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3
질베르 시몽동 지음, 김재희 옮김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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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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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독창적일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의 생각이 독창적인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은 익히 알려진 통념들이기 십상이다.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생애는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바쳐진 생애이며, 그것도 이른바 대가들이 남긴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주석을 다는 일에 바쳐진 생애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1924-1989)은 경이로운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의 독창성을 칭송하는 뜻에서 그들을 19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야말로 사상가에게는 최고의 호칭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몽동이야말로 마땅히 20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기술에 관한 우리의 두 가지 통념을 완전히 뒤엎으면서 기술에 관한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술에 관해 너무 비관적이거나 너무 낙관적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공상과학영화에서 즐겨 다루듯이, 기술이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인간을 기술의 노예로 만들게 되리라는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 예찬론자들은 기술이 인간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왔으며, 앞으로도 더욱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전자가 기술적 대상은 (자연 및) 인간에 대해 적대적 존재자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기술적 대상을 오직 인간의 유용성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몽동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는 기술적 대상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의 본질은 자동성이라는 믿음이다. 20세기 후반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통해 널리 유포된 이런 믿음은 기술적 대상 또는 간단히 말하면 기계에 대한 세 가지 통념을 함축한다. 하나는 기계가 미리 결정된 작용만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는 결정론적 통념이다. 둘째, 따라서 기계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자라는 생각이다. 셋째, 이 두 가지 통념은 결국 기계는 인간과 전혀 무관한 것이며(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인간적이라는 생각을 낳는다. 기계는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남을 때 유용한 것이지만, 기술적 자동성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몽동은 우선 자동성이 기술적 대상의 본질을 이룬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기술의 본질은 오히려 비결정성에 있다. 곧 기술적 대상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외부 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열린 체계다. 다만 생명체는 완전히 “구체화”되어 있는 데 반해, 기계는 항상 어느 정도의 “추상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쉽게 말하면, 기계는 생명체와 달리 정보를 생산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술적 대상들은 자신의 고유한 진화 과정에 따라 발전하지만, 인간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때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다. “인간은 자기 주위에 있는 기계들의 상설 발명가이자 조정자로 존재하는 기능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과 함께 작용하는 기계들 가운데 존재한다.”(14쪽)

그렇다면 기술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생태운동가들이나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맹목에 젖은 테크노크라트들 모두 기술적 소외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시몽동이 보기에 우리 문명의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기술적 소외를 극복하는 것, 곧 기술공학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인문학 독자들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과학기술자들과 생태 운동가들에게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필자가 알기로 이 책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완역된 적이 없으며, 영역본이 이제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것은 시몽동의 사상이 그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외국만이 아니라 프랑스 국내에서도 그동안 충분히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책을 유려한 한글로 읽게 된 것은 역자의 헌신적인 노고 덕분이다. 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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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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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는 11월 5일 (토)부터 경향신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입니다.

신문에는 지면상 다소 축약된 글이 실릴 예정입니다.

새롭게 번역된 책이 또 상당한 오역본이라는 점은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좀더 책임감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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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자크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지난 2008년 방한할 때까지 국내에 랑시에르를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하지만 방한과 함께 [무지한 스승],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출간된 이후 불과 2년여만에 10여권의 저작이 소개되고 문학계에서는 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왜 랑시에르가 이렇게 주목받을까? 그것은 철학, 문학, 정치, 역사, 영화 등을 가로지르는 그의 독창적인 글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사유가 깊이 있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집약된 책이 [불화]라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가 우선 문제 삼는 것은 최근 저명한 프랑스 지식인들(장-클로드 밀네르, 베니-레비 등)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이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과잉(자유와 권리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무리들의 방종)과 무제한적인 소비(재화, 향락 등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라는 이중의 과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곧 민주주의가 문명의 중심에 내재하는 원죄 내지 도착(倒錯)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몰락 이전에는 전체주의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대중적 개인주의”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증오는 사실은 평등한 집단인 인민에 대한 공포이자 그들이 구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공리 중 하나는 대중에게는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체(政體), 곧 독재나 전체주의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사실은 “과두제적인 통치에 대한 본성적 충동”, 곧 “인민을 몰아내고 정치를 몰아내려는 충동”(169쪽-번역은 수정)의 발현이며, 인민 없는 통치, 곧 정치 없는 통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민주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아니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개인의 권리 보호, 사유재산 보장, 법치, 주기적인 선거, 권력 분립 등으로 꼽는다. 중요한 기준들이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현재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흔히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말하는 서유럽과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 소수의 금융 권력이 거대한 부를 독점하고, 인종주의 테러와 이민자 추방, 정치권의 부패와 비리 같은 현상들이 나타날까?

따라서 랑시에르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곧 “우리의 “민주주의들”이 겪고 있는 악은 무엇보다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과 연결된 악”(156쪽)이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다. 그럼에도 과두제 국가에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통치자들이 선량하거나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민이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대의제가 과두제 권력의 단순한 도구에서 벗어난 것 역시 인민이 행위를 통해 실질적 대표성이 관철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현실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권리다.”(158쪽) 민주주의란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행위 자체인 것이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같은 출판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심각한 오역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출판사 스스로 수거ㆍ폐기한 바 있다. 그럼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사정이 훨씬 좋아졌을까? 평자의 생각으로는, 지난 번 오역본보다는 상태가 다소 좋지만 학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번역이다. 이런저런 다수의 오역들이 곳곳에서 눈에 띌뿐더러, “이중구속”을 뜻하는 “double bind”를 같은 페이지에서 한번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한번은 “이중적 연계”(74쪽)라고 번역하거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를 “프랭크 갈브레이스”(60쪽)로, 울리히 벡을 “율리츠 벡”(193쪽)으로 표기하는 등의 사례도 보인다. 이는 역자의 잘못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출판사 편집부의 기본 소양에서 비롯한 문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역자보다 편집부를 바꿔야 하는 것일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읽기 위해서는 세 번째 번역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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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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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가 겨냥하는 것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글로벌한 세계사, 세계 경제의 역사를, 근대 경제를 대상으로 서술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계사나 경제사에서 지배적인 유럽중심주의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는 은의 세계적인 유통 흐름이라는 구체적인 쟁점을 가지고 이 두 가지 목표를 수행하려고 시도한다.   

문외한인 데다가 전공도 전혀 다른 사람이 세계적인 화제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재미있게 책을 읽은 한 사람의 독자의 권리를 빌려 한 마디 해보고 싶다. {리오리엔트}는 비유하자면 {공산당 선언}에 가까운 책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유럽 혁명(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고 썼던 것처럼, 아마도 동아시아의 새로운 (재)발흥에 고무된 프랑크의 머릿속에도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세계체제라는 유령이”라는 문구가 소리 없이 맴돌고 있었을 법하다.  

비유를 좀더 이어가자면, 마르크스(ㆍ엥겔스)는 완성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자본} 1권을 출판함으로써(그리고 2, 3권을 편집ㆍ간행함으로써)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저 허망한 허깨비가 아님을 입증했다. 그러나 프랑크는 ‘선언’은 했지만, 그 선언을 뒷받침해줄 만한 결정적인 저작은 미처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프랑크의 솔직한 고백처럼 “이 책도 ‘분석’은 미진한 반면 ‘서술’에 너무 치중한 것이 사실이다.”(538쪽) 아마도 이 때문에 우리는 프랑크의 ‘서술’(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선언’과 ‘촉구’)에 약간의 흥분감을 느끼며 때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끝내 ‘그렇지만 ...’이라는 망설임과 회의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리오리엔트}의 주장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웬만한 지지자나 동조자가 아니고서는 선뜻 그의 주장들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토인비, 폴라니, 파슨스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마르크스와 베버 및 브로델이나 월러스틴도 모두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이며, 따라서 19세기 이후 서양의 사회과학자들 중 거의 누구도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역으로 말하면 그의 세계체제론은 적어도 지난 2세기 동안의 (따라서 사실은 그 역사 전체에 해당하는) 서양 사회과학 전체를 뒤집어엎으려는 대담한 시도인 셈이다. 

하지만 이 대담한 시도를 위해 프랑크가 제시하는 논거들은 너무 불충분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인상, 적어도 너무 간단하거나 단조롭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특히 프랑크가 제시하는 콘드라티예프 장기 순환설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그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세계 체제에 되풀이해서 작용해온 경기 순환의 사이클은 마치 세계 체제 내의 각 부분 경제들의 발흥과 몰락, 재발흥을 설명하는 유일한(적어도 궁극적인)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 특히 그렇다. “결국 1800년을 전후하여 아시아가 유럽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전반적으로 빈곤해서도 아니었고 전통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무슨 대단한 실책을 저질러서도 아니었다. 마르크스식이면서 슘페터식의 어법을 빌리자면 실패의 근원은 성공에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 각국의 경제가 밀리게 된 것은 그때까지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화폐를 자금으로 삼아 18세기 상당 기간동안 지속되었던 장기 ‘A’국면적 팽창으로 조성된 경제적 인센티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데 있었다.”(488-89쪽)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주장했다면 프랑크는 “인류의 역사는 장기순환의 역사다”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치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의 경제사적인 판본처럼 들린다. 곧 지역적인 경제 현상들의 작용 이면에는 세계체제의 장기 순환이라는 신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프랑크가 이 책에서 전체론적인 관점을 일관되게 역설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크는 지칠 줄 모르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임을 주장한다. 이는 나무들에 몰두하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다른 ‘국지적인’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이자 진정으로 ‘글로벌한’ 세계사를 구성하려는 그의 궁극적인 방법론적 원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크가 보지 못한 것(또는 일부러 외면하는 것)은 전체론은 결국 환원론에 빠지기 쉽고 환원론은 역사를, 헤겔이 말했듯이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처럼 그려낼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 역사에서는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 장기순환이라는 신의 몸짓의 표현들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너무나 황량한 풍경일 것이다.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투쟁을 역사의 동력으로 설정함으로써 역사 과정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이나마 남겨두었다면, 그 유럽중심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는 프랑크가 레오폴트 랑케(그는 이 책에서 비판받지 않는 유일한 19세기 사상가인 것으로 보인다)의 문구가 일종의 기독교 신학의 세속화된 판본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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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04-13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오~ ^^

balmas 2009-04-15 02:39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

2009-04-14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9-04-15 02:40   좋아요 0 | URL
속삭이신 님/ 아, 어쩌죠, 저도 그 책을 아직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시간이 있어야 좀 들춰볼 텐데, 요즘 일이 너무 밀려서 당분간 볼 틈이 없을 것 같네염. 죄송.

balmas 2009-05-14 04:48   좋아요 0 | URL
지나가다님, 댓글 잘 읽었습니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네요.

2009-04-15 1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5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4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4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번역) 562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 아카넷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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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학자의 빼어난 한국학 연구서. 무엇보다 방법론이 돋보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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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 넘기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3
스티븐 모튼 지음, 이운경 옮김 / 앨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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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에대한본격적인개론서인데,좋은책이라고보기는좀어려울듯.평범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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