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미술 수업 - 한 젊은 아트컨설턴트가 체험한 런던 미술현장
최선희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재미도 있고, 정보도 많았던 책을 읽었다.

이게 내 첫 소감이다. 최근에 유명 화가의 전시회 소식이 들리기도 했고, 별로 유쾌하지 못했던 사회문제에 거론된 작품때문에 새로이 알게 된 사실도 있었기때문인지, 미술관련 책들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 나의 관심이라는 것도 시류를 타고 왔다갔다하는지라 최근의 관심과 맞아떨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트북스에서 출간되는 [이모션]이라는 잡지를 통해 미술과 돈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금 지식을 넓혔던 터라 그런지, 크리스티에서 배운 그녀의 미술수업은 내게도 재미를 주었다.

얼마전에 읽었던 [베트남 그림여행]이, 다른 이들에게는 좋은 평을 받았지만, 나는 실망을 했던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정말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내게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그녀의 미술수업을 통해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뽐내려한 글이 아니라 사람을 매개로 쓰여진 글들이라 인간냄새가 폴폴 나면서도 정보와 지식도 소홀히 하지 않은 책이라는 점에 있다.

또, 그렇게 특별나 보이지 않는 저자가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생활할 기회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외국인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배려도 흔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현명하게 잘 이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자주 만나는 나는, 그녀들도 최선희씨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국에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그래도 항공사 근무를 했기에 어느 정도 어학에 자신이 있는 여성이었을 거고 그러니 어학에 대한 부담이 적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도 아니었다. 미국식 영어를 배운 한국인인 그녀가 프랑스에서 살아가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또 영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영국식 영어를 다시 배워야했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그녀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다가온 수많은 기회를 놓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어란 필요에 의해 습득되는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이 말하는 [시각이미지]를 기억하는데 특출났던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살린 공부를 하고, 그 결과 자신의 일을 찾은 것도 귀감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고 일생을 살다 죽는 일도 흔하니까 말이다. 자신의 장점은 자기 스스로 파악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어떤 경험을 통해 표출되고, 또 남에 의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런 자신의 장점을 발견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또 얼마나 행운일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이었다. 미술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오로지 수업내용으로 알려주려고 했다면,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책이 되었을까? 그녀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나는 미술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게다가, 이 책이 미술수업 자체에만 한정된 정보와 지식을 나열하고 있지는 않다. 저자가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점을 미술수업과 연계해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림에 대한 선입견(어렵다는?)을 버릴 수 있었다. 또한 그녀가 생활하고 움직였던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참 좋았다.

크리스티라는 경매회사가 하는 일을 통해 미술품 경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그것도 좋았다. 미술이 돈이 된다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무슨무슨 경매에서 얼마에 그림이 팔렸다더라는 소식도 자주 듣는다. 그렇지만, 미술품 경매라는 것을 돈 많은 부자들의 돈자랑이라고까지 생각했던 내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책이기도 하다. 경매를 통해 미술품을 구입하건, 전시회에서 그림을 구입하건간에 컬렉터의 마음으로 하라는 이야기도 좋았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모은 컬렉션을 경매에 내놓은 이가, 자신의 아이들이 고급차를 사고 집을 사는데 쓰는 돈으로 바꾸는 것보다는 그 작품을 진정으로 원하는 이가 가져가는게 더 좋다고 말한 컬렉터의 이야기는 컬렉터를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누구는 미술품을 투기의 대상으로 구입하고, 누구는 비자금을 숨기는 용도로 사용한단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멀게만 느껴지던 미술품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가깝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런던에서의 미술수업과 관련된 정보를 실어놓고 있어서 이런 공부를 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동기부여가 될만한 책이다.

그뿐 아니라, 그녀가 한국의 작가들을 유럽에 소개하고 그들의 작품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신인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모습도 참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참 좋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삶도, 커리어도,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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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궁금한 우리 예절 53가지 - 젊은 철학자의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이야기
이창일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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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솔직히 말해서, “정말 궁금한”이라고 했는데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던” 소재가 [예절]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예절 얘기 운운했다가는 고리타분하다는 얘기 듣기 딱 좋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절]을 소재로 책이 나왔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예절을 “세상을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현명한 삶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사랑에 관한 테크닉이 아니었던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삶의 기술 역시 어떤 구체적인 방법론은 아니다. 그러니까 “삶의 기술로서의 예절은 우리 삶이 더 좋은 상태가 되도록, 행복한 삶이 되도록 해주는 것”(p.11)이다.




크게 관혼상제로 나누어진 이 책은, 왜 하는지도 모른 채 해왔던 것들의 의미를 알려준다.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그저 귀찮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것들, 그리고 현대화 한답시고 마구 변형시켜버린 것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관혼상제 중에서 내가 실생활에서 접하고 그나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혼상제이다. 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아무도 내가 성년이 되었다고 축하해주지 않았고, 성년이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성년의 날이랍시고 학교 정문 앞에서 팔던 장미꽃은 생각이 난다. 그러나, 어른들로부터 받는 제대로 된 축하가 아니었던 것이다. 옛날의 관례와 그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한 다음 지금도 관례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통해 현실로 끌고 온다. 저자는 관례의 형식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방황하는 청소년은 물론이고 무늬만 어른인 채 나이를 먹은 아이들, 어른을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응석받이들, 이들에게 어른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줄 삶의 예식이 필요”(p.56)하다고 말한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제대로 어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갖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른들의 행동만을 답습하게 되니 어른다운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혼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읽었다. 나도 결혼식이란 걸 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그나마 쉽게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서양식인 결혼식이 아니라 전통혼례를 했다. 10분 20분에 한 쌍씩 급하게 해치우는 결혼식이 못마땅하기도 했고, 그렇게 할 거면서 큰돈 들이는 것이 아깝기도 해서였다. 날이 추워서 야외에서 하지는 못하고 실내에서 이루어진 전통혼례였지만, 나름대로는 의미 있는 결혼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우선 결혼, 아니 혼인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관혼상제에는 음양오행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그것을 단순하게 미신이니 하는 식으로 폄하하기보다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조상들의 지혜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듯하다. 혼과 관련된 질문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연애결혼과 중매결혼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걸 보면, 실제로는 연애결혼이든 중매결혼이든 간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옛날식의 중매결혼이라면 얼굴도 모른 채 혼인날에야 알게 될 터인데, 요즘의 중매결혼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소개로 만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해 파악한 다음 혼인이 이루어진다. 또 중매로 만난 후에 1년 정도 연애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가하면 연애결혼이라 하여도 당사자들의 의견만으로 혼인이 성사되지는 않는다. 상견례를 통해 부모와 만나고 부모의 허락을 받아 이루어지는 혼인이기 때문이다. 결혼축의금은 왜 홀수로 내는가에 대한 의견도 읽을 만하다. 그런데 결혼축의금을 홀수로 내느냐 짝수로 내느냐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왜 축의금을 내야하는가, 청첩장에 계좌번호를 적어놓는 것은 괜찮은가 등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궁금하니까.(^^) 면사포가 어떤 의미가 있나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종교적 관점, 남녀차별에 대한 생각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섞어놓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생각할 바가 많은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너울’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페이지의 그림이 뜬금없는 ‘장옷’이라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상과 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상의 경우 예전과 달리 전문업체가 맡아서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보니 상에 대해 잘 몰라도 그런대로 진행이 되기는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따른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나도 몇 년 전 아버지의 상을 치루면서 이것저것 경험해본 터에 이 책이 설명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조금 어렵지 않나(책을 쓴 저자는 쉽게 풀어놓았으나 그 내용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일 듯)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의 경우에는 그런대로 이해가 쉬울 듯하다. 차례를 비롯하여 기제사는 대부분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니까. 이 책에서 지적한 대로 제사에 관해서는 생각해야 할 점이 많다. 종교적인 이유로 싸움이 나는 집을 나도 몇 번 봤으니 말이다. 저자의 글이 때로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가 많이 나기는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전통 풍습과 기독교가 많이 부딪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굳이 저자가 기독교를 비판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관혼상제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많은 생각이 스친다. 명절 때면 연휴라고 좋아하고, 성년식이든 결혼식이든 이벤트가 되어버렸고, 상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다니는 상례가 그러하고, 제사 때문에 싸우기도 하는 걸 보면서 이런 걸 그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말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현대에 어울리는 접점을 찾아 유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저자의 글 모두에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예절 속에 담긴 정신만은 올바르게 계승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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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거울 메타포 1
미하엘 엔데 지음, 에드가 엔데 그림, 이병서 옮김 / 메타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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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거울 속의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거울 속의 거울은 끊임없이 똑같은 상을 보여줌으로써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현실이 아닌가를 구분할 수 없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 이 책의 내용이 바로 거울 속의 거울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맨 앞으로 돌리기를 수차례, 결국 맨 앞이라는 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깨달은 다음에야, 편안하게 읽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끝까지 읽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면 포기했을 지도 모를 책이었다. 그러나, 순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나자, 짧은 단편 읽듯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책 중반을 넘어서자 익숙한 인물들, 익숙한 소품들이 재차 등장하면서 책을 전체적으로 바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이 책은 재미를 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 순간부터 다시 그 인물과 소품을 찾아 앞으로 넘기지는 않았다. 그건 나를 또다시 지치게 할 게 뻔하니까. 그냥, 끝까지 읽어나가는 사이에 미하엘 엔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기를 바랐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오,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몇 번을 맨 앞으로 되돌리다 역자후기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솔직히 소설보다 역자 후기가 더 어려웠다. 그것은, A부터 Z까지 퍼즐 맞추기를 하듯 읽기에는, 번역텍스트로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작품의 원문에 나오는 수많은 단어 가운데 'Y'로 시작하는 유일한 단어 'Ypsilon'을 내가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원문에서 주는 묘미는 번역작을 읽는 사람이 감수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문학작품을 읽는데 있어서 그 감상 혹은 의미를 찾는 일은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바가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의도를 알아차림으로써 그 작품이 빛을 보겠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감동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한 단어나 문장을 통해 의미를 찾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독자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18. 남편과 아내가 전시회에 가려고 한다 : 전시회에서 남편과 아내가 본 작품들을 한번 보자. [양, 총채, 사막의 모래, 불타는 횃불, 그물, 상자 모양 추시계, 비둘기 집, 시한폭탄, 문자, 물고기 눈, 양철통, 목발, 달걀, 이파리, 망원경, 서커스 채찍] 전시회의 작품들은 이 책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소재들이다. 책 속 주인공들에게는 현실인 세계가 또 다른 책속 주인공들에게는 의미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전시회의 작품에 불과하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나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과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과제인 셈이었다. (p.19)

“모든 걸 다 놓아야 해!”, “억지로 하는 상황이 되기 전에, 너 스스로 자진해서 해. 그렇지 않으면 때를 놓치게 돼.”, “그 불안도 놓아야 해!”, “너 자신도 놓아야 해!”(p.116) “별들은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저마다 자기 궤도에서 서로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 별들은 서로 피붙이기 때문이야. 우리 역시 그래야만 하는 거야. 나의 일부는 네 속에 있어. 우리는 서로서로 받혀주는 거야. 그것 말고 아무것도 우리를 받혀주지 않아. 우리는 원을 그리는 별이야. 그러니 모든 것을 버려라! 그리고 자유롭게 되라!” “너는 자유롭게 되거나, 아니면 너는 존재하지 않게 될거야.” (p.121-122)

“자신이야말로 이 세계가 존재하도록 자기 주변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p.128)

24. 검은 하늘 아래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가 있다 : 무대 뒤의 피가드가 관객 중의 한 아이의 상상에 의해 엔데로 되살아나고, 엔데는 아이에게 미하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아버지는 아이의 상상에 의해 태어나고, 아버지는 아이를 구체화시켜준다. 내가 상상하고 창조해내는 것들이 나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의미있게 만든다.

26. 교실에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 24에 이어 역시 상상이 큰 역할을 하는 장이다. 교실에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하던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칠판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은 자신의 배역을 창조해내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떠난다.

27. 우리는 배우들의 복도에서 몇 백 명이나 되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 그들은 모두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의상을 준비한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이 삶은 우리가 창조한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9. 서커스가 불타고 있다 : 꿈에서 깨어나라. 여기는 현실이 아닌 꿈일 뿐이다. “모든 것은 꿈. 모두 꿈이란 걸 난 알아. 내가 존재한다고 꿈꾸기 시작한 때부터 난 쭉 알고 있었어.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야.” (p.362)

거울 속의 거울은 이렇게 현실이 아닌 세계를 마구 만들어낸다. 결국은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아닌지조차 구분되지 못하게 말이다. 결국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 육체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나 역시 아무도안, 아무도 아닌 사람일 뿐이다. 존재에 대해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는 책, 그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생각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묘한 매력으로 끌어당기는 책. 결코 한 번 읽어서는 그 맛을 모를 것이다. 입안에서 씹고 또 씹어서 넘긴 음식처럼 그렇게 책을 읽고 또 읽게 만든다.

덧붙임 : 번역자의 유머감각일까? “그건 그 때그 때 달라요.”(p.405) 띄어쓰기에 유의해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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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정당한가 고정관념 Q 13
오드 시뇰 지음, 정재곤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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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팔레스타인 : 1920년대 초반 영국인들은 이 지역에서 군사적․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위임통치 하의 팔레스타인은 1922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의 지배권 아래에 놓여있던 지역들을 일컫는다. 바로 오늘날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 이스라엘로 분할된 팔레스타인에 해당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지역 모두가 ’역사적 팔레스타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팔레스타인 영토‘는 이스라엘이 1967년에 점령한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동예루살렘 포함)에 국한된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바로 이 지역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려한다. (p.7)




19세기의 팔레스타인에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주를 이루었다(p.10)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 국가주의에 직면하게 된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에는 부동산 문제로 인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p.13)하는데 1920년대 말부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영토분쟁이라는 시각에서 이야기한다. 즉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영토 점거를 유대민족의 역사적․종교적 권리로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영토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 역시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가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 점령자를 적으로 여겨 투쟁할 것을 촉구(p.23)하는 등 종교보다는 영토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팔레스타인에 자신들만의 영토를 가지려고 한 것일까? 고정관념 Q시리즈의 또 다른 책 『유대인』(이하, 『유대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다른 이민자들의 경우(경제적 이유)와는 달리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는 박해를 피해 여러 세기에 걸쳐서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나라(『유대인』p.31)를 떠나 흩어진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런 비극’이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영토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유대인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줄 수 있는 유대국가가 팔레스타인에 수립되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유대인 가운데 상당수는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1950년 이스라엘이 공표한 ‘모든 유대인’의 국가라는 조항을 담은 귀국법에 의해 모든 유대인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이스라엘로의 귀환을 요구할 수 있다(『유대인』p.35)는 것에 따른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아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국가를 세우고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불러 모으려는 시도는 일견 당연해 보이면서도, 그들을 박해하고 집단살인을 자행한 당사자들이 아닌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씁쓸하다.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의 합의 없이, 미국과 소련의 지지를 얻어 수립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행보는 정당성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그런 정당성을 얻기 위해 역사적․종교적 이유를 들고 있지만, 결국은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와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또 다른 난민을 만든 것은 아닌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엇이 있을까? 팔레스타인인들은 항상 테러를 통해 투쟁해왔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투쟁은 테러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다른 투쟁방식보다 자살테러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거나 각인시키는 강도가 크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상황이 악화되면 될수록 더 강한 투쟁방식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무력투쟁은 PLO에 소속되지 않은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슬람 또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오늘날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에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며 이스라엘에서도 이슬람교도가 인구의 10퍼센트를 조금 넘는다(p.71)고 한다. 1980년대 들어 이슬람 정치세력은 팔레스타인 건국투쟁에 새로운 지주로 부상(p.75)하는데 이슬람 지하드와 하마스가 대표적이다. 이슬람교도들이 보기에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이질적 종교(유대교)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들 단체는 사회를 재차 이슬람화하는 것이야말로 팔레스타인의 “진정성”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p.75)




같은 시리즈의 책 『이슬람』(이하 『이슬람』)에서는 9월 11일의 테러와 10월 7일에 알지지라 방송을 탄 빈 라덴이 성명서 발표를 통해 이슬람 민족이 80년 정부터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칼리프 제도의 폐지 이래로) 모욕을 당해왔다고 강조했다(『이슬람』, p.61)고 한다. 빈 라덴은 “내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기 전에 미국인들은 결코 안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는데 빈 라덴이 그때까지 팔레스타인 문제를 언급했던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명백히 기회주의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그의 오른팔인 쉴레이만 아무 가이트는 ‘유대인들과 미국인들에 대항하는 지하드’를 펼쳤다. 빈 라덴의 행동과 성명서들은 테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발언이었지만 이슬람 세계 여론의 일부, 특히 반세기 전부터 원한을 쌓아왔던 아랍사람들에게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이슬람』p.62)고 한다. 어찌되었건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맞서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민주주의를 수하하기보다는 석유를 둘러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에 더 급급해하는 것을 보면서, 아랍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간에 미국에 대하여 다시금 원한을 불태우게 (『이슬람』p.147) 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과 미국은 공동의 적이 된 것 같다.




다시 팔레스타인 문제로 돌아오면, 미국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을 궁지에 몰아넣는 수단으로 부패를 내세우곤 (p.113) 하지만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며, 국가구조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p.115)고 한다.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만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개입되어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저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고정관념 중 하나는 이스라엘과 전혀 교류를 하지 않고 살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어떤 고정관념을 깨주는 책이라기보다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던 것 같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토 확장 또는 영토 확보라는 측면에서 팔레스타인문제를 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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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인가 고정관념 Q 8
빅토르 퀘페르맹크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유대인 : ‘유다(야곱의 아들)의 부족’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초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후예를 가리켰다. -중략- 기독교도에게는 금지되었던 돈과 간련된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단어는 수전노나 돈벌이에 악착스러운 사람과 동의어가 되었다. -중략- 오늘날 이 말은 유대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과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을 동시에 가리킨다. (p.6-7)




누가 유대인인가라는 대답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유다 왕국에 살았던 사람, 유대교를 믿는 사람, 유대인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 유대민족에 속하는 사람”(p.13) 그러나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지 그 중 하나면 충분한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가 유대인인가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 책은, 유대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거기에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생각(유대인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인가와는 별개로)이 더해져서 수많은 고정관념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고정관념은, 유대인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말로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따라서, 고정관념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의 저자는, 경전의 민족이라는 것은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라고, 유대인이 다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야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지만, 모든 유대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유대인의 의식이 비교(秘敎)적이라는 것은 할례가 대표적인데 그것은 유대인만의 풍습이 아니라 여러 문명에서 행해진다고, 유대인 어머니의 독점욕이 강하다는 것은 어머니를 통해 이어지는 유대교의 특성 때문에 크게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유대인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종사할 수 없었던 금전과 관련된 직업을 유대인들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역사적으로 유명한 공산주의 지도자 5명 중 3명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대인=공산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자면,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일부 유대인의 행동을 전체 유대인으로 확대해석해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라고 이야기하는듯하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왜, 다른 민족과는 달리 유대인에게만 이런 편견이 두드러지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흥미로운 것은, 대중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성공한 경우 그들이 어느 민족인지를 캐지 않지만, 유대인일 경우에는 반드시 민족적 뿌리를 밝히려고 든다는 것이다.”(p.133)라고 말하는데, 왜 그런가하는 대답이 없다. 제시된 고정관념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들인데 유독 유대인에게 한정지어 이야기하기 때문에 생겨난 고정관념들이다. 저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그렇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그것이 편견임을, 고정관념임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왜 사람들이 유독 유대인에게만 그런 생각을 가지는지에 대한 해답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해답이 없는 주변부 이야기만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바로 누가 유대인인가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나에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은 던져도 “당신은 어느 민족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라는 질문만이 유효할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가 유대인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고정관념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세계는 점점 더 민족이라는 울타리가 필요 없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민족을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그건 종교의 자유이므로 그 역시 구분하고 나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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