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보니 무영님이 방명록에 질문을 남긴 게 2월 2일인데, 거의 한 달이 다되어서 몇 줄 안되는

답변을 올리게 되어,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은 며칠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입장들] 불어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만 더 늦어지고 말았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도 없더니, 역시 도둑 맞은 편지처럼, 책은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ㅜ_ㅜ

(ㅎㅎㅎ 이게 변명이 되나요?)

어쨌든 조금이나마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질문하신 걸 보니까 상당히 꼼꼼하게 읽으신

것 같습니다. 그 대목을 읽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생각할 내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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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님의 질문


책을 읽다 궁금한 대목이 있어 여쭙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은 아닙니다. 데리다의 『입장들』이라는 국역본 대담집 중 「함의」 부분 입니다.


1) 앙리 롱스가 차이(差移) 개념에 대해 데리다에게 묻는 대목인데요. 데리다는 차이(差移)가 경제 자체라고 말한 후, "우리의 언어를 특징짓는 개념들의 이항 대립 …… 의 요소"(32)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대립들이 알려지는 동일자(이는 동일한 것과 구분됩니다)의 요소"(같은 쪽)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差移) 개념이 왜 '동일자'의 요소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동일한 것'과 구분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2)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가 차이(差移)를 유한하게 결정짓는 것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존재사유의 차이(差移) 은폐는 "예를 들어 수많은 '음성적' 비유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위나 늘 '진리의 실행'으로서의 예술로 연결되는 예술에 대한 성찰 속에서 인지"(34)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입니다. 요컨대 하이데거는 진리의 실행이 예술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로고스나 음성과의 …… 연계"(같은 쪽)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데리다는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예술들은 '예술의 본질'인 시의 공간이나 '언어'와 '말'의 공간 속에 펼쳐진다는 사실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는 "건축과 조각은 말하기와 명명하기의 통로 속에서만 일어나며 그에 의해 지배되며 인도된다"고 말합니다. 낭독법(혹은 발성법)과 노래에 매우 고전적으로 부여된 탁월한 가치나 문학에 대한 경멸은 이런 식으로 설명됩니다. 하이데거는 "낭독법을 문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같은 쪽)


저는 이 말들이 재구성이 잘 안 되는데요. 우선 1) 하이데거는 모든 예술들이 '말(=음성)'의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고 보았다. 2) 이것은 시라는 문학예술 이외에 건축/조각예술의 경우―어쩌면 예술 일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렇게 요약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학에 대한 경멸"은 오히려 엉뚱하게 들리거든요. 그럼 시와 문학은 서로 다른 범주인 것인지, 아니면 문학에'만' 적용되었던 낭독법이라는 가치는 다른 예술들에까지 펼쳐놓아야 하기에 경멸스럽다는 건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가 문학에 대한 철학의 일반적인 경멸을 오히려 정당화해준다는 건지, 어쨌든 이해가 안 됩니다 T.T


3)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음의 논의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앙리 롱스는 데리다의 해체론적 작업이 문학과 맺는 친화적인 관계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문학적' 실천"(35)이라는 말에서 '문학적'이라는 부분에 인용부호를 붙이며, "왜 문학적이란 말에 인용부호를 붙여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애매모호함을 여기서 제거해야 하는가를 이해"(같은 쪽)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문학적' 실천이란, 어떤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같은 쪽)합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은, 문맥으로 볼 때 대표적으로 하이데거적 예술관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예술론의 음성중심주의적 성격에 반대하는 '문학적' 실천이 가지는 함의란, 차이(差移)로서의 기록을 부각시키는 예술론을 지지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이렇게 단순화시켜서만 말할 수밖에 없네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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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관한 답변


역자가 “동일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각각 “du même”와 “l'identique”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하이데거가 쓰는 두 개념에 상응하는 불어 단어들이죠. 하이데거는 “Selbigkeit"와 "Gleichheit 또는 Identität”를 구별하지요. 전자가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이라면(하이데거는 “나누어 놓으면서 묶음Zusammenhalten im Auseinanderhalten” 이라는 식으로 뜻을 풀이합니다), 이 후자는 차이와 대립하는 동일성을 가리키죠. 따라서 데리다는 하이데거 식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봐야겠죠.

 

다만 différance는 “동일성의 요소이기도 하다”고 말할 때 데리다는 “공통된 근원으로서”라고 한정을 하고 있죠. 이것은 différance가 이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데리다는 그 이전에 이미 différance는 첫째로 “유예, 위임, 연기, 이송, 우회, 지연, 유보 등에 의하여 지연시키는 데 있는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있지요.


(2)에 관한 답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지만, 맥락은 이런 것 같습니다. 번역본에서 “낭독법”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불어로는 “diction”, 독어로는 “Dichitung”의 번역입니다. “Dichitung”은 원래 “시(詩)” 또는 “시작(詩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후기 사상에서 (특히 횔덜린의 시를 숙고하면서) 근원적인 사유를 “Dichtung”, 곧 “시작”과 동일시하지요. 시인들만이 주관과 객관의 구별에, 학문의 논리적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세계 또는 존재의 근원적인 시원을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불어로 번역한다면 “poésie”가 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Dichitung”은 어원상 “diction”, 곧 “구술하다/말로 불러서 받아 적게 하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사실 하이데거 자신이 “Dichtung”과 “Diktat”를 결합해서 사용합니다. 시는 시인이 혼자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씌어진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시작에 대한 하이데거의 특권화는 음성에 대한 특권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문학”, 곧 “littérature” 또는 독어로는 “Literatur”는 어원상 “littera”, 곧 “문자”, “글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데리다는 “시”와 “문학” 또는 “Dichtung”과 “Literatur”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하이데거의 관점에는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보는 셈이죠.


(3)에 관한 답변


세 번째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조금 다른 내용과 관련된 것이죠. 데리다는 “문학적”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쓰고 있고, 그 이유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한다고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와 형이상학의 역사의 연결, 양자의 연루는 반드시 하이데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고, 그보다 좀더 넓은 맥락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문제는 우선 문학적인 것을 이른바 “belles lettres”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학적인 것”을 시와 수사학, 미학 또는 비평이론 같이 순수한 또는 고급한 예술에 속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태도는 “belles lettres”야말로 좀더 고귀하고 본질적인 어떤 내용을 표현하거나 재현하고, 따라서 진리에 좀더 근접해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죠. 또는 시가 소설보다 아니면 소설이 시보다 좀더 본질적인 문학적 형태, 문학적 장르를 이룬다는 태도도 마찬가지겠죠.

 

  데리다가 (당대의 텔켈 그룹을 포함하여) 말라르메나 바타이유, 아르토 같은 전위 문학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종류의 구분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령 황지우(나 오규원) 같은 시인들이 80년대 초에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서 출발하자고 하면서, 이것과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죠. 그리고 구체적으로 신문의 “사람을 찾습니다”에 난 문안을 그대로 시로 옮겨적거나 글자의 크기를 달리 하거나 연의 배열을 파괴하는 등의 실험을 했던 적이 있죠. 이런 것들은 문학의 장르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적인 규범과 규칙 속에 포함시키기 힘든 것들인데, 데리다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울타리에 포섭되지 않는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죠.

 

* 좋은 질문에 비하면 좀 부족한 답변인데, 혹시 추가 질문이 있으면 더 말씀해주세요.

이번에는 빨리 답변을 드릴게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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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esas 2006-02-2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넘 감사드립니다. 불어와 독어까지 덧붙여주시니까 확 들어오네요! ^-^
다음에 또 질문 거리 생기면 또 올릴께요. 너무 감사드려요~

balmas 2006-03-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o^

cplesas 2006-03-0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의>부분을 다시 읽다 보면서 자잘하게 놓쳤던 의문이 다시 한 둘 떠오릅니다.
우선 저번 질문의 연장선에서 첫번째 답변해주신 부분인데요,

1)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 그리고 차이와 대립되는 동일성이 구분되는 주장은, 왠지 하이데거의 책인 <동일성과 차이>에 담겨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 대해서 더 힌트를 주신다면 어떤가요. 복잡하다면 제가 찾아서 책을 읽겠습니다. ^^

2) 3번의 답변에 대한 질문도 있는데, 이건 제가 생각을 조금 가다듬어 다시 여쭐께요;;

3) <함의>의 번역본 바로 첫 페이지에 나오는 구절들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특히 대담자인 앙리 롱스가 <기록과 차이>의 각주에 있다고 하는 구절을 말하면서 이어지는 말라르메의 책(Livre)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까지가요;

4) 이건 좀 찾아보고 안 여쭤보려 했는데,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 또 나오는 듯 보여서, 그리고 제 무능력으로 인해 그냥 여쭙습니다. 앙리 롱스가 옐름슬레우의 '표현실질'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내용은 이해되는데 정작 표현실질과 기표/기의 관계란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각주를 봐도 잘 모르겠네요;;

balmas 2006-03-0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에 대한 답변

예,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를 보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이 나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구별이 아니니까 한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3)에 대한 답변

롱스는 “문제점을 이동시켜놓는 작업은 틀림없이 어떤 체계를 이룬다.”는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은 당시에 데리다가 출간한 세 권의 책, 곧 󰡔목소리와 현상󰡕, 󰡔기록과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죠. 이 세 권의 책은 서로 상이한 주제, 상이한 대상을 다루고 있지만,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것”, 또는 좀더 불어에 가깝게 표현하면 “하나의 질문을 계속 전위(轉位)시키는 것”(ce qui reste le déplacement d'une question)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게 아니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들은 물론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이동으로서 그리고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작업으로서 이러한 체계는 자신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불확정적인 수단을 향해 어딘가에서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라고 답변하지요. 또는 약간 고쳐서 번역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겠죠. “그것들은 분명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전위로서, 그리고 하나의 질문의 전위로서 이러한 체계는 이 체계를 작동시키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을 향해 어떤 부분이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un certain système ouvert quelque part à quelque ressource indécidable qui lui donne son jeu).”


곧 데리다의 답변의 요점은, 세 권의 책이 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체계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에 의해 작동되는 체계이고, 따라서 이 원천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체계, 말하자면 자신의 타자 또는 자신의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는 체계라는 뜻입니다.


4)에 대한 답변

음, 이 질문은 사실은 대답하기가 좀 곤란한데요. 옐름슬레우의 이론을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 ;;;

그리고 저같은 문외한이 어쭙잖게 설명하는 것보다 전문가들이 비교적 알기 쉽고 명쾌하게 해설해놓은 글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참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박인철 교수가 쓴 글들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박인철, [옐름슬레우], 김치수, 박인철 외, 󰡔현대 기호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박인철, 󰡔파리 학파의 기호학󰡕 민음사, 2003 중, 1장 2절, 63-99쪽.

(참고로 책값은 위의 책이 훨씬 싸고, 내용 설명은 아래의 책이 좀더 간명합니다. ^^)




cplesas 2006-03-0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감사합니다. ^^ 그런데 선생님이 다시 번역하신 대목들은 왜 이렇게, 좋죠?;;;
 

좋다!

 

 

Marie-Louise Mallet, Ginette Michaud ed, Jacques Derrida , Herne (7 octobre 2004)

Collection : Les Cahiers de l'Herne
Format : Broche- 628 pages
ISBN : 2851970984
Dimensions (en cm) : 21 x 3 x 27

이 책은 Herne 출판사에서 내는 Cahiers de l'Herne[카이에 드 레른느]라는 총서 중 

한 권이다. 매 권마다 유명한 작가나 철학자, 사상가 한 사람을 골라서 그에 대한

글들과 그 사람의 미발표 글들을 함께 묶어서 내는 책이다.

횔덜린이나 랭보, 프랑시스 퐁주, 베케트,예이츠, 브레히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작가들도 있고,

 시몬 볼리바르나 마오처퉁 같은 정치가도 있고,

쇼펜하우어나 레비-스트로스, 리쾨르 같은 철학자들도 있다. 데리다는 83번째 주제인 셈이다.

 

값은 50 유로 ...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하면 약 6만원. 5유로 할인을 했으니까, 약 5만 5천원 정도.

그런데 판형도 크고 좋은 글들이 아주~ 많다.

데리다 지인들이 데리다에 대해 쓴 짧은 회고담이 한 10여편 되고,

데리다에 관한 저명한 연구자들이 쓴 논문들이 한 40여편(발리바르의 글도 한 편 있구나)

미발표된 데리다의 원고가 한 6편 정도 ...

이 정도면 본전을 뽑고도 남을 만하다.

책 판형이 크고(보통 책 두 배쯤 되네) 분량도 많은 편이니까 양적으로도 그렇고.

어느 것부터 읽어볼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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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24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피면, 페이지가 줄줄줄 흐르는거 아니에요?

balmas 2006-01-24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마치 그러기를 바라는 듯 ...
하지만 아니올시다. 이번 책은 실로 단디 묶었음.

balmas 2006-01-24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표지를 들여다봤더니,
사진을 너무 실물감 있게 찍어서, 깜딱 놀랐음 ...

아영엄마 2006-01-24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저는 처음에 그림보고 발마스님이 담배파이프 사신 줄 알았슴다..^^;;

balmas 2006-01-24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담배 파이프 ...

Kitty 2006-01-24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교양이 줄줄줄 ^^;;
오늘도 늦게 주무시는군요~ 반가워요~!

하이드 2006-01-24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키티님, 반가워요~! 키티님 스토커 하이드!

balmas 2006-01-24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두 분의 극적인 상봉을 보니 눈물이 ... ^^;
키티님/ 오, 대단한 통찰력. 데리다 얼굴에서 교양이 줄줄 흐르는 게 보이삼? ^^
저는 오늘은 아직 두어 시간 더 있다가 잘 것 같음~~

비로그인 2006-01-2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서는 주로 어디에서 사세요? 아마존? JPC?

숨은아이 2006-01-2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아자씨가 저렇게 생기셨군요. *,*

balmas 2006-01-24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아마존에서 주로 사지요. 제일 편리하고 사고도 거의 없고 하니까
아무래도 제일 애용하게 되더라구요.
숨은아이님/ 예, 저렇게 생겼답니다. 말년의 사진 ...

둥가 2006-01-2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번역하실 계획은? ^^ 아 글구 이번에 목소리와 현상이 재번역되서 출판되었는데 믿을만한 번역본인지요. 글구 앞으로의 출판 계획은 어떤지 물어도 될까요? 글구 연대 대학원 스피노자 강의안이 빨리 보고 싶네요. 미리 예습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이런........ 이것저것 마구 요청해서 죄송함다~~

balmas 2006-01-26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번역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ㅎㅎ 왜냐하면 분량이 너무 많은 데다가 데리다 저서도 아니기 때문이죠. 데리다 글들 중에서 한 두어 편은 나중에 선집으로 묶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출판 계획은 뭐, 일단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세계화와 반폭력의 정치]를 1학기 안에 내는 게 목표지요. 그리고 2학기 중에는 리오타르의 [Differend]를 내고, 그 이외에 공동 논문집 한 권 정도 내는 게 현재로서는 목표라면 목표겠지요.
스피노자 강의안은 지난 번에 올린 것과 비슷한데, 다음 주쯤 올리긴 올려야겠네요. :-)
[목소리와 현상]이 나왔군요. 제가 아는 후배가 번역한 건데,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읽을 만한 번역본일 것 같군요. 원래 후설을
공부한 친구인데, 석사 논문을 [목소리와 현상]을 주제로 썼거든요. 저도
한권 사봐야겠네요.

yoonta 2006-01-27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에티카라도 좀 재번역해주시면 안될까요..강영계교수님 번역은 읽기가 넘 힘들어요..오역도 종종 있는거 같공..

balmas 2006-01-27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yoonta님, "[에티카]라도"라뇨?
[윤리학] 번역은 정말 작심하고 달려들어야 겨우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요. 스피노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윤리학]을 번역하고 싶은 마음이야
다 가지고 있겠지만, 쉽게 생각하고 할 일은 아니니까 선뜻 말씀드리기는 어렵네요. 하지만 언젠가 하긴 해야 할 일인 건 분명합니다.

비로그인 2006-01-2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오타르의 Differend 을 번역하신다구요 @@ 근데 이 책 제목이 "분쟁" 인가요 "차이" 인가요?

balmas 2006-01-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ifferend]은 번역하기가 어려운 단어죠. 차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분쟁이 좀더
가깝기는 하겠지만, 글쎄요, 그게 좋은 번역어일지는 ...

2006-02-01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술, 심지어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조차도 재현된 대상에 이타성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재현된 대상은 우리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예술은 대상을 벌거

벗음 속에서, 진정한 벌거벗음 속에서 나타낸다. 진정한 벌거벗음은 옷의 부재가 아

니라 말하자면 형식의 부재 자체이다. 즉 벌거벗음은 외재성이, 형상이 이루어내는

내재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림의 형식과 색채는 사물 자체를 은폐하

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형식과 색채는 사물의 외재

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세계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이

의미에서 예술 작품은 자연을 모방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멀리 자연으로부터 떨

어져 나간다. 또한 이런 까닭에 과거 세계들에 속한 모든 것, 즉 고풍스러운 것, 옛것

들은 미감적 인상을 내뿜는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84-85쪽 

 " L'art, même le plus réaliste, communique ce caractère d'altérité aux objets représentés qui font cependant partie de notre monde. Il nous les offre dans leur nudité, dans cette nudité véritable qui n'est pas l'absence de vêtements, mais, si on peut dire, l'absence même de formes, c'est-à-dire la non-transmutation de l'extériorité en intériorité que les formes accomplissent. Les formes et les couleurs du tableau ne recouvrent pas, mais découvrent les choses en soi; précisément parce qu'elles leur conservent leur extériorité. la réalité reste étrangère au monde en tant que donné. Dans ce sens, l'oeuvre d'art, à la fois, imite la nature et s'en écarte aussi loin que possible. C'est pourquoi aussi tout ce qui appartient à des mondes passés, l'archaïque, l'antique produit une impression esthétique."

 Emmanuel Levinas, De l'existence a l'existant, Vrin, 1990, pp. 84-85.

 

 

 

“지각 속에서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소리, 색채, 말은 어떻게 보면 그것들이 은폐하는 대상들을 가리킨다. ... 그리고 지각은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통해서 또한 주관적 의미를 가진다. 즉 외재성은 내재성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사물 자체의 외재성이 아니다. 예술의 운동은 감각(sensation)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각과 결별하는 데서 성립하며, 대상을 조회하는 기능[대상에 준거시키는 기능renvoie à l'objet]을 하던 성질을 그 대상 조회의 기능[대상 준거의 기능]으로부터 떼어놓는 데서 성립한다. 지향은 대상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감각 자체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감각 속에서, 즉 아이스테시스(aisthesis) 속에서의 길 잃어버림이 미감적 효과를 일으킨다. 감각은 대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리하여 감각은 더 이상 주관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은 지각의 질료가 아니다. 예술 속에서 감각은 [지향적 인식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요소로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감각은 요소의 비인격성으로 되돌아간다.”(85-86쪽)



“예술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도 인도해주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 감각적 성질의 방식은 감각으로서의 감각 사건, 즉 미감적 사건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감각의 음악성이라고 부른다.”(86쪽)


“그러므로 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 여기서 사물 자체란 상위 등급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상을 제외시켜 버렸을 때 어떤 새로운 요소로 귀착하는 그런 것으로서의 사물 자체를 말한다. 이것은 ‘외면dehors’과 ‘내면dedans’의 모든 구별과 이질적이며 명사의 범주조차 거부한다.”(87쪽)



“게다가 그림이란 세계의 한 조각을 떼내에서 따로 놓아두는 것이며, 또 그림이란 서로 침투할 수 없고 서로 이질적인 세계들의 공존을 내재성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이미 하나의 적극적인 미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를] 한정짓는 질료적 필연성에서 기인하는 그림의 한계는, 이 한정에서 오는 추상적이고 돌연적인 선들에 힘입어 미학상의 긍정적 제약을 가능케 해준다. 또한 이런 것은 무관심한 덩어리, 로댕의 조각상을 빚어내는 그런 덩어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실재는 세계가 부재하는 실재의 이국적 벌거벗음 속에서 정립된다. 실재는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 나온다.”(88쪽)



“그러나 더 이상 객관적[객체적, 대상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내재성을 가리키지 않는 예술의 이국적 실재는 그 스스로 하나의 내재성의 겉봉[겉면, enveloppe]으로서 나타난다. 예술 작품 속에서 인격성[개성, personnalité]을 획득하는 것은 우선[무엇보다] 사물의 내재성 자체이다. [...]

예술적 실재는 영혼의 표현 수단이다. 사물 안에 깃들인 영혼이나 예술가의 영혼과의 공감을 통해서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우리 세계와 통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타인의 이타성이 타아로 유지되는 한에서는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공감을 통해 접근될 수 있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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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독회 모임이 있어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많지 않은 예술에 관한 논의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 있어서 옮겨봤다.

나름대로 흥미있는 통찰이기는 한데, 초기 저작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때(1940년대)와 지금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어서 그런지(실로 엄청난 격차가 있다!)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 더 불만을 말하자면, 이런 글을 읽다 보면,

가령  감각과 지각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적 감각과 일상적인 감각

사이의 관계는? 또 왜 예술에 대해(서만) 이런 특권을 부여할까? 과연 "일상적 지각" 같은 게

존재할까? 등등

이런 물음을 묻게 되는데, 그는 자기의 체험, 자기의 인식의 경험에 기초를 둔 통찰들을 툭툭 던지지,

따져 묻고 답변하고 의심하고 새로 모색해보고 하지는 않는다.

(레비나스식) 현상학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이런 책들을 몇 권 읽다 보면 금방 물린다.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나 고진류의 저술도 마찬가지다.

 

이 책([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백미는 아무래도 1장인 것 같다. 깊이도 있고 상당히 독창적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몇군데 오역들이 엿보인다. 오역처럼 읽히지 않는 오역들도

있고 명백하게 논리를 전달하지 못하는 오역들도 있다. 물론 뒷 장들에도 조금씩 있고 ...

무난한 번역인데, 학문적인 토론에 사용하려면 오역들을 좀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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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9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1-20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행복나침반님, 오랜만이에요. ^-^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으시구나. ㅎㅎ 그런데 저도 레비나스는 잘 몰라요.
조금씩 읽고 있는데, 가끔 페이퍼를 한번씩 올릴 테니, 행복나침반 오셔서
같이 이야기해봐요. :-)
숨어계신님/ 이경신 씨가 번역한 [니체와 철학]은 오역이 꽤 있습니다. 아주 못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어려운 구절들에서는 자주 오역이 나옵니다. 불어본이나 기타 외국어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같이 읽는 게 좋습니다.
[들뢰즈 커넥션]은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두 번역본을 비교해서 말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 ...

onookoh 2006-01-2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온욱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새 불어 공부 (이제 문법 막 익힌 정도)하던 참에, 아침에 불어 한 페이지씩 독해라는 목표를 세워 놓고 괜찮은 공부사이트를 찾고 있었어요. 이런 글들 (불/한 대역) 가끔씩 올려주시면 읽는 저로서는 일석이조겠네요. 눈팅만 하다가 한 자 남기고 갑니다. 혹시 추천할 만한 불어공부 사이트 알고 있는 분 계시나요? 추천 바랍니다...

balmas 2006-01-2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
외국에서 설을 맞으시는 기분이 좀 쓸쓸하시겠어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시기 바랍니다. 공부도 잘 되시구요. :-)
직장 생활 하시면서도 공부는 여전히 열심히 하시네요.
그렇다면 앞으로는 가끔씩 불어 원문하고 번역문을 함께 올려드려야겠네요. ㅎㅎ
불어공부 사이트는 제가 별로 아는 데가 없네요. 혹시 대학 불어불문과 홈페이지
같은 데 가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종종 들르세요. ^-^
 

작년 말 국내에 [세 명의 사기꾼]이라는 책이 번역되었다.

 

바로 이 책!!

저자는 "스피노자의 정신"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놀랍게도 현재 알라딘에서 역사 부분 베스트셀러 4위에

올라 있고, 몇몇 서점을 검색해보니 역시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내가 두번씩이나 "놀랍다"는 말을 한 이유는, 이 책은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17세기 말과 18세기에 이른바 "litterature clandestine", 곧 "비밀문학" 또는 "지하간행물"이라고

불린 여러 저작들 중 하나, 실로 가장 유명한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문헌이다. 비밀문학은 오늘날로 치면

반체제 지식인들이나 문사(文士)들이 공식적인 검열을 피해 비밀스럽게 간행해서 유통하던 문헌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세 명의 사기꾼, 곧 모세, 예수, 마호메트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나 홉스 또는

가브리엘 노데(Gabriel Naude)나 프랑수아 드 라 모트 르 베예(Francois de La Mothe Le Vayer) 같이

당대에 "악명높던" 저술가들의 저작에서 따온 내용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한 것이고,

다만 비난의 논조만 훨씬 더 격렬할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유럽의 반체제 지식인들의 저항운동과 지적 동향을

살피는 데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고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 만한 저작이지만, 결코 대중적인

저작이라고 볼 만한 책은 아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내용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다!! 그러니 놀라울 수밖에.

 

왜 그럴까? 저자가 "스피노자의 정신"으로 되어 있어서일까? (하지만 국역본 역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의 저자는 스피노자의 종교 비판에서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스피노자가 이 책을

저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세나 예수에 대한 관점이 확연히 다를 뿐더러 지적인 수준에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

아니면 자극적인 종교 비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18세기 비밀 문학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 때문일까?

 

한 가지 찜찜한 것은 이 책을 낸 출판사가 얼마 전에 사재기 의혹을 불러 일으킨 출판사라는 점이다.

(관련 기사는 요기로 ... http://news.empas.com/show.tsp/cp_hn/20060112n09828/?kw=%BB%E7%C0%E7%B1%E2+%BB%E7%C0%E7%B1%E2+%BB%E7%C0%E7%B1%E2+%7B%7D)

그러고서 봤더니, 이 책은 1000원짜리 할인쿠폰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살 경우

이 책보다 정가가 더 비싼 [1215 마그나 카르타의 해]라는 책을 끼워준다! 

(그럼, 혹시, 이 책도 ????? )

 

 

ps. 예전에 서점에서 잠깐 서서 읽어봤는데, [1215 마그나 카르타의 해]라는 책은

괜찮은 책이더라.

(그러니 [세 명의 사기꾼]을 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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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15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책을 사다 저 책을 살까 말까 망설였어요. 근데 리뷰 중에, 이 책 말고도 살 책 많으니 이 책은 사지 말라는 분의 말씀을 새겨 들었죠..^^; 저자가 익명(스피노자의 정신)을 쓴다는 점, 종교비판이란 점, 제목과 표지 때문에 끌렸던 듯 합니다... 저렇게 책을 끼워팔면 남는 게 있을까요...

라주미힌 2006-01-1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 할인에 책 한권을 껴준다?
생각의 나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저런 이벤트를... 신문기사에 난 것이 찔려서 그런건가..
일단 싸니깐 끌리네요 ^^;;; 제목도 선정적이고...

balmas 2006-01-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님/ ㅎㅎ 맞습니다. 18세기 무신론 사상에 대한 역사적 관심이 없다면
굳이 살 필요는 없는 책이에요. 끼워팔기는 나도 좀 의외네요.
라주미힌님/ 아마도 베스트셀러로 계속 밀어보자, 그 생각인 것 같아요.
관심 있으시면 사보셔도 되고, 또 굳이 관심 없다면 사보실 필요는 없고 ... ^^;;

urblue 2006-01-15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교보 갔다가 이 책도 들춰봤는데, 어째서 베스트 목록에 들어있는지 저도 의아했더랍니다.

마립간 2006-01-1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끼워 주는 책을 생각하면 사야 되냐요 말야야 되나요. (balmas님에게 여쭤볼 성격이 아닌 것도 같지만.)

비로그인 2006-01-1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다빈치코드 열풍에 교묘하게 묻어간듯.ㅡㅡ;;

balmas 2006-01-1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그럼요, 내용상으로는 전혀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책은 아니죠. 그래서
뭔가 작전이 있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다니까요.
마립간님/ ㅎㅎㅎ 사도 좋고 안사도 그만인 것 같습니다. 끼워주는 책은
볼 만하더라구요. 어째 주객이 전도된 듯 ... ^^;;
자꾸 때리다님/ 이 책은 소설도 아닌데 말이죠.

balmas 2006-01-16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냥 추천만 하나 해주삼!!
 

ㅎㅎ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을 단 책이 한 권 나와 있구나.

당신의 아내는 왜 자살할 수밖에 없을까?

프랑수와 다고네 (지은이), 여인석 (옮긴이) | 청년의사

 

이 책은 프랑수아 다고네(Francois Dagognet)라는, 프랑스의 저명한 의사-철학자의 대담집을

옮긴 책이다. 다고네는 바슐라르-캉귈렘의 제자이자 동료이며, 프랑스 과학사, 과학철학계의 거목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매우 다작의 철학자인데도 국내에는 한 권의 책도 번역되지 못해 아쉽던

참에, 찾아보니까 2004년에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걸 알고 오늘 구입해서 읽고 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질병의 철학을 위하여"(Pour une philosophie de la maladie, 1996)인데,

번역본 제목은 역자가 바꿔 붙인 모양이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의아했는데, 1장 말미쯤 가니까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원제인 <질병의 철학을 위하여>만큼 이 책의 내용을 충실히 표현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얼마전에 부르디외의 [하이데거의 정치 존재론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r]이

[나는 철학자다]라는 코믹한 제목으로 번역돼서 실소한 적이 있는데(아마도 출판사 사장이 개그를

좋아하는 듯하다. 번역은 좋은데, 책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놓았다.), 이 책의 제목은 그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이 책은 3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은 프랑스 의학 사상의 계보에 대하여 다루고 있고,

2장은 생명 윤리학에 대해, 3장은 [건강의 사회정치학을 위하여]라고 해서 공공 의료 정책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대담집이라는 성격도 있겠지만, 어렵지 않게 술술 잘 넘어간다. 하지만 매 쪽마다, 아니 매 답변마다

다고네의 말과 생각은 간결하고 거침 없으면서도 깊이가 있고 핵심을 찌른다.  대가다운 풍모다.

아직 1장 뒷부분 정도밖에 안 읽었지만, 2장과 3장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시사적인 쟁점들을

다루는 것으로 보아 더 흥미진진할 것 같다.

 

몇 가지 인상적인 구절들.

"우리는 질병에 대해 순수하게 양적으로 판단하는 이론을 포기해야 합니다. 유기체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부과하는 규범을 위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26)

 

"의학은 무엇보다 분리의 학문입니다. [...] 병리학은 유기체 속에서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상호관계들을

파악하려고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유명한 의사인 장 밥티스트 부이요는 류마티스의 증상과

심장질병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무릎의 관절과 심장을 연결시킨다는 것은 경탄할 만한 일입니다. [...]

그것은 몸에 대한 해부학적 독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와 그 안에 많은 길이 있는 하나의 '총체'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그것을 하나의 '전체'라고 말하며 내게 몸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일종의

실망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몸을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체'는 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입니다."(27)

 

"내가 철학자로서 상상했던 질병과 의사로서 접근한 질병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질병이란

고통이지요. 철학자로서의 나는 불행과 죽음과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

했습니다."(29)

 

"새로운 의료 기술의 큰 기여는 몸을 외면화시킨 것입니다. [...] 이제 더 이상 몸을 열거나 죽음을 보기

위해 몸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 외면화란 몸을 외재화시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몸의 내부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31)

 

"우리는 질병을 [완전히] 외면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초음파 기기와 컴퓨터 스캔과 같은

진보된 형태를 통해 방사선학은 우리에게 병변을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을까요?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기술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만족하지 않습니다. 기술 이전에, 그리고 기술을

적용하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의 몸의 감수성입니다."(33)

 

"질병은 흔히 실존적인 문제 앞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건강이란, 당신을 엄습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과감히 맞서고 그것을 해결하는 가능성인 것입니다."(42)  등등.

 

아주 적임자가 번역을 해서 매끄럽게 술술 잘 읽히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인명의 번역이 잘못된

데가 있고, 간혹 원어가 무엇인지 궁금한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가령 위에서 인용한 "총체와 ""전체") ... 

그런데 책값이 너무 비싼 것 같다. 130쪽 정도 되는 책에 9500원이면 너무 비싼 거 맞지???

15% 할인을 해도 8000원 ...

거의 팔리지 않을 책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어쨌든 재미있고 유익하고 생각할 만한 것들을 많이 안겨주는 책이다.

깊이 있으면서 쉽고 명쾌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책을 쓰는 법, 말하는 법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나는 ...) 

 

나중에 서평을 한번 써봐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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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1-1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님이 올리실 서평을 눈여겨보겠습니다. ^^*

balmas 2006-01-13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부끄럽습니다.
사실 저보다 의사이신 분들이 써서 올리셔야 하는데 ... ^^;;

마늘빵 2006-01-13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재밌겠다.

로드무비 2006-01-1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읽고 땡스투 누를 거야요.(유인작전)
우선은 추천만!=3=3

마냐 2006-01-1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퍼 제목으로도 도발적이야요. 기둘릴께요. ^^;

balmas 2006-01-1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예, 재미있어요. 한번 보세요. :-)
로드무비님/ 추천 감사. 헤헤, 그럼 못이기는 척하고 말려들어볼까요? ^^;;
마냐님/ ㅋㅋ 제목이 좀 자극적이죠?

비로그인 2006-01-1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제목 정말 마음에 드네요. 님의 서평이 올라오면 보고 읽을것인가 말것인가 결정을..(실은 심히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balmas 2006-01-14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제목 멋있죠?
책도 별로 안 어려워요. 명 문장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o^

포월 2006-01-1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의 책의 제목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래도, 나는 철학자이다'라는 주장에 순수사유와 파시즘의 관계가 압축으로 담겨있다고 보는 독자분들도 계시더라구요. ^^

balmas 2006-01-1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