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e 세트 - 전2권 - 가슴으로 읽는 우리시대의 智識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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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텔레비전에서 5분짜리 짧은 방송을 보며, 참 잘 만들었구나..생각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들쑥날쑥하여 시간마다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이 챙겨봤다. 짧은 만큼 함축적으로 표현했으면서도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와닿았었다. 그러다가, 책으로 출간되고, 많은 이들의 입소문까지 들려왔지만, 정작, 나는 아이책에 밀려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가, 두권세트가 나왔다는 걸 보고 구입하게 되었다.

사실, 내용에 대해서는 방송을 통해, 각 권에 대한 리뷰들을 통해 알고 있지만, 책으로 만나고 싶었다. 내가 놓친 부분도 알고 싶었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내용이 어느 한 분야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 있어서, 그 다양성도 좋다. 함께 곁들여져 있는 사진도 내용과 잘 어울린다.

학생들과 소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기에도 좋은 것 같다. 남들보다 늦게 보았지만, 두권을 함께 사니 지식노트도 따라온다. 그냥 무지의 노트지만, 남편이 활용하겠다며 가져갔다.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게 선물용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의 주제를 수업 중 토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전문용어 설명도 쉽게 되어있어서 참고자료로 쓰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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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즈 - 간바라 메구미의 첫 번째 모험 간바라 메구미 (노블마인) 1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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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온다리쿠의 책을 한동안 줄줄이 읽었더니, 재미가 없어지는 듯했다. 역시, 한 작가의 책이 한꺼번에 우루루 몰려나오는 것은 재미가 없다. 그러다가 뜸하더니, 신작(?)이 나왔다. 대뜸 구입했다. 망설일것도 없이.

온다 리쿠의 책을 계속해서 읽을 때는 그 내용이 그 내용같아 조금 식상해질려고 했는데, 몇달 안 읽었더니, 그 식상함은 사라지고 그리워지더란 말이다. (^^) 그래서, 이 책 [메이즈]를 읽었다. 첫번째 느낌 ! 역시 온다 리쿠다! 재미있다!

학원물이 아니란 점에서 일단 좋아~!! 그리고, 새로운 인물, 간바라 메구미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간바라 메구미]의 첫번째 모험이라고는 하지만, 메구미의 역할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쓰루]와 [세림]에게 초점을 맞춰보았다. 메구미는, 독특한 캐릭터이므로 여러모로 활용가능한 캐릭터인 듯 싶다. 뒤이어 나온 [클레오파트라의 꿈]에서는 메구미의 활약이 더 두드러진다. [메이즈]에서는 그런 인물이 있으니 관심가져달라는 말 같다.

어찌보면, 이 책은 미쓰루의 모험 같다. 메구미의 권유로 일을 하게 된 미쓰루, 메구미가 하는 일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쓰루에게 주어진 일주일 동안 탐정역할을 충실히 하면 된다. 보수도 끝내준다. 미쓰루가, 탐정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유적 아닌 유적 '두부'의 정체가 하나둘 드러난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면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곳이기도 한 [두부]. 그곳에서 사람들이 사라진다. 매혹적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곳, 그러나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전설은 형성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항상 음모론이 도사리기 마련이다. 전설로 무장된 음모론. 미쓰루가 파헤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해 만든 곳, 그곳의 목적으로 알아내는 것이다.

미쓰루가 세림과 함께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그 대화를 통해 이야기는 실마리가 잡힌다. 그런데, 마지막 마무리는 좀 허전한 감이 있다. 자신(혹은 회사, 혹은 회사가 있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사라지게(죽게) 만들고, 공포를 조성해놓고,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그 전설을 제대로 파헤친 미쓰루도, 그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서 나가는 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함께 지낸 세림에 대해서도.

그 점이 조금 아쉽지만, 오랜만에 만난 온다 리쿠의 작품이어서일까? 그의 이야기 솜씨에는 여전히 반할 만하다. 전체적인 이야기 내용은, [클레오파트라의 꿈]보다 더 환상적이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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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어, 목을 비트는 아이 메타포 3
제리 스피넬리 지음, 최지현 옮김 / 메타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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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어, 라는 단어를 이 책을 통해서 접했다. 하긴 내가 뭔가의 목을 비틀 일도 없었을 뿐더러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생각을 떠올려보면, 어린 시절, 닭을 잡던 풍경이 떠오르긴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파머의 두려움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링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링어가 될 날이 <8 다음에 9가 오고, 9다음에 10이 오는 것처럼>(p.13) 다가오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파머에게는 링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생일을 맞아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일명 <생일빵>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의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과 친구가 되느냐 못되느냐의 의미였고, 그렇게 자신들만의 영역 속에 들어가기 위해 도로시와의 관계도 재정립해야하는 의미였다.

파머가 겪어야하는 두려움은, 그것이 되고 싶지 않다는 데서 출발한다. 5천 마리나 되는 비둘기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목을 비틀어 죽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당연한 전통처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은 축제이고 영광이었다. 그러나, 왜 그래야만 하지? 나는 하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남들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다수가 하는 일에 침묵하거나 동참하지 않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기 힘들어진다.

파머는, 어린 시절 비둘기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당하면 목이 비틀려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가는 비둘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죄책감은커녕 즐거움을 느꼈다. 어쩌면 총을 쏘아 죽이는 일보다 더 잔인해 보이는, 비둘기의 목을 비틀어 죽이는 일을 아이들에게 맡김으로써 어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링어, 가 되어 비둘기의 목을 비트는 행위를 일종의 통과의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죄책감을 씻어버리고자 한 건 아닐까? 어른들은 사격의 즐거움을 누리고, 10살이 된 아이들은 마을의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소속감(아이들에게 영광의 역할)을 갖게 만드는 것 말이다. 역시, 기대대로 이 책에서는 파머가 그러한 통과의례를 거부한다. 파머는 링어가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고, 어른이 된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모방한다. 요즘 아이들은 문제가 많아, 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아야한다. 파머의 변화를 옆에서 말없이 응원해주었던 엄마, 아빠를 보자. 파머의 부모는 파머가 링어가 되는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룰이기 때문이다. 파머의 아빠는, 명사수 왕이라는 황금비둘기상을 가지고 있고 거실에 장식이 되어 있다. 그것을 보는 아들은 아빠를 대단한 영웅처럼 생각하고 모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또, 링어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링어가 되거나, 총을 만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당연히 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행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파머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 날지 못하는 황금비둘기보다 매일 아침 창을 두드리는 자신의 비둘기, 니퍼를 더 사랑했다. 그것이 파머가 링어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랑 말이다.

게다가 파머에게는 도로시가 있다. 도로시는, 동네 아이들이 아무리 놀리고 괴롭혀도 무시한다. 무시하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헨리나 파머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할까봐 그것이 두렵고 겁이 난다. 책에는 표현이 되지 않았지만, 빈즈나 머토 같은 아이들은 아이들 그룹 중에서도 소수일 것이다. 아이들 세계에서의 파워게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애들이 하는 짓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애들 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나는 괴롭힘을 당할거야 라는 이유로 같은 편이 되는 아이들. 우리는 현실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많이 접한다. 파머는, 자신이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것(니퍼)을 지키기 위해 남(도로시)을 더 괴롭히거나 오히려 앞장서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는 파머와 같은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파머에게는 그래도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고, 특히 지켜봐주는 엄마의 역할은 아주 컸다. 또도로시는 늘 친구가 되어주었고 파머의 비밀을 함께 공유했었다. 이렇게 옆에서 지켜봐주는 사람들은 파머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비둘기의 목을 비트는 행위와 같이 잔인함이 느껴지지는 않더라도 지금의 우리도 아이들에게 거쳐 가기 힘든 통과의례를 제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과연 당연히 겪어야 할 통과의례일까. 우리가 무엇인가의 목을 비틀어야한다면, 그것은 비둘기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가치한 일들에 대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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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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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말은 종교인들은 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종교가 없다. 내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는 어떤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라거나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종교 역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종교가 없어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생각이 저자의 주장 속에 들어있다. 종교란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냈다는 것. 그러므로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하며 그 신이 한 일과 계시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종교가 없다고 해서,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적대시한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종교인들도 내가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종교를 강요한 적도 없다. 물론 내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종교를 강요당한 적은 있지만. 어쨌든,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 아니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 책의 저자와 모든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미리 말해두자.

일단, 이 책은 내용적으로는 소재와 주제, 외관적으로는 두께 때문에 상당히 읽기 힘든 책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책을 읽기 시작하자 상당한 속도감으로 읽히는 책이었다. 저자의 글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각 소제목을 살펴보면, 종교인들이라면 핏대를 세울 만한 제목들이 보인다. 물론 나에게는 흥미로운 제목이었지만 말이다. 종교가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거나, 코란의 내용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화를 빌려온 것이라든가, 값싼 기적, 종교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가, 종교는 아동 학대인가 등등.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면, 저자는 종교를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신성모독에 해당될까?

"종교는 언제나 신자가 아닌 사람, 이단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의 삶에 끼어들려고 한다. 황홀하기 짝이 없는 내세를 이야기하면서도 이승에서 권력을 잡고 싶어 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종교는 결국 속속들이 인간이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종교는 자신의 다양한 가르침을 스스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p.33-34)"

“첫째, 종교와 교회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 사실이 너무나 뻔히 드러나 있어서 무시할 수가 없다. 둘째, 윤리와 도덕은 신앙과 그다지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신앙에서 유래할 수 없다. 셋째, 종교는 자신의 행위와 믿음 덕분에 신에게서 특별한 면죄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무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도 하다.” (p.84)

"종교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종교가 대개 남성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증명된다.“(p.87)

저자와 나의 일치하는 생각은 아래와 같은 문장이다. “믿음이 개인의 선택이 된 지금 신자들의 행동은 그들 자신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강제적인 방식으로 종교를 주입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도 신경 쓸 필요 없다.”(p.146) 사실, 종교가 있든 없든 간에, 자기네들의 종교를 강요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그들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협박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종교 테두리 안으로 몰아넣고 싶은 것일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때는 그런 협박을 받아 무서움을 느꼈을 때보다는, 그들의 행동이 귀감이 되어 그들의 종교를 새롭게 보게 될 때이다. 그다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저자는 이런 경우에도 그들의 종교 때문에 그런 선행이나 귀감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본성에서 우러나온 행동이고 우연히 그 행동을 한 사람들의 종교가 그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즉 종교보다 인간의 본성이 먼저라는 것이다.

불신자, 이단자, 종교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자행된 만행은 저자가 예를 들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많다. 대량학살과 수많은 전쟁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자행되었고, 표면적으로는 종교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들도,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그 일에 침묵함으로써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들도 많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이고 만들어진 신이니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종교는 아주 다양하다. 가톨릭과 개신교, 유대교와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도, 모르몬교, 통일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여호와의 증인, 부두교, 등등을 비롯하여 인간을 신격화하여 비롯된 문제들(예를 들어 북한, 일본 등)까지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저자의 자료들은 저자의 주장을 증명하는데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 또한, 그 많은 일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종교인인 내가 읽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었으나, 혹여 종교인이 읽는다하여도 배타적으로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거나, 침묵한 일들에 대해 반성을 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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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엄마 메타포 2
클라라 비달 지음, 이효숙 옮김 / 메타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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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나쁜 엄마가 아니라 바로 그 엄마의 딸인 멜리다. 철저하게 멜리의 시각으로만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멜리가 되었다. 멜리는 엄마를 두 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분홍빛의 상냥한 엄마, 또 하나는 검은 빛의 악독한 엄마이다. 어느 쪽이 진짜 엄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분홍빛의 엄마가 진짜 엄마였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으며, 검은 엄마를 동정하고 위로하면서 그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소녀가 멜리다.

엄마는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으며, 그 병이 멜리에게 두 명의 엄마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물론 멜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니 오래된 병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멜리의 엄마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아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 역시 그런 이중적인 면이 많았음을 인정해야겠다. 나의 컨디션에 따라 똑같은 행동에 대해서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적이 분명 있었음을. 그리고 그러한 나의 태도는 아이에게 혼란을 느끼게 해주었을 거라는 것을. 멜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두 가지 행동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이 혼자 놀고 있도록 옆에 앉혀놓았다. 사실, 매주 토요일은 아이 아빠가 나를 위해 시간을 주기로 한 날이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토요일로 미뤄놓은 일을 해야만 하는 나는, 엄마의 일을 방해하고 같이 놀자고 떼를 쓰는 아이를 옆에 둔 채, 혹은 등에 업고 엉거주춤하게 앉은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날은 괜찮은데 토요일만 되면 화를 내는 나는 나쁜 엄마일까? 아닐까?

멜리의 엄마는, 남들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고 좋은 엄마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완벽한 엄마를 연기한다. 또한 엄마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검은 엄마의 모습을 드러내며 아이를 경멸하고 모욕을 준다. 아니, 멜리는 모욕을 준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이중적인 생활은 물론 엄마의 우울증이나 자살충동 등을 통해 병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 엄마를 대하는 아빠나 할머니,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멜리가 어렸을 때 엄마의 이중적인 행동(예를 들면 토요일의 나의 행동과 같은)을 두 명의 엄마가 있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망상이 커진 것은 아닐까? 엄마가 좋아하는 행동만을 해야 하고, 검은 엄마와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은 멜리이다. 3이라는 숫자(아빠, 엄마, 멜리가 포함된 가족의 수 3)에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 것도 멜리의 망상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엄마는 아이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이다. 맞벌이부부가 많은 현실에서는 엄마나 아빠나 아이에 대한 친밀감이 그리 차이가 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책 속의 멜리는 엄마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엄마의 존재로 인해 늘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엄마의 병은 점점 더 깊어가고(이 부분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엄마의 병이 더 깊어졌다면 엄마가 취업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멜리의 정신적 측면이 더 악화된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빠는 점점 더 집으로부터 멀어진다. 멜리는 엄마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늘 숨긴다. 엄마가 아닌 주변 사람은 없다. (아빠까지도 늘 부재중인 이미지이다) 결국은, 멜리에게는 관심을 보여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도 멜리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멜리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지 않았고, 멜리의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도 엄마 편을 들기만 했지 멜리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멜리는 철저하게 무관심 속에서 생활했다.

나 역시 딸을 키우는 엄마이다. 내가 자라면서 우리 엄마의 행동이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았듯이 나의 딸도 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것이다. 지금 내가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네가 있어서 엄마가 행복하다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이기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때로는 아이를 향해 나도 모르게 검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이 자꾸 쌓이다보면, 멜리처럼 내 아이도 그런 감정 상태를 겪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어린이심리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아이에게 언제나 일관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접한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나쁜 엄마를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 아이를 이용하지는 말아야지. 내가 다른 이들로부터 좋은 엄마라 불리는 것보다 내 아이로부터 좋은 엄마라 불리고 싶다는 것. 이 책 속의 [나쁜 엄마]는 사회적으로 볼 때는 나쁜 엄마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그녀를 대해는 사회의 태도(엄마의 친구들, 그녀의 취업)를 보면 안다. 그렇지만 멜리에게는 나쁜 엄마였다. 멜리가 자기 자신의 문제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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