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기욤 시베르탕-블랑의 저서 [국가에 관한 질문들]이 오월의봄에서 출간됐습니다. 


이 책에 "추천사"를 썼는데, 그것을 여기에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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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적인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



이 책의 저자인 시베르탕-블랑은 들뢰즈와 가타리 사상의 전문가로서, 현재 국제적인 마르크스주의 학술지 "악튀엘 마르크스"(Actuel Marx)의 편집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탁월한 정치철학 교과서인 이 책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된다.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정치철학에 관한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좌파적인 입장에서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과서는 알다시피 학생들을 위한 책이다. 교과서는 해당 분야의 지식을 체계적이면서 교육적으로 제시하여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관련 지식을 성공적으로 습득하여 활용하거나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발판을 제시해주는 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철학에 관한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종의 당파성을 견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과서에 대한 이러한 중립적인 정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 좌파적인 관점에서 정치철학 교과서를 쓴다는 것은 더 까다롭고 더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실패에 관한 성찰, 따라서 어쩌면 자기 자신의 불가능성에 관한 성찰을 교과서의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선 이 책이 다루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 곧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서 러시아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에 이르는 200년 간의 정치철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근대성의 시작을 알리는 한 혁명에서 근대성의 종결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혁명의 실패에 이르는 이 시기는 좌파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쓰라린 실패의 여정일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하지만 새로운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시기이다. 저자가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하되, 혁명가들의 담론보다는 혁명에 대한 대응들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러시아혁명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를 총체적 국가와의 대비 속에서 살펴보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 책을 서술하는 방법론적 전략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국가라는 역사적 실재를 이 책의 준거로 삼으면서, 역사적, 이론적, 비판적 관점에서 국가라는 대상을 둘러싼 정치철학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역사적' 관점은 국가라는 대상을 실체화하지 않고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서 이해하겠다는 뜻이며, 또한 국가를 둘러싼 철학적 담론들의 전개과정 역시 그러한 역사적 변화와 연동하여 살펴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이론적' 관점이 의미하는 것은 정치철학이라는 담론을 불변적인 초역사적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신학이나 법학, 경제학이나 사회학 같은 다른 담론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정치철학 담론의 조건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 그리하여 정치철학이 매 시기마다 새로운 담론으로서 생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학과의 마주침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철학과 경제학 및 사회학과의 마주침 이후에 생성된 정치철학은 하나의 동일한 담론이 아니다.


더 나아가 '비판적' 관점이 가리키는 것은, 국가라는 대상의 우연성과 정치철학이라는 담론 자체의 우연성을 성찰하려는 태도다. 이것은 이중의 함의를 지닌다. 우선 이것은 20세기를 특징지은 양 극단의 국가, 곧 한편으로는 전체주의적인 국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인 국가의 생성의 원인과 그 실패의 이유를 성찰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보통 세계화라고 부르는 조건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및 그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인 우연성, 따라서 소멸 가능성에 직면해 있음을 사유하겠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성찰하는 정치철학만이 국가와의 상호정당화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흔히 접하게 되는 정치철학 교과서와는 꽤 차이가 있는 교과서, 역사적 전개에 충실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 개성적이고, 정보가 풍부하면서도 명료한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교과서를 (물론 역자의 공들인 번역 덕분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실패 가능성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는 이 교과서에서 학생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얻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진보적인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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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마르크스주의 연구] "마르크스와 스피노자: 철학, 실천, 정치" 특집호에 실릴 논문입니다. 


이번 특집호에는 3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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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마르크스, 또는 실천으로서의 철학(

[이 논문에 대한 세 분의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유익한 지적들을 해주셨는데, 시간관계상 지적들에 대해 제대로 답변을 드릴 수 없었던 데 대해 양해를 부탁드린다. 조만간 다른 기회에 지적한 논점들과 관련하여 토론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I. 머리말

 

스피노자와 마르크스또는 마르크스와 스피노자라는 문구는 오늘날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 군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다. 철학사 내지 사상사의 일반적인 관습을 고려하면 이것은 상당히 특이한 화두처럼 보일 수 있는데, 마르크스보다 약 200년 전에 살았던 사상가인 스피노자가 마르크스에게 이렇다 할 사상적인 영향을 직접 미친 바가 없기 때문이다.[마르크스에게 끼친 스피노자의 사상적 영향이라는 문제는 다른 말로 하면 마르크스가 스피노자를 얼마나 읽었으며 그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유익한 논의는 Rubel, 1977; Matheron 1977; Bianchi, 2018을 참조. 특히 비안키는 󰡔신성가족󰡕(1845)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스피노자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55)이 곧 스피노자의 사상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 마르크스의 저술에서 스피노자의 이름은 거의 사라졌지만, (1) 물질을 자기원인으로 이해하는 것 (2) 인간의 사회질서를 자연에 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3)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에서 마르크스는 스피노자 사상을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스피노자의 수용 방식에 관해서는 토젤 2005 참조.] 20세기 후반까지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에서 스피노자가 매우 주변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런 경향을 거슬러 스피노자가 우리 시대 인문사회과학을 위한 주요 이론적 원천으로 각광받고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필수적인 준거 중 하나가 된 것은 무엇보다 루이 알튀세르와 질 들뢰즈,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에티엔 발리바르 같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현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주요한 동력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60년대 말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20세기 스피노자 르네상스 덕분이었다(진태원 2007).


1968년 마르샬 게루의 스피노자 󰡔윤리학󰡕 1부에 관한 주석서가 출간되고, 1969년에는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에 관한 기념비적 저서인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Matheron 1969; 마트롱 2008)와 질 들뢰즈의 국가박사학위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Deleuze 1969; 들뢰즈 2019)가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스피노자 르네상스는 단순히 스피노자의 철학사적 복권에 그친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스피노자가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 전환되는 운동이었다. 실로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은 1965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라는 두 권의 저작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기반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작업을 수행했고, 마트롱은 본인이 직접 술회한 바와 같이, 68혁명의 와중에 그것의 철학적 표현으로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출간했다. 또한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를 발표한 이후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자본주의와 정신분열 연작 안티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등에서 스피노자주의를 기반으로 실천철학적인 작업을 수행하여 현대 철학 및 인문사회과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Deleuze & Guattari 1972; 1980; 들뢰즈가타리 1999; 2014). 그리고 1981년에는 네그리가 야생의 별종: 스피노자에서 권력과 역량를 출간하고(Negri 1981)[이 책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우리말 번역본이 있지만, 번역에 문제가 많아서 참조할 수 없다. 야만적 별종, 윤수종 옮김, 푸른숲, 1997.], 1985년에는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와 정치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을 출간함으로써[발리바르의 책과 논문은 다음 책에 함께 번역되어 있다. 발리바르 2014. 또한 Balibar 2018도 참조.],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현대 사회 분석을 위한 이론적 기반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바 있다(좀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1 참조). 들뢰즈를 제외한 알튀세르와 네그리,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 유럽 스피노자 연구를 주도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게다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 철학을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의 지주로 삼은 것은 바로 자신들의 독자적인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려는 기획 덕분이었으며, 마트롱의 스피노자 정치철학 연구의 기저에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트롱의 이론적 관심이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스피노자주의 사이에는 더 폭넓은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 깊은 위기에 봉착하고 결국 현실 정치 체제의 지도적 이념으로서 붕괴하고 만 마르크스주의의 모순 내지 아포리아를 사고하고 극복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선구적인 작업을 배경으로 하여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철학의 공통적인 특성을 실천(praxis)으로서의 철학으로 개념화해보려고 한다. 실천으로서의 철학은 일차적으로 지배에 대한 비판을 주요 요소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목적론적인 가상과 미신의 제도를 지배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정치론󰡕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의 인간을 파악하고 정치적 실천을 사고하는 데서 (지배적인) 철학의 무능력을 비판하고 있다. 반면 마르크스는 초기 저술에서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인간적 지배의 근본 구조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를 사고하고 비판하는 데서 철학의 한계를 고발하면서 실천 내지 혁명 또는 과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지배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기성 철학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첫 번째 계기를 이룬다. 두 번째 계기는 지배의 근본 특성을 해명하는 것인데, 이것은 소외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초기 마르크스 저술에서 자본주의적 지배의 핵심 원리로 제시된 소외 개념은 󰡔자본󰡕을 비롯한 후기 저술에서 (용어 그 자체는 더는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가치 법칙과 상품 형식에 입각한 인간적 삶의 포괄적인 지배 원리로 확장되고 있다. 스피노자의 저술에는 소외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수동성 개념, 특히 수동적인 정서들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에 상당하는 지배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세 번째 계기는 해방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자체의 변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혁명을 해방의 핵심으로 이해했으며, 스피노자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을 해방 또는 자유의 근간으로 파악했다. 스피노자의 해방 개념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혁명에 비하면 덜 급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해방의 조건이 부재하는 가운데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인 조건 속에서 해방의 현실성을 사고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II. 실천으로서의 철학

 

1. 마르크스: 비철학으로서의 철학

 

겉보기에는 마르크스가 어떤 성격의 철학자였는지는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는 문제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가 말해주듯이 마르크스는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에 반대하여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verändern) 이라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집필한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파악하면서 자본주의적인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계급투쟁과 혁명에 평생을 바치지 않았는가? 또한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지배의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위해 󰡔자본󰡕의 집필에 매진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과연 마르크스를 일차적으로 철학자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철학(또는 철학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질문들은 우리가 자명하게 답변하기 어려운 것들이며,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더불어 정통 마르크스주의및 그것에 기입되어 있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정의(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가 폐기된 이후에는 더욱 더 그렇다(마르크스에게서 철학의 문제에 관한 유익한 개론으로는 르노 2020 참조).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비자명성 및 그것에 함축된 난점들이야말로 우리가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해 새롭게 (그리고 아마도 더 잘) 이해하는 계기를 열어놓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 이후에 철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것으로 존재하고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데리다 식의 표현을 빌리면 마르크스의 철학은 하나 이상/더 이상 하나 아님”(plus d’un)(데리다, 2014: 16)의 철학이라는 것, 곧 보편적이고 단일한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다수의 철학적 실천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복수성으로서의 마르크스의 철학들, 하나 이상/더 이상 하나 아님의 철학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마르크스의 철학이 어떤 성격을 지닌 철학인가 하는 서두의 질문을 다시 살펴본다면, 나로서는 알튀세르가 제안했던 규정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사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근본 화두로 삼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초기 저술에서 유고집에 이르기까지 되풀이해서 이 질문을 제기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철학이 대문자 이론(Théorie), 곧 이론적 실천들의 역사와 구조에 관한 이론으로 정의되었다면, 이른바 자기비판 이후에는 이론 안에서 정치를 재현/표상/대표하기(représenter)로 재정의된다(특히 레닌과 철학).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새로운 철학”, 관념론적 철학들보다 더 과학적이고 참된(바깥의 세계를 더 정확히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이 아니며, 심지어 그람시가 표현했듯이 실천 철학도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에 새롭게 도입한 것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실천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알튀세르, 2008b: 326. 강조 표시는 원문. 이하에서 별다른 지시가 없는 한, 모든 강조 표시는 원문의 것이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재정의는 1976년 강연인 철학의 전화및 같은 시기에 작성된 유고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에서 더욱 명료하게 전개된다(알튀세르 2020). 이제 마르크스주의 철학 또는 유물론 철학은, 관념론적인 철학의 자기 완결성 및 자율성에 대한 주장에 맞서 철학은 본질적으로 타율적임을 자각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철학은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마찬가지로 계급지배 질서의 재생산에 봉사하느냐 아니면 피지배계급의 해방에 복무하느냐 하는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인데, 관념론 철학은 자율성과 자기완결성을 주장함으로써 계급지배 질서의 재생산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은폐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반면 진정한 유물론 철학은, 철학은 자기완결적인 것,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상 유한하고 타율적인 것임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타율적인 것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이러한 관점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나타나는 철학의 지양에 관한 선언이나 반()철학적인 주장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 자체를 제거하거나 넘어서자는 것이 아니라 철학 안에서 철학으로서의 철학과는 다른 새로운 철학적 실천을 수행하는 것, 따라서 알튀세르 자신의 용어법대로 하면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이 글에서 제기하는 실천으로서의 철학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초기 저작에서부터 말년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가 수행한 작업들은, 그것이 외관상 정치적 정세에 관한 저술이든(예컨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아니면 󰡔그룬트리세󰡕󰡔자본󰡕 같은 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저술이든 간에 모두 일관된 유물론 철학적인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타율적인 것으로서의 철학, 실천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유물론적 테제는 철학의 분할이라는 테제를 함축한다. 철학은 보편적이고 단일한 것이 아니라 그 본질 자체에서 분할되어 있다. 따라서 유물론(적 경향)과 관념론(적 경향) 사이의 투쟁, 그리고 그것에 깔려 있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우리 식으로 말하면 갑과 을의 투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유물론 철학을 이해할 수 없고, 더욱이 실천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실천으로서의 철학이 함축하는 철학의 분할이라는 테제는 보편성의 분할이라는 테제와 연결된다. 유물론적인 관점, 실천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보편적인 것은 통합적인 것, 총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상, 분할하는 것이고 적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성의 철학들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정당화의 담론(알튀세르는 라이프니츠-하이데거의 근거율(또는 충분이유율) 개념이 이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본다)을 제기하는 것을 철학적 자율성의 징표로 간주하는데 반해, 유물론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계급지배의 현실을 정당화하며 그것의 재생산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알튀세르 2020). 따라서 알튀세르가 말년에 제기한 우발성의 유물론이나 마주침의 유물론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근거 지으려는 관념론적인 보편성 내부에 적대와 분할을 도입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보편성의 이름으로 가부장적인 지배의 현실을 정당화하며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유물론 철학으로서 페미니즘의 보편성은 이러한 남성주의적 또는 이성애주의적 보편성 내에 분할과 적대를 도입하는 것이다. 구조적인 (포스트) 식민주의적/인종주의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보편주의 담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알튀세르가 제기한 철학의 분할, 보편의 분할이라는 문제는 그 현재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2. 스피노자: 해방의 조건들에 관한 성찰로서의 철학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도 이러한 의미에서 실천으로서의 철학에 관한 사고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서양철학사에서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 따라서 누구보다도 더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통일성을 옹호한 철학자가 아닌가? 더욱이 그는 범신론자로서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에 관한 사변적 성찰에 몰두했던 형이상학자가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피에르 마슈레는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해준다.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마슈레는 좌파 헤겔주의적인 배경을 지닌 질문자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스피노자를 실체의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의 뜻은 속성들 사이에는 아무런 매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 텐데요.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실체 개념은 헤겔적인 실체 개념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후자는 단지 실체만이 아니라 주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많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의 주체 없는 역사에서부터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들뢰즈의 강조 등에 대해 말해볼 수 있겠죠. 선생님께서 이점에 관해 어떻게 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곧 선생님께서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과 헤겔의 실체 개념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읽고 계신지요? (Macherey, 2021: 19)

 

마슈레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한다.

 

헤겔은 스피노자 독해에서 󰡔윤리학󰡕 1~2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스피노자를 존재와 그 표상에 관한 사상가로 만들었고, 이때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지식이론을 수반하는 존재론으로 이루어집니다. 만약 헤겔이 󰡔윤리학󰡕의 나머지 3개 부와 정치학 저작들을 간과하지 않았다면, 그는 스피노자가 주체가 되지 못할 운명을 지닌 실체의 철학자, 결과적으로 세계와 삶의 현실에서 단절된 철학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무엇보다도, 들뢰즈가 특징지은 것처럼, “실천철학이라는 것, 본질적으로 해방의 조건들(conditions of liberation)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스피노자가 그의 철학의 상이한 측면들을 모아놓은 위대한 저작에 윤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스피노자가 계속 되물었던 거대한 질문은, 정적인 덩어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양한 방향에서 동역학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실행하는 실체성의 지평 아래에서 어떻게 점점 더 능동적으로 될 수 있고 덜 수동적이게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Macherey, 2021: 19-20. 강조는 인용자)

 

질문자들의 질문과 마슈레의 답변에는 (19세기 초 독일 범신론논쟁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스피노자에 관한 오래된 통념과 이를 깨뜨린 20세기 후반 스피노자 르네상스 사이의 관점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스피노자를 범신론 철학자라고 이해하는 이들이 여전히 스피노자 철학을 주체성이 부재한 실체의 철학이라고 이해한다면, 후자의 관점에서 이해된 스피노자는 무엇보다도 실천철학자,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마슈레가 지적하듯이 해방의 조건들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 실천으로서의 철학을 수행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를 범신론 철학자로 이해하는 것은, 마슈레가 정당하게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의 철학, 그의 대표작인 󰡔윤리학󰡕을 단편적으로, 더 나아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부적합하게”(단지 잘려나가고 혼동된”(confusam tantum et mutilatam)(󰡔윤리학󰡕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이하 스피노자 저술에서의 인용문은 모두 필자가 원문에서 직접 번역했다.] 방식으로) 독서하는 것의 결과다. 󰡔윤리학󰡕 3~5부와 분리되어 독서될 경우 1, 2부의 중심 주제인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 및 심리철학도 적합하게 인식될 수 없는데, 스피노자 철학에서 가장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 부분들의 논의에 이미 스피노자의 실천적인 관심이 담겨 있으며, 그 논의 자체가 실천적인 관심에 따라 일정하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윤리학󰡕해방의 조건들에 관한 성찰인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지난 50여 년 동안 전개된 스피노자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다수의 학자들이 견지해온 관점이며,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마르크스와 스피노자라는 주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관점이다.[마슈레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토젤의 말과 공명한다. “윤리학의 주요 대상은 무한하게 무한한 실체가 아니라, “자기원인인 실체로서 규정된 존재를 경유하여 전개되는, 윤리적 해방의 과정이다.”(Tosel, 1994: 19).]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작업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는데, 이는 그의 철학이 관념론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 기원주체, 목적이라는 요소들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과 대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알튀세르 2008a; Althusser 1998). 그리고 사실 이 세 가지 요소는 스피노자가 󰡔윤리학󰡕 1부에서 사변적인 논의를 통해 반박하고자 한 핵심 논점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한 사례로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을 살펴볼 수 있다. 󰡔윤리학󰡕을 시작하는 자기원인 개념은 󰡔윤리학󰡕 1부와 2부에서 전개되는 기원, 주체, 목적/종말에 대한 비판의 토대를 제시해주며, 심지어 그 개념 자체 안에 이미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한 탈구축이 함축되어 있다. 자기원인은 하이데거가 주장한 바와는 달리 존재-신학적 형이상학의 근거 개념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형이상학적 근거에 대한 탈구축을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원인은 전통적인 존재-신학(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동일한 존재자가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로 정립된다는 사실에 내포된 자기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시간적 선행성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현행적 무한”(actual infinity)을 함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배제된, 자기 자신의 작용인으로 사고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는 󰡔성찰󰡕에 대한 카테루스와 아르노의 비판에 대한 답변에서 자기 자신의 작용인또는 유사 작용인”(quasi-cause efficiente)으로서의 자기원인의 가능성을 모색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후기 스콜라철학에서 신이라는 만물의 기원 내지 근거는 형상인(causa formalis)으로서의 자신에 의한 존재”(ens a se)로 사고되었을 뿐이다(Carraud, 2002: 283).


반면 스피노자는, 들뢰즈가 1부 정리 25의 주석에 근거하여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원인에 입각하여 원인이라는 개념을 다시 사유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는 행위 주체 내지 기체(substratum 또는 subjectum)에 입각한 인과관계, 따라서 항상 원인과 결과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항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행적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인과작용 자체를 (유일한) 기체로 삼는 인과관계다. 이렇게 이해된 자기원인은 기원과 목적/종말이 없으며 인과작용의 주체 내지 기체도 없는 인과관계, 인과적 작용의 (절대적) 무한성을 가리키는 개념과 다르지 않다(Laerke 2009. 또한 이혁주 2022도 참조). 스피노자에게 존재라는 서양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이름은 바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인과관계로서의 자기원인 또는 그것의 다른 이름으로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오늘날 문명의 상대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physis로서 이해된)의 자족성을 가리키며, 따라서 자연을 초월하는 창조의 주체로서 기독교적인 신 개념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적인 자연과 달리 무한한 인과작용의 역동성을 표현한다. 더 나아가 자기원인 개념은 이러한 무한한 인과작용을 기체적인 항들 없이 전개되는 인과관계로 이해하며, 이러한 인과관계의 전개 속에서만 각각의 원인과 결과의 항들이 구성되고 변용되고 해체된다고 파악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관계론적인 존재론을 함축하는 것이다. 기원이나 종말/목적 개념을 탈구축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은 다른 항들과의 관계에서 분리되거나 독립되어 있는 원자적인 주체 내지 기체로서의 항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자기원인 개념이 수행하는 전략적인 기능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1부 정리 8의 주석 2에서 누군가가 실체는 창조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동시에 거짓된 관념이 참된 관념이 되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은 생각될 수 없다.고 말하거나 1부 정리 16에서 신은 그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을 산출한다고 말하는 것, 1부 정리 17의 주석에서 신을 자유원인으로 규정하면서 자유의 의미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 권능(potestas)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 또는 2부 정리 3의 주석에서 우중(vulgus)신의 역량신의 자유의지로 이해하고 그것을 왕의 역량과 혼동한다고 말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신 또는 실체 또는 자연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1부록에서 목적론적인 편견이 자연을 주재하는 초월적인 인격신에 관한 미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원인 개념의 전략적 탈구축 기능의 효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실천으로서의 철학이라고, 그것은 기성의 철학이 제시하는 보편성의 가상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지배와 예속의 철학적 쟁점들을 제기한다고, 일종의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을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 내용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서술 방식의 측면에서도 사실은 철학의 분할, 보편의 분할을 수행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점에서는 들뢰즈의 탁월한 통찰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한 권으로 된 책이 아니라 사실은 두 권으로 된 책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들뢰즈 2019). 곧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보통 윤리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간주하는, 정의, 공리, 정리, 증명으로 이어지는 엄밀한 연역적 논증 부분은 사실 윤리학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고 스피노자의 철학적 통찰과 역량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윤리학전체는 아니다. 이런 엄밀한 연역적 논증의 윤리학 이외에도 서문부록, 주석으로 이루어진, 적대와 비판의 윤리학이 존재하며, 이 두 개의 윤리학은 각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조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 입각할 때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어떤 의미에서 해방의 조건들에 관해 성찰하는 실천으로서의 철학인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III. 해방의 조건들: 소외 비판의 두 형태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스피노자, 그리고 스피노자와 마르크스는 구체적으로 지배와 예속에 관해 어떻게 논의하고 있는가? 이 글에서는 이를 소외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소외”(Entfremdung 또는 Entäußerung, alienation)라는 개념은 헤겔 이후 서양 근현대철학의 주요 어휘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개념이며, 마르크스주의 연구, 특히 루카치 이후 이른바 서방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의 필수적인 이론적 요소로 간주되어온 개념이다(이 개념의 이론적 역사에 관해서는 Walter Kaufmann 1970; Jaeggi 2014 1부 참조). 구조주의 또는 포스트 구조주의가 등장한 이후 이 개념은 인간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한계로 인해 지난 수십 년 간 현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에서 영향력이 점차 쇠퇴해왔다. 하지만 최근 라헬 예기(Rahel Jaeggi)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사회비판이론을 위해 소외 개념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Jaeggi 2014(독일어 원서는 2005년에 출판); 로자 2020).

주목할 만한 것은 몇몇 연구자들이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이론적 관계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프랑스의 연구자들이 선구적인데, 특히 프랑크 피슈바흐와 프레데릭 로르동의 작업이 두드러진다(Fischbach 2006; 2014. Lordon 2010; 2013). 이들은 주로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연구되어온 소외 개념을 스피노자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소외 개념의 이론적 탄력성을 입증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소외 개념을 개조하고 확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이 스피노자 철학을 기반으로 어떻게 소외 개념을 변용하고 확장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기반하여 현대 자본주의에서 지배와 예속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이들의 통찰을 다시 정정하고 확장해보겠다.

 

1. 대상의 상실로서의 소외: 마르크스와 소외 비판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소외 개념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집약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단일한 형태의 소외가 아니라 4가지 소외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위대함을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으며, 대상적 인간, 현실적이기 때문에 참된 인간을 인간의 고유한 노동의 결과로 파악하고 있다”(마르크스, 2006: 192)는 점에서 찾으면서 동시에 헤겔의 한계는 그가 국민경제학(또는 정치경제학)의 관점에 입각하여 노동의 긍정성만을 보고 있을 뿐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헤겔이 간과하는 노동의 부정적 측면을 소외된 노동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의 네 가지 측면을 제시한다(마르크스, 2006: 82 이하). 첫 번째 측면은 인간 노동의 산물이 노동에게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에게서 독립된 힘으로서 노동에 대립한다는 점이며, 이렇게 하여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의 현실성 박탈,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획득은 소외, 외화로 나타난다.”(같은 책, 85) 두 번째 측면은 소외가 생산의 결과에서뿐만 아니라 생산의 행위에서도, 생산적 활동 자체의 내부에서도 나타난다”(같은 책, 89)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 수행되는 노동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강제노동이라는 점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소외된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성격을 띤다. 이러한 노동은 노동자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대립적인 힘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속하며, 노동자 자신의 상실”(같은 책, 90)이다. 마르크스는 세 번째 측면을 인간의 유적 존재(Gattungswesen)와 관련시킨다.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비유기적 자연과의 물질적인 교섭 관계를 통해 생존하며, 따라서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같은 책, 92)라는 점에서 성립한다. 자연과의 교섭에 기반하여 의식적 생명활동”(같은 책, 94)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에서의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1. 자연을 소외시키고, 2. 자기 자신, 인간 고유의 활동적 기능, 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인간을 인간의 유()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의 노동 소외로부터 네 번째 측면이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같은 책, 96)라는 측면이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실현되고 표현되는 소외로서, 노동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곧 노동자가 소외된 노동을 통해 생산활동을 수행하고 생산물을 산출함으로써, “생산하지 않는 사람”(같은 책, 99)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노동자는 소외되고 외화된 노동을 통해서 노동에게 낯설고 노동 바깥에 성립하는 인간의 이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한다.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는, 또는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노동의 주인을 불러도 좋다면, 노동에 대한 자본가의 관계를 산출한다.”(같은 책, 같은 곳)


청년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다양한 비판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질적이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며 󰡔독일 이데올로기󰡕 저술을 기점으로 하여 인식론적 절단이 발생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아직 헤겔-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에 사로 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자본󰡕을 중심으로 전개된 과학적 마르크스의 저작들과 엄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청년 마르크스 사상의 중심에 존재하는 소외론을 마르크스가 헤겔-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에 사로 잡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로 간주했다(Althusser 1996; 알튀세르 2017). 다른 한 편 현대적인 소외론을 이론화하려는 연구자들 역시 청년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소외 개념의 현대적 재구성 작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예기의 작업이다. 그는 2005년에 독일어로 출간된 󰡔소외: 한 사회철학 문제의 현재성에 대하여󰡕(Entfremdung: zur Aktualität eines sozialphilosophischen Problems)라는 저작에서 소외 개념을 현대의 이론적사회적 조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비판적 재구성 작업에서 청년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본질주의의 대표 사례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기는 󰡔인간의 조건󰡕에서 전개된 아렌트 식의 마르크스 비판이 노동과 세계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Jaeggi, 2014: xxi),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포이어바흐를 매개로 전유된 헤겔의 소외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본질적인 인간적 힘들 의지, 목표, 인간적 능력들”(Jaeggi, 2014: 14)의 소외로서의 노동 소외를 뜻한다는 점에서 본질주의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이러한 비평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깊은 개념적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예기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는 Gädeke 2014; Haverkamp, 2016; Sørenson, 2019; Evans, 2022 참조). 우선 알튀세르나 예기의 비판과 달리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매개로 헤겔의 소외론을 단순 수용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를 읽어보면, 마르크스가 노동 소외와 관련하여 헤겔과 포이어바흐에 준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항상 거리를 둔 비판적인 준거다. 오히려 비판이론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 개념으로서 소외는 마르크스의 개념적 발명품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소외 개념을 주목할 만하게 풍부하게 하고, 심지어 그 내포를 완전히 쇄신했다”(Fischbach, 2006: 14, 각주) 1)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다.]더욱이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본질주의적인것인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본질주의 비판은 마르크스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인간의 본질 같은 것을 전제한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마르크스가 낯선 존재”, “대상화”, “외화”, “인간 고유의 활동”, 특히 유적 존재같은 헤겔-포이어바흐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외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객관적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이러한 본질의 회복을 소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에게 소외는, 피슈바흐가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듯이 대상 및 ... 대상성 일반의 상실”(Fischbach, 2006: 21)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노동 소외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나타나며, 둘째,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이 강제노동이라는 데서 비롯하는 생산 활동 자체에서의 소외로, 셋째, 비유기적 자연과의 관계의 소외로 인해 생겨나는 인간의 유적 존재와의 소외로, 넷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로 표현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관계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소외의 핵심을 대상 및 대상성의 상실로 이해하는 것은, 역시 피슈바흐가 말하듯이 노동자 자신을 대상적 존재자”(être objectif)(Fischbach, 2006: 21)로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대상적 존재자란, 일차적으로는 주체로서의 노동자가 의식적 존재자이기 이전에 신체적물질적 존재자라는 것을 의미하며, 더 핵심적으로는 노동자를 비롯한 인간 존재자가 주체로서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대상적 존재자들과의 관계가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뜻한다.[지나가는 김에 지적해두자면, 독일어처럼 ObjektGegenstand라는 두 개의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유럽어권(예컨대 영어에서는 object, 프랑스어에서는 objet)에서 서로 구별되는 이 두 용어를 번역할 때 늘 혼란이 생긴다. 이런 측면에서 피슈바흐가 대상적 존재자라고 부르는 것을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적 구별에 입각하여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유기적인 자연과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다른 대상적 존재자들(예컨대 주거, 양식, 의복 등)과의 관계이기도 하며, 다른 인간 존재자들과의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 주체는 주체로서 존재하고 활동하고 재생산될 수 있다. 마르크스 자신은 이것을 소외와 구별되는 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Marx, 1957: 512)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소외 개념에 대해 흔히 갖고 있고 청년 마르크스의 본질주의적-인간주의적 소외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을 뒤집는 분석이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관점에서 이해될 경우 소외는,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지닌 인간 주체 내지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노동관계 속에서 사물의 낯선 힘에 예속되고 더 나아가 사물성(또는 상품)의 일부로 전환되며, 이로써 인간들 사이의 관계 역시 사물들(상품들) 간의 관계로 전도되는 현상, 요컨대 루카치의 사물화”(Verdinglichung, reification) 개념이 지칭하는 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주체와 객체, 인간과 사물 사이의 존재론적 대립이 소외 내지 사물화의 개념적 핵심으로 남게 된다. 반면 소외의 본질을 대상 및 대상성의 상실로 이해하는 것은 주체 자체를 대상적 존재자로 파악하는 것, 대상들의 세계 연관 속에서만 주체는 주체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주체는 대상들의 세계의 일부로서만 주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피슈바흐 자신의 이론적 기획에서 이는 주체 개념을 (하이데거적 의미의) “세계 내 존재로 파악하는 것을 함축한다(Fischbach 2014 “재판 서문”). 이점에서 스피노자-마르크스-하이데거(그리고 존 듀이) 사이에는 긴밀한 철학적 연관성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런 존재론적 고찰은 소외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적 분석보다는 덜 흥미롭다.] 이는 그 자체로 독창적인 해석이지만,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또한 본질적인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소외를 이처럼 대상 및 대상성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한 범주로서 소외 개념은 민주주의나 정의 같은 통상적인 규범적 개념들이 수행하지 못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을 지니고 있다(Renault 2006). 우리가 그것을 포스트포드주의로 이해하든 아니면 신자유주의로 이해하든, 또는 절대적 자본주의”(에티엔 발리바르)로 이해하든 간에, 지난 수십 년 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개과정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들(세계화와 국민국가의 약화,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이주의 확산과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의 강화 등)을 드러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와 정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경제적인 원리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 곧 자본 축적이 사회 모든 분야로 확산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상품화 과정을 촉진했으며, 이로써 청년 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부르는 현상을 더 강화시켰지만, 주류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규범적 비판의 토대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와 정의 같은 개념들은 이 현상들에 대해 의미 있는 내재적 비판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는 소외 개념을 후기 마르크스의 작업과 연결하여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알튀세르는 제라르 뒤메닐의 󰡔자본의 경제 법칙 개념󰡕에 부친 서문(1977)에서 󰡔자본󰡕 1권의 중심적 서술순서와 추상적 장들(󰡔자본󰡕 1권 서두에 나오는 상품, 화폐, 자본에 관한 장들)을 한 편에 놓고, 주요 서술순서를 깨뜨리고 방해하는, “항상 낯선 것으로서 등장하는 장들”, ‘역사적’, ‘구체적장들을 다른 한 편에 놓으면서, 이 양자의 이질성과 연관성을 함께 고려할 경우에만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에서 벗어나 착취를 그 구체적 조건들 및 형태들 속에서 이해”(알튀세르 2018)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 1권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하여장을 비롯한 역사적인 장들에서 서술한 초기 자본주의의 성립 및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가혹한 착취, 초과착취가 자본의 논리적 전개과정을 서술하는 전반부 장들에서 분석 대상이 되는 정상적인 착취에 대해 우연 속성으로서 외삽되는 것이 아니라, 이 후자의 조건이자 요소로서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Marx 1987; 마르크스 2008). 곧 착취는 노동과정 및 노동규율의 냉혹한 제약을 포함하고 있으며 노동력 재생산의 조건 속에서만 사고될 수 있는 것으로, 지배의 형식이자 과정이면서 또한 예속적 인간들(불구화되고 배제된 인간들)의 생산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청년 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또 다른 개념적 표현이다. 물론 청년 마르크스와 노년 마르크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자본󰡕 사이에는 거대한 이론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전자에는 노동의 이중성에 기초를 둔 가치법칙과 잉여가치 개념이 부재하며, 더 나아가 상품 물신숭배 개념으로 표현되는 현실적 가상의 계기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외라는 개념이 이러한 이론적 요소들과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인간학적 요소들을 제시해준다.

 

2. 수동성과 예속: 스피노자의 소외 비판

 

과연 스피노자 철학에도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의 소외 개념이 존재할까? 또는 그러한 소외 개념에 필적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개념을 새롭게 확장할 수 있을 만한 이론적 요소들이 존재할까? 이러한 질문이 최근 10여 년 간 몇몇 마르크스주의적 지향을 지닌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제기했던 화두였다. 이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이들이 프랑크 피슈바흐와 프레데릭 로르동이다.


피슈바흐가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대상 및 대상성의 상실로 규정할 때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스피노자주의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특히 Fischbach, 2014: 7). 그것은 우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스피노자주의적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서문에서 인간을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로 이해하는 관점, 곧 인간을 자연과 단절해 있는 존재자, 더 나아가 자연과 대립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존재자로 이해하는 관점 이는 하이데거가 지적하듯이 데카르트나 베이컨의 저작에서 잘 드러난다(진태원 2020) 에 맞서, 자연과의 연속성 속에서 자연의 일부”(pars naturae)로 규정한다. 이는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 존재”(마르크스, 2006: 198)라고 말하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상통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인간학적인 측면에서도 스피노자주의적인데,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그가 유한 양태 또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라고 부르는 다른 자연적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 속에 존속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를 본질로 지니고 있으며(󰡔윤리학󰡕 3부 정리 7), 이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은 다른 존재자들과의 지속적인 변용(affectio) 관계, 곧 변용되고 변용하는 관계 속에서 성립하고 존속하고 또한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생존의 기회이면서 죽음과 파괴의 위험이다). 마찬가지로 대상적 존재자로서의 마르크스의 인간도 한편으로는 자연적 힘, 생명력을 갖추고 있는 활동적 자연 존재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으로 변용을 인용자 추가] 겪고(leidendes), 제약되고 한계 지어진 존재”(Marx, 1957: 578; 마르크스, 2006: 198. 번역은 약간 수정).

더 나아가 인간을 국가 속의 국가로 이해하는 관점은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의 모든 편견의 기저에 놓여 있는 가상으로서, 이러한 가상은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opinentur)”(󰡔윤리학󰡕 1부록)는 데서 나온다. 곧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자연적 존재자들과의 끊임없는, 변용되고 변용하는 인과 연관 속에서만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또는 정신의 자유로운 권능(potestate)에 의해 우리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한다고 믿을”(󰡔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 , 사실 가장 가상에 빠져 있으며 가장 수동적이다. 마르크스의 용어법대로 하면 소외된 상태에 머무른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젖먹이 아이, ... 성난 어린아이, ... 겁쟁이, ... 술 취한 사람, ... 섬망에 빠진 사람(delirans), 수다쟁이, 어린 아이 및 이런 부류의 많은 사람들을 자유로운 결단의 미망에 빠져 있는 이들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자유의 가상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은 의식하는 반면 그 행동을 규정하는 원인들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생겨난다(이러한 자유의 가상의 원인은 󰡔윤리학󰡕에서 세 차례에 걸쳐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자유의 가상은 정신의 자유로운 권능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며, 이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의 실존과 행위, 사고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변용의 인과연관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무지와 결부되어 있다.


피슈바흐는 이러한 스피노자주의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에게서 소외는 대상화 내지 사물화가 아니라, 사실은 순수한 주체성을 의미한다는 주목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여기서 순수한 주체성은, 대상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대상들과의 연관성에서 분리된 채, 추상적인 행위 능력, 특히 추상적인 노동력으로 환원된 것, 따라서 추상적 주체성”(Fischbach, 2014: 150)을 의미한다. 이러한 추상적 주체성은 사실 무능력(impuissance)으로 환원된 주체성이며, 자본주의에 고유한 소외는 인간들을 그 고유한 생산적 역량에 대한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긍정의 객체적 조건들에서 분리된 채로, 단순한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주체성의 무능력”(Fischbach, 2014: 163)으로 환원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이러한 결론은 단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그룬트리세󰡕󰡔자본󰡕 같은 후기 저작에서도 동일하게 도출해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상품관계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는 일체의 생산수단과 분리된 채 노동력 상품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들(프롤레타리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결국 더욱 더 노동자들을 비롯한 인간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추상적 주체성, 순수한 주체성으로 환원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면 로르동은 피슈바흐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적인 소외 개념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분석에서 스피노자가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자본주의 분석가들이 질문해왔던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왜 노동자들은 매일같이 공장(또는 회사)에 나가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때로는 즐겁게,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식인 것처럼 일하는가 하는 질문이다(Lordon, 2010: 서문). 로르동은 임노동을 매우 불행하고 힘든 일로 간주하고 자본주의가 점점 더 양극화되어가리라고 생각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적인견해에 반대한다. 착취관계로서의 임노동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생산물로부터 노동자들의 이중의 분리로 충분하다고 믿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맞서 로르동은 매일같이 노동자들이 스스로 공장(또는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론적 어휘들에는 부재한 개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용되는 정서(affectus, affect)라는 개념이다. 이것에 기반을 둔 욕망의 체제”(régime de désir)(Lordon, 2010: 73) 또는 욕망과 정서의 체제정념적 체제”(régime des passions) 같은 용어들을 통해 강제와 동의(“자발적 예속”)의 이분법을 넘어서 자본주의적 예속 내지 소외의 특성을 해명하는 것이 로르동의 이론적 기획이다. 그것은 관계의 구조주의와 정념의 인간학, 마르크스와 스피노자”(Lordon, 2010: 10)를 결합하려는 기획, 더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의 정념의 인간학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임노동 이론과 교차하는 지점”(같은 책: 13)을 해명하려는 기획이다.


로르동은, 명시적으로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지만,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대한 재독해에 입각하여 소외를 상실이나 분리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외 개념은 결국 소외 이전 상태의 회복이나 역량의 재전유를 목표로 삼는데, 여기에는 역량(potentia, puissance)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이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Lordon, 2010: 182). 곧 소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편으로 소외를 노동자들이 지닌 역량과의 단절로 이해하고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러한 역량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이해는 역량을 현실태(acte)와 구별되는 잠재태(en puissance)로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해 항상 모종의 실현되지 않은 잔여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로르동은 들뢰즈 역시 수동성을 역량과의 단절로 이해하고 능동성은 역량을 온전히, 끝까지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이해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들뢰즈의 수동성-능동성 개념에 대한 이해에 내재한 이러한 난점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준 사람은 파스칼 세베락(Pascal Sévérac)이다. Sévérac 2005 중에서 4Une théorie de l'occupation de l’esprit참조). 스피노자는 역량을 이처럼 잠재적인 힘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실행할지 실행하지 않을지 여부는 행위 주체(신이든 왕이든 또는 인간 주체이든 간에)의 의지 내지 결단에 있다고 보는 관점을 신학적인간학적 가상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를 소외론의 토대로 삼는 것은 분명 적절치 않다.


로르동은 우리가 스피노자적인 욕망과 정서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적인 소외를 사고하기 위해서는 욕망의 자동사성”(intransitivité du désir)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념이 로르동의 가장 독창적인 이론적 기여 중 하나다. 그가 말하는 욕망의 자동사성, 자동사적인 것으로서의 욕망은 󰡔윤리학󰡕 3부록에서 제시된 욕망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 9의 주석에서는 욕구(appetitio)와 욕망(cupiditas)을 구별하면서 욕구와 욕망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욕망이 자신들의 욕구를 의식하는 한에서의 인간들과 관련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만, 부록에서는 조금 더 정확히 욕망을 정의한다. “욕망은 그것의 주어진 여하한(quacunque) 변용으로부터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다.이렇게 정의된 욕망은 주어져 있는 목표나 대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여하한 변용에 의해 무언가를 추구하도록 규정되는 욕망의 순수한 힘”(Lordon, 2010: 33) 또는 대상 없는”(Lordon, 2013: 60) 욕망이다. 이 욕망이 어떤 대상을 추구할 것인지는 변용들에 의해 규정되며, 이러한 변용들은 다름 아닌 이런저런 독특한 실재들과의 마주침의 역사이며, 또한 그 역사에 의해 규정되는 것들이다. 스피노자 자신은 󰡔윤리학󰡕에서 주로 개인의 차원에서 이러한 변용의 역사를 살피고 있지만, 이것을 집합적인 차원으로, 또한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차원으로 확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로르동은 자동사적인 욕망을 규정하는 정서들의 체제라는 견지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를 포드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으로 제시한다. 포드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에서 경험하는 슬픔을 시장에서의 소비자의 쾌감을 통해 보상받았다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자신들의 일 자체를 기쁨으로 경험하도록 강제된다. 그러나 포드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노동 내지 일을 부여받았다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이것이 훨씬 더 불분명해진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에서는 전통적인 제조업 대신 서비스 산업이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여기에서는 고객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접객업)이나 기업가 정신(창업자, “크리에이터”)으로서의 능동성,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을 발휘할 것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자에서는 정해진 일, 노동, 직무에 대한 충실한 이행이 중요했다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어떤 일이 주어지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성향”(disposition) 내지 태도”(attitude)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 자체를 프로처럼즐길 것, 자신의 일을 사랑할 것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임금노동자가 내면화하는 주인-욕망”(désir-maître)이 된다. 이것이 바로 로르동이 말하는 욕망의 자동사성의 구체적인 의미다.


그렇다면 자동사적인 것으로서의 욕망은, 특정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은 욕망, 이런저런 변용들에 의해 타동사적인 욕망들로 전환되기 이전의 순수한 추상적 욕망, “대상 없는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로르동이 말하는 대상 없는 순수한 추상적 욕망으로서의 자동사적인 욕망은, 피슈바흐 등이 강조하는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분리된 추상적 주체성과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두 사람이 모두 정당하게 강조하듯이 각자 스피노자주의적인 관점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가 드러내는 두 측면을 포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수동성과 신을 향한 사랑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할 겸,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세 번째 계기인 해방의 문제에 관해 몇 마디 결론 삼아 덧붙여보겠다. 피슈바흐의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적 소외론이 보여주는 것은 이를테면 근대적 주체의 역설이다.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와 정치의 주체로 간주하는 한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주체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개념화되었으며, 자율성과 능동성의 지표는 그것이 얼마나 대상들의 세계에서 독립적인지, 이러한 대상들의 세계 속에 포획되지 않고 그것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로 설정되었다. 반면 피슈바흐가 보여주는 것은, 대상들과의 세계에서 분리된 이러한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가 사실은 소외된 주체라는 점이었다. 곧 이러한 주체는 해방의 주체가 아니라 사실은 자본주의적 관계에 포섭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성립하는 주체, 상품으로서의 노동력만을 지니고 있는 주체이며, 자본주의적 관계에 실질적으로 포섭되면 될수록 더욱 더 대상과의 연관에서 분리되어 순수한 주체성으로 환원되는 주체, 그리고 바로 이로 인해 행위 역량을 박탈당하거나 역량이 더욱 더 축소되는 주체, 다시 말해 더욱 더 자본에 예속되는 주체인 것이다.


이점과 관련하여 피슈바흐의 분석은 조금 더 보충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피슈바흐는 자본주의적 상품 관계 속에서만 예속적 주체성의 성립을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다른 방식으로도 분석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알튀세르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종속의 본질적인 조건을 이데올로기적 호명에서 찾았으며, 푸코는 규율권력에서 찾았다. 순수한 주체성은 사실은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수동적인 주체를 뜻한다는 점과 관련해보면, 푸코의 분석이 더 시사적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discipline)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예속을 확보하며 체력에 순종-효용의 관계를 강제하는 이러한 방법을 규율이라고 부를 수 있다.”(푸코, 2003: 216; Foucault, 1975: 139) 또는 조금 더 정확히 규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규율의 역사적 시기는 신체의 능력 확장이나 신체에 대한 구속의 강화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신체가 유용하면 할수록 더욱 신체를 복종적인 것으로 만드는, 또는 그 반대로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유용하게 만드는 관계의 성립을 지향하는, 신체에 대한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는 시기다.”(같은 책, 217; Ibid. 강조는 인용자) 곧 푸코가 규율이라고 부르는 권력은 개인이나 집단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작용이 아니라, 개인들의 신체가 역량을 더 잘 발휘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더 순종하게 만드는 관계를 확립하고 유지, 강화하는 메커니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스피노자의 수동성 개념과 논리적으로 상통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수동 개념에 대한 통상적 이해(데카르트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와 달리 그것을 외부 작용을 겪는 것 또는 그러한 작용의 결과로서 정의하지 않고 오히려 원인 개념으로 정의한다. 수동은 부적합한 원인”(causa inadaequata) 또는 부분적인 원인”(causa partialis)(󰡔윤리학󰡕 3부 정의 2)을 가리킨다. 부적합한 원인이란, 어떤 행위자가 어떤 결과를 산출했을 때 이 결과가 그 행위자의 행위만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 원인, 따라서 그 결과의 설명을 위해서는 또 다른 원인이 필요한 원인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그것을 부적합한 또는 부분적인원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어떤 행위자의 역량의 정도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행위자의 역량만으로 그 행위자가 산출한 결과가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면, 그 행위자는 수동적인 행위자가 된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역량의 증대 내지 촉진을 나타내는 기쁨과 역량의 감소 내지 억제를 나타내는 슬픔의 이원성에 만족하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각각 쾌감”(titilatio)희열”(hilaritas), “고통”(dolor)우울”(melancholia)로 세분하고(3부 정리 11의 주석), 더 나아가 여기에 능동과 수동이라는 다른 개념쌍과 결부시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행위자가 외부 원인에 의해 큰 기쁨을 느끼고 따라서 역량이 크게 증대한다고 해도, 그 기쁨이 신체 일부의 기쁨과 역량의 증대로 한정되고, 더 나아가 부분적인 원인으로서 행위자의 역량을 통해 획득된 것이라면, 그것은 행위자의 해방 내지 자유를 위해 충분하지 못하다. 오히려 그것은 예속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푸코가 규율에 대해 제시하는 정의는 스피노자적인 수동 개념의 훌륭한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규율은 분명히 신체의 행위 역량의 증대(따라서 기쁨의 정서)를 목표로 삼는 기술이지만, 행위 역량의 증대의 조건은 타자의 권력에 대한 예속이며, 따라서 그러한 역량의 증대는 부분적인 원인으로서의 행위 역량의 증대, 수동적인 행위 역량의 증대를 뜻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규율권력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가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독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납득할 수 있는 점이다. 결국 착취란, 자본가 권력의 통제에 잘 순응하면서 동시에 일 잘하는 신체, 뛰어난 행위 역량(노동력)을 지닌 신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푸코가 말하는 󰡔자본󰡕은 프랑스어판 󰡔자본󰡕 2”(Foucault, 2012: 100-101), 곧 사실은 독일어판 󰡔자본󰡕 1권의 3편과 4편인데[저 자신의 경우, 마르크스에서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 적어도 제게 영감을 주었다고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자본󰡕 2권입니다. 곧 첫 번째로는 자본의 발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자본주의의 발생에 대한 분석, 두 번째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분석, 특히 권력 구조 및 권력 제도의 확립과 발전에 관한 분석과 관련된 모든 것입니다.”], 이는 알튀세르가 󰡔자본󰡕역사적이고 구체적인장들에 준거하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의 규율 권력 개념에는 스피노자 철학에 존재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서 개념, 특히 수동적 기쁨이라는 개념이다. 로르동의 분석이 기여하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자동사적인 것으로서의 노동자들의 욕망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의 축적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곧 주인 욕망을 다시 내면화하기”(Lordon, 2010: 85) 위해서는, 그 욕망은 기쁨의 정서들을 통해 만족을 경험해야 한다. 이러한 기쁨의 정서는 각각의 노동자들이 노동 내지 일을 통해 경험하는 기쁨, 역량의 증대를 경험하면서 느끼는 기쁨이지만, 그것은 항상 이미 임노동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며, 자본의 권력에 대한 종속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수동적 기쁨이다. 그러나 어쨌든 스피노자주의적인 코나투스의 논리를 따른다면 이러한 기쁨의 계기가 없다면 지속적인 노동의 수행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자본 축적의 증대가 전제하는 역량의 증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지속적인 자본 축적은 규율의 기술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노동자들 각자가 스스로 기업가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축적의 활동에 참여할 것을 전제하는데, 이것은 수동적인 기쁨이라는 계기(쾌감, 만족, 사랑 등으로 나타나는)를 반드시 요구한다.


하지만 푸코의 규율권력은, 신체 역량의 증대의 계기를 포함하지만 이러한 정서적 계기는 결여하고 있다. 푸코의 규율 권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내지 주체가 아니라 바로 신체. 가끔 오해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규율권력은 정신에 대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따라서 규율권력과 관련하여 우리 안의 파시즘운운하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정신과 신체의 통합체로서 인간에 대해 작동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신체에 대해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아주 의도적인 방법론적 결정의 결과다. 곧 푸코가 비판하고 대체하려고 하는 법적 권력론이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플라톤의 영혼의 감옥으로서 신체라는 관점으로 표현되는)를 전제하는 데 반해, 푸코는 신체의 감옥으로서의 정신”(󰡔감시와 처벌󰡕, 서문)이라는 모토 아래 권력은 권력자의 의지나 정신적 결정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신체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주장하는 동일한 관념론적 전통에 반대하면서 스피노자는 푸코와 달리 정신과 신체의 동일성,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한다(simul sit)”(󰡔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는 테제를 제시한다. 이러한 심신 평행론적또는 심신 동일론적 관점은 우리가 보기에 예속의 계기를 더 적절히 설명할 수 있을뿐더러 해방의 조건을 사고하는 데도 더 낫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로르동의 분석에서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로르동은 포드주의 체제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선행적인 이행으로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본 축적의 방식이나 노동과정의 현실은 선행적 이행보다는 공존 내지 전략적인 분업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특히 선진 자본주의 경제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불평등 분업구조 내지 가치사슬을 시야에 놓는 세계체계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더욱 그렇다. 이는 마치 푸코가 말하는 주권적인 법적 권력과 규율 권력,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시간적인 대체 관계에 있다기보다 상호결합된 지배의 계기를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더 나아가 로르동의 분석에서는 수동적 정서의 계기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상대적으로 인식과 상상의 계기는 충분한 중요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해방의 조건들을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사고하기 위해서는 상상과 정서, 인식의 계기를 복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수동적인 기쁨의 정서가 예속화 내지 소외를 설명하는 데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는 그것이 고착의 현상을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52의 주석에서 놀람”(admiratio) 개념을 활용하여 이러한 고착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이를 정서적 예속(servitudo)의 핵심으로 제시한 바 있다. 스피노자의 사랑 개념(“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에 수반되는 기쁨”)에 따르면, 우리가 욕망하는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게 되면 우리는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외부 원인에 의존하는 이러한 수동적 사랑은 대개 쾌감의 형태를 띠며(3부 정리 11의 주석), 우리 신체 일부의 역량의 증대를 나타내는 쾌감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그 대상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자본주의적인 현실에서 이것은 임노동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소득의 기쁨 및 소비의 기쁨일 수 있고, 플랫폼 미디어가 주는 오락 및 유흥의 기쁨일 수 있으며, 소속된 집단이나 국가의 발전에서 느끼는 자부심일 수 있다. 하지만 수동적인 기쁨과 사랑의 경로는, 그것이 더 많은 기쁨을 주는 그만큼 그 원인에 대한 인식 및 대안의 모색을 배제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에게 쾌감을 주는 그 대상이야말로 유일한 기쁨의 원천이라는 믿음, 그런데 갈수록 그 대상을 전유하는 것이 불확실하게 된다는 두려움은 결국 그 대상에 대한 정서적 고착을 낳게 되며, 그 대상을 둘러싼 경쟁과 슬픔(미움, 시기, 분노)의 회로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다. 각자도생의 경쟁은 수동적인 기쁨과 사랑의 고착이 유발하거나 강화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외의 조건을 사고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집합적인 노력이 없다면 소외와 예속의 재생산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5부 전반부의 논의에서 사고하려는 것이 바로 정서적 고착과 그것이 산출하는 예속을 전환하기 위한 방법이다. 스피노자는 주로 개인적인 정서적 예속과 그 해법(치료)에 대해 논의하지만, 그의 논의에 집합적인 차원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스피노자가 신을 향한 사랑”(amor erga Deum)이라는 개념은 여러 모로 주목할 만하다. 그 이유는 첫째, 이 개념이 수동적인 사랑 개념의 특성으로서 공유 불가능성과 상호성, 미움으로의 전도 경향과 상반되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곧 신을 향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정서적 동력을 지니면서도 공유 불가능한 특정한 사랑의 대상을 향해 보편적인 경쟁의 소용돌이로 사람들을 몰아넣지 않으며,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과의 공유를 사랑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랑은 고착된 사랑들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둘째, 더 나아가 이 개념은 신의 지적 사랑”(amor intellectualis Dei)과 같은 고도의 지적 인식을 전제하지 않으며 상상의 차원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현실적 조건 속에서 해방을 사고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신을 향한 이 사랑은 우리가 이성의 명령 아래 원할 수 있는(4부 정리 28에 의해) 지고한 좋음(summum bonum)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고(4부 정리 36에 의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 사랑을 누리기를 욕망한다(4부 정리 37에 의해). 이에 따라 (정서들에 대한 정의 23에 의해) 시기심의 정서에 의해서도 그리고 (5부 정리 18에 의해 그리고 3부 정리 35의 주석에 나오는 질투심의 정의에 의해) 질투심에 의해서도 손상될 수 없다. 오히려 (3부 정리 31에 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을 누린다고 우리가 상상할수록 이 사랑은 더 촉진되어야 한다. (󰡔윤리학󰡕 5부 정리 20의 증명)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을 누린다고 우리가 상상할수록 더 촉진되는 사랑으로서의 신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집합적인 사고의 노력과 더불어 상상의 역량을 요구한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여러 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실제로 인간이 집합적인 삶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삶의 형식 속에 우리가 공유하는 지고한 좋음들및 이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국문초록

루이 알튀세르와 질 들뢰즈, 안토니오 네그리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 이후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사이에 긴밀한 정치적지적 연관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늘날 비판 이론 분야에서 널리 공유되는 공통 통념이 되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선구적인 작업을 배경으로 하여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철학관의 공통적인 특성을 실천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개념에 따라 설명하고자 한다. 실천으로서의 철학은 일차적으로 지배에 대한 비판을 주요 요소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목적론적인 가상과 미신의 제도를 지배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반면 마르크스는 초기 저술에서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인간적 지배의 근본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두 번째 계기는 지배의 근본 특성을 해명하는 것인데, 이것은 소외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초기 마르크스 저술에서 지배의 핵심 원리로 제시된 소외 개념은 󰡔자본󰡕을 비롯한 후기 저술에서 가치 법칙과 상품 형식에 입각한 인간적 삶의 포괄적인 지배 원리로 확장되고 있다. 스피노자의 저술에는 소외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의 수동성과 예속 개념에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에 상당하는 지배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크 피슈바흐와 프레데릭 로르동의 최근 연구는 이를 잘 예시해주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들의 작업을 검토하면서 스피노자주의적인 소외 비판의 가능성을 탐구해볼 것이다.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세 번째 요소는 해방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자체의 변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혁명을 해방의 핵심으로 이해했으며, 스피노자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을 해방 또는 자유의 근간으로 파악했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해방의 조건들을 사고해보고자 한다.

 

주요 용어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소외, 신을 향한 사랑, 실천으로서의 철학, 칼 마르크스, 프랑크 피슈바흐, 프레데릭 로르동

 

영문 제목: Spinoza and Marx, or Philosophy(s) as praxis

 

abstract

The idea that Spinoza and Marx share close political and intellectual connections has become widespread in the field of critical theory, after the work of Louis Althusser, Gilles Deleuze, Antonio Negri and Etienne Balibar. This paper aims to explain the intellectual connection between Spinoza and Marx based on three elements of philosophy as praxis. First, philosophy as praxis features a criticism of domination. Spinoza takes teleological illusions and superstitions to be the core of domination in the appendix of Part 1 of Ethics and Theologico- Political Treatise. On the other hand, from his early writings Marx understands capitalist society as the fundamental structure of human domination. The second element of philosophy as praxis is alienation, which explains the fundamental characteristics of domination. Presented as a core principle of domination in his early writings, Marx expands alienation into the comprehensive principle of the domination of human life based on the law of value and the commodity forms in later writings, including Capital. Although alienation does not appear in Spinoza's writings, we believe that one can grasp an equivalent principle in his concepts of passivity and servitude. The recent work of Franck Fischbach and Frédéric Lordon illustrates this well, and by reviewing their work we will explore the possibility of a spinozist critique of alienation. The third element of philosophy as praxis is liberation. Marx understood communist revolution, which seeks to transform the capitalist social structure itself, to be the core of liberation, and Spinoza identified the transition from passive to active as the basis of liberation or freedom. Finally, this article theorizes the conditions of liberation based on Spinoza's concept of "love toward God."

 

key words

alienation, Benedictus de Spinoza, Franck Fischbach, Frédéric Lordon, Karl Marx, love toward God, philosophy as prax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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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수업 후 ‘강의 다시보기’가 제공됩니다.


▶강의소개

2022년 2월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의 문명의 중심에 전쟁과 폭력이 뿌리 깊이 내재해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프로이트는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왜 전쟁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는데, 이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그 질문이 무겁게 제기되고 있다. 왜 문명은 전쟁의 운명에서 분리될 수 없는가? 왜 정치 공동체는 폭력의 뿌리를 근절하지 못하는가? 폭력을 근절하고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배적 폭력에 맞서기 위한 대항폭력이 불가피한가? 아니면 진정한 정치의 진보는 폭력을 넘어서는 정치를 요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비폭력 또는 반폭력의 정치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이 우리가 이 강의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중심적인 주제들이다. 이 질문들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주디스 버틀러와 에티엔 발리바르가 최근에 발표한 저작들을 함께 읽어보려고 한다. 이 강의는 전체 3부 24강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1부: 비폭력인가 반폭력인가: 버틀러의 『비폭력의 힘』 ,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 

 

1부 강의에서는 버틀러의 『비폭력의 힘』과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을 함께 읽으면서 폭력과 대항폭력, 비폭력, 반폭력의 관계를 살펴본다. 버틀러의 『비폭력의 힘』은 정신분석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비폭력에 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폭력과 대항폭력의 아포리아를 검토하면서 반폭력의 정치와 윤리를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으로 사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두 사람의 비폭력과 반폭력에 관한 깊은 사유는 전쟁과 폭력이라는 난제를 살펴보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2부: 폭력의 정치철학: 홉스, 헤겔, 슈미트, 데리다, 들뢰즈ㆍ가타리

 

2부 강의에서는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1부를 바탕으로 관련된 저술을 읽으면서 홉스, 헤겔, 슈미트, 라캉, 들뢰즈ㆍ가타리, 푸코, 데리다와 같은 서양 근현대 철학자들의 폭력의 정치철학을 살펴보려고 한다. 폭력과 대항폭력, 반폭력이라는 주제는 홉스에서 들뢰즈ㆍ가타리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였지만, 국내에서는 이 주제가 제대로 검토된 적이 없다. 이 강의에서는 서양 근현대 정치철학의 뿌리에 놓여 있는 폭력이라는 주제를 면밀하게 사유해보고자 한다.

 

3부: 전쟁과 평화의 정치철학: 클라우제비츠, 슈미트, 레닌, 간디

 

마지막 3부에서는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2부를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문헌들을 함께 읽으면서 클라우제비츠에서 슈미트, 레닌, 간디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평화의 정치사상의 흐름을 살펴보려고 한다. 발리바르는 이 저작에서 한편으로 걸프 전쟁에서 9.11 테러 및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는 최근의 비극적인 전쟁들을 검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클라우제비츠에서 간디에 이르는 전쟁과 비폭력의 정치사상을 분석하면서, 반폭력과 평화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과 통찰은 한국전쟁 이후 70여 년 동안 분단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반전평화운동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커리큘럼

1부 (2022. 11. 25 ~ 2023. 1. 13) 

: 비폭력인가 반폭력인가: 버틀러의 『비폭력의 힘』 ,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

 

‣  1주. 버틀러 『비폭력의 힘』 1장: 비폭력, 애도가치, 개인주의 비판

‣  2주. 버틀러 『비폭력의 힘』 2장: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

‣  3주. 버틀러 『비폭력의 힘』 3장: 비폭력의 윤리학-정치학 

‣  4주. 버틀러 『비폭력의 힘』 4장: 프로이트의 정치철학- 전쟁, 파괴성, 열광, 비판력 

‣  5주.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1장: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혁명적 폭력론

‣  6주.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1장: 반자본주의와 반제국주의 혁명론- 레닌, 벤야민, 파농

‣  7주.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2장: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 아쉴 엠벰베

‣  8주.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2장: 시민다움의 정치와 윤리-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막스 베버, 알랭 바디우

 

2부 (추후 진행 예정)

: 폭력의 정치철학: 홉스, 헤겔, 슈미트, 데리다, 들뢰즈ㆍ가타리 

* 에티엔 발리바르의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는 강사가 조만간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할 번역 원고를 가지고 진행할 계획입니다.



‣  1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서론: 폭력과 정치의 아포리아

‣  2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1장: 홉스, 헤겔, 폭력의 지양?

‣  3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2부 부록:  「홉스와 슈미트: 폭력의 정치철학」 (I)

‣  4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2부 부록:  「홉스와 슈미트: 폭력의 정치철학」 (II)

‣  5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2장: 폭력의 잔혹성: 전환 불가능한 폭력?

‣  6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3장: 시민다움의 전략: 헤겔과 인륜성

‣  7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3장: 시민다움의 전략: 소수자 전략, 다수자 전략

‣  8주. 발리바르  「해방, 변혁, 시민다움: 정치의 세 개념」,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3부 (추후 진행 예정 )

: 전쟁과 평화의 정치철학: 클라우제비츠, 슈미트, 레닌, 간디 



‣  1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2부 1장:  「클라우제비츠 이후: 전쟁과 정치」(I)

‣  2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2부 1장:  「클라우제비츠 이후: 전쟁과 정치」(II)

‣  3주. 발리바르 「오늘날의 전쟁과 정치」 『황해문화』  2022년 겨울호

‣  4주. 발리바르 「마르크스주의와 전쟁」. (강사 번역)

‣  5주.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2부 2장: 「레닌과 간디」

‣  6주. 발리바르 「주권에 관한 서언: 칼 슈미트의 주권 이론」, 『우리, 유럽의 시민들?』 

‣  7주. 발리바르 「우리는 전쟁 속에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성찰」. (강사 번역)

‣  8주. 발리바르 「탈주선을 탐색하기: 재난의 시대에 구체적 유토피아란 어떤 것인가?」. (강사 번역)

 

‣ 참고문헌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 진태원 옮김, 난장, 2012.

에티엔 발리바르,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 진태원 옮김, 그린비, 근간.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 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Etienne Balibar. "Marxism and War", Radical Philosophy no. 160, 2010.

Etienne Balibar. , "Nous sommes dans la guerre"

https://aoc.media/analyse/2022/07/04/nous-sommes-dans-la-guerre/

Etienne Balibar., "Uncovering lines of escape: towards a concept of concrete utopia in the age of catastrophes"

https://blogs.law.columbia.edu/utopia1313/etienne-balibar-uncovering-lines-of-escape-towards-a-concept-of-concrete-utopia-in-the-age-of-catastrop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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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학기에 이어서 이번 2학기에도 유럽인문아카데미에서 스피노자 강의를 하게 됐습니다. 


지난 1학기 강의에서 진도가 생각보다 늦어져서(^^;)  [윤리학] 1부 정리 9까지 나갔는데, 


이번 2학기에는 [윤리학] 1부 정의 10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진행해볼 생각입니다. 


계획대로 되었으면 좋겠는데, 과연 그럴지는 미지수. ㅎㅎ 


유럽인문아카데미 2022년 2학기 강의 및 수강신청 안내는 아래 주소로 가시면 찾아볼 수 있습니다.


http://www.aeh.kr/page/index_bd_10.php?bwf_mode=bd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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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스피노자 󰡔윤리학󰡕 읽기 II: 양태들의 존재론

강사명

진태원

이메일

jspinoza@empas.com

강좌 유형

세미나

정원

15

강의실

 

강좌 난이도

대학교 전공 수준

 

강의 기간

2022년도 가을학기 : 95일 개강 ~ 1111일 종강 (10)

* 추석(9.9./9.12 ), 개천절(10.3. ), 한글날 대체공휴일(10.10. ) 휴강

강의 시간

1순위) 수요일 3교시

 

 

강의 횟수

10

강좌 소개

이 강좌에서는 연속 강좌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공부해보려고 한다. 지난 학기에는 [윤리학] 1부 정리 10까지의 논의를 다루었으며, 이번 학기에는 그 뒤를 이어 양태들의 존재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스피노자 철학은 보통 실체의 철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양태들의 존재론이 더 정확한 명칭이다. [윤리학]이라는 저서의 명칭이 말해주듯, 스피노자의 궁극적 관심은 유한한 존재인 양태들의 존재론과 인식론, 윤리학이기 때문이다. [윤리학] 1부 후반부에서 스피노자가 어떻게 양태들의 존재론을 관계론적인 존재론으로 제시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번 학기 강의의 주제다. 강의 수준은 대학교 학부 전공 수준으로 진행하되, 가급적 수강생들의 이해 수준에 맞춰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수강생들은 앞선 강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에 대해 다음 번 강의 때 감상문을 제출하거나 문제제기, 토론 등을 해주길 바란다.

홍보용

강좌 소개글

이 강좌에서는 강사가 직접 번역한 스피노자 [윤리학] 번역본 및 해설서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을 바탕으로 [윤리학] 1부 후반부에 나타난 양태들의 존재론을 다뤄보고자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의 존재론이라기보다는 양태들의 존재론이며, 양태들의 존재론은 아주 일관된 관계의 존재론이다. 이번 학기 강좌에서는 이점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강사 소개

진태원은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연구교수로 있다. 스피노자 철학과 현대 프랑스철학, 사회정치철학, 한국 민주주의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을의 민주주의],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을 저술했으며, [스피노자의 귀환] 등을 엮었다. 또한 [헤겔 또는 스피노자], [스피노자와 정치],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진행 방식

이 강좌는 세미나 방식으로 진행한다.

1. 강사가 매 시간마다 1시간 동안 강의를 하고, 나머지 1시간은 수강생들의 질의와 응답, 토론을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2. 수강생들은 지난 시간의 강의와 관련하여 1페이지 이내의 질문이나 논평이나 질문 또는 독후감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질의와 응답, 토론을 진행한다.

3. 글을 작성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구두 질문이나 논평, 감상을 제시해도 무방하다.

교재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윤리학󰡕 (강사가 번역한 번역본)

Benedictus de Spinoza, Ethica/Ethique, PUF, 2020.

.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vol. I,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참고문헌

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그린비, 2022.

 

기타 필요한 자료는 강의 시간에 별도로 배포할 계획입니다.

주차

날짜

      

1

9. 7.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로서의 신.

󰡔윤리학󰡕 1부 정리 11의 신존재증명에 대한 검토

2

9. 14.

유일한 실체로서의 신.

1부 정리 12 ~ 정리 15

3

9. 21.

양태들의 무한한 생산 원인으로서의 신.

1부 정리 16 ~ 정리 17

4

9. 28.

실체와 양태의 내재적 인과관계.

1부 정리 18 ~ 정리 20

5

10. 5.

무한양태란 무엇인가?

1부 정리 21 ~ 23. 2부 정리 13의 주석

6

10. 12.

무한양태와 유한양태의 관계.

1부 정리 24 ~ 정리 28

7

10. 19.

신에 관한 신학적 관점 비판.

1부 정리 29 ~ 정리 33

8

10. 26.

원인으로서의 유한양태.

1부 정리 34 ~ 정리 36. 3부 정리 6~7 (코나투스)

9

11. 2.

목적론적 관점과 자연의 전도.

1부록

10

11. 9.

미신의 인간학 비판.

1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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