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풍경 1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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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부끄럽게도.

솔직히 아동문학이니 청소년 문학이니 하는 책들에 관심이 없었던 탓도 있고

이런 류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던 탓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추천하던 책이라 이번에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생기자마자 주저않고 읽게 되었다.

책을 다 읽은 나의 첫느낌이자 하이타니 겐지로와의 첫만남은,

대단히 만족스러우며, 그와 더불어 많은 생각꺼리를 안게 되었다.


소키치는 고3이 되면서부터 등교거부를 하고

도시락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버지의 흔적 찾기를 하고 있는 학생이다.

자신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않기때문에 선생님과 친구들 뿐만 아니라

유일한 가족인 누나조차도 소키치가 왜 등교거부를 하고 있는지 알지를 못한다.

소키치의 담임인 시마오 선생도 소키치가 단순히 학교교육에 반항하기 위해

등교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소키치 때문에 교사로서의 자신에 대해 고민을 거듭한다.

 

책의 첫머리부터 소키치의 등교거부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등교거부는 일본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문제로 익히 들은 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등교거부에 대해서는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등교거부는 학부모 또는 어른들의 요구 관철을 위해

이유도 모른채 등교거부를 명령(!!)받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뉴스 정도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도 아이들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등교거부가 존재한다.

학교교육에 반발하여 스스로 학교를 떠난 학생이나,

이런 저런 이유로 학교 측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학생 등등.

그리고 그런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가 이슈가 된 적도 있다.

 

혹시 주변에 등교거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 있는가?

있다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가?

 

대부분 등교거부의 이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주위 사람들을 믿지 않으며(혹은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또, 친구들조차도 그들을 외면하기 일쑤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는

일단 학교에 가야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들을 지도하려 들거나,

설득하려들기 때문이다.

 

소키치도 마찬가지다. 소키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웃들의 고기잡이 일을 돕기도 한다. 또,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직접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등교거부학생 = 문제아 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소키치를 역시 그와 같은 공식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소키치 뿐만 아니라 다른 등교거부 학생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 학생이 왜 무슨 이유로 등교거부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찾아 근본원인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일단 학교를 벗어난 학생은 문제아라는 공식에 사로잡혀 있는

어른들의 눈 때문이다.

 

자, 다시 소키치로 돌아가보자. 소키치가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의 뒤를 좇는

이유는 누구보다 섬을 사랑하고 어부를 천직으로 알던 아버지가 섬의 자연을

파괴하는 송전탑 건설에 동참한 것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키치는 아버지의 흔적을 뒤쫓으면서, 정치와 기업의 논리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일본의 섬과 자연들, 그리고, 1차 산업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개발이 곧 발전이라는 논리가 얼마나 황망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 한참 FTA협상때문에 시끄럽다. 자동차니 의약이니 여러 가지가 걸려 있지만,

가장 크게 대두되는 것 중에 하나가 농업이나 축산업 같은 1차 산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1차 산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굳어져왔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게으름을 부리면 농사꾼 밖에 될 수 없다"는 선생의 말에 상처받은 아이가

"기왕이면 그렇게 게을러서야 어떻게 훌륭한 농사꾼이 될 수 있겠냐고 야단쳐줬으면" (p.66)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1차산업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바로 그 선생과 다를 것이 무엇이던가.

게다가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는 1차 산업 종사자들이 자신의 자녀들은 이런 일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키치가 아버지의 흔적으 뒤좇는데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토록 섬과 자연을 사랑한 아버지가 섬의 파괴가 눈에 보듯 뻔한 송전탑 건설을

도왔다는 사실이 과연 다른 이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어업을 일치감치 포기하고

토산품 가게를 하면서 편안한 삶에 안주하기 위해서가 아니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좀더 능동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키치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을 따라가면서

히데요의 가족, 시마 아저씨, 유코, 오키나와의 리쓰, 시마오 선생님, 와카마쓰 선생님,

그리고 학교 친구들 등 소키치가 만나는 사람들을 함께 만났다.

그들을 통해 소키치가 남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풀어야할

문제라는 걸 인식하게 되면서 소키치는 자신이 독선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듯이

나 역시, 소키치와 마찬가지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소키치가 학교를 떠나 혼자서 많은 고민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풀어나가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것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로 발전하면서, 학교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걸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권의 책 속에 하이타니 겐지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등교거부 문제, 환경파괴문제,

1차산업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등..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각각 다른 문제가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문제라는 걸 보여주었다.

또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주어진 레일을 따라 얌전히 걸어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새로운 레일을 깔고 그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한 사회,

살아있어서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됨을 알 수 있었다.

 

청소년 책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성인들에게도 충분한 감동과 화두를 던져주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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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 되풀이되는 연구 부정과 '자기검증'이라는 환상
니콜라스 웨이드.윌리엄 브로드 지음, 김동광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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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우석과 이필상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서문을 통해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는 외국 기자의 시선을 짧게나마 읽을 수 있었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황우석 사태는 연일 미디어를 강타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결론적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로 잊혀져 가고 있다. 지금 황우석은, 그리고 황우석과 함께 그 엄청난 조작에 관여했던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합당한 조치에 처해졌는가? 이 책 속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만의 메커니즘 속에서 보호받으면서 우리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비단 과학자의 기만행위뿐만 아니라 얼마 전 고려대 총장의 논문표절 사건 등을 통해 지식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기만행위들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최근에 일어난 새로운 사태가 아니라 몇 백 년 전부터 있어온 일이며,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만행위에 대처하는 방법이 변하지 않았다는 점도 놀랍다.


2. 지식의 사기꾼, 과학의 사기꾼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2006년에 시아출판사에서 출판된 하인리히 창클의 『지식의 사기꾼』과 『과학의 사기꾼』을 떠올렸다. 분면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내용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뒤져보니 이 두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상당 부분 같은 내용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지식의 사기꾼에서는,

   알사브티 ‘박사', 멋대로 쓰이는 지능 검사, 버트 교수가 조작한 쌍둥이 연구, 상상의 산물인 뇌신경전달물질, 베링거의 가짜 화석, 필트다운 화석을 둘러싼 스캔들


   과학의 사기꾼에서는,

   프롤레마이오스의 별자리지도,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칙, 뉴턴의 '조작인수', 블론로의 N선, 멘델의 교배실험, 헤켈의 생물발생 법칙과 사진 조작, 카머러의 이상한 두꺼비, 과학답지 않은 리센코의 '과학', 단백질 분리 사기극, 사기로 드러난 서머린의 피부이식, 스펙터의 키나제 사건, 롱의 이상한 호지킨 세포주


등이 그러하다. 물론, 하인리히 창클이 쓴 책에는, 윌리엄 보로드와 니콜라스 웨이드의 글 상당수가 참고문헌으로 올라있다.


3. 윌리엄 보로드와 니콜라스 웨이드, 그리고 하인리히 창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책은 아래와 같은 점에서 다르다.

   하인리히 창클의 책이 구체적인 사례들을 전달하는데 그친다면, 윌리엄 보로드와 니콜라스 웨이드의 책은 구체적인 사례와 더불어 그런 기만행위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과학자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과 과학자들이 말하는 자기규찰시스템의 세 가지 메커니즘 동료평가, 심사위원제도, 재연 등이 올바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적 시도들을 소개하면서, 과학자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따라서, 재미있는(?) 일화를 읽고 싶다면 과학/지식의 사기꾼을, 일화와 더불어 과학자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추천한다.


   이들은 모두 이러한 과학자의 기만행위들을 1830년 런던에서 발표된 찰스 배비지의 『영국 학술의 몰락에 관한 고찰들』을 근거로 하여 ‘위조(forging)’, ‘요리하기(cooking)’, ‘다듬기(trimming)’, 그리고 ‘표절’등으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이 두 책은 저자의 오류인지, 번역자의 실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똑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점이 눈에 띈다.


   『지식의 사기꾼 / 과학의 사기꾼』에서의 머리말 [학문에서 사기는 어떻게 일어나나?]의 일부 p. 8-9를 보자. 배비지도 그로 말미암아 여러 측정치를 합하여 얻어낸 중간 값이 본질마저 뒤바뀌는 정도가 아닌 한 ‘요리하기’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절차를 배비지는 ‘다듬기’라고 이름 지었는데, 독일에서는 이를 흔히 ‘데이터 마사지’라고 한다. -중략- 배비지는 요리하기보다 더 위험한 사기행위를, 처음부터 자신이 설정한 값이 나오도록 측정값을 계속해서 조작하는 ‘다듬기’라고 보았다.


   그러나 『진신을 배반한 과학자들』의 2장 [역사 속의 기만행위 사례들]의 일부 p. 43을 보면,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배비지는 당시 이런 다듬기가 다른 유형의 기만행위들에 비해 그나마 덜 비난할 만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다듬기를 하는 사람의 관찰로 나온 평균값은 다듬기를 하든 그렇지 않든 같기 때문이다. -중략-” 배비지의 관점에서 다듬기보다 더 고약한 행위는 그가 ‘요리하기cooking)’라고 기술한 것이었다.


   과연 배비지의 견해는 두 책의 저자 중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4. 이런 일들이 비단 과학계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은 아니다. 논문 표절, 도용, 위조는 이미 학계에 많이 퍼져 있다. 보통 내부 고발자에 의해 밝혀질 수밖에 없는데, 만약, 누군가가 학계에서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한다면, 아마도, 그 내부 고발자는 학계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 몇몇, 양심적인 학자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교수들이 자신의 양심에 아무런 죄책도 없이 그러한 일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부산에 있는 모 대학 교정에 산책 삼아 나갔다가, 교수 동 앞에 푯말 - 이 연구동은 교수님들이 연구를 하는 곳이니 정숙해주십시오- 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과연 몇 명이나 되는 교수들이 연구를 하고 있을까? 대학원 석․박사 과정생들에게 제대로 논문 지도를 해주는 교수가 몇이나 되며, 뒷날을 볼모로 삼아 자신의 연구를 그들에게 떠넘기는 교수는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한국대학의 현실이다.

   몇 백 년 전에도, 이 책이 쓰인 20여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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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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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뉴스에서는, 여수출입국관리소에서 화재로 10여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내가 읽고 있었던 책은 중남미국가의 불법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이야기한 [엔리케의 여정]이었다. 사실, [엔리케의 여정]을 읽으면서, 이주 노동자의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으려 하는 모습들이 중남미 혹은 미국과 국경을 인접한 지역의 특수한 경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국경을 넘다 기차에 수족을 잃거나 갱에게 당하는 것이나, 국가기관인 출입국관리소에 수용되어 강제출국을 기다리는 그들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엔리케의 여정]은, 온두라스에 사는 엔리케라는 아이가, 미국으로 일하러 간 엄마를 찾아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가는 여정을 사실 그대로 그린 책이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작가의 목소리보다는 엔리케의 여정을 쫓아가면서 독자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아이를 두고 혼자 미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싱글맘들이 많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국경을 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린 중남미국가들. 엄마들은 밀입국알선자를 통해 국경을 넘고, 그런 엄마를 찾아가기 위해 아이들은 몰래 국경을 넘는다. 미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인접 마을마다 엄마를 찾아가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불법이주자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차지붕에 매달려 국경을 넘어가는 이들에게는 추위와 더위, 그리고 굶주림과 더불어 갱까지, 험난한 여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사선을 넘나들며 마침내 엄마를 만난 아이들은 행복한 재회를 꿈꾸지만, 수년간 떨어져 살아온 그들에게는 또다른 갈등이 증폭되고 폭발한다. 이것은 중남미국가뿐만 아니라 해마다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미국사회에서도 문제가 된다. 결국, 이 험난한 여정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중남미 국가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 뿐이다.

 

미국은, 그동안 세계 평화 유지자라는 가면을 쓴 채 수많은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종속시켜버렸다. 그 결과 미국은 부유해졌고, 그 어느 나라도 미국에 대항할 수 없는 체제가 되었지만, 미국 사회는 수많은 문제점들을 동시에 같이 안고 가게 되었다. 그것은, 자국에서의 경제활동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윤택한 미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고, 오히려 미국민들의 일자리를 싼 노동력의 이주자들이 차지하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간에 값싼 노동력이 해외로부터 많이 유입되게 되면, 일자리를 잃는 자국민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있는 자는 값싼 노동력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고 없는 자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거대 자본과 물류에 종속된 국가들은 그 국가들대로 살아남기 위해 또다른 국가의 값싼 노동력을 가져옴으로써 자국민이 설자리를 잃게 되는 똑같은 악순환이 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남아국가의 이주 노동자들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고, 해마다 불법체류자들을 강제이송한다 어쩐다하며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기도 한다. 엔리케가 겪은 수많은 고통들이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부패 경찰관과,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악덕기업주들과, 그런 노동자들에게 사기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불법이주를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만 잘먹고 잘살면 되는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아야 한다. 근본원인(불법이주자들의 국가가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치료하지 않고서는 물고 물리는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또한, 불법이주자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그들 가족들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얼마 전까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물론, 내가 가르친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학 온 대학생이나, 기업체의 전문기술직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좀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사람들의 이중적인 잣대를 보았다. 대학생이든 전문기술자들이건간에 출신국가(선진국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산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생산직 외국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하랴. 2-3년 전, 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 노동자들이 알고 있는 한국어들이 대부분 한국의 욕설이었다는 것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즉, 그들이 듣는 수많은 한국어가 욕이라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불과 몇십년 전에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간 노동자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좋으나 별점이 적은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두려(P.57) ->두드려 (오타) 

 2. 엔리케도 그녀가 자신의 멋진 옷과 진지한 태도가 건방져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P.58) -> 그녀가 건방져 보이는 건지 엔리케가 건방져 보이는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번역

 3. 스 다섯 점(P.66) -> 스물 다섯 점, 스 명(P.105 / P.197) -> 스무 명

: 스물 + 수분류사(개, 대, 명 등등)이 오면 ㄹ 탈락, 스물 + 숫자 오면 ㄹ 유지되는 것이 맞춤법에 맞음.

 4. 나라(P.89) -> 우리 나라

 5. 국경에서 북부 치아파스의 아리아가에 이르기까지가 구역인 검은 피부와 이마에 MS문신을 한 뚱뚱한 엘살바도르인 블랙키, 엘 더크, 포르키, 홈보이 등등 많았다.(P.117) -> 이런 문장처럼 꾸미는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문장 다수

 6. 르티야(P,124)와 르티야(P.125)처럼 같은 단어의 다른 표기들.

 7. 물 컵(P.128) 한 살 반 인(P.128) -> 띄어쓰기 오류

 8. (P.154), 코요태(P.175) 셔츠(P.226) ->조사 오류

 9. 그는 부패한 경찰들도 가난한 이주민들 강탈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P.183) -> 은/는 보조사의 명확하지 못한 사용

 10. 고속도로의 아스팔트가 녹을 정도였던 섭씨 44도에서 47도를 나타냈던, 지난주보다는 기온이 낮아졌지만 (P.198) -> 어색한 문장

 11. 그는 그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인 결과, 결론은 혼자서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P.200) -> 주어와 서술어의 불일치 문장 다수

 12. 그곳은 일반전화 훨씬 싸기 때문에 엔리케에게 전화할 때 (P.261) -> 생략된 조사로 인해 불분명한 문장

 13. 준비하고 있으라는 연락이었다, (P.276) -> 틀린 문장부호

 14. 더 것 같았다. (P.277) -> 더 나을 것 같았다. 맞춤법 오류

 15. 이주민들은 그들이 받는 서비스 요금보다 적은 3,463달러를 덜 낸다고 국립조사위원회는 말한다.(P.294) -> 서비스 요금보다 3,463달러가 적다는 것인지, 3,463달러를 덜 낸다는 것인지 불명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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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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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 다녔다. 마리의 아버지가 프라하에 있는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라는 잡지의 편집국에 파견된 편집위원회 멤버였기 때문이다.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라는 잡지는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지로, 그 편집국은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 정당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상설국제교류기관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이론은 간간히 접할 수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철저한 반공교육의 탓인지 약간은 삐뚤하게 바라보고 있었던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리가 소비에트학교에 다니면서 보고 들은 내용들, 그리고 35년 후 그 시절의 친구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낸 이 책을 읽으면서는 피상적이었던 그 내용들의 실체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이 그런 이론을 풀어낸 책은 아니다.

마리가 다닌 소비에트학교에는 소련을 비롯하여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마리가 그 학교에 다니기 전에는 ''중공''-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인가...-아이들도 있었다고 했지만 소련과 중공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아이들도 소비에트학교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하면 막연하게 소련이나 중공- 때로는 북한까지-을 떠올렸던 나에게 두 나라는 같은 이념을 가진 비슷한 나라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도 여러가지 노선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프라하의 소비에트학교는 1930년에 러시아인을 위한 학사로 지어졌고 1945년에 나치스 독일 점령에서 구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소련에게 선물한 학교이다. 내가 볼 때는 똑같은 공산주의국가인 중공과 소련이지만 그 미묘한 갈등은 아이들을 갈라놓았다. 이것은, 마리가 소비에트학교를 다니면서 겪은 일들(노선의 차이로 인한 갈등과 분열, 공산주의 속의 민족주의 관점 등)에 대한 예고편이기도 하다.

마리는 소비에트학교에서 여러나라 아이들과 학교생활을 한다. 그 중에서도 마리는 리차와, 아냐, 야스나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35년이 지난 후 그들을 찾아 떠난다. 35년 전, 마리리가 기억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35년후의 만남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요매하라 마리는 세명의 친구 모두를 친했던 친구라고 기억하지만, 마리의 기억-혹은 추억-을 읽는 독자인 나는 마리의 우정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35년 후의 만남에서도 여전히 똑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리차나 야스나에 대한 기억에 비해 아냐에 대한 기억은 조금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어린 시절의 마리는, 아냐에 대해 그렇게 느꼈을리는 없지만,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아냐와 아냐의 가족들의 생활이 공산주의 이념과는 괴리됨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그려졌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논리에 가려지고 포장되고 감춰진 사회주의를 우리는 배워왔다. 물론 요즘은 많이 개방되어 예전에 비해 많이 알기는 하지만... 그럼 잘 모르는 공산주의 이념은 차치하고 우리의 체제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바라보자. 교과서적으로는 얼마나 멋진 이념인가마는, 실제로는 다수에 밀려 의미있는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봐 왔으며, 일한만큼 벌 수 있기는 커녕 있는자만이 더 벌어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얼마나 많이 느끼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그런 다음 이 책을 다시 보자. 이 책을 읽다보면, 리차나 야스나를 통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장점을 볼 수도 있고 아냐를 통해 모순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것이 무조건 옳고 어떤 것이 무조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경우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념이나 이론은 이상을 지향하지만 그 실천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마리의 어린 시절 경험은, 보통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으면서 공산당을 체험할 수 있었던 마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나친 민족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리의 경험이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나라와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의 경험에는 비교될 수 없겠지만, 나도 많은 외국인과 접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또 외국에서 1년 정도 생활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념을 떠나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은 책표지의 문구처럼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소녀들을 통해 동유렵의 역사를 본다기보다, 나와 다른 민족이면서, 나와 다른 사고를 지닌 소녀들, 그리고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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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박영숙 지음 / 알마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면서 수많은 고민이 한꺼번에 생겼다.

모든 것을 부모가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혹시 속상하지나 않을지... 다른 아이들과 본의 아니게 비교하면서 아이를 닥달하지는 않을지.. 엄마의 욕심으로 아이를 망치지나 않을지..등등등... 별별 고민이 꼬리를 문다.

 

바위솔님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됐는데, 웬만한 육아서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책 제목만을 보고서 독서지도에 관한 책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그냥 느티나무 도서관 이야기다. 아, 그런 도서관이 있었어? 어린이 도서관?? 느티나무 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만난 아이들 이야기를 통해 독서가 교육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독서일 뿐이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책을 펼치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감동하고 희노애락을 느끼면 된다. 그런데 요즘은 [~~학습], [~~교육]하면서 독서도 가르치려 든다. 가르치려 드니 배우기 싫은 게 당연하다.

 

어렸을 때,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했다. 누가 시켜서 읽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책 읽는 것이 좋았다. 다행히(?)도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성격이었던 탓에 집에 있는 책을 읽게 되고 그것에 재미를 붙여 무섭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동네 서점에 이야기해서 내가 언제든지 읽고 싶은 책을 골라갈 수 있게 하였고, 당신께서는 월말이 되면 책값을 정산하셨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보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이 무궁무진하다. 모든 것을 직접 해 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준 것이 독서였다. 그래서 독서에는 즐거움과 재미가 있고, 지식과 지혜가 함께 있으며 감동이 있다. 그런데 요즘 독서는 그렇지 못한듯하다. 우리 아이가 독서를 독서답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이 책 속에 있다.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책을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른들 마음이 바뀌어야한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느티나무 도서관이 있는 그곳은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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