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ordeux > 역자입니다.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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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버틀러 책'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역자 김윤상입니다.

우선 carrot님의 리뷰들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몇 가지 오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1월말 우연히 알라딘에 들렀다가 carrot이라는 아이디의 마이리뷰를 보았습니다. 우선 장문의 리뷰를 쓰실 만큼 제 번역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신 것에 대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carrot님의 리뷰를 보고 무력함을 느껴야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타인에 대한 비판(내지는 비난)의 내용을 갖고 있는 인터넷상의 글의 일방성 앞에서 전전긍긍해야하는 저자 내지는 역자의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우선 carrot님의 과장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책 리뷰가 갖는 기본적 성격을 벗어나 감정적 표현들 내지는 지나친 추측을 담고 있는 carrot님의 첫 리뷰에 대해 알라딘 측에 전화를 하였고 알라딘 담당자분께서는 회의결과 리뷰내용이 인신모독과 관련된 부분을 포함하기에 삭제결정을 내리고 carrot님께 전화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 북리뷰의 기본적 성격을 벗어났다고 여기는 부분은 오역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표현들 때문입니다:

“... 드디어 도서관에 반납된 그 책을 빌려서 영어원본과 대조해보던 날밤, 나는 혈압 올라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성의없음과 불성실과 건망증의 극치인 번역으로 이루어진 책이었음이 영원본과의 대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 책은 안 좋은 번역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점들을 다 가지고 있다:”, “번역하다가 너무너무 귀찮다 싶으면 마지막 문장 하나 휙 빼먹어버리는 식으로”, “기본적인 문법들까지 틀려가면서, 문장의 순서와 인과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번역료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번역자도 문장의 주어를 모르게 되고 마니까 그냥, 주어를 빼버린 것이다 하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부분들이 계속 걸린다..”.

둘째로, carrot님께서 제가 이메일로 ‘협박’했다고 말하시는 부분은 carrot님께서 “기본적인 문법들까지 틀려가면서, 문장의 순서와 인과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번역료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표현하신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명예훼손의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 것과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협박’이라고 표현하신다면 지나친 비약이겠지요.     

셋째로 저는 독일에서 10년간 공부했기에 제 번역이 틀릴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번역료만을 받기위해 아무렇게나 번역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도 독일에서 학문적 진지함을 배우려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는 제 번역상의 문제점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carrot님의 지적대로 normativity를 materiality로 번역해 놓은 부분처럼 몇몇 단어들이 아마도 빨리 번역하다보니 다른 단어들로 대체되어 번역된 부분이 있고, 전체를 다시 보지는 않았지만 빠뜨린 문장들도 두어개 있더군요.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시간을 갖고 다시 검토수정하려고 합니다.

둘째, carrot님의 지적, 즉 “정신분석용어들의 번역을 보면, 하나같이 다 문제가 많다. articulation을 단순히 '정교화'로 번역해버린다던가, trauma를 '외상'이라는 널리 쓰는 번역은 왜 놔두고 '징후'로 번역해놓으면서 '징후'로 번역되는 다른 단어들과 혼동되도록 만들어버린다던가, foreclosure를 '권리박탈'로 번역한다던가, 치환 전치 대체 등등의 용어들을 마구 섞는다든가 등등”인 것 같은데, carrot님은 위의 단어들을 어떻게 번역해야한다고 생각하시며, 국내에서 통상 사용되는 번역어들에 대해 carrot님이 갖는 신뢰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articulation은 본래 ‘정교하게 발음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며 철학에서는(특히 헤겔에 있어서는) 개념의 모멘트들이 세세히 구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말로 ‘정교화’라고 번역하는 데에는 아무 무리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trauma를 국내에서 ‘외상’으로 번역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trauma의 뜻이 ‘무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작용하고 있는 강한 정신적 쇼크’이기에 계속해서 작용하는 정신적 상처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징후’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foreclosure는 법률용어로 권리박탈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말해 carrot님은 (만일 carrot님 고유의 번역어가 있으시다면) 정신분석학 및 버틀러가 기대는 철학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계시기에 저의 번역에 대한 비판과 저의 '철학 및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를 주장하시나요? 분명 carrot님은 영한사전에 나온말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혹은 기존의 번역서들에서 사용된 용어들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저의 번역을 비판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겠습니다.

저의 메일에 대해 carrot님께서도 답신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나 carrot님께 보낸 메일에서나 개인적으로 격앙된 감정적 표현들이 동반되지 않은 그야말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비판적인 리뷰’에 대한 아쉬움을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carrot님께서는 만일 carrot님께서 조목조목 오역을 지적해주면 제가 소리 소문 없이 carrot님의 지적들만을 고스란히 고쳐 새로운 번역을 낼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황당하면서도 어찌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세 개의 리뷰들에서 알 수 있듯이 버틀러에 대한 철저한 맹신 때문인지 오역본 일반에 대한 근원적 불쾌감 때문인지 격앙된 감정이 뒤섞인 어조가 지배적입니다. 저에게 보낸  메일에서 carrot님은 저를 “스타 번역가”의 위치에 놓고 carrot님 자신을 “일개 독자”의 위치에 놓으시면서 마치 학자들의 권위와 그에 대해 커다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반 대중의 구도를 인위적으로 만드셨는데, 사실 저는 “스타 번역가”가 아니며, 독자를 좌지우지할 권위나 권력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자신을 ‘일개 대중’으로 위치시키면 자유로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보낸 메일이 carrot님께 불쾌감을 주었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김윤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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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2007-02-2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조심스레 말하는데 carrot님의 표현이 조금 심한 것 같기도 하네요. 위의 글만 보자면.
그리고 그 trauma, 이 글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래도 외상이 맞지 않을까요? 제가 읽은 정신분석책에선 징후란 말을 한 두번 밖에 본 기억이 없네요.
아니면 나아가선 그냥 저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차라리 기표,기의 뭐 이런 표현보단 그냥 말 그대로 시니피앙, 시니피에라고 하는게 차라리 혼란이 없을 듯 합니다. 이런 논쟁도 없으리라 생각되구요. 어차피 이런 종류의 책들은 보는 사람들만 보니 굳이 번역하지 않고, 역자주로 뜻을 설명만 해준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Chopin 2007-02-23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하튼 저도 이제부턴 좀 더 조심해서 글을 써야겠네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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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첫 리뷰를 올리고 난 뒤 역자분과 알라딘 책임자 분으로부터 전화와 이메일을 몇 차례 받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시면, 어느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서문에서부터 마지막 8장, 각주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달아드리겠다고 답변 드렸습니다. 하지만 역자분은 계속해서 알라딘 책임자를 통해 제게 전화하게 하고, 제 개인메일로 보내고 계십니다. 제발 그만해주십시오.

아래 글은 방금 전 역자분께 보낸 답메일입니다. (역자분이 제게 보낸 메일은 우선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저도 소모적인 싸움은 그만두겠습니다.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 리뷰 지우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젠 출판사에 직접 항의하던가, 학계를 통해 항의하는 다른 방식 등을 모색하보겠습니다.

**************************************************************************************************

 

저는 분명히 알라딘 책임자란 분에게,

역자분께 이메일주소를 알려드린 것도 후회하고 있으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요청은 당연히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무엇보다 앞으로 공개적인 자리가 아닌 제 개인적인 이메일로 메일을 보내실 경우나 전화하실 경우,

그 내용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알라딘 책임자 분이 그 말씀은 전해주시지 않으셨나보군요.

 

따라서 저에게 보낸 이 메일 또한, 공개되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라 간주하겠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시는 것은 역자분이십니다. 저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문제제기한 것이고,

역자분은 독일에서 10년이나 공부한 내가 번역을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명예훼손이라고 하시면서

문제를 명예훼손이나 인신공격 쪽으로 몰고가시고 있습니다.

비판적인 리뷰를 바라신다고 하셨죠. 제가 아까 올린 새 리뷰에다 답글 달지 그러셨습니까.

아까 올린 새 리뷰는 비판적인 리뷰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들과 상의한 결과, 번역서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역자가 해야할 작업이지 굳이 네가 나서서

수고스럽게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줄 필요 없다, 차라리 그에 대한 논문을 하나 쓰는 것이 낫다고 하셔서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적어도 제 논문이 완성된다음 학회에 따로 비판글을 내던가 아니면 제 논문에 녹여내는 방식을 취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더 이상의 리뷰는 올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괜히 나서서 번역상의 잘못을 지적해봤자, 역자분은 알라딘 담당자를 통해 글을 지우겠다는 통보까지 받게 하셨고, 법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비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사한 바로는 번역상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으며, 감정적인 표현이 섞였다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역자분은 자신이 권위가 없으며, 인터넷의 일방성에 노출된 피해자라고 주장하시지만

정말로 역자분이 권위가 없다면, 문제제기가 올라온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질문받는 형식이 아니라

따로 개인메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명예훼손감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알라딘을 통해 리뷰를 내리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오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일방성이라는 건, 이 책을 돈 주고 사는 독자들이 당하는 그 '일방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원본을 읽을 엄두가 안 나시는 분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이 한역본을 "믿고" 구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껍고 비싼 책을 말이지요. 그런데 그 책에 번역이 잘못되어있거나 빠져있거나 원저자의 사고흐름과 다른 부분들이 있다면, 영원본을 모르는 독자들은 학역본만 믿은 채 원저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번역이 이상하다는 지적을 안 하면, 사람들은 이 책의 번역엔 문제가 없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그 책을 구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일방성이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역자분은 기본적으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나오는 그 어떠한 비판도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킬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렇다면 저도 여기에서 소모적으로, 말도 안 통하는 분 붙잡고 리뷰 따위 쓰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제가 논문을 하나 따로 쓰지요.

 

이 메일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알라딘의 마이리뷰에 바로 개제하겠습니다.

다시는 제 이메일로 연락하지 마십시오.

 

이 글도 올라가는 게 불편하시면, 그땐 알라딘과 상의해서 지우시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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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이...

Chopin 2007-02-2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balmas 2007-02-21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입니다. 서평자 말이 사실이라면, 참 놀라운 일이죠. ;;;
우선 역자나 알라딘측의 분명한 해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가넷 2007-02-22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로군요...==;

balmas 2007-02-22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의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확실히 말하긴 어렵지만,
정황상, 정말 좀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인 것 같네요.

작은짐승 2007-03-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분야는 전혀 모르지만... 전에 '장미의 이름'에서 이윤기-강유원 씨가 보여준 반응과 결과가 너무 다르네요;;

balmas 2007-03-0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강유원 씨 사이에서 번역에 관한 논의가 있었나 보군요. 저는 몰랐습니다. ^^
그나저나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종종 들르시기 바랍니다. :-)
 
황우석의 나라 - 황우석 사건은 한국인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성주 지음 / 바다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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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과학의 시스템과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큰 구도에 따라 구체적인 정책이 입안되면 시행을 통해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 정책 추진 과정의 기본 틀이다. 그러나 과학 정책에서 오류 수정 절차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황 교수 사태에 투영된 한국 정치에는 합리성과 오류 수정 절차가 아니라 패거리, 부패의 냄새만 고약하게 진동했다. -11쪽

진실을 위해 국익을 덮어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온 나라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소동에서 1974년 유신정권에 의해 광고취소 사태를 겪은 <동아일보>는 이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보도를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쨌거나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이 MBC의 고통을 즐기는 측면이 있었다.
-28쪽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11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PD수첩 광고 중단 요구, 도가 지나쳤지만 강압 취재도 잘못됐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강압 취재 혐의는 군중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29쪽

나는 과학과 정치, 사회가 모두 동일한 민주주의의 틀에서 가장 잘 기능한다는,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의 혜안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언론 역시 동일한 틀, 즉 민주주의의 시스템에서 움직여야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그렇지 않고, 이러한 민주적 의사소통의 부재가 저널리즘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생각이다.-57쪽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은 수직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고치는 오류 수정 장치는 관성 때문에 작동을 하지 못하며 기사의 흐름이 잘못됐다 싶어도 이를 바로잡는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지 않기 일쑤다.
이는 언론의 속보 경쟁 때문에 신속성, 효율성이 강조되면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62-63쪽

국내에서는 성체줄기세포 치료가 효과나 안전성을 따지지 않고 환자의 마지막 소원 들어주기 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결국 환자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 치료법이 횡행하게 된 것은 현재 황우석 교수 지지자들이 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이 치료법을 맹신한 환자와 가족 때문이다. ...
병원이나 바이오 업체의 원성도 하늘을 찔렀다. 돈도 인력도 없는 국내 업체들이 까다로운 식약청의 요건을 모두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04-105쪽

한국 언론은 과학적 의미보다는 '세계 최초'에 열광했다. 한국 언론은 기사나 사설에서는 독자들에게 "제발 1등이 아니라 2등에도 신경을 쓰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기들은 늘 1등, 최초만 찾아다닌다. 그리고 한탕 하고 나면 그 뒤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쓴다. 그리고 한탕주의가 가장 심각한 곳이 바로 언론이다. ...
일부 과학자들의 이벤트성 발표가 통하는 것은 특종 경쟁에 빠져 이들의 주장을 여과없이 보도하는 신문과 방송이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언론 환경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기자와 언론사가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130-131쪽

이런 점에서 황 교수는 벤처사업가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미국에서 만난 한 교포 과학자는 한국의 황 신드롬에 대해 "대학 교수가 스스로 벤처기업 CEO가 돼 30년 뒤에 이익이 생길지 모르는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데 온 국민이 내일 당장 이익이 실현될 것처럼 열광하는 형국"이라고 혀를 찼다. -168-169쪽

<뉴욕타임스>의 과학기자였던 윌리엄 브로드와 니콜라스 네이드는 ... 과학의 검증 시스템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첫째, 피어 리뷰. ...
둘째, 논문 발표. ...
셋째, 재현성의 테스트. ...

이러한 세 단계의 시스템 역시 과학은 늘 틀릴 수 있고, 거짓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과학계는 이 시스템이 허술해 반칙이 개입할 소지가 많다. 한국의 과학기술 예산은 선진국 못지않은 규모다. 2006년 예산은 전체 예산의 5%대인 9조원으로 세계에서 7, 8위권이다. 이것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집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황교수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줬다. -170-171쪽

첫째, 피어 리뷰 제대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
그의 표현으로는 연구비 신청에서부터 '과학'보다는 '정치'가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
이 때문에 세계적 권위지에 논문을 썼던 과학자도 국내 연구비 신청 때 번번이 떨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암 억제 원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서울대 생명과학부 백성희 교수는 네 차례 지원서를 내고 떨어지고 다섯 번째 지원할 때에는 심사장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

둘째, 정부 관료의 입김이 너무 세 '과학자 간의 공정한 게임'이 이뤄지지 않는 측면이 크다. ... 황교수 사태는 한국 과학 예산 집행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도 드러났지만 정부 공무원과 과학자의 친분이나 은밀한 거래에 따라 새로운 연구 과제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171-172쪽

셋쨰, 연구자의 연구를 관리할 장치가 전무하다는 것도 문제다. ...

IRB도 유명무실하다. 서울대 수의대와 한양대의 예에서 드러났듯, IRB가 "Institutional Review Board"가 아니라 "Institutional Relatonship Board",
즉 기관윤리위원회보다는 "기관친목위원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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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6-04-1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마르크스가 실패한 이유를 사람이라는 동물이 이기적이라는 기본적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누가) 그러시더라구요.
또한 저는 사람을 감정의 동물 (예전에는 이성의 동물로 생각해지만)로 생각하기 때문에 알라디너 물**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 치료법을 맹신한 환자와 가족 때문이다.'에 동감하지만 적절한 해결책은 어렵고 그 반대의 예가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반대의 뉴앙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말 추천되는 영화입니다. 저는 물론 이 영화에 반대하죠.) 또한 정치적 측면과 언론적 측면의 견해도 동감을 합니다. (제가 언론을 비판하는 것은 옥상옥이죠.^^) 정치는 처음부터 포기했고 언론은 처음에는 기대했다가 황색 저널리즘이 또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원했기 지금은 포기.
위 책의 내용 구절 구절 옳은 이야기이지만 이 책 또한 황색 저널리즘의 단편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비판 이후에 대안은 어디있나요.

balmas 2006-04-1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야 황우석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언론과 정치, 과학계의 불합리한 관행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이라면, 칼 포퍼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시스템의 확립 정도겠죠. :-)
 
 전출처 : 수수께끼 > 저승사자에 이끌려간 지옥의 형벌을 그린 그림들..
영혼의 여정 - 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
국립중앙박물관 엮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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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집을 찾으면 스님이 거주하는 요사채를 제외한 모든 불당(佛堂)에는 불화가 있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등장인물도 매우 다양하여 어지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알록달록한 그림이라 치부하고 지나쳐버리기 딱 알맞습니다.  더구나 신도가 아닌 관광객으로 사찰을 방문하는 이교도들의 눈에는 마치도 무당집으로만 비쳐질 것이다.

 이 책은 2003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전시되었던 불화전의 도록이다. 양산 통도사와 김천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이던 불화들과 남장사, 해국사의 불화,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이던 불화중에서 조선시대의 불화를 전시하며 "영혼의 여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화를 "영혼의 여정"이라고 이름붙인것은 불교적 교리의 '윤회'의 의미를 말하기도 하지만, 불화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세계를 한 마디로 정의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또 다른 삶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이기에 그 광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들, 즉 저승사자에 의하여 이승에서 심판을 받으며 업보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불화에 담고 있으며 가장 성스러운 탄생인 연화생(蓮花生)의 모습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도록중 도판은  '지옥' , '극락을 향하여','수행과 염원'이라는 세 개의 소주제로 나누고 있으며 논고로는 김승희, 정명희, 문동수, 천주현 등의 불화에 대한 연구 논문과 보존처리 조사보고서가 첨부되어 있다. '지옥'편에서는 인간이 이승을 떠나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저승세계의 왕들에게 나가서 살아생전의 업보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죄중에 따라 다양한 처벌을 받는다. 지옥에는 10명의 왕이 있어 이 왕들 앞에서 죄질에 따라 문초를 당하며 이승에서의 업보에 따르는 고초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절차를 묘사한 불화가 바로 시왕탱(十王幀)이다. 이 시왕탱화는 모두 10명의 왕이 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벌을 받는 인간의 모습은 제각각의 형벌대에서 고통과 낙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화는 현생을 사는 인간들에게 나쁜 업보를 쌓으면 죽어서도 무서운 형벌을 받으니 착한 일을 하라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극락을 향하여'편에는 '지옥'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는 구제된 인간이 극락을 향하여 자력과 타력의 수행을 통하여 화엄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갖는 원융(圓融)의 상징적 체계로 나타나며 지옥과 극락이 분리된 세계가 아닌 하나의 여정임을 감로탱(甘露幀)을 통해서 알수 있다. 이 불화는 영혼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로탱에는 여래와 보살, 지장과 관세음보살등 구제와 관련이 있는 불보살들이  영혼을 맞이하며 영혼의 여정을 이끄는 불보살의 주변에는 긴 구름의 꼬리가 하늘로 뻗어 천상의 세계, 극락정토에서 하강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지옥과 지상, 천상은 하나의 유기적인 순환체라는 것을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감로탱에서는 구제와 자비를 수행하는 불보살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감로,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르면 어떤 대상에 대한 구별이 없는 만인평등의 구제임을 나타내고 있다.

 '수행과 염원'에는 인간의 윤회를 마무리 짓는 극락정토에서의 안착을 위한 수행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수행의 길은 모든 업보를 참회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깨달아가는 어렵고도 먼 길을 그리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죽은자의 여혼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으로의 인도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찰에 불화를 모셨다. 이렇게 하므로써 망자가 지옥으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로 불화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록의 도판은 우선은 전체 사진을 싣고, 중요한 세부 사진은 확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도록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의 제한임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불화를 감상함에 있어 그 세부 묘사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필수조건임에도 도록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만남이라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세부묘사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지옥도는 인간의 형벌모습을 확대하여 담고 있다.

 券末부록에는 불화의 아랫쪽에  명기된 화기(畵記: 화기에는 누구를 위하여 누구의 발원에 의하여 초본은 누가 그리고 화공은 누구였으며, 언제 그렸다는것 등등이 담겨있다)를 싣고 있는데 이 화기는 불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작자를 알 수 있는것은 물론이고 왜 불화를 그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화승(畵僧)의 계보를 파악하는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비록 전시회는 한 달 남짓으로 끝났고 불화는 원래 불화가 걸려있던 사찰에 가면 다시 볼 수 있게되었지만 불화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도록이지만 절간에 걸려있는 불화에 대한 대략적인 조형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그 가치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조선인
얼마전 수원 용주사로 탱화기행을 갔어요. 원래는 브라이언 배리 선생님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그만 일정이 어긋나는 바람에 문외한끼리 코끼리 다리 더듬느라 우스웠지요. 그러고보니 용주사 탱화가 김홍도 작이냐 아니냐에 대한 님의 의견도 듣고 싶네요. - 2004-11-11 05:15
 
수수께끼
용주사 후불탱화는 양분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탱화 기법은 일반적인 동양화와는 다소 다른데 용주사 탱화가 서양화와 같은 음영기법을 적용한 최초의 작품 운운합니다. 탱화의 아랫부분에 보면 중앙에 붉게 경명주사로 마련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화기(畵記)를 기록합니다. 화기는 그림을 완성하고 마지막에 쓰는것이라 '발미'라고도 합니다만, 이 탱화는 발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탱화의 기법은 소위 보카시기법(태서법)을 사용하여 인물의 얼굴 표현등을 입체감이 살도록 한 그림인데, 그림의 잘잘못이나 또는 교리상의 도상형식이 맞는가 보다는 주로 김홍도의 작품이 맞다...틀리다로 논쟁이 일지요... 참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화가는 어떤 그림에서 "평생 단 한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단 한편만 남을 수 있지만 그림은 유사한 여러 그림을 그려야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탱화는 저로서는 딱 잘라 김홍도의 그림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양식이나 접근방법에서 전혀 김홍도의 작품세계를 접할 수 없음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일반 기록(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나타난 내용을 확대해석하여 김홍도의 그림으로 판단하는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조가 김홍도를 용주사에 머물게 하였고, 또 "부모은중경"을 그리고 목판에 새긴것은 사실이나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성된 탱화가 반드시 김홍도가 그렸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 관해서는 1편의 논문도 있는데 잘 모르고 논문을 본 분들은 김홍도의 그림으로....그러나 탱화에 대해 제대로 아는 분들은 아닌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말씀을 첨언합니다...김홍도의 그림으로 알려진것은 대웅전 바로 뒷편의 시방칠등각에 있는 3개의 탱화중 가운데 탱화도 있는데 화법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답니다......답변이 되었는지요? - 2004-11-11 07:29
 
수련
탱화작품은 어느것을 막론하고 한사람이 그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특시 조선시대는 주로 궁실화가들이 왕실원찰의 탱화를 그렸습니다. 그 당시에 김홍도 역시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중의 높은 직책에 있었던 한사람으로서 용주사 후불도제작시 도편수로서 탱화의 일부를 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조선시대와 구할말의 모든탱화들이 화승들이나 도화서 화원들의 팀웍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제 의견으로는 김홍도가 용주사 후불탱화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고 도편수로서 작품제작의 감독정도로 도화서의 합동작이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불화제작에 임하는 사람들은 각기 재능에 따라 초를 잘내는 사람, 바름질을 잘하는 사람, 영락을 잘꾸미는는 사람 등 이 있었고 현재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수수깨끼님께서 말씀하신 딱잘라라는 말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군요.
하지만 화기가 없으니 모든 말들은 추측에 불과하겠죠. - 2004-11-11 10:09
 
수수께끼
탱화 제작에 있어 말씀하셨듯이 화기의 연화질에 기록된것과 같이 많은 화승이나 화원이 그리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답니다. 의외로 한분이 제작한 탱화가 많이 있습니다. 금호당 약효스님도 그랬고, 정연스님도 혼자서 제작하신 작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보응도 마찬가지입니다.이런 내용은 "한국의 불화" 전집의 뒷편에 있는 화기편을 자세히 읽어보신다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또 1800년대에 활동하셨던 홍안스님은 대부분의 작품을 혼자 그리셨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라기보다는 탱화를 작업하시는분들의 성향도 불화를 제작함에 있어 많이 좌우된듯 보이며, 저같은 경우라도 혼자 제작을 할 것입니다.왜냐하면 단순히 그리기만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교리적 내용을 녹아들게 하려면 자신이 불화 제작의 기능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구태어 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랍니다.
말씀하신대로 김홍도는 용주사의 탱화제작에서 총책임을 맡았는데(이럴때는 도편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도편수는 영화 감독 같은 것이고 용주사에서의 김홍도의 역할은 제작자...정도입니다) 다만 책임을 맡았을 뿐이며 제작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실 화원의 특성상 "단원"이라는 낙관이 들어가는것은 필수임에도 화기조차 없다는 것은 이 작품이 김홍도의 작품이라는데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기법 운운하지만 실제 그 당시에 바름질이라는 태서법이 들어왔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인하여 현재 용주사 탱화의 제작시기마저도 모호한 입장이며 일부에서는 그보다 더 늦은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시대에 변화나 발전의 과정을 보이지 않으며 유일하게 나타나는 형태나 양식을 그 시대의 작품으로 평가한다는것은 상당한 위험을 가져오기에 용주사의 후불탱화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 그냥 김홍도가 그렸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은중경'은 분명히 왕의 분부를 받들어 그렸고, 목판에는 다른 목공장이 각인을 하였기에 김홍도의 작품과 다를바가 없다 할것이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김홍도는 밑그림을 그린 것이며, 판각은 목조각장이 한것으로 구분을 해야 할것입니다. - 2004-11-12 01:35
 
balmas
엇, 주문하려고 봤더니 품절이네요.
다른 데서 주문해야지 ... - 2004-11-12 02:03 수정  삭제
 
수수께끼
이크!! 발마스님...제가 말씀드린대로 제가 읽는 책은 그리 많이 팔리지를 않나봅니다. 몇 권 가져다 놓았다가 팔리면 그만이고 그런 책들인지 번번히 발마스님이 찾으시는 책은 없군요...제가 그 빌미를 제공했으니 구해서라도 드려야 하는데...거참...문제네요... - 2004-11-12 05:54
 
조선인
오랜만에 알라딘에 와봤더니 이처럼 자세한 이야기가 논해지고 있군요. 김홍도작이냐 아니냐라는 지엽적인 궁금증을 가진게 무색해집니다. 사실 용주사 기행은 여러 모로 속상한 경험이었습니다. 회사일로 차일피일 미룬게 벌써 1달이 다 되어가네요. 후기 올리면 꼭 한말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
참, 발마스님, 지난달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걸 본 적 있어요. 알라딘이나 웬만한 서점에서 다 품절로 나오는 도록도 박물관에서는 꽤 찾아볼 수 있더군요. - 2004-11-13 11:36
 
수수께끼
아...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중앙박물관이 폐관을 했기에 차라리 국립민속박물관에 가시면 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김홍도는 당시 화원의 수장으로 '화성능행도'등을 제작하기 위하여 정조를 따라 융건릉에 자주 갔었습니다. 역대 조선의 임금중 가장 많이 화원들을 활용하여 그림을 남긴 임금이 정조임금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달에 일곱차례나 화성에 행차를 했던적이 있었다 하니 그 수 차례의 능행을 보고 그림을 그린 왕궁 화원의 노력으로 "화성능행도"가 만들어진것입니다. 김홍도作이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지 화원이라고 해서 불화를 그리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한편으로는 화원이기에 불화를 그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것은 왕의 발원에 의하여 그린 불화에는 발미(화기)가 반드시 있어야함은 물론이고 그 내용중에는 왕의 발원에 의하여 그렸다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많은 불화중에는 임금, 또는 왕비나 대왕대비의 발원에 의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모은중경"의 판본에도 누가 그리고 누가 판각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어 김홍도가 그렸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새겨진 글씨의 서체로 보아서는 김홍도의 필체로 판단이 되기에 김홍도가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며 이런 불명확함으로 인하여 대웅보전의 후불탱화가 수차례의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하였으며 "부모은중경판" 또한 국가지정문화재에 등재되지 못하고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2004-11-14 12:05
 
조선인
웅... 그건 좀 이상하네요. 김홍도작이어야만 국가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화원의 그림이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예술적 완성도 이외에도 그런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니 몰랐습니다. - 2004-11-15 02:15
 
수수께끼
죄송합니다. 오해의 소지를 남긴것 같군요.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문화재보호법 제 2조의 정의에는 "자연적,인위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큰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회화는 제1항에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로 유형문화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또한 국보로 지정되기 위한 위원회의 규정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문화재위원회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등재여부를 결정합니다. 물론, 결정전에는 문화재 조사위원의 선행조사와 문화재전문위원의 학술적 조사를 거치게 됩니다.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기법상에 있어서는 다른 불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색은 갖추고 있으나 제작시기나 제작자 등등 제반 요건을 갗추지 못했기에 지정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안성의 '쌍미륵사'라는 사찰에 고려초에 제작된것으로 여겨지는 미륵불 2개가 있는데 보물 지정을 위한 여러차례의 위원회가 개최되었었으나 계속 보류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명확한 문헌자료가 없어 소홀히 그 형태나 양식만으로는 지정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가 그 사찰에도 다녀왔습니다만, 이 사찰은 미륵불을 주불로 하는 '법상종'의 본사인만큼 미륵불에 대한 가치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두 개의 미륵불에 대한 조사를 제가 했었기에 저도 지정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말씀하신것처럼 김홍도가 그려야만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는것은 아니며 국가지정문화재의 요건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예전의 '별황자총통'의 경우처럼 잘못 지정하여 망신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 2004-11-15 02:47
 
조선인
아항, 설명 잘 들었습니다. - 2004-11-15 06:27
 
balmas
ㅎㅎㅎ
수수께끼님, 조선인님, 이 책을 다른 서점에서 구입했답니다.
그런데, ㅋㅋㅋ 책 맨 앞에 나온 저승사자 그림을 보고 너무 웃었어요. 저승사자 콧구멍에 삐져나온 코털들을 봤기 때문이죠. 다른 그림들에는 없는데, 유난히 저승사자 그림에만 코털들이 그려져 있네요. 저승사자가 너무 바빠서 코털 소제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다른 심오한(??) 뜻이 있는 건가요?^^
정말 지엽적인 질문이라, 좀 쑥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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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
자크 데리다 지음,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 사진, 신방흔 옮김 / 아트북스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데리다는 현재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심지어 영미 학계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관한 논의가 하나의 독자적인 하위학문(sub-discipline)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데리다의 이론적 작업은 여러 학문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서는 데리다의 작업을 소개하고 이해하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의 중요한 예술론 저서 중 한 권인 [시선의 권리](아트북스)의 출간은 원칙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 없다. 데리다는 문학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회화에 관해서도 여러 권의 책(La vérité en peinture(1978), Mémoires d'aveugle(1990), Atlan: Grand format(2001), Artaud le Moma(2002))을 낸 적이 있지만, 사진, 포토로망에 관해 이처럼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벨기에 출신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관해 데리다가 긴 ‘해설’을 붙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격조 높은 사진들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데리다가 덧붙인 탁월한 ‘해설’은 이 책을 통상적인 사진집(과 해설)의 차원을 넘어, 이미지와 문자, 보기와 말하기/쓰기, 장르와 젠더, 현전/현상과 환영/유령 및 더 나아가 시선과 감시, 법과 권력 등에 관한 예술적, 철학적 논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번역이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이루어졌을 때의 이야기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이는 대부분의 국내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전설, 신화일 따름이다. 사실 국내의 데리다 독자들은 이미 이같은 사실과 소문, 현실과 신화 사이의 참담한 괴리를 여러번, 너무나 자주 경험한 바 있다. 아쉽게도 이는 이 번역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인데, 이 책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나 [해체](문예출판사, 1996), [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 등과 더불어 데리다 저서의 최악의 오역본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저런 기회에 지적했던 것처럼 데리다는 현대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도 보기드문 문장가(그에 비견할 만한 현대의 이론가는 라캉 정도일 것이다)여서, 이론적인 논증과 수사학적인 어법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글을 쓰며, 그의 작업이 갖는 의의, 중요성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이 산출해내는 의미효과들에 있다. 따라서 데리다 저서에 대한 번역의 성패는 이러한 의미효과들을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충실하게 옮겨내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책의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프랑스어의 초보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의 용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격자구조”나 “액자구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en abyme”를 줄곧 “심연 속으로”라고 번역하거나 “독촉”과 더불어 “총합”이라는 의미를 지닌 “sommation”이라는 단어를 줄곧 “독촉”이라고만 번역하는 등의 일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이며, 더 나아가 복잡하게 뒤얽힌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을 풀어내어 이해 가능한 표현으로 전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는 이 번역본은, 데리다를 신비스러운 인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는 데도 외국에서는 놀라운 명성을 누리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물로 만드는 데 기여할 뿐, 독자들이 미묘한 논의들을 통해 산출되는 놀라운 의미효과들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데리다의 이론적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번역본의 상태가 어떤지 다른 독자들도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에서 좀 길긴 하지만,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처음에 제시된 것은 번역본에 나온 번역문들이고, 그 다음은 해당 원문, 마지막은 이 서평의 필자가 수정한 번역문들이다. 그리고 번역본의 번역문들에 내가 추가한 [원문 그대로]라는 표시는 원본의 불어 단어를 잘못 옮기거나 우리말 맞춤법이 잘못된 것들이다.



101쪽 번역문: 당신은, 그리고 당신들은 내가 이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을 결코 모를 것이다.

원문 I 페이지: Tu ne sauras jamais, vous non plus, toutes les histoires que j'ai pu encore me raconter en regardant ces images.

수정 번역문: 자네는, 그리고 당신/들 역시, 내가 이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결코 알 수 없을 걸세.


이 문장은 데리다의 해설의 첫 번째 문장인데, 여기에서 문제는 시제가 잘못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불어 시제는 “ai pu”라고 해서 복합과거로 되어 있는데, 역자는 이를 “계속해서 말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문장 이외에도 이 번역본에서는 간단한 불어 시제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경우가 여럿 보이는데, 이는 역자가 불어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소한 것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역자는 “tu”라는 불어 단어를 “당신”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tu”라는 단어는 같은 또래의 친구 사이나, 선생과 학생 같이 나이 차이나 지위의 차이가 있지만 친숙한 사이에서 쓰이는 단어다. “tu”를 “당신”이라고 번역하는 게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데리다의 ‘해설’은 신원이나 성별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둘 이상의 사람들이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구어체 문장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tu”라고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vous”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tu”라고 부르는 경우는 “자네”나 “너”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위의 문장에 대한 대화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보자.


101쪽 번역문: 이 이미지들? 그러니까 이 이미지들은, 플롯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보거나 알아차리게 되는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플롯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원문 I 페이지: Ces images? Il faudrait alors qu'elles donnent quelque chose à voir ou à reconnaître, flnalement, à l'instant où une intrigue se dénoue. Or, j'en ai du moins le sentiment, on s'ingénierait plutôt à nous dissimuler quelque chose.

수정 번역문: 이 이미지들? 그렇다면 결국 이 이미지들은, 하나의 플롯이 결말을 짓게 되는 순간에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또는 인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선사해주어야 하겠지. 그런데 나는 [이처럼 이미지들에 이야기의 구조를 부여함으로써―인용자 삽입]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 같다는 생각, 또는 적어도 느낌이 드는데.


  여기서 대화 상대방은 앞 문장의 화자가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연계시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곧 이야기라는 것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 같은 목적론적 구도에 따라 전개되기 마련이며, 따라서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결부시키는 것은 이미지들에 대해, 처음부터 이미지들과 상이한 질서에 속하는 이야기/언어의 구조를 외재적으로 강제하는 셈이 된다. 이 문단의 두 번째 문장은 바로 이런 의도를 문법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 불어에서 “il faut que”는 “해야 한다”나 “일 수밖에 없다”는 뜻을 갖는 비인칭적 표현인데, 이 문장에서는 조건법에 따라 “il faudrait que”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두 번째 문장은 ‘그처럼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결부시키면, 이미지들은 이야기에 고유한 목적론적 구도에 따라 확정된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더 나아가 화자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미지들에 이야기의 구조를 부과함으로써 이미지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사람들on”, 곧 불특정한 어떤 사람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은폐하기 위해 제시하는 술책에 말려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번역본에서는 이런 논의의 의미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번역이 되어 있다. 같은 쪽의 다른 문단들도 유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이를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고, 이제 다음 쪽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102쪽 번역문: 일견 시퀀스들의 엄청난 비가역성이 바라보고, 묘사하고, 판독하는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결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문 I~II 페이지: Au premier regard, une rigoureuse irréversibilité des séquences commande à qui regard, décrit, déchiffre, elle sous-entend du moins, car jamais rien n'est dit ... 

수정 번역문: 처음에는 사진들의 진행séquences을 규제하는 어떤 엄격한 비가역성이 바라보고 기술하고 판독하는 사람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지. [또는]―왜냐하면 [사진들에서는] 결코 어떤 것도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적어도 이 비가역성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이 문장에서 잘못 번역된 것은 세 가지이지만, 제일 핵심적인 것은 “그러나 결국”이라는 접속사 부분이다. 사실은 원래의 불어 문장에는 명시적인 접속사가 존재하지 않으며, 콤마와 “적어도du moins”라는 숙어가 접속사 구실을 하고 있다. 번역본처럼 접속사를 이처럼 번역하게 되면, “사진들의 진행을 규제하는 엄격한 비가역성의 지휘”와 “비가역성의 암시” 사이의 관계가 역접의 관계로 잘못 이해될 뿐만 아니라, 뒤에 나오는 “왜냐하면 결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의 뜻은, 우리가 이 사진집 또는 포토로망을 처음 볼 때에는, 마치 시퀀스들, 또는 사진들의 진행을 규제하고 있는 어떤 엄격한 비가역적 규칙이 우리에게 사진들을 바라보고 기술하고 판독하는 모종의 객관적인 규칙이나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본다면, 사진들은 결코 어떤 것도 언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에(“결코 어떤 것도 말해지지 않기 때문”), 이런 종류의 객관적인 해석의 규칙이나 근거가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다만 적어도 어떤 서사 가능하고 판독 가능한 내용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고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du moins”로 연결되는 두 문장, 두 절 사이의 관계는 축소나 제한의 관계에 있지 역접이나 대립의 관계에 있지 않다.

  이 문장에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역자가 이 문장에 붙인 다음과 같은 역주다. [역주: 사진이(시선이) 무엇인가를 암시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달리 말하면 침묵 속에서만 사진의 시퀀스들은 암시되고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데리다가 언어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다고 우선적으로 지적하려는 것이다. 언어는 워낙 그 속성이란 것이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말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한다. 즉 언어는 어떤 한 단어로 말해질 때 그 단어 이외의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서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해진 것에는 더 많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 담지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언어에서나 사진에서나 데리다가 그토록 자주 침묵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사진에서 데리다는 언어를 통해 말해지지 않을 것을 말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진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하여서만, 바로 말이 결하고 있는 것을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63-164쪽)]

  이 역주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번역본에 달려 있는 대부분의 역주들은 독자들이 문장의 의미나 데리다의 수사학적 어법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데리다의 논의를 더욱 막연하고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제대로 명료하게 이해는 되지 않지만 무언가 신비하고 심오한 것을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갖게 만드는 번역문, 그리고 이를 더욱 조장하는 역주들, 데리다가 선사(禪師)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 다음 문장을 보자.


103쪽 번역문: 미장 드뫼르mise en demeure는 번역 불가능한 표현이다. 그것이 법에 관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법성을 고려하는, 어떤 사람이 바라보고 자신의 시선 안에 배치하고 붙잡아두고 시야에 간직하거나 사진으로 ‘찍을’ 권리, 즉 이 책의 제목인 시선의 권리droit de regard[원문 그대로-인용자]에 관여한다. 문제의 이미지들의 텍스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것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시선의 권리, 오직 바라보기의 권리만을, 혹은 여러분이 그 시점에 대해 순응할 권리만을 허용한다.

원문 페이지 II: Mise en demeure, expression intraduisible, parce qu'il y va de la loi. Il y va de la légitimité, il y va du titre qu'on peut avoir à regarder, à disposer sous son regard ou à détenir par le regard, à prendre en vue ou à "prendre" des photographies, il y va donc du titre: droit de regards. Un texte d'images à regard vous accorde, comme à ses "personnages", un droit de regarder, seulement de regarder ou de vous approprier par la vue ...

수정 번역문: 미장드뫼르는 번역이 불가능한 표현인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법이 문제되기 때문이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적법성이며,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의 눈으로 배치할 수 있는, 또는 시선으로 붙잡아두고 시야에 두거나prendre en vue 사진들을 “찍을prendre” 수 있는 자격titre일세. 따라서 제목titre,『시선들의 권리/감시권』이 문제인 셈이야. 바라보아야 할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한 텍스트는, 텍스트 내의 “인물들”에 대해 그렇게 하듯이 당신/들에게 하나의 시선의 권리/감시의 권리를 부여하지. 단지 바라볼 권리만을, 또는 당신/들이 시각을 통해 전유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이 문단의 번역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droit de regards”의 번역이다. 우선 이 책의 제목은 “시선” 또는 “감시”라는 의미를 갖는 “르갸르regard”가 단수로 쓰이지 않고 복수로 사용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단수냐 복수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데리다의 해설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복수의 시선들 사이의 관계―권력 관계일 수도 있고 성적 관계일 수도 있고, 지각과 기술의 관계일 수도 있는―라는 점을 감안하면(이는 해설이 진행될수록 더욱 문제가 된다), 복수로 쓰인 “regards”와 단수로 쓰인 “regard”를 잘 구분해서 번역하는 게 필요하다. 더 나아가 “regard”는 단순히 “시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시”를 의미하기도 하며, 특히 이 문단처럼 법, 적법성, 권력 등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regard”가 지닌 “감시”라는 의미를 좀더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마지막 문장처럼 “단지 바라볼 권리”와 “당신/들이 시각을 통해 전유할 수 있는 권리”가 구분되는 경우에는 “regard”를 각각 “시선”과 “감시”로 파악해야 데리다의 논의가 이해될 수 있다.

  이 문단과 이어지는 다음 문단을 보자.


103쪽 번역문: 그것은 분명 법칙에 관한 문제이나 또한 법칙에 의해 통제되는 시간에 관한문제이기도 하다. 사물들은 질서에 의해 감시당한다. 시선의 권리의 시간은, 마치 사진의 기호체계 안에서처럼 심연을 향한 연속 반복, 즉 사진 속의 사진, 다른 연작 속에 재편입된 연작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준엄한 기한délai de rigueur에 입각해서 전개된다. 미장 드뫼르는 시간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결코 넘치지 않을 시간이고, 계산되고 운율이 있는 일직선적인 시간이자 극적인 시간이다.

원문 페이지 III: Il y va certes de la loi mais aussi d'un temps réglé par la loi. Un ordre le surveille. Le temps du droit de regards se développe, comme on dit dans le code de la photographie, non seulement par la répétition de génériques en abyme, une photographie dans l'autre, une série dans l'autre réinsérée, mais comme le délai de rigueur. La mise en demeure donne le temps, mais un temps à ne pas déborder, un temps mesuré, rythmé, cadencé, un temps dramatique.

수정 번역문: 분명 여기에서는 법이 문제되지만, 또한 법에 의해 규제되는 하나의 시간이 문제되기도 하지. 하나의 질서가 이 시간을 감시하고 있지. 시선들의 권리/감시의 권리의 시간은 사람들이 사진술의 용어법에 따라 말하듯이, 현상/전개되네se développe. 단지 도입장면들génériques을 격자구조[액자구조, en abyme]에 따라 한 사진을 다른 사진 속에 담고 사진들의 한 연속장면을 다른 연속장면 속에 재삽입하는 식으로 반복함으로써 현상/전개될 뿐만 아니라, 엄격한 기한으로서도 현상/전개되는 것이지. 미장드뫼르는 시간을 선사하지만, 이 시간은 결코 어겨서는 안되는 시간, 박자가 있고 리듬이 있고 운율이 있는 극적인 시간이야.


  이 문단에서 특히 잘못된 점은 “en abyme”를 “심연을 향한”이라고 번역하고 “répétition de génériques”를 “연속반복”이라고 번역한 점이다. 이 문단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것은 역자가 이 두 용어 사이의 체계적인 연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en abyme”는 “en abîme”, 곧 “심연 속에서”와는 달리 “격자구조” 또는 “액자구조”를 뜻한다. 격자구조란 원래 어떤 무늬나 모양 안에 같은 무늬나 모양이 들어 있는 것을 뜻하는데,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는 기법을 가리킨다(액자소설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따라서 “en abyme”는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법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지, “심연 속에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데리다는 이를 부연하기 위해 바로 뒤에 “한 사진을 다른 사진 속에 담고 사진들의 한 연속장면을 다른 연속장면 속에 재삽입하는 식으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서 이러한 격자구조가 반복해서 사용되는 곳은 사진들의 한 계열이 끝나고 새로운 계열이 시작되는 곳이다. 곧 플리사르는 새 등장 인물이 앞 장면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바라보는 장면으로부터 새로운 계열을 시작하는 기법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génériques”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로 이처럼 새로 시작되는 장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도입장면들”로 번역되는 게 적합할 것 같다. 사실 “génériques”는 이 책에서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 중 하나인데, 이는 이 단어가 “유(類)”나 “속” 같은 의미 이외에도 영화 첫머리에 제목, 제작자, 배역, 감독 따위의 이름들을 표시해놓는 자막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는 라틴어 어원인 “genus”의 의미, 곧 “시작” “기원”이라는 의미를 직접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단어가 “유”나 “속”과 같이 집합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génériques”는 “사진들의 계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뒷부분에 가서 이 단어는 “genre”나 “génération”과 같이 같은 어원을 갖는 다른 단어들과 함께 수사법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문단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용어의 적절한 의미와 상호연관성을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이 번역본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문단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제 서너 문단을 건너 뛰어서 다음 문장을 보기로 하자.


104쪽 번역문: 당신은 반복하기를 좋아하고, 그것으로부터 전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데, 마치 그 전체가 형성되지 않을 듯이 그러하며, 그것에 당신을 굴복시키지도 않는다.

원문 페이지 III: Mais tu aimes à le répéter, tu en fais toute une histoire, comme pour marquer que la sommation n'aura pas lieu, et que tu n'y céderas pas.

수정 번역문: 하지만 자네는 그 말[결코 모든 이야기들을 알 수 없고, 심지어 하나의 이야기조차 전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말―인용자]을 기쁘게 되풀이하면서, 시시한 이야기를 계속 대단한 이야기인 양 늘어놓고 그것만으로도 이야기 하나를 온전히 만들어내고 있군. 마치 [이야기들의] 총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이/자네에게는 독촉이 제기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리고 자네는 거기에 기꺼이 불응하겠다는 듯이 말이지.


  이는 겉보기에는 간단한 문장같지만, 사실은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문장이다. 번역본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원문에는 “aimes à le répéter”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반복하기를 좋아하는”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되며, “le”라는 지시대명사가 가리키는 것, 곧 “반복”, “되풀이”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다음 구절인 “tu en fais toute une histoire”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 번역본에서처럼 “그것으로부터 전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데”라고만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가 이해되지 않고, “전체 이야기를 만들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다음 불어에서 “en faire toute une histoire”는 숙어적으로는 “시시한 이야기를 대단한 것처럼 늘어놓다”는 것을 의미하며,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이야기 하나를 온전히 만들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데리다의 논의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것"은 앞 구절에 나온 “le”를 가리킨다. 따라서 첫 구절의 “le”를 정확히 파악해야 두 번째 구절의 의미도 좀더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셋째, 번역본은 “sommation”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불어에서 “sommation”은 영어의 “sum”과 같이 “총합”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영어의 “summons”처럼 “독촉” “소환”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sommation”은 여기에서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결합해서 파악한다면, 지금 이 문장의 화자는 앞 문장의 화자, 곧 “결코 모든 이야기들을 알 수 없고, 심지어 하나의 이야기조차 전체적으로 알 수 없다”고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이 목적론의 위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화자의 태도에서 은연 중에 드러나는 자기기만의 위험을 비꼬듯이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다음 두 문단을 연속해서 보기로 하자. 이 두 문단은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문단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



104쪽 번역문: 나, 너, 당신, 그, 그녀, 사람들on, 우리, 너희들, 그녀들, 그들―모두와, 무대에 올려져 있고mise[원문 그대로―인용자] 지금 여기ici meme[원문 그대로―인용자]서 작동되고 있는, 지정하고mandés 요구하고demandés, 명령하는commandes[원문 그대로―인용자] 모든 것은 가능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말해지도록 서로를 독촉한다. 그리고 하나의 금지를 겸하는 그와 같은 명령이 오직 하나(의 이야기)로부터만 비롯하는 듯이 보이지만 당신은 하나뿐인, 신중하게 순서매겨진 포토그람들의 병치, 포즈들의 불연속적인 연속을 이해한다. 또한 각각의 내적인 ‘말해지는 것들adresse’, 각각의 생략부호는 단수든 복수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당신’과 ‘너’라는 양태사들 모두 하나의 사진적인 문법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페이지 III-IV: Je, tu, vous, il, elle, on ,nous, vous, elles, ils ― tous et toutes mis en scène et en jeu ici même, mandés et demandés, commandés, mis en demeure de se raconter presque toutes les histoires possibles, et l'ordre aussitôt doublé d'un interdit semble venir d'une seule, tu entends, d'une seule juxtaposition, discrètement ordonée, de photogrammes, d'une série discontinue de poses. Et chaque "adresse" implicite, chaque apostrophe, au singulier ou au pluriel, au masculin ou au féminin, dans toutes les modalités du “vous” et du “tu” paraît conjuguée par une grammaire photographique.

수정 번역문: 나, 너, 당신, 그, 그녀, 사람들, 우리, 너희들, 그녀들, 그들 ― [따라서] 남성 모두tous와 여성 모두toutes는 무대 위, 바로 여기에서 연기하도록 올려져 있으며, 가능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서로에게 이야기하도록 소환되고 요구받고 명령받고 독촉받고 있지. 그런데 하나의 금지와 더불어 곧바로 이중화되는 명령/질서ordre는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 자네도 이해하겠지만, 은밀하게 질서지어진/순서화된 포토그람들의 단 하나의 병치, 포즈들의 단 하나의 불연속적 계열로부터 도래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리고 단수나 복수, 남성이나 여성 가릴 것 없이 “당신/들”과 “너”의 모든 양상들 속에 암묵적으로/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부름adresse”, 각각의 돈호법apostrophe은 사진의 어떤 문법에 의해 활용되는conjuguée 것처럼 보이지. 


104쪽 번역문: 사진의 문법 대신 나는 차라리 특정한 사진기구의 수사 혹은 호색성에 의해서, 그것의 렌즈의 권력, 그것의 앵글 범위,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몽타주들, 이미지의 객관화와 사취, 시선의 권리, 침묵하는 내적 질서/명령, 주체의 위치에 당신들을 지정하는 잠재적 몸짓, 움직임, 상황, 위치 들[원문 그대로-인용자]에 의해서 굴절된 말을 사용하겠다. 차례로 바라보기 또는 바라보여지기, 하지만 항상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닌 ...... .

원문 페이지 IV: Au lieu de photogrammaire, je dirais plutôt déclinée par la rhétorique ou aussi bien l'érotique d'un certain appareil photographique, par le pouvoir de son objectif, l'écart de ses angles, les montages auxquels il peut donner lieu, objectivation et captation d'images, droit de regard, ordre intimé en silence, autant de gestes, de mouvements, de situations et de positions possibles vous assignant telle place de sujet: regardant ou regardé, tour à tour et point toujours seul.

수정 번역문: 사진의 문법[에 의해 활용된다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어떤 사진 장치의 수사법에 의해 또는 그것의 에로티시즘에 의해서도, 그리고 그 렌즈objectif의 권력에 의해 곡용(曲用)된다déclinée고 말하겠네. 렌즈의 각도의 범위, 사진 장치가 산출할 수 있는 몽타주들, 이미지들의 렌즈화/객관화objectivation 및 포착, 시선/감시의 권리, 침묵하고 있는 내밀한 질서/명령, 당신/들을 특정한 주체 위치로 지정해 놓는 태도들, 움직임들, 상황들, 가능한 위치들 모두에 의해 곡용되는 것이지. 차례차례 [다른 이를] 보거나/감시하거나 [다른 이에게] 보이거나/감시되거나 하지, 결코 항상 혼자서만 [보거나 보이거나/감시하거나 감시되거나] 그러는 건 아닐세.  


  이 두 문단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단어들은 “활용”과 “곡용”이다. 앞 문단의 화자는 사진들 속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 단 하나의 계열, 병치에 따라 질서지어진 어떤 명령과 금지의 구조, 따라서 권력의 구조를 발견하며, 사진의 문법에 따라 "너" “당신/들”이 활용되는 방식(알튀세르식으로 말하자면 호명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에서 사진의 장치에 내재한 권력의 구조가 다른 많은 이야기들, 질서들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따라서 첫 번째 화자에 따르면 사진에 고유한 권력, 사진에 고유한 시선/감시의 메커니즘은 초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문단의 화자는 활용보다는 곡용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곧 어떤 타자(또는 대타자), 어떤 권력이 자신의 예속자들을 이렇게저렇게 배치하고 위치시키고 포섭하는 일방적인 메커니즘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고/감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도록/감시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이 경우 권력의 메커니즘은 초월적이라기보다는 횡단적/평면적이고, 이원적(“너”, “당신/들”)이라기보다는 다원적이며, 인격적이라기보다는 익명적이다.

  왜 이러한 차이가 “활용”과 “곡용” 사이의 대비로 나타날까?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대비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인도유럽어에서 활용은 동사의 변화를 가리키는데, 이는 주어/주체의 변화에 따라 같은 동사/같은 행동이 변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가령 불어에서 “가다”라는 의미의 “aller”라는 동사는 각각의 주어에 따라 “나는 간다je vais” "너는 간다tu vas", "그/녀가 간다il/elle va" "우리가 간다nous allons" "너희들이 간다vous allez", "그/녀들이 간다ils/elles vont" 등으로 활용된다. 반면 곡용은 명사류가 성, 수, 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활용의 경우 문제는 각각의 주어/주체들이 단독으로 수행하는 행위/동작인 데 반해, 곡용의 경우에는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또는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른 주어/주체의 변화양상이 문제라는 점이다. 격변화가 상당히 소멸한 불어보다는 격변화가 좀더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는 독일어의 예를 들면, “나”라는 의미의 대명사 “ich”는 주격(1격)은 “ich” 소유격(2격)은 "meiner" 여격(3격)은 “mir” 대격(4격)은 “mich”로 변화된다. 그래서 각각의 명사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형태가 바뀌게 된다. 예컨대 “나는 너를 사랑한다Ich liebe dich”에서 “나ich”는 주격으로 쓰이고 “너du”는 대격인 “dich”로 쓰이지만, 반대로 “너는 나를 사랑한다Du liebst mich”에서는 “너”가 주격으로 쓰이고 “나”는 대격인 “mich”로 사용된다. 따라서 곡용에서는 활용과는 달리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주어/주체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활용이 초월적/이원적/인격적인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데, 그리고 곡용은 평면적/다원적/익명적 관계를 나타내는 데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첫 번째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의 차이가, 두 문단의 화자가 각자 파악하고 있는 사진의 권력의 메커니즘의 차이가 “활용”과 “곡용”의 차이로 대비되는 것이 (충분히는 아닐지 몰라도)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문단을 더 보기로 하자.


105쪽 번역문: 아니, 여기서 말하기를 강요당하는 침묵, 다시 한번 우리로서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가능한 발화parole에 다른 방식으로 부합한다. 그것이 가진 침묵으로서의 전략은 다른 예술 매체를 통해서는 조금이라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진의 사건은 일종의 또다른 구조를 가지는데, 이것이 내가 말하라는 명령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바로 그것이다.

원문 페이지 IV: Non, le mutisme don't il est ici demandé de parler, et nous ne savons pas encore à qui, se rapporte autrement à la parole possible. La stratégie de son silence n'a rien à voir avec le médium de ces autres arts. L'événement photographique a une autre structure, c'est ce que je devrais vouloir dire sous sa loi.    

수정 번역문: 아니, 여기에서 말하도록 요구되고 있는, 그리고 누구에게 이러한 요구가 제기되는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침묵작용mutisme은 가능한 말과 다른 식으로 관계맺게 되지. 그 침묵의 전략은 이 다른 예술 매체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사진의 사건은 다른 구조를 갖고 있고, 내가 이 구조의 법칙에 따라 말해보아야/의미를 전달해야 할 것devrais vouloir dire이 바로 이러한 구조이지.


  이 문단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고 번역하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 문단은 우리가 인용하지 않은 바로 앞 문단의 화자가 이 사진집, 포토로망에 언어/담론이 부재하는 것을 “목소리 없는 예술들, 곧 회화, 조각, 음악”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이 사진집, 포토로망에 나타나는 침묵작용은 다른 비언어예술과 다른 고유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단에 대해 역자가 붙인 11번 역주를 한번 보자. “침묵은 말해질 수 없는 것 혹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이 사진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부분들과 시퀀스, 롤들이 반복되고 그 반복의 연속성이 순서를 바꾸어 역전의 구도를 가능하게 하므로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더욱 말해질 수 없었던 것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여기에서 침묵은 사진의 특성상 부분과 부분 사이에 항상 분절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빈 공간과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빈 공간은 사진 시퀀스의 불연속적인 연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이후 데리다가 사진 속의 사진, 혹은 전체와 부분으로서 시간의 가역적인 플레이를 주장하게 하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가역성, 전체가 부분들로 다시금 재삽입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하여 역전되는 이야기, 서술 등의 특성은 사진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으로서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후 명령에 딸, 즉 필연성을 가지고 데리다는 설명하겠다는 것이다.”(164쪽)

  이 역주의 내용이 올바른 것인가 여부는 둘째치고라도 이런 식의 역주가 과연 이 맥락에서 필요한 것인지, 이는 또 하나의 (불필요한) 선문답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음 두 개의 문단을 보자. 앞의 문단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문단은 상당히 긴 편이다.


105-106쪽 번역문: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기술하기 시작한다.

                  

                  아니, 아니. 나는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당신의 응시를 바라보고 그것을 따르고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단어라고 불리는 이것들[역주 16: 이미지들]이 누구에게 말해져야 할지 모른다. 후자(이러한 것)는 분명 망설임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지만 개개의 사람들personnes 사이에서 일어나는 망설임[역주 17]은 아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해 쓰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지금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말하고자 애쓰는 가장 중요한 내용도 알고 있다. 나는 오직 당신과 더불어 바라보고, 당신만이 여기서 내가 감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시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직 우리만을 바라보며, 그로부터 시대착오l'anachronie적 성격을 띠며, 결과적으로 보아야 할 어떤 것과도 무관하며, 그런 것을 제시하지도 않는 것, 그리하여 아마도 이 사진 연작과 무관한 채로 남아 있는 이 단어들의 자리바꿈이 존재하게 된다[역주 18]. 그것은 오히려 여러 가지 의미의 범주들 사이에서 수신자에게 생기는 망설임이다. 그러므로 수신이 통보된 지역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망설임인 것이다. 여기서 사행(事行)procés[원문 그대로-인용자]이 발생한다: 그러니 말이란 게 한 번의 호흡으로du même coup 하나 이상의 남자와 하나 이상의 여자를 호명하므로 나는 동시에 (남성) 청중un spectateur와 여성 청중la spectatrice[원문 그대로-인용자]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원문 페이지 IV-V: Voilà qu‘on commence à raconter, au moins à décrire.

                  

                  Non, non je renvois aux images, je regarde et suis vos regards. Je l'ai dit, je ne sais pas à qui il aurait été demandé d'adresser ces choses qui sont des mots; cela peut signifier l'hésitation, certes, mais non pas entre des personnes singulières ― tu sais que j'écris, moi, pour toi, et que de l'essentiel en ce moment je ne parle qu'à toi seule, je ne regarde qu'avec toi, toi seule a droit de regard sur ce que je risque ici, cela ne regarde que nous, d'où l'anachronie, le déplacé de ces mots qui n'ont et ne donnent finalement rien à voir, demeurant peut-être sans rapport avec ces suites photographiques ― mais une hésitation entre plusieurs catégories de destinataires, et donc de lieux pour accusés de réception. Voilà le procès: vais-je du même coup, car on s'adresse toujours à plus d'un et plus d'une, parler pour un spectateur, pour une spectatrice?

수정 번역문: 이제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기술하기 시작하는 것이군.


            아니, 아니 나는 이미지들에 준거하고 있고, 당신/들의 시선들을 바라보고 따르고 있어.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단어들이라는 이 사물들이 누구에게 전달되도록 요구받고 있는지 알지 못해. 이는 분명 망설임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개별 인물들/단수 인칭들 personnes singulières 사이에 존재하는 망설임은 아니지(자네는 내가 자네에게/자네를 위해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순간 본질적인 것은 내가 자네에게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고 있지. 나는 자네하고만 관계하고 있고/자네하고만 바라보고 있고je ne regarde qu'avec toi, 자네 혼자만이 내가 여기서 위험을 무릅쓰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시선의 권리/감시의 권리를 지니고 있지. 이 일은 우리에게만 관계된 일이고/이것은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고cela ne regarde que nous, 바로 이로부터 이 단어들, 볼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결국 아무런 볼 것도 선사하지 못하고qui n'ont et ne donnent finalement rien à voir, 이 연속적인 사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마도 관계가 없는 채로 남아 있게 될 이 단어들의 비시간순서적anachronie 성격, 제자리에서 벗어난/부적절한déplacé 성격이 나오게 되지). 이는 오히려 여러 가지 범주의 수신자들destinataires 사이에서, 따라서 소환장 수령자들을 위한 장소들lieux pour accusés de réception 사이에서 존재하는 망설임이지. 바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소송이 시작되지. 나는 동시에 ―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하나의 남성 이상, 그리고 하나의 여성 이상에게/더 이상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에게plus d'un et plus d'une 자신을 전달하기 때문이지 ― 한 남성관객과 한 여성관객에게 말을 하게 될까? 


  이 두 문단도 매우 번역하기 까다로운 문단들이다. 우선 첫 번째 문단에서 원문의 “on”을 “우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on”은 상대방 화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이 문단의 뜻은 “사진과 담론, 언어와 이미지의 차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이 사진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니, 이제 너도 어쩔 수 없이 이 사진들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말 어법에서는 “너”나 “자네”라는 주어를 생략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에, 수정 번역문에서는 주어 없이 번역을 했다.

  두 번째 문단은 이러한 반응에 대한 재반론이다. 곧 이 문단의 필자는 자신이 담론활동, 이야기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강조하면서, 자신(및 상대방 화자)이 말하는 단어들/언어의 수신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제대로 파악해내기가 어렵다.

  우선 (1) 나와 너/미지의 수신자들 또는 소환장 수령자들의 대비, (2) 단수 인칭들/범주들의 대비, (3) 이미지들/단어들 사이의 대비가 이루는 체계에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문단의 논의에 따르면 “나”와 “너” 같은 개별적인 인물/인격들 사이에는 시선/보는 것만이 문제될 뿐이며, 망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데리다는 “ne regard que”라는 어구를 여러번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만을 바라보다”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하고만 관계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이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나와 너 같이 대면하고 있는 사이에서는 “regard”만 요구될 뿐 단어들/언어는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당연히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된다). 반면 단어들/언어는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또 이 사진집에 대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수신자들, 소환장의 수령자들에게 전달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단의 화자는 자신이 이 수신자들이 누구인지, 또 소환장을 수령하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알지 못한 채 말을 하고, 단어들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망설임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말해주듯이 이 망설임은 성별의 문제, 젠더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수사법적 표현은 “car on s'adresse toujours à plus d'un et plus d'une”라는 문장, 특히 “plus d'un et plus d'une”이다. 불어에서 “plus”는 “보다 더”라는 의미를 갖는 부사인데, 이것이 “ne”라는 단어와 함께 “ne ... plus”라는 형태로 쓰이게 되면, “(더 이상) 아니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따라서 “plus d'un”은 “하나 이상”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가 아님”이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에서는 “un”과 “une”가 번갈아 사용되었다는 점인데, “un”은 남성명사나 관사(“한 남자un homme”에서처럼)로서 “하나”를 가리키며, “une”은 여성명사나 관사(“한 여자une femme”)로서 "하나"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맥락에서 “plus d'un et plus d'une”이라는 어구는 단지 “하나 이상의 남성과 하나 이상의 여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가 이 두 번째 문단의 대략적인 의미인데, 이 문단이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을 두고 꼼꼼히 대화의 전후 맥락들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는 지금까지 살펴본 번역문들의 두 배 가량 되는 내용들을 검토하고 수정하려고 했지만, 지루하고 힘들기도 하거니와 이 일에만 매달려 있을 여유가 없어서, 번역문에 대한 검토는 이 정도로 그치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시 해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정도의 검토만으로도 이 번역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데리다를 번역하는 일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보다시피 이 번역본은 매쪽마다 오역이 나오는 게 아니라 거의 매 문단마다 오역이 나올 정도로 번역에 문제가 많으며, 병기된 불어 철자들에 다수의 오류가 있고 상당수의 비문들도 존재한다. 이는 출판사 쪽에서 거의 교열이나 교정을 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역자만이 아니라 출판사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의 하나”―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라고 광고할 만큼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더 나아가 역자가 불어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면, 데리다 전문가나 적어도 불어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외주를 줘서 이 책의 번역을 꼼꼼하게 교열하고 교정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본의 상태는 출판사에서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이 책을 출간했음을 잘 말해준다. 그런 마당에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재판을 찍을 경우에는 아예 [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라는 민망한 제목을 빼고 대신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 시선의 권리]라는 제목으로 고쳐내는 게 옳을 것이다. ‘포토로망의 번역본’이라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더 어이없는 점은 [북 앤 이슈]라는 서평 전문지를 내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이런 참담한 오역본을 이 달의 우수도서로 선정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 쪽 이야기로는 “책의 출간에 의의를 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단체는 국내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고질적 문제점 중 하나가 오역의 문제라는 점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 출판인들의 모임이 한국 출판계의 실정을 그처럼 모른다면, 누가 한국 출판계의 실정을 자각하고 바로 잡겠는가?

  따라서 한국출판인회의의 공신력 역시 이 책으로 인해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고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데리다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데리다의 책이 이처럼 우수도서로 선정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오역본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과연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이래저래 이 책의 출간과 우수도서 선정은 한국 출판계 및 인문학계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건, 또하나의 해프닝으로 기록될 것 같다. 제발 이런 류의 참담한 사건, 이런 식의 어이 없는 해프닝은 이번으로 끝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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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04-10-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지금 마구 졸음이 와서 글을 끝까지 못 읽었어요; 나름대로 옆에 사전도 펼쳐놓고 열심히 읽어보려고 했는데 -.- 여튼 참 힘드셨겠어요;

그리고 궁금한 것 하나 : 맨 첫 문장에 나오는 "...j'ai pu encore..."에서, pu는 어떤 기능을 하나요? pouvoir의 과거분사인 듯한데, 책의 번역과 balmas님의 번역 모두 pouvoir에 해당하는 의미는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요. pu를 고려한다면, "나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되지 않는지... 그냥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

balmas 2004-10-01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맞습니다. "pu"는 pouvoir의 과거분사죠.
그러니까 그대로 번역한다면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할 수 있었던"과 "했던" 사이에 큰 의미상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읽기 쉽게 "했던"이라고 옮긴 거죠.

가을산 2004-10-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 그럼 '추천할 만한 번역서'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데리다, 그람시, 들뢰즈, 네그리 이런 사람들 책으로요.
정말 모르겠어요.... ㅜㅡ

딸기 2004-10-0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에 관심이 많으시구나...가 아니고,
리뷰와 페이퍼에 철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네요. 무서워졌어요. ^^

paby 2004-11-02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진태원으로 검색해 보세요. 바로 balmas님 자신의 번역!

마냐 2005-04-08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악의 오역으로 꼽힌 책들의 출판사들, 이름값은 하는 줄 알았는데...꼭 그런건 아닌 모양이군요. 저 책을 그저 휙휙 사진만 구경하고 데리다 글은 보는척 마는척 한 인간도 있슴다. 뭐, 사진만으로도 인상적이었슴다만...^^;
암튼, 지성을 유머로 감춘 발마스님의 이중성, 넘 좋아요. ^^

balmas 2005-04-0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지성하면, 역시 박지성이죠. ㅋㅋ

zelatop721 2010-08-1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번역본으로 추천할만한 책들 리스트를 부탁드립니다. 아주 개인적인 리스트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