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둘리지 않는 말투, 거리감 두는 말씨 - 나를 휘두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책
Joe 지음, 이선영 옮김 / 리텍콘텐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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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협찬을 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나를 휘두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책'

'점점 불행해지는 관계를 정리하는

인간관계 기술 43가지'

'가스라이팅에 현혹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

이 책은 위의 '부제'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아주 일상적이거나, 평소 그렇게 억울한 감정이 없거나, 만날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 따위 없거나, 부부 또는 연인 간에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라면 읽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 관한 책이라 생각을 했는데, 읽다보니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조언들이다.

그래서 저자에 대해 찾아보았다. 책에서 소개하는 저자의 정보가 너무 적다. 정신적 학대 대책 상담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자가 일본어과이니 저자도 일본인이겠다 싶어 원제를 찾아 검색을 해보았다.

이 책을 읽고 남긴 일본인들의 리뷰를 보니 '모라하라 モラハラ,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말이나 태도로 괴롭히는 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있거나 그럴 거라고 짐작이 되는 사람들의 글이 많았다. 우리가 흔히 그냥 거절하거나 벗어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알려주는 방법들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 본다.

어떤 인간관계든 '적당한 거리'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고, 가족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가스라이팅'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부부나 연인처럼 남녀관계에서도 일어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이나 동성 친구 사이에서도 일어나며, 직장 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타인에게 휘둘리기 쉬운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항상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너무 활짝 열어놓고 있다'는 점을 든다. (P.13) '상대 앞에서 의도적으로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해' 보라는 조언과 함께 43가지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 내 얘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자의 조언을 실천해봐도 좋겠다. 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관계란 너무 멀어져도 안 되는 것이지만 가까운 게 무조건 좋다는 것도 아니다. 인간 관계란 상대와의 거리감을 측정하면서 자신에게 알맞은 상태로 조정해 나가는 것(P.26~27)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이 좋게 지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기 때문에 거리를 두거나 상대에게 무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특히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본인이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사회에 '죄송하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들이 '하기 쉽지 않은' 방법일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심해야 할 부분은, 그런 일을 당하는 것(휘둘리는 것, 종속관계가 되어버리는 것,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남이 무리한 부탁을 하거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을 떠맡는다거나 하는 것이 모두 '내 탓'이 되어버린다면 자신의 주체성, 자존감을 되찾는 데는 오히려 실패할 수 있다.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주 원초적인 솔루션이다. '더는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하면 좋은가, 거절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방어를 할 수 있는 무게감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등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게 되면 자연히 자신감이 붙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존중을 받는다.

2장 누구도 파고들 수 없는 베이스를 만들어라에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은근한 미소를 지어라, 크고 느긋하게 움직여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라, 침묵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라, 자신의 TMI를 드러내지 마라'는 조언을 한다. 2장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도 사용하면 괜찮은 방법들이다.

3장에서는 거절의 방법을 알려준다. 이 거절의 방법은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상황'이라는 것이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조언들은 내가 몇 번을 이야기하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 사회생활이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지나치게 쉬운 것은 권태로움과 지루함을 유발할 수 있고, 지나치게 어려운 것은 지레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약간 어려운 도전을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래 직원들에게 그런 도전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럴 때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걸 왜 제가 해야 하죠?'하는 표정을 짓거나, '못하겠습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하거나 바쁜 척하거나(실제로 바쁜 게 아닌데 바쁜 척 하는 모습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하면 그 직원은 내가 함께 이끌고 가거나 같이 성장해야 할 직원으로 인식할 수 없다. 이 책이 조언하고 있는 내용은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는데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호불호가 많이 갈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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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소망 - 나만의 주문을 외다! 우리말 시리즈
조현용 지음 / 마리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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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십년 쯤 전, 나의 직업은 '한국어교사'였다. 그러니까,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언어를 가르치는 일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문화, 철학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언어 사용자의 환경이나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알기 어렵고 경우에 맞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람은 한국어를 사용하므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이런 말은 언제 사용할 수 있는지',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다른지', '왜 같은 뜻인데도 이 문장에서는 쓸 수 없는지' 등 구체적으로 답을 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역사와 문화, 환경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굳이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문장을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어휘 하나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말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어와 언어문화를 연구하다보면, 우리말에 담겨 있는 삶의 지혜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중에서도 삶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우리말을 소개한다. 우리말 어휘를 소재로 삼아 미래를 기대하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에세이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어의 어휘를 소개하는 책으로도 볼 수 있다. '별이나 우주'를 이야기하면서 내 삶을 반추하는 글을 쓸 수도 있고, '자연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삶을 읊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바로 우리말,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를 빗대어 삶을 이야기한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책을 읽으며 우리말이 품고 있는 '소망'을 함께 찾아 본다.

'까짓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별거 아니니까 툭툭 털어버리자'라는 느낌이 들며 속이 시원할 때가 있다. 까짓것의 의미를 '까지'와 비교해서 보면 '그 정도까지는 괜찮다'는 느낌이 있다고 한다. 즉,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는 의미다. 까짓것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마음도 덜 괴롭고 우울함도 줄어든다. (P.44 요약)

'고통'은 사전에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괴롭다'와 '아프다'가 합쳐진 말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말을 합쳐서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을 동의중첩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큰 상처보다 자신의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를 더 아프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일도 당사자에게는 가장 힘든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다.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통(痛)이고 정신적으로 아픈 것은 고(苦)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통은 부정적인 생각을 수반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일종의 성장통으로 괴로움의 순간이 성장의 환희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해'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공감을 나타낸다. '어떻게 해?'는 '방법'을 물어보는 의문문인데,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도 사용한다. 감탄문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이때 느껴지는 감정은 당황하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어떻게 해'는 큰 슬픔에 빠진 사람이나 굉장히 좋은 일이 생긴 사람에게도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반대의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속뜻은 비슷하다. 즉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공감을 아주 잘 표현한 말이지만,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도 위로는 전달할 수 있다.

저자는 인생에서 제일 괴로운 단어로 '혼자'를 떠올린다. '혼자'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서 철저히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은 혼자의 고통을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혼자'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외로움'도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고립도거나 버려진 느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대가족에다가 늘 함께 어울려야 하는 사회활동 때문에 '혼자'가 되는 상황이 되면 외로움의 크기가 상당히 컸을거라 생각된다. 요즘은 혼자 뭔가를 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시대이기에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스스로 '혼자'의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닌 '따돌림'의 결과일 때는 부정적인 단어로 작용을 한다. 혼자라는 말은 '하나'라는 말과 통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하나가 자기 존재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낱'이 되고 만단다. 한낱은 하나하나가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외로움과 두려움의 이유가 된다.

어휘를 통해 인생의 쓰고 단 맛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에세이와 어휘 설명서의 어중간한 지점에 있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뜻과 느낌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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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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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학 입학 성공기를 다룬 책은 많은데, 입학 후부터 졸업까지 이르는 성장 과정을 다룬 책은 없는 걸까? 해외 대학에서 유학한 이야기를 다룬 책은 많은데, 국내 대학에서 공부한 이야기는 왜 드문 걸까? 의문을 거듭한 끝에 결심했다. 그러면 애가 한 번 써 보자고. 그리하여 이 책은 40대 직장 여성이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보낸 20대 초반을 돌아보는 성장기가 되었다." (p.11)

오래 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 첫 사회생활이라 할 수 있는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들이 살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무수한 규칙과 실천방법들이다. 곽아람의 '공부의 위로'를 읽으면서 그 책이 떠올랐다. 내용의 유사함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부의 위로'에서 저자는 대학에서 배운 교양 수업을 중심으로 지성(知性)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이야기한다. '대학 때 작성한 대부분의 리포트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저자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리포트들을 피드백을 포함하여 되돌려받았다는 것도, 그 리포트들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는 것도.

나는 '혹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꼭 '대학시절'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만큼 의미있었고 즐거웠던 시잘이었지만 나는 내가 들은 교양 수업이 기억나지 않는다. 돌려받은 리포트도 없다. (그 당시 교수님들이 돌려줬는지도 기억에 없다.) 대학 때 쓰던 전공 교재들은 20년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공부의 위로'를 읽다보면, '친구들이 수강신청해서' 따라 신청한 과목이 대부분이지만 그때 배운 것들이 저자의 인생 어느 구석에서든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 삐딱한 나는 매 학기 21학점을 꽉꽉 채우면서 수업을 들었는데도 기억에 남는 강의가 없는 것이 '내 탓'도 있겠지만 '가르치는 사람'의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수준 차이'를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저자는 교양수업으로 외국어를 배우는데 원서로 읽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번역서의 문장들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원어로 읽으면 다르다. 날것 그대로의 뜻을 곱씹게 되므로 구체적으로 내 것이 되어 손에 잡힌다."(P.50) 이 부분에서 크게 공감하였다. 나야 남들 다 하는 영어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2외국어로 배운 외국어 한 두개가 있다. 나 역시 원서로 읽으면서 번역서와는 다른 맛을 충분히 맛본 터였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학에서 배우는 교양 수업 몇 시간이 엄청난 지식을 쌓게 할 수는 없지만 이때 배운 교양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지혜, 지식의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대학에서 전공과목 교육이 부실해진 것을 사람들이 걱정하지만, 저자는 교양과목 수업이 망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대학이 교양을 습득하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P.63)

"인도미술사는 무용한 수업이었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었고, 새로운 지식을 안겨 주었고,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안다. 그 수업의 쓸모는 그 수업을 듣겠다 결심하던 시절의 내가, 그 수업이 무용하리라 여겼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 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P.117)

저자의 주장에 공감했던 부분이 있는데, 바로 창의성과 암기에 관한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지만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소수의 천재들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번떡이는 아이디어로 가득차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평범한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는 것과 아무 것도 모르고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어떤 것은 직관적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나의 직관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솔직히 후자가 더 많지 않은가? 즐기기 위해 공부를 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는 공부는 또 즐거우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수업 시간에 읽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내가 살면서 읽은 유일한 아리스토파네스였고, 그 수업 때문에 읽은 볼테르가 내가 만난 유일한 볼테르였다. 소포클레스도 에우리피데스도 몰리에르도 솔제니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접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름들을 다시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을 수 있었다. 교양은 어떤 상황에서든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된다."(P. 169~170)는 문장을 보고 나는 또한번 공감하였다. 저자는 나중에라도 그 이름들을 다시 만날 기회라도 있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다시 만날 일도 거의 없다.

해외 여행 한 번 가자고 했더니, 우리나라도 구석구석 안가본곳이 많은데 왜 나가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지구상에 그 많은 장소가 있는데, 어차피 못 가본 곳, 안 가본 곳 투성이인데 좀 유명하고 좀 특이하고 지금 나의 생활에서 벗어나 리프레쉬할 수 있는 곳에 가 보면 좀 어떤가? 때로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길도 한 번 가보면 좋지 않은가? 내가 평생 다시 만날 일 없어도 그렇게 대단하신 분들이 남긴 저서 한 권 슬쩍 읽고 지나갈 수 있는 기회라도 고맙지 않은가?

"대학 시절에 수강했던 많은 강의들이 선배들과 동기들의 그럼 '추천'에 의해 엉겁결에 택하게 된 것이었는데, 배움을 갈망하는 이들이 한곳에 있으면서 서로의 배움을 공유하고 부추기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겨우 스무 살 남짓한 학생들에게 학점을 잘 주는 강의가 아니라 '정말 좋은 강의'를 듣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좋은 강의'를 판별할 만한 식견이 있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대견하게 느껴진다. '쉽기만 한 길'과 '어렵지만 얻을 게 있는 길'이라는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앎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도 대학의 역할일 것이다."(P.253)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이 저자가 말한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배움을 갈망하는 선후배가 모여 좋은 강의를 추천하고, 그런 좋은 강의가 많아서 고를 수 있고, 앎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그런 대학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대학에서 배운 '교양'이 나의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라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렇지 못했기에 나는 책을 읽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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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30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가 넘 별로인데 무슨 연관이 있나요??

하양물감 2022-03-30 13:20   좋아요 1 | URL
책 표지랑, 책날개도 좀 마음에 안들어요... ㅎㅎ
표지 그림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읽는 사람](1994)이라는 작품입니다.
책 읽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넣지 않았을까요?

라로 2022-03-30 14:56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다시 표지를 자세히 보게 되네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좀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호두파이 2022-03-30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 보니 읽고싶어져요ㅎ 언급하신 <내가 배워야할...>도 아직 안 읽었는데, 열심히 읽고 있지만, 저는 아직도 북린이네요. ㅎㅎ;

하양물감 2022-03-30 14:19   좋아요 1 | URL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속상하고 그랬어요.
대학을 다니면서, 명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 그랬고, 그런 강의를 추천해줄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을 가진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요. 알수없는 자격지심이^^ ㅎㅎㅎ
 
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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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에 잘 가지 않는 편이다. 처음에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이 생겼을 때, 동네 구멍가게들이 다 죽는다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편의점, 깨끗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편의점, 동네 구멍가게들보다 많은 물건들이 아무래도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러다보니 골목골목에 하나씩 있던 구멍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제는 편의점 건너 편의점이 이어질 정도로 많아졌다.

작년에 이사를 한 후에야, 근처 편의점을 이용하게 되었다. 원체 군것질거리나 야식을 먹지 않기에 그다지 갈 일이 없기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동네 구멍가게를 떠올렸다. 동네 사정 다 아는 동네 주민이 운영하였기에 사는 이야기도 하고, 안부도 묻고,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물건을 척척 내주던 가게들말이다. '독고'씨가 야간 알바를 하게 되면서, 이 편의점은 불편한 편의점일지언정 동네사랑방 같은 느낌의 편의점으로 바뀐듯하다.

편의점이라는 이름은 '편리함'을 포함하고 있다. 24시간 문을 열 뿐만 아니라 웬만한 물건들은 다 있어서일 터이다. 그런데 이 편의점은 불편한 편의점이라고 한다.어떤 사연이 있는 편의점일까?

"버스를 타고 홀로 돌아오는 길에 염 여사는 편의점 직원들을 떠올렸다. 지지리도 말 안듣는 아들놈과 오지게도 잘난 딸년보다 요즘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가족 같고 편하다. 이렇게 말하면 딸은 또 직원들을 가족같이 대하면 악덕 업주니 옳지 않다느니 따지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랴. 직원들에게 날 가족같이 생각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겨 무리한 업무를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염 여사는 지금 가까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편의점 직원들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p.31)

염 여사는 서울역에서 자신의 파우치를 지켜준 노숙자 '독고'씨를 본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에 데리고 와서 도시락을 준다. 언제든지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어도 된다고 말하면서. 염 여사의 선행은 쉽게 할 수 있는 선행이 아니다. 편의점에 노숙자가 들락거리는 것은 결코 가게 운영에도 도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독고'씨에게 편의점 야간 알바 자리까지 주게 된다. 그녀가 편의점 직원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면,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편의점을 운영하지만, 그것을 갖고 수익을 많이 내기 위해서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근처에 다른 편의점들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할 때도 무리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오랜 시간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그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 저 아래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런 그녀 덕분에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아간다.

이 편의점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바를 하고 있는 시현이 있고, 동네에서 20년을 알아온 친구이자 교회 성도인 오여사가 있다. 그리고, 종종 담배를 사 가던 동네 아저씨 성필이 야간 알바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염 여사는 그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 이 편의점을 떠나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족 같다는 느낌이라고.

"평생 사장이나 자영업과는 거리가 멀었던 염 여사가 편의점 경영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이 사업장이 자기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삶이 걸린 문제라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였다."(p.33)

염 여사의파우치를 찾아주고, 염 여사가 곤란에 처했을 때 도와 준 인연 덕인지 '독고'씨는 성필 씨가 떠난 야간 알바 자리에 들어간다. '독고'씨는 시현 씨로부터 편의점의 일을 배운다. '독고'씨의 과거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지만, 편의점 일을 배우는 속도나 시현 씨에게 유튜브 업로드를 제안하는 등 아마도 잘 나가던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게 된다. 시현 씨는 '독고'씨의 조언대로 유튜브를 업로드하면서 다른 편의점에 스카웃되어 가게 된다.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나쁜 사람이 없다. '독고'씨는 어눌한 말투지만,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면서 손님들과 소통을 해 나간다.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라며 무시하지만 결국은 '독고'씨로부터 위로와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은 손님들이다. '독고'씨가 일을 한 후로 편의점에는 동네 할머니들도 드나들고 매상도 조금씩 오른다. 편의점의 변화는 조금씩 조금씩 일어난다.

'독고'씨가 손님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스스로도 자신의 과거를 조금씩 찾아가는 듯하다. 서울역에서 노숙자로 살아 온 시간들이 그에겐 어떤 시간이었을까? 짐작컨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과거와 단절된 채 노숙자로 살아가게 한 것일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책을 읽어가는 동안, 이 편의점을 들렀다 가는 많은 손님들을 통해 나 역시 독자로서 위안을 받는다. 어쩌면 그들의 생활이 나의 어느 일부인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p.266)

소설 속의 인물들을 보면, 혼자 애끓이며 고민할 때는 풀리지 않던 것들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문제는 혼자 고민한다고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기에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무수한 긍정 에너지가 있다. 요즘 본의 아니게 사회생활이 제한되고,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에 '관계와 소통'이 더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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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구로카와 유지 지음, 안선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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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최근에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2022년에 발매되었지만, 이 책은 2002년에 일본에서 나온 책을 번역한 책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하기까지의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지만, 최근 2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국제 정세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아쉽다. 즉,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최근의 전쟁 때문이고 과거와 달리 20년이라는 세월은 국제정세가 엄청나게 변화할 수 있는 시대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 책을 펼쳤다면 아마도 그런 아쉬움을 같이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짚어보는데는 꽤 읽을만한 책이었다. 일본인 작가가 우크라이나와 일본을 엮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부분만 좀 뛰어넘으면 되겠다.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스키타이인의 건국설로부터 시작한다. 스키타이인은 유목생활을 했으며 고대에서 유목의 형태를 거의 최초로 확립한 민족이다. 스키타이인에 대해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곡창지대'로 불리는 배경과 부합한다. 다만 스키타이의 땅에 사는 이들이 모두 유목민이엇던 것은 아니다. 스키타이는 문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농경 스키타이가 슬라브의 선조라는 학설도 있다. 또 스키타이인은 용맹함을 숭상하고 능란한 기마술이 특징인 매우 뛰어난 전사였다.

2장부터 키예프 루스 공국이 등장한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및나는 대국이었다. 루스라는 단어에서 '러시아'가 파생되어 '키예프를 수도로 삼는 루스'라는 뜻에서 키예프 루스로 부르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를 러시아역사에서만 다루었지만 러시아(소련)는 대국이고, 우크라이나는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영토가 됐고 나라 자체가 소멸해서 계승자가 없었다. 반면에 키예프 루스 공국을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아노고 존속했기 때문에 키예프 공국의 문화를 계승하여 러시아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이다.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는 모스크바를 포함한 당시 키예프 공국의 동북 지방은 민족, 언어가 달랐고 16세기가 되어서야 슬라브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 전제 중앙집권체제였던 러시아/소련과 키예프 루스 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기때문에 별개의 국가이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키예프가 파괴된 이후에도 1세기에 걸쳐 서우크라이나 지역의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됐다. 그래서 양 국가의 주장은 배치된다. (p.41~47 요약)

이 책에는 12세기 초에 편찬된 『원초연대기』의 내용을 많이 소개한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건국, 번영, 쇠퇴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최초의 역사서이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동슬라브의 거주지역에 건설됐는데, 그 촉매 역할을 한 것이 하자르인과 북유럽의 바랴그인(바이킹)이다. 하자르는 세계사에 세 가지 흔적을 남겼는데, 유대교를 국가의 종교로 채택한 점, 동쪽에서 유럽으로 침입하려는 이슬람을 막은 점, 통상무역을 보호하고 전쟁보다는 외교를 중시하는 국가가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동슬라브인의 땅에 국가를 수립한 것은 바랴그인이었다. 그들에 의해 '루스'라는 나라의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키예프 루스 공국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를 통해 비잔티움 문화를 흡수했다.

12세기에는 10~15개의 공국이 나타나면서 키예프 루스 공국은 공국들의 연합체가 되었고, 블라디미로 수즈달 공국에서 갈라진 것이 모스크바 공국이었다. 경제적으로 교역로가 쇠퇴하였고 상품경제에서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경제로 변화하며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몽골의 침략으로 몽고 시대로 접어드는데, 이때 모스크바는 몽골에 순종하여 유복해지는 발판을 마련한다. 우크라이나의 역사가들은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본다.

제3장은 리투아니아-폴란드의 시대를 다룬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단일 루스 민족이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하고 모스크바대공국, 폴란드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분할된다. 언어도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가 독립적으로 형성되고, 코사크가 형성된 시기도 이때다.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이 증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라는 어원을 러시아에서는 '변경지대'라고 하였으나 우크라이나에서는 '땅', 또는 '나라'를 의미한다고 본다. 16세기가 되자 특정한 땅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코사크 지대를 가리키게 되었다. 코사크에게 우크라이나는 조국이라는 의미를 담은 정치적, 시적인 단어가 되었다. 19세기가 되어 러시아제국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지배하자 우크라이나 땅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의 정식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1917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제4장에서는 코사크의 영광과 좌절을 다룬다. 코사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에 거주하던 자치적인 무장집단을 말한다. 코사크는 이후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한다. 우크라이나의 최고 영웅이자 우크라이나의 배신자라고도 평가되는 흐멜니츠키가 등장한다. 흐멜니츠키와 코사크군은 폴란드를 분쇄하기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완전한 독립보다 코사크의 권리 향상 정도에 머물렀다. 이후 흐멜니츠키는 자력으로 폴란드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외국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 모스크바와 보호협정을 맞게 된다. 이때의 조약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병합되는 과정의 첫걸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 외국의 협조 또는 외국의 힘을 빌어올 때, 그 결과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자주국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제5장에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은 우크라이나를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80%는 러시아제국,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흥해서 우크라이나 동남부에서는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되어 러시아 제국 최대의 공업지대를 형성하게 된다.

제6장에서는 중앙 라다가 등장한다.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고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는 과정애서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의 발트, 북유럽 국가들이 독립하고 오스크리아-헝가리 제국 하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달성한 국가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큰 에너지를 독립운동에 투여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희생을 치렀다. (p.189)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는 왜 독립을 하지 못했을까?

먼저 국내적 요인으로 차르 정부 하에서 민족주의가 억압되어 있었다. 많은 인텔리가 사회개혁과 민족독립을 두고 고민하는 상황에 놓였다. 자치와 독립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경험이 부족한 젊은 정치가들이 정부 수립을 하게 되었고, 혁명의 주도권을 쥔 도시 주민 중에는 우크라이나인이 적었고 독립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낮은 교육 수준 탓에 독립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폴란드의 압도적인 힘, 러시아의 볼셰비키의 인적 물적 차이, 협상국과 미국이 정부의 좌파적 성향을 탐탁치 않게 여긴 점 등을 들 수 있다.

힘들게 독립을 했지만, 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들어간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고 이 책은 평가하고 있다.넓은 면적, 유럽 최대 규모의 철광석 산지, 세계 흑토의 30%에 이르는 농업, 과거 소련의 최대 공업지역이면서 수준 높은 과학자와 기술자, 서유럽세계와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로서의 지정학적 위치 등은 그런 잠재력을 짐작케한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잠재력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유지는 세계 ㅍㅇ화와 안정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이 책은 설명한다.

최근 20년 간의 정보와 변화를 함께 알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책을 마지막으로 덮는 순간까지도 이 점은 많이 아쉽다. 우크라이나의 최근 상황을 다룬 내용을 다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덧붙임: 키예프, 키이우 표기 방식에 대해선 일단 책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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