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철학 강의 -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이 순간의 철학
하버드 공개 강의 연구회 지음, 김경숙 옮김 / 북아지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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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누구나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상황들이 함께 하다보니 때로는 도피하고 때로는 무시하곤 한다.

과연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좋은 방법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다. 바로 철학적인 지식을 배워 내면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하버드에서 강의했던 역사적 이야기를 살펴 보며 삶의 진정한 목적과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하버드 공개 강의 연구회는 하버드 공개강의를 연구 및 전파하는 전문협력기구다.

주로 하버드 공개강의의 핵심 내용을 선별·정리하고 다양한 형식으로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하버드 공개강의는 이미 잘 알려진 정설이나 보편적 일반론 혹은 보기가 될 만한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깊은 사고와 논쟁을 거치며 천천히 받아들이게 하는 방식으로 강의가 진행된다. 그 안에 담긴 학술, 사상, 예술의 내용은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깊이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하버드 공개강의연구회에는 경제부 기자, 교육 종사자, 마케팅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고 있다. 모두 삶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바탕으로 하버드 공개강의를 연구하고 있다. 하버드 공개강의연구회는 2012년부터 중국철도출판사와 손잡고 하버드 공개강의 시리즈 도서 15종을 펴냈으며, 이후 몇 차례 수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Ⅰ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행복은 삶에 대한 감정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느낄 때, 인생이 아름답다는 사실과 행복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행복이란 많은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에게 맞는 무언가를 얻는 것이다.

돈이 행복을 좌우할 순 없지만 돈이 없으면 행복을 추구하기에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돈만 쫓게 되면 끝없는 욕망과 수요를 추구해 만족할 만한 행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행복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하기 전 자신의 내면을 진정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쉽게 말하진 못한다.

어렸을 때, 학교를 마치고 오는 길에 남동생과 친구들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놀았는지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어서 얘들을 데리고 슈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 2개를 고르거나 아이스크림, 음료수를 고르라고 하니 각자 원하는 대로 골랐었는데 그때 얘들이 저마다 하는 말 중 하나가 행복하다였다.

고작 아이스크림과 음료수에 행복하겠냐마는 그때 그 순간 그 아이들에게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지금 남동생에게 묻는다면 아이스크림이 무슨 행복이겠냐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런 날 있지 않은가.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만한 날.

마침 학교에서 시험이 끝난 시기였고 날씨도 좋았고 컨디션도 좋았을 뿐더러 집 가는 길에 만난 남동생과 친구들이 꼭 만화영화보는 것처럼 노는 게 예뻐보여서… 유난히 그 날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영국 시인이자 정치가 존 밀턴은 말했다.

"나는 행복을 찾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방법을 찾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라면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최선을 다해 추구할 수 있으며, 그것을 얻었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이해이자 깨달음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게 즐거움과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생활 방식 안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린다.

_ 탈 벤 샤하르, 전 하버드대학 교수



Ⅱ 나를 사랑하는 법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남과 다르다. 당신과 100퍼센트 똑같은 사람은 없다. 설령 외모와 신체는 똑같을지라도 지능지수와 사고는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원하는 방식대로 한 걸음씩 걸어가다 보면 당신 앞에 빛나는 길이 나올 것이다.


거울은 외면을 보는 용도이긴 하지만 내면도 관찰할 수 있을 뿐더러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을 기준 삼아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게 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거울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우수한 부분을 발견해야 한다.

또한 자아 반성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해야 한다.


성공학자 로빈은 우리가 하루를 마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어떤 발전이 있었는가?

내가 한 모든 일에 만족을 느끼는가?

이 질문들을 통해 자아 인식을 진행하게 되면 끊임없이 한계를 돌파하고 성공적인 인생의 목표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을 보낼 수 있다.




행복한 인생에도 고통은 존재한다.

특히 행복한 사람에게 즐거움은 일반적인 상태고 고통은 사소한 일이라고 한다.

감정 기복이 있을 순 있어도 가끔 벌어지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담담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고통을 피할 순 없지만 담담하게 마주한다면 상처받긴 해도 최소한 더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

즐거움이 삶의 일반적인 상태고 고통은 작은 에피소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모두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셈이다.

스무살이 되고 나니 10분, 1시간이 소중할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체감하며 지내왔다.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달리는 중인데 아직 찾지는 못했다.

잠시 쉬어가려 해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아마 행복을 찾기 위해 계속 달려도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중년, 노년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행복의 신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행복을 느끼고 싶어하는 삶의 순간순간을 누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이 문제를 푸는 데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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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고전 독서 -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노명우 지음 / 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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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고전을 읽다보면 단순히 교훈 뿐만 아니라 지식을 얻을 때도 있어서인지 완독 후 무언가를 얻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 분야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일리아스》, 《거대한 전환》, 《기나긴 혁명》, 《편견》, 《돈의 철학》 ……

학자의 기준으로 선별된 열 두 권의 고전이 담겨져 있는 『교양 고전 독서』는 저자의 완독 경험을 바탕으로 배경지식과 핵심 키워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새로운 독서법까지 얻을 수 있다.


저자, 노영우는 아주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이러다 잘될지도 모르는 연신내 골목길의 독립 서점인 ‘니은서점’을 열고 세상에 알려져야 마땅한 좋은 책을 소개하는 마스터 북텐더다.

세계적인 석학은 되지 못했지만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되고자 시민과 함께 공부하는 ‘생각학교’를 만들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언제나 닮고 싶은 학자이며 지그문트 바우만처럼 노인이 되어서도 글을 쓰고 싶기에 누군가 대표작을 물어보면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다음 책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에 대한, 그의 대답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에토스는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묻는 과정이 바로 에티카, 즉 윤리학이다.

그렇다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에티카의 세계를 탐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아웃사이더이자 여행하는 철학자였다.

그는 그리스 북부 지역인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는데, 굳이 구별하자면 그리스인이 아닌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이였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가 마케도니 왕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다 보니 그곳에서 성장하며 훗날 왕이 되는 필립포스와 친구로 지내게 된다.

17살이 되던 해, 플라톤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아에서 유학을 하기 위해 아테네로 떠나게 되는데 10년간은 학생으로, 10년간은 교사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후 플라톤이 세상을 떠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후계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후계자가 되지 못하였고 결국 20년 간 머물렀던 아카데미아를 떠나 레스보스섬으로 이주해 생물학을 연구하게 된다.

그 사이 필립포스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아달라 청한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립포스의 아들(훗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스승이 되었다가 가정교사 일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

이 때까지는 자연과학자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쉰 살이 되어 그는 아테네로 돌아가 뤼케이온이라는 자신만의 학교를 설립하게 되지만 반마케도니아 정서를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아테나 정치인들 때문에 매번 위험에 처해지자 에우보이아섬으로 피신해 머물다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테네에서는 시민 자격 없이 머무르는 사람을 메토이코스라 불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인이였기에 메토이코스였다.

국외자였던 유대인이 역설적으로 뛰어난 사상가가 많았던 것처럼 아테네의 많은 메토이코스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평탄하게 사는 삶이 복일지 몰라도 학자에게는 오히려 독으로 다가올지도 몰라 학문적으로도 hungry and angry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삼아 사상적 발전을 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업적이 된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그의 삶이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삶이었고 본인처럼 타인도 앎에 대한 욕망을 유지하길 기대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번 학문적 지식 뿐만 아니라 교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술수를 간파할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바로 파이데이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현대적 의미의 편집 없이 만들어진 책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요새는 편집자들이 원고 검토 후 의견을 첨부해 되돌려 보내지만 오래된 고전은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이렇다보니 중간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특히 저자가 강요하는 것은 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 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다 보면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즉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리고 모든 점에서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병들었을 경우에는 의사의 말을 따르고 장군을 선출할 경우에는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하는지. 마찬가지로, 만약 둘 다 할 수 없을 경우 신실한 사람을 돕기보다 친구를 도와야 하는지, 동료에게 선행을 베풀기보다 먼저 은인에게 선행을 갚아야 하는지, 이런 종류의 모든 문제들을 엄밀하게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사안의 크기, 경중이나 고귀함, 또 절실함에 있어서 수없이 많고 다양한 차이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_《니코마코스 윤리학》 中


임기응변이 아닌 성찰을 통해 선택해야 한다면, 성찰하는 시간이 곧 철학하는 시간이 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고 이러한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자신의 언어로 진술하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관점의 철학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철학 전문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전문용어로 떠들어봤자 보는 대상은 한정될 것이고 모두가 관심있게 보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전문용어가 즐비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장황하게 떠들었다고 생각해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학과 거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한 한계를 깨려고 했던 것이다.




학창 시절에 보름 정도 진행했던 짤막한 방학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고전 도서 읽기에 관한 특강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덕분에 고전 도서에 대한 망설임이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고 딱히 가리지 않고 읽다 보니 책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그 특강이 아니더라도 고전문학에 대해 두려움은 전혀 없었는데, 그 강의마저 듣고 나니 책을 읽기도 전에 생기는 막막함과 같은 걱정이 온 데 간 데 사라졌다.

희한했던 것이 당시 선생님도 고전문학을 읽을 때 어려운 부분은 대충 읽고 넘기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었다.

그 부분이 이야기의 흐름을 좌지우지하지도 않을 것이며 몇 문장 모른다고 해서 큰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책이란 한 번 읽고 끝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생각날 때 또 한 번 읽는 것이 좋다며,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읽었을 때는 이해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었다.


저자는 각각 유명한 고전을 예시 삼아 실용적인 조언을 던져준다.

예컨대 앞서 설명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렇다.

이를 읽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편집 과정이 없이 만들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은 우선 넘기라는 것이다.

그간 인문학을 많이 읽으면서 중복되지 않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짤막한 내용을 담았는데 마지막 부분인 《돈의 철학》도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고전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의 독서 방법으로는 버겁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약간의 조언만 있다면 고전 한 권 깨부수기는 절대 어렵지 않다.

대표적인 고전문학을 예시 삼아 어떤 독서방식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교양 고전 독서!

이번 달, 책 한 권 펼쳐 고전문학의 세계로 빠져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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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 답사 일지 - 배움을 찾아 떠난 국문학자의 여행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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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서울대에서 교양과목을 맡았던 저자가 수업을 위해 답사 다니고 여행하며 썼던 글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었다.

문학과 역사 그리고 여행의 만남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무엇보다 국문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이전에 분명 다녀왔던 곳이 모르던 곳인 것마냥 새롭게 느껴졌었다.

그래서인지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깊이감이 달라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여행을 향한 갈망


여행은 위대하다. 석가모니의 출가와 성불, 원효의 유학 여행 도중 각성, 연암 박지원의 연행과 북학의 깨달음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위대한 깨달음 중에 여행에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다.


한국인은 대대적으로 여행 DNA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전근대 조선 사람들도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가까운 중국도 사신단 신분으로 수도 베이징에만 갈 수 있었으며 바다에서 배가 난파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쇄국 상태였던 조선에서 지식인들이 가진 여행에 대한 갈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열하일기」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중국에 들어서자마자 울고 싶다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니깐.

박지원은 정식 사신은 아니었지만 팔촌 형인 박명원이 사신이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갔던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중국 문화에 빠진데다 선배 학자들의 중국여행기를 읽으며 언젠가 떠날 날만을 갈망했으니 울고 싶다고 표현한 부분이 새삼 이해가 간다.


조선시대처럼 폐쇄된 것도 아니지만 여행이 절실하지 않았던 저자는 1993년 신혼여행 때 첫 비행기를 타봤다고 한다.

문학연구자로서 해외 대학에서 선진 학문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한국까지 찾아와 학문적 교류를 청하는 벗을 만나게 된다.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있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가 서울대학교 연구생으로 오게 되어 저자의 박사 지도교수이신 이상택 선생님에게 한국고전소설을 함께 읽을 학생을 구해달라고 청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카투사 경력이 있는 저자에게 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하였는데 결국 그는 제안을 하게 된다.

매주 한 번씩 만나되 저자는 한국문학을 영어로 소개하고 임마누엘은 미국의 중국문학 연구 성과를 한국어로 말하자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있었다.

아, 질문이 사람을 빨리 성장시킬 수 있구나!

유대계 미국인인 임마누엘은 유대인의 전통적 질의토론식 학습법인 하브루타가 익숙해서 저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다.

한국 밖 대학을 한 군데도 가보지 못했던 저자였지만, 머릿속에서는 세계 유수의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미숙했지만 그 시절 멀리 찾아온 벗과 만나던 때가 그의 학문적 황금기였다고 덧붙였다.




Ⅱ 옛 서울 나들이


전세계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꼽으라면 지리적으로는 단연 '서울'이 으뜸일 것이다.

서울 성내로 들어오면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청계천이 가운데서 흐르고 있으며, 북한산, 도봉산 같은 명산을 옆에 끼고 한강이 흐르는 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때문이다.


조선시대 소설이 전공인 저자는 부전공을 서울로 여긴다고 한다.

나라의 중요한 일이 서울에서 벌어지며 인재 또한 서울로 모이니 문학 역시 서울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내세우던 인물도 서울에서 나고 자랐거나 주로 활동한 경우도 많다.

이렇듯 역사 또한 조선사는 결국 서울의 역사이지 지방사는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 서울은 행정적으로는 서울 성곽 안쪽과 성 바깥 10리까지를 가리킨다. 당시 서울 인구를 20~30만 명 정도로 추산하니, 도성 안쪽에는 20~30만 명 가까운 인구가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높지 않은 산이 있다. 북에는 북악, 동에는 낙산, 남에는 남산, 서에는 인왕산이다. 서울 성곽은 이 산들을 둘러가며 쌓았다. 각각의 방위마다 중심 성문이 있고 중심 성문 사이에 다시 작은 성문이 하나씩 있다. 그 문들 중 동대문이 가장 크며 남대문 또한 왕래가 많던 중요한 문이다. 서소문과 동소문은 서민의 상업 활동 등 일상생활에 많이 이용되었다.

서울 성내는 청계천에 의해 남북으로 구획되었으니 조선시대에도 일종의 강남과 강북이 존재했던 셈이다. 청계천 주변 종로와 그 이남은 평서민이 많이 사는 상업과 유흥의 거점이었고, 북쪽에는 궁궐과 관청을 출입하는 상층 양반이나 서리, 아전 등이 많이 살았다.


저자에게 북촌은 곧 궁궐 답사나 다름없다.

헌법 재판소 자리에는 고종 때 정승 박규수의 집이 있는데 할아버지인 연암 박지원의 집이기도 하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또한 북촌에 있는데 이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간다고 한다.

수락산 기슭 벽운동 계곡에 별장이 있다는 말은 불확실하며 오래 머문 흔적 또한 없다고 한다.

다만 저자가 친정집 위치를 추적하며 깨달은 것은 우리가 옛날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잘 옮겨다니지 않고 한평생 한곳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편견을.

남편인 사도세자가 폐세자된 후 뒤주에 갇히는 벌을 받자 아들 정조와 함께 궁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이때 궁궐과 멀지 않은 곳에 친정집이 위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경궁의 후손들은 서울 공예박물관 자리에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오빠 홍낙인이 남긴 「피음정기」에 따르면 이곳보다 약간 북쪽 언덕 부근에 자리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조선시대에서 양반이었다면 서울집, 시골집, 서울 근교의 별장을 가지고 있었어서 북촌 골목골목에 있는 한옥들을 보면 조선시대 최상층 양반의 일상이 묻어나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남쪽은 북쪽에 비해 상인이나 서민이 많이 거주해 있었다.

"남대문이 개구멍이요. 인정이 매방울이요. 선혜청이 오 푼이요. 호조가 서 푼이요. 하늘이 돈짝만하고 땅이 맴돈다." _춘향전

남촌 중에도 특히 광통교 주변은 상업 지역이자 문화 구역이었다.

광통교 가에는 그림 가게가 있어 다리에 걸린 그림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고 한다.

광통교 남쪽으로 가면 다동을 다방골이라 불렀는데 그곳에는 기생집이 많았다.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논 기생과 취객이 다음날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하니, 이를 다방골 잠이라고도 불렀다.

갤러리, 술집, 상점이 많은 곳, 즉, 돈과 술 그리고 유흥이 어우러진 곳이 남촌이었다.




초등학교 때, 영어만큼 좋아했던 책이 바로 사회과부도였다.

지도 보는 것이 좋아 여기저기 가보고 싶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고 깨알같이 써져있는 글들까지 읽으며 뒷부분에 나오는 나라, 수도까지 다 외우곤 했었다.

저자는 세계 지리부도를 보며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하던데 나 또한 책상 위에 놓인 미니 지구본을 떼굴떼굴 굴려가며 여행하는 꿈을 꾸곤 했다.


작년에는 못했지만 못해도 매해 두어 번은 궁 나들이를 다녀온다.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경희궁을 살펴보다 마음 가는 대로 북촌이나 서촌 혹은 인사동, 명동까지 다녀오곤 한다.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여유와 힐링을 느끼고자 다녀오는 것인데, 책을 읽고 나니 주제를 정해놓고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갔던 그곳이 곧 문학과 역사였으며 나들이가 곧 배움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아도 걷는 게 참 좋다.

날씨만 허락한다면 저녁 산책은 빼먹지 않을 정도니깐.

근래 다쳐서 오래 못 걷다보니 마당 산책만이 숨통을 틔여주고 있는데 올 가을에는 꼭 다녀와야겠다.

올해 강원도만 전부였던 내게 남원부터 군산, 안동, 광양 그리고 서울 곳곳을 살피며 떠난 인문학적 여행은 꽤나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었다.

이러니 내가 책을 끊지 못한다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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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서로마 제국이 ‘시시껄렁하게’사라지는 순간 - 프로와 아마의 차이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최봉수 지음 / 가디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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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나, 책과 마주하다』


로마제국이 천 년 이상 서양 고대사를 독점했지만 오도아케르가 누구인지, 로마는 어떻게 망했는지, 그 과정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어떤 인물들이 등장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된 책이 없어서 항상 궁금했었다.

그 궁금증을 해결해 줄 책이 나타났으니, 바로 『천년왕국 서로마 제국이 ‘시시껄렁하게’사라지는 순간』이다.

참고로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시리즈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을, 그 사람의 일생이 아닌 역사에 등장했던 순간 그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


저자, 최봉수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김영사 편집장, 중앙M&B 전략기획실장, 랜덤하우스중앙 COO를 거쳐 웅진씽크빅,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프린스턴리뷰 아시아 총괄대표를 지낸 후 현재는 기업, 단체의 자문과 집필을 하고 있다.




Ⅰ 훈족의 영웅, 아틸라


혹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를 본 적이 있는가?

자연사 박물관 야간 경비원을 맡게 된 래리는 첫 날 밤 밀랍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는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된다.

그 중 한 무리들이 래리를 향해 달려가는데 그들이 바로 훈족이며 그 중 대장이 바로 아틸라다.


흉노족이 무제의 정벌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목 생활을 하다 헝가리를 통해 유럽 대륙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유럽인들은 이들을 훈족이라 불렀다.

북쪽에서 남하하던 '야만스러운' 게르만족은 '문명스러운' 로마와 국경에서 잦은 충돌을 하면서 순화되고 또 일부 편입되고 있었는데 '더 야만스러운' 훈족이 동에서 서로 게르만족을 압박하며 들어온 것이었다.

로마국경에서 자리를 펴던 게르만족은 뒤에서,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훈족에게 떠밀려 다시 대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유럽 대륙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훈족은 영웅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친형을 암살하고 훈족 11대 왕에 오르게 된 아틸라다.

이전 훈족 왕과는 달리 헝가리 일대에 흩어져 살며 고트족을 압박하고 동로마를 위협하며 금을 뜯는 데 그치지 않고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과 로마로 직접 쳐들어가기에 이르렀다.

훈족 왕으로서 서유럽 정복 활동을 펼친 것이 8년에 불과하니 서양인들에게 훈족의 아틸라는 '잔인한 파괴자'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어린 나이에 집권을 하게 된다.

7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아들이 걱정되었던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앙숙 페르시아 황제에게 아들의 후견인을 부탁하게 된다.

위험하고도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이는 제대로 수용되었고 실제 재임 기간 동안 페르시아 황제는 동로마 침공을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 환관 크리사피우스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페르시아 황제와 맺었던 커넥션도 깨지고 서로마를 지원해주겠다고 부대를 파견했다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 때, 아틸라의 형 블레다가 이끌었던 훈족이 치고 들어와 많은 공납금을 요구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섭정에 익숙했던 황제는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훈족의 공납금 요구 또한 감당하기 힘들다보니 크리사피우스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선택의 순간에 항상 해오던 방식대로, 자신에게 익숙한 패턴으로 사고하여 결론을 얻는다. 새로운 도전에 맞부딪쳤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심지어 자신의 판단히 현실에서 엇박자를 낼 때도 곧, 다시 익숙한 패턴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현실을 왜곡하여 해석한다.


이렇게 생각했던 크리사피우스였지만, 아틸라는 달랐다.

아틸라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를 떠나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거쳐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된다.

이 때, 내부 단속을 외부 전쟁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다가온 아틸라는 섣불리 나서지 않고 성벽을 앞에 둔 채 인근 도시들을 휩쓸어 나갔다.

성벽에 갇혔던 황제와 신하들은 가타부타 할 새도 없이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치욕적인 조약을 맺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맺을 수 있었다.

유럽 전역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민족에 의해 로마제국이 무너질 수 있음을 직면했으며 단순히 황금만 뜯는 것이 아닌 제국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백척간두 진일보, 백 척이나 되는 긴 장대 위에 서서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더 내딛기는 쉽지 않다. 백 척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상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허공을 향해 한 발 내디딘다.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시공간이 바뀌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지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한 발 더 내딛지 않으면 끝내 모를 차원이다.




Ⅱ 비겁한 시간의 권력자, 오도아케르


천년 제국 서로마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순간을 마주할 때이다.

게르만족 출신의 서로마 장군인 리키메르는 아리우스파라는 이유로 황제에 오를 수 없자 실권을 장악해 무려 17년 동안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워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다.

그가 폐위시킨 황제만 해도 4명이다.

아비투스는 루비콘강을 건너 황제에 올랐지만 리키메르 반란군과 전투에 패하여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리키메르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마요리아누스는 반달족 정복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길에 리키메르의 기습을 받아 살해당하게 된다.

세베루스도 리키메르의 의해 독살당했고 안테미우스는 새 황제를 옹립한 리키메르의 공격을 받아 거지로 분장해 성당에 숨어들어갔지만 결국 참수당하고 만다.

각 황제들의 재임기간은 이렇다. 아비투스는 1년 3개월, 마요리아누스는 4년 4개월, 세베루스는 3년 9개월 그리고 안테미우스는 5년 3개월.

황제도 아닌 실권자에 의해 네 명의 황제가 살해당하고 폐위당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즉, 그는 제국의 위엄과 황제의 권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권력만이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후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참수한 지 40일 만에 급사했다고 하는데 자연사한 것인지 독살당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리키메르가 죽고난 뒤, 권력을 잡은 이는 오레스테스였다.

오레스테스는 아틸라에게 자신의 딸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던 인물로, 로마 약탈자의 장인이자 심복이었다.

리키메르가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했다면 오레스테스는 잔머리 하나로만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셈이다.

황제의 자리는 아니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어린 아들을 황제로 대신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서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다.

그러나 권력을 쥐었어도 내리막길 걷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오레스테스가 잔머리를 굴렸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쿠데타가 일어났고 오레스테스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한다.

당시 게르만족 용병 국경 수비대 지휘관들이 추대했던 인물이 바로 오도아케르 장군이었다.

무혈 입성에 성공한 오도아케르 장군이었지만 로마인이 아니었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순 없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살해하고 다른 이를 올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로물루스가 스스로 퇴위하도록 조건을 제시했고 어린 로물루스는 스스로 황제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 황제에 오르지도 못한다면 황제를 새로 옹립해야 하는데, 오도아케르는 이를 공석으로 만들어버렸다.

즉, 서로마 제국에 황제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때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황제인 제노에게 자신의 실권 승인을 요청하게 되고 제노는 그에게 총독에 해당하는 호칭을 하사하며 이탈리아 국왕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적당한 지위였다.

결과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사라졌으니 서로마 제국의 문패 또한 사라진 셈이 되어버렸다.

당시 오도아케르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은 이렇게 멸망했다. 야만족이라도 쳐들어와서 치열한 공방전이라도 벌인 끝에 장렬하게 무너진 게 아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도 없고, 처절한 아비규환도 없고, 그래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_시오노 나나미



앞서 책을 읽기 전, 세계사 공부했던 기억을 되살려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 생각해 보니 〈… 로물루스가 폐위되자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가 떠올랐었다.

떠올렸던 게 딱 그뿐이었는데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충분했다.

역사적인 흐름이 아닌 인물을 중점적으로 두며 내용이 전개되다 보니 당시 사정을 세세하게 알 수 있어 더 깊게 몰입하며 읽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인문학 책임에도 불구하고 100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만들어진 미니북 형식으로 되어있어 내용이 길지 않다.


길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우리가 역사책을 읽다 보면 선택에 따라 미래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데, 이러한 선택을 했던 인물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결국은 과한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물욕이든, 권력욕이든 적당한 욕심은 나 자신을 이끌어주는 동기부여의 역할도 하지만 선을 넘어버리게 되면 상황 판단이 흐려져 결국 나 자신도 잃어버리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한나라도, 서로마 제국도 몇몇 인물들의 과학 욕심으로 인한 선택 때문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나라의 운명이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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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의 몰락, 그 이후 숨기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 - 권력자와 지식인의 관계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최봉수 지음 / 가디언 / 202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 책과 마주하다』


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중국에는 한(漢)이 있다!

로마제국과 함께 읽어보기 위해 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서로마와 마찬가지로 한도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시리즈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을, 그 사람의 일생이 아닌 역사에 등장했던 순간 그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


저자, 최봉수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김영사 편집장, 중앙M&B 전략기획실장, 랜덤하우스중앙 COO를 거쳐 웅진씽크빅,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프린스턴리뷰 아시아 총괄대표를 지낸 후 현재는 기업, 단체의 자문과 집필을 하고 있다.




망탁조의, 왕망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문명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꽃을 피운 역사의 뿌리가 바로 한나라이다.

전한, 후한 합쳐 500년 동안 이어지는 한은 초한지로 건국하여 삼국지에서 망한다.


망탁조의,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녹을 먹다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했던 역적들을 묶어 일컫는 말이다.

왕망은 망탁조의의 첫 인물이다.

동탁은 후한 소제를 시해하고 폐위시켰지만 황제자리에 오르진 못하고 살해당했다.

조조와 사마의는 직접 황제를 폐위하지도, 스스로 황제 자리에도 오르진 않았으나 아들 조비와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었다.

그러나 왕망이 전한 평제를 독살하고 유영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다음 선양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새 왕조까지 열게 된다.

그래서 망탁조의의 첫 인물이라 했던 것이다.


왕망의 역사적 평가는 두 시기에 집중된다.

첫번째 시기는 마흔다섯 살에 두번쨔로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사마에 올라 실권을 장악한 후 전한의 막을 내릴 때까지이다.

평제가 아홉 살에 즉위하자 태황태후 추천으로 왕망이 두번째로 대사마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참고로 태황태후는 평제의 할머니이자 왕망의 고모였다.

두번째 시기는 새 왕조를 세우고 황제에 오른 시기이다.

왕망은 국상에 오르자마자 태후의 정사 개입을 차단하고 평제의 외가를 멸족시켜 버린 뒤 장녀를 효평황후에 올려 황실을 정리한다.

그렇게 그는 대사마 국상이자 황제의 장인인 국구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허나 그는 자리에 만족하지도 못했고 자신이 한 일들 때문에 매번 전전긍긍하였다.

결국 그는 사위인 평제마저 독살시킨 뒤 외손자 유영을 황제에 올려 섭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이것 또한 만족하지 못한 그는 선양의 형식을 빌려 제위를 찬탈하고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

황제를 독살하고,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망탁조의의 끝판왕이 된 것이다.

그의 개혁 슬로건은 탁고개제였다.

(탁고개제란 옛것을 본받아 당대 제도를 개혁한다는 의미이다.)

주나라의 정전법을 모방해 전국 토지를 왕전으로 바꾸고 개인 토지 매매를 금하여 영농의 빈민화를 막고자 하였고 빈농들에게도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주고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지만 지배계급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개혁 자체가 너무 이상적이고 전한 말의 사회모순이 누적되어 개혁은 실패를 맞고 만다.


조조와 사마의는 창업 군주라도 재평가되었지만, 왕망은 실패한 개혁가이자 건너뛰어도 무방한 폭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는 의도가 정당하다고 과정과 결과를 가벼이 볼 순 없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동기와 시도까지 묶어 매도하면 안 된다고 의견을 내비친다.

왕망은 젊은 시절부터 개혁에 대한 욕구가 지대했다고 한다.

지배계급의 이중성에 대해 깨닫고나니 지금의 체제를 바꾸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유교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단순히 학문으로서가 아닌 사회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대사마에 오르자 개혁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조정의 극심한 반대와 사회의 모순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기득권 세력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과 함께 자신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스스로 확신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두번째 대사마에 올라서도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했으나 나아갈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역사에 기록될 만도 하지만 개혁을 위해 패륜을 저질렀던 왕망이었기에, 역사는 그의 패륜만을 기록하게 된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자들은 근본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기에 이르른다.

그 강요가 공격성을 띠게 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덕성은 결국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목표가 추구하는 가치와 수단에서의 도덕을 분리하여 가치에 우선을 둔다.

사실 왕망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몇몇 인물들이 이러한 절차를 밟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왕망은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고 마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멸망의 길


한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후한은 장각의 황건적 난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는데 언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 통일왕조 없이 400년 동안 혼돈의 시기가 이어지는 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후한 멸망 과정의 중요 사건들은 아래와 같다.

1.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무력한 조정을 대신하여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지방 군벌이 세력화되고, 중앙 조정은 십상시의 수중에 떨어진다.

2. 십상시의 난을 진압하러 낙양으로 밀고 들어온 군벌 중동탁이 정권을 장악한다. 그는 소제를 시해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왕망에 이어 망탁조의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후한은 이때부터 명목상의 수명만 이어간다.

3. 조조가 동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후 헌제를 내세워 지방 군벌을 토벌하는데, 이에 대항하여 촉의 유비, 오의손권이 나서며 삼국시대가 열린다.

4. 조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조비는 명목상 연명하던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을 빌려 제위를 뺏는다. 이로써 후한이 멸망하고, 그 뒤를 위가 잇는다. 220년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세워져 서기 220년에 멸망하여, 426년 동안 존속한 중국 역사상 최장수 국가로 평가된다.

5. 유비가 세운 촉을 촉한으로, 한나라의 정통 계보로 인정하여 전한, 후한에 이어 촉한까지를 하나의 왕조로 본다면 수명은 좀 더 연장된다. 유비는 후한이 망한 다음 해에 한 황실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촉한을 세우나, 유비의 아들 유선에 이르러 위나라의 침공을 받아 263년에 멸망한다. 이를 포함한다면 한의 수명은 470년으로 늘어난다.

후한이 멸망한 후 수가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의 기간을 약 400년으로 추정하는데, 이 시기를 위진 남북조시대라고도 부르며 크게 삼국시대, 서진시대,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로 나눈다.


중국에서 위진 남북조시대는 흑역사나 다름없어 최근까지도 역사 시간에서 건너뛰었을 정도라고 하는데 서양사에서도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분열의 시기를 맞았을 때 재통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한나라와 관련된 책리뷰에 이어 서로마 제국에 대한 책리뷰를 곧장 올릴 예정인데, 두 나라가 비슷한 점이 많다.

이를 비교한 내용은 다음 서로마 제국 때 다룰 예정이다.




좋아하는 과목을 질문받으면 단연 국어와 영어가 으뜸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재미를 흠뻑 느끼게 된 과목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사였다.

수업해주시는 선생님이 마치 책을 읽어주시는 것만 같아 수업시간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내신때문에 점수 따기 목적이 크다보니 흥미를 두었던 일부 유럽사만 지금까지 기억할 뿐 그 외에 역사적 사건들은 기억 속에 묻힌 지 오래이다.

스무살이 되고서도 대한민국과 유럽사만 흥미를 느껴 관련 역사책은 간간히 챙겨보긴 했으나 중국 역사는 관심이 없어 한시와 동양고전에 나온 배경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작년 책결산을 하면서 언급했었지만 삼국지를 아직 읽지 못해 숙제처럼 쥐고 있는데 『한(漢)의 몰락, 그 이후 숨기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을 읽고나니 삼국지를 펼쳐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죽림칠현이란 말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죽림칠현이란 위/진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 권력에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세월을 보낸 산도, 완적, 유영, 혜강, 향수, 완함, 양융, 즉, 일곱 명의 선비를 일컫는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던 산도는 어렵게 살았지만 노장사상을 좋아해 완전, 혜강과 교유했다고 알려졌다.

마흔이 되었을 때 관직에 나갔으나 조상이 권력을 잡자 낙향했었다.

이후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조정으로 나갔고 고위관직을 두루 거치다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은거하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과연 죽림칠현과 어울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역시나 산도보다 열여덟 살 아래였던 혜강이 죽림칠현의 실질적 영수였다고 한다.

수려한 용모와 총명함을 지녔던 혜강은 일찍이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는 조조의 외손녀와 결혼하여 중산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지나 뜻이 없어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동무 향수와 함께 술과 시, 거문고를 즐겼다고 하니 죽림칠현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수가 없다.

이후 종회의 모략으로 죽음에 몰리게 되는데 태학당 3천 여명의 학생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함께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했단다.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문고를 뜯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정말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싶다.

혜강의 죽음 이후 사실상 죽림칠현은 해체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뒤를 이은 자도 없었으니.

죽림칠현은 스스로 속딤을 멸시하고 속됨을 깨뜨리고 속됨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으나 속됨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다시 속됨과 어울리는 현실을 맞게 된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지 않는가.

저자는 이런 말을 남긴다.

고고한 자들은 높은 봉과 같아 홀로 떨어져 있어도 우뚝 솟아 있는데 그런 무리들은 개천의 자갈 같아 무리 지어 흘러가는 물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목소리 높이며 얼굴마당에 출몰하지만 다 애기 주먹보다 잘고 꼬락서니도 닳고 닳아 누가 누군지 분간조차 안 된다고.


역사적인 흐름이 아닌 인물을 중점적으로 두며 내용이 전개되다 보니 읽는 재미도 흥미로울 뿐더러 앞서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느끼는 바가 매우 컸다.

죽림칠현을 잠깐 언급한 것도 다 이런 이유였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읽다보니 삼국지도 올해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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