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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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반복이 가득한, 마침표가 눈에 띄지 않는, 쉼표가 가득한 그의 문체는 참 단순하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욘 포세.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저자, 욘 포세는 1959년 노르웨이 헤우게순 출생으로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극작가로,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했으며, 20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2003년 프랑스에서 국가공로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07년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100명의 살아 있는 천재들 리스트 83위에 올랐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소설뿐만 아니라 시, 아동서, 에세이, 희곡 등 다양한 방면의 작품을 쓰고 있는데, 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연극은 전 세계에서 수천 번 이상 공연되는 국제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오늘날 그의 작품들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뉘노르스크 문학상, 도블로우그상, 노르웨이 예술위원회 명예상, 브라게상 명예상, 국제 입센상, 스위스 아카데미 북유럽문학상, 유럽연합 문학상, 북유럽 이사회 문학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공로 훈장에 이어 노르웨이 국왕이 내리는 세인트 올라브 노르웨이 훈장을 수훈했다.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가족관계와 세대 간의 관계를 통해 볼 수 있는 인생, 사랑과 죽음 같은 우리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들이다. 세대 간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말로는 결코 종합적으로 고찰될 수 없는 것, 즉 죄와 실망의 원천 문제를 다룬다. 그의 작품에는 일견 너무나 평범해 보이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삶의 그림들이 단순한 구조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에는 많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며, 항상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 남자(남편), 여자(아내), 소년, 소녀. 여기에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할머니, 그리고 때때로 이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으며 특별한 고유의 성격이 부여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항상 단순한, 일반적인 사람들이며, 그들의 관계는 한눈에 파악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평범함과 보편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경건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그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이고 그 관계가 또한 철저하게 관찰되고 파악될 수 있어서 보편성의 미니멀리즘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만큼 포세가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현실의 단면은 굵은 윤곽으로 이루어진 담담한 그림으로 그려지나 그 사이의 여백에는 인간의 삶이 가진 구체적인 모습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인이 만들어내는 의사소통 부재의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며 인간 의식 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원형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포세의 언어는 배우와 연출자에게 커다란 도전이 된다. 그의 언어는 철저하게 압축되고 축약된 형태로, 문장의 조각들,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완벽하게 구두법 없이 쓰인 그의 텍스트는 해석과 리듬의 모든 힘을 배우와 연출자의 손에 넘겨준다. 포세는 삶의 본질적인 것이 파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필요한 소리들을 제거한다. 그의 언어는 끊임없이 회전하는 말의 고유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모노톤의 문장들, 부분적으로는 스타카토처럼 던져지는 문장들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구조들, 인간의 내적인 심리 구조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응축된 형태로 노출된다. 여기에 포세는 침묵의 순간들을 적절히 이용한다. 인물들의 대화 과정 중에 끊임없이 반복 사용되는 ‘사이’의 침묵, 이 행간을 인물들의 말 없는 진실이 넘나든다. 소리와 소리 없음의 독특한 리듬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통해 포세는 인간의 삶이 가진 진정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더운물 더요 올라이,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

거기 부엌문 앞에서 서성대지 말고 이 사람아, 그녀가 말한다

네네, 올라이가 말한다


아마도 그건 신의 영혼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에 내재해 무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고, 의미와 색을 부여하는, 그리고 그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모든 것에 신의 말씀과 영혼이 내재하는 이유다, 그래, 그렇지, 그러나 사탄의 의지 역시 작동한다는 것, 그 역시 확신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센지, 그것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고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 둘은 누가 더 강한지 겨루고 있으니까, 아마 태초부터 그랬을거야, 올라이는 생각한다, 신은 세상을 훌륭하게 창조했으며 전지전능하다고,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항상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굳게 믿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신은 존재한다,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을 뿐, 신은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어린 요한네스는 큰 소리로 울고 또 울며 세상 밖으로 울려퍼지는 제 목소리를 듣는다, 울음소리는 아이가 새로이 속한, 세상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따뜻하고 검고 조금 붉고 조금 축축하고 온전한 것은 더이상 없다, 이제 저 자신의 움직임뿐이다, 모든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을 메우려는 듯한, 무엇인가, 그리고 아이와 아이의 목소리는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거기에는 뭔가 다른 것이 더 있는데, 뭔가, 그의 일부이면서 아니기도 한 무엇이, 아이의 목소리는 저 밖의 모든 것을 갈라놓고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더 커지고 커진다 그리고 다 잘될 거야, 올라이가 말한다



어부 올라이와 마르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요한네스.

올라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아침마다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고 먹을 것을 생각해보고 서쪽 만으로 산책을 나갈 지, 날씨가 좋다면 배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을지 등의 생각을 반복한다.

지루하지만 불평할 것도 없다.

몸 누울 집도 있고 자식들은 벌써 장성해서 손주까지 있는데다 막내 싱네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거의 매일같이 그를 보러 오니깐.

그 날은 몸이 참 가벼워 희한하기만 하다.

매일같이 아프던 뼈마디가 하나도 안 아파 희한하기만 하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오래되고 손때 묻은 것들도 모든 것이 금빛으로 반짝거리니 희한하기만 하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만으로 내려가는데, 해변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테르였다.



페테르 자네 오랜만이네,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가 돌아서서 요한네스에게 눈을 껌벅해 보인다

그럴 줄 알았지, 자네가 올 줄, 알았어, 페테르가 말한다

자네 게망을 보러 가려는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래야지, 페테르가 말한다

……

그러니까 어제, 자네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말이야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자네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그가 말한다


이상하다, 페테르는 이미 죽었는데 요한네스 눈앞에 있다는 것이.

요한네스는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한 페테르가 눈앞에서 고깃배를 끌어당기고 있으니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금 죽어 있는건지 살아 있는건지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눈앞에서 이리도 멀쩡하게 있으니 살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페테르의 머리를 반드시 잘라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요한네스는 페테르의 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곤 눈앞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싱네를 발견하게 된다.

저를 보러 오는 싱네가 반갑기만 한데 싱네는 요한네스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버린다.

싱네 또한 이상했다. 일 때문에 빨리 오지 못해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는데도 아버지 요한네스가 도무지 받질 않았다.

평소처럼 산책하지도 않으셨고 무엇보다 해질녘까지 불 한 번 켜지 않았다면 혼자 임종을 맞으신 건 아닌지.

그렇게 성큼성큼 올라가고 있는 길에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물체가 그녀에게 마주 오는 것을 느꼈고 그 중심을 통과하는 순간 너무나 차가웠다.



지금 서쪽 만으로 가는 건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그래, 페테르가 말한다

거기서 뭘 하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이제 떠나는 거야, 자네와 내가, 페테르가 말한다

그렇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내 고깃배를 타고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지, 페테르가 말한다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게 페테르,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싱네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그리고 오늘 바다는 저리도 잔잔하고 푸르게 빛나는데, 싱네는 생각한다, 요한네스,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



💭

아내가 죽고나니 집안이 조용하다.

썰렁한 집안, 요한네스는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귀찮기만 하다.

귀찮지만, 몸을 일으켜 걷던 중 해변에 서 있는 페테르를 보게 된다.

페테르와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깨닫게 된다.

페테르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요한네스의 일생을 한 권에 담아낸 이 책은 마침표가 없다.

쉼표만이 가득할 뿐인데, 이는 삶과 죽음은 곧 연결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표현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백세인생이라고 하지만 누구는 얼마나 더 짧게 혹은 길게 살지, 누구는 얼마나 더 빠르게 혹은 늦게 죽을 지는 알 수가 없다.

결국 삶과 죽음의 과정도 연결 지어진 '하나의 과정'이기에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


어제 오후에 올리려고 했는데 급 컨디션이 안 좋아지더니 비오는 오늘 하루종일 아팠었다.

잠시 닫아놓았던 노트북 켜서 얼른 올려보는데… 책장 앞에 높이 쌓여있는 책탑에 눈길이 멈춘다.

책은 참 많이 읽고 있는데, 쓰는 게 따라가지를 못 한다. 잠시 멈추었던 글도 내년에는 연재 시작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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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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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번역해왔다. 피츠제럴드는 나의 출발점이자 일종의 문학적 영웅이다."


피츠제럴드가 활동했을 때, 후기에 발표한 단편소설 8편과 에세이 5편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편집하고 번역하였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았기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초조하고 불안했던 피츠제럴드, 그럼에도 쓰는 것을 놓지 않았던 그였다.

특히 후기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희망과 애정을 엿볼 수 있어 피츠제럴드의 팬인 하루키는 더 깊은 애정을 느꼈다고 한다.


저자,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의 소설가이며 단편 작가이다.

1896년 9월 24일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자퇴 후, 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그중에서도 1920년대 화려하고도 향락적인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무너져 가는 미국의 모습과 ‘로스트제너레이션’의 무절제와 환멸을 그린 작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등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작품과 생애,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 인물이다. 1919년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5년 4월, 피츠제럴드는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완성했는데, 1920년대 대공황 이전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의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전후의 공허와 환멸로부터 도피하고자 향락에 빠진 로스트제너레이션의 혼란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작품에서 청춘의 욕망과 절망이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다. 세계적인 명작으로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고 있다.




어느 작가의 오후


잠에서 깼을 때 그는 지난 몇 주 사이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부정문으로 나타낼 수 있는 분명한 사실ㅡ그는 편찮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ㅡ이었다.


몸이 아프고 나서 모든 것이 느려진 듯하다.

진즉 나간 딸이 머물렀던 자리를 서성거리다 하녀가 만든 토스트와 오렌지주스, 홍차를 아침으로 들었다.

반가움이라고 없는 지루한 우편물들만 가득하다.

'소설 아이디어' 노트를 보던 중 파트타임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몸이 아파 고용했던 비서였다.

그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썼던 글을 찢어버렸으니 오늘은 올 필요 없고 우편물, 청구서가 많이 와 있으니 내일 오후에나 오라고 일렀다.


그는 상의와 하의의 색상이 다른, 가장 좋아하는 정장을 입었다. 지난 6년 동안 정장을 단 두 벌 샀지만, 둘 다 최고급이었다. 상의 하나만 해도 가격이 110달러나 되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가야 했기에ㅡ목적지 없이 어딘가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ㅡ그는 단골 이발사가 사용할 연고 샴푸 튜브를 호주머니에 넣고, 루미놀이 든 작은 약병도 챙겼다.


젊은 시절 그는 참 호기로웠다.

허세 낭낭한 그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교통 신호를 요령껏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건너가는 젊은이들을 뒤로 한 채 모퉁이에 얌전히 서서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린다.


…… 여섯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복장은 형형색색으로 다채로웠다. 그들의 얼굴에는 계획도 갈등도 없었다. 그저 도발적인 동시에 평온한, 감미로운 미정 상태의 얼굴이었다.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난간을 붙잡으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딛어 호텔 이발소로 향했다.

이발할 목적으로 시내로 외출한 것이 몇 달만인지 모르겠다.

단골 이발소에 들어서니 익숙하고 좋은 냄새가 코를 찔러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이발해주었던 단골 이발사가 관절염으로 몸져누었다는 사실은 지난 날을 더 떠올리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하녀가 그를 맞아주었다.

딸은 아직 집으로 오지 않았다.

하녀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냐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볼링을 치고, 맨 마운틴 딘과 어울려 논 다음 증기탕에서 마무리했지. 전보 온 거 없나?"

"없어요."


서재로 걸음을 옮기니 2천 권의 장서가 햇빛에 반짝였다.



망가지다 The Crack-Up


…… 그러니까 계속 뇌리를 맴돌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가지 안 좋은 일에 대한 원인으로 돌리며 탓해대고, 마음이 약해질 때면 친구들에게 얘기하게 되는 종류의 타격은 갑자기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 한편 이와는 다른 종류의, 내부에서 오는 타격이 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그것을 자각했을 때는 너무 늦어서 손쓸 도리가 없는, 그런 종류의 타격이다. 어느 면에서는 자신이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되는, 그런 타격이다. 첫 번째 종류의 타격으로 인한 손상은 순식간에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종류의 타격으로 인한 손상은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다.


10년 전만 해도 인생이란 대체로 개인적인 문제였다. 나는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과, 싸우는 것은 필요하다는 생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실패가 불가피하다는 확신과 그럼에도 '성공'하겠다는 결의 사이애서 균형을 유지해야 했고, 특히 과거의 성과가 주는 압박감과 미래의 고상한 의도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균형 있게 다루어야 했다.


"들어봐요! 세상은 오직 당신 눈에만 존재해요. 당신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세상을 원하는 대로 크게 만들 수도 있고 작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 작고 하찮은 사람이 되려 하고 있어요. 있잖아요. 만약 나에게 균열이 생긴다면, 난 세상도 나와 함께 망가지게 만들어버릴 거예요. 들어봐요! 세상은 오직 당신의 인식을 통해서만 존재해요. 그러니 균열이 생긴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나아요."


하루키가 몇 번이고 읽었을 정도로 애정하는 작품으로, 직접 번역하고 싶었지만 나이를 더 먹고 번역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소중히 품었다가 이번에 번역했다고 한다.

이 해설을 읽기 전에 작품을 먼저 봤기에 해설을 보며 흠칫했다.

하루키는 에세이를 쓸 때 '망가진 3부작'과 「나의 잃어버린 도시」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나 또한 두 작품이 인상깊어 글쓰기 노트에 꼼꼼하게 요약해놓았기에 놀랐던 것이었다.

하루키가 말한다.

헤밍웨이에게 '여성스럽다'라고 비난받은 이 에세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여기에 숨은 단단함을 부디 맛보시길.



젊은 시절 누구보다 화려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조용하고 적적해진 삶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젤다의 신경쇠약, 가난한 형편 그리고 이제 막 날개를 달아 훨훨 나는 후배들에게 추월당하는 초조함까지 여러 요인들이 그의 불안함을 자극하고 또 자극했다.

그럼에도 펜을 놓지 않았다는 것, 그는 진정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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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2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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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외로운 사람들의 섬뜩하고 비상식적인 욕망…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이 다가왔다."


저자, 정보라는 연세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대학에서 러시아와 SF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

예일대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SF와 환상문학을 쓰기도 하고 번역하기도 한다.

중편 「호(狐)」로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단편 「씨앗」으로 제1회 SF 어워드 단편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선정되었다.




"저거 확 치어버릴까."

"야, 우리 골목으로 빠지자."

"저거 확 치어버릴까."

"야, 치어버려. CCTV 없어."


한 차에 타고 있던 두 번째 남자와 세 번째 남자, 결국 발은 가속페달 위에 올라갔다.

어두컴컴한 골목은 도무지 어디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아 내비게이션은 연결되지 않았다.

좀전에 큰 소리가 나 차 밑을 웅크린 채 바라보았을 때 새빨간 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깜깜했던 밤, 그 끝에 서 있던 노인을 보고선 두 남자는 헐레벌떡 뛰었고 친구의 아파트로 향했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잊지 않는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며 즐긴 사람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죽음은 영원히 당신과 함께.

또한 당신의 원혼과 함께.


화장실에 간 두 번째 남자는 그 빨간 눈을 다시 보았고 수건걸이를 힘으로 뽑아 미친듯이 휘둘렀다.

그리고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세 번째 남자였다.

세 번째 남자도 두 번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둘은 시체가 되었고 그는 부인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세 번째 남자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신고했다.

곧장 경찰이 도착했는데 그 집에서 나온 사람은 트렁크만 입고 머리는 헝클어진 첫 번째 남자였다.

그는 자신이 결혼하지도 않았으며 이 집에 시체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 안은 피범벅에 시체까지 있었다.

친구가 유산으로 남겨줘 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는 남자는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한 젊은 경찰관이 형사에게 말했다.

옆 반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유명한 놈들이었다.

얌전한 아이들 괴롭히고 돈 빼앗고 심지어 성매매까지 강제로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제 그 경찰관이 네 번째 남자이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또한 당신의 원혼과 함께.



극단적으로 가정해 보자면, 세상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선함과 악함으로 구분 지어져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뉴스거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신림동 등산로에서 성폭행 및 살인을 저질렀던 최윤종,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학폭 피해자라며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합의금 줄 돈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서현역에서 칼부림을 벌였던 최원종은 유족들에게 지금까지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 40대 여성을 납치해 초등학교에서 성폭행했다는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흉악범죄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도 못한 시점에서 일부 초·중생 사이에서 플라스틱 칼 모형 완구인 당근 칼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기는커녕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취하고 있다.


세상이 밝아졌으면 하는 바람과는 달리 더 무심해지고 더 잔인하게 변해가는 것 같아 할 말을 잃게 만드는데, 결국은 이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

죄를 지었으면 그에 맞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시되어야만 이를 모방한 범죄는 물론 작고 큰 범죄들이 줄어들 것이다.

잡지였나? 책이었나? 한 문장이 문득 떠오른다.

범죄자들은 자신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 자체에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범죄자들도 벌받는 것은 싫다고 한다.

하기야 벌받는 게 싫으니 재판에서 판사에게 반성문을 쓰고 온갖 변명으로 본인들은 변호하는 것이겠지.

피해자가 아닌 판사에게 반성문을 쓰는 것 또한 참 아이러니다.

이렇듯 법은 가해자를 위해 존재하고 세상은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추세로 흘러가는데 죄가 분명하면 응당 받아야 할 벌도 더 세게 받아야 한다.

덧붙여, 촉법소년도 폐지되어야 한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흔들어 놓고 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읽고 있으면 섬뜩하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원죄에 대한 묵직한 울림이 크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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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에이미 블룸 지음, 신혜빈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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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스스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남편, 그런 그의 결정을 결국 받아들이는 아내.

조력자살을 지원하는 스위스의 비영리기관으로 가기 위해 둘은 그렇게 취리히로 향한다.


저자인 에이미 블룸과 그의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의 선택을 존중해 디그니타스로 향하는 그와의 마지막 여정이 담겨져 있다.


저자, 에이미 블룸은 1953년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심리치료사이다.

1993년 소설집 『내게로 와Come to Me』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으로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에 올랐고, 2000년 소설집 『눈먼 사람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볼 수 있다A Blind Man Can See How Much I Love You』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후보에 올랐다. 임상사회복지사로 일해온 경험을 토대로 TV 코미디 드라마 시리즈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의 극본을 쓰고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2022년 출간된 『사랑을 담아』는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스스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작가의 남편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스위스의 비영리기관 디그니타스의 승인을 받은 뒤 부부가 함께 취리히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때로 슬픔은 가장 지극한 사랑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이라는 평을 받으며 <타임> 선정 ‘2022년 최고의 논픽션 1위’에 이름을 올린 것을 비롯해 <뉴욕 타임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워싱턴 포스트> <보스턴 글로브>, NPR, 아마존 등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 함께 울고 웃으며 이별을 향해 나아가는 두 사람의 사랑 가득한 이야기를 그린 이 책은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울리며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의 결정


2020년 1월 26일 일요일

스위스 취리히

취리히로 향하는 이 여정은 브라이언과 내가 좋아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여행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여행이다.


스위스항공 좌석에 앉아 브라이언과 나는 서로를 위해 건배하며, 약간은 망설이다 '위하여'라고 말한다. 보통 우리는 '첸타니'라고 한다(이탈리아식 건배사로 '백 년을 누리세'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백 년'은 없다. 우리는 십삼 주년 결혼 기념일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그런 그가 스스로 삶을 떠나겠다고 선택한다면 지지해줄 수 있을까?


지난 몇 년간 병세가 진행되는 줄 모르고 지냈던 남편 브라이언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된다.

브라이언은 이내 자신에게 내려진 진단을 듣고선 알츠하이머병이 동반되는 긴 작별을 원치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종착지는 디그니타스가 되었다.



그와의 마지막 여정


브라이언은 보던 신문을 접어 비행기에 갖고 타려다 곧 생각을 바꿨다. 그에게는 거창한 계획 충동,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필요를 과잉 짐작하여 좋아하는 것들을 쟁여두다시피하는 버릇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예를 들면 4월에서 11월까지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갈 때 트렁크에 제물낚시용 미끼를 비롯해 덜 아끼는 낚싯대를 적어도 하나 이상 꼭 넣어두곤 했다. 식당에서 나갈 때는 박하사탕을 꼭 한 움큼 챙겨 침대맡 탁자와 사탕 담는 병과 자동차 글러브박스에 쟁였다. 이번 여행에서만은 아니다.


이따금 나는 그가 더 좋은 아내, 적어도 다른 아내를 만났다면, 그 사람이 이 결정에 반대하고 남편의 육신이 스러질 때까지 그를 이 세상에 잡아두기로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나는 옳은 일을 하는 거라고, 브라이언의 결정을 지지하는 게 옳다고 믿지만, 그가 이 모든 준비를 직접 하고 나는 그의 뒤를 새끼 오리처럼 충실히 졸졸 따라다닐 수 있었다면 마음이 한결 편했을 것이다.


취리히에 도착했다.

디그니타스의 스위스인 의사인 닥터 G와의 첫 면담을 갖기 전 하루가 남아 있었다.

월요일과 수요일, 두 차례에 걸쳐 브라이언과 면담을 진행한 뒤 목요일에는 디그니타스와의 최종 예약을 하게 된다.

공식적인 이메일이 도착했다.

디그니타스 아파트에서 브라이언이 동행자살을 위해 마실 펜토바르비탈나트륨을 처방해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즉, 두 차례의 면담에서 기대만큼 잘해내고 닥터 G가 브라이언의 분별력과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게 되면 수요일에 최종 승인을 받아 목요일에 디그니타스 아파트로 향하는 것이었다.


취리히로 향하기 전 디그니타스의 담당자 하이디가 브라이언에게 삶을 중단하려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알츠하이머라는 단어를 생각해내지 못했었다.

그는 하이디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삶을 중단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직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이 삶을 끝내고 싶을 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점점 더 잃어가기 전에."

1월에 취리히에 오라고 통보받았을 때, 그들은 서로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었다.

앞으로 함께 존재하지 않을 브라이언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


작은 도시에서 불행한 관계에 갇힌 중년들이 사랑에 빠지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키스를 하게 되고, 그 해 내내 서로를 피해다녔다는 것이 팩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브라이언이 에이미에게 걷자고 청했다.


난 바보가 아니에요, 이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 잘 알아요. 당신은 나한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할 테고, 혹은 내가 당신한테 그렇게 말하겠죠. 그러고 나면 우린 각자의 삶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면 난 평생 당신을 잊지 못하겠죠. 아니면, 각자의 삶을 끝장내고 서로와 함께할 수도 있고요.


그의 말에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브라이언과 에이미는 결혼하게 된다.



그와의 마지막


브라이언은 말이 없고, 이제 나는 미식축구 얘기가 미친듯이 듣고 싶다. 내가 그의 두 손을 잡고, 그는 내게 손을 허락한다. 사랑해사랑해사랑해. 내가 말한다. 정말 많이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가 말하고, 펜토바르비탈나트륨을 마신다. 나는 그에게, 그의 잘생기고 지친 얼굴에 온통 입맞추고, 그도 내 입술을 허락한다.


그의 숨소리가 바뀌고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잠드는 소리를, 그의 깊고 고른 숨소리를, 지난 십오 년 가까이 그의 옆에 누워 듣던 소리를 듣는다. 그의 손을 잡는다. 여전히 그의 무게와 온기가 느껴진다. 그의 피부색이 불그스름한 빛에서 좀더 창백한 분홍빛으로 바뀐다. 나는 그곳에 오래도록 앉아 기다린다. 이제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낯빛이 더 창백해지고 나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났음을 안다.


구토억제제를 먹은 뒤에라도, 원한다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다는 말에도 브라이언의 결심은 확고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온전히 그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이전에 안락사를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안락사를 앞둔 환자가 그런 말을 했었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이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래. 생명은 귀한 것이니 반대하겠지. 근데 말은 쉽겠지. 나는 어쨌든 죽을 날을 받아두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그들은 겪어보지 않았으니 이 고통을 모르겠지. 이 고통을 모르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사실 이 말을 듣고 벙쪘던 것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굉장히 고통스러워보였다는 것이었다.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인만큼 이에 대해 찬반논란은 여전히 뜨겁지만,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의 결정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한 어르신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나는 치매에 걸리게 되면 요양병원까지 갈 필요없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가족한테는 물론 나한테도 그게 제일 좋은 정답이야."

본인의 모습은 잃어버린 채 요양병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 할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안락사라는 소재를 다루었던 영화 「미 비 포유」, 주인공 윌은 오토바이에 치여 크게 다치고 만다.

전신마비 상태로 힘겨운 치료를 넘기며 그나마 손가락 몇 개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스스로 앉지도, 눕지도, 먹지도 못했기에 그에게 산다는 것은 사는 게 아니었다.

스위스 행을 결정짓고 만나게 된 간병인 루이자.

루이자를 만나 사고 난 이후 처음으로 많이 웃게 된 윌은 그녀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You are pretty much the only thing that makes me want to get up in the morning."

스위스 행을 알게 된 루이자 또한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 그는 예정대로 스위스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내 인생은 아니에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당신은 예전의 날 몰라요. 난 내 인생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요. 난 이 삶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기적이지만 당신이 나를 보면서 후회나 연민은 느낀다면..."

"이렇게 함께 있는 이 밤이 당신이 내게 준 가장 멋진 선물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끝내야 해요. 고통과 피곤함도 지겹고 아침마다 죽길 바라며 깨는 것도 싫어요. 난 더 나아지지 않아요. 의사들도 알고 나도 알아요. 돌아가면 스위스로 돌아갈 거예요."


결국 그들은 결혼기념일 15주년도 채우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그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안락사 정의 및 찬성 반대 근거 그리고 디그니타스 ▶ https://blog.naver.com/hanainbook/223201266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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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
에이미 하먼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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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때는 1850년대.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나오미와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존의 여정.

그러나 그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콜레라에 원주민 공격까지 뭐 하나 쉽게 쉽게 흘러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험난한 여정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을 위해 전진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가 매우 대단하다.

과연 그들은 원하는 종착지에 도착하였을까?


저자, 에이미 하먼은 월스트리트 저널, USA 투데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다.

하먼의 책들은 총 18개국 언어로 출판되었다. 유타 출신의 작은 시골 소녀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먼은 그동안 총 열다섯 권의 책을 썼고, 그중에는 월스트리트 저널과 워싱턴 포스트 베스트셀러 『왓 더 윈드 노즈(What the Wind Knows)』, USA 투데이 베스트셀러 『더 스몰리스트 파트(The Smallest Part)』, 『메이킹 페이스(Making Faces)』, 『런닝 베어풋(Running Barefoot)』 그리고 아마존 역사 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프롬 샌드 앤 애쉬(From Sand and Ash)』가 있다.

『프롬 샌드 앤 애쉬(From Sand and Ash)』의 경우 2016년 휘트니 어워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소설 『디퍼런트 블루(A Different Blue)』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USA 투데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판타지 소설 『더 버드 앤 더 스워드(The Bird and the Sword)』는 2016년 굿리즈 최고의 책 부문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하먼의 향후 책 출간 일정과 하먼의 포스팅을 보고 싶다면 www.authoramyharmon.com을 방문해 보기 바란다.




존과 나오미의 첫 만남


넓은 도로 한복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소곳이 앉은 노란 드레스의 그녀는 마치 한 송이 꽃과도 같았다.

모두가 먼지와 불만에 둘러싸인 채 부지런히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홀로 가만히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일렁였다.

존은 이내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있자 그녀는 순간 놀랐다가 방긋 웃어주었다.

그리곤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나오미 메이라고 해요. 저희 아버지가 당신 아버지 존 라우리 씨께 노새 두 마리를 사셨거든요. 혹시 당신과 아버지 두 분 다 존 라우리라고 불리시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아서요."

내민 손을 바라보니 손바닥은 얼룩덜룩하고 손가락 끝은 새까매 단정한 외모와는 부조화스러워 내민 손을 끝끝내 잡지 않았다.



존의 이야기


존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들의 존재를 민망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본인 스스로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존의 어머니가 속해있는 부족 원주민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두 발", 즉 한쪽 발은 백인의 발, 다른 쪽 발은 포니 족의 발이라는 뜻으로 양쪽 세계에서 존은 낯선 이임을 의미했다.

존은 어머니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다. 제니라 부를 뿐이었다.

제니는 존의 친어머니가 아니다.

이복 여동생들은 존의 아버지의 파란색 눈을, 머리카락 색은 제니보다 조금 더 밝은 빛을 띠고 있는데 존의 눈과 머리카락 색은 제니보다 조금은 더 짙은 색깔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는 제니라 불렀고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호칭을 사용하지 않거나 그냥 부인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제니를 어머니라 부르는 순간, 머리숱 많고 비뚤어진 미소를 지녔던 포니 족 여인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니깐.

어느 날, 아버지가 존에게 이런 말을 꺼내게 된다.

"그녀를 사랑했었다."

"네가 나를 나쁜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거 나도 안다. 나쁜 놈 맞아. 하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까지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마리는 나와 함께하는 삶을 좋아하지 않았어. 마리가 떠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그냥 보내줬다. 그리고 너도 보내줄 거다. 하지만 내가 마리를 억지로 보낸 게 아니라는 사실은 너도 알아둘 필요가 있어. 결코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그런 거 없었어. 만약에 마리가 허락만 해줬다면 나는 평생 마리를 아껴줬을 거다. 그 후로 8년이 지나 마리가 너를 나에게 그리고 제니에게 데려오기 전까지 나는 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존과 나오미 가족의 첫 만남


나오미에게는 와이엇, 윌, 웨브라는 남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존이 바라보는 메이네 가족은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존이 나오미 가족들을 만나고 있을 때, 나오미가 갈색 종이 꾸러미를 들며 다가왔다.

존은 다가오는 나오미에게 자연스레 "메이 아가씨."라 불렀는데 웨브는 이렇게 정정했다.

"누나 이름은 콜드웰 부인이에요, 라우리 씨."



나오미의 이야기


미주리 강의 강물은 웨브의 머릭카락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

마구용품점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자 최고 품종의 노새를 판매한다는 라우리씨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미주리 강을 왜 빅 머디라 부르는 건지 물었다.

"강바닥이 모래로 덮여 있는데 그 모래들이 계속해서 이동하고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수면 아래에 물길이 계속 새로 만들어진단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면서 강물을 흙탕물로 만들어 놓지. 그 물에 한 번 빠졌다가는 나오는 데 고생 좀 하게 될 거다."

나오미가 온 일리노이 주가 미주리 주와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인트조지프에는 고요함과 탁 트인 땅이 없으니 기대 이하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카운슬 블러프스에서 강을 건너 오리건 준주까지 갈 생각을 했지만 카운슬 블러프스는 싸움을 벌이는 곳에 지나지 않아 남쪽으로 출발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세인트조에는 마구점과 증기선 그리고 노새들이 있다고 했는데…… 온종일 존 라우리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사실 서부로 가는 것은 나오미의 목표가 아니었다. 대니얼의 꿈이었다.

결혼한 지 세 달이 지나고 열아홉 생일이 며칠 안 남던 날 대니얼은 갑작스레 병에 걸려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가 죽었을 때 임신한 게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극심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흘러 나오자 괜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오미는 과부인 동시에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다.

1년이 흘러 나오미는 대니얼을 묻기로 했다.

콜드웰 부부는 대니얼이 없어도 엄연히 콜드웰 가의 일원이라 했지만 나오미는 대니얼이 없으니 영속되어 있다는 의무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콜드웰 부부에게 자신의 가족들과 서부로 갈 계획이라고 말하자 콜드웰 씨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에 나오미는 간단하게 말했다. "저희 어머니께 제가 필요해요."

콜드웰 부부에게는 딸 루시는 물론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담 하인스 그리고 열여섯 살 아들인 젭도 함께 할 것이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니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콜드웰씨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니 콜드웰 씨는 대니얼의 죽음으로 관심받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 마냥 행동했다.

무엇보다 중년의 시기는 살아보지 않고 노년으로 접어든 것마냥 과부 콜드웰이라 부르는 게 더더욱 싫었다.


붙임성 좋아보이는 그랜트 애벗이 존의 엄마 제니가 자신의 여동생이라 소개하며 존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나오미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존 라우리 씨와 분명히 닮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이국적인 생김새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피부는 태양에 그을린 색이었고 머리카락도 블랙커피 색깔이었는데.




여정의 시작


여정을 위해 총 마흔 가족이 그랜트 애벗과 계약을 맺었다.

막힘없이 나아갈 것 같은 여정은 말그대로 느릿느릿, 단조로웠다.

봄 야생화들이 습지대에서 빼꼼거리며 있고 강과 개울이 곳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느리게 이동하는 건지 쉼 없는 덜컹거림 때문에 잠이 들어버린 사람들이 자기 마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나름 요령도 생기긴 했지만 지루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정은 시작되었다.




관계의 전환


나오미는 엄마에게 세인트조지프의 거리에서 존 라우리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놀란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했지만 엄마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라우리에 대한 꿈을 꿨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만…… 그 사람이 너에게 잡혀줄지는 엄마도 모르겠구나. 그 사람은 불신과 부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인내심이 필요할 거야, 나오미. 인내심과 이해심이. 그리고 네가 그 둘 중 하나라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람이 우리 곁에 오랫동안 있어 줄지는 모르겠구나."

매번 공책에 글을 쓰고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연 존은 마음과 다르게 나오미에게 툴툴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나오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좋은 대화를 좋아해요. 관심이 가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요. 당신은 관심이 가는 사람이에요. 당신과 이양기를 더 자주 나누고 싶어요."

"내가 입 다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말 때문에 곤경에 처할 거라고 아빠가 그러셨어요. 존 라우리 당신 생각에도 내가 문제인 것 같나요?"

존은 제니 생각이 번뜩 나 나오미에게 존 라우리라 부르지 말라 했다.

그러자 나오미는 답했다.

"그럼 나는 당신을 존이라고 부르고, 당신은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가을, 겨울 그리고 여정


여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나오미의 엄마가 아이를 출산하였고 W로 시작해야만 하는 아기 이름은 울프로 결정 났다.

인물들의 갈등은 물론 콜레라도 행렬을 한 번 덮쳤었고 원주민 또한 큰 사건을 안겨다 준다.

그저 앞으로 나아 가면 아무 일 없을 것 같던 여정, 그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나오미.

스무 살에 과부가 될 것이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렇게 자신의 꿈은 아니었지만 대니얼의 꿈이었던 서부로 가족과 함께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다.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존.

그는 그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참 외로운 존재이다.

그렇게 나오미도 존도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2천 마일에 달하는 오리건 트레일의 삶은 매우 힘들고 가혹하기만 하다.


우리는 밤에도 달빛에 의지해 빠르게 전진했고, 다음날 토마스 강에 도착했다. 우리는 수면과 풀 그리고 모기가 둥둥 떠 있지 않은 물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우리는 베어 강을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계곡에는 초록 풀들이 무성했지만 벌레들이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다. 토마스 강을 지나자마자 메뚜기떼의 습격이 시작됐다. 우리는 머리 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메뚜기들이 달라붙으면 소리를 꺅꺅 지르고 옷을 때려가며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 생존을 위한 투쟁이 있었으며, 길을 찾아내기 위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결말을 살짝만 언급하자면, 모두가 그 땅에 도착할 순 없었다.

또한 앞서 설명했던 존이 두 발이란 별명을 가진 사실도 염두해두고 읽어야 한다. 나오미의 동생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소설이지만 참고로 저자 남편 조상인 존의 이야기를 참고하여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글의 흐름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시작한 여정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 투쟁 그리고 용기와 희망까지!

『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에는 이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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