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의 몰락, 그 이후 숨기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 - 권력자와 지식인의 관계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최봉수 지음 / 가디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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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중국에는 한(漢)이 있다!

로마제국과 함께 읽어보기 위해 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서로마와 마찬가지로 한도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시리즈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을, 그 사람의 일생이 아닌 역사에 등장했던 순간 그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


저자, 최봉수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김영사 편집장, 중앙M&B 전략기획실장, 랜덤하우스중앙 COO를 거쳐 웅진씽크빅,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프린스턴리뷰 아시아 총괄대표를 지낸 후 현재는 기업, 단체의 자문과 집필을 하고 있다.




망탁조의, 왕망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문명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꽃을 피운 역사의 뿌리가 바로 한나라이다.

전한, 후한 합쳐 500년 동안 이어지는 한은 초한지로 건국하여 삼국지에서 망한다.


망탁조의,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녹을 먹다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했던 역적들을 묶어 일컫는 말이다.

왕망은 망탁조의의 첫 인물이다.

동탁은 후한 소제를 시해하고 폐위시켰지만 황제자리에 오르진 못하고 살해당했다.

조조와 사마의는 직접 황제를 폐위하지도, 스스로 황제 자리에도 오르진 않았으나 아들 조비와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었다.

그러나 왕망이 전한 평제를 독살하고 유영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다음 선양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새 왕조까지 열게 된다.

그래서 망탁조의의 첫 인물이라 했던 것이다.


왕망의 역사적 평가는 두 시기에 집중된다.

첫번째 시기는 마흔다섯 살에 두번쨔로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사마에 올라 실권을 장악한 후 전한의 막을 내릴 때까지이다.

평제가 아홉 살에 즉위하자 태황태후 추천으로 왕망이 두번째로 대사마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참고로 태황태후는 평제의 할머니이자 왕망의 고모였다.

두번째 시기는 새 왕조를 세우고 황제에 오른 시기이다.

왕망은 국상에 오르자마자 태후의 정사 개입을 차단하고 평제의 외가를 멸족시켜 버린 뒤 장녀를 효평황후에 올려 황실을 정리한다.

그렇게 그는 대사마 국상이자 황제의 장인인 국구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허나 그는 자리에 만족하지도 못했고 자신이 한 일들 때문에 매번 전전긍긍하였다.

결국 그는 사위인 평제마저 독살시킨 뒤 외손자 유영을 황제에 올려 섭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이것 또한 만족하지 못한 그는 선양의 형식을 빌려 제위를 찬탈하고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

황제를 독살하고,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망탁조의의 끝판왕이 된 것이다.

그의 개혁 슬로건은 탁고개제였다.

(탁고개제란 옛것을 본받아 당대 제도를 개혁한다는 의미이다.)

주나라의 정전법을 모방해 전국 토지를 왕전으로 바꾸고 개인 토지 매매를 금하여 영농의 빈민화를 막고자 하였고 빈농들에게도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주고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지만 지배계급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개혁 자체가 너무 이상적이고 전한 말의 사회모순이 누적되어 개혁은 실패를 맞고 만다.


조조와 사마의는 창업 군주라도 재평가되었지만, 왕망은 실패한 개혁가이자 건너뛰어도 무방한 폭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는 의도가 정당하다고 과정과 결과를 가벼이 볼 순 없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동기와 시도까지 묶어 매도하면 안 된다고 의견을 내비친다.

왕망은 젊은 시절부터 개혁에 대한 욕구가 지대했다고 한다.

지배계급의 이중성에 대해 깨닫고나니 지금의 체제를 바꾸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유교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단순히 학문으로서가 아닌 사회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대사마에 오르자 개혁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조정의 극심한 반대와 사회의 모순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기득권 세력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과 함께 자신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스스로 확신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두번째 대사마에 올라서도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했으나 나아갈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역사에 기록될 만도 하지만 개혁을 위해 패륜을 저질렀던 왕망이었기에, 역사는 그의 패륜만을 기록하게 된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자들은 근본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기에 이르른다.

그 강요가 공격성을 띠게 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덕성은 결국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목표가 추구하는 가치와 수단에서의 도덕을 분리하여 가치에 우선을 둔다.

사실 왕망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몇몇 인물들이 이러한 절차를 밟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왕망은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고 마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멸망의 길


한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후한은 장각의 황건적 난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는데 언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 통일왕조 없이 400년 동안 혼돈의 시기가 이어지는 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후한 멸망 과정의 중요 사건들은 아래와 같다.

1.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무력한 조정을 대신하여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지방 군벌이 세력화되고, 중앙 조정은 십상시의 수중에 떨어진다.

2. 십상시의 난을 진압하러 낙양으로 밀고 들어온 군벌 중동탁이 정권을 장악한다. 그는 소제를 시해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왕망에 이어 망탁조의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후한은 이때부터 명목상의 수명만 이어간다.

3. 조조가 동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후 헌제를 내세워 지방 군벌을 토벌하는데, 이에 대항하여 촉의 유비, 오의손권이 나서며 삼국시대가 열린다.

4. 조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조비는 명목상 연명하던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을 빌려 제위를 뺏는다. 이로써 후한이 멸망하고, 그 뒤를 위가 잇는다. 220년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세워져 서기 220년에 멸망하여, 426년 동안 존속한 중국 역사상 최장수 국가로 평가된다.

5. 유비가 세운 촉을 촉한으로, 한나라의 정통 계보로 인정하여 전한, 후한에 이어 촉한까지를 하나의 왕조로 본다면 수명은 좀 더 연장된다. 유비는 후한이 망한 다음 해에 한 황실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촉한을 세우나, 유비의 아들 유선에 이르러 위나라의 침공을 받아 263년에 멸망한다. 이를 포함한다면 한의 수명은 470년으로 늘어난다.

후한이 멸망한 후 수가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의 기간을 약 400년으로 추정하는데, 이 시기를 위진 남북조시대라고도 부르며 크게 삼국시대, 서진시대,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로 나눈다.


중국에서 위진 남북조시대는 흑역사나 다름없어 최근까지도 역사 시간에서 건너뛰었을 정도라고 하는데 서양사에서도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분열의 시기를 맞았을 때 재통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한나라와 관련된 책리뷰에 이어 서로마 제국에 대한 책리뷰를 곧장 올릴 예정인데, 두 나라가 비슷한 점이 많다.

이를 비교한 내용은 다음 서로마 제국 때 다룰 예정이다.




좋아하는 과목을 질문받으면 단연 국어와 영어가 으뜸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재미를 흠뻑 느끼게 된 과목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사였다.

수업해주시는 선생님이 마치 책을 읽어주시는 것만 같아 수업시간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내신때문에 점수 따기 목적이 크다보니 흥미를 두었던 일부 유럽사만 지금까지 기억할 뿐 그 외에 역사적 사건들은 기억 속에 묻힌 지 오래이다.

스무살이 되고서도 대한민국과 유럽사만 흥미를 느껴 관련 역사책은 간간히 챙겨보긴 했으나 중국 역사는 관심이 없어 한시와 동양고전에 나온 배경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작년 책결산을 하면서 언급했었지만 삼국지를 아직 읽지 못해 숙제처럼 쥐고 있는데 『한(漢)의 몰락, 그 이후 숨기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을 읽고나니 삼국지를 펼쳐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죽림칠현이란 말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죽림칠현이란 위/진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 권력에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세월을 보낸 산도, 완적, 유영, 혜강, 향수, 완함, 양융, 즉, 일곱 명의 선비를 일컫는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던 산도는 어렵게 살았지만 노장사상을 좋아해 완전, 혜강과 교유했다고 알려졌다.

마흔이 되었을 때 관직에 나갔으나 조상이 권력을 잡자 낙향했었다.

이후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조정으로 나갔고 고위관직을 두루 거치다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은거하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과연 죽림칠현과 어울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역시나 산도보다 열여덟 살 아래였던 혜강이 죽림칠현의 실질적 영수였다고 한다.

수려한 용모와 총명함을 지녔던 혜강은 일찍이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는 조조의 외손녀와 결혼하여 중산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지나 뜻이 없어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동무 향수와 함께 술과 시, 거문고를 즐겼다고 하니 죽림칠현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수가 없다.

이후 종회의 모략으로 죽음에 몰리게 되는데 태학당 3천 여명의 학생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함께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했단다.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문고를 뜯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정말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싶다.

혜강의 죽음 이후 사실상 죽림칠현은 해체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뒤를 이은 자도 없었으니.

죽림칠현은 스스로 속딤을 멸시하고 속됨을 깨뜨리고 속됨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으나 속됨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다시 속됨과 어울리는 현실을 맞게 된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지 않는가.

저자는 이런 말을 남긴다.

고고한 자들은 높은 봉과 같아 홀로 떨어져 있어도 우뚝 솟아 있는데 그런 무리들은 개천의 자갈 같아 무리 지어 흘러가는 물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목소리 높이며 얼굴마당에 출몰하지만 다 애기 주먹보다 잘고 꼬락서니도 닳고 닳아 누가 누군지 분간조차 안 된다고.


역사적인 흐름이 아닌 인물을 중점적으로 두며 내용이 전개되다 보니 읽는 재미도 흥미로울 뿐더러 앞서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느끼는 바가 매우 컸다.

죽림칠현을 잠깐 언급한 것도 다 이런 이유였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읽다보니 삼국지도 올해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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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 - 부와 불평등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미래
오데드 갤로어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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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호모사피엔스 등장 후 30만 년, 인류가 풍요를 누린 시간은 200년에 불과하다. 나머지 29만 년이 넘는 시간은 배고픔, 질병과의 싸움이었다.

최근에는 몇 년간 코로나가 전세계를 강타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앞으로도 인류의 영원한 숙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

저자는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지난 29만 년 전으로 돌아가보려 한다.


저자, 오데드 갤로어는 브라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통합성장 이론’의 창시자이다.

통합성장 이론은 인류사 전체에 걸친 개발, 번영 그리고 불평등의 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갤로어는 경제학자로서 일생을 바쳐 얻은 통찰을 세계 각지에 공유했으며, 그렇게 얻은 통찰과 발견을 모아 『인류의 여정』을 썼다.




Ⅰ 인류의 여정


카르멜산, 이스라엘 하이파 동남쪽에 있는 산악 지역으로 카르멜산의 여러 동굴로 가는 길을 오르다보면 선사시대가 자연스레 그려진다고 한다.

여러 산을 뚫고 굽이져 흐르는 시내, 산맥 옆자리 숲에는 사슴과 가젤, 멧돼지가 가득했을 것이고 사마리아산맥에 접한 광야에는 곡물과 과일나무가 즐비했을 것이다.

카르멜산 동굴에선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조우 가능성으로 관심을 끌었을 뿐 아니라 선사시대 정착지에 대해 증언하기도 한다.

고인류와 초기 현생인류는 불을 능숙히 사용하고 석회석 도구를 개발하며 꾸준히 나름의 신기술 또한 익혔을 것이다.

이렇듯 인류를 정의하고 인류를 다른 종과 구분해 주는 이 문화적, 기술적 진보의 핵심적 동력은 다름 아닌 인류 뇌의 진화이다.


인류 뇌는 비상하다.

지난 600만 년간 3배로 커진 인류 뇌 크기는 호모사피엔스 출현 전에 압축적으로 일어났으며, 발달한 뇌를 가진 인류는 지구상의 어떤 종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안전과 번영을 이루게 된다.

인류 뇌가 생존에 유리하다면 왜 수십억 년간 다른 종들은 뇌를 발전시키지 못했을까?

즉, 강력한 뇌가 명백한 이점을 가졌음에도 왜 자연계에선 드물게 나타난 것일까?

이 답은 강력한 뇌의 약점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우리의 뇌는 일반적으로 체중의 2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에너지 20퍼센트를 소비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크다.

둘째, 다른 종의 새끼는 태어난 직후 스스로 걷고 빠르게 먹을 것을 구하지만 인류 뇌는 다른 종보다 주름 잡혀 압축되었으며 인류 아기는 성숙기에 이르는 몇 년간 미세 조정이 필요한 반쯤 여문 뇌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크기 때문에 태아의 머리가 산도를 통과하기 어려워진다.


생태적 가설에 의하면 인류 뇌는 환경상 노출된 데 따른 결과물로 보고 있으며 사회적 가설에 의하면 진화의 요인을 복잡한 사회 구조 안에서 찾고 있다.

문화적 가설은 정보를 흡수하고 저장한 뒤 다음 세대로 전해 주는 뇌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듯, 인류 뇌의 진화는 인류를 독특한 발전 경로로 나아가도록 한 주요한 추진력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상전이를 경험했는데 정체에서 성장으로의 전환은 매우 급작스럽게 보이기까지 했었다.

지나고 보니 일찍이 상전이를 거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에는 거대한 불평등이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류의 상전이를 불러온 것일까?

통합성장이론은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확신에 자극을 받아 개발되었으며, 경제 발전의 요인을 연구하려면 한정된 기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보며 밑바탕의 추진력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론이 무너지기 쉽고 불완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통합성장이론을 통해 30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출현부터 오늘날까지 전 과정을 조망하며 인류의 여정을 담아내었고 그 과정에서 찾은 힘은 인류가 빈곤의 덫에서 탈출해 지속 성장의 시대로 가는 상전이를 촉발시키게 된다.

인류사를 정체기에서 성장기로 전환할 수 있게 한 촉매를 찾을 때, 산업혁명이 거론된다.

외부적 충격을 가했다고는 하지만 18-19세기를 살펴보면 실제 급격한 전환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빨랐다고 느껴지는 것이지 그 당시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극적인 변혁을 촉발한 변화의 톱니바퀴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요인들 중 하나가 바로 인구 규모이다.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240만 명이 지구상을 돌아다녔고 로마, 마야문명이 정점에 이르던 기원후 1년까지는 전체인구 대비 78배로 불어나 1억 8,800명에 이르게 된다. 이후 산업화 초기인 19세기 초입에는 10억 명을 넘기게 된다.

인구 규모가 클수록 개개인의 전문화가 발달되니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 퇴보까지 막을 수 있어 기술 변화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적 혁신은 더 많은 인구를 떠받치면서 인류가 생태적·기술적 환경에 적응하도록 자극했으며, 규모와 적응력을 키운 인구는 다시 신기술을 고안하고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도록 역량을 키웠다. 이것이 인류사 표면 아래에서 돌아간 변화의 톱니바퀴다. 마침내 인류사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규모로 혁신의 폭발을 불러온 것 역시 변화의 수레바퀴였다. 산업혁명은 그러한 혁신의 폭발이었다.




Ⅱ 부와 불평등의 기원


해마다 수천 명이 유럽과 미국 국경에 이르려다 죽곤 한다.

아마 뉴스에서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파도에 휩쓸려 혹은 배가 침몰하여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사망한 사람들을.

이들 대부분이 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이주자들인데 배를 타기 위해서 밀입국 브로커에게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목숨을 걸면서까지 쉽지 않는 여정을 걸어가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국가 간 생활수준의 엄청난 불평등' 때문이다.

기대수명, 평균 취학 연수, 유아사망률, 인터넷 서비스 확보 및 전기 사용 인구 비중은 각 나라마다 천차만별이다.

기본적인 생활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국가도 있기에 목숨을 걸면서까지 탈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글로벌 불평등의 표면에 드러난 사실을 놓고 봐도, 선진국의 1인당 소득이 개발도상국보다 상당히 높은데다 그만큼 투자에서 차이가 확연히 나타나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소득 격차는 부분적으로 노동생산성의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에 각 국가 거주자들마다 상이할 수밖에 없다.

2018년 기준으로 미국 농민 1인당 노동생산성은 케냐의 77배, 우간다의 90배, 에티오피아의 147배라고 한다.

미국 농민이 남쪽 아프리카, 남동아시아, 남아메리카 지역보다 소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교육, 훈련, 경작과 수확 기술의 차이다.

미국 농민은 높은 수준의 직업훈련을 받고 유전자 변형 종자나 좋은 비료, 농약 등을 사용할 수 있는 반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애초에 실행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기술 진보와 물적/인적자본의 축적이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

그래서 20세기 후반 정책 결정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개발도상국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한 계획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 간의 불평등이 너무 심해 정책 효과는 결국 제한적이었다.

불평등을 불러온 근원보다 표면상 요소와 드러난 불균형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요소가 투자, 교육 등을 가로막아 세계의 불균등한 발전을 조장했다는 것인데, 불평등의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이며 전 세계적인 번영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무엇일까?


19세기 국제무역은 큰 폭으로 늘어나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를 촉발하게 하고 식민주의를 가속화시켰다.

당시 북서부 유럽 국가는 제조업 상품의 순수출국이었고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는 원재료와 더불어 농업 기반 생산품의 수출 비중이 높았었는데 국제무역의 도움 없이도 산업혁명을 낳을 정도의 기술수준이었는데, 서유럽 국가가 국제무역 덕분에 산업화 속도와 성장률 급성장을 이루게 된다.

즉, 자원, 식민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에 대한 착취에 더해 국제무역에 힘입은 결과가 서유럽의 성장이 된 셈이었다.

산업화 초기, 국제무역의 확대는 산업화된 경제와 그러지 못한 경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불균형적 영향이었다.

산업화를 이룬 경제에서의 무역 확대는 숙련노동이 필요한 제품 생산에 대한 전문화를 촉진시키니 숙련 노동자 수요가 자연스레 증가하게 되고 이는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를 확대시키고 인구변천을 촉진시켜 기술 진보를 더 자극하고 관련 상품 생산에 대해 비교우위를 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2세기 동안 이루어졌던 세계화와 식민주의는 국가 간 부의 격차를 더욱 키우게 되었다.


국가의 부에서 나타난 거대한 격차는 국가 간 기술과 교육의 차이 같은 근사 요인, 그 핵심에는 제도와 문화, 인구의 다양성처럼 모든 뿌리에 존재하는 근본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근사 요인과 근본 요인이 미친 영향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지만 얼마나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무엇이 그 속도와 변화를 좌지우지한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짚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다!

인류가 이룬 발전만 놓고 보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불을 통해 어둠을 밝히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했으며 도구를 통해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것이 첫 시작이었고 인류는 이내 자동차, 기차까지 만들었으며 전자기기를 발명시켜 지금은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빠르고 쉽고 편리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고 인구 증가는 더더욱 발전된 기술력을 가져오게 된다.


책에서도 나와있듯이, 생활수준만은 대체로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기술 진보도 빈곤의 덫을 막을 순 없었다. 기술 진보를 통해 자원이 늘면 이를 바탕으로 항상 인구가 늘어났으니 이는 진보의 과실을 더 많은 이들이 나눠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기술 진보와 혁신을 통해 몇 세대 정도는 번영할 순 있었지만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또다시 생활수준은 생존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뒷걸음질 하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개개인이 가지는 기술적 능력만이 빈곤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술과 지식의 역량을 키워 주기 위해 부모는 자녀 양육과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게 되는 것이다.

의학기술 발달에 의해 인류의 기대수명이 길어지고 사망률이 낮아짐에 따라 교육투자에 대한 기간 또한 길어지니 이는 결국 인적자본 투자 증가와 출산율 감소를 촉진하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는 게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경제 발전은 인구 증가에 따른 상쇄 효과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기술 향상이 불러온 번영은 영구적인 개선이 된 셈이다.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지난 200년간 1인당 평균소득은 14배로 높아졌고 기대수명 또한 두 배 이상으로 높아지게 된다.

대중교통 및 배, 비행기를 통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고 전자기기를 통해 곧장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국가 내에서는 물론 국가 간에서도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했다.

효율적인 경제 정책이 있더라도 빈곤에 빠진 국가를 하루아침에 선진 경제로 바꾸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경제 격차이다.

이미 오랜 기간동안 여러 부분에서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따라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해도 실행시켜 성공시킬 순 없는 것이다.


특히 2장은 현 대한민국이 가장 고심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불평등 근본 원인을.

내용이 길어지는 것 같아 최대한 추려보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꼭 확인해보길 바란다.



역사의 긴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운명은 돌에 새겨지지 않았다. 인류의 여정을 지배했던 거대한 변화의 톱니바퀴는 계속 돌아가므로, 성 평등과 다원주의, 차이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미래지향성을 강화하고 교육과 혁신 역량을 키우는 조치는 보편적 번영의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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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생활자를 위한 시시콜콜 100개의 퀘스트 - 기후와 자연 IQ를 키우는 지구살이 안내서
루시 시글 지음, 이상원 옮김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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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지구를 알고 싶은데 무엇부터 알아야 할까?

지구인도 아니고 지구생활자라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지구와 함께 살고 싶지만 상황을 바꾸기 어렵고, 실천이 얼마나 효과 있을지 의심이 간다면?


저자인 루시 시글은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에 대해 흥미롭지만 생소했던 사실들을 재치 있게 소개하며 지구와 친구가 되는 즐거움을 많은 사람과 나누려고 한다.

퀘스트는 10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물권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생소하게 느꼈던 지구 공동생활자들의 삶을 밀착 탐색하고 업계와 개인이 어떻게 공존하며 살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 루시 시글은 저널리스트이자 자연과 기후 문제 전문가이다.

영국 중앙일간지 최초의 생태 전문 칼럼니스트로, 《옵저버The Observer》지에 윤리적 삶에 관한 칼럼을 10년 넘게 기고해왔다. BBC 토크쇼 〈더 원 쇼The One Show〉에서 지구 리포터로 활동하며 개인의 생태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실질적 조언을 해왔다.

환경 비정부단체 SAS의 이사이고, 기후위기를 다루는 팟캐스트 ‘너무도 뜨거운 지금So Hot Right Now’을 진행하고 있으며 싱어송라이터 엘리 굴딩 등 여러 유명 환경활동가들과 기후 관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Ⅰ 플래닛 하이프에 입장하셨습니다


플래닛 하이프는 「심슨 가족」에 나오는 테마 식당의 이름이다.

Planet Hype, 대박 행성으로 풀이되며 말그대로 지구가 대박이라는 의미로 저자는 사용하고자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환경의 범위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코앞의 환경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저자는 이를 더 넓게넓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생명체 대부분이 온대 기후에서 번성한다는 점으로 봤을 때, 지구와 태양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대기를 유지할 수 있는 크기를 갖추었으며 지구에서 물은 액체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생물권은 나무들의 가장 깊은 뿌리 체계부터 대양의 깜깜한 해구, 빽빽한 우림, 높은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다."

지구와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생물군계와 맺는 밀접한 관계를 인식하고 중요한 사항들을 깨달아야 한다.

여러 연구에서도 증명되었듯이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힘겹게 진화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생태계가 무너지고 예상치못하게 자연재해가 닥치면서 지구가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니 다른 행성 이주를 추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분리수거, 텀블러 사용하기 등 작은 행동들을 실천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으로만 끝이 아닌, 지구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지구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잊지 말자! 우리는 지구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지구는 우리가 밟고 다니면 그만인 바윗덩어리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무심코 그렇게 행동해왔지만, 생명체가 살아갈 만한 조건으로 환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구가 힘겹게 진화해왔음을 보여주는 연구는 아주 많지요."




Ⅱ 지구 공동생활자와 팀을 결성하십시오


온갖 동식물 생명체로 가득한 지구, 즉, 동식물이 넘치도록 많다는 것은 지구가 건강하다는 것이다.

지구와 진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자연의 모든 존재를 옹호한다는 의미이다.

가장 작은 생명체를 크게 인식하고 이를 생태계에서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수상자 몇 명을 선정해 보았다.

첫 번째 수상자는 바로 "지렁이"다.

지렁이는 유기물 잔해를 처리해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흙에 산소를 공급한다.

'지렁이는 지렁이일 뿐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렁이 종만 해도 6,000개 이상이며 1,200평 당 100만 마리가 넘게 산다고 한다.

두 번째 수상자는 바로 "크릴"이다.

바다의 크릴 떼는 식물성 플랑크톤을 먹고 탄소와 영양소를 배출해 토양에 비료를 뿌려 생산력을 높이듯이 바다의 생산력을 높여준다고 한다.

또한 덩어리로 뭉쳐진 크릴의 배설물은 바닷속 바닥으로 내려가 안전하게 탄소를 저장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인해 습한 날씨에 취약한 지렁이가 이전에 없던 캐나다 최북단 숲에서 발견되는 초유의 상황도 벌어졌다.

숲에서는 유기물질을 먹어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탄소가 추가로 배출되기 때문에 지구의 친구에서 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한 자료에 의하면, 2021년 동안 미국에서만 총 22종이 공식 멸종되었으며 2022년은 최대 많은 종의 멸종이 선언된 해라고 한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찍으면서 유일하게 퇴짜 맞은 곳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탐 크루즈가 와도 촬영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곳은 바로 노르웨이였다.

제작팀은 노르웨이에서의 헬기 촬영을 추진했으나 촬영 허가를 요청했던 스발바르 제도는 북극곰, 북극여우, 턱수염바다물범, 바다코끼리 등 다양한 동물들의 서식지였기에 거절했던 것이었다.


자연 보호가 곧 지구 보호이다.

개발 명목으로 인한 지역 서식지 파괴, 토지 사용 변화로 인한 멸종은 막아야만 한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지구와 진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자연의 모든 존재를 옹호한다는 뜻이에요. 가장 작은 생명체를 크게 인식하고 그것이 생태계에서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제인 구달이 말했다.

"주변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당신의 행동은 분명 차이를 만든다. 어떤 차이를 만들고 싶은지 결정해야 한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했지만 100개의 퀴즈를 보고 나니 꼭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었음을 느꼈다.

넓게 바라봤다고 생각했지만, 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무엇보다 지구에 대한 생각에 큰 울림을 주는 책이었다.

지구와 함께 공존하기 위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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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너머의 별 - 나태주 시인의 인생에서 다시없을 사랑 시 365편
나태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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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세상은 다시금 빛나게 될 거야!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빛과 같은 시로 응원하다.


그는 진정 시의 마법사가 아닐까.

그 어떤 것도 그의 영감이 될 수 있다.

그 영감을 이내 시로 변신시키니, 그는 진정 시의 마법사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사랑 시 365편은 시인의 일생을 담듯 한 편 한 편 정성스럽게 고르고 고른 시들이며 그 또한 자신의 사랑 시 중 결정판이라 강조하며 특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저자, 나태주는 1945년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111번지 그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공주사범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2007년 공주 장기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친 뒤, 공주문화원장을 거쳐 현재는 공주풀꽃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1971년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등단 이후 끊임없는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수천 편에 이르는 시 작품을 발표해왔으며, 쉽고 간결한 시어로 소박하고 따뜻한 자연의 감성을 담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풀꽃」이 선정될 만큼 사랑받는 대표적인 국민 시인이다.

흙의문학상, 충남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향토문학상, 편운문학상, 황조근정훈장, 한국시인협회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작품상, 김삿갓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별처럼 꽃처럼


별처럼 꽃처럼 하늘에 달과 해처럼

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조그만 나뭇잎처럼

곱게 곱게 숨을 쉬며 고운 세상 살다가리니,

나는 너의 바람막이 팔을 벌려 예 섰으마.



까닭


꽃을 보면 아, 예쁜

꽃도 있구나!

발길 멈추어 바라본다

때로는 넋을 놓기도 한다


고운 새소리 들리면 어, 어디서

나는 소린가?

귀를 세우며 서 있는다

때로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하물며 네가

내 앞에 있음에야!


너는 그 어떤 세상의

꽃보다도 예쁜 꽃이다

너의 음성은 그 어떤 세상의

새소리보다도 고운 음악이다


너를 세상에 있게 한 신에게

감사하는 까닭이다



은방울꽃


누군가 혼자서 기다리다

돌아간 자리

은방울꽃 숨어서

남모래 지네


밤마다 밤마다

달빛에 머리 감고

찬란한 아침이면

햇빛에 몸을 씻고


누군가 혼자서

울다가 떠나간 자리

어여뻐라 산골 아씨

또다시 왔네.



또 다른 행복


그 애를 마음의 꽃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어딘가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되었고

조바심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낮이면 스스로 들판에 나아가

벌 받는 나무가 되었고

밤이면 어둠 속에서

혼자 우는 꽃이 되었다


그렇다 한들 어떠랴!

그 애가 주는 불행은

또 다른 행복


숨 쉬는 사람으로

살아 있는 순간순간만 그저

기쁘고 고마울 뿐이다.



너를 보았다 1


세상을 한 바퀴 돌아왔을 때

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늦게 만난 것이었다


너와 함께 떠날 세상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도 너를 보았다


빈방에서 흐느껴 울다가 보았고

골목길 걷다가 소낙비 끝에 보았다


너는 별빛 너머 빛나는 별

꽃송이 속에 웃고 있는 꽃


더는 꿈꾸지 않아도 좋겠다.



그냥 약속


10년 뒤에도 우리가

이렇게 정답게 만날 수 있을까?


10년 뒤에도 네가

오늘처럼 예뻐 보일 수 있을까?


10년 뒤에도 우리가

살아서 숨 쉬는 사람일 수 있을까?


나무 아래 바람 아래

하늘과 구름 아래 오직 땅 위에서.



'곁에 두고선 읽고 싶은 시집이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 중 한 권은 분명 나태주 시인의 시집일 것이다.

풀꽃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작은 풀꽃 하나에서도 큰 세상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그의 문체는 간결하다.


시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좋은 시 다음에 좋은 시가 연이어 등장하니 올해 첫 필사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내게 무지개같은 존재였다.

힘듦과 절망에 부딪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시고선 매번 손수 적은 시를 건네주셨다.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시 하나로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것임을.


중학교 때의 선생님이 무지개같은 존재였다면 고등학교 때 문학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은 내게 햇살과 같은 존재였다.

귀 기울여 성심껏 이야기를 들어주고 환하게 미소지어주시는 어른은 선생님을 따라올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에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것은 내겐 큰 재산인 것 같다.


자주 연락하지 못해도 간간히 연락하면서 명절과 생일 선물을 챙겨드리고 있는데, 선물과 함께 꼭 넣는 것이 있으니 바로 손편지를 첫 장에 끼워 담은 시집이다.

두분 모두 문학에 대해 남다른 분이시기에 책 또한 신중하게 고를 수밖에 없는데, 시집만큼은 절대 실패가 없다.

올 초부터 주구장창 읽고 있는, 나의 올해 첫 필사책으로 선정한 별빛 너머의 별로 올해 첫 선물을 보내드렸는데 명절은 지났지만 명절 선물 한가득 받은 기분이라 좋으셨다는 선생님들의 연락을 받고 나니 이번 선물들도 성공적이었어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다할 말도 없이 언제 3월이 된 건지.

분명 몸과 마음은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만 덧없이 빠르게 흐르고 몸과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아 이상하다.

나태주 시인이 말하길, "행복은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할 일은 그 행복을 찾아내는 일뿐이다."라고 했다.

세상에는 없는 꽃, 아무도 모르는 꽃, 아직은 이름도 없는 꽃이지만 겨울에라도 꼭 꽃이 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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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 - 각본
이지하 지음 / 프로젝트이오공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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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지인의 소개로 연극 <그 나무>를 보게 된 지하.

연극의 ‘그 나무’처럼 남자 성기 모양을 본 따 깎은 나무를 보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한다.

연극은 대학원 사회의 밀폐되어 있는 공기와 사건사고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지하는 이 연극이 특정 대학을 겨냥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연극이 알려지자 성기 모양 나무가 식재되어 있는 여러 대학들이 등장하고, 서로 이 연극이 자기 대학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공연중단의 기로에서조차 연출가와 작가는 확답을 내리지 않고, 진실을 알고 싶은 지하는 취재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뜻밖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저자, 이지하는 89년 서울 출생으로 대학에서 문학과 외국어를 공부했다.

졸업 후 여러 서점에서 서점원으로 지냈으며 이따금 영상을 찍고 글을 쓴다.




학생1 거기 뒤편에 나무들이 있어.

학생2 (눈을 끔뻑거리며) 맞아요. 화단 있잖아요.

학생1 지나갈 때 한번 구석을 유심히 봐봐

학생2 구석에 뭐가 있어요?

학생1 잘 보면, 그 중 하나가…. (주변을 살핀 후 작은 소리로) 고추 모양이다?

학생2 (마찬가지로 작은 소리로) 예?! 그런 게 왜 있어요?

학생1 나도 A교수님한테 들은 건데, 완전 골 때리잖아.

학생2 학교에서 심은 거예요?

학생1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음기 누르려고 그런 거래. 대학원 건물에 음기가 너무 강하다고.



A교수 나는 여러분들이 아~주 존경스러워.

학생1 (갑자기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당혹스러운 듯 두리번댄다)

A교수 정말이야, 진짜! 이 시대에 문학을 하겠다고 대학원까지 온 게 아주 존경스러워. 내 딸이 지금 고3인데, 나는 내 딸한테 절대! 내 딸이 문학 공부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반대할 거야. 그 정도로 여러분 결정을 믿어준 여러분 부모님이 정말 대단하신 거지. 부모님들 아주 대~단하셔! 내가 정말이지! 존경해! 응! 자, 그런 의미로 한 잔 하자!


학생1 (울먹이며) A교수이 술에 취하셔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 흐느끼며) 제 허벅지에 손을 올리셨어요. 제가 계속 뿌리쳤는데도 만지셨어요.



아라 논문심사 전날 카페에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같은 지도 제자였던 오빠가 들어와서 얼렁뚱땅 잡담을 나누게 됐어요. 거의 그 오빠의 하소연이었어요. 지도교수가 어떻고, 저떻고, 힘들다, 어쩐다. 그래도 논문은 꼭 쓰자, 그만두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 갑자기 기운이 쏙 빠지더라고요. '내가 겪은 일은 아예 모른 채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퍼득 들었어요. 저보고 택일 하라면, 무조건 그 오빠의 고충을 선택했을 거예요. 그 오빠가 겪은 일이 그 정도로 사소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힘들었을 상황이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이 사람이 '부럽다'고 되뇌었어요. 차라리 남에게 언제든 털어놓을 수 있는 정도의 일을 겪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아라 …… 그 정도는 괜찮다고 누군가 얘기해줬다면 좋았겠지만, 제 얘기 자체를 동기 외에는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어요. 지도교수를 바꿀 수도 없었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제 연구 분야와 무관했거든요. 그렇다고 연구 분야를 바꾸는 것은 한 가지만 생각하고 해오던 사람에게 갑자기 그것을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일과도 같았고요. 꼭 그 안에서만, 꼭 그 교수에게서만 그 공부를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당시에는 다니던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는 게 두려웠어요. 무엇보다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어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일이 커지면 어떡하지, 겨우 그걸로 관뒀냐고 혼날 것 같았어요. 오직 동기하고만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동기와 여러 번 논의를 하면서, 논문은 무조건 써야겠다고 결정했어요.





책에 대한 느낀 점을 말하기에 앞서,

모든 대학원과 모든 교수님들이 다 그렇지는 않으며, 이러한 행동을 행한 교수님과 이를 방치한 대학원이 그 대상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책에서는 대학의 부조리함을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각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해도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나 또한 대학교 다닐 때부터 선배들에게 대학원의 부조리함에 대해 심심치않게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조교라도 하게 되면 일부 교수님의 심부름꾼이 된다는 소문도.

아무래도 대학원은 대학과 달리 그 전공으로 나아가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어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사회에 나가기 전단계나 다름없어 혹여나 교수가 그 분야의 굵직한 사람이라면 교수의 입김으로도 좌지우지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대학보다 대학원이 특히 수직관계가 더 심한 편이다.

이렇게 책에서는 대학원 생활이 얼마나 폐쇄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좋은 선생님, 교수님들과 만날 수 있었고 지금도 몇몇 분들과는 꾸준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다 좋을 순 없는 법!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께서 과하게 나를 예뻐해주셨다.

평소 내게 이름까지 불러주며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셨는데 그게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어느 여름 날, 영어선생님의 개인적 사유로 인해 자율 학습으로 전환되어 음악 선생님이 대타로 교실에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다들 자습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음악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더니 공부 열심히 한다며 등을 가볍게 두들기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물론 가볍게 한두 번 두들겨 줄 수 있다.

그러나 여름이라 하복을 입으면 끈나시를 입었어도 속옷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 등을 두들기면 당연히 후크 부분이 만져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살짝 미소지으며 "아, 네."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책을 봤다.

그 순간, 어쩜 이렇게 열심히도 하냐며 기특하다는 말과 함께 내 왼쪽 뺨을 살짝 꼬집고선 왼쪽 귓볼을 만지는 게 아니겠는가.

기분이 좋질 않아 눈만 미소지으며 '네, 열심히 하려고요.'라는 말과 함께 몸을 틀었다.

훗날 대학생이 되어 무슨 얘기를 하다 음악 선생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니 다들 기겁을 했었다.

사실 그 때는 어려서 기분나빴던 터치라는 것만 느꼈을 뿐 무슨 의도로 만졌었는지 전혀 몰랐었다.

당시에 선생님이 시킬 게 있다고 음악실로 와보라고 했을 때 혼자 안 내려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항상 혼자 다니지 않고 친한 친구들이랑 같이 다녔었는데, 두어번 친구랑 함께 내려가니 '아, 다른 얘 시켰으니 괜찮아'라는 말로 보낸 게 지금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순수하게 심부름 시키려고 부르신 걸 수도 있다.

그렇기에 크게 의심하진 않고 있지만 결국 심부름은 시키지 않으셨다.


한 기사에 따르면,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서 지난 2019년 학부생과 대학원생 1902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이들 중 46.4%가 입학 이후 '인권침해' 피해 경험이 1회 이상 있었다고 답했다.

또 이들 중 49.5%가 사적 만남 강요, 스토킹, 성희롱 등 성폭력을 가장 힘들었던 피해 경험으로 꼽았다.

주된 성폭력 가해자 중 교수(전임교수·비전임교원)는 25.5%를 차지, 1위인 선배(32.4%) 다음이었고 동기(23.5%)보다 많았다.

특히 이공계와 예체능계, 의학계 등에 속한 피해자는 가해 교수가 학계에서 얼마나 많은 네트워크를 가졌는지,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안다며 문제 제기를 할 때 한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싸운다고 생각해야 한다.

가해 교수가 파면되거나 해임되어도 사실상 관련 업계에서는 그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지금도 권력형 성범죄가 만연한 대학이 분명 있을 것이다. 피해자는 잘못이 없지만 침묵해야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깝기만 하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내부 고발을 배신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어 폭로하는 것이 어려운 것 또한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피해자를 온전히 보호하면서 대학에 만연한 위계형 성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처해있는 학업·연구·노동 여건을 총체적으로 고려해 건설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적 인식 또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올리지 못했던 임시저장글을 정리하다 진즉 올렸어야 할 글들이 있어 후다닥 올려본다.

설 연휴 전에 업로드하려고 작성했던 글인데, 병원 왔다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라도 봤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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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8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9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