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개정증보판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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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조선과 관련된 역사책을 여럿 읽다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죽음,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 『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구성되어 있어 꽤 흥미로웠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오래 전 출간되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개정되어 오류를 바로잡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보강했다고 한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사도세자의 어른들


1694년에 태어난 영조는 여든세 살까지 살며 역대 임금 중 재위 기간이 53년으로 가장 길다.

삼십 년 이상 지켜본 혜경궁은 영조의 성격을 상찰민속이라 표현하며 세세히 신경쓰는 것은 거의 병적이라고 했다.

(상찰민속이란, 꼼꼼히 살피면서 동시에 재빠르다라는 뜻이다.)

죽음과 관련된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영조는 사람을 죽이거나 불길한 말을 들으면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었다고 한다.

심지어 영조는 좋은 일 혹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에 드나드는 문이 달랐다.

그래서 혜경궁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만나러 경화문으로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 이미 알아차렸다고 한다.

생사, 내외, 호오, 애증을 엄격하게 가르고 철저히 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영조는 편집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짐짓 추측해볼 수 있다.


그 누구도 권위에 도전할 수 없고 뜻 또한 거를 수 없는 자리, 바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리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유일하게 거스를 수 있는 또하나의 절대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부모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는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부모의 말과 뜻을 거스를 순 없다.

대개 왕이 서거한 후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살아 있는 임금의 부모는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임금이 너무 어릴 경우에는 대비가 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대신 통치하기도 했는데, 수렴청정은 세조비 정희왕후부터 익종비 신정왕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아무런 권력 기반도 없었지만 불안한 왕자 시절을 보냈던 영조를 왕세제로 만들고 대권을 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조의 어머니 인원왕후다.

인원왕후는 영조의 생모는 아니지만 엄연히 영조의 어머니였다.

숙종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다.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죽고 10월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자 중궁전이 공석이 되었는데, 이를 비울 수 없어 숙종은 결혼을 서둘렀고 이듬해 10월 인원왕후가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숙종은 마흔두 살이었고 인원왕후는 열여섯 살이었다.

인원왕후는 후사를 얻지 못했지만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에게 왕권을 넘기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후계를 정하자는 상소를 받게 되는데 이때 인원왕후가 영조를 후계로 정하자고 지지하였고 영조는 왕세제가 될 수 있었다.

왕세제로서 대리청정을 할 때도 영조는 인원왕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박상검 사건으로 인해 영조도 위험해지고 경종 또한 자신의 수하를 쳐내기 어려워했지만 단호하게 그들의 처벌을 결행한 사람이 바로 인원왕후였다.

임금이 원치 않거나 하지 못하는 일까지 하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대비밖에 없었으니, 당시 인원왕후가 영조를 위해 나섰던 것이었다.

이렇듯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권력의 전수자이자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인원왕후는 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사도세자 또한 할머니를 믿고 따랐다고 하는데 당시 인원왕후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영조에게 첫날밤 소박을 맞았다고 알려진 정성왕후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해 죽는 날까지 고독했다고 전해진다.

정성왕후의 병세가 심각해졌을 때도 영조는 찾아오지 않았는데 곧 죽을 것 같게 되자 그제야 병소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성왕후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 커녕 아들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왕비가 운명하게 되었고 장례 절차를 진행시켜야 하는데 영조는 죽은 아내를 곁에 두고 내인들에게 아내를 만났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의 부음이 들려오자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하고 부마의 집에 거동하려 했다고 한다.

승지, 대사간 등이 말리자 영조는 그들을 해임하고 밤에 화완옹주 집에 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무려 33년이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왕비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단 한 건도 볼 수 없다.

참으로 고독하고 고독했던 정성왕후였다.


1764년 7월 26일, 선희궁 영빈 이씨가 사망하게 된다.

그 날은 아들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인은 화병이 아니었다.

그해 2월 선희궁은 영조가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라는 전교를 내리자 식음을 전폐했었다.

아들이 죽고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선희궁에게 손자 정조라도 보전하여 왕으로 세우기를 바랐지만 손자가 더이상 자기 아들의 아들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이렇듯 당시 자살을 숨기고 병사로 덮었던 행태로 미뤄보아 선희궁은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선희궁은 아들을 죽인 어머니라는 낙인을 가지고 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아침, 선희궁은 영조에게 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했다.

사도세자가 병이 심해 상황 파악은 물론 주위 사람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니 아들의 대처분을 권한 것이었다.

세자를 죽이려 하는 영조를 보며 신하들은 말렸지만, 선희궁의 말을 들은 영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선희궁이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 것만은 사실이다.

선희궁의 남은 희망은 오로지 정조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정조의 아버지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로 두라는 명령을 받고 삶을 정리했을지 모른다.

훗날 영조와 함께 선희궁의 묘소로 간 세손 정조는 할머니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할머니께서 소자를 돌봐주신 은혜는 어머니와 다름없으셨고, 세상을 가르치심은 엄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하늘처럼 크신 덕은 망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762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소자가 할머니를 우러러 기댐은 전보다 배나 더했고, 할머니께서 소자를 가련히 여기심도 전날보다 더 심했습니다. 춥지나 않은지, 시장하지나 않은지, 아침저녁으로 한마음으로 살뜰히 돌보셨습니다. 이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음도, 어느 것이 우리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조, 「영빈이씨제문」)




Ⅱ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다.

영조는 마흔둘의 나이였고 이복형인 효장세자도 죽은 지 이미 칠 년이나 지났으니깐.

그렇게 모두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태어난 사도세자였지만 영조가 그에게 실망하기 시작한 것은 열 살 전후부터였다.

열 살부터 죽기 직전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골칫거리 아들이었고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무섭고 두려워 피하고 싶은 아버지였다.

그 기간이 이십 년이나 되니 세자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는 말도 이해가 갈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열다섯 살에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 병이 생겨 그 총기를 잃었다고 한다.

예컨대 병이 발작이라도 하면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발작이 그치면 후회를 했다고 전해진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세자를 동궁의 지위에서 내려 평범한 서인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전교에 "비록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찌 처분을 하지 않으리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치며 미쳐서 한 행동이니 너그러이 처분해줄 것을 영조에게 당부하지 않았는가.

이후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 장례에서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쳤다고 못박아 말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수시로 깜짝깜짝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하지만 이를 심각한 정신병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유무죄 여부를 떠나 어느 쪽을 택해도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조는 물론 손자인 순조도 결코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조가 측근의 꾐에 넘어가 아들을 죽인 것이라면 왕의 판단이 결국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즉, 혜경궁의 말처럼 어떤 쪽을 선택하든 결국 문제는 발생한다.


아홉 살 때부터 어지럼증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혜경궁과 결혼한 이듬해부터 행동이 예사스럽지 않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 신경증 초기이자 ADHD를 앓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또한 두 달 가까이 눈이 충혈되는 안질은 어린아이에게서 거의 볼 수 없는 병인지라 안경 착용을 고려했을 정도라고 한다.

세자의 병증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1752년 가을, 정조가 태어나고 궁궐에 홍역이 돌았다.

화협옹주가 홍역으로 죽고 사도세자 또한 병을 이겨내었지만 정성왕후의 환갑을 이틀 앞두고 영조가 전위하겠다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 혼란 속에 사도세자는 「옥추경」을 읽으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벼락신을 부리기 위해 「옥추경」을 공부했지만 오히려 귀신이 보인다면서 겁을 먹었다고 한다.

홍역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세자가 귀신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Ⅲ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고변한다.

곧 대권을 이어받을 세자가 반역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가 감히 세자의 반역을 고발한다는 것일까?

윤급의 겸종인 나경언은 노비는 아니지만 대갓집의 일을 돌봐주는 집사였다.

나경언은 머리를 써 궁궐의 내관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의 고변서를 형조에게 바쳤다.

형조는 이내 영의정에게 알렸고 영의정은 곧장 영조에게 고했던 것이었다.

워낙 엄중한 문제인만큼 영조는 나경언을 직접 심문했는데, 이때 영조를 대면한 나경언은 또 다른 고변서를 꺼내놓았다.

즉, 형조에게 갖다 바친 고변서는 가짜였다.

세자의 죄상을 담은 고변서를 올렸다가 임금과 마주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으니 미끼를 던졌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고변서로 인해 영조는 물론 온 조정이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었고 영조는 세자를 폐위할 결심을 하게 된다.


임금의 행차는 즉각 혜경궁에게 보고되었었다.

혜경궁은 영조가 어느 문을 통해 들어와 어디로 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경화문을 통해 들어와 선원전으로 갔단 소식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징크스를 강하게 믿던 영조는 궂은일을 할 때 경화문을 통해 선원전으로 갔는데, 이는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이 확실해졌다는 전조였다.

사도세자는 곧장 영조에게 가지 않고 아내를 불러 이별을 고하고 세손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사실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는 것은 온전치 못한 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혜경궁은 아들의 것은 작으니 세자 본인의 것을 쓰라고 답했다.

서로의 말에 대한 오해만 남긴 채 결국 사도세자는 정조의 것을 쓰진 않았다.

휘령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세자는 관과 용포를 벗고 사죄하는 뜻에서 돌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자결하라며 단호하게 요구했다.

세자의 죽음을 막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손 정조도 살려달라 간청했으나 안겨 나갈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신하들이 들어와 간청해도 영조는 단호하게 쫓아냈다.

결국 세자는 뒤주에 들어가게 되고 자정이 넘어서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는 전교를 반포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사인에 대해 세자가 미쳐서 그리되었다는 것과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작은 임금인 세자를 일반 죄수처럼 처형할 수 없기에 영조는 자결하라고 명한다.

세자가 칼을 받아들고 목숨을 끊으려 할 때도, 옷을 찢어 목을 매려 할 때도,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할 때도 신하들이 모두 손으로 막았다.

명목상으로 국정을 대리하는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세자를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자의 죽음을 목숨 걸고 막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도운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의 처벌을 받을 순 있어도 유교 이념에 따라 용서받겠지만 거꾸로 충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에 세자에 대한 충성심이 있건 없건 모든 신하들이 그의 자결을 막으려 노력했다.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누군가의 지시로 뒤주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순순히 들어갔고 밤이 깊어지자 뚱뚱한 체구에 더위도 많이 타 저도 모르게 뒤주판을 차고 뛰어나왔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세자가 깨고 나오지 못하도록 두꺼운 널판을 덧대어 큰못을 치고 동아줄로 뒤주를 꽁꽁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뒤주는 세자의 관이 되어버렸다.

누가 뒤주를 들이게 했는지 알 순 없지만 세자를 죽이고자 한 사람은 뒤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아닌 영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야금을 연주하다 알게 된 곡이 있는데 바로 「꽃이 피고 지듯이」다.

유명했지만 보지 않았던 영화 「사도」의 OST인데 문득 사도세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의혹이 있다?

▶뒤주에 갇히는 벌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순히 들어가던 사도세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였지만 이를 애통해하던 영조?

국사책에서 처음 마주했던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해 죽게 했을까하는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피 여겨 내린 시호, 사도는 당시 내게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와 정조는 업적까지 꿰뚫고 있지만 사도세자에 대해 너무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내막에 대해 파헤져보고자 『권력과 인간』을 펼치게 되었다.


신하 앞에서도 대놓고 꾸짖으며 아들 사도세자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아버지 영조 그리고 아버지 영조의 꾸짖음 아래 도망치지도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아들 사도세자.

모두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싫어해 열 살도 되기 전에 영조를 실망시켰고 학자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까웠던 그였기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애초에 맞질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조선이 아닌 현대에서 부자관계였다면 극한의 결말로 내몰리진 않았겠지.

사도세자를 둘러쌌던 어른들부터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죽음까지 지켜보고 나니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간혹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문 하나가 있으니 뒤주에 갇히게 가는 것은 일종의 벌이지 죽음으로 내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영조가 아들을 죽일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보니 모두가 이에 대한 의문을 믿고 싶어한다.

사도세자는 모후인 정성왕후의 영혼이 깃든 휘령전에서 뒤주에 갇혔었는데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보면 뒤주는 강서원에 있었다고 표시되어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든 다음 영조가 이를 승문원으로 옮기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영조는 차마 어머니의 영령이 있는 곳에서 아들을 죽게 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경희궁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뒤주를 감시했으며 19일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른 시점에 환궁을 했다.

이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20일에 죽었다고 추측했는데 영조는 뒤주를 21일에야 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일 뜻이 없었다는 영조의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단편적이기에 한 사건에 대해 전후사정을 알기 어렵다.

또한 역사 왜곡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는데 달라진 것은 전혀 없으니 간혹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유사 역사가 아닌 진짜 역사, 즉, 진정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학생들을 위해, 우리 역사를 위해 대중 역사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이는 전문가들이 역사 대중화의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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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 답사 일지 - 배움을 찾아 떠난 국문학자의 여행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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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서울대에서 교양과목을 맡았던 저자가 수업을 위해 답사 다니고 여행하며 썼던 글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었다.

문학과 역사 그리고 여행의 만남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무엇보다 국문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이전에 분명 다녀왔던 곳이 모르던 곳인 것마냥 새롭게 느껴졌었다.

그래서인지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깊이감이 달라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여행을 향한 갈망


여행은 위대하다. 석가모니의 출가와 성불, 원효의 유학 여행 도중 각성, 연암 박지원의 연행과 북학의 깨달음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위대한 깨달음 중에 여행에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다.


한국인은 대대적으로 여행 DNA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전근대 조선 사람들도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가까운 중국도 사신단 신분으로 수도 베이징에만 갈 수 있었으며 바다에서 배가 난파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쇄국 상태였던 조선에서 지식인들이 가진 여행에 대한 갈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열하일기」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중국에 들어서자마자 울고 싶다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니깐.

박지원은 정식 사신은 아니었지만 팔촌 형인 박명원이 사신이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갔던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중국 문화에 빠진데다 선배 학자들의 중국여행기를 읽으며 언젠가 떠날 날만을 갈망했으니 울고 싶다고 표현한 부분이 새삼 이해가 간다.


조선시대처럼 폐쇄된 것도 아니지만 여행이 절실하지 않았던 저자는 1993년 신혼여행 때 첫 비행기를 타봤다고 한다.

문학연구자로서 해외 대학에서 선진 학문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한국까지 찾아와 학문적 교류를 청하는 벗을 만나게 된다.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있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가 서울대학교 연구생으로 오게 되어 저자의 박사 지도교수이신 이상택 선생님에게 한국고전소설을 함께 읽을 학생을 구해달라고 청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카투사 경력이 있는 저자에게 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하였는데 결국 그는 제안을 하게 된다.

매주 한 번씩 만나되 저자는 한국문학을 영어로 소개하고 임마누엘은 미국의 중국문학 연구 성과를 한국어로 말하자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있었다.

아, 질문이 사람을 빨리 성장시킬 수 있구나!

유대계 미국인인 임마누엘은 유대인의 전통적 질의토론식 학습법인 하브루타가 익숙해서 저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다.

한국 밖 대학을 한 군데도 가보지 못했던 저자였지만, 머릿속에서는 세계 유수의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미숙했지만 그 시절 멀리 찾아온 벗과 만나던 때가 그의 학문적 황금기였다고 덧붙였다.




Ⅱ 옛 서울 나들이


전세계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꼽으라면 지리적으로는 단연 '서울'이 으뜸일 것이다.

서울 성내로 들어오면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청계천이 가운데서 흐르고 있으며, 북한산, 도봉산 같은 명산을 옆에 끼고 한강이 흐르는 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때문이다.


조선시대 소설이 전공인 저자는 부전공을 서울로 여긴다고 한다.

나라의 중요한 일이 서울에서 벌어지며 인재 또한 서울로 모이니 문학 역시 서울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내세우던 인물도 서울에서 나고 자랐거나 주로 활동한 경우도 많다.

이렇듯 역사 또한 조선사는 결국 서울의 역사이지 지방사는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 서울은 행정적으로는 서울 성곽 안쪽과 성 바깥 10리까지를 가리킨다. 당시 서울 인구를 20~30만 명 정도로 추산하니, 도성 안쪽에는 20~30만 명 가까운 인구가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높지 않은 산이 있다. 북에는 북악, 동에는 낙산, 남에는 남산, 서에는 인왕산이다. 서울 성곽은 이 산들을 둘러가며 쌓았다. 각각의 방위마다 중심 성문이 있고 중심 성문 사이에 다시 작은 성문이 하나씩 있다. 그 문들 중 동대문이 가장 크며 남대문 또한 왕래가 많던 중요한 문이다. 서소문과 동소문은 서민의 상업 활동 등 일상생활에 많이 이용되었다.

서울 성내는 청계천에 의해 남북으로 구획되었으니 조선시대에도 일종의 강남과 강북이 존재했던 셈이다. 청계천 주변 종로와 그 이남은 평서민이 많이 사는 상업과 유흥의 거점이었고, 북쪽에는 궁궐과 관청을 출입하는 상층 양반이나 서리, 아전 등이 많이 살았다.


저자에게 북촌은 곧 궁궐 답사나 다름없다.

헌법 재판소 자리에는 고종 때 정승 박규수의 집이 있는데 할아버지인 연암 박지원의 집이기도 하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또한 북촌에 있는데 이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간다고 한다.

수락산 기슭 벽운동 계곡에 별장이 있다는 말은 불확실하며 오래 머문 흔적 또한 없다고 한다.

다만 저자가 친정집 위치를 추적하며 깨달은 것은 우리가 옛날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잘 옮겨다니지 않고 한평생 한곳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편견을.

남편인 사도세자가 폐세자된 후 뒤주에 갇히는 벌을 받자 아들 정조와 함께 궁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이때 궁궐과 멀지 않은 곳에 친정집이 위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경궁의 후손들은 서울 공예박물관 자리에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오빠 홍낙인이 남긴 「피음정기」에 따르면 이곳보다 약간 북쪽 언덕 부근에 자리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조선시대에서 양반이었다면 서울집, 시골집, 서울 근교의 별장을 가지고 있었어서 북촌 골목골목에 있는 한옥들을 보면 조선시대 최상층 양반의 일상이 묻어나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남쪽은 북쪽에 비해 상인이나 서민이 많이 거주해 있었다.

"남대문이 개구멍이요. 인정이 매방울이요. 선혜청이 오 푼이요. 호조가 서 푼이요. 하늘이 돈짝만하고 땅이 맴돈다." _춘향전

남촌 중에도 특히 광통교 주변은 상업 지역이자 문화 구역이었다.

광통교 가에는 그림 가게가 있어 다리에 걸린 그림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고 한다.

광통교 남쪽으로 가면 다동을 다방골이라 불렀는데 그곳에는 기생집이 많았다.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논 기생과 취객이 다음날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하니, 이를 다방골 잠이라고도 불렀다.

갤러리, 술집, 상점이 많은 곳, 즉, 돈과 술 그리고 유흥이 어우러진 곳이 남촌이었다.




초등학교 때, 영어만큼 좋아했던 책이 바로 사회과부도였다.

지도 보는 것이 좋아 여기저기 가보고 싶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고 깨알같이 써져있는 글들까지 읽으며 뒷부분에 나오는 나라, 수도까지 다 외우곤 했었다.

저자는 세계 지리부도를 보며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하던데 나 또한 책상 위에 놓인 미니 지구본을 떼굴떼굴 굴려가며 여행하는 꿈을 꾸곤 했다.


작년에는 못했지만 못해도 매해 두어 번은 궁 나들이를 다녀온다.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경희궁을 살펴보다 마음 가는 대로 북촌이나 서촌 혹은 인사동, 명동까지 다녀오곤 한다.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여유와 힐링을 느끼고자 다녀오는 것인데, 책을 읽고 나니 주제를 정해놓고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갔던 그곳이 곧 문학과 역사였으며 나들이가 곧 배움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아도 걷는 게 참 좋다.

날씨만 허락한다면 저녁 산책은 빼먹지 않을 정도니깐.

근래 다쳐서 오래 못 걷다보니 마당 산책만이 숨통을 틔여주고 있는데 올 가을에는 꼭 다녀와야겠다.

올해 강원도만 전부였던 내게 남원부터 군산, 안동, 광양 그리고 서울 곳곳을 살피며 떠난 인문학적 여행은 꽤나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었다.

이러니 내가 책을 끊지 못한다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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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누워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면
빛나는 잔물결 해일 수 없지만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


_김영랑





하지 않은 죄


당신은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고 남겨둔 일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바로 그것

부드러운 말을 잊었다면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꽃을 보내지 않았다면
잠자리에 든 당신은 괴로울 것이다

형제의 길 앞에 놓인 돌을 치워주지 않았다면
힘을 주는 몇 마디 조언조차 해주지 못했다면
당신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사랑이 담긴 손길
마음을 끄는 다정한 말투
그것들을 소홀히 대했다면

인생은 너무 짧고 슬픔은 너무 크다
늦게까지 미루는 우리의 느린 연민을 눈감아주기에는
당신은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고 남겨둔 일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바로 그것


_마가렛 생스터





혼자서


하이얀 티셔츠 차림으로
미루나무 숲길에서 온종일 서성이고 싶은 날은
깊은 산골짜기 새로 돋은 신록 속에 앉아 있어도
안개 자욱 개구리 울음소리 속에 앉아 있어도
귀로는 연신
머언 바다 물결 소리를 듣는답니다

아야, 아야, 아야, 아야,
산 너무 산 너머서
흰 구름 생겨나고 죽어가는 소리를 듣는답니다

바다에는 지금
하얀 돛폭을 세워 떠나가는
돛단배가 한 척.


_나태주




나태주

처음 사는 인생, 누구나 서툴지


"서툰 것이 인생. 부디 당신, 외로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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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아 -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니콜 슈타우딩거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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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다들 그렇게 살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위로지만, 가장 상처가 되는 위로이기도 하다.

잘 들어오지도 않고 와닿지도 않는, 애초에 안 들었으면 좋았을 말들은 오히려 상처가 된다.


저자는 함부로 조언하거나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과 주변 지인들이 거쳤던 힘든 시간 속에서 찾았던 일어서는 힘을 전해줄 뿐이었다.

다시 일어서기는 다리가 아닌 마음에서 시작된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가슴 절제 수술을 거치면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아파하고 상처받았던 순간 그리고 끝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서른둘 나이의 유방암 이야기, 『새드엔딩은 취향이 아니라』 ▶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2336048975


저자, 니콜 슈타우딩거는 현재 독일에서 커뮤니케이션 전문 코치이자 강사로 활동 중이다. 다양한 강연과 워크숍을 통해 갑작스런 언어 공격에도 상처받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는 기술을 조언하고 있다.

32세에 유방암 선고를 받았지만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유머를 잃지 않고, 자신의 투병 이야기를 담은 첫 책 《형편상 가슴을 포기하고Brusteumstandehalber abzugeben》를 펴냈다. 국내에도 출간된 《나는 이제 참지 않고 말하기로 했다》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코치로서 망설이지 않고, 기죽지 않고, 지지 않는 대화 기술을 소개해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았다.




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


독일의 한 출판사에서 남부럽잖은 연봉을 받으며 오래 일했던 저자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당차게 사표를 던진다.

이후, 자신의 장기를 살려 커뮤니케이션 강사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고 청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성공 가도의 초입에 서게 된다.

그렇게 인생의 제 2막이 오른 순간 찾아온 것이 유방암이었다. 그녀의 나이 고작 서른둘이었다.

서른 두 살, 저자는 유방암 선고를 받게 된다.


인생의 배낭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다. 하지만 신발과 태도와 끈기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내가 정할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통증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휴식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자책으로 나 자신을 괴롭힐 필요도 없고 남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도 않아야 한다.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넘어지곤 한다.

남들이 나보다 더 많이 걷는 것을 보고 자책말고 오히려 의욕과 용기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속도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바로 인생이다.

대략적인 계획을 설계해도 중간에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세워놓은 계획이 생각해 놓았던 길과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곤 한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그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모든 것을 혼자서 짊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혼자서 아등바등 거려봐도 해결은 커녕 자책감만 커져가는 날이 있었다.

혼자서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몰랐기에 마음만 병 들어갔던 것이었다.

덧붙여, 마음이 아프면 결국 몸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머뭇거리지 말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Ⅱ 두려움을 일일이 적는다는 것


걱정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걱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걱정은 의무가 아니다. 걱정의 먹구름은 태양을 가린다. 구름을 멀리 보내버려라.


몇 년 전 뮌헨에서 열린 레이디스 이벤트에 게스트로 초대받은 저자는 나름의 걱정이 생겼다.

맨발로 걸어도 발을 접질리는데 하이힐을 신고도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게 걷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옷이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해야 즐거운 저자는 블라우스, 바지에 납작한 신발을 신고 호텔로 향했다.

홀에 들어서자 진짜 레이디들이 보였고 우아한 옷을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은 그녀들이 저자에게 물었다.

"어느 행사에 오셨는지…."

"레이디스 이벤트요."

"아, 행사요원이신가 봐요. 저쪽에 모여 계시던데."

"실망시켜드려 죄송하지만 저는 행사요원이 아니고 오늘 강연을 할 연사입니다."

그들의 행성에 끌려가지 않는 것, 저자는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에게 충실했기에 부끄럼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개선점으로 변화시켰지만 나 또한 걱정병이 나름의 단점이었다.

걱정이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끊임없이 걱정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끝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나의 생각 또한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흐려져만 간다.

저자는 그럴 때면 심리치료사가 해준 말을 되새긴다고 한다.

"걱정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는 방이 여러개 있다. 기쁨의 방, 불안과 수치의 방, 확신과 유머의 방, 당연히 걱정과 두려움의 방도 있다. 운이 좋다면 평생 그 방에 불이 한 번도 켜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수도 없이 그 방의 불을 켤 것이다. 혹시 불을 켜지는 않더라도 손전등을 들고 그 안에 들어가 보기라도 할 것이다. 이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두려움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Ⅲ 다시 일어서기, 다리가 아닌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물론 나는 당신이 그 강한 힘을 쓸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혹시 쓸 일이 생기거든 그냥 자신을 믿어라. 당신은 해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상처로부터 스스로 회복되는 힘,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훈련이 꼭 필요하다.

평탄하지 않은, 굴곡 있는 길들을 지나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항력을 키우고 회복탄력성을 배우게 된다.

즉, 많이 도전하고 노출되어야만 기를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인 셈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저앉고 싶을 때, 이 말들만 기억해보자.

나쁜 일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

모든 비판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

걱정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그것을 깨닫는 능력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열한 살의 딸인 아냐를 얻었고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저자를 임신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내와 헤어진 후 몇 년 뒤에 어머니를 만난 것인데, 열 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새출발을 결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언니인 야나를 만날 순 없었다.

부모님이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어느 날, 오는 길에 신문 한 부 사달라고 부탁을 받게 된다.

3분 거리인 가판대이지만 비가 오기에 안 된다고 차로 가자고 말렸지만, 자전거를 좋아하던 아냐는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자전거를 타고 가판대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던 부모님 귓가에 들리던 것은 사이렌 소리였다.

걱정이 된 아버지는 가판대까지 걸어가 주인에게 아냐가 왔냐고 물었지만 아직 안 왔다는 답변만 듣게 된다.

덧붙여, 저쪽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과 함께.

그랬다. 사고가 난 것은 바로 아냐였다.

심각한 뇌손상을 입어 뇌사상태에 빠진 아냐, 그런데 운전자는 처벌도 받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차 앞 유리창을 변상하라고 뻔뻔하게 요구하기에 이른다.

부모님은 그 사건 이후 도심을 떠나 시골로 이사하게 된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부모님에게 이를 어떻게 이겨냈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어떻게 저한테 그렇게 좋은 아빠가 돼주시고 자전거도 가르쳐주실 수 있었어요?"

"그 힘은 바로 너였단다. 그때도 그랬고 또 지금도 그래. 네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서지 못했을 거야."


큰일을 겪은 친구와 이웃에게 이런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 잊어버려. 관심을 딴 데로 돌려봐."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사랑과 슬픔, 이 두가지를 동시에 집중할 순 없기 때문이다.

힘든 시간이나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면, 우리의 신경은 서서히 그쪽으로 쏠리게 된다. 다른 것은 까마득해진다.

특히 누군가를 보내는 큰일을 겪은 순간에는 매일매일 행했던 루틴을 지키려고 해야 한다.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결국은 버텨내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목표를 잡은 뒤 세운 계획에 따라 착착 진행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고 우리는 그 묘미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간혹 인생 실패했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모두가 인생은 처음이라 그에 따른 실수는 당연히 나오는 것이기에 실수한 것 뿐이지 실패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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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봄날인 너에게 - 인생의 꽃샘추위에 지지 않는 햇살 같은 위로
여수언니(정혜영) 지음 / 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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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유튜브를 즐겨본다면 '여수언니'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여수언니의 컨텐츠는 먹방이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먹방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힐링받는다.

왜일까? 영상 내내 자막을 통해 구독자들과 소통하며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기 때문이다.

먹방은 두번째이고 그녀의 조곤조곤한 말솜씨에 보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햇살 같은 응원과 위로를 글로 써내었으니, 바로 『나의 봄날인 너에게』란 에세이다.


여수언니는 말한다.

나의 응원은 언제나 당신을 향해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라고.


저자, 여수언니(정혜영)는 여수언니 채널과 봄날언니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이자 매일 달콤한 행복을 선물하는 디저트 브랜드 봄날엔 대표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도 많은 사람이다.

2019년도부터 각종 음식과 디저트를 리뷰하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으며 누적 구독자 수 약 100만 명, 누적 조회 수 약 2억 뷰, 영상당 평균 댓글 수 1,000개 이상을 기록하면서도 구독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튜브 여수언니정혜영[Yeosu Unnie], 봄날언니정혜영[Bomnal Unnie]

인스타그램 @yeosu.unnie




Ⅰ 행복의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저자의 DM은 항상 넘쳐난다. 짧은 안부부터 그녀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다양한 고민까지.

특히 오랫동안 생각하며 보낸 고민들은 지나칠 수 없어 꼭 살펴본다고 한다.

항상 미소 지으며 구독자들과 만나는 여수언니지만 그녀 또한 우울감에 빠졌었던 시기가 있었고 그럴 때면 털어놓고 싶은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모르고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구독자의 메시지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하였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을 때 제가 생각났나 봐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을 때는 너무 크게 느껴지지요.

하지만 밖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이겨낼 만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저는 뭐든 들어줄게요.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거든요.

어쩌면 추운 겨울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시기도 언젠가는 모두 지나고 반드시 따스한 봄날이 찾아올 거예요.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을 들은 것이 불과 몇 년 되질 않았다.

즉, 하루 아침에 180도 달라질 순 없다.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하고, 잘 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싫은 내색 없이 홀로 다 감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착하게, 예의바르게, 똑똑하게, 야무지게" _첫째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런 것들이 내 마음을 갉아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순응하며 살아오니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상처 또한 크게 받은 적도 많았고 도저히 마음이 감내할 수 없는 수순에 이르자 사람 자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었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항상 흠 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잘 보이기 위해 부지런히 꾸몄고 누군가 똑 부러져서 좋다고 하면 실수하는 모습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심지어 친구들에게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다.


저자는 딸 은채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잔뜩 주며 문득 느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조건 없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오늘도 말한다.

스스로를 무조건 사랑하자.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정말 아무런 조건이 없으니까. 오늘도 나는 나를 무조건 사랑한다.




Ⅱ 언제나 파릇파릇 돋아나는 자존감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함에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고 저자는 그저 달렸다고 한다.

'나한테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지지?'라는 물음에 좌절했지만 땀을 뻘뻘 흘리고 난 뒤에는 그 질문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발병하는 우울증이지만, 물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만 해도 과거의 나쁜 일에서 멀어진 것처럼 느끼게 되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힘들고 우울한 일이 생긴다면 일단 달려보자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손에 자란 저자는 자신의 가정만큼은 꼭 지키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불안에 떤 저자는 항불안제를 처방받게 된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맨 처음 권하는 것이 있다.

바로 햇빛과 운동 그리고 규칙적인 식사이다.

저자 또한 스스로를 탓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햇빛을 쬐며 정기적으로 산책하기 시작했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내니 그동안 미루었던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돈이나 명예 같은 사회적 성공도, 인간관계도 아닌, 바로 일조량과 활동량이다.




Ⅲ 흔들릴지언정 열매를 맺으며


좋아하는 일로 성공하려면 결국은 찾아야 한다.

저자는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고 말을 차분하게 잘하는 편이며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글로 쉽게 잘 풀어낸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여수언니 정혜영」 유튜브 채널이다.

상위 1퍼센트의 기술을 가지지 않았지만 상위 25퍼센트에 든다고 생각할 만한 기술과 능력들을 결합하니 시너지를 도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일로 성공하고 싶다면 두 가지를 떠올리자.

그 일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상의 기술을 상위 25퍼센트 안에 들도록 개발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예전에 코로나에 걸리고 나서 밥 반 공기도 거의 못 먹을 정도로 입맛이 아예 떨어져 물과 이온음료만 먹던 때가 있었다.

체내 수분까지 쭉 빠져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고 삼키는 것조차 버거워 오히려 약이 더 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내게 친구가 유튜브 영상 한 편을 보내줬었다.

계속 보다 보면 치킨이 먹고 싶어질 거고 계속 보다 보면 떡볶이가 먹고 싶어질 거고 계속 보다 보면 과자가 먹고 싶어질 거라고.

그 때, 여수언니 컨텐츠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친구의 의도와는 달리 막상 여수언니 유튜브를 보고나니 먹방이 아닌 조곤조곤한 말솜씨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쩜,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건지! 무엇보다 어쩜, 이렇게 맛있게 말할 수 있는 건지!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왜 여수언니 유튜브를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자의 이야기에 읽으며 공감한 부분이 많았다.

영상 속 자막을 통해 응원과 조언을 아낌없이 주는 여수언니, 그런 저자를 보며 그녀의 높은 자존감이 마냥 부러웠다.

자존심은 버려도 자존감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데, 언제 내 자존감이 이렇게나 조그맣게 구겨진 것인지.

나의 이야기를 완전히 꺼내볼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스스로 삭히는 게 맞다고 생각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절대 꺼내 보이지 않았던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속적으로 사람에게 상처받은 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사람 자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더더욱 생각에 휩싸였었다.

나의 부족함이 드러남으로써,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심지어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부족함을 보일 때,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초점이 '나'가 아닌 '남'에게 있으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었다.

분명 스스로 알고 있는데 한순간 고쳐지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겁이 많은가보다.

중학교 때부터 다니던 병원이 있는데 오랫동안 날 지켜본 원장님은 내 감정을 잘 헤아려주시는 편이다.

가족들도 서로 잘 아는 편이라 안부 묻는 게 일상인데 어느 날 위염이 심해져 병원에 갔었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을 주고 받았는데 원장님께서 조심스럽게 명함 두 장을 건네주셨다.

스스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하고 행동했지만 그게 아니였었나 보다.


사람마다 느끼는 깊이감의 차이는 있지만 상처가 크고 우울과 불안이 깊다면, 어쩌면 당연하고도 형식적인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진 않을 수도 있다.

스스로 답을 알고 있고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다.

땀 흘리며 열심히 운동하는데, 끼리 거르지 않고 열심히 챙겨먹는데, 뜨거운 햇빛 받으며 열심히 산책하는데도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타나진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공감받으며 위로의 감정을 주고받다 보면 조금의 위안은 된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오듯이, 그 시기가 길더라도 결국 봄은 찾아오지 않겠는가.



나의 응원은 언제나 당신을 향해 있어요. 그러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세요. _여수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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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5-11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책장님 편안한 하루 보내셨나요.
오늘은 조금 더운 날이긴 했지만, 아직 봄이라서 좋은 것 같아요.
행복한 일들은 미루지 않고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매일 매일 좋은 일들 가득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