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공부 - 느끼고 깨닫고 경험하며 얻어낸 진한 삶의 가치들
양순자 지음, 박용인 그림 / 가디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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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저자가 오랜 기간 동안 서울 구치소에서 교화위원으로 사형수들을 상담해 주었다.

그런 그녀가 암을 통해 죽음과 마주하게 되면서 지난 시절 동안 느꼈던 삶의 가치와 삶의 자세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자신을 진정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며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저자, 양순자는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으로 30년간 사형수들을 상담해왔다. 영암군청 사회복지과 상담실장으로 일했으며, 법무부 교정대상(박애상), 국무총리 인권옹호상, 법무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안양교도소 정신교육 강사 군부대 강사 활동을 하면서 양순자심리상담소를 운영했다.

‘남을 돕는 일에는 계산하지 말고, 누군가 넘어지면 빨리 일으켜줘야 한다’가 신조인 그녀는 누군가가 SOS를 치면 언제든 달려가는 열혈 상담가였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탔을 때 그녀 옆자리에 앉기만 해도 그녀의 긍정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만다. 그래서 그녀를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사는 게 우울하거나 위로받고 싶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떠올 린다. 그녀는 2010년 대장암 판정을 받았지만 두 번의 수술 후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행복할 때도 슬플 때도 암세포와 함께한다는 생각으로 살다가 2014년 7월, 향년 73세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Ⅰ 어른으로 살아보기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이,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한참은 힘들 겁니다."

의사가 조심스레 저자에게 말을 꺼냈다.

피할 수 없는, 준비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말이었다.

저자는 이미 암을 받아들인 상태였기에 수술을 하지 않고 안에 있는 암과 함께 가겠다고, 그렇게 담담하게 의사에게 말했다.

30여 년 동안 집행장으로 향하는 사형수들을 본 저자는 그들을 이렇게 기억했다.

죽을 때조차도 마음 편히 가지 못하고 말이 많았다고.

지금은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아 나 또한 알지 못했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사형수들은 집행날을 알지 못해 갑자기 문을 열고 여러 사람이 들이닥치면 그 때 짐작했다고 한다.

담담하게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물을 쏟고 일어서지 못하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말한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열심히 산 사람은 죽음에 의연할 뿐만 아니라 이별도 잘한다고.

뒤돌아보고 멈칫거리는 것은 결국 최선을 다하지 못해 미련이 남아서라고.

저자인 양순자 선생님은 암과 함께 사셨고 2014년 7월 세상과 작별하셨다고 한다.

선생님의 말대로 하루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산다면 분명 이별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별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불량품이라고 하셨으니깐.


30여 년 전,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했던 서대문 형무소.

봉사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종교단체를 통해서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구치소에 종교위원을 두는 이유는 교도소 직원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일, 사형수와의 상담때문이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나면 정신적으로 급격히 불안해져 사형수 대부분이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렇다보니 사고를 치기도 하고 자해를 하기도 하니 직원들이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위원은 정해진 날에 찾아가 사형수를 면담하며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런 시간이 2년에서 3년정도라고 한다.

그 중 저자의 마음에 걸렸던 사형수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형수 한씨는 딸만 일곱으로 형편이 워낙 어렵다보니 딸들을 식모로 보내 생활을 근근히 해나가던 농부였다.

당시 50만원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던 중, 잠실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딸에게 찾아가 그 집 주인에게 50만원만 빌려달라고 간청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큰 돈을 덥석 빌려줄 일은 없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화장대에 놓인 보석 하나가 한씨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홀린듯이 보석을 집어들고 가려는 순간, 이를 본 주인과 실랑이가 일어나자 한씨는 도망치듯 그 집에서 빠져나왔다고 한다.

단순 강도인데, 그렇다면 한씨는 왜 사형수가 된 것일까?

실랑이를 벌이고 난 뒤, 주인이 넘어지면서 장롱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만 것이었다.

한씨는 신문을 통해 사망소식을 접하고선 자수를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고 경찰서로 향하기 전 사찰로 먼저 가 기도를 하던 중에 죽은 주인의 시어머니를 절 앞에서 만나게 된다.

한씨는 그 시어머니에게 자수하러 간다고 말을 꺼냈고 그렇게 주인의 시어머니와 함께 경찰서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죽은 주인의 시어머니가 법정에서 뜬금없이 자신이 잡아왔다고 증언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변호해 줄 변호사도 없는 한씨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증거와 증인만이 법정에서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었으니 50대 젊은 남자가 늙은 할머니에게 붙잡혀 왔겠냐는 호소도 법정에서 먹히질 않았다.

저자는 끊임없이 궁금했다고 한다.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던 노인은 왜 끝까지 내가 잡아 왔다고 거짓 증언을 했던 것일까? 무슨 이유였을까?

가난 때문에 딸 일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사람.

빚 50만 원에 끝없이 몸부림치다 마지막에 강도로 돌변해버린 사람.

살인을 하진 않았지만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가난 때문에 죗값을 더 치르고 간 사람.

변호해줄 변호사 한 사람없이 홀로 간 사람.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사형 집행 전 위암으로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때 아닌 철에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해서 수박도 먹고 수의를 입고 간 유일한 사형수였다고 한다.

아끼던 선배의 물음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선배님, 그들의 삶이 불행했으니 마지막 가는 길에 착한 사람이 곁에 있어 주면 조그만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조금 더 가진 자, 조금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 불행한 사람에게 밝혀주는 작은 촛불만큼의 배려라고 생각해주세요."




Ⅱ 사람부자가, 결국 옹골진 부자다


돈이 많으면 돈 부자, 친구가 많으면 친구 부자라고 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정작 쓰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하물며 친구가 많다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의미 없을 때도 있다.

저자는 말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가 진정한 '진짜 친구'라고.


미국 청교도 시절, 한 사형수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집행관이 사형수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묻게 된다.

사형수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단 한 번만이라도 뵙고 싶다는 부탁을 하였지만 집행관 입장에서 이해는 해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 때, 오랜 고향 친구가 사형대 앞으로 나와 친구가 어머니를 잠시 뵙고 있을 동안 자신이 사형대에 올라와 있겠다고 한다.

그렇게 사형대에 친구가 대신 오르게 되고 사형수는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길을 나선다.

한참이 지나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는데 사형수 옷자락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집행관은 불쌍한 눈빛으로 사형수 친구에게 말했다.

"이젠 네가 친구 대신 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느냐?"

그러자 친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친구는 분명 올 것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늦는 것일뿐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 친구가 도착하면 꼭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친구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갔다고 말입니다."

그 때, 만신창이가 된 사형수가 드라마틱하게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어떻게 된 것일까?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갑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에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떠내려 가게 되었고 그 길을 헤엄쳐 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었다.


한때는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 넓게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크게 상처받는 일이 생겼었다.

유난히 남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그 아이가 내 뒷담화를 하고 다니던 것이었다.

뒷담화했던 그 아이에게도 실망했지만 침묵하고 방관한 아이들에게도 조금은 실망했었다.

그 아이가 그 자리에서 그 아이들에게 뒷담화를 했다면 결국 말을 보태지 않았어도 동의하며 들었단 뜻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끝낼 일이지, 굳이 나에게 와서 그 아이가 네 뒷담화를 하고 다닌다고 일일이 얘기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착하게 살면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그저 내가 잘하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결국 그 사람의 인성은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때, 내게 뒷담화하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하며 주동자인 그 아이를 뒷담화하자는 식으로 말하는 그들을 보며 그간의 쌓인 정이 한순간에 무너졌었다.

남을 비하하고 뒷담화하면서 괜한 감정 소모를 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도 지치는 일이기 때문에 애초에 할 생각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굳이 똑같이 비하하고 뒷담화하며 고립시킬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나는 그들과는 멀어지는 것을 택했었다, 과감하게.

생각해보면 너무 잘했던 행동이었다.

이후 들었던 이야기로는 곁에 남았던 친구들마저 다 떨어졌을 뿐더러 그들도 서로서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사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이 연속으로 터지면서 사람을 대하는 것 자체가 내겐 너무 힘들어 사람 자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까지 오게 되었었다.

그 때, 선생님께 조언을 받아 연락처 목록을 과감하게 정리하기에 이르렀었다.

'진정하게'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다 정리해보니, 굳이 내가 연락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과 이렇게나 많이 연락했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남은 친구들은 자주 보지 못해도 어제 본 것 같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주며 무엇보다 서로간의 믿음이 있다.

이렇듯 좋은 친구는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 또한 그들에게 가식 없이 진정한 마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Ⅲ 마무리가 깔끔하면 머물다간 자리도 아름답다


30년 동안 교도소만 다니다보니 칠십이 넘었던 시기에 저자가 갈 수 있는 곳은 노인정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오피스텔 관리소장이 통장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묻게 되었고 며칠을 고민하다 승낙하게 된다.

이력서에서 수상 목록을 쓰려고 보니 당최 기억이 나질 않아 서울구치소로 연락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굵직굵직한 상을 많이 받았음에도 저자가 상을 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성격상 상을 진열하는 것 자체가 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은연중에 '오만'이라는 병에 걸릴까봐 상장의 의미를 밀어냈었다고 한다.

소신있었던, 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인간은 물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정해진 수명이 있다.

"인명은 재천이다."

즉,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으므로 우리가 생명을 쥐고 흔들 순 없다.

세계적인 부호였던 록펠러는 99년을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위암 판정을 받게 되자 1년만 더 살게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나누어주겠다고 전세계적으로 홍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99살에 죽고만다.

죽음 앞에서 돈도 권력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심지어 건강해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니 우리의 수명은 하늘만이 알 뿐이다.


칠십 평생 아파본 적 없던 저자는 오복을 다 누리고 살았기에 겁날 것이 없었고 암이라는 터널을 두 번이나 벗어나면서 까칠했던 성격이 많이 원만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에 20구씩 5년 동안 2만 여 구의 시체를 돌봐온 상담자가 찾아오게 된다.

수의를 입혀 보내는 일을 했기에 숨을 거둔 시신의 모습을 매일 볼 수 밖에 없는데, 대부분 평안한 모습으로 죽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평안하게, 평안하지 못하게 가는 얼굴은 확연히 드러나며 성숙하지 못하고 죽은 시체는 모습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저자는 그 날의 일을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 든다고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나이 먹어서 나잇값 못하는 것처럼 추한 것도 없다는 것.

암병동에 입원하면서 긍정적으로 암을 안고 가는 사람과 의사와 병원을 잘못 선택했다며 골 난 사람은 얼굴 색깔부터 달랐다고 저자는 덧붙였다.

아프고 나서도 성장하기는커녕 신세 탓, 환경 탓만 하는 사람도 참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야."




(자살을 제외하고) 사람은 병으로 혹은 사고로 혹은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저자의 말처럼 인명은 재천인지라 죽음의 날짜를 예측할 순 없다.

몇 주 전 대학병원에 다녀왔었는데, 갈 때마다 느끼지만 아픈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이다.

또한, 요새 크나큰 사고 소식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는데 어제는 화성 제약회사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인명피해가 있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는 것,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 양순자 선생님은 암 투병을 하시다가 2014년 7월 눈을 감으셨다.

죽음을 앞두고서 이별 연습을 했던 저자는 매우 의연하고도 담담했었다고 한다.


갑작스레 세상을 등진다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하루하루를 더 소중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삶,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이 진짜 어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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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왕자 - 내 안의 찬란한 빛, 내면아이를 만나다
정여울 지음 / CRETA(크레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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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어린왕자」와 【정여울】작가님의 조합이라니!

「어린왕자」를 통해 성인자아가 마주한 내면아이의 순간순간을 【정여울】작가님과 함께하다 보면 절로 느끼게 될 것이다.


타인 앞에서 용감해지기 위해서,

내 꿈 앞에서 순수해지기 위해서,

내면아이를 되찾아야겠다고.


저자, 정여울은 매일 글 쓰는 사람, 쉬지 않고 꿈꾸는 사람으로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인문학, 심리학, 글쓰기에 대한 강연으로 전국의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붙잡지 않으면 자칫 스쳐 지나가버릴 모든 감정과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문학과 여행과 심리학을 통해 내 아픔을 치유한 만큼, 타인의 아픔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한때는 상처 입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타인에게 용기를 주는 치유자가 되고 싶다. 인문학, 글쓰기, 심리학에 대해 강의하며 ‘읽기와 듣기, 말하기와 글쓰기’로 소통한다. 세상 속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글을, 한없이 넓고도 깊은 글을 쓰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정한 틀에 매이기보다 스스로가 주제가 되어 더욱 자유롭고 창조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은 목마름으로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독자와 소란하지 않게, 좀 더 천천히, 아날로그적으로 소통하기를 바란다. KBS 제1라디오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진행하고 있으며, [김성완의 시사夜]의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 내 안의 어린 왕자, 첫 만남


열네 살, 중학교 1학년 어느 겨울날. 나는 춥고 어두운 골방 안에 난로를 켜놓고 그 불빛에 의지해 《어린 왕자》를 읽다가 갑자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열네 살 아이가 무에 그리 서러운 일이 많았는지,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오래오래 토해냈다. 내 안에 그토록 많은 눈물이 고여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나의 사랑스러운 어린 왕자가 영원히 지구를 떠나는 장면이 너무 슬퍼서였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런 설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성인이 되고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내면아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저자는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어른의 언어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내면아이가 성인자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넌 한 번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지? 넌 어른이 되어 바삐 살아갈느라 하루하루 힘들었겠지. 하지만 난 네가 쳐놓은 마음의 쇠창살 속에 갇혀서 항상 너에게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었어. 오랫동안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간절히 기다려 온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마치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에게 대뜸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 왕자처럼. 이제0야 너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뻐. 난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거든."


그렇게 성인자아는 내면아이에게 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내면아이 또한 성인자아를 루나로 부르기 시작했다.

기쁨 그리고 달밤의 사람, 달밤에 어울리는 사람.

내면아이는 단순히 덜 자라고 덜 교육받았고 모자라고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되찾아야 할 내 안의 소중한 잠재력이며 어린 왕자처럼 해맑고 여리면서도 당차고 사랑스러운 내 안의 가장 환한 빛인 것이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내 안의 어린 왕자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어른이 되면 내 안의 어린 왕자, 내 안의 그토록 아름다운 내면아이와 끝내 작별할까봐 미치도록 두려웠던 것이다.



★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때


조이 어른인 네가 나보다 더 나약하고 불쌍하니까 그렇지. 넌 네가 원하는 것을 다 가졌는데도 항상 불행하잖아. 루나 넌 참 이상해. 멀쩡한 자신을 매일 할퀴고 있어.

루나 그런가?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졌나? 난 결점투성이인데.

조이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 그리고 네 곁에는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것 말고 뭘 더 바라는 거야?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그런 걸로 널 만족시킬 수 있어?

루나 그렇게 많은 걸 바라진 않아. 물론 예전에는 나도 바랐어. 더 좋은 집, 더 많은 통장 잔고, 더 뛰어난 무언가를 항상 바랐어. 하지만 요즘은 좀 더 소박한 꿈을 꿔. 더 많은 걸 바랄수록 삶이 너무 피곤해진다는 것을 알았거든. 요즘 나의 소원은 이거야. 조이 너처럼 발강지고 싶어. 내 안에 너처럼 환하고 해맑은 존재가 있다는 게 아주 큰 힘이 돼. 너와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힘이 나.


어린 왕자가 있었다는 증거는  그는 멋있었고, 잘 웃었고, 양을 원했었다. 그것이 어린 왕자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 어린애로 취급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고 있던 별은 소행성 B621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어른들은 금세 인정할테니깐.

저자는 말한다. 성인자아가 내면아이를 껴안아 준다면 반드시 치유되고 성장할 것이라고.



★ 아픈 기억과의 대면


조이 열한 살 때. 네가 학교에서 왕따 당했을 때, 넌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다 털어놓지 않았어. 철저히 숨기던 옛날보다는 그래도 많이 털어놓았지만, 너는 완전히 너의 상처를 드러내지는 않았어.

루나 아, 역시 그거였구나. 네가 펑펑 운 걸 보고, 그날 때문이 아닐가, 역시 그날이구나, 조금은 짐작했어, 조이. 미안하구나. 네가 아직도 그 시절의 상처 때문에 울고 있는지는 몰랐어. 난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졌다고 믿고 있었거든. 사실은 하루가 아니었잖아. 초등학교 4학년 거의 1년 동안, 너는 왕따를 당했지.

조이 그 하루에서 시작되었지. 그 하루를 꺼내면 너의 열한 살 전체가 먹구름으로 가득하게 되니까. 넌 그 하루를 꺼내보기가 그토록 두려웠던 거야.


새로운 사람과 연을 쌓아가다 보면 그런 말을 간혹 듣곤 한다.

참 밝고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것 같다고.

이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순 없지만 크게 반문하지도 않았다.

그 순간에도 나는 '나'가 아닌 '남'에게 초점을 맞추었었으니깐.


어른이 되고나서 받은 상처도 물론 크지만 어린아이였을 때 받은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의 일은 과거일 뿐,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이다.

결국 상흔이 남는다.

아무 일 없이 탄탄대로의 삶을 살았을 거라 여기지만, 어렸을 때부터 안 힘들었던 적을 꼽는 게 더 쉬울 것 같다.

집안 환경은 물론 학창시절도 마냥 꽃같은 생활이라 생각하겠지만, 위기는 매번 닥쳐왔다.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좋은 인연이 가득한 삶이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앞으로도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복병의 인물들이 내 인생에 끊임없이 등장해 나를 괴롭혀왔다.

남에게 조그마한 피해 하나 준 것도 없이 살아왔어도, 나만 착해도 소용없는 것이 인생이다.

예쁨받는 것이 보기 싫어서, 잘 사는 게 보기 싫어서… 그런 이유로 괴롭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세상이 참 미웠다.


아직은 자세하게 말할 엄두도 나질 않고 용기도 없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오랜 기간 상담도 받아왔다.

몇 군데 다니는 병원 중 하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곳이라 의사선생님은 나의 성장과정을 지켜봐주신 분들 중 한 분이다.

속으로 삭히고 홀로 감내하면서 몸까지 병 들어가는 나를 보던 선생님이 한 분을 소개시켜주셨고 그렇게 나는 매번 외면해왔던 순간순간을 되뇌어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한정된 사람들만 들려 보는 이 블로그라는 공간에 언젠가 아픔을 몽땅 털어내는 글을 쓰는 순간이 곧 나의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그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들, 그중에서도 유독 더 아픈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핵심 트라우마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핵심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조금씩 친밀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로도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



★ 사랑받지 못한 우리 모두의 내면아이에게


조이 루나,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지만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아직도 많아. 어른이 되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잖아, 특히 너무 괴로운 상처일수록 어른들은 그저 묻어두려고만 하더라. 거꾸로 너는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르는 세상의 진실도 너무 많아. 그러니 우리 더 자주, 더 오래 만나서 이야기하자.

루나 그래, 조이. 네가 항상 나를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 우리는 함께할 때 더 강해지는 느낌이야. 어떤 어른들은 내면 아이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아, 이제야 내 상처를 깨달았다, 이렇게 느낀 다음에는 다시 내면아이와 작별하기도 해. 그러면 그토록 어렵게 이루어진 내면아이와의 만남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버려. 내면아이는 평생 우리가 데리고 다녀야 할 아주 소중한 친구인데 말이야.

……

조이 루나 너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달빛이야. 70억이 넘는 인구가 느끼는 달빛이 모두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서 태어나서 그 모든 세상 여행을 다 마치고 돌아와 마침내 나를 마지막 안식처로 삼을, 슬프지만 아름다운 운명의 조종사는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야. 네가 뭔가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를 다시 떠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끝까지 기다릴 거야. 조이라는 아이는 루나의 달빛을 받아야만 비로소 완전히 환하게 빛나는 별이니까. 너의 품에 안겨야만 나는 이 슬픔의 사막에서 비로소 찬란한 오아시스를 찾을 수 있으니까.


웃을 줄 아는 별을 갖게 되는 그날을 위해...★





"아이들만이 자기들이 무얼 찾고 있는지 알고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이들은 누더기 인형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쏟아붓잖아. 그래서 그 인형이 아주 중요하게 되어버리는거야.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하면 엉엉 울잖아."

"아이들은 참 운이 좋아." 철도 관리인이 말했다.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떠나지만 찾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확신은 없다는 것이 어른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아이들은 멀리 있는 것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기보다는 아주 가까이 있는 곳에서 충분히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 아이들이야말로 길들인다는것의 의미를 어른들보다 더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왕자는 수천 송이 장미꽃을 보고나니 정성껏 돌본 장미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여우를 통해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

길들이다의 의미를 알았기에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그 장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J내과는 열 살 즈음부터 다녔으니 선생님은 나의 성장과정을 지켜봐 주신 분 중 한 분이다.

인사 혹은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묻는 여느 환자들에게 하는 말과는 달리 선생님이 내게 하시는 말은 따로 있다.

"괜찮니?" ……

오늘은 어디가 아파서 왔냐는 물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항상 마음부터 확인해주신다.

여느 때처럼 내색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어느 날은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며 친한 분을 소개해주셨고 그렇게 내 마음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었다.

스스로 버티기에는 매우 힘들어보였다고 나중에 말씀해주셨었는데,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돌보게 된 시작이었으니 아직 나는 멀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에게 상처받았어도 결국 내 마음의 상처를 확인해주는 것 또한 사람들이다.

부정해도, 모른 척 해도 내면아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특히나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다.


「어린왕자」 한국판은 물론 영문과 불어로 된 원서도 읽었었고 「어린왕자」로 나온 에디션이란 에디션은 몽땅 하나의 책장에 꽂혀져 있다.

또한, 매년 YES24나 알라딘에서 한 해의 기록을 키워드로 보여주곤 하는데 그 때마다 꼭 보이는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정여울】이다. 작가님의 책 중 두어권 빼고는 전부 읽었을 정도이니깐.

이렇게나 사랑하는 「어린왕자」와 정여울 작가님의 조합이라니!

안 읽어볼 수가 없다.

매년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좋은 책들을 발견할 때면 한 책당 서너 권씩 사다가 두고선 선물하곤 하는데 『나의 어린 왕자』도 낙점이다.


내면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희미해진 부분을 선명하게 만들어서 ‘내가 되찾아야 할 나’를 보다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됩니다. 내면아이의 상처가 선명하게 깨어나는 순간, 그때 돌보지 못했던 나의 소중한 부분도 함께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림자와 만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자의 층을 뚫고 들어가면 반드시 내 안의 가장 환한 빛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상처 때문에 나의 잠재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밖에 못 하니’, ‘저 아이는 저렇게 잘하는데’라는 어른들의 비난을 들으면서 급격하게 소심한 성격으로 바뀌었던 순간들이 기억났습니다. 저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 재능, 꿈이 많았는데,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어요. 다행히도 글쓰기라는 탈출구가 있었기에, 제 안의 잠재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표현의 탈출구가 필요합니다. 그 표현의 탈출구를 열어주기 위해, 내면아이와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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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21 2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하나님 서재 테이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쒼!ㅎㅎ 산꼭대기 서리가 내릴 정도로 새벽온도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건강 잘 챙기세요 ^^

하나의책장 2022-10-07 23:27   좋아요 1 | URL
제가 한 일주일을 밖에 나가질 않다가 저녁산책을 오랜만에 나갔었는데 급! 추워졌더라고요😶‍🌫
추워진 건 둘째치고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어요^^
아직 10월인데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낼까 말까 생각중이에요ㅎㅎ

mini74 2022-09-22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면의 아이 ㅠㅠ 저는 라임오렌지나무에서 뽀르뚜카 아저씨는 상상의 인물이란 해석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ㅠㅠ

하나의책장 2022-10-07 23:36   좋아요 1 | URL
오오 미니님! 저도요😭
제제가 뽀르뚜까를 잃었을 때 슬펐던 것처럼 저도 많이 울었어요ㅠㅠ
그 책을 처음 읽고나서 느꼈던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거든요.
어렸을 때 읽었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예요!

scott 2022-10-07 14: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이달상 추카!

하나님의 10월의 책탑 ! 궁금 합니다 ^^

하나의책장 2022-10-07 23:39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scott님❤
사실, 매달 책탑은 빠지지 않고 찍고 있는데 정작 업로드를 못 하고 있어요ㅠ
매번 올리려고 해도 시기를 놓쳐서… 너무 느지막히 올리는 것 같아 쓰다가 지운 적도 몇 번인지 모르겠어요ㅎㅎ

이하라 2022-10-07 14: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이달의 당선 축하합니다.^^

하나의책장 2022-10-07 23:39   좋아요 2 | URL
하라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10-07 15: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의책장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2-12-16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10-07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당선 축하합니다~! 10월에는 안아프시고 즐겁게 독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2022-12-16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10-07 2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잘 찍고 글도 잘쓰시는 하나님 축하드립니다 *^^*

2022-12-16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10-07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2022-12-16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E. M. 델라필드 지음, 박아람 옮김 / 이터널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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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탄생 이후 100여 년 동안 한 번도 절판되지 않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원조!

소설이어도 예나 지금이나 속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역시 일기가 최고이다.

100여 년 전이지만, 영국 지방 소도시의 일상이지만 현실감 넘치는 주인공들이 가득해 생동감이 넘친다.

생동감 넘치는, 100여 년 전 영국 여인의 일상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E. M. 델라필드의 본명은 에드메 엘리자베스 모니카 대시우드, 결혼 전 성은 드 라 파스튀르로, 1890년 잉글랜드 남동부의 서식스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기에 잉글랜드로 이주한 백작 가문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유명한 소설가였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데번주 엑서터의 간호 봉사대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1917년 첫 소설 를 발표했다.

1919년 토목기사인 아서 폴 대시우드 대령과 결혼한 뒤 잉글랜드의 데번주 켄티스베어에 정착하여 지역 사회의 주요 인사로 활동했다.

진보적 정견과 페미니즘을 기치로 내세운 영국의 주간지 <시간과 조수>에 꾸준히 기고했고 1927년 이 주간지의 이사진에 합류했다.

1929년부터 <시간과 조수>에 연재된 자전적 소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으며 이후 세 편의 속편을 더 발표했다.

1943년 5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11월 8일

남편 로버트가 화덕을 보더니 멀쩡하다며 통풍 조절판을 꺼내보라는 뻔한 제안을 한다. 요리사는 몹시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낼 것 같다.

…… 본머스에 갈 준비를 하던 중 남편이 다락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다 구근 식물 화분 세 개를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하실에 내려놓은 줄 알았다나. 어쨌든 거기 있을 줄 전혀 몰랐단다.



11월 11일, 본머스

로빈이 조금 마른 것 같아서 양호교사에게 얘기하자 그녀가 밝게 대꾸하길, 어머,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이번 학기에 오히려 살이 쪘는걸요. 그러곤 새 건물을 짓는다고 떠들어 댄다.

의문: 왜 모든 학교가 6개월에 한 번씩 새 건물을 지어야 할까?



11월 13일

흥미롭지만 다소 불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특정 장소의 존재 여부를 놓고 비키와 긴 설전을 벌인 탓이다. 비키는 그 특정 장소를 "지 그리고 옥"이라고 부른다. 현대적인 부모인 나는 그런 곳은 없다고,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비키는 있다고 우기며 성경을 들이댄다. 나는 어느 때보다 현대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영원한 천벌을 받는다는 이론은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거라고 타이른다. 그러자 비키가 바락바락 대든다. 자기는 그런 얘기를 들어도 전혀 겁나지 않는다고. 오히려 지옥을 계속 생각하고 싶다고. 교착 상태에 이른 것 같다. 제멋대로 생각하라고 내버려두는 수밖에.

의문: 현대의 아이들은 현대인이 되기 싫은 걸까? 그렇다면 현대의 부모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11월 19일

너무나 힘든 이틀을 보내고 있다. 뜻밖에도 시시 크래브가 엄격한 식이조절으 하고 있는 탓이다. 이 때문에 로버트는 시시에게 넌더리를 낸다. 렌틸 콩과 레몬 따위를 급조할 수 없어서 부엌도 몹시 어수선하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마드무아젤은 식이요법 얘기를 자꾸 꺼내며 몇 번이나 이렇게 소리친다. "아, 몽 두 생 조제프!" 불경한 말인 것 같아서 그만하라고 당부한다.

("아, 몽 두 생 조제프!"는 "어머나, 성 요셉이여!"를 뜻한다.)



12월 1일

비키에게 엄마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그 애의 대모가 3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고 얘기하자 아이가 대뜸 이렇게 묻는다. "와, 그럼 내 선물 사오는 거야?" 아이의 탐욕에 혀를 내두르며 투덜거리자 마드무아젤이 하는 말, "시 라 생트 비에 르주 르브네 쉬라 테르, 마담. 세 스레 노트르 프리트 비키."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무드무아젤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비키를 두고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스 프티 데몽 앙라제."

의문: 프랑스 사람들이 언제나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 라 생트 비에 르주 르브네 쉬라 테르, 마담. 세 스레 노트르 프리트 비키."는 "성모 마리아께서 이 땅에 환생하셨다면 아마 우리 예쁜 비키가 그분일 거예요."를 뜻한다.)

("스 프티 데몽 앙라제."는 "성난 꼬마 악마 같으니."를 뜻한다.)



12월 12일

남편은 길 잃은 새끼 고양이를 절대 거둘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있는 부엌 고양이만 해도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그러나 비키가 애원하자 조금씩 누그러진다. 이제 새끼 고양이가 수컷이냐 암컷이냐에 따라 운명이 갈릴 판이다.



12월 16일

…… 레이디 복스가 찾아와서 말하길, 자기는 햇살이 필요해서 다음 주에 남프랑스로 떠난단다. 그러더니 내게 같이 가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내가 씹다 뱉은 껌처럼 늘어져 있다면서. 좋은 의도였을 테지만 어쩐지 매우 부적절하고 모욕적인 비유처럼 느껴진다.

레이디 복스가 묻는다. 그냥 기차를 타고 프랑스를 달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여름 태양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면 좋지 않겠어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으련다. 레이디 복스의 머리에는 비용이라는 문제가 들어갈 자리조차 없는 것 같다.

메모: 여성회 토론 주제로 흥미로울 듯. '상상력과 상속받은 재산은 양립할 수 없다.' 다시 생각하니 사회주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 떠나면서 레이디 복스는 남프랑스 여행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 번 더 호소한다. 나는 예의상 망설이는 척하며 마음이 바뀌면 바로 연락하겠노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나도 그녀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을.

의문: 우리가 위선이라는 도덕적 일탈을 하는 이유는 주로 상대의 눈치 없는 고집 때문이 아닐까?



크리스마스 날

하인들을 쉬게 해주려고 저녁은 차가운 칠면조와 크리스마스 푸딩으로 떼운다. 앤젤라가 구근 식물을 보더니 어째서 구근 식물이 크리스마스에 꽃을 피울 거라 생각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자고 제안한다.



12월 27일

윌리엄 부부가 떠났다. 막판에 앤젤라가 작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지난주에 주간지 <시간과 조수> 작품 공모에서 '지식인'이라는 필명으로 1등을 했는데 혹시 알고 있었냐고 묻는 게 아닌가. 당연히 몰랐지만 축하해 준다. 나도 응모했는데 당선되지 않았다는 말을 삼킨 채.

의문: 이 공모전의 편집자들이 언제나 문학성을 예리하게 평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중한 업무로 판단력이 흐려질 때도 있지 않을까?

…… 집으로 오는 길에 얌전하게 행동한 비키와 로빈을 칭찬해 준다. 하지만 나중에 마드무아젤에게 들으니 비키의 파티 드레스 주머니에서 초콜릿 비스킷이 왕창 나왔다고 한다.

메모: 이런 행동은 예절과 위생, 정직성의 측면에서도 문제가 되며 현명하지도 않다고 비키에게 말해주는 게 좋을까?



2월 12일

레이디 복스가 내게 아이들의 안부를 묻더니 모두를 향해 내가 "얼마나 완벽한 엄마인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그때부터 모두들 자연스레 나와 대화하기를 꺼린다. 레이디 복스는 계속해서 남프랑스 얘기를 떠들어 댄다. 자기가 그곳에서 써먹은 이러저러한 재담을 열심히 해석해 주면서.

여기서 피할 수 없는 의문: 정당방위의 살인이라고 해도 자식들의 앞길에 큰 걸림돌이 될까?



4월 2일

하워드 피츠시몬스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어설프게 이 두 주제를 오가며 분위기를 더없이 어색하게 만든다. 이 파괴의 마지막 결정타는 내 손에 쥐어진다. 어쨌든 바버라에게 차에 우우와 설탕을 넣을지, 빵을 먹을 것인지 따위를 물어봐야 하니까.

메모: 요리사에게 코딱지만 한 스펀지케이크 조각을 왜 들여보냈는지 무어볼 것. 먹고 남은 음식이 틀림없는데 이 스펀지케이크를 처음 본 지가 열흘도 더 된 것 같다. 그리고 맛없어 보이는 작은 록 케이크는 왜 계속 내오는지도 물어볼 것.



6월 1일

레이디 프로비셔가 요즘의 치과 진료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모두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빵을 먹느라 바쁜 로버트를 제외하곤 다들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메모: 손님을 초대했을 때 먹먹한 정적이 흐르면 이런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하면 좋을 듯.

……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묻는다. 이런 기후에서 혹시 아름다운 푸른색의 '그란디플로라 매그니피카 수페르비엔시스'(어쨌든 이와 비슷한 이름이었다)를 제대로 키운 적이 있느냐고. 내가 없다고 짧고 솔직하게 대꾸하자 눈에 띄게 안심한다. 혹시 이 부인은 평생 그란디플로라 매그니피카 수페르비엔시스가 이 기후에 적응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내 정원에서는 그 귀한 식물이 잡초처럼 잘 자란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메모: 이런 망상에 자주 빠지지 않도록 경계할 것. 영양가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멍한 인상을 주기 쉽다.



6월 23일

…… 점잖게 당황하는 여주인의 얼굴을 보니 내 재치 있는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계속 후회를 곱씹고 있는데 어느새 화제가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에 관해서는 모두들 한마음이 된다. 미국인들은 확실히 개방적이지만 전쟁 빚은 어쩔 셈이냐고 우리는 입을 모은다. 금주법은? 싱클레어 루이스는? 에이미 맥퍼슨은? 남녀공학은? 모든 논의가 끝날 무렵 우리 중 아무도 미국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모두들 뚜렷한 주관을 가졌고 다행히 모두가 서로의 관점에 동조한다.

의문: 도덕적 용기가 남다른 사람이 여기서 갑자기 실험 정신을 발휘해 파격적인 의견을 제시한다면 흥미롭지 않을까? 예를 들면 미국인들이 우리보다 예의범절이 뛰어나다거나 그들의 이혼법이 훨씬 더 발전된 형태라거나, 등등. 이런 심리적 폭탄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고 싶지만 로버트가 없는 자리라면 더 좋을 것 같다.




때는 1929년 말, 잉글랜드 지방 소도시에서 살고 있는 한 여인의 일기이다.

남편 로버트, 아들 로빈, 딸 비키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

지적이고 여유로운 생활이 매일같았으면 좋겠지만 로버트는 무뚝뚝하고 약간의 신경질적이며 아들과 딸은 꽤나 말썽꾸러기들이다.


현대적이고 지적인 여성의 삶을 갈망한다.

넉넉지 못한 생활이었기에 음식과 드레스를 장만하기 위해 보석을 전당포에 맡기고선 전전긍긍하고 문학을 사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때문에 사교모임에서 그 작품이 나올까봐 전전긍긍한다.

앞서 말했듯이, 갈망한다.

갈망하지만, 로버트가 말도 안 되게 신경질을 내고 아이들을 혼내고 싶을 정도로 말썽을 부려도 집안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일단은 참아 본다.

갈망하지만, 춥고 습해도 무조건 산책해야 하는 귀족 문화가 참 이해하기 어렵다.

갈망하지만, 남편의 고용주인 레이디 복스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염장을 지를 때면 겉으론 웃고 있어도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기를 쓴다.

그 상황에서 느껴지는 순간의 감정들은 물론 속마음까지 모조리 일기장에 담아낸다.


물론 소설이라 할지라도 예나 지금이나 속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일기뿐이다.

100여 년 전, 영국 여인의 일상이 담긴 일기였지만 현실성있게 묘사되어 꽤나 재미있게 읽었었다.


일기 형식의 소설을 읽고나니, 책상 옆에 있는 책장에 눈길이 절로 갔다.

글쓰기 노트와 몇 개의 다이어리, 캘리그라피 노트, 드로잉 노트 그리고 일기가 꽂혀있는 책장이다.

올해 일기장을 꺼내 기분좋았던 순간이 언제였었는지 뒤적여보았다.

아, 찾았다!

일기장에 쓴 그대로 일부분만 그대로 써보려고 한다.


두 번째 생일


호수 산책을 마치고 N의 집에 들어와 다들 한숨 돌리고 자리를 잡았다.

그 말인즉슨, 또 다른 수다의 장이 열림을 의미했다.

N과 A가 부엌에 들어간 사이, J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로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 짧은 1-2초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훑고 갔는지 모른다.

내가 내 친구들 생일을 까먹었을 리는 없는데 혹시 내가 어떤 기념일을 잊어버렸던 건가?

J 생일은 가을인데, 이상하다.

근데 J는 왜 나를 보고 손뼉을 치는 거지?

어쨌든 N과 A가 케이크를 들고 오니 내 옆에 있는 J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덩달아 손뼉 치며 옹알이하듯이 입을 오물거렸다.

(지금 생각하니 눈만 똥글거리며 덩달아 손뼉치던 내 모습, 참 웃기다.)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지난 생일날, 아파서 침대에 누워 눈만 껌뻑거리며 하루를 보냈었는데 그게 마음에 걸렸었는지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해 줬던 것이었다.

케이크를 들고선 노래를 불러주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리기까지 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이렇게까지 깜짝 놀랐던 생일파티는 처음이었다.

N, A 그리고 J, 잊지 못할 순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잊지 못할 순간 만들어준 N, A 그리고 J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꼭 준비해줘야겠다.

……

코로나로 죽을 만큼 아팠다는 게 남 얘기인 줄 알았는데 가뜩이나 병치레 중에 코로나까지 걸려서 큰일 날 뻔 했으니 생일이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생일날, 엄마에게 영상통화가 왔었다.

엄마가 '우리 하나, 생일 축하한다.'라고 했을 때, 얼마나 입술을 깨물고 참았는지 모른다.

끊자마자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베개를 흠뻑 적셨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울컥한 순간이었다.)

……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울고 웃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히려 그 많은 일들을 다 얘기하기엔 시간이 부족했지만, 친구들 말대로 이 날을 두 번째 생일로 정해야 할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의무적으로 썼던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쭉 일기를 쓰고 있다.

나처럼 잘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삭히는 타입인 이들에게는 일기야말로 털어놓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를 모아놓고 보면 얼마나 웃긴지 모른다.

'어린아이였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감탄사와 함께!

남의 일기 읽어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으니 나중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만 추려 책을 내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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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8-30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의 일기인데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군요. 학교는 왜 매번 건물을 지어대는가에서 웃음이 ㅎㅎ 하나님 일기 저도 보고싶어요 *^^*

하나의책장 2022-12-16 20:00   좋아요 0 | URL
예나 지금이나 학교 건물 올리는 건 똑같나봐요😚
가끔씩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 보면 정말 웃겨요.
때묻지 않았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썼던 일기장, 한 번 꺼내서 올려봐야겠어요ㅎㅎ
 
작별 - 이어령 유고집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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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거죠. 이 생물학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긴 말과 글 속에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아침 저녁으로 쓰고 있는 말과 글 속에도 똑같이 문화 유전자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우리가 남긴 말, 가장 중요한 몇 가지 말들은 마치 AGCT처럼 서로 얽히고 결합되면서 내가 없는 세상, 우리가 없는 그 세상에도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해간다는 것이죠.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이야기를 펼쳐볼까 한다.


저자, 이어령은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의 창간을 주도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일보]에 당시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새로운 ‘개성의 탄생’을 알렸다. 20대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두루 맡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으로 활약했다. [새벽]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 전작을 게재했고,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아 ‘문학의 상상력’과 ‘문화의 신바람’을 역설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았다.

마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 쉼 없는 말과 글의 노동으로 분열과 이분법의 낡은 벽을 넘어 통합의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Ⅰ 원숭이


제주도 근방에 야생종 원숭이가 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동물원갔던 게 20살? 21살? 20대 초반이었으니 원숭이 안 본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이렇듯 한국에는 없는 그리고 중국하고의, 일본하고의 차이를 나타낼 때 볼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원숭이이다.

원숭이는 나를 타자와, 남과 구별하는 나의 의식이자 나의 아이덴티티라고 선생은 말한다.

인간과 비슷하기에 남을 놀릴 때 원숭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즉, 원숭이와 어떻게 다르냐로 자신이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에게 있어서는 외국이었던 겁니다. 원숭이가 없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면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객관화하고 나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중국 사람, 일본 사람만 겨우 알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해왔는데,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은둔의 시간 속에서 개화를 맞이한 우리의 외국관이 바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는 원숭이 엉덩이가 아닌 원숭이 항문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니깐 엉덩이 빨간 짐승같은 사람들이 사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우리보다 월등한 문명인이라는 것을 느껴 한쪽으로는 무시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것을 의미한다.

과거 개화기때의 외국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 것이다.

사극 혹은 시대극에서 왜놈, 양놈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4000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억압과 압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민족이기에 가지고 있는 이런 오기가 한국 사람들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인 것이다.



Ⅱ 사과


사과는 1901년 윤병수가 미국 선교사로부터 묘목을 들여오면서 유입되기 시작했다.

추운 지방에서만 나왔었기에 북한 원산 부근에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1901년이다.

한쪽에서 선교사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키워봤지만 기후로 인해 다 죽어버렸는데 유일하게 사과 하나가 살아남았었다.

그것이 바로 대구 사과이다.

사과가 자랄 수 없는 고장임에도 품종 개량을 통해 대구가 사과의 명산지가 된 것이다.


사과는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20세기 초 개화가 시작되던 때에 유입되었기에 서양 문명이 압축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의 사과, 트로이 전쟁에 나온 파리스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윌리엄 텔의 사과로 서양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에서 사과 체험은 즉, 서양 체험인 것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사과는 지금도 이어진다. 바로 애플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이자 글로벌한 사과가 된 사과!

앞으로도 '사과'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Ⅲ 바나나


바나나는 과일의 단순한 개념과는 무언가가 다르다.

과거 수박, 참외와 같이 둥글둥글한 과일만 보다 기다란 바나나를 처음 접했을 때, 꽤나 놀랐다고 한다.

단순히 길기만 한 게 아니라 끝이 꼬부라져서 올라간 바나나는 우리 상식을 완전히 뒤바꾼 과일이었다.

대부분 바나나 나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파초과이다. 풀이 돌돌돌 말려 올라가서 딱딱해지는 것이다.

또한, 씨가 없다. 씨도 나중에 나오지만 줄기세포처럼 발아되니 그 싹을 잘라서 심는 것이 바나나이다.

인간의 역사, 서양의 역사, 정치, 경제-이 모든 것이 바나나 속에 있다.


문득 검정고무신의 한 회차가 떠오른다.

성철이가 바나나 먹었다는 자랑에 기영이는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렇게 성철이를 따라 바나나 먹으러 성철이 외숙모집 앞에서 추운 겨울 날씨에 한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이웃집에 다 나눠주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에 기영이는 결국 좌절하고 만다.

그렇게 병이 난 기영이는 아픈 와중에도 바나나만 찾는다.

당시 쌀 한 되가 아닌 쌀 한 말 값은 되었다는 바나나는 쉽게 먹지 못하는 비싼 과일 중 하나였다.



Ⅳ 기차


혹시 알고 있는가?

호두, 호빵, 호박과 같이 '호'자 붙은 먹거리는 전부 이란, 이라크와 같은 중동 지방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왔다는 것을.

개화기 때는 실크로드를 통해 곧장 들어오지 않고 미국, 유럽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다.

그래서 '양'자가 붙는 것이다. 한국 것에 '한'자가 붙는 한옥처럼.

기차는 인간이 만든 문명을 상징한다.

과거 기차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는 수단이기도 했다.

대륙에 진출하려던 일본이 한국에 경인선 철도를 만들었었다.

미국이 이를 통해 들어오려고 하니 일본이 가만두지를 않았다.

거기다 만주까지 닿는 철도를 놓게 되었고 이후 러일전쟁, 청일전쟁이 연이어 발발했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기차였다.

선생은 어느 누구에게는 지배의 힘이요, 어느 누구에게는 빼앗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기차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고 읊조렸다.


지금 여러분과의 작별을 앞둔 그 어린아이에게 그 기차는 어떤 의미를 가진 기차일까요? …… 미래에 올 새로운 생명들, 새로운 세계들에 비록 나는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몇 가지 나의 글, 나의 언어들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씨앗이 되고, 불씨가 되고, 그리고 작은 터널 속 빛과 같은 것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떠날 때의 모든 절망 소에서 남기고 가는 희망으로 오늘 이별을 얘기합니다.



Ⅴ 비행기


높이 날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자기 엔진이 필요한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쓰는 것은 코로나 시대에 당연한 일이다. '나'가 아닌 '남'을 위한 것이다.

본인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이유지만 남에게 병을 안 옮기기 위해 쓰는 것이 마스크이다.

이처럼 나눠야 할 경험의 가치, 이 모든 슬기를 합쳐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선생은 강조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날아올라 앞으로도 이렇게 100년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잘 있으세요, 여러분 잘 있어요


내가 여러분들과 헤어지는 인사말 '잘 있어'라는 말, '잘 가'라고 하는 그 '잘'이라는 말. 영어로 웰 다잉, 웰 에이징 등 우리가 흔히 잘 쓰는 '웰'이라는 말, 그게 바로 잘 있어, 잘 가 할 때의 '잘'입니다.

그게 바로 어질 인이죠. 이게 있으면 잘 있고 잘 가게 되는 겁니다. 떠나도 그와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고, 잘 있으면 떠나간 사람을 마치 곁에 있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잘 있어, 잘 가입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코로나 위기를 겪은 사람들을 옛날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새 문명, 새로운 가치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생명의 가치가 제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접속과 접촉이 함께 있어야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 오늘보다는 내일 늘어가는 것. 생식되는, 불어가는 생명체가 증식하는 세계가 바로 생명자본이요, 우리의 밑천이 되는 세계입니다.


이별이 끝이 아니고 잘 있어, 잘 가, 라는 말이 마지막 인사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서로 헤어지는 인사말 속에 잘 있어, 잘 가, 라고 서로 웃으면서, 그리고 잘 가기를 원하고 잘 있기를 원하는 서로의 공감 속에서 죽음도 생명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영원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헤어질 때와, 떠날 때의 인사말…

잘 있으세요. 여러분 잘 있어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구전으로 전해진 이 동요는 자연스럽게 입에 익혀져 있다.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이라고 지금은 이어지지만 옛날에는 빠르면 토끼였다고 한다.

원숭이부터 백두산까지 그 어떤 맥락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단순히 한 사람도 아니고 어른들도 아닌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에서 고르고 골라 전해진 노래이다.

선생의 말처럼 생각해보면 원숭이, 사과, 바나나, 기차, 비행기, 백두산에서 백두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우리 것이 아니다.

원숭이부터 살펴보자.

외교사절단이 원숭이를 보내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대중 앞에 원숭이를 선보인 게 1909년이다.

그렇다면 원숭이를 본 시기를 감안한다면 1909년 이후에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다.

원숭이, 먹거리인 사과와 바나나 그리고 문명 단계의 마지막인 비행기까지, 전부 미국에서 들여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백두산은 어떻게 들어간 것일까?

100년 동안 외세와 외국 물품들을 마주하고선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쫓아가지만 결국은 백두산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어령 선생이 전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훗날 선생이 없는 지금부터 미래의 한국인들에게 과거의 경험과 꿈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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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들리와 그레이스
수잔 레드펀 지음, 이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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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프랭크의 아내, 하들리.

프랭크의 비서, 그레이스.

그들에게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프랭크의 사무실로 향하기 전까지만 해도.

각자의 이유로 프랭크의 사무실에서 있던 200만 달러를 훔쳐 절반으로 나누고 헤어지려 했다.

그러나 200만 달러는 프랭크가 마약을 팔았던 자금이었고 이를 FBI가 쫓고 있었다.

결국 FBI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하들리와 그레이스, 그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저자, 수잔 레드펀은 동부 해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15세 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캘리포니아 주립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현재 레스토랑을 소유하고 있는 남편과 라구나 비치에 살고 있고, 작가일 뿐만 아니라 주거 및 상업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가정 폭력을 일삼는 남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난 여성의 놀라운 사랑과 아이들에 대한 헌신을 다룬 《허시 리틀 베이비(Hush Little Baby)》로 데뷔해 크게 주목받았고, 2016년 어린 시절의 소중함과 엄마가 어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위험한 선택을 다룬 소설 《평범하지 않은 삶(No Ordinary Life)》, 2020년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 이후 불가능해 보이지만 계속되는 삶의 이야기를 그린 《한순간에(In an Instant)》, 2022년 인내, 생존, 우정을 다룬 《모멘트 인 타임(Moment in Time)》을 발표해 찬사를 받았다. 전 세계 13개국에서 그녀의 소설이 출간되었다.




하들리


하들리에게는 남편 프랭크, 딸 매티 그리고 여동생의 자식이지만 제 자식처럼 키우고 있는 스키퍼가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할 것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하들리에게 있어서 남편 프랭크는 치워버리고 싶은 정도였다.

프랭크는 언제나 빨랐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인지 곧장 답하였고 설사 하들리가 답장이 느리면 휴대폰의 진동이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언제나 그녀가 멋지게 차려입고 자신을 맞이해주길 바랐다.

딱 그뿐이었으면 버틸만했겠지만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이라 혹여나 매티가 잘못을 저지르면 하들리를 성적으로 학대할 정도였다.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야만 한다.

한 달 전, 여동생 바네사가 하들리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며 스키퍼를 데려가 키우겠다고 말하였었다.

그래! 벗어나자! 스키퍼를 데려다주면서 도망치자!

딸 매티를 데리고 프랭크에게서 벗어나려면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프랭크의 금고를 털기 위해 하들리는 프랭크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프랭크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돈이 여러모로 필요했던 그레이스는 착수한 지 석 달 만에 악착같이 주차장 재임대하는 계약을 성사시키게 된다.

프랭크가 협상에 성공하면 수입의 10퍼센트를 떼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수입에 영향을 줄 만한 계약이었다.

지미의 도박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자동차 타이어를 새것으로 교체할 수도 있고 생후 4개월 된 마일스를 주간 보호 시설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랭크는 보기 좋게 계약서를 반으로 접더니 이내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대놓고 협박하며 약속을 엎어버린 프랭크에게 한 마디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레이스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생전에 할머니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오직 바보들만 변할 거라고 기대하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밑바닥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직접 나서야만 했다.

은행 잔고는 한 푼도 남지 않은 상태이고 분명 화요일이 되면 해고될 판이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믿을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야."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프랭크의 금고를 털기 위해 그레이스는 프랭크의 사무실로 향했다.



금고 안, 200만 달러


금고로 향한 하들리.

하들리는 프랭크의 비상열쇠를 이용해 사무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금고로 향한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주위를 살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이스?"

"토렐리 부인?"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프랭크의 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게 된 둘은 나누어야 할 돈의 비율을 따지며 실랑이를 벌였다.

금고 속 두툼한 돈다발 위에 올려진 총구까지 겨누며.


구두를 신고왔던 하들리는 결국 발목을 살짝 삐게 되었고 그레이스의 부축을 받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레이스가 하들리를 화장실 바닥에 버려두고 돈다발만 챙겼다면 그걸로 끝이었겠지만 괜스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주차해둔 혼다로 다가가 잠든 마일스를 안고 하들리의 SUV로 향했다.

엘 토로에 있는 한 호텔의 이름을 대자 그레이스는 일단 SUV 시동을 걸었다.

집을 나오려고 했다, 그것이 남편의 금고에서 돈을 훔치려는 이유였다라고 그레이스에게 말하자 그레이스는 돈은 안 줄 거라며 딱 잘라 답했다.

울화통이 터지는 하들리에게 그레이스는 드라이브스루에 들려 인앤아웃 버거를 샀다.

그렇게 가던 중 갑자기 차를 멈춰 세운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나눠요."

"……"

"50대 50이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절반을 가져가요."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죠?"

"카르마."

"……"

"난 솔직히 카르마를 믿어요. 내가 멍청한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에게 절반을 넘겨주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신 몫을 가져가요."


호텔로 들어와 프랭크의 금고에서 가져온 돈은 무려 200만 달러였다.

밉상이긴 해도 그레이스 뺨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을 정도로 하들리는 노래를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FBI 요원


퉁퉁 붓고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발목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자 그레이스는 하들리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누군가 쫓아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FBI 요원이었다.

설마? 프랭크의 돈이 쫓기는 돈이었던거야?

그레이스와 마일스, 하들리와 매티, 스키퍼는 그렇게 열심히 내달렸다.

그레이스가 쓰레기통에 휴대폰을 버리자 하들리도 따라했고 눈치 빠른 매티도 휴대폰을 던지며 달렸다.

일단 몸을 숨기는데 성공했다. 지금부터 각자 헤어지자고 말을 꺼내자 감수성많은 하들리의 눈물에 그레이스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 FBI 요원들을 따돌리고 여기서 빠져나갈 때까지 같이 가요. 하지만 그다음엔 각자 서로의 길을 가는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자 둘이 감시 카메라 천 대가 설치되어 있는 병원에서 요원들을 따돌리고 무사히 나갔다는 점이.

더군다나 두 여자 가운데 한 명은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있고 어린애 둘과 갓난아기까지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하들리와 그레이스는 전혀 접점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들리의 여동생은 신혼여행 중이라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레이스의 남편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굉장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 어떤 가설을 세워도 지금까지 두 여자가 계속 붙어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CCTV를 살펴보니, 분명 병원 주차장에서 하들리와 그녀의 아이들이 달려가는 그레이스를 향해 뒤쫓아 갔다.

그레이스는 분명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왜 함께 있는 것일까?



그리고 ……


금고에서 200만 달러를 챙겨 각자의 몫으로 100만 달러를 챙길 수 있었지만 200만 달러는 프랭크가 마약을 판매해 모아놓은 돈이었다.

FBI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던 범죄 증거물이었기에 이제는 하들리와 그레이스가 FBI에게 쫓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함께했지만 결국은 긴 여정을 함께 한 두 여성은 위기의 순간마다 한껏 지혜를 발휘해 헤쳐나간다.

돈을 나눌 때까지만 해도 빠르게 끊어내고 싶은 사이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이란 매개체를 통해 유대감이 형성되며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한다.

과연 하들리와 그레이스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비 오는 날, 엄마가 잠시 볼일보고 오실 동안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라떼 한 잔을 시켜놓고선 못 다 읽었던 책을 펼쳐들었다.

40분이 흐르고 엄마가 카페로 오셨던 그 때, 마지막 장을 덮었다.

질척거림없이 빠르게 읽어내릴 수 있다는 것은 갈수록 몰입도 놓고 재미있는 소설임을 뜻한다.

『하들리와 그레이스』가 그랬다.

『하들리와 그레이스』는 고전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영감받아 쓴 작품으로 변화된 나를 비롯하여 아이들, 가족, 사랑의 의미까지 느껴볼 수 있다.


성격이나 행동 자체가 정반대인 하들리와 그레이스이기에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더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알았을까. 오렌지카운티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돈만 나누고 헤어질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솔트레이크 시티 외곽에 있는 바비큐 레스토랑에서 다같이 밥을 먹고 있을 줄은.

일주일만의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하들리와 그레이스. 그들이 이렇게 치열하도록 협심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아이들때문이었다.


금고를 털고난 직후 그리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하들리와 그레이스의 변화된 심리 그리고 매티, 스키퍼와 마일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살펴보며 읽는다면 더 재미있게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FBI 요원과 하들리의 관계 또한 주목하여 읽는다면 끝까지 읽기도 전에 어떤 결말로 향할 지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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