의 제도적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도적 분화를 통해 각 분야별로 더 전문적이고 밀도 있는 연구를 이룩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분과 체제에서는 상호 연계와 융합을 통한 역사학이 점차 해체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성규, 같은 글, 512쪽] 또는 “분과학문체계로 나뉘어져 발전해온 현재 역사학이 각 분과의 전문성 확보로 말미암아 역사학의 정체성 자체가 상실된 데 대한 반성”[최갑수 외, 앞의 글, 78쪽]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전의 편찬자들을 비롯한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제도적 분과 체제 및 거기에서 비롯된 파편적인 역사 이해를 극복하는 것을 한국 역사학의 기본 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 이 사전이 한국 역사학의 자립성과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자 그것을 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상되고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1)의 특성은 사실 탈식민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의 구별 자체가 일본 사학계의 관행에서 유래한 것이고, 한국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 역시 일본 학계에서 쓰는 용어들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능한 한 일본식 용어의 범람을 막아보고, 한국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역사용어를 한국사 안에서 발굴”하려고 노력했다는 편찬자들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노력은 좀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역사 용어의 확립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안적 역사상을 모색”[최갑수 외, 같은 글, 같은 곳]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3) 가장 중요한 점이겠지만, {역사용어사전}의 편찬 방식 및 체제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래 근대적인 사전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여기에서 사전은 주로 사전(事典), 또는 움베르토 에코의 구별법을 원용한다면, 자모사전dictionary이 아니라 백과사전encyclopedia을 가리킨다. Umberto Eco, Kant and the Platypus, Secker and Warburg, 1999; 움베르토 에코, {칸트와 오리너구리}, 박여성 옮김, 열린책들, 2009 참조.] 첫째, 관련 학계의 대표적인 권위자 중 한 사람이 전체적인 책임을 맡아 사전 편찬 작업을 지휘한다. 이 책임자는 또한 분야별로 적절한 전문가를 선택하여 그에게 부분적인 감수의 책임을 부여한다. 그리고 사전의 각 표제어의 집필자는 그 표제어와 관련된 학계의 권위자 또는 적어도 전공자가 맡는다. 아울러 사전의 권위와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검증과 교열의 과정을 거친다. 둘째, 근대적인 사전은 기본적으로 일국적인(또는 한 언어 내적인) 기획으로 고안되고 진행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거니와 그 이후 제작된 각 국의 여러 사전들, 예컨대 프랑스, 독일 등과 같은 서유럽 나라들의 여러 사전들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 성립 이후 제작된 소비에트 백과사전, 중화인민공화국 백과사전, 탈식민지 이후 인도에서 제작된 110권짜리 백과사전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이점에 관해서는 Mike Featherstone and Couze Venn, “Problematizing Global Knowledge and the New Encyclopaedia Project: An Introduction”, Theory, Culture & Society, Vol. 23, nos. 2~3, p. 7 이하 참조.] 따라서 사전 집필은 해당 국가 출신의 전문가들이 해당 국의 언어로 작성함으로써 이루어지며, 분야가 어떻든 그 사전은 해당 국가의 학문적 자립성 및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표 구실을 한다. 셋째, 따라서 근대적인 사전은 정의상 각각의 네이션을 독립적인 문화적 단위로 설정한다. 경험상으로는 다른 나라 및 문화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지만, 원칙적으로 각각의 네이션은 다른 네이션과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문화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백과사전을 비롯한 각각의 사전(事典)은 이러한 문화적 통일성을 각 분야의 수준에서 표현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따라서 다른 네이션 및 문화와의 교류 및 상호 영향은 이러한 선행하는 통일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간주된다. {역사용어사전}은 이러한 근대적인 사전 편찬의 원칙에 전형적으로 부합하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처럼 원칙적으로 전형적인 근대적 사전을 지향하고 있음에도, {역사용어사전}은 탈근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측면도 보여주고 있다. 또는 적어도 전형적인 근대적 측면을 넘어서거나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사전이 {민족대백과사전}이나 그 이전의 다른 한국사 사전과 달리 한국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역사학 전체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이 사전은 한국의 시각에서 동양사와 서양사를 포함한 역사 전체를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좁은 의미의 한국사의 시각 또는 민족주의 사관의 시각과 구별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전의 민족주의 사관이 (식민사관에 맞서) 한국사의 차원에서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의 경로와 법칙을 밝히려는 데 주력한 것이었다면, 이 사전은 한편으로 역사의 외연을 한국사 내지 민족사 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사의 범위로 확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내포적인 차원에서도 한국인의 시각에서 역사 전체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는 전망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학적 근대성의 핵심을 민족 사관 내지 내재적 발전론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 사전은 이미 그러한 근대성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이 사전이 비교사적 시각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 사전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동일한 표제어에 대하여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시각에서 각각 설명하는 내용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무정부주의에 관하여 동양사의 시각에서 설명한 “무정부주의”와 각각 서양사와 한국사의 시각에서 설명한 “아나키즘”(서) 및 “아나키즘”(한)을 제시한 것이나,[그런데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한), “아나키즘”(서)의 경우 anarchism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설명에 차이가 있고, 상충하는 대목도 존재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나키즘”(서)의 설명이 제일 정확하다.] “과거제”에 대한 설명에서 한국, 동양, 베트남의 경우를 비교한 것, “상속제”나 “역법”에 대한 설명에서 서양과 동양, 한국의 역사를 비교사적으로 배열한 것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농민봉기”나 “혁명”의 경우에는 동양사와 서양사에서의 논의를 독립적인 표제어로 제시하고 있고, “근대화”, “농업혁명”, “사회진화론” 등에서는 한국사와 서양사의 경우를 비교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독립적인 표제어로 배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특히 대표제어에 대한 설명에서는 서양사나 동양사 또는 한국사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세 개의 역사적 시각을 함께 포함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가령 대표제어인 “개화”에서는 중국, 일본, 조선의 상황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고, “관료제”나 “시대구분” 등도 서양과 동양, 조선(한국)의 경우를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해명하고 있다. 


  필자가 이를 탈근대적 측면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도가 역사를 이해하는 근대의 지배적인 관점, 곧 유럽중심적 역사학에 대한 탈구축의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식민주의 역사가들이 잘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 역사학은 서양, 특히 유럽을 중심에 두고 구성된 유럽중심적인 역사학이었다.[이점에 관해 필자는 다음 책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유럽을 지방화하기}, 김택현ㆍ안준범 옮김, 그린비, 2014. 이 책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토론은 역사학도만이 아니라 철학도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에서 유럽중심주의는 첫째,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이분법, 둘째, 단일한 보편사로서의 세계사, 셋째,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시각에 입각하면 근대는 단순히 여러 시대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전근대(경제적 전근대이든 아니면 정치적 또는 문화적 전근대이든 간에)가 넘어서야 할 규범적인 문턱으로 나타난다.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야 보편사(또는 보편적 문명사)로서의 세계사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세계사의 과정을 먼저 개시한 유럽의 모델을 따라 각자 경쟁적으로 근대화의 역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역사는 유럽이 보편적인 틀과 규범을 제시한 단일한 역사적 과정으로 제시된다. 반면 이 사전에서 채택하고 있는 비교사적인 전망은 이러한 유럽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복수적인 과정들이 상호 연계를 맺고 갈등하며 분화하는 복잡성과 다양성의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탈유럽중심주의적인 역사학을 위한 흥미로운 실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서두에서 필자가 이 사전이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점은 이 사전의 편찬자들 역시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최갑수 등이 발표한 논문에서 필자들은 “현재의 우리들 또한 역사적 변화의 끝자락에 있기에”[]라는 시대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 변화의 끝자락’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편찬자들과 다른 역사학자들, 그리고 필자 사이에 당연히 이런저런 의견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필자는 이것을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처럼 실증성을 중시하는 학문에서는 탈근대성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도 있을 테고, 특히 탈근대적 사전이라는 표현 자체를 어불성설이나 용어모순처럼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사전과 관련하여 탈근대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려는 것은, 개방성상호 연계성, 다수성이라는 개념이다. 필자가 볼 때 이 세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탈근대성은 이미 {역사용어사전}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사전이 한국 역사학의 범위를 좁은 의미의 한국사에서 동양사, 서양사를 아우르는 더 커다란 역사학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또한 인접 학문들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종합 학문으로서 역사학의 성격을 잘 드러낸 점도 평가할 수 있다. 같은 표제어의 경우에도 한국사와 동양사, 서양사 각각의 시각에 따라 집필하거나 동일한 표제어 내에서도 서양과 동양, 한국의 역사적 사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려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상호 연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다수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사전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이점에 관해서는 5절에서 후술하겠다. 따라서 필자가 말하는 탈근대적 사전 또는 사전의 탈근대성이라는 것은 기존의 다른 사전들이나 {역사용어사전}과 전혀 무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사전에서도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는 특색을 조금 더 진취적으로 살려보자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IV. 몇몇 표제어에 대한 비평


  표제어의 내용과 관련하여 필자가 가장 놀랍게 생각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라는 표제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대신 원고지 3매 분량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제시되어 있고, 대표제어 중 하나인 “사회주의” 내에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1830년대 이래 등장한 사회주의 사상 중의 하나였고, 20세기 실현된 사회주의 정치 체제는 사실은 “국가사회주의 체제”(885쪽)였으며, “1989년 동유럽 체제의 몰락으로 역사에서 그 힘을 잃었다”(884쪽)는 평가에 따른 편성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정치 체제로서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몰락했지만, 이념 또는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사회주의” 집필자의 의도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사전에는 마르크스주의라는 독립적인 표제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부재하는 표제어에 준거한다고 할 수 있는 다수의 표제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공산주의”(한), “공산주의”(동),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에르푸르트 강령”, “역사적 유물론”, “유럽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전시공산주의”, “코민테른”, “페레스트로이카”,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이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공산주의”, “소비에트”, “페레스트로이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중표제어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마르크스주의라는 부재하는 중심 없이 이 표제어들 간의 역사적 연관성이 이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사회주의”라는 표제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연관성일 것이고 아마도 “국가사회주의”나 “현실사회주의”로도 포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역사용어사전󰡕은 편찬자나 “사회주의” 집필자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의미에서 역사는 승리자들의 기록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듯 보인다.


  이 사전에는 메타역사적인 용어라고 할 만한 것이 두 개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대구분”과 “역사”라는 표제어가 그것이다. 이 두 표제어는 역사학 자체의 성격 및 그 존립 근거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항목들이다. 이러한 표제어들을 역사용어의 범주 내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역사학이 상당히 성숙해 있다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 밖의 다른 표제어들도 좀 더 포함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가령 이 사전에는 “근대화”라는 표제어는 존재하지만 “근대성”이라는 표제어는 빠져 있다. 하지만 동일한 어근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양자 사이에는 내용상의 상당한 차이가 존재할뿐더러, 앞서 지적했다시피 근대라는 것은 단순히 여러 시대 중 하나를 가리키기보다는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단일한 보편사라는 관념의 개념적(ㆍ이데올로기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메타역사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유럽중심적인 메타역사 개념일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근대성이라는 대표제어를 설정하고 그것을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시각에서 비교사적으로 설명해본다면, 이 세 가지 역사적 시각 사이의 갈등과 차이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고, 한국 역사학 내에서 유럽중심주의 및 그 대안에 관한 쟁점이 훨씬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면 근대를 단순히 여러 시대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유럽중심적 역사관을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 하나 내용과 관련하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표제어들의 내용 수준에 꽤 편차가 있다는 점이다. 특정 표제어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몇몇 표제어들의 내용은 과연 충분한 검토와 검증이 이루어졌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만큼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비문이나 오식이 눈에 띄는 곳도 더러 있었다. 반면 필자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근대국가”나 “대공황”, “대의제”, “봉건제”, “시대구분”, “제국주의”, “젠더”, “혁명”(서) 같은 표제어들은 내용도 풍부할뿐더러 집필 기준에 잘 부합하는 뛰어난 항목들이라고 보인다. 필자가 무지로 인해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다른 여러 표제어들, 특히 동양사와 관련한 표제어들 중에도 탁월한 성과들이 많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유토피아”라는 표제어의 경우에는 제목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본문에서 설명하듯이 ‘유토피아’라는 용어 자체가 16세기에 토머스 모어가 처음 만들어낸 말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서양의 각종 이상사회론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이상사회론까지 모두 포괄할 수 있는가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상사회” 같은 용어가 오히려 조금 더 중립적이고 포괄적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이나 “문화” 같은 항목의 경우도 유럽중심주의 비판이나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성찰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V. 몇 가지 제언


  끝으로 몇 가지 제안을 덧붙이면서 글을 맺기로 하겠다. 


  이 사전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종이사전의 한계 내에서 하이퍼텍스트성 충분히 구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선 이 사전에 전체 표제어들의 목차를 실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고 책 옆구리에 ‘ㄱ’에서 ‘ㅎ’까지 구별을 해놓았지만, 책 앞부분에 전체 목차를 제시했다면, 독자들이 이 사전에 어떤 표제어들이 수록되었는지 일람하기에 훨씬 편리했을 것이다. 아울러 각 표제어 마지막에 관련 표제어들을 함께 표시해놓았다면, 표제어들 간의 상호연관성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가령 이 사전에서 “여성사”와 “젠더”, “페미니즘”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지금의 편제 방식처럼 각 표제어가 서로 독립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이 사전에 여성과 관련된 어떤 표제어들이 존재하고 그것들 사이에 어떤 내용상의 연관성과 상위성(相違性)이 존재하는지 독자들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바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표제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들 각각의 내용 마지막에 연관된 표제어들을 표시해놓았다면, 전체적인 연관 관계를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표제어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해놓는다면, 사전에 대한 훨씬 다양한 독서를 가능하게 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전의 장단점을 더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전에서는 앞서 지적했듯이 다수성이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말하는 다수성이란 일차적으로 다수의 견해, 다수의 필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대표제어는 원고지 100매 이상이 되는 방대한 분량의 항목이며, 그것이 다루는 범위도 매우 포괄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포괄적인 외연을 가진 주제인 만큼 당연히 그 세부적인 논의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사전의 경우 어떤 특정한 입장을 택하기보다 가급적 중도적인 관점에서 주제와 관련된 주요 논쟁들을 소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사전의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런데 중도적인 관점을 취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중립적인 입장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가령 앞에서 지적했듯이 마르크스주의를 “사회주의”라는 대표제어 내의 하위 항목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한지, 또는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을 “민족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경우 한 사람의 필자에게 대표제어 전체의 집필을 맡기는 것보다 상이한 관점을 가진 두 명의 필자에게 집필을 맡기는 것은 어떨까? 또는 그것이 사전으로서는 너무 논쟁적인 해법이라면, 한 명의 필자가 대표제어의 주요 내용을 집필하되, 그와 상이한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종의 “보론”이나 “부록”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약 50여 년 전에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1967)라는 저작에서 장-자크 루소의 저작에 대한 탈구축적인 독서를 바탕으로 ‘보충’(supplément)[사실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대리보충”이나 “대체보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라는 아주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 바 있는데, 데리다의 원래 논조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표제어에 보론이나 부록을 덧붙임으로써 단일 필자가 집필하는 경우에 얻을 수 없는 논의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획득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들이 존재하는데, 가령 200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유럽철학어휘사전󰡕의 경우가 그렇다. 이 사전은 여러 모로 혁신적인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Barbara Cassin ed., Vocabulaire européen des philosophies, Seuil/Le Robert, 2004.] 우선 이 사전은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네이션이라는 문화적 단위에 기반을 둔 사전이 아니라, 포스트네이션(post-nation) 내지 트랜스네이션(trans-nation)으로서의 ‘유럽’이라는 단위에 기반을 둔 사전이다. 더욱이 이 사전은 “번역 불가능한 것들의 사전”(dictionnaire des intraduisibles)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의 사전들과 달리 “번역 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사전이다. 여기서 번역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은 사실은 탁월한 역사적 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전에서 번역 불가능한 것들이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또는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통과 혼란, 단절과 전환, 쇄신과 발명의 측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어 “Âme”라는 개념의 경우 보통의 철학사전은 이 개념에 관해, 그리스어의 “프쉬케psykhē”(또는 “누스nous”)에서 유래하고 라틴어의 “아니마anima”나 “멘스mens”를 거쳐 오늘날의 “암므âme”나 “가이스트Geist”, “마인드mind”에 이르게 된 경로를, 대표적인 철학자들(가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등)의 몇몇 저작들의 발췌문들을 검토하면서 제시해준다. 그리고 우리말로는 간단하게 “정신”이나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반면 이 사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고전 로마 시대, 중세 스콜라 시대를 거쳐 근대 초기 유럽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이 여러 단어들이 모두 동일한 지시체를 가리킨다는 전제, 따라서 이 용어들이 모두 선행적인 개념적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포기하고, 그 대신 그리스어 프쉬케에서 라틴어 아니마와 멘스로 번역이 될 때, 그리고 라틴어가 근대 초기에 암므나 가이스트, 마인드로 번역이 될 때 어떻게 정신이나 마음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달라지는지, 따라서 각각의 시대마다 어떻게 각자의 고유한 마음과 정신을 발명해내는지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수많은 단어들 사이에는 연속성만이 아니라 불연속성, 번역 불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프랑스어 “âme”나 독일어 “Geist”, 영어의 “mind” 또는 우리말의 “정신”이나 “마음”이 지닌 역사성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전의 또 다른 혁신적인 면모는 이러한 번역 불가능성, 개념의 다의성에 충실하기 위해 하나의 표제어를 설명하는 데 적어도 2~3명, 때로는 그 이상의 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주체”(sujet)라는 표제어의 경우 고대철학 전문가인 바르바라 카생(Barbara Cassin)과 중세철학의 대가인 알랭 드 리베라(Alain de Libera), 대표적인 현대 프랑스철학자 중 한 사람인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공동 집필을 하고, 여기에 더하여 또 다른 고대철학 전문가와 근대 초기 철학 전문가가 일종의 “보론”들을 덧붙이고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보통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와 헤겔 같은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완성되었다고 간주되어온 주체 개념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며, 이는 서양 근대철학 전체를 새롭게 조명해주는 놀라운 탈구축 효과를 산출한다. 이런 혁신적인 면모 덕분에 이 사전은 철학사전으로서는 드물게도 영어와 아랍어로 번역이 됐다.[Barbara Cassin ed., Dictionary of Untranslatables: A Philosophical Lexicon, trans., Emily Apter et al.,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참조. 영역본에는 영어권 필자들이 추가한 항목들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역사학과 철학이 다르고 프랑스와 한국의 지적 상황 역시 다르기 때문에 이 사전이 무조건적인 기준이나 모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사전에 대해 갖고 있는 근대적인 통념을 탈구축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흔히 탈근대적 사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위키피디아를 꼽지만, 위키피디아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사전의 분류 방식 및 체제에서는 전형적인 근대적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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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지방화하기 -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프리즘 총서 15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음, 김택현.안준범 옮김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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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트의 [유럽을 지방화하기]가 "프리즘 총서"  15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마이페이퍼"에서 소개할까 했는데, 마침 한국일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요청해서

 

한국일보 서평 원고로 이 책의 소개를 대신하겠습니다.

 

중요한 문제의식과 독창적인 개념화, 빼어난 문체 등이 어우러진 차크라바르티의 걸작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히고 논의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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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초판이 출간된 인도 출신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아직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단언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미 고전이 되어가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미 10여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많은 서평과 논평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이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럽 대륙 내부에서 유럽을 탈식민주의의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간된지 불과 15년만에 이 책이 이처럼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1980년대 초 일군의 인도 역사가들이 시작한 서발턴 연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라나지트 구하를 비롯한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발턴 역사학이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더욱이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려는 새롭고도 급진적인 역사학 기획이었다.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 스피박의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등이 바로 이러한 기획을 대표하는 저작이며, 차크라바르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유럽을 지방화하기] 역시 서발턴 역사학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책의 제목이 “유럽을 지방화하기”일까? 유럽을 지방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여기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역사주의’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주의를 “모든 연구 대상은 그것이 실존하는 내내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세속적, 역사적 시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역사에 관한 사유 양식”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세계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패턴에 따라 발전해왔고 또 계속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구조다. 곧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먼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서구 내지 유럽은 세계의 모든 문명이 뒤따라야 할 표준적인 모델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차크라바르티에 따르면 유럽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해준 것이 바로 역사주의였으며, 식민지 체계가 종식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사유 방식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역사에는 단일한 발전과정이 존재하며, 각 나라 및 문명은 이 과정에서 얼마나 앞서 있고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에 따라 그 수준의 정도가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을 해체하려는 것이 바로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을 새로운 보편을 세우자거나 보편을 다수화하자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유럽식 보편주의는 한물 갔으니 이제 아시아적 보편을 세울 때가 되었다, 이제 세계의 패권은 아시아로 넘어왔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유럽식 역사주의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할뿐더러, 헌팅턴 식의 문명충돌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유럽의 사상 및 문명 전체를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차크라바르티가 유럽을 지방화하기 위해 주로 의지하는 사상적 원천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및 푸코 같은 유럽의 사상가들이다. 중요한 것은 단일한 역사 발전 과정을 가정하는 관점을 해체하고, 각각의 문화, 각각의 나라, 각각의 지역에 고유한 역사적 삶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역사주의는 우리의 삶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정희 시절에는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로 나타났고, 지금은 선진국 따라잡기라는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획일화된 도식이 얼마나 사람들의 삶을, 특히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 몫 없는 이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발턴들의 독특한 삶의 역사들에 기반을 둔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테면 탈중심적 보편성, 해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화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고전 저작들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독일철학자들과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들까지 두루 꿰고 있는 데다가, 인도의 역사와 사회, 문학 등에 관한 폭넓은 사료들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서와의 대조 없이 술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두 번역자의 빼어난 능력과 힘겨운 노력 덕분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기획을 어떻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해보고 또 각자 답변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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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2014-10-0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갈 길이 머네요~~~
 
육화, 살의 철학 뉴아카이브 총서 8
미셸 앙리 지음, 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미셸 앙리라는 현상학자의 저서에 관한 서평입니다.

 

이 글 역시 아직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토론은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린 글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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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앙리(1922~2002)는 프랑스 현상학의 최후의 대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에서 시작되고 마르틴 하이데거와 막스 셸러 등을 통해 활력을 얻은 ‘현상학 운동’은, 하버마스가 지적한 것처럼(󰡔탈형이상학적 사유󰡕), 그 이후 오히려 프랑스에서 독창적인 계승자를 얻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적 현상학,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현상학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적인 현상학 운동의 모습들이라면, 미셸 앙리는 프랑스 현상학이 여전히 창조적 쇄신의 능력을 잃지 않았음을 입증해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앙리의 저작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었으며, 독일이나 미국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앙리의 저작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고, 앙리에 관한 연구서나 논문집도 여러 권 나와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다소 늦기는 했지만, 󰡔물질 현상학󰡕과 󰡔육화, 살의 철학󰡕의 번역을 계기로 국내에도 이 독창적인 현상학자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은 앙리의 저작 중 말년에 속하는 책이다. 󰡔현시의 본질󰡕(1963)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앙리는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1965), 󰡔물질 현상학󰡕(1990) 같은 현상학적인 저작 이외에도, 󰡔마르크스󰡕(1976)나 󰡔정신분석의 계보학󰡕(1985), 󰡔내가 진리다: 기독 철학을 위하여󰡕(1996) 같은 저서를 통해 고유한 의미의 현상학적인 철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철학, 정신분석 및 기독교 신학의 영역까지 자신의 사유를 확장해갔다. 따라서 󰡔육화, 살의 철학󰡕은 국내의 독자들이 앙리의 원숙한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2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상학의 전복”이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는 살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밝히고 있다. 2부인 “살의 현상학”에서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근대 과학을 개시한 갈릴레이적 환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신체(corps)와 구별되는 살(chair)의 개념에서 찾고 있다. 마지막 3부인 “육화의 현상학-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에서는 살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구원 개념에 대하여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육화’라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이루는 육화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살이라는 앙리의 현상학적 개념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또한 근본적으로 현상학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대담한 철학적 도전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현상학을 통해 현상학을 넘어서기. 둘째, 육화라는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심오한 철학적 통찰로 이해하기.

 

자신의 도전을 정당화하고 완수하기 위해 앙리는 우선 신체와 살의 구별에서 논의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신체가 “길가의 돌멩이” 같은 우주의 타성적 물체 등을 가리킨다면, 살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13쪽)를 뜻한다. 우리의 살은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13~14쪽)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별은 매우 현상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현상학을 전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적인 이유는, 이러한 구별이 신체에 대한 살의 우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앙리의 구별은 후설 이래로 다른 현상학자들이 전제하듯이 초월론적인 것으로서의 주관에 근거하여 객관적 질서, 과학적 질서의 가능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앙리에게 이러한 주관의 핵심은 의식이나 현존재, 심지어 무의식이나 신체도 아니고 “살”이다. 이러한 살의 개념은 “철학자들에 의해 전혀 성찰되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한 진술에 의하면 사유는 삶의 양태”(175쪽)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앙리가 시도하는 현상학적 전복 또는 전회에 의하면 “더 이상 우리에게 살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며 반대로 사유가 자기에 접근하는 것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것을, 그리고 결국 사유가 매번 자기인 바의 것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삶, 즉 cogitatio의 자기-계시이다.”(174쪽)

 

이러한 입장에 기초하여 앙리는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구별에 입각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두 사람의 한계는 나타남을 “세계의 나타남”으로, 곧 탈-자(ek-stase)의 가시화의 순수 지평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무관심한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앙리는 후설이나 하이데거가 묻지 않은 “인상 그 자체의 나타남”(96쪽), 즉 “인상의 기원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러한 기원을 “고통의 자기-촉발(auto-affection)”(116쪽)에서 찾는다. 이러한 ‘고통을 느낌’은 후설의 이른바 ‘수동적 종합’에 선행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바로 “삶의 자기 안에의 도래”가 성립하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자기와의 차이남이 없이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본래적이고 순수한 “정감성(affectivité)”(121쪽)으로서의 이러한 자기를 느끼고 견딤에서 “절대적인 삶의 자기-증여 과정”(182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전복은 두번째 도전으로서 육화의 계시에 대한 재해석과 연결된다. 이러한 재해석은 사도 요한의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진술 및 “말씀이 살이 되었다”(16쪽)는 진술의 수수께끼에서 출발하여, “신의 인간-됨, 말씀의 살-됨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누군가는 가능하며 최소한 생각될 수 있는가?”(34쪽)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앙리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의 가상들이 부딪히게 되는 한계로서 “절대적인 무-능”, “모든 힘보다 오래된, 그것에 내재하는 무-능에 대한 결정적인 직관”(327쪽)에서 출발하여 진정한 자유를 “정념적인/수난적인 소여”(345쪽)로서의 살의 경험에서 발견한다. 이때 “창조는 더 이상 자기 밖에 외적인, 분리된 실존의 이름으로, 그 자체 자율적인 것으로 향유하는 한 실체(entité)의 정립을 의미하지 않는다.”(345쪽) 오히려 창조는 “절대적인 삶의 자기-생성 안에서, 그것의 그치지 않는 도래 안에서만 자기에 도래하는 것의 생성을 의미한다.”(346쪽) 이렇게 “창조의 개념을 생성의 개념으로 대체”(426쪽)하면서 앙리는 삶에 대한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수동성을 의미하는, 따라서 모든 초월성이 배제된 수동성을 뜻하는 “초월론적 정감성”(427쪽)을 “우리의 초월론적인 탄생, [신의-인용자 추가] 자식으로서 우리의 조건”(428쪽)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앙리에 따르면 “모든 초월론적인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이 삶의 자기-계시를 가리키는 것”(482쪽)이 바로 말씀의 육화이다.

 

3

 

앙리의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책은 500쪽이라는 책의 분량이 적게 느껴질 만큼 아주 조밀하고 응축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무언가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독자들이 받게 된다면, 그것은 (프랑스 현상학 특유의 강점이지만) 앙리가 욕망과 사랑, 불안, 고통, 부조리에 대한 감정 같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앙리의 치밀하고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자는, 번역서 옆에 놓아둔 불어 원서를 거의 들춰보지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꼼꼼하면서도 유려한 우리말로 잘 번역이 되어 있다. 역자의 값진 노고 덕분에 독자들은 프랑스식 현상학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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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 철학의 정원 8
문성원 지음 / 그린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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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내는 [코기토]라는 학술지에 수록될 서평입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이니까, 이 글에 대해 논평하거나 토론할 분은

[코기토]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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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

 

 

문성원 교수(이하 필자로 약칭)는 사회철학 전공자나 프랑스철학 전공자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루이 알튀세르에 관한 학위논문({철학의 시추}, 백의, 1999)에서 {배제의 배제와 환대}(동녘, 2010)를 거쳐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줄곧 현대 프랑스 철학과 사회철학이 만나는 자리에서 사고하고 글을 써왔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에 입각한 사회철학이 필자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필자의 이러한 지향이 좀더 뚜렷이,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필자의 애정과 관심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타자와 책임”이라는 주제 아래 5편의 논문을 싣고 있으며, 로컬리티, 주변, 책임, 이웃, 윤리의 문제에서 타자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2부는 “새로움과 윤리”라는 제목에 따라 4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용서라는 문제와, “잘 있음”을 넘어서는 “있음과 달리”로서의 윤리의 문제, 시간과 새로움이 함축하는 윤리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의 핵심적인 철학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는 곳은 바로 2부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표현과 욕망”이라는 표제 아래 이미지, 차이, 욕망과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요 주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진리와 정의”라는 제목 아래 좀더 거시적인 사회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4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의 이전 저작들의 문제의식과 좀더 맞닿아 있는 반면에, 1부와 2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가 좀더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질서에 대하여 프랑스 철학, 특히 레비나스의 사상이 어떤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7쪽)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러한 화두와 관련하여 이 책은 들뢰즈(ㆍ가타리)냐 레비나스냐라는 대결 구도를 논의의 줄기로 삼고 있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해체론적인 사상, 곧 “유동성과 끊임없이 ‘차이지는 차이’가 근본적임을 입증하는 것이 이들의 지향이며, 짐짓 고정되어 보이는 영토와 체계를 부단한 탈영토화의 운동을 통해 흔들어 놓는 것이 이들의 추구하는 바”(103쪽)인 반면, 레비나스는 “변화를 수용하는 열림의 자세와 아울러 그러한 변화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109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이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고 희구하는” 사상인 반면(필자에 따르면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역시 “어떤 정해진 해결책이나 정의의 상태가 아니라 약속의 이루어짐에 대한 기다림”(160쪽)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궁여지책”(161쪽)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나타내는 타자 개념과 더불어 그 새로움의 해악을 막는 윤리라는 기준을 제시해준다는 것이 이러한 대결 구도가 함축하고 있는 논점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질서”(109쪽)는 때로는 주변-중심의 관계로 표현되기도 하고, 의사들의 파업 사태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거래 관계에 지나지 않”는 “호혜성의 문제”(59쪽)로 이해되기도 하고, 다위니즘에 기반을 둔 경쟁 이데올로기로 나타나기도 하며, 나르시시즘적인 욕망(3부 3장)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를 넘어서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윤리 개념은, 필자에 따르면 대단히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런저런 기회에 필자의 글을 접해온 평자에게 이 책은 필자의 지적인 미덕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현실에 기반을 두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려는 필자의 지속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철학자가 한국의 현실에 입각하여 사유하고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글을 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실제로 이렇게 한국이라는 레퍼런스에 뿌리를 두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철학자, 특히 프랑스 철학 전공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한국의 철학, 한국의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보다는 그 철학적 고향들인 독일, 미국, 프랑스에 있으며, 그 고향들을 자신들의 레퍼런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들의 삶을 레퍼런스로 삶기에는 그들의 사유가 아직 허약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필자의 일관된 철학적 태도는 매우 드물고 값진 것이라 할 만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명확하면서 유려한 글쓰기를 꼽을 수 있다. 이점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이러저러한 철학적인 주제에 관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필자 자신의 선명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면서 정확히 논의를 전개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글과 같이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철학적인 글은 설렁설렁 되는 대로 쓰이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을 거쳐 숙달된 문체의 힘과 더불어 일관되고 깊은 문제의식이 곁들여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젊은 철학도나 인문학도에게 교과서와 같은 모범이 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평자가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나 불만, 또는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자는 줄곧 불만이나 의문을 품으면서 이 책을 읽었고, 그것은 서평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필자의 논의가 다소 개략적이라는 점이 불만스럽다. 필자는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알튀세르, 바디우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로티, 월저, 롤즈 같은 독일과 영미 철학자들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 이들 철학자들 가운데 레비나스에 관해서만 비교적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뿐,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는 개략적인 인용과 논의 이외에는 깊이 있는 분석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필자 자신이 서두에서 지적하듯(8쪽),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개념과 이론을 빌려와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고해보려는 필자의 지적 관심에서 비롯한 결과일 수도 있다. 곧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부딪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론 자체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면밀하고 심도 있게 검토되고 설득력 있는 해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물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썩 훌륭한 결과가 산출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다. “해체와 윤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철학적 기반은 레비나스 철학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필자는 레비나스의 철학적ㆍ윤리적 의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욕망에 휘둘리는 현실 속에서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7쪽) 있으며, 로컬리티의 문제나 분단의 문제(1부 1장)에서도, 의약분업과 관련된 의사 파업의 문제에서도(1부 3장), 경쟁 이데올로기 극복의 과제에서도(1부 4장), 웰빙의 문제(2부 3장)에서도 레비나스는 우리가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철학적ㆍ윤리적 보고로 제시된다. 따라서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적 위력을 그처럼 높게 평가하고 있는 만큼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평자가 보기에 이 책에는 잘 알려져 있는 레비나스 사상의 이런저런 개념들(타자 내지 타인, 전체, 무한, 향유, 거주 등)에 관한,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이런저런 내용만 제시되고 있을 뿐, 레비나스에 관한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무언가 새롭거나 독창적인 분석이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평자로서는 레비나스를 그처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필자의 태도가 다소 놀랍다.

 

아마도 필자에게 레비나스 철학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이나 아니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인 준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에 비견될 수 있는, 아니 그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초월(론) 철학, 곧 타자에 입각한 초월(론) 철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그것을 초월론적 주관성에 입각한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상호주관성의 철학도 넘어서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에 입각해 있고, 타자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매우 새로운 초월(론) 철학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이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실제로 논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필자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호혜성에 입각한 서양 근대의 철학이나 현재의 삶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해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가 “나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일뿐더러,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무한하”(115쪽)다고 말하고, “레비나스의 독특성과 무한은 ... 초월과 직결”(120쪽)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레비나스 철학에서 종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그것은 “윤리적 초월”(120쪽)이라고 역설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리적 초월과 종교적 초월 사이에 그처럼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가? 유일자인 신과의 관계가 구체적인 이웃들, 이웃에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로 번역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초월성의 관계가 사라질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타자와 관련하여 그 닿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초월성을 강조하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일상화하고 구체화할수록 그 초월성은 더 강화되는 것이 아닐까?

 

평자가 보기에 필자가 제시하는 레비나스는 신과의 초월적 관계를 새로운 휴머니즘과 도덕주의로 번역하고 싶어 하는 철학자,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특이한 점은 이웃을 사랑하되, 우선 나 자신과 내 가족을 돌본 뒤에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나 자신 및 내 가족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도 아니라, 나와 내 가족에 앞서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자아에 앞서야 하는 사랑이고, 동일성 중심적인 질서, 호혜적 관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책임의 모습을 띤 사랑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말하자면 테레사 수녀 같은 이에게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또는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피난의 장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필자가 레비나스 철학이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훨씬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자의 논의와 주장이 때로는 상당히 막연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논의 자체의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우도 눈에 띈다. 가령 필자는 4장 1절에서 다위니즘을 “반목적론의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형태”(77쪽)라고 말하면서, 의도적 목적을 내세우지 않고도 유기적 조직과 기능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점을 다위니즘의 장점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다위니즘이 “살아남음”에 초점을 두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음에 대하여 “사태를 지배하고 제어하는 원리의 자격”(79쪽)을 부여함에 따라, 오늘날 사회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필자가 다위니즘으로 지칭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윈 사상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종류의 생물학 이론을 가리키는가? 또는 그 중에서 특정한 일부, 특히 사회생물학이나 유전자 결정론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에 대한 통속화된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가? 필자가 막연하게 다위니즘이라고 지칭하는 것만으로는 과연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우 필자의 주장은 다윈 사상 전체 및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생물학의 흐름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윈주의 생물학은 무용한 학문인가? 또는 적어도 다윈주의 생물학 자체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인가? 따라서 경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윈주의 생물학은 모두 배격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레비나스 철학은 다윈주의 생물학 전체와 대립하는 철학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지만, 과연 필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들뢰즈ㆍ가타리의 철학이 후기-자본주의의 특징적 면모들과 부합하는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98쪽)거나 “들뢰즈ㆍ가타리의 사회철학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비역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99쪽)라는 주장, 또는 데리다가 “이전에는 치열하게 비판했던 레비나스의 타자를 ‘환대’하게”(258쪽)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대담한 주장인데도, 필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ㆍ가타리에 관한 주장에 대해서는 주로 지젝이 후원자로 등장하지만, 지젝의 논의가 타당한 근거를 지닌 것인지는 검토되지 않으며, 데리다에 관해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필자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흔히 ‘2차 문헌’이라고 하는 문헌들에 대한 검토나 논의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레비나스나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등에 관한 논의에서 언급되는 ‘2차 문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필자의 주장이 기대한 만큼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을까? 어떤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텍스트일수록, 그것이 남긴 흔적들, 또 그 텍스트 자체가 흔적을 이루는 그 이전의 흔적들과 분리될 수 없다. 그 흔적들의 연관망과 분리되면, 그 텍스트는 아주 빈곤한 것이 되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흔히 ‘원전’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초월적인 타자, 찬미와 경배의 대상인 타자가 될 뿐, 분석과 해체, 산종(散種)의 텍스트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2차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은 그러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노력의 다른 표현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은,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이 아직 충분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텍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의 이면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다음 번 책에서는 타자(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텍스트들의 해체와 산종의 움직임 속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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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를 읽기 위해서는 레비나스를 읽을 필요가 있죠.

레비나스를 읽다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헛소리에 사로잡혀 있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깨려고 노력해야죠.

그렇다고 해도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또 다르죠.
 
백색신화 -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 경성대문화총서 25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6월 2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 하나 올립니다.

경향신문 서평은 이것이 마지막 서평입니다.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워낙 밀린 일들이 많다 보니

도저히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이번 서평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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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영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영미 비평계에서는 잘 알려진 이론가다. 그는 특히 데리다, 알튀세르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철학에 깊은 조예를 지닌 탈식민주의 비평가로 명망을 떨치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이 오늘 소개할 [백색신화](1990)다. 20여 년 전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이 책의 원서를 복사해놓고, 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 계속 미뤄두고 있다가 반갑게도 몇 년 전에 번역이 되어 재미있게 읽은 뒤 독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서 서평을 쓰게 되었다.

 

국역본은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영어 원서의 부제는 Writing History and the West다. “역사의 서술과 서양”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이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전달해준다. 그리고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가 하나의 단일한 역사적 시간의 산물이라면, 그 순간은 1968년 5월이 아니라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될 것이다”라는 이 책 초판의 첫 문장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하려는 저자의 지적ㆍ정치적 관심을 잘 표현해준다.

 

지난 1990년대 이후 국내에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이른바 ‘포스트 담론’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이제는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빼놓기 힘든 지적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 수용될 때만큼 격렬하지는 않다고 해도 포스트 담론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진보 지식인들에게 포스트 담론은 여전히 경원과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포스트 담론이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에 기여하고 그것을 대체한 가짜 진보 담론,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국내의 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판단과 거부감이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 해도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단순히 경원하고 거부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관계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의 원인 중 하나는 그것에 고유한 이론적 난점과 맹목에 있으며, 포스트 담론은 그러한 맹목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로버트 영이 화두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볼셰비키적인 보편성은 어떻게 번역 불가능한 것들과 지금까지 무시당해온 특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가?”(26쪽)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로버트 영은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르라는 마르크스주의 최후의 이론가들의 난점에서 출발해서 미셸 푸코, 에드워드 사이드를 거쳐 프레드릭 제임슨 및 호비 바바와 가야트리 스피박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의 서양의 역사이론과 탈식민주의 비평의 문제적인 역사를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다. [백색신화]를 읽고 나면 20세기 후반의 진보 사상의 역사가 새롭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너무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보다 10여년 뒤에 출간된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백색신화]가 매우 논쟁적인 일종의 사상사 책이라면, 후자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식민주의에 이르는 사상의 경로를 20세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필독서라고 할 만하다.

 

어려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을 역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이 책은 여러 이론가를 다루고 있고 그들의 사상이 매우 집약적으로 농축돼 있어서 번역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책이다. 모두 등재지 논문 쓰는 데만 힘을 쏟는 상황에서 이런 책을 붙잡고 오랜 시간 동안 씨름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와 책임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여러 대목에서 오역들이 눈에 띄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역본을 낼 때 이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면, 이 중요한 책이 훨씬 더 큰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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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6-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은 다른 사람이 번역해도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역사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헤겔의 영향력이 가공할만한 수준이라는 것도 동시에 보여준다.

그 역사주의가 바로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식민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혹은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주의를 제거하고 자본주의적 근대 및 유럽중심주의적인 근대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트리컨티넨탈 마르크스주의"를 만들려는 게 로버트 영이 주장하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10년 뒤의 책에 술탄-갈리에프나 문화적 혼종(잡종)으로 식민주의에 저항한 마리아떼기까지 얘기하는 것이다. 마오 쩌둥을 너무 긍정적으로 서술한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헤겔로 대표되는 역사주의로부터(랑케도 포함된다)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다면 아마도 미래의 세계는 크게 바뀔 것이다.

역사주의를 배우는 것을 배우지 말기.


여담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미셸 푸코를 "국사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견상 역사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를 다룬 철학책이라고 생각한다.

광기의 역사 영문판 번역 서문을 읽으면 푸코가 식민주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란혁명에 대해 "오바"했던 해프닝도 일어난 게 아닐까? 푸코 사진을 자세히 보면 솔직히 미친 사람 같아 보인다. 눈에 광기가 어려 있다.

구조주의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나는 언어학자 소쉬르도 구조주의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영국의 경험주의나 대륙의 합리주의가 둘 다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라고 생각하지만 위대하신 분들이 소쉬르를 그렇게 가르치고 경험주의나 합리주의를 그렇게 가르치니 난들 어쩌겠는가?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은 decoionization 및 decolonialism 과 postcolonialism을 어떻게 번역할지 가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