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
강경석 외 지음, 이기훈 기획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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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과 촛불,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

 

 

 

 

 

『하나, 책과 마주하다』

 

올해는 꼭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주년이였던만큼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애도하고 감사함을 표했다.

3.1운동이라고 하면 "대한독립만세"가 자연스레 떠오를텐데 대부분 전·후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3.1운동은 독립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대항한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서 민족적 항일운동 뿐만 아니라 공화정을 추구한 민주주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전부터 3.1운동에 대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대개 우리는 3.1운동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3.1혁명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운동과 혁명은 뜻하고 있는 바가 하늘과 땅 차이다.

식민지배를 받았던 조선인들이 오롯이 '대한독립'을 목표로 만세시위를 벌인 것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목표에 달성했다면 혹은 달성하지 않았더라도 역사적으로 대전환이 일어났기에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또 일각에서는 정치적 변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혁명이란 용어를 쓰기에는 한계가 있어 '운동'이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국민 모두가 유심히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3.1운동이 일어나던 시점에 태극기를 만들고 배포하는 일이 쉽지 않아 '태극기의 물결'은 자주 등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밤새 만든 깃발이 고작 100여 개의 불과했고 실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마구 뿌려질 정도로 양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는 그만큼 귀하고 귀했다.

2월 10일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 마지막 날, 3월 1일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포하여 만세시위를 벌이자는 지침이 전달되었다.

학생과 신도들이 모여 태극기를 만드는 일까지 진행되었으나 정작 선언서가 돡하지 않아 2월 28일 의주양실학교에 20여명의 주동자들이 모여 시위에 대한 준비사항을 점검하던 중 선언서 문제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 다른 곳에서 발표된 선언서를 내놓게 되었고 그 선언서가 바로 「2.8 독립선언서」였다. 실제 오후까지 선언서가 도착하지 못하자 미리 준비한 「2.8 독립선언서」 등사본을 배포하였다. (이후 200장의 선언서가 도착하였다.)

이후 독립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는 인식이 확산되자 「독립선언서」의 중요성이 점차 감소하게 된다.

당시 국민 모두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들고 일어난 운동이지만 3.1운동은 여성들의 활동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학창 시절 근현대사를 배울 당시 기생들에 관한 내용은 배운 적이 없었다. 이후 대학생이 되어 역사책을 이것저것 보던 와중에 기생들 또한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몇 줄을 볼 수 있었다. 3.1운동은 유관순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열사들의 순국 또한 기억해야 한다.

최은희는 애국부인회사건을 3.1운동의 일부로 파악하고 만세운동의 연속선상에서 『근역의 방향』을 집필했다. 『근역의 방향』 첫 면에는 "삼일 동지 중 대구 감옥생활 삼년간 같이한 친구들"이라는 제목과 함께 김마리아, 김영순, 백신영, 신의경, 이정숙, 이혜경, 유인경, 장선희, 황애덕 아홉 사람의 사진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3.1운동과 촛불혁명은 꽤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혁명 이후 사회에서 억압받았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굉장히 큰 사건이다. 우리의 역사이기에 자세히 알아야하며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더 나아가 남과 북이 함께 겪었던 일인만큼 3.1운동을 발판 삼아 단단하고 강한 한반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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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년 :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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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뜨거운 함성이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그 날, 벌써 100주년이 되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국민 모두가 그 날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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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3 : 세종·문종·단종 - 백성을 사랑한 사대부의 임금 조선왕조실록 3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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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을 사랑한 사대부의 임금, 『조선왕조실록 3』

 

 

 

 

 

『하나, 책과 마주하다』

어렸을 때 존경하는 인물란이 있으면 항상 '세종대왕'이라고 기입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위인전 전집을 사주셔서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50여 권이 넘는 위인전 읽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 중 세종대왕, 신사임당, 장영실은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조선의 역사는 깊어 지난 왕들의 이야기와 업적을 하나하나씩 보려면 그 양이 정말 방대하다.

어린 시절 읽은 위인전과 학창시절 배운 국사가 전부라 조선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어서 집어들게 된 책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의 주요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흥미로워 지루하지 않다.

1권부터 차례대로 읽는 게 맞지만 세종의 이야기부터 듣고싶어서 3권부터 읽게되었다.

한 권으로 읽었던 위인전은 아무래도 내용이 한정적이였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니 세종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세종은 태자가 아니였는데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실제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그의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는데 영의정, 좌의정이 반대하고 열다섯 명의 신하가 어진 이를 골라야 한다며 간청했다고 한다. 원경왕후는 신하들의 의견에 반해 양녕대군의 아들을 후사로 삼자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결국 어진 이를 고르는 쪽을 택했다.

바로 셋째인 충녕대군, 세종을 택한 것이다. 둘째 효령대군도 있었지만 충녕을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독서를 즐겨하는 충녕이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충녕은 알아주는 책벌레였다고 한다. 몸이 아파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해서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에도 밤새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두려워 늘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내 큰 책(冊)은 모두 청해서 가져갔다.(<<태종실록>> 18년 6월 3일)

 

왕의 자리에 앉은 세종은 실제 모든 것들이 다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세종이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태종의 눈치를 보며 태종의 비위를 맞췄다는 것은 세종의 부인인 심씨 일가를 몰락시킨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태종은 며느리인 심씨는 자리를 보존해줬지만 그녀의 집안을 몰락시킨 것만 봐도 당시 세종이 왕의 자리에 있었다해도 군사권은 태종에게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태종이 총대를 메고 무리들을 애초에 척결했기에 세종이 정치를 펴내는데 수월했다고 한다.

 

나는 단순히 세종대왕하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큰 임금으로만 기억했었는데 학창시절 그가 개정한 법을 보며 약간 갸우뚱하긴 했다.

그래서 책에서도 세종을 '모순의 임금'으로 칭하며, 세종의 시대를 '모순의 시대'라고 지칭한다.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그 마음은 진실하여 세종대왕은 백성들도 읽고 쓸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였고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대부를 우선시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태종이 개정했던 노비종부법을 종모법으로 환원하고 그 외에도 악법을 만들어 조선사회를 후퇴시키는데 일조했다.

역사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 학생의 신분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과거사는 매우 중요하다.

이전 정부에서 국정교과서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정말 답답하고 짜증나기 그지없었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밑도 끝도 없이 나올 것 같아 중략한다.)

왜곡되지 않고 사실만을 다룬 역사를 배워 과거 우리 선조들의 삶을 살펴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본받아야 할 지혜로움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것 또한 삶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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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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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야 할 우리나라의 산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 순례』

 

 

 

 

   

 

『하나, 책과 마주하다』

 

며칠 전 브라질 국립박물관에 큰 화재가 일어나 문화적가치가 귀한 주요 유물들이 다 소실되고 말았다.

역사, 과학, 문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일순간에 사라짐으로써 결국 시민들이 분노하여 반정부 시위까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또한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아하는 책 분야를 꼽으라하면 인문서지만 인문서못지않게 가장 사랑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역사 분야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누구나 한번쯤은 이 책을 읽지않았어도 제목은 한번쯤 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책이다.

이번에 내가 읽은 책은 산사순례편으로 전국에 있는 모든 산사를 다룬 내용으로 이번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사건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인 '산사'는 더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산불화재는 건조해지는 가을에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산 속에 있는 절을 뜻하는 산사는 이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 아니다. 전세계인의 문화유산이다.

바로 지난 6월 우리나라 산사 7곳(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등재되면서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우리에게 권고사항을 보냈다고한다.

1. '문화유산이 아닌 요소'에 대한 공간 계획, 신규 건설 및 리노베이션 지침 마련, 승인 절차 명확화, 문화재 관리 계획 수립

2. 사찰 내 적절한 분위기 유지를 위해 (성수기) 방문객 압력을 낮추기 위한 조치

3. 문화유산의 OUV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내 신규 사업에 대해 세계유산센터와의 협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문화유산이 갖고있는 진정성을 훼손시키지 말고 보존하라는 뜻 아니겠는가.

 

책을 통해 전국의 산사를 여행하였는데 그 중 순천에 있는 선암사는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선암사는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내가 답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도록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다녀온 남도답사의 필수처다.

그러나 선암사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딱 집어 말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저자 또한 미술사적 유적으로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는 산사라고 표현하였다.

저자가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이 끝나고 외국인 커미셔너 넷을 데리고 선암사로 여행을 했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캐서린이 저게 뭐냐고 묻길래 저자는 누런 풀인 벼라고 대답해줬다고 한다. 벼라는 말을 듣고선 캐서린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켜 벼가 익어가는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논이다."

나도 외할머니가 계시는 강원도 철원에 놀러갈 때면 하염없이 창문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하염없이 달리다보면 부대가 보이고 끝없이 펼쳐진 논과 소들을 키우는 큰 외양간들이 보인다.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2-3시간이면 금방 갈 수 있다. 예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근래 들어 도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도로까지는 괜찮았는데 건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은 이상했다.

 

나는 매년 할머니집에 갈 때면 할머니집과 마을 그리고 집 앞에 있는 하천부터 산까지 항상 사진을 많이 찍곤 하는데 매년 바뀌는 모습이 낯설긴하다.

1년이면 모든 게 바뀌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옛것의 아름다움은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

산과 계곡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산사, 우리나라 역사의 귀중한 유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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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9-08 1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선암사 꼭 가보고 싶네요.
조정래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해서요~

하나의책장 2018-09-08 21:11   좋아요 1 | URL
아! 정말요? 조정래선생님이 태어난 곳이였군요ㅎ 북프리쿠키님덕에 알게되었네요^^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
로베르트 융크 지음, 이충호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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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과학자들이 말해주는 원자과학의 역사에 대해,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하나, 책과 마주하다』

 

미국 뉴멕시코주의 한 사막에서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다.

새벽 5시가 넘는 경 폭탄이 폭발하였고 하늘이 순식간에 환하게 비춰질 정도였다.

하늘로 치솟는 순간 멀리 떨어져서 이를 보던 학자들과 군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오펜하이머가 그 순간 힌두교 경전의 한 구절을 말했다고 한다.

"천 개의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 같으리라."

그렇게 로버트 융크는 원자폭탄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쓰면서 오펜하이머가 읊었던 "천 개의 태양"이란 문구를 인용해 책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이 책은 원자과학자들의 겪었던 일들을 풀어내며 원자과학의 황금기부터 7인의 과학자가 원자폭탄을 막기 위해 탄원서를 쓰는 내용이 담겨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9년 6월 파리 외곽 지역에서는 4년에 걸친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있었다.

그 때 원자연구로 명성이 자자했던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성공했음을 알린다, 질소 원자에 알파 입자를 충돌시켜 질소를 산소와 수소로 변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 연금술사들이 '물질 변환'의 비결을 찾기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시대막론하고 특정영역에 관심이 생기면 너도 나도 그 영역에 뛰어들기 마련인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원자물리학이 바로 그랬다.

철학적 재능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부터 정치적 감각은 있지만 현실 정치에 거부감을 느낀 젊은이들이 다 여기에 뛰어들었다.

원자 연구 분야는 새롭고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 다른 분야보다 유독 이 분야에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사제지간의 관계가 긴밀했다고 한다.

과학자들의 호기심으로 끈임없이 연구되었지만 결국은 힘을 갖기 위해, 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원자폭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945년 무렵 미국 공군은 일본 도시 4곳을 폭격하지 않고 남겨두기로 결정하는데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미국 유타주의 한 비행장에서는 파일럿들이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사용을 막기 위해 탄원서까지 쓰지만 원자폭탄은 결국 사용되고 만다.

저자인 로베르트 융크는 천 개의 태양보다도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원자폭탄이란 존재에 대해 분석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1945년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다.

상공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이로 인해 발생한 구름이 상공 18km까지 치솟고 폭발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6km 이내에 있는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부분적으로 손실된 건물은 둘째치고 거의 모든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초기 폭발로만 7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폭탄으로 인해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이들이 목숨을 잃고 다쳤지만 무엇보다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그 후 더 많은 이들이 사망하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렸던 로버트 율리어스 오펜하이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시킨 이후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오펜하이머를 다시는 데려오지 말라고 했단다. 결과적으로 폭탄을 만든 이는 오펜하이머고 자신은 그 폭탄을 발사시킨 사람이라는 것을 덧붙이며 말이다.

물리학자들이 원자를 연구하기 시작한 이야기부터 원폭이 만들어진 과정까지에 대해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원자물리학자들의 인터뷰를 담아서 써낸 내용이라 그들의 주관적인 견해가 한껏 곁들여진 내용임을 알아야한다.
지금도 핵무기 보유국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다. 당연히 핵무기는 없어져야하며 이를 인류 살생에 쓰면 안 된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그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자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우리의 소원은 세계평화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때면 '에이, 그게 뭐야.'라는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 어쩌면 말은 쉽지만 절대 풀리지않는 숙제일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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