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격동 : 1 인정과 욕망 / 2 연민 / 3 사랑의 등정 (전3권)
마사 누스바움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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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함께 살펴보지 않고서는 내용을 충실히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본. 번역본만 읽으면 논지가 대충은 이해되지만, 논변의 섬세한 흐름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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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 후마니타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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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금요일치 한겨레신문에 실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평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번째 번역되는 셈인데,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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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위하여>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루이 알튀세르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자크 라캉의 <에크리>,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현대 프랑스 사상의 걸작이다. 이번이 3번째 번역인데, 지난 두 차례의 번역본보다 더 정확하고 가독성도 좋아서 알튀세르를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1965년 처음 간행되자마자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알튀세르가 같은 해에 그의 제자들과 공저로 출간한 <자본을 읽자>와 더불어 프랑스 사상계를 뒤흔들고 곧바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학계, 그리고 저 멀리 라틴아메리카에도 급속히 번역소개되어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는다. 이는 특히 이 책의 세 가지 핵심 논점 덕분이었다.


첫째, 청년 마르크스와 성숙한 마르크스 사이에는 엄밀한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시된다. 당시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래 불어닥친 반()스탈린주의의 흐름 속에서 초기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청년 마르크스는 아직 자신의 이론적 핵심을 발견하지 못한 채 헤겔과 포이어바흐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인 생산양식,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을 발견하게 되며, <자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하지만 알튀세르는 <자본>의 마르크스 역시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이러한 이론적 미완성과 공백은 현실 정치의 실천적인 오류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가 되며, 무엇보다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독창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기에서 저 유명한 과잉결정 개념이 도출된다. 생산양식과 생산관계 사이의 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경제적 모순은 역사의 동력을 이루는 기본 모순이지만, 이러한 모순은 늘 상부구조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의해 과잉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혁을 위해서는, 레닌이나 마오가 했듯이 경제적 모순과 상부구조의 모순,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집적된 약한 고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셋째, 하지만 더 나아가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며, 심지어 공산주의 사회에도 이데올로기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나 기만, 조작된 표상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세계 자체, 상상적 관계 그 자체를 뜻한다. 간단히 말하면 개개인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계급이나 국민, 민족 같은 집단의 정체성 역시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며, 우리는 그러한 정체성을 살아간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핵심 기능은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지배가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면서 또한 역설적이게도 해방 투쟁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우리는 반공주의에 의해, 민족주의에 의해, 신자유주의적 경쟁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지만, 또한 주권자로서의 국민으로 호명되며, 갑질에 고통받고 분노하는 을들로서도, 여성 혐오에 맞서는 메갈리안으로서도 호명된다.


1980년 알튀세르가 부인을 목졸라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유폐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는 영원히 망각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같이 그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던 제자들에 의해, 또한 미국 학계의 슬라보예 지젝이나 주디스 버틀러 등에 의해 알튀세르는 21세기 사상의 젖줄임이 입증되었다.


실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예속적 주체화 메커니즘에 맞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알튀세르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상가는 보기드물다. ‘을의 민주주의를 위해 알튀세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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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um21 2017-01-1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질문이라 죄송합니다만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읽으려는데 2004년 김웅권님 판과 2010 김성도님 판 중 어떤 책을 봐야 할까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메일로도 글을 올렸으니 그리 답변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그럼..

balmas 2017-01-14 17:12   좋아요 1 | URL
두 번역서 모두 번역에 문제가 많아서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읽으려면 불어 원서나 영역본 등을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geum21 2017-01-14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귀찮으시겠지만 메일 좀 봐주세요 ^^
 
복지의 배신
송제숙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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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린 촌평입니다. 이 글에 대한 논평이나 토론 역시 


[창작과비평]에 수록된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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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2003년 일리노이주립대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해서 2009년 듀크대출판부에서 영어로 출판한 저작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의 주제는 1997IMF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사회가 겪게 된 변화를 ‘()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는 관점 아래 서술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복지의 배신이라는 책 제목은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1997IMF외환위기가 한국사회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사상 유례없는 대량 해고와 사회경제적 혼란을 초래한 국가적비극이었다.”(28) 둘째, 그런데 IMF위기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99712월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이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을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김대중 대통령이 IMF외환위기를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IMF 및 국제금융세력의 압력과 조언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의해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김대중정권은 역사상 전례없이 이루어진 대량 해고를 합법화하고, ‘정보사회생산적 복지의 기치 아래 대한민국을 더 유연하고 자본 친화적인 탈개발국가로 이행”(62)하게 하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김대중정권을 통해 한국 최초의 보편적 복지국가”(6) 또는 대한민국에 최초로 성립된 복지국가”(256)가 등장했지만, 그것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민주화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정이 자본주의 시장의 확장과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을 정당화시킨 과정”(83)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착근시킨 주체에 민주화투쟁의 주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에는 과거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사람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자유주의적 사회 통치의 대리인으로 변모했다는 분명한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32) 그리고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지식인들의 딜레마는 단지 한국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자유주의적 사회에 적용”(52)되는 것이다.


저자는 1998~2001년까지 약 29개월 동안 진행한 현장조사에 입각하여 이러한 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특히 노숙인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를 구체적인 소재로 삼아 자신의 기본적인 주장을 입증하려고 한다. 노숙인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자활 가능한 일시적 노숙자와 장기적 노숙자를 선별하여 전자만을 집중 지원한 것을 문제 삼으며(2), 또한 여성 노숙자의 존재 자체를 집요하게 부인하는 정책 담당자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남성중심적·가부장제적 복지정책의 편견을 지적한다(4). 또한 5장에서는 “‘자기 관리가 가능한주체 및 자기의 기업화가 가능한주체로서의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사회적 통치를 분석한다.


이 책이 번역되기 전부터 이 책의 평판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읽고 상당히 실망감을 느꼈다. 우선 김대중 정권의 개혁 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오히려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주장이다.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점은 이 책의 이러한 거시적인 이론적 주장이 설득력있는 자료나 구체적 논거를 통해 충실히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분석은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을 입증하기에는 너무 단조롭고 단편적이다. 우선 노숙자와 청년 실업자에 대한 대책이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을 대표할 수 있는 사례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노숙자를 자활 가능한 노숙자와 그렇지 못한 노숙자로 구별했다는 것, 그리고 여성 노숙자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했다는 것은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이 상당히 미흡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저자의 분석 중에 좀더 설득력이 있고 구체성을 띠고 있는 것은 청년실업에 관한 논의이다. 저자는 서울시 청년실업대책위원회에 고용된 모니터링 팀 소속 젊은이들의 경험에 입각하여 신지식인닷컴기업’, ‘정보사회에 관한 담론이 청년실업 및 그 대책에 관한 정책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내준다.


이 책에서 제일 실망스러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푸꼬(M. Foucault)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꽤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내가 역설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저자 자신이 내가 한국 당시의 사회 통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택한 주요 프레임의 하나인 푸꼬의 통치성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좀더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18)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이해하는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푸꼬 작업에 입각했다고 자처하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과연 무엇인지 의아했다. 과연 푸꼬에 대한 직접적인 독서경험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저자의 푸꼬에 대한 인식이 매우 허술해보였다.


가령 저자는 푸꼬의 통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책은 푸꼬의 이론에 의거해 ...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국가 행정제도로서의 정부의 개념과 달리, ‘통치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주체 형성을 통해 인구 전체를 관리하는 자유주의적 정치권력의 작동방식을 ‘government’ 또는 ‘governing’으로 명명한다.”(34) 이 인용문에서 놀라운 점은 통치에 관한 정의가 별로 푸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령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주체 형성을 하지 않고 인구 관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저자의 통치에 대한 정의는 너무 막연하고 허술하다. 푸꼬 자신은 통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기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163)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푸꼬적인 통치 개념에 입각하여 신자유주의를 분석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 민주화 세력이었던 김대중정권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집행자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이든 신자유주의이든 자본주의 통치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푸꼬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맑스주의적인 관점이며, 더욱이 꽤나 고전적인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교조적인 맑스주의적 관점이다. 반면 푸꼬는 고전 자유주의가 자연적 소여로서의 교환에 근거를 둔 반면 신자유주의는 인위적 관계로서의 경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결혼과 범죄, 아이 양육 등에 이르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부문을 경제적 관계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모든 개인이 기업가, 자기 자신의 기업가”([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2, 319)로 간주되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은 푸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푸꼬와 상당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점이다.


다음 대목을 보자. “신자유주의 국가가 잉여 인구를 비롯한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는 권력기구로 작동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 정규직이 줄어들고 노동시장이 더욱 불안정해진 후기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에서는 국가의 잉여 인구 관리 방식이 생명권력적 복리 증진의 형태를 더 확연히 띠게 된다.”(136)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국가는 잉여 인구를 비롯한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는국가이며, 그것의 잉여 인구 관리 방식은 생명권력적 복지 증진의 형태를 더 확연히 띠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고 생명권력적 복지 증진을 도모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국가라면, 그것에 반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엉뚱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저자가 푸꼬의 생명권력 개념이나 통치 개념, 또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가령 생명권력=신자유주의적 통치 같은 도식적 규정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면의 한계상 더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 책은 훨씬 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 독자들에게 얼마간 쓸모 있는 참고 도서가 될 수 있겠지만, 푸코에 대한 인식과 활용에 관해서도,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는 데도 한국의 연구자들은 저자에게 배울 만한 바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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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2016-12-25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리 크리스마스 , 선생님!

올 한 해도 좋은 글로 강연으로
제게 많은 생각거리와 고민거리를 던져수셨네요.
지면으로나마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더욱 좋은 성과 거두시길 바랍니다!

balmas 2016-12-28 19: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님.

댓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감사! 2016-12-28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철학 강의를 듣는 학생입니다.
선생님이 강의 하신 스피노자 강의 화일을 오늘 복사해왔습니다.
선생님의 노고가 담긴 결과물인데 무료로 쓸려니 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나마 감사의 인사드리고자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16-12-28 19: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댓글 감사합니다.

공부하시는 데 강의 파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박탈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지음, 김응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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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실릴 촌평입니다. 글과 관련하여 논평하거나 토론하고자 하는 분들은 [창작과비평]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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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최근 국내에서 가장 왕성하게 번역되는 외국 사상가 중 하나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그의 저작([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은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번역 탓에 거의 반향을 얻지 못했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이 출간된 후 최근 사오년간 가속이 붙어 올해에만 네권의 책이 번역되었다. 이 중 이번에 서평 대상으로 고른 책은 버틀러가 그리스의 문화이론가인 아테나 아타나시오우(Athena Athanasiou)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국내에 소개된 버틀러 책들 가운데는 가장 최신의 저작(영어판은 2013년 출간)이고 정치적인 것에서의 수행성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버틀러의 사상에 관한 대중적인 해설용 대담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주요 사상가들과의 대담집이 보통 그렇듯이, 질문자가 사상가의 사상에 관하여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사상가가 그의 저작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점들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방식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역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타나시오우라는 생소한 학자는 이 책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 중 하나였으며, 이 책의 화두를 이끄는 사람이 버틀러가 아니라 바로 그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능동적인 대화 주체였다. 그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박탈이라는 개념을 대담의 화두로 제안하면서, 이 개념에 입각하여 어떻게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인종주의, 극단적 폭력 등과 같은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있을지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버틀러의 저작,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윤리정치적인 저술에 기반을 두면서 동시에 그 저술에 담긴 이론적 개념들을 신자유주의탈식민주의성소수자정치적 저항 등과 같은 쟁점들에 관하여 폭넓고 자유롭게 변주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나누는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고 독창적인 논의들은 특히 포스트 담론에 입각한 정치철학 및 윤리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건설적인 자극을 준다.


이 글에서는 총 21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이 대담집을 이끌어가는 몇 가지 주요 개념, 곧 박탈(dispossession), 관계성, 취약성, 감응성(affectivity), 수행성 등에 주목하고 싶다.


옮긴이(김응산)가 박탈이라고 번역한 ‘dispossession’이라는 단어는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저자들이 이 단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닌 양가적인 의미 때문이다. 첫째, ‘dispossession’은 말 그대로 박탈을 가리킨다. 곧 이 단어는 우리가 장소와 생계, 주거지, 음식, 보호 등을 빼앗길 수 있는 존재라는 점, 따라서 이를 우리에게서 박탈할 권리와 힘을 지닌 권력에게 우리가 종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둘째, 하지만 이 단어는 또한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원초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공통으로 전제된 소유적 개인주의의 원리와는 달리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은 우리 각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 개인이 아니며,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쾌락과 고통을 어떤 지속된 사회계 혹은 지속적인 환경에 빚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상 23)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타자와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실은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자아 내지 개인 주체의 원초적인 타자 의존성이라는 의미로 인해 ‘dispossession’이아주 문제적인 개념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만약 이 개념의 뜻이 첫번째 측면으로 국한된다면, 비판적인 이론과 정치의 목표는 꽤 단순해진다. 부당하게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각각의 개인 및 집단 들에게 그들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소유와 권리를 회복시켜주거나 부여해줌으로써, 개인들 사이의 평등한 자유의 질서를 확립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 내지 개인들이 원초적인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그 본질 및 정체성에서, 그리고 삶의 과정 자체에서 타자에 의존적인 존재들이라면, 자유주의를 넘어선 이론적 분석과 실천적 해법이 요구된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한 난상토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가적인 측면을 드러내기에 과연 박탈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박탈이라는 번역어는 오히려 첫번째 측면에 너무 경도된 것이 아닌가? 첫번째 측면에서는 부당한 법적정치적물리적인 탈취, 몰수라는 뜻이 핵심인 반면, 두번째 측면에서는 자율적인 자아 내지 개인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자기소유(self-possession 내지 self-ownership)가 타자와의 원초적 관계에 의해 사후에 성립되는 것이며, 더욱이 이러한 원초적 관계를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두번째 측면에서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전제인 소유 및 자기소유의 논리적 불가능성과 윤리적 폭력성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실 탈소유로 옮기는 편이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자의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에, ‘탈소유라는 번역어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따라서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가 무엇인지는 열려 있는 문제이며, 말 그대로 개념적 번역과 이론적 ()창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dispossession’의 문제는 감응성’, ‘affectivity’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원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관계적인 존재들이라면, 그러한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을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affectivity’ 및 ‘affect’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 용어들을 일관되게 감응성감응이라는 용어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정동성, 정동, 심지어 정동하다’(능동태인 affect의 번역이다), ‘정동되다’(수동태인 affected의 번역이다) 같은 괴상한 신조어들을 남용하는 일부 연구자들의 번역보다는 훨씬 사려 깊은 태도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감응보다는 정서라는 개념에 기반을 둔 번역이 이 책의 논의를 이해시키는 데도 더 낫고, 미국 문화이론계의 논의를 우리 식으로 전유하고 변용하는 데도 더 낫다.


우리가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느낄 때 여기에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타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분노하거나 즐거워하며, 타자의 기쁨을 시샘하거나 부러워한다. 더욱이 스피노자(B. Spinoza)의 정서 모방(affectuum imitatio) 개념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항상 이미 타자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내지 정서는 항상 신체적인 작용을 수반한다. 우리가 기쁨을 느낄 때 신체적인 역량 내지 에너지도 증가하며, 우리가 고통이나 자괴감을 겪을 때 우리의 신체도 무기력해진다. 우리의 분노는 동시에 강렬한 신체적인 반응을 촉발하며, 흐뭇한 마음은 신체적인 이완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affect affectivity가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다음 번역문을 보자. “이와 같은 반응의 성향은 우리를 경첩에서 어긋난(out of joint)” 상태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로부터 이탈하도록, 곧 자기 정신줄을 놓도록(beside ourselves)” 만드는 다양한 감응, 곧 분노와 절망, 욕망, 격분, 희망 등의 감정 속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123) 내가 볼 때 여기에서 감응대신 정서라는 번역어를 쓴다면, 논의의 내용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논의의 요점은 분노, 절망, 욕망, 격분 같은 정서들이 강렬한 신체적 반응을 촉발하면서 우리의 평정한 상태를 깨뜨리고 우리를 평상시와 다른 모습으로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out of joint’‘beside ourselves’ 같은 표현이 함축하는 바이다. “공감과 친절함, 연대는 물론이고 긴장, 괴로움 혹은 갈등과 같은 강렬하고도 정치적인 감응적 요소들을 통해(286) 같은 대목도 정서적 요소들이라는 번역이 이해를 더 쉽게 해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affectaffectivity가 정서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체적 변화의 차원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정서적 변용()’이나 그냥 변용()’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83~85면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심급이라는 용어는 원문 “instance”의 번역인데, 이 경우에도 사례내지 경우로 옮기는 편이 낫다. 전체적으로 꽤 공을 들인 꼼꼼한 번역인데, 이처럼 몇 가지 용어 선택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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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설솔술 2016-11-2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엇습니다.^^ 번역자는 유민석이 아닌 김응산씨네요.

balmas 2016-11-27 16: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살설솔술님.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사실 괄호 부분은 편집부에서 교정 과정 중에 추가한 것인데, 제가 미처 확인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정정 안내를 하도록 편집부에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질문 있어요 2017-01-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강추하신 <박탈>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철학용어가 익숙치 않다보니 읽어도 명확히 이해를 못하네요.
그래서 용어 질문 좀 드리고 싶은데, 괜챦으시죠?
‘현전의 형이상학‘과 ‘자기 현전‘이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이해를 하면 될까요?

새해부터 귀챦게 해드려, 지송합니다^^

balmas 2017-01-02 19: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질문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현전>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사실 <현존>이라는 번역어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용어들은 어쨌든

모두 하이데거 철학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 알라딘 서재의 다음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1583071
 
존재론적, 우편적 -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 바리에테 18
아즈마 히로키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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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여름호에 실릴 촌평 하나 올립니다. 


일본의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에 대한 서평입니다. 


아직 교열이 끝난 글이 아니므로, 혹시 논평을 하거나 토론을 하실 분은 [창비]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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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를 읽다 말기

   

 

우선 내게 아즈마 히로끼(東浩紀)는 매우 낯선 인물이라는 점을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서평 대상인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存在論的,郵便的, 조영일 옮김)을 비롯해서 그의 책이 국내에 몇권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아즈마 히로끼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일본의 문화계 및 학술계 전반에 관해 꽤 무지한 편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는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책 두어권을 읽어본 정도이고, 그외에 니시까와 나가오(西川長夫)나 우까이 사또시(鵜飼哲) 같은 이들의 저작, 그리고 얼마 전에 국내에 소개된 사또오 요시유끼(佐藤嘉幸) 같은 젊은 연구자들의 현대 프랑스철학에 관한 연구서를 필요에 따라 한두권씩 읽어본 정도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 책이 데리다(J. Derrida)에 관한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이 20대 중반의 아즈마 히로끼를 일약 카라따니 코오진의 후계자로 부각시킨 역작이라는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기에, 과연 어떤 책일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읽었던 몇몇 일본 학자나 비평가 들의 책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도 대단한 소문과는 달리 그저 그런 저서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예상도 있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특이하게도 평자의 이 두가지 기대 내지 예상에 모두 들어맞았다. 이 책은 역작이라고 볼 만한 장점과 자신의 지적 성취를 스스로 잠식하는 약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문장에서 저자는 본서의 목적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해설(9)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데리다 해설서라기보다는 한가지 집요한 질문을 바탕으로 데리다 사상을 재구성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탈구축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물음은 도대체 데리다는 왜 그와 같은 기묘한 텍스트를 쓴 것일까?”(13)이다. 여기서 기묘한 텍스트라고 지칭되는 것은 1970년대에 출간된 데리다의 {산종(散種)}(La dissémination, 1972), {조종(弔鐘)}(Glas, 1974), {회화에서의 진리}(La vérité en peinture, 1978), {우편엽서}(La carte postale, 1980) 같은 저술이다. 이 저술들의 기묘함은 1960년대 저작들과 달리 더이상 제도적인 논문’, ‘저작의 체계를 지키지 않고, 극도의 실험적 스타일, 신조어들의 빈번한 출현, 데리다 자신의 여러 텍스트에 대한 암묵적 참조 등으로 인해 극도로 난해하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이론화의 칸스터티브(constative)한 형태에서 에크리튀르(écriture)의 퍼포머티브(performative)한 양태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 자신의 넘어짐(15)을 가리킨다.


어떤 넘어짐이 문제일까? 그리고 데리다는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책의 후반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1970년대의 실험적 텍스트들을 통해 하이데거처럼 심연에 대해 사색하는 위대한철학자(263)가 되는 것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아즈마가 데리다파(397)라고 부르는 전이(轉移)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곧 데리다는 자신이 스승으로 숭배되고 자신의 철학적 주제와 스타일이 모방됨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하나의(또는 여럿의) 학파가 만들어지는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일종의 초월론적 중심, 부재하면 부재할수록 더욱 숭고해지는 그런 중심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편적 탈구축(235)을 시도했지만, 1980년대 이후 그는 전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끼가 특히 {우편엽서}에서 읽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전이를 둘러싼 철학적·정신분석적·정치적 쟁점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데리다의 탈구축에는 두 종류가 존재한다는 점으로 집약된다. 아즈마가 카라따니 코오진을 따라 괴델적 탈구축”(또는 부정신학적 탈구축)이라고 부르는 첫번째 탈구축은 어떤 하나의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 체계의 내재적인 역설을 드러내는 것, 오브젝트레벨과 메타레벨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에 의해 텍스트의 최종적 심급을 무효화하는 전략(111~12)으로, 그는 특히 초기 데리다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데리다에게는 이것과 구별되는 또다른 탈구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편적 탈구축이다. “우편=오배(誤配) 시스템(185)이라고 지칭되는 우편적 탈구축은 하이데거, 라깡, 크립키, 지젝이 벗어나지 못한 부정신학적 탈구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편적 탈구축을 집약하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명제는 시니피앙의 분할 가능성(117)을 가리키며, 따라서 비세계적 존재를 복수적이고 능동적으로 파악(204)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역으로, 괴델적 탈구축에서 부각되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은 우편공간이 야기한 망령적 효과’, ‘불가능한것의 복수성을 말소시(155) 결과이다.


데리다 자신은 명확히 하지 않은 우편적 탈구축을 작업가설로 설정한 이후, 아즈마는 4장에서 데리다를 넘어 카르나프, 하이데거,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논리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접목이라는 시각에서 검토한다. 그러다가 372면 이하에서 정신분석적인 전이의 문제를 제기한 뒤 그의 논의는 얼마 못 가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그가 전이작용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편적 탈구축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데리다 및 데리다 학파에 관한 논의와 참조를 중단하는 것, 그리고 데리다 읽기를 중지하는 것이 데리다파의 전이(398), 즉 서양 형이상학의 체계를 근원적으로 탈구축하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탈구축적인 논문과 저서를 산출함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형이상학의 제도를 지속하고 데리다를 포함한 탈구축 사상을 그 형이상학의 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결과와 절단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의 독창성은 {우편엽서}를 데리다 사상의 중심(또는 중심 아닌 중심)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특히 두가지 논의를 인상깊게 읽었다. 첫번째는 1장과 2장에서 제시된 쏠 크립키(Saul A. Kripke)의 명명이론에 대한 탈구축적인 독서로, 이는 지젝의 정신분석적 비평을 훨씬 넘어서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두번째는 2장과 3장에서 전개된 우편적 탈구축에 관한 논의인데, {우편엽서}에 관한 분석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반면 이 책은 뚜렷한 약점과 한계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괴델적 탈구축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이라고 할 만큼 끝도 없이 괴델적 탈구축, 부정신학적 탈구축에 대한 언급이 끝도 없이 나온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실상 매우 단순하고 빈곤하다. 유일한 초월론적 중심, 더욱이 역설로만 표시되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중심을 설정하는 사상이 그가 말하는 괴델적 탈구축이기 때문이다. 초기 데리다 작업(및 더 나아가 하이데거와 라깡의 사상)이 과연 이러한 괴델적 탈구축으로 환원되는지 여부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지만,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이라는 이원론적 문제설정이 데리다 사상을 분석하기에 적절한 것인지는 더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가 유사 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 국역본에는 의사 초월론(258)이라고 되어 있다)에 관해 단 한차례, 그것도 괴델적 탈구축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매우 증상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유사 초월론이야말로 그가 작위적으로 설정한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이분법을 탈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문제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즈마 히로끼는 이 책의 논의를 중단하는 것이 그 자신의 관점에 일관된 태도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더 썼다 하더라도 데리다 사상에 관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밝혔을지는 의문이다.

 

상당히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를 다루는 책인데 매끄럽게 잘 읽히는 것은 역자의 노고 덕분이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 표현들(‘소행’ ‘폐역’ ‘쟁이’ ‘지견’ ‘비급)이 적지 않게 그대로 사용되어 독서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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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6-05-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데리다의 해체가 `유물론`인지 잘 보여주는 책이었다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