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굉장한 어른의 뇌 사용법 - 깜빡하는 당신을 위한 효율적인 두뇌 습관
가토 토시노리 지음, 황세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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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어른에게 맞는 공부법을 쓰지 않으면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기억의 메커니즘이 학생 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썼습니다)


결국, 이 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뇌의 규칙에 따라 활용법을 바꾸면 어른도 공부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감퇴하고 노화가 되니 더이상 공부 같은 건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나이 탓'만큼 편리한 변명도 없는 셈이다. 


이 책은 '뇌의 규칙을 따르고, 뇌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라'고 조언한다. 우선 뇌의 전체 특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장 39페이지에 등장하는 '브레인군의 성격' 그림을 보면 간단하게 뇌에 대해 알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아이

요령이 좋음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연구함

싫증을 잘 냄

칭찬을 받으면 성장하는 타입

쉽게 영향을 받는다(세뇌당하기 쉽다)

정직함

마감이 정해져 있어야 의욕이 생기는 타입

기본적으로 게으름

편한 방법을 찾는 것이 특기

보상을 매우 좋아함

설명은 하지 않지만, 이 녀석은 '당'을 좋아한다. 브레인 군의 성격 그림에서도 '당'을 먹고 있는데 만화로 그려진 곳곳에서 당을 섭취하는 뇌를 볼 수 있다. 힘든 회의나 공부를 할 때 단거 찾게 되는 심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뇌의 최전성기를 40대 후반부터 50대까지로 본다. 노의 기본 특성은 위와 같지만 거쳐온 환경이나 직업, 인생 경험, 뇌활용법에 따라 뇌는 개성적으로 변화한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자주 사용하는 것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을 것이다. 뇌는 평생 성장한다고 하니 인생 절반을 산 지금 남은 50년을 위해 나의 뇌를 다시 훈련시켜 볼만하지 않는가. 


인간의 뇌는 새로운 자극을 받는 시기 그러니까 취직, 승진, 결혼 등의 인생 단계를 밟으면서 급격하게 성장한다고 한다. 40대 이후가 되면 뇌의 기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뇌 안에는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는 뇌세포의 영역이 있는데 저자는 이것을 초뇌야라고 부른다. 그 중 기억이나 이해를 담당하는 초측두야는 30대에 절정, 시각이나 청각 정보를 통해 부석하고 이해하는 초두정야는 40대에, 실행력이나 판단력을 관장하는 초전두야는 50대에 절정을 맞는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의 나의 뇌는 최전성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지금 더 철저하게 연습을 해둔다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더 똑똑해질 수 있다. 


우리는 노화가 되면 뇌의 기능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뇌세포 수가 아무리 많아도 뇌세포를 연결하는 정보전달회로가 발달하지 않으면 뇌는 기능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즉, 뇌세포 수가 아니라 정보전달회로 즉 네트워크가 중요한 셈이다. 


책에는 뇌를 각 부위의 역할에 따라 뇌번지라 명명하여 소개한다. 사고/의욕/상상력 등을 관장하며 무언가를 생각할 때 작용하는 사고계 뇌번지, 눈이나 귀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이해하고 모르는 내용을 추측해 이해하려 할 때 작용하는 이해계 뇌번지, 무언가를 외우거나 떠올릴 때 작용하고 정보를 축적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며, 해마 주위에 위치해 있는 기억계 뇌번지, 희로애락을 느끼고 표현하며 평생 계속 성장하고 늦게 노화되며 뇌의 여러 부위에 있는 감정계 뇌번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는 전달계 뇌번지, 손/발/입 등 신체를 움직이는 일 전반에 관여하며 뇌 안에서도 가장 먼저 성장을 시작하는 운동계 뇌번지, 눈으로 본 영상이나 사진, 읽은 문장을 뇌에 축적하는 시각계 뇌번지, 귀로 들은 말이나 소리를 뇌에 축적하기 위해 작용하는 청각계 뇌번지가 그것이다. 


뇌에서도 사고계, 이해계, 기억계 뇌번지가 서로 기능적으로 작동하면 뇌 전체의 기능이 향상된다고 한다. 어른의 공부법도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를 기능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단독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어른의 뇌에 맞는 기업력 향상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관련된 뇌의 시스템이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스템에 맞게 공부법을 바꾸면 기억력을 탓할 일은 없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외우고 싶을 때는 이해를 해야 한다. 


해마는 장기기억과 연결된 길이다. 두근거리거나 긍정적인 상황에서 세타파라는 뇌파가 나와 해마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장기기억으로 연결이 된다. 새로 들어 온 정보 중에 과거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과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해한 것은 장기기억으로 연결된다. 어른의 뇌는 암기가 아니라 이해를 통해 정보를 기억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이 책은 '굉장한'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해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책 제목처럼 '사소하지만'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하면 좋을 내용들이 많다. 복습법이라든가 75시간 학습이라든가 정보를 출력하는 단계를 염두에 두라는 등의 방법적 측면 외에도 뇌번지의 특징을 이용한 다양한 방법을 소개한다. 


중간중간 4컷만화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고, 한 꼭지 한 꼭지가 길지 않아서 쉽게 읽힌다. 뇌과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뇌 이야기'이다.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하는 중장년층에게도 힘이 되는 내용이다. 가볍게 읽히는 책이니 교양 삼아 읽어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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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중이다. 토지 10권을 읽었다. 이제 딱 절반을 넘어왔다. 생각보다 쭉쭉 읽히기 시작해서 남은 책을 읽는데도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는 한 자리에서 쭉쭉 읽어 마무리를 짓는 것이 나에게는 맞는 방법이다. 띄엄띄엄 읽으면 사람들도 기억이 안나고... 핫하...

'결혼문제만이 아니다. 정열이 모자라는 여자, 나는 정열이 모자라는 여자야. 오빠는 신여성에게 정열이 부족하면 죽도 밥도 아니라 했다. 그래, 죽도 밥도 아니야. 내가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두려워서 떨었다.' (p.25)

'어쨌든 나는 죽도 밥도 아닌 것만은 확실해. (중략) 아버님이 살아 계실 적에 열심히 공부해서 칭찬받고 집에 들면 집안 살림 도와주어서 칭찬받고 그것이 내 전부였어. 그것이. 교장 선생님은 여성교육의 선구자라 하셨다. 여성교육의 선구자, 선구자 될 생각도 없으면서 뭘 여자가 시집이나 가지, 하면 불쾌해진다. 오라버니 말대로 자발적으론 아무것도 못하면서 최고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은 있어서, 그 무거운 짐짝 같은 선생, 직업, 여성교육의 선구자, 그걸 끌고 막연한 독신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역시 비참하다. '(p.26)

토지를 읽다보면 신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신여성'이라 불렸던 여성들의 자의식, 그리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조선 남성들의 시선들 말이다.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될 생각은 없으면서 최고교육은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어서라는 말은 명희의 생각에서 나왓다기보다 그 당시 신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교육을 받은 당사자들도 신념이나 학문에의 의지가 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아니지요. 나는 분명히 지금 여자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신교육을 거부하고 용납하고 하는 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달랐어요. 남자들에게는 일부 서민층을 제외하고 지식인은 남아도는 형편이었고 벼슬 못한 선비들이 우글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갈 거요. 그러니만큼 남자들은 신교육 혹은 신학문을 거부하는 데도 그만한 명분이 있었을 것이요, 받아들이는 데도 그럴 만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니 어느 편이든 자각하고 취한 행동이지 여자들같이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지요. 여자들의 경우는 지식의 바탕이 전혀 없이, 전통도 없이 바로 들이대었기 때문에 교육을 받았다. 하면은 그것을 곧 학문으로 착각을 한단 말입니다. 학문이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모르거든요. 엄연히 말하여 오늘날 우리가 해외에서 받는 교육은 학문이기보다 태반이 기술인 겁니다. 착각을 하고 있어요. 모두가, 특히 여자들이 말입니다. 의사나 간호원이나, 재봉, 요리가 포함된 가사과나 심지어 하란사가 미국서 영문학을 했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영어로 시작한 그네들조차 학문으로까지 들어가기에는 아주 적은 몇 사람일 터인데, 솔직히 말하여 영어공부를 했다 하는 것이 옳아요."(p.38~39)

섬으로 시집을 간 푸건이가 병에 걸려 엄마가 보고싶다고 울고 있다는 소식에 야무네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보니 한번 들여다 볼 수도 없던 딸이기에 마음이 짠하다. 야무네는 뒷일이야 어찌 되건 푸건이를 데려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먹을 것 없고 가족들 살기도 빠뜻하지만 그래도 딸을 데리고 가고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푸건이가 끝내 안가겠다고 하여 두고 오는데, 사위마저 병이 들고 결국 푸건이를 데려오게 된다. 푸건이네 시집에서는 아들이 병든 것조차 사람이 잘못 들어온 탓이라 하며 병에 들어 다죽게된 며느리를 데려가라 한다. 사람 사는 것이 참말로 냉정하다. 흔히 일일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이야기기도 한데.. 집안에 새 사람이 들어와서 집안이 펴면 자기들 잘나서 그렇고 집안에 변고라도 생기면 다 밖에서 들어온 새 사람 탓을 한다. 지독한 가족중심 이기주의다. 결국 그 가족이란 것이 밖에서 들어온 새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아니던다.

토지를 읽다보면 '시대적'인 특성이긴 하겠지만, (요즘도 아예 없어지지 않은) '결혼'을 했는가 안했는가, 누구와 혼인을 하는가, 못하는가, 좋아하는 이를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싶다.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사는 인물이 거의 없는데도 왜 다들 그렇게 결혼을 하라고 하라고 하는걸까?

임이네는 토지 10권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악착같이 모은 돈은 호강하며 사용하지도 못할 돈이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도 악을 쓰며 삶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임이네. 남편도 자식도 모두 임이네를 멀리하지만 그런 악바리같은 심성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웃으면서 살 수 있었을까? 결국 병원에서도 손쓸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임이네에게조차 나는 연민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부여잡고 있는 끈이 썩은 동아줄이라면 진작 놓아야했지 않나...

홍이는 좋아하는 장이가 아니라 보연과 결혼한다. 어찌 된 것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연스레 이어져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없다. 다들 얽히고 엮이다 보니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평사리에서 오광대놀음 하던 날 의병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고 나오면서 홍이는 사는 방법을 또 하나 배운다. 보연과의 결혼생활도 나쁠 것 없음에도 장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런가하면 서희는 두 아들의 성장과정에서 길상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차갑고 냉정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이들을 지키고, 가족을 지켜내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 말 때문에 때린 거는 아니고요. 니 아부지는 종이라 했더니."

"그랬었구나. 말한 대로 들려주어 고마워."

서희의 음성은 잠긴 물처럼 조용했다.

"순철아."

"야."

"그랬다면 환국이 잘못한 것은 없구나. 네 잘못이야. 왜냐하면 환국이아버님은 종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나라 위해 몸 바친 분이었단다."

박의사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강인한 억제, 마지막의 말은 모든 것을 건 모성의 승리였다.

강가까지 온 서희는,

"여보, 당신이 그곳에 남은 뜻을 이제 확실히 알겠소. 하지만 장하지 않아요. 당신 아들 환국이가?"

찬 바람 속에 서서 서희는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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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서점 - 잠 못 이루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소서림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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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읽은 리빙스턴씨의 달빛서점에 이어 서점 책을 하나 구입했다. 등장인물들의 무대가 서점이거나 도서관이거나 하면 괜스레 반갑다. 읽을 틈이 나지 않아 계속 미루다, 친구를 만나러 진주에 가면서 들고 갔다. 버스를 기다리며 읽고, 버스를 타고 가며 읽었다. 그리고 친구를 기다리며 읽다보니 어느새 끝을 향하고 있었다.

잠 못 이루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라는 부제가 탁 와닿았다.

전자책으로 먼저 나온 이야기인 것 같았다. 종이책으로도 발간해달라는 요청이 진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자책으로도 꽤 성공한 듯 보인다. 나는 아직 전자책은 잘 못 읽는다. 화면을 따라 뭔가를 읽는다는 것이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기 때문이다. 나도 얼른 익숙해져야 할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자란 한 소녀가 저잣거리에서 바닥에 떨어진 책을 한 권 발견한다. 주인 잃은 책을 찾아주려고 주위를 보니 신선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 한 사내가 보인다. 소녀는 그 사내가 이 책의 주인이라 짐작하고 쫓아가다 귀신이 나온다는 숲 한가운데까지 가게 되었다. 스산한 숲 속에서 겁이 나 울음을 터뜨린 소녀 앞에 그 신선같은 남자가 다가온다. 시간이 흘러 그 둘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얼핏 알려진 바로는 벼랑에서 둘이 꼭 껴안고 뛰어내려 비극으로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죽었다는 그 사내가 그 후에도 계속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몇 백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도깨비 같은 놈이 자기 신부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내와 소녀가 이어진 것이 한 권의 책이었다고 하는데 그 책은 무슨 책일까? 소녀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계속해서 남자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왜일까? 문득 드라마 도깨비가 떠오르는 것은....음.... 이런 류의 환상 소설에 도깨비 같은 녀석이 나오면 이런 구조일 수밖에 없는가?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연서는 동화작가가 되고 싶어 회사를 그만 두고 글을 쓴다. 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거절하는 이메일만 받고 있다. 오늘은 해피엔딩을 써보라는 편집자의 이메일을 받았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 다른데 왜 모두 해피엔딩이어야 할까. 연서는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는 결말을 더 좋아한다. 약간은 잔혹하더라도 아름다운 찰나가 있는 그런 이야기. 연서는 산에 오르기로 하고 길을 나서는데, 그런 메일을 받아서일까?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 설정이 뻔한 결말을 향해 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옆길로 빠졌다가 길을 잃었다. 꽤 높은 절벽까지 와서 구조도 바랄 수 없는 상태에서 날이 저문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연서는 물빛 도포를 입은 수상한 남자를 만난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외모, 낯선 장소에서의 우연한 만남, 강풍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그 이름 모를 남자의 품에 안겨 눈을 떴다. 연서를 데리고 간 곳은 남자의 가게, 즉 환상 서점이다. 그곳에는 어린 소녀도 한명 있었는데, 서점 주인인 남자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서점주인인 이 남자는 종종 손님들에게 책을 소개해줄 겸 직접 읽어준다고 한다. 그 서점에는 방문객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 산책길에 마주친 이야기, 어느샌가 날아든 이야기 등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모여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말이란 흩어지지만 글은 영원하다고 하던가.

동화작가를 꿈꾸는 연서와 이야기를 기록하고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는 남자의 만남이다. 환상서점은 그 둘의 만남에 꽤 어울리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가끔 들리는 저승사자도 있다. 서점에서 만난 그 어린 소녀도 보통의 아이는 아니다. 그러고보니 등장인물도 묘하게 드라마 도깨비를 연상하게 한다. 불멸의 삶을 살며 정해진 삶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을 바라보며 산다.

'신'이 정한 길을 가지 않으려고 자기 인생을 바꾸는 인간, 그런 인간을 벌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민의 정을 느껴 도와주는 신, 그들의 삶은 돌고 돌고 다시 돌아 늘 그자리로 온다. 환생을 믿지는 않지만, 과거의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이승에서 다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야기는 과히 나쁘지 않다. 잠못 이루는 밤이 되라길래 무서운 이야기인가 했더니, 절절한 인연의 끈을 쥐고 있느라 잠들기는 어렵겠다. 전자책의 특성이 묻어있어서 그런가 술술 읽히는 책이다. 다만 자꾸 드라마 도깨비가 떠올라서... 신선함은 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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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나요 - 명랑한 척하느라 힘겨운 내향성 인간을 위한 마음 처방
양스위엔 지음, 박영란 옮김 / 미디어숲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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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며칠 전 대학 동기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었다. 30년 전 나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또 10년 전후로 오랜만에 만난 터라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 그 10년이라는 시간도 경사보다는 주로 조사로 만났던 시간이기에 서로 웃고 떠들면서 안부를 묻기엔 마땅치 않았던 셈이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이 쉽지 않은 성격이지만 많은 이들이 나의 성격과는 정반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 동기들이 기억하는 나는 역시나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다들, 자신이 알고 있던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성격이 다르다는 걸 알고 놀라워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내 모습 중에서도 그들은 그들이 기억하고 싶은 모습만을 기억하는 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 제목처럼 나 역시 그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내향성 인간을 위한 책들을 몇 권 읽었다. 대표적인 게 수잔 케인의 [콰이어트]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내용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일본인 저자의 책을 읽을 때 무거운 주제도 가볍게 다루고, 한 줄로 요약 가능한 주제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딱 지하철에서 들고 읽을 만한 책이다. 그런데 최근 좀 접하게 되는 중국인 저자들의 책도 그런 경향이 있다. 주제는 가볍지 않지만 낯설지 않은 예화들이나 이론들을 자주 마주친다. 심각하게 주제를 파고드는 맛은 없지만 쑤욱 훑어가는 느낌이다. 이 책도 약간 그런 느낌이다. 


'외향성'은 심리학자 칼 융이 1912년에 펴낸 『심리유형』에서 '내향성'과 '외향성'의 개념을 처음 주장한데서 나왔다고 한다. 그는 '내향적'인 사람들은 에너지가 내부를 향하고, 혼자 있는 것으로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조용한 것을 선호하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에너지가 외부를 향하고, 사람과의 교제를 통해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대부분 밝고 활발하다고 했다. (p.10)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회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 내향적인 사람들이 설 곳이 좁아진다. 사회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성격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애써서 외향적으로 바꾸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본성과는 다르게 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그런 척 하고 살아간다면 실제의 자신과 보여지는 나 사이의 간극은 더 커지고 힘들어진다. 


이 책은 그런 내향성 인간들에게 이야기한다. 당신의 진실한 감정을 무시하지 말라. 그리고 당신도 활짝 웃을 수 있다고.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예로 들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당신은 이들 중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그 모습은 진짜 당신 모습인가하고.


누가 봐도 외향적이고 밝은 사람도 스스로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들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거나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거나, 약에 취해 사는 모습 등을 보여줄 때 이런 걸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와 충만한 열정 이면에는 '감정 기여자' 또는 '감정 조력자'라고 하는 이미지가 겹쳐진다. 자기 감정의 필요는 무시한 채 다른 사람의 감정적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다.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디테일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습관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감히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부터 시작해보자."(p.29)라고.


대부분 사람이 겪는 우울증은 실제로 자기억압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자기억압이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성장기에 자기 표현이 항상 무시당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하고 억압을 받으면 표현하지 않고 억압하게 된다.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고 취약성을 숨긴다. 저자는 우리가 먼저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후 자신을 담대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우리의 성장 과정을 단순하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포용적 환경과 파괴적 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나 다른 양육자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관심, 호응과 지지를 받은 사람은 세상이 안전하고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거부와 미움, 다툼으로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면 이유 없이 위축되고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파괴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이익을 자신보다 우선시하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잘 거절하지 못하고, 갈등이 생길까봐 두려워한다. 성격이 예민하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까봐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지 늘 신경 쓰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인간관계에서 주눅이 들어있어서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대인관계에서 '남의 기분을 맞추는 것'은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기분을 맞추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우리가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사용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려는 동기가 자기계발이 아니라 두려움일 경우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정적인 사회적 평가에 직면한다. 내향적인 사람이 소수라면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한다', '독특하다', '친구가 없다', '심리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등과 같은 평가를 많이 받는다. 이런 부정적 꼬리표는 내향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압박을 느끼게 하고 자기계발을 이룰 많은 기회를 놓치게 한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내향적인 사람이 사는 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저자는 성격을 바꾸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실험에 따르면 내향적인 사람은 특정한 목적이나 필요에 따라 외향적인 사람의 일부 기술을 학습을 통해 완전히 습득해 환경에 잘 융화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빌 게이츠가 아무리 사교 기술을 갈고닦는다고 해도 빌 클린턴이 될 수는 없고, 빌 클린턴이 혼자 컴퓨터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빌 게이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격을 바꿀 수도 없고 바꿀 필요도 없다.(p.78) 두번째는 성격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가진 특징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분야의 직업에 유리하다. 세번째는 자신의 성격을 온전히 느끼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라고 한다. 더이상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다. 나를 괴롭히고 공격하는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는 등 자기도 모르게 닮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의 특징을 따라 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미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이다. (p.141)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공격자와 동일시'라고 한다. '공격자와 동일시'하는 방어기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뚜렷한 경계 의식을 구축하지 못하면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어진다. 심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현실에서 반복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한다. 경계의식을 뚜렷이 하기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알려준다. '아니요'라고 말하라. 외부에 투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라. 중요한 것은 '틀려도 괜찮다'는 신념이다.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심리적 욕구는 자기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삶과 자아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해여 내면의 활력과 창의력도 발현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부정적인 감정이 터져나오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를수록 반항심은 더욱 커진다. 직장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다. 좋은 상사, 좋은 동료가 되기 위해 'no'라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곪을만큼 곪은 후에야 터져나오기 마련인데, 그때는 이미 관계 회복은 물론 업무에 있어서도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후이다. 


나의 감정을 잘 알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나답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만한 다양한 사례가 소개된 책이다. 사례별로 나뉘어 있어 어딜 펼쳐서 읽어도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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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 죽을 만큼, 죽일 만큼 서로를 사랑했던 엄마와 딸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진환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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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모성'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읽으면 나는 괜히 삐뚤어져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 '위대한 어머니'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나'가 아닌 '어머니'로 틀에 묶어버린 느낌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어 봐야 마치 뭔가가 완성된 것처럼. 누군가는 그러한 자신이 자랑스럽고 멋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죽을 만큼 죽일 만큼 서로를 사랑했던 엄마와 딸"


1973년생인 저자 미나토 가나에는 나와 동년배이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가 쓴 작품 속 '모성'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10월 20일 오전 6시경, Y현 Y시의 공영주택 화단에 여학생(17세)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되었다. 신고자는 여학생의 어머니였다. 신고자의 어머니는 "모든 걸 바쳐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이렇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여학생이 투신을 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신고를 했던 어머니는 신부님의 조언을 받아 "자기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생각나는 말을 그대로" 적어나간다. 애지중지 키운 딸, 모든 걸 바쳐 키운 딸이 투신을 했는데 신부님은 왜 그랬냐고 묻는다. 왜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냐고? 아마도 누구든지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 어미라면 그렇게 자식을 키우는 게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당연한 걸 왜냐고 묻는다는 건 나쁜 짓을 왜했냐고 묻는 추궁이 아니라 확인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학생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딸과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나는 회사 동료의 권유로 들어간 시민문화센터의 회화교실에서 알게 된 타도코로 사토시와 결혼을 했다. 타도코로의 그림은 늘 어두침침했고 우울하고 답답했지만, 나의 그림은 사랑받으면서 컸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의 어머니는 진심을 담아서 칭찬을 해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가 좋아할 대답을 한다. 오로지 어머니로부터 칭찬 받고 어머니가 기뻐하길 바라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날 어머니는 '나'가 아닌 '타도코로의 그림'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분신이므로 어머니와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간걸까? 어머니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타도코로와 결혼을 하는 나. 그런 나에게 히토미는 타도코로와의 결혼에 대해 충고를 한다.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그런 충고가 얼마나 귀에 들어올 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당사자보다 제3자가 더 정확하게 꿰뚫어본다. 물론 히토미는 또다른 관계를 형성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오로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한다. 음악이나 시, 영화까지도 취향이 맞았던 어머니와 타도코로, 어머니와 같은 전업주부가 되고 싶었던 나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둔다. 임신을 했을 때는 두렵고 무서웠지만 어머니는 이런 말을 전한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엄마는 이 세상에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싶어. 널 낳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는 더 기쁘거든 내 삶이 더 먼 미래로 이어져 나간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엄마가 어렸을 때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뭘까 계속 생각하곤 했어. 이대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죽더라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지.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잖니? 나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든 없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 그런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런데 널 낳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난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더라도 내 아이는 무언가를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 아이가 못 하더라도 이 아이가 낳은 자식이 무언가를 남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바로 나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잖니.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지. 그럼으로써 역사 속에 점이 아닌 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거야. 이 정도로 멋지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P.28


여기까지 읽었을 때, 투신한 여학생의 어머니 '나'의 삶의 방식에 동조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어머니'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어머니'와 같은 삶을 동경하고 '어머니'와 같아지기를 원하는 '나'에게 나는 공감할 수 없었다. 딸에게 하는 모든 행동도 '나와 딸'의 관계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일까? '나'는 왜 '어머니'가 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딸'이어야 했을까? 


딸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소설을 계속 읽어본다. 딸인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다. 어른들의 반응을 신경 쓰는 어린이, 용서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린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기뻐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P.47)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아이.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것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원하는 말만 했다. 외할머니에게서 받은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고백과 딸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는다. 


"이러다가 늦겠어, 빨리."

"나 말고!"

"왜? 어째서?"

"네가 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니."

"엄마는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날 낳고 길러준 사람이잖아."

"바보처럼 굴지마. 넌 이제 애가 아니야. 엄마란다."

"싫어, 난 엄마 딸이야."

"그만해. 그만하렴. 왜 엄마 말을 못 알아 듣니?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부터 구해야지."

"싫어요. 싫어. 난 엄마를 구하고 싶어. 자식은 또 낳으면 되잖아."

"부탁이니까 엄마 말 들어. 난 내가 살아남는 것보다 내 생명이 미래로 이어지는 게 더 기쁘단다. 그러니까.."

"싫어!"

"널 낳아서 엄마는 정말로 행복했어. 정말 고맙다. 네 사랑을 이번엔 이 아이에게 주렴 애지중지 아끼면서, 모든 걸 바쳐서 키워주렴."(P.79~81)


그것이었다. 이 날의 일로 '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과 작별하였고, 그날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엄마가 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내리사랑이라고들 하는데, '나'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만이 있다. 그 사랑을 딸에게로 옮겨놓지 못한 채 여전히 '딸'인채로만 살아가는 '나'. 


"나한테는 어머니가 없는데, 이 아이에겐 있다. 엄마! 하고 부르면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있다. 어째서 이 아이에겐 있고 나한테는 없는 걸까?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 아이는 어머니를 잃은 내 마음 따윈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나한테 어리광을 부리는걸까?" (P.105)


어머니는 자식을 지키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딸아이가 나를 위해 시어머니와 맞서는 것도 달갑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더 불편하다. 딸은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 딸인'나'는 다른 사람을 만지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만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외할머니를 잃은 그날 이후 엄마는 나를 거의 만져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를 대신해서 내가 엄마 편이 되어주자. 어머니를 지켜주자'(P.135)고 생각했던 '딸'과 그런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엄마. 


과연 모성이란 것은, 엄마가 되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일까? 요즘 미디어나 매체를 통해 '비정한 부모'에 관한 뉴스를 자주 접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부모가 저럴 수 있냐고, 특히 어머니를 향한 비난은 더욱 심하다.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버려지거나 하는 아이들 뒤에는 언제나 그 아이들을 지키지 않고 학대한 '어머니'만 있다. 자식을 키우고 사랑하고 길러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부모'이다. 이 이야기 속에도 타도코로는 무기력하다. 오히려 가족들에게서 도망을 치는 남자다. 이 여학생의 투신에 아빠인 타도코로의 책임은 없는가. 세상에는 모성만 존재하고 '부성'이란 건 아예 없는 것인가. 


"사쿠라를 잃으면서 제 자식은 세상에 오직 한 명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줄 그 아이가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P.176)


둘째를 유산한 후 '나'가 하는 말이다.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줄'대상일 뿐이다. 나는 이런 문장들이 가슴 아프다. 



'모든 걸 바쳐서'라는 말은 어째서 '어머니의 손맛'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을까? 비유를 해보자면, 매일 고기감자조림과 고등어 된장조림 같은 요리를 만드는 어머니가 있다고 해보죠. 이 사람에게 평소에 아이에게 어떤 음식을 해주냐고 묻는다면,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요리를 해준다고 대답할까요? 아마도 그냥 평범한 음식을 해준다고 대답할 것 같은데요. 반면에 인스턴트 식품이나, 심한 경우 하루 세 끼도 제대로 먹이지 않는 부모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어머니의 손맛이라느니, 아이를 위해 균형 잡힌 건강한 식단을 만들어준다고 대답하지 않겠어요?"

"결국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수록 거창한 말로 둘러댄다는 거로군."(P.201)


이 이야기에는 제3자로서 신문기사를 읽은 사람들의 반응도 보여준다. 투신한 여학생의 어머니가 '모든 걸 바쳐서 애지중지 키웠다'는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 지나치게 독자에게 친절한 문장이긴 하지만, 그렇구나. 그 문장이 그래서 이상하게 느껴졌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를 칭찬해주고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나, 엄마가 죽길 바란 적도 없고 싫었던 적도 없다. '나'는 엄마가 싫어하는 내가 싫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엄마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다. 


과연 모성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갈구하고 바라는 것, 그것을 내 자식에게도 무조건적인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것, 그것을 모성이라고 하면 될까?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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