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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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하루빨리 좀더 많은 작품이 번역,소개되어야 할 사람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필가, 철학자, 문예이론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아마도 20세기 전반기의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현재와 장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놀라운 이미지 이론과 매체 이론이 그렇고,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신학과 유물론, 또는 신학적 유물론이 특히 그렇다.
   이 분야의 글로는 말년에 씌어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보통 [역사철학테제]라고 번역되지만―와 초기의 단편 한 두개만이 국내에 소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파리 아케이드](“Passagen Werk”)를 비롯한 이 분야의 글들은, 좀더 체계적으로 소개된다면, 벤야민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사상적 지형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릴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지난 20여년 동안 국내에서 가장 널리 읽힌 벤야민 번역본이다. 벤야민이라는 이름이 아직 생소했던 시기에, 더욱이 군사독재의 엄혹한 탄압이 짓누르고 있던 시기에, 난해한 벤야민의 글들을 짜임새 있게 묶어서 소개한 공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벤야민을 번역해본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힘겹고 생색이 안 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벤야민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문장들을 틈새 없이 조밀하게 이어주는 깊은 논리전개를 따라잡아야 하고,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본문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지만 벤야민이 매우 친숙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이론들, 이데올로기들의 유래를 추적해서 밝혀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번득이는 통찰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고 잘 붙잡아두었다가 옮겨 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들이 이 번역본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소시켜 주지는 않는다. 이 책의 역자가, 20세기 독일 지성계의 귀중한 유산을 번역, 소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반성완 교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번역가의 과제] 앞부분에 해당하는 320쪽의 논의를 보자. 번역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떤 상대적 개념들은, 그것들이 처음부터 인간들에게만 관련되지 않는 경우에만 그 자체의 가장 좋은 의미를 보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삶이나 아니면 잊을 수 없는 순간―비록 우리가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고 하더라도―이라는 말을 운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러한 삶이나 순간이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요구를 할 경우,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이 말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내포하고 있을 따름이며, 나아가서는 동시에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 개념들]은 원문이 'Relationsbegriffe'이니까 [관계 개념들], 또는 [관계적 개념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건 매우 사소한 문제다(하지만 321쪽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다). 맞줄 사이의 [우리]도 'alle Menschen'의 번역이니까 [모든 인간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역시 사소한 문제다. 그러나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인간이 부응할 수 없는 요구]로 고쳐야 하고,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을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의 기억]으로 고쳐야 한다는 건 중대한 문제다. 번역문만으로는 벤야민의 논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언어적 형상의 번역성 여부는, 그것이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도 [비록 '어떤' 언어적 형상물들이 인간에게는 번역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수정되어야, 앞의 논의와 일관성있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321쪽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은 그것이 번역될 수 있음으로 해서 번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원전의 번역 가능성 덕분에 원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와 같이 주어를 바꿔 번역해야 역시 논의의 문맥이 이해될 수 있다. 이것들은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간이 있고 지면이 허락한다면 이런 문제점은 수도 없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는 벤야민 전공자가 여럿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벤야민 저작의 번역이 이처럼 더딘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제 제대로 번역된 벤야민 저작들을 읽고 싶다는 게 단지 나의 바램만은 아닐 것이다.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것 같아 딱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아니면 이 일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벤야민 전공자들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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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9-1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카페에서 알게된 바에 따르면, 그 주인장이 [모스크바 일기장]의 번역 초고를 완성한 상태고, 조만간 출판될 예정이랍니다. 주인장이 올린 몇편을 보니, 아직 초고라 그런지 어색한 문장이 좀 있더군요. 기대 반 의구심 반입니다.

balmas 2004-09-1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벤야민 저작들이 출간되는 건 반가운 일인데, 번역이 제대로 됐으면 좋겠군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앞으로 종종 들르시기 바랍니다.^^
 
글쓰기와 차이 동문선 문예신서 162
자크 데리다 지음, 남수인 옮김 / 동문선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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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책들(데리다의 저서 및 해설서) 중 많은 수가 심각한 오역으로 훼손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다면 이 번역본은 좋은 번역본일까? 알라딘의 편집자는 이 책을 “Editor's Choice”로 표시해 놓았고, 서평자 중 한 사람은 서평의 제목을 “데리다 번역본 가운데 가장 낫지 않을까 ...”로 달아놓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그래도 믿고 구입해볼 만한 번역본인 듯하다.

그런데 다른 서평이 재미있다. 실례인지 모르지만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와~~ 뭐 이렇게 어렵냐? 장장 10일 동안이나 자세히,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도 잘 모르겠다. 원래 철학 하면 어려운 것이라는 내 고정관념을 더욱 강고히 만든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쓰기와 차이다. 도대체 글쓰기와 이 책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식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볼 때 이 서평자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고, 이 서평은 매우 좋은 서평이다. 국내의 데리다 번역의 문제점을 몇 줄로 집약해서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국내의 데리다 번역본은 10여일 동안 꼼꼼하게 읽은 독자가 잘 모르겠다고 탄식을 하게 만들 만큼 내용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철학은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관념만 강화시키고 있다.

둘째, 하지만 데리다는 원래 어려운 철학자 아닌가? 이런 반론이 제기될지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논증이 복잡하고 내용이 심오해서 한번 읽어서는 내용 전체를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사용되는 언어나 기호가 지극히 전문적이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철학이 어렵다면 아마도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데리다의 어려움을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에 가까운 어려움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도대체 글쓰기와 이 책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식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위의 서평자의 지극히 정직한 고백에서 잘 나타난다. 이 서평자는 책 제목이 [글쓰기와 차이]이니 책을 읽어보면 당연히 제목에 관해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 연관성을 알 수가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그런데 역자는 알고 있을까? 왜 이 책의 제목이 <글쓰기와 차이>인지, 도대체 '차이'가 '글쓰기'와 무슨 관계에 있는지?)

그렇다면 이제 데리다 책을 사보겠다고 나설 독자가 있을까? 책 제목의 뜻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번역본이 가장 나은 번역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사람들말고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데리다와 교양대중의 거리는 더 멀어질 것이고, 철학과 교양대중의 거리도 더 멀어질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들에게 이런 번역본이 연구에 참조가 될까? 그들이 이런 번역본을 강의나 수업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학원 수업이라면) 차라리 영역본을 권할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 번역은 왜 하는 것일까? 아마도 출판사로서는 이미 계약해 둔(또는 오히려 전매해둔) 저작권을 사용하기 위해서, 역자는 업적을 올리기 위해서 했으리라. 대중의 교양습득이나 전문가들의 연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저작권 계약과 번역,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끊임없는 오역의 악순환을 야기시키는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원인을 제거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누구 해답을 아는 분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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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그렇게 어렵지 않던데... 이제 대딩 1학년입니다만. 케바케 아닐지요. 그냥.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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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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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9-3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잘 이해는 못했지만 추천은 하죠

balmas 2004-10-10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마울 데가 ...
 
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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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는 흔치 않은 깊이를 지닌 책이다. 적은 분량이지만, 권력과 폭력 같은 정치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해 깊이 있고 참신한 논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반면 이 책의 번역은, 심각한 오역이 문제되는 건 아니지만, 영어의 통사 구조를 그대로 옮긴 게 여실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번역투 문장들로 되어 있어서 읽기가 매우 불편하다). 아렌트의 논지는 (1)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인 개념들이지만, (2)서양 정치학의 한 전통으로부터 양자를 같은 것으로, 또는 적어도 동류의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생겨났으며, 이는 결국 20세기에 폭력 혁명론의 예찬자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인 것이며, 폭력은 어떤 부당한 압제나 횡포에 맞서 행사되었을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즉 폭력이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부당하게 실행된 권력에 대해, 다른 어떤 대용물이 아니라 바로 그 권력을 응징하고 바로 잡기 위해 행사된 경우다. 반대로 권력은 [제휴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상응](74쪽)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집단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권력의 좀더 중요한 특징은 정당화를 요구하는 폭력과 달리 정당성(legitimacy)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즉 폭력은 사후적인 결과들에 따라 정당화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지만, 권력은 정치적 공동체의 기원에서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예컨대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 또는 반혁명의 행위는 엄격하게 구분됨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정치, 특히 20세기 정치의 문제점은 권력과 폭력의 이러한 본질적 차이가 망각되고 은폐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는 16세기 절대주의 권력론 이래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이해하고, 권력 역시 [조직되고 합법화된 폭력]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관점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유일한 관점도 바람직한 관점도 아니며, 오히려 좀더 근원적이고 심오한 이해 방식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형성하는 공적인 참여 행위로 권력을 이해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경험, 그리고 18세기의 미국 혁명의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제기되는 폭력혁명론의 위험은 폭력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하고 폭력을 목적화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아렌트에 따르면 폭력혁명론의 진정한 위험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관료제의 확산에 따라 생겨난 [전쟁과 폭력의 자율화] 경향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을 저지하고 근절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더욱 부추기고 심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적어도 문제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가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아렌트의 매력은 서양의 철학 전통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복잡한 현실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혁명적이거나 진보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읽는 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또한 바로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보수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지나치게 규범적인 방향으로 경도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을 해보자. 폭력과 권력이 구분되는 [시점]은 어느 시점인가? [누가] 이 양자를 구분하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는 [언제], [누구]에 의해 구분되는가?

아렌트는 [과거시제]로 말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라는 인칭을 사용할 권리를 부당전제하고 있다. 이는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미국혁명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정치적 전통이 지니는 규범적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는 이 두 전통은 [현재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또 오늘의 투쟁 속에서 [변용]되고 [변혁]될 수밖에 없음을 그가 얼마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20세기 후반이 탈혁명의 시대이며, 문제는 오래된 혁명의 전통을 [복원]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역시 하나의 폭력일 수 있음을. 따라서 경계는 권력과 폭력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 자체 내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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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7-09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제목만 읽고서라도 추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군요.
한나 아렌트....
한동안 무척 좋아했고(현재도 좋아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할 필요가 있는 작가란 점에서....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추천 꾸욱....

balmas 2004-07-0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앞으로는 제목에 좀더 신경을 써야겠군요.
감사.^^

balmas 2004-10-2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좀 빨리 보시지~~ ^^
 
신학-정치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김호경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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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하면 사람들은 보통 [윤리학]을 생각하지만, 스피노자는 서양정치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학 저술은 1670년에 독일의 유령출판사 이름을 달고 익명으로 출간된 [신학정치론]과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정치론](1676-1677)이 있다. 이 두 저작은 스타일이나 논변방식, 논의 내용 및 저술의 목적에서 매우 상이한 성격을 보여주지만,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서나 근대 정치철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저작들이다.

1980년대 이후 네그리나 발리바르 등의 스피노자 연구서가 출간되면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번역은 꼭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책세상에서 출간한 이 [신학정치론] 번역본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 이 책 맨 앞에는 번역 대본을 1670년판이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사실인데, 왜냐하면 이 판본은 희귀본이어서 한 권에 천만원이 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구자들이나 주석가들, 또는 번역가들이 사용하는 판본은 이 판본이 아니라, 1925년 독일에서 칼 게파르트(Carl Gebhardt)가 편집해서 출간한 고증본 전집본이나 1884-85년 네덜란드의 반 블로텐과 란트가 편집한 판본이 대부분이며, 1670년 판본(및 그 이후 출간된 몇 개의 이본들)은 문헌학 연구를 위해 드물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역자의 번역을 보건대, 역자가 실제로 대본으로 삼은 것은 독일의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에서 라틴어-독어 대역본으로 출간된 책과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새뮤얼 셜리의 번역본인 듯하다. 새 판을 찍을 때는 어느 판본을 사용했는지 좀더 정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2) [신학정치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반부는 서문에서부터 15장에 이르는, 성서 해석과 관련된 부분이고, 후반부는 16장에서 20장까지의 정치학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고 전반부는 다시 서문에서 7장까지를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책세상 고전문고의 성격상 [신학정치론] 전체를 번역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7장까지는 모두 번역했어야 마땅할 텐데, 이 책은 선별된 3장밖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3) 역자가 라틴어본을 직접 번역했을 것 같지는 않다. 번역 문장을 볼 때 독일어본이나 영어본 문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학문적으로 평가해주기는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은 스피노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네그리나 들뢰즈 또는 알튀세르나 발리바르의 영향 아래 스피노자의 저작들을 직접 읽어보려고 하지만 외국어 판본으로 읽는 데는 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일 것 같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신학정치론]이 담고있는 내용을 얼마간 전달해 줄 수 있는 이 책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별 세개의 평점을 주었다.

[신학정치론]은 번역하기는 매우 어려운 책이지만, 잘 번역된 판본으로 읽는다면 매우 흥미있고 매력있는 저작이다. 아쉽게도, 이른 시간 내에 이 책의 국역본이 출간되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 잘 번역이 된다면, 스피노자의 사상만이 아니라 근대 사상 전반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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