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혁명 - 프로이트의 삶과 저작
마르트 르베르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마르트 로베르는 프랑스의 저명한 독문학자로, 문학과 정신분석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여럿 발표한 사람이다. 푸코는 자신의 문학비평에서 자신이 로베르에게 많은 이론적 빚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로베르의 이론적 역량과 위상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프로이트 전집의 발간과 지젝 등의 작업이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점점 더 정신분석에 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음에도, 로베르의 이 책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64년 이래 이 책은 프로이트에 관한 개론서 중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저술 중 한 권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또 그럴 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 라디오방송을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매우 평이한 문체로 쓰여 있으며, 내용 역시 프로이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의 학문적 작업과 지적 교류, 일상적 삶을 서술하고 있어서, 프로이트 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의 사상의 발전과정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로베르는 프로이트를 일종의 성인으로 간주하여 숭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로베르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책임을 안고 있고, 결혼할 돈이 없어서 오랫동안 약혼자를 기다리게 만들고 있으며, 학문적 성공에 목말라 있는 유대인 출신의 젊은 학자인 프로이트가 상황의 압력과 학문적 고뇌를 겪으면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이면서 매우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들은 프로이트라는 한 유대인 학자의 삶과 사상을, 마치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와 함께, 충실하게 읽어낼 수 있다.

로베르의 문체 자체가 유려한 데다 번역도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다만 프로이트 원전 인용문들 중 일부는 오역이어서 내용이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큰 어려움 없이 읽히는 것도 이 번역본의 장점이다.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려는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4-12-0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갈께요. 꾸벅~^^

balmas 2004-12-0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세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불량배들 -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자크 데리다 지음, 이경신 옮김 / 휴머니스트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이 책 <불량배들>이 국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이 책은 올해 초에 나왔고, 따라서 출판사에서 저작권 계약을 하고 역자 섭외를 하는 일 등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 번역본의 출간은 불과 4-5개월만에 번역이 끝났다는 것을 뜻하는데, 데리다의 극도로 미묘한 글쓰기를 생각할 때 과연 번역이 충실할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걱정은 끔찍하게도 사실로 드러났다. 나는 지금 책을 사서 불과 30여쪽을 읽었지만, 일일이 밝히기가 민망할 정도로 책의 첫부분부터 터무니없는 오역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프랑스 철학 전공자(그것도 프랑스에 유학중인)가 한 번역이라 혹시 했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하다 싶을 만큼 이 책은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다. 근거없는 중상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몇 개의 예만 들어보자.

9쪽 번역문: “그녀가 개시하여 말하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비록 그녀가 나르시스의 “오라!”를 반복하며, 나르시스의 어떤 말의 메아리로 울린다 할지라도 첫번째로 호소한다.”
Elle dit de façon inaugurale, elle déclare son amour, elle appelle pour la première fois, tout en répétant le "Viens!" de Narcisse, tout en se faisant l'écho d'une parole narcissique.
수정 번역문: “그녀는 나르시스의 “나오라!”를 온전히 반복하면서도, 자신을 온전히 나르시스의 말의 메아리로 만들면서도, 자신이 최초로 말하듯이 말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호소한다.”
   이는 데리다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에코와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에코가 나르시스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지만, 이 되풀이의 행위 자체에서 새로운, 따라서 최초로 일어나는 어떤 것,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음을 밝히는 구절이다. 그 다음 번역을 보자.

번역문: “내가 여기서 이 “변형들”을 보충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이 유명한 장면 속에서 모든 것이 어떤 “도래할” 호소 주위를 선회하기 때문이다. 또 매번 새로이, 차례로, 이번을 마지막으로 줄곧 “도래하고” 있는 것이 “도래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에서 예측불가능한 것과 반복이 교차할 때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Si je parais insister ici avec complaisance sur ces Métamorphoses, c'est que tout tourne, dans cette fameuse scène, autour d'un appel à venir. Et que c'est là, au croisement de l'imprévisible et de la répétition, en ce lieu où, chaque fois de nouveau, tour à tour, une fois pour toutes, on ne voit pas venir ce qui reste à venir, le motif le plus insistant de ce livre(p. 11).
수정 번역문: “만약 내가 여기서 자기만족에 빠져 『변신』의 이 대목에 집착하고 있는 듯 보인다면, 이는 이 유명한 장면에서 모든 것은 나오라는 호소/도래에 대한 호소/도래할 호소[appel a venir-이는 적어도 이 세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예견 불가능한 것과 반복이 교차하는 곳에, 매번 새롭게, 차례대로/돌고 돌아서(tour a tour), 마지막으로 한 번, 도래할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도래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 장소에, 이 책의 가장 집요한 동기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32쪽 번역문: "영불 해협 너머, 그리고 대서양 너머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스리지에서의 decade 기간을 위해 등록하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리지에서 단번에 10년 동안 체류해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도 어떤 불량배의 말을 들어야만 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어와 라틴어, 즉 decade를 잊어버린 채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J'imagine que certains, outre-Manche et outre-Atlantique, hésitent encore à s'inscrire pour une décade à Cerisy parce qu'ils craignent de devoir y séjourner, y parler et surtout y écouter quelque voyou d'un seul trait pendant dix ans. C'est qu'ils en perdent leur grec et leur latin: décade, qu'ils se rassurent, ...(p. 20)      
  수정 번역문:  “영불 해협 너머, 그리고 대서양 너머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스리지에서 한 번의 데카드 기간[10일]을 지내기 위해 등록하는 것조차 주저하리라고 상상해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경우 10년 동안 계속 스리지에 머물면서 이야기해야 하고, 특히 어떤 불량배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데카드라는 말의] 그리스 및 라틴어 어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그들은 안심해도 좋을 것이, ...”

32-33쪽 번역문: "그것은 rogue state에서 '불량국가'까지 최강자의 이성, 법, 법률, 법의 힘, 요컨대, 질서, 세계질서와 그것의 미래, '세계의 의미', 결국 장-뤽 낭시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아무튼 더 겸손하게 말해서 '세계'와 '세계화'라는 단어들의 의미에서 '불량국가'까지 나아갑니다."
De rogue State à "Etat voyou", il y va, rien de moins, de la raison du plus fort, du droit, de la loi, de la force de loi, bref de l'ordre, de l'ordre mondial et de son avenir, du sens du monde, en somme, comme dirait Jean-Luc Nancy, en tous cas, plus modestement, du sens des mots "monde" et "mondialisation."  
수정 번역문: "[영어의] rogue state에서 [불어의] 'Etat voyou'[이 양자는 모두 불량국가라는 뜻이다]로 나아가는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은 최강자의 이성, 법/권리(droit), 법(loi), 법의 힘,요컨대 질서, 세계질서와 그 장래이며, 장-뤽 낭시라면 이렇게 말하겠지만, 결국 '세계의 의미'[이는 1993년에 나온 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좀더 소박하게 말한다면, '세계'와 '세계화'라는 단어들의 의미다."

34쪽 번역문: "제가 오래전부터 말씀드렸듯이 S.I.E.C.L.E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장차 어떤 특이한 모험―즉, 지식인들의 사회성, 교환, 협동, 장소들, 확장들―의 대문자 약호나 표시―우리는 이 점을 터득하고 있습니다―가 될 때 스리지가 지적인 삶의 한 세기를 위해 의미하게 될 바를 반세기의 현존을 넘고 관통해서 몇 주 후에 우리는 축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Depuis si lontemps, disais-je, puisque nous fêterons dans quelques semaines, par-delà et à travers un demi-siècle d'existence, ce que Cerisy aura signifié pour un siècle de vie intellectuelle, chaque lettre du mot S.I.È.C.L.E. devenant désormais, nous l'apprenons, le sigle ou l'enseigne d'une extraordinaire aventure: Sociabilités Intellectuelles Échanges Coopérations Lieux Extensions.(p. 21)  
  수정 번역문: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몇 주 뒤면 스리지가 [1952년 이래] 반 세기 동안의 존재를 통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지적인 삶의 한 세기에 대해 의미하게 될 바를 축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스리지의] 세기siècle라는 단어의 각각의 철자, 곧 S.I.ÈC.L.E.는 하나의 비범한 모험을 가리키는 대문자 약호 내지는 표시가 되리라는 점을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곧 [스리지의] 세기는 지적인 사교와 교류, 협동의 확대의 장이었다고 말입니다.”

 53-54쪽 번역문:  “그리고 그는 자신이 계약적이라고 생각하는 신학적 형태를 띤 순수 수사학적 비유, 그 필요성이 제게는 훨씬 더 중요하고 심각해 보이는 그 비유와 더불어 그 장을 마치기 전에 그것이 행정권과 입법권의 조직에 있어 어떤 지시적 표현으로 보이는 것을 제공합니다.
‘민중은 신이 우주를 지배하듯 미국 정치계를 지배한다. 그들은 모든 것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모든 것은 그들로부터 나오고 그들에게 흡수된다.’라고 결론짓습니다.”
  Puis il donne ce qu'il tient pour une description démonstrative quant à l'organisation des pouvoirs exécutif et législatif, avant de clore son chapitre avec le trope d'une figure théologique qu'il croit conventionnelle et de pure rhétorique mais dont la nécessité me paraît beaucoup plus grave et sérieuse: "Le peuple, conclut-il règne sur le monde politique américain comme Dieu sur l'univers. Il est la cause et la fin de toutes choses; tout en sorte et tout s'y absorbe."
  수정 번역문: “그 다음 그는, 그 자신은 관례적이고 순전히 수사학적일 뿐이라고 믿고 있는―하지만 이러한 비유를 사용해야 하는 필연성은 제가 보기에는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신학적 형태를 띤 비유와 함께 그 장을 끝마치기에 앞서(“인민은 신이 우주를 지배하듯 미국의 정치계를 지배한다. 그들은 만물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모든 것은 그들로부터 나오고 그들에게 흡수된다”라고 그는 결론짓습니다) 그 자신이 행정권과 입법권의 조직에 관한 논증적 기술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54쪽 번역문: “저는 긴 우회의 관점에서 목적과 아주 가까이에서 미국에서의 민주정치, 더욱 분명하게 말해서 민주정치와 미국이 제 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아마 간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서 알리기 위해 토크빌과 『미국에서의 민주정치에 관해서』에 그다지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으면서 인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Il me fallait citer Tocqueville sans trop attendre, et 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pour annoncer de très loin que, au terme d'un long détour, tout près de la fin, on s'apercevra peut-être qu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ou, plus précisément, la démocratie et l'Amérique aura été mon sujet.(pp. 34-35)
  수정 번역문: "아마도 사람들은 오랜 우회적인 논의를 거친 다음 거의 결말 부분에 가서, 미국에서의 민주정치,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정치와 미국이 내 주제가 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아주 일찌감치 예고해 두기 위해, 저는 기다리지 않고 미리 토크빌과 『미국에서의 민주정치에 관하여』를 인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79쪽 번역문: “저는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종종 악용되는 결합의 특징을 아랍적, 그리고 차례로 이슬람적이라고 말합니다.”
  Je dis arabe et tour à tour islamique pour éviter le trait d'union souvent abusif de l'arabo-islamique.(p. 51)
  수정 번역문: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식으로 자주 악용되곤 하는 붙임표[하이픈, trait d'union]를 쓰지 않기 위해 저는 차례차례 아랍 그리고 이슬람이라고 말합니다."

  80-81쪽 번역문: “그 대신 정체 속에서, 적어도 문화 속에서 유태교적 신앙(단 한 나라가 있지요. 이스라엘입니다)이나 기독교적 신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국가들, 그리고 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종교문화로 말하자면, 식민지 이후의 혼성국가들 대부분은 오늘날 민주 국가로 자기 소개를 합니다.”(80-81쪽)
  En revanche, toutes les États-nations profondément liés, sinon dans leur constitution, du moins dans leur culture, à une fois juive(il n'y en a qu'un, Israël), ou chrétienne(...), mais aussi la plupart des États-nations  post-coloniaux composites quant à la culture religieuse, en Afrique(...), en Asie(...) se présentent aujourd'hui comme des démocraties(p. 52).
  수정 번역문: "반대로, 헌정 자체에서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문화에서 유대교적(여기에는 단 한 나라, 이스라엘만이 있습니다)이거나 기독교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민족국가만이 아니라, 또한 여러 종교가 혼합되어 있는 문화를 지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의 탈식민주의 민족국가들도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로 자신을 내세웁니다." 

  210쪽 번역문: “그것은 모든 국가에게 무력에 의존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유일한 예외조항입니다.”
  C'est la seul exception à la recommendation faite à tous les États de ne pas recourir à la force.(p. 142)
  수정 번역문: "이것은 모든 국가에게 무력에 의지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것에 반하는 유일한 예외 조항입니다."

  이 문장들은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오역문들 중 일부를 임의로 골라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에만 국한한다 해도, 만약 이 문장들이 제대로 된 한글 문장이고 내용이 이해가 간다면, 나는 내가 경솔했음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이런 마당에 41쪽에서 ‘supplément’과 ‘itérabilité’를 ‘보충’과 ‘반복 가능성’으로 번역하고, 120쪽 이하에서 ‘singularité’를 ‘개별성’으로, ‘partage’는 ‘배분’으로 번역한 것 등을 문제삼는 건 오히려 사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솔직히 이제 나는 출판사들과 지식인들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겁이 난다. 얼마나 더 많은 오역들이 있어야, 따라서 독자들과 책의 원저자들, 더 나아가 역자 자신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어야, 이 끔찍한 오역의 되풀이가 끝날 수 있을까? 또 언제쯤 이런 식의 끔찍한 독자서평을 쓰지 않게 될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 2004-06-03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지적에 대해 추천을 던집니다.
출판사와 번역가의 치졸함으로 인해 안 그래도 어려운 책들이 더 어려워집니다. ㅠ.ㅠ

balmas 2004-06-0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죠.
번역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됐든 번역을 맡았다면, 읽을 수 있는 번역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겁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게 놔두든가요.
독자들이 봉입니까?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사랑하고 돈주고 사보는 게 무슨 죄입니까? 네?

balmas 2004-08-06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의 외침들이죠, 정말.

장팔이 2005-09-10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워케 프랑스말을 그리 잘하세요~
정말 부럽슴니다.... ^^

balmas 2005-09-1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장팔이님,
정말 불어 잘하는 분들이 보시면 비웃습니다. ^^;;;
제 불어는 어디 명함 내밀 실력도 못된답니다.
어쨌든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반갑습니다. 요즘은 제가 좀 바빠서
서재에 거의 들르지 못하는데, 나중에 좀 한가해지면 종종 들르세요. :-)

미지 2008-07-1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데리다 시선의 권리를 꼭 읽고 싶은데요, 선생님의 오역 지적을 보고 경악해서 구매를 포기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역투성이 번역본을 보며 고통받고 싶지는 않지만, 이 책은 꼭 읽고 싶거든요... 선생님 같으신 분이 왜 그런 중요한 책들을 번역하시지 않는지 의아합니다. 불어는 장님인데, 영역본은 어떻습니까?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동문선 현대신서 97
베르트랑 오질비 지음, 김석 옮김 / 동문선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전부터 미국에서 부는 지젝 열풍이 남한에도 고스란히 날아와(이는 너무 당연한 결과지만, 또 너무 진부하고 부끄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제 국내에서도 라캉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라캉 자신의 저술(곧 책이나 논문)이 한편도(!) 국역되어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참 놀라운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그만큼 라캉의 저작이 하루빨리, 그리고 신뢰할 수 있게 번역되기를 바라는 여러 독자들의 열망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라캉에 관한 연구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오질비의 책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이렇게 사장되어 가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참 아쉬운 일이다. 이는 아마도 오질비가 이 책 이외에는 단행본 저작을 내지 않은 데다 발표한 글들도 매우 적은 편이어서 미국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고, 그래서 라캉에 관심이 많으신 여러 연구자들(대개 영미문학 전공자들이고, [아마추어] 정신분석가들이 몇몇 섞여 있는)들 역시 당연히(?) 이름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저간의 사정 때문이리라.

오질비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영미권에도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프랑스의 좌파/구조주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높이 평가받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고등사범학교에 2002/2003년 학기부터 설치된 [현대 프랑스 철학 연구 센터]에서 그가 알랭 바디우, 이브 뒤루 등과 함께 강좌를 맡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그리고 그는 올해 나온 발리바르의 책(L'Europe, l'Amerique, la guerre)에서 발리바르와 '우정어린'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오질비의 이 책은 그의 철학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책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오질비의 책은 소위 정통 라캉주의자인 자크-알랭 밀레류의 해석에서 벗어나 라캉의 정신의학 박사학위 논문에서부터 1949년 라캉이 발표한 [거울 단계] 논문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라캉의 이론을 탐구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1960년대 말-70년대 초의 소위 마템에 기초한 후기 라캉 중심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이며, 따라서 벌써 영미권에서 정형화되기 시작한 정통 라캉주의적 해석과 다른 관점에서 라캉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준다.

2) 하지만 오질비는 단순히 1933-1949년까지의 라캉의 저술에 한정하지 않고, [에크리]만이 아니라 라캉의 후기 저술, 예컨대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1964)의 쟁점들이 어떻게 이 시기의 라캉의 작업 속에 함축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캉귈렘의 과학사 연구나 푸코의 작업과 라캉의 작업을 비교함으로써, 1960년대 구조주의 진영 내부의 지적 쟁점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제공해 주고 있다.

3) 오질비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고 명쾌하지만 또 한편으로 상당히 함축적이어서, 적은 분량 안에서 매우 많은 논의내용을 담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 이것들 대부분은 구조주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라캉의 이론, 더 나아가 구조주의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오질비의 이 책은 필독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공들인 역주도 책을 읽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준다. 하지만 두어 군데 오역이 있고, 몇군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들은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무책임한 오역과 날림 출판으로 악명높은 출판사에서 이 정도 수준의 번역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출판사의 책이라면 다시는 사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독자들도 한번 이 책은 믿고 구입해 볼 만할 것 같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opin 2005-04-1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절 읽었어요. 집중하니까 이해가 되긴 되네요.
그리고 뒤의 원주/역주는 철학적 지식이 부족한 저에게는 많이 도움이 되네요. 두고 궁금할 때마다 보면 좋겠어요.
예전에 읽은 책에서는 시니피앙, 시니피에를 능기네 소기네 하던데 이 책에서 처럼 그냥 그대로 시니피앙, 시니피에 하니까 더 낳은 것 같네요. 이해하기가요.
아무튼 라깡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책을 추천해 줘서 감사합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욕망
콜린 데이비스 지음, 김성호 옮김 / 다산글방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레비나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하면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철학자다. 레비나스의 저서 중 두 권, 그것도 대표적인 저서로 보기는 어려운 저서들만 국역되어 있고, 국내 연구자의 저서 한 권과 몇 편의 연구 논문들이 국내의 레비나스 연구의 현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이 레비나스의 사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후설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려는 레비나스의 초기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해서 [전체와 무한](1961)에서 제시된 타자론이 [존재와 다른 것](1974)에서 윤리, 정치적인 영역으로 심화, 확장되는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요령있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레비나스의 사상이 다른 철학자들, 특히 데리다와의 논쟁 또는 토론을 통해 변모되어가는 과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잘 제시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레비나스의 복잡하고 난해한 사상을 일반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로 전달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이런 점에서 성공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자의 공들인 번역도 칭찬할 만하다. 몇군데 가벼운 오역이 눈에 띄긴 하지만, 유려한 우리말 문장으로 내용을 정확하게 잘 전달해주고 있다. 레비나스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직접 레비나스의 저작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이종영씨는 국내에 바디우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을 번역하고, 이후에도 여러가지 경로로 바디우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학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학]의 번역은 좀 실망스럽다.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번역들에 비하면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고, 바디우에 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이 번역서는 여러가지 세부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학문적으로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몇가지 사례를 통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에는 identification/identifier라는 단어가 여러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종영씨는 이를 어떤 경우에는 <정체화>(16-17쪽)로, 어떤 경우에는 <식별>(18쪽)로, 어떤 경우에는 <일체화>(20쪽)로 번역하고 있다. 원문의 같은 단어를 이처럼 상이하게 번역할 경우에는 이 다양한 번역어가 원문의 같은 단어를 가리킨다는 점을 표시해두는 게 당연할 것이다. 더 나아가 16-17쪽의 <정체화>라는 번역은 라캉이 쓰는 의미에서 identification, 즉 상상적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개념(30쪽에 나오는)을 염두에 둔 번역이지만, 16-17쪽의 맥락에서 이는 그저 <동일시>나 <일체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아직 너무 '사소'한 문제다. 이 번역의 또다른 문제는 reconnaitre/reconnassance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역시 어떤 때는 <인정>(18)으로, 어떤 때는 <파악>(18)으로, 또 어떤 때는 <식별>(21)로 번역하고 있고, 그리하여 독자가 <식별>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이 단어가 identification을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reconnassance를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 바디우의 논의가 담고 있는 학문적인 엄밀성이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번역에는 다수의 오역들도 엿보인다. 예컨대 15쪽의 <명확하게 표명될>이라는 번역은 <형식적으로 표상될>이라고 번역해야 칸트 윤리학의 고유한 형식주의가 드러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6쪽의 <성찰적 주체>와 <결정하는 판단>이라는 번역은 칸트 철학의 고유한 주제 중 하나인 reflessiant과 determinant의 대비, 즉 <반성성>과 <규정성>의 대비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30쪽의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식에 대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되는 거리를-둔-나-자신>이라는 번역은 <-나를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하는->이라고 번역해야 왜 identification이 <정체화>, 즉 허구적 정체성의 형성인지 이해가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31쪽의 <그 유한성 속에서 나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타자는, 그 넘어섬이 고유한 윤리적 경험일 순수하게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여야만 한다>는 번역은 <유한자 안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대타자는 고유하게 무한한 타자와의 거리의 현현이어야 하며, 이 거리를 넘어섬이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이다>로 번역해야 바디우의 진의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식의 오역과 부주의한 번역은 이 책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데(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부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일이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iosculp 2004-09-13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글도요.
정확히 어디에 문서가 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이 윤리학책번역이 이종영씨의 의도대로 출판이 안되고 출판사 자의로 출판되어 지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종영씨 글중에서 읽은 기억인데 많은 부분 출판사 맘대로 뺄건빼고 출판된것으로 말하더군요.
하여간 많은 리뷰글 부탁하고 마이리스트보니 사두어야 될 책들을 알게되어 정말 고맙습니다.

balmas 2004-09-1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그런 이야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종영 선생이 번역한 다른 책들도 [윤리학]과 대동소이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걸 보면, 꼭 번역의 문제점이 거기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종영 선생은 자신의 번역본(이나 저술)이 이런저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수긍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 같더군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좀더 꼼꼼하게, 좀더 정성을 들여서 번역하면 될 텐데 ...

balmas 2006-03-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씨,

첫째로,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의 출판과정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그 책은 제가 교정을 한 차례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을 한 뒤 저에게 연락도 취하지 않고 출판된 책입니다. 저는 교보문고에서 그 책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책을 사서 내용을 훓어본 후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한 부분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곧장 출판사로 가서 책의 폐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서 원래의 원고대로 책을 고쳐놓은 후(교정을 보았다기보다는) 출판사에게 새롭게 인쇄할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새로운 판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당시의 출판저널에도 실려 있고, 제가 이와 관련하여 교수신문에 '책의 자본주의적 운명'이란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폐기된 책을 가지고 저의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진태원 씨가 지적한 번역문제에 대해 말해봅시다.

1) identification을 여러 용어로 번역했다고, 그래서 문제라고 하셨는데, 원래 identification은 여러 용법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s'identifier라고 할 때는 정체화이겠지만, identifier는 식별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진태원 씨는 reconnaissance가 식별일 수 있다고 했지만, reconnaissance는 훨씬 가볍고 부정확한 의미로 쓰입니다. 한 용어의 쓰임을 그 용법에 따라 정확하게 파악해 주는 것이 번역자의 할 일이겠지요.

2) 15쪽의 "명확하게 표명될"에 대해서는 저처럼 번역해야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되리라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formel'이란 단어의 불어 용법에 대해 진태원 씨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진태원씨께서 다니시는 서울대의 김상환 선생님께 여쭤보시기 보랍니다.

3) 16쪽의 맥락에서 "열정적 또는 성찰하는 주체", "능동적이거나 결정하는 판단"에서 '성찰'을 '반성'으로, '결정'을 '규정'으로 번역하면 맥락에 잘 맞지 않겠지요. 한국에서 철학을 하면서 특정한 번역어를 중심으로 사고를 하셨겠지만, 불어로 사고를 할 때는 특정 저자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가 공유하는 '헤플레시상', '데테르미낭' 그대로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태원 씨께 전달이 될런지요? 불어 단어를 볼 때 진태원 씨 머리 속에 굳어진 국내 번역어에 자꾸 집착하시지 말란 것입니다.

4) 30쪽의 정체화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처럼 번역해야 자기가 설정한 대상에 대한 상상적 정체화가 더욱 잘 드러나겠지요. 제가 역점을 두었던 것은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를 대상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5) 31쪽의 번역에 대해서, '넘어섬'을 말하는 것이 '바디우의 진의'일 것임은 명확하겠지요. 진태원 씨께서도 좁은 지면에 길게 말씀하실 수는 없었겠지만, '바디우의 진의'를 진태원 씨가 어떻게 파악하셨는지 알 수 없군요.

셋째로, 진태원 씨가 알라딘 리뷰에 쓴 글의 의도에 대해 말해보고 싶습니다. 불어에 대해 판단능력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불어단어들을 열거하시면서 스스로가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을 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런 얘기는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것이 좋겠지요. 서로 서로를 고쳐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불어를 알지도 못하는, 아무런 판단능력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봐라,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분히 선동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태원 씨의 리뷰가 저에 대한 사적 감정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불어를 잘 아는 번역자들끼리 모일 기회가 없다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서 책임질 수 있는 글을 쓰시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권력을 좋아하지 않고 진리만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진태원 씨께서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를 갖는 학자로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이종영 드림.


balmas 2006-03-2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2002년 9월에 바디우의 [윤리학] 번역본에 대해 알라딘에

서평을 하나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그 책의 역자인 이종영 씨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제 서평에 대해 이견이 있다고 말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알라딘에 답글을

달려고 했는데, 회원 가입 절차가 번거롭고 개인 정보가 유출될까 미심쩍기도 해서,

전화로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길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길래, 차라리

메일로 반론을 적어 보내면 내가 답글로 올리겠다고 했더니, 메일을 한통 보냈습니다.

위에 올린 글은 이종영씨가 저에게 보낸 메일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걸 강조하는 이유는 처음에 제가 메일로 보낼 것을 제안했더니, 저를 어떻게

믿냐고 반문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서 판단하시면 될 것이니까 긴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종영 씨가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라고 봅니다.

이런 류의 치기어린 답변에 제가 굳이 답글을 달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종영 씨는 마치 제가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한 판본을 가지고 서평을 쓴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제가 서평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종영 씨가 항의한 이후에 새롭게 출판된 판본입니다. 이 점은 이종영 씨에게

전화상으로도 이야기했고, 동의를 얻은 것이니까 확실히 지적을 해두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왜 이종영 씨가 굳이 메일에 이 내용을

다시 써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


2008-06-21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망가진 5년 2012-02-0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 처럼 해야 맞겠지요",
잘못된 지적에 대해 지적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힌다면서 한다는 말이 이것밖에 없군.
나이는 먹을 만큼 먹고, 공부는 한 만큼 했으면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 할까.
좋아 스스로를 제대로 처다보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
"나처럼 해야 맞겠지요"
어디다 이런 엉성한 답글로 사기를 치려고 해.

손용탁 2012-08-12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 선생님위 글중 '데테르미낭'이란 무엇을 뜻하는겁니까..
예문 ....
중국 논문을 번역한 조선족(교포분)이 이러한 문구를 적어 놓았습니다,
"블러드마그네티즘 치료법으로 자신의 병을 오게하는 데테르미냥을 제거하고 화학 합성 반응을 가속하여...."
란 글귀에서..... '데테르미냥을 제거하고' 란 무엇을 뜻하는지요
선생님의 고견을 .. 꼭 부탁드립니다

balmas 2012-08-13 19:58   좋아요 0 | URL
맥락을 잘 몰라서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댓글의 인용문에서 "데테르미낭"은 "결정 요인" 정도의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용탁 2012-08-1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의 고견에 감사드림니다.

Lomain 2017-12-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쪽 번역에서,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여야만 한다’는 번역이 타자와 갖는 거리의 무한을 언급하고 있는 거라면, 재번역된 ‘무한한 타자와의 거리의 현현이어야 하며, 이 거리를 넘어섬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이라는 것은 타자와의 무한한 거리마저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 또는 거리를 좁힌다는 걸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후술된 ‘그리스적 용법에서 벗어나서 일반성 속에서 포착’이라는 건 타자의 무한성의 일반성이 아닌 그 무한성을 넘어선? 또는 좁힌 일반성을 말하는 것인지요.

balmas 2017-12-15 23:56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답변을 당장 드리기가 어렵겠네요.
도서관에서 확인을 해보고 나중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