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라이브러리 (1주년 스페셜 에디션)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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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라는 낱말만 보면 습관적으로 책이든 잡지든 손에 잡게 되는데, 이 책도 그런 책 중에 하나이다. 보통은 비문학이기 마련이지만, 소설임에도 손에 든 이뉴는 '죽기 바로 전에 열린다는 그 마법의 도서관'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모르는 저자의 책일 경우에는 저자 소개를 읽지 않는다.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는 편인데,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다 읽은 후 작가소개글을 읽는다. 저자인 매트 헤이그는 20대 초에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생을 마감하려했었다고 한다. 파트너와 가족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회복하였고 그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캐릭터인 노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 여정의 시작과 끝에는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 해주었던 엘름 부인(사서)과 도서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외롭거나 힘들거나 아프거나 할 때 그런 마음을 다독거려줄 친구나 어떤 장소가 있다. 노라에게는 그곳이 '도서관'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곳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도서관'을 찾지 않을까. 요즘 아이들도 그럴까? 학교 도서관이든 마을 도서관이든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마음을 편히 하고 쉴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죽기로 결심하기 19년 전, 노라 시드는 베드퍼드에 있는 헤이즐딘 스쿨의 아늑하고 작은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9)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도서관 사서인 엘름 부인은 노라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체스를 두는 중이다. "뭐든 할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어. 덜 춥고 덜 축축한 곳에서 말이야." 라며 노라를 격려한다. 노라의 엄마는 노라를 '바로잡아야 할 술시'처럼 대했지만 엘름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너처럼 똑똑한 아이는 뭐든 할 수 있어."라고. 

죽기로 결심하기 스물일곱 시간 전 노라는 애쉬가 찾아왔고, 애쉬는 그녀의 반려묘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노라는 외로웠고, 슬픔은 익숙했다. 복용 중인 항우울제는 눈물도 나지 않게 했다. 자신의 반려묘가 죽었는데, 노라는 동정과 절망보다.... 고통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질투를 느꼈다.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등 요즘은 육체의 고통만큼이나 정신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공황장애'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되어버렸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이 특히 그러하다. 산후우울증은 대표적인 우울증의 하나인 것 같다. 나 역시 그 시기를 거쳐오며 아슬아슬하게 넘겼지만,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두드러진 요즘 산전 산후의 갭이 지나치게 크게 느껴지지 않나 싶다. 그럴 때 느끼게 되는 '나'라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 떨어진 자존감, 무쓸모....

노라는 인생의 작은 고비고비마다 그 고비를 이겨 넘지 못하고 포기하고 후회하는 삶을 살아왔다. 항우울제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상태에서 가족(특히 오빠)과의 유대도, 직장에서의 평범한 삶도, 친구와의 연결도 모든 것이 다 엉망이고 제대로 되지 않는 극한의 상황을 맞이한다. 그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한다. 그런데 노라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에서 자정의 도서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 들어가게 된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는 인생의 조력자를 만나, 후회했던 선택을 바꿔 다시 살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삶이 만족스럽다면 그곳에서 계속해서 살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나라면 어떤 후회의 삶을 바꿔보고 싶을까?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매순간을 산다. 분명 내가 가지 않은 길에는 다른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길이 지금 내가 선택한 길보다 나은 길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노라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자신이 가보지 않은 선택을 경험하게 된다. 죽고 싶었던 노라가 그런 경험을 통해 점점 변화하게 된다. 노라는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이웃집 배너지 씨를 대신해서 약을 타다주는 사소한 목적도, 노숙자에게 줄 돈도 없었다. 궁지에 몰리거나 외로움에 사무칠 때 왜 세상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밀어버릴까? 노라는 평생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번 삶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가 둔 모든 수는 실수였고, 모든 결정은 재앙이었으며, 매일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에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수영선수, 뮤지션, 철학가, 배우자, 여행가, 빙하학자, 행복하고 사랑받는 사람. 그중 어느 것도 되지 못했다. 심지어 '고양이 주인'이라는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혹은 '일주일에 한 시간짜리 피아노 레슨 선생님'도. 혹은 '대화가 가능한 인간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39

"삶과 죽음 사이에는 도서관이 있단다." 그녀가 말했다. "그 도서관에는 서가가 끝없이 이어져 있어. 거기 꽂힌 책에는 네가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살아볼 기회가 담겨 있지. 네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지 볼 수 있는 기회인거야.... 후회하는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하나라도 다른 선택을 해보겠니?"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49


그러고보면, 진짜 도서관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무한대의 삶을 담고 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의 경험과 사유를 통해 내가 가 보지 않은 그길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저자는 도서관을 무대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결과이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그것을 선택했고, 한편에는 '후회'를 남기고 살고 있다. 

"나는 고독만큼 함께하기 좋은 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 소로가 <월든>에서 한 말이다. 

예전에 밤이 되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면 노라는 그 이유가 고독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고독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분주한 도시에서는 외로운 마음이 어떻게든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를 갈망한다. 마음은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한 자연(혹은 소로의 표현대로 ㅎ자면 '야생이라는 강장재') 안에서는 고독이 다른 성격을 띤다. 고독 안에서 자체적으로 연결이 이뤄진다. 그녀와 세상이 연결되고, 그녀와 그녀 자신이 연결된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185


노라는 빙하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북극에서 곰을 만나 정말로 돌가고 싶을 때 돌아가지 못했다. 생존본능은 노라로 하여금 정신없이 냄비와 국자를 두들기게 하였다. 노라는 죽음의 순간 자기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 앞에 서면 삶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노라 앞에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북극에서의 경험은 노라로 하여금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을 끌어내었다. 삶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였다. 이곳에서 노라는 노라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위고를 만난다. 

노라는 자신을 위한 완벽한 삶을 찾아 새로운 삶을 계속 경험한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 나에게 의미가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 노라와 같은 고민에 빠져든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인적이 적은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그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고...'만약 숲에서 길이 두 갈래 이상으로 갈라졌다면 어떻게 될까? 나무보다 길이 더 많다면? 네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끝없이 많다면? 로버트 프로스트라면 그럴 때 어떻게 했을까?" 

(중략)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최상의 결과는 '여러 대안 중에서 현명한 선택을 내린 결과'다. 그런데 지금 노라는 이렇게 여러 대안을 조금씩 맛보는 특권을 누리는 처지에 있다. 이는 지혜로 가는 지름길이며 아마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할 것이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277~278


그녀가 삶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르러서 이제 나쁜 경험이 있으면 좋은 경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듯 했다. 노라는 자신이 삶을 끝내려고 했던 이유가 불행해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우울증의 기본이며 두려움과 절망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지하실로 들어가게 되어 문이 닫힐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반면 절망은 문이 닫히고 잠겨버린 뒤에 느끼는 감정이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308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과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가 확실하고 분명했던 데에 비해 최근에는 가벼운 연결고리를 더 많이 원하는 것 같다. 내 삶을 다른 사람(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 공유하면서도 나의 내면은 드러내보이지 않으며 어느 누구와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상태.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정작 그들의 고민과 생각에 깊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상태 말이다. 배너지 씨가 요양병원보다 집에서 살기를 원했던 이유도 그것이었고, 노라가 병원에 있는 엘름부인을 찾아가 체스를 두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노라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와 비슷한 나의 도서관도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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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커버 특별판, 양장)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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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과학에세이 정도는 찾아 읽는편이라 이 책도 올해 초에 구입을 했지만, 정작 이 책을 읽은 것은 10월 들어서서였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 나는 이 사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성학'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고, 특히 나는 '생물' 과목을 엄청 싫어하는 사람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이 어떤 비유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인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대기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어렸을 때 천체의 이름과 의미에 호기심이 생겼고 밤하늘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그 일이 끝나자 지도 만들기에 집중을 했고, 이후에는 식물의 학명과 종을 알아내는 것에 열중했다.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있는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p.28)

열정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형 루퍼스가 북부연방군에 입대하려고 집을 떠났다가 훈련소에서 군대열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 경험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도 꽤 많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나중에 그가 평화주의자가 되어 벌이는 일들은 이 일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그가 평화주의자가 된데는 다른 이유, 즉 전쟁이 우수한 인재들을 다 죽게 만들어 그 자리를 열등한 인간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우려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루퍼스가 죽은 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수집에 더 열중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은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뮌스터 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p.31)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덮었을 때, 그의 강박적인 수집 성향이 어떤 파멸적인 일로 바뀌었는지 알게 되었다. 프랜시스 골턴이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도 있겠다"며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우생학'을 이야기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무시하였지만 데이비드는 가장 앞장서서 큰 소리로 옹호했다. 그리고 그는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조금 혼란스러웠던 것은, 룰루 밀러의 삶이 내게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삶을 좇는 여정이 룰루 밀러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 부분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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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말 - 무심히 저지른 폭력에 대하여
김예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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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그리고 천원짜리 변호사를 보면서,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 주변에 법대 다니던 선배와 동기, 그리고 후배들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 법조계로 나간 이는 없었다. (아마 잘 된 분들은 나와의 연결고리가 없었을지도) 그래서 내가 접할 수 있는 '변호사'라는 직업은 tv나 영화를 통해서였다. 꽤나 잘나가는 직업이라 여긴 것은 아마도 그런 매체들의 영향이 크다. 반대편에 서 있는 '검사'들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선망보다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김예원 변호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시각장애인이고 장애인, 아동 등 사회적 소수자인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공익변호사라는 소개글을 읽고서야 이 책을 좀더 진실되게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82년생 김지영' 연극을 보면서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었다. 그것은 바로 그 김지영에 내 모습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김예원 변호사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아닌 것은 아니라는 목소리를 피해자의 옆에서 대신 내줄 때, 같은 곳을 함께 째려봐줄 때, 사건을 마주한 한 사람이 조금씩 본래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 큰 행복이다. 이 책은 그 연대의 여정에서 썼다. (p.11)

사람들은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공감한다. 그래도 아직은 그런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가끔은 타인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피해자'가 당할 만하다거나 '그런 빌미를 줬다'고 말한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이해시키려고 해도 철통같이 막아낸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된다. 전부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 둘 조금씩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까. 

한번은 인권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각자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인권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고 공통의 관심사로 논의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인권'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의 삶이 '인권 친화적'일 거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터였는데, 그날도 사건이 하나 있었다.(p.60)

세상은 느리게 변한다. 결국 세상을 변하게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변화다. 텀블러를 끝내 반납하지 않았던 그가 살아가며 '절도'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약간씩 불편해지기를 바란다. 스스로 돌이켜서 변화하기 어려운 우리네 인생에 때로는 그런 작은 파동들이 작동한다는 것을 믿는다.(p.62)

나도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비인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 한둘때문에 모두를 싸잡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안다. 그만큼 세상에는 자신도 모르게 비인권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고, 우리 어느 누구도 그런 사람이 안 되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의 행동과 말 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날갯짓이 될 거라 생각하고 '의식적'으로라도 바른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장애인은 소수일 수는 있지만 '약자'로 불릴 이유는 없다. 사람의 얼굴이 제각기 다르듯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도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모두 다르다. '약자'라는 말로 납작하게 표현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와줘야 하는' 장애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감탄하고 배우고 싶은' 한 사람으로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실천해보면 어떨까. (p.86)

중학교 때 친구가 장애가 있어서 늘 어머니와 함께 등교를 했다. 그 친구는 어느 누구보다 밝았고, 활기 있었고, 건강한 미소를 가진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장애'가 있다고 해서 '약자'인 것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은 너무도 부족하다. 어쩌면 장애인과 여성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고 본다. 장애인이면서 여성인 경우는 더 말해서 무엇하랴.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은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들을 가차 없이 드러냈다. 아니, 원래부터 드러나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곳이 너도 나도 죽겠으니 드디어 들여다보이는 상황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사회의 약한 고리 중에 아동학대문제가 특히 더 드러나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아동은 스스로 '내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p.118)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이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드러냈다는 데 공감한다. 그나마 혼자 있어도 걱정이 별로 안 되는 청소년 자녀를 둔 덕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 어린 자녀를 키우는 직장 동료들을 보면서 많은 걱정이 되었었다. 누군가가 보호하고 보살펴야 하는 아이들이 '팬데믹' 앞에서 방치되었고 고립되었다. 아동에 대한 걱정 뒤에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또 한번 느낀다. 고립되고 방치된 아동을 위해 국가가, 우리 사회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여전히 손가락은 여성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장애인, 아동, 그리고 여성의 이야기를 우리 사회가 좀더 많이 하고 많이 들어주길 바란다. 

술 마시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형을 깎아주지 말고 엄하게 처벌하자는 말에는 동의하는 사람이 많지만, "술 취한 사람은 위험하니 술 깰 때까지 가둬놓아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왜 통계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결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독 장애인에게만 분리와 배제를 말하는가. 등록 장애인의 수가 전체 인구의 5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장애인이 비장애인에 비해 절대적인 소수자라서 겪어야 하는 오해나 해프닝일까?(p.158)

우리나라가 유독 술에 관대한 나라라고 한다. 술 좋아하는 나랏님이 술 얘기만 하는 걸 봐도 그렇다. 술에 취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고 인사불성이 되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사람이 뭔 죄냐, 술이 죄지.'라는 말을 한다. 웃기는 말이다. 술이 뭔 죄냐, 그걸 마시고 정신 못차린 사람이 문제지.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눌까? 무엇을 기준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다. 뚜렷한 해결점을 찾기 어려운 각자도생 아비규환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별일 없이 살아가려면 '약자'로 취급받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거나 '약자'라고 무시당하지 않도록 괜찮은 척을 해야 한다. 더러는 삶의 무게가 무거워 도저히 괜찮은 척을 할 수 없을 상황이 닥쳐도 마른 걸레에 물 짜내듯 스스로를 비틀어 견뎌야 하는 것이다.(p.183)

차별과 혐오. 요 며칠, 온갖 혐오가 넘쳐나는 모습을 또 보았다. 국가가 국가의 구실을 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약자와 비정상'은 '국민'이다. 이 책은 장애인과 아동의 인권을 서술하고 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여성'을 보았고, '대한민국 국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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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을 위한 인문학 - 왜 세계 최고 CEO들은 인문학에서 답을 찾는가? CEO의 서재 33
이남훈 지음 / 센시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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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아니라서 안 읽으려다가, 관리자에게도 필요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하여 책을 들었다. 경영자와 관리자 사이에 막이 하나 있긴 하지만 경영자의 마인드를 알면 관리자로서의 나의 행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인문학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관점으로 사람들 사이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던가. 사장을 위한 인문학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저자는 사업에 관한 질문 20가지에 동서양 사상가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덧붙이자면, 서양보다는 동양 사상가가 압도적으로 많다.)


20가지 질문 중 나의 관심을 끈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인성 좋은 사람을 뽑아야 할까? 실력 좋은 사람을 뽑아야 할까?

2. 조직문화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

3. 매사에 부정적인 직원, 과연 문제가 있는걸까?


경영의 한수라는 코너에서는 


1. 직원의 언어를 사용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2. 지금 외롭다면, 잘못 일하고 있는 것이다


사장의 입장에서 직원은 '나를대신해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장에게는 열심히 노력하는 직원은 '인재'이고, 회사에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직원은 '더 좋은 인재'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를 수 있다. 성과를 낸 직원이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5~60%만 쓰면서 적당히 일하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직원은 인재인가? 인재가 아닌가? 


만약 어떤 직원들이 사장과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회사가 이뤄야 할 가치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있다면, 그 직원들의 말과 행동은 '일 잘 하는 직원', '돈 많이 벌어주는 직원'과는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들은 누군가 요구하지 않아도 사장 마인드로 생각하고, 스스로 사장의 방법으로 회사를 관리한다.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깊은 동의와 '같은 목표'에 대한 열정, 이것이 진정한 인재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p.23~24)


인재를 어떻게 알아보고 뽑을 수 있을까? 인재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갖지 않는다. 인재 기준을 너무 높게 잡으면 선발에 어려움이 생긴다. '완성된 인재'가 아니라 회사에 입사한 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우리 회사에 맞는 인재로 성장시킬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 조직 문화에 어울릴 수 있는 직원을 선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직원을 선발할 때 인성을 볼 것인가, 실력을 볼 것인가? 


삼국시대 동오의 정치가이자 당태종 신하인 위정은 이런 간언을 하였다고 한다. 

천하가 평정되지 않았다면 오로지 그 재주를 취할 뿐, 행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하 대란을 없애고 평정했기에 재주와 행실을 둘 다 갖추지 않으면 등용할 수 없습니다. (p.33) 


즉 창업 초창기에는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인성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으므로 실력 위주로 채용하되,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때는 인성도 고려해야 한다. 인성만 보자는 것이 아니라 실력 위에 인성도 갖춘 직원을 선발하거나 그런 직원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비범했던 인재도 게으른 조직문화 속에 들어오면 그 비범함의 빛이 사라진다. 평범한 사람도 건강한 조직문화 속으로 들어오면 비범하게 변한다. (p.79)


조직문화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만드는 방법은 생각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고, 생각의 구조를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험'이다. 그러므로 직원들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정확한 전달을 통해 회사가 원하는 것과 직원이 해야 할 일을 맞추는 경험도 필요하다. 정확한 소통과 의사 전달, 공유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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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주문 - 일터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말, 글, 네트워킹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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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겪는 차별에 대해 말하지않으면 세상은 그것을 없는 것으로 친다. (p.18)


대학 다닐 때(벌써 3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중간/기말고사를 치면서 교수님들이 남학생들에게 후한 성적을 줬다. 그때, 교수님들은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점수를 줘도 여학생들이 성적이 더 좋지 않냐. 얘들은 졸업하면 취직하고 결혼해야하니까 너희가 이해해라."라고. 


저건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들은 수많은 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결혼한다는 말을 했을 때, 지도교수가 했던 말도 생각난다. "이제 공부는 계속 안할거야? 일도 못하겠지?" 어쩌면,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왜 저런 말은 여자만 들어야했을까? 남자들은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니 학점도 잘 줘야 하고,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하던 일도 하던 공부도 손을 놓아야 한다는 말인가. 


세상의 여성에 대한 차별에 눈떠야 하냐고? 그것은 도무지 진단명이 나오지 않던, 수많은 여성들의 승진누락, 조기퇴직, 낮은 임금, 쉬운 해고 등의 문제들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p.18)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었다. 결혼 전까지 나름 전문직을 갖고 있었고, 잘한다고 인정도 받았지만, 결혼과 임신, 출산 이후 나는 일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여자가 돈 벌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적게 벌어도 남자가 벌어야한다"는 말도 들었다. 나만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일까?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러다 아이라도 낳고 나면, 그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아이가 학습능력이 좀 뒤처지기라도 하면, 학교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그건 다 엄마탓이 되었다. 


성공한 여자의 자녀에게 진학 등과 관련한 문제가 생기면 성공한 여자는 여자로서도 심판받고 어머니로서도 심판, 비난받는다. 본인도 못 견뎌 자녀를 서포트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그럼, 성공한 남자의 자녀에게 같은 문제가 생기면? 그의 아내가 비난받고 그는 이해받는다. 그의 아내가 일하는 여성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p.34)


요즘은 대부분이 맞벌이를 한다. 똑같이 출근을 하고 근무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나'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저녁 준비를 하고, 설거지까지 끝내고서야 자리에 앉지만, '누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서 주는 밥 먹고, 쉰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회사에서 조퇴를 하는 사람도 엄마고, 학부모 상담이 필요할 때 연차를 쓰는 것도 엄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은 아빠들이 많다(정말 많냐고. 아직도 20여 명의 학부모가 모이면 19명이 엄마고 1명이 아빠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그 1명의 아빠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지만.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라도 일으키면 '엄마는 무엇을 했냐'고 한다. 왜 아빠에게는 묻지 않을까? 혼자 키우는 아이도 아닌데. 


출산 후 그만 둔 일을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때 다시 시작했다. 출산 전 '전문직'이었던 나는 시간당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직원이 되었다. 경력 단절은 나의 커리어를 0으로 되돌려놓았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아이는 아직 어렸고 풀타임으로 근무를 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런 시간들을 거쳐 지금은 다시 정규직으로,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지만, 정년까지 일할 수 있을까?를 항상 걱정한다. 


좋은 기회는 여자에게 오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이런 '기분'을 느껴왔는데, 실제로도 그런 경향성이 있다는 말이다. 승승장구할 때는 여성을 배척하다가, 위기에 처하면 여성을 리더로 내세우는 조직은 정치권에서부터 전 세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IT기업까지 비일비재하다. (p.101~102)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여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면 온갖 욕지기를 다 듣는 경우도 흔하다. 여성들에게는 유리천장도 있고 유리절벽도 있지만 남성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던가? 차별이란 게 뭔지 제대로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역차별' 운운한다. 여성을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존재로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가벼운 에세이였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묵직한 주제들이었다. 남성들이 읽고 현실에 눈뜨게 할 필요도 있겠지만, 나는 이 책을 여성들이 읽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네트워크도 필요하고, 위에서 끌어주고, 옆에서 밀어주고, 밑에서 받쳐줄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도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먼저 변해야 한다. '나 혼자'라면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함께'라면 바꿀 수 있다. 나 역시 구구절절 남성과 여성을 구분지었지만, 앞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짓지 않고 '인간' 그 자체로 보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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