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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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버지니아 울프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면 망설이지 마라.

문학과 인문학의 세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버지니아의 13편의 작품들을 한번에 볼 수 있다.


저자, 버지니아 울프의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으로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다양한 소설 기법을 실험하여 현대문학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화주의자, 페미니즘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빅토리아 시대 소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고, 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당시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여성들의 적극적인 예술 활동 참여, 동성애자들의 권리, 전쟁 반대 등 빅토리아시대의 관행과 가치관을 공공연히 거부하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머니의 사망 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의 사망 이후 울프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다. 1905년부터 문예 비평을 썼고,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버지니아 울프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며 다작을 남긴 야심 있는 작가였다. 그녀의 픽션들은 플롯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초점을 맞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쓰였다.




날씨가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차라리 더운 여름을 버티는 게 낫지 개복치 체력인 나에겐 겨울은 너무나도 힘들다.

단독주택은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도 우풍까지 완벽하게 막을 수 없어 마냥 좋다고 할 순 없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컨디션이 좋질 않아 약으로 버텼다.


병원에서 검사받느라 반나절을 꼬박 보낸 덕분에 업로드하지 못한 책을 이제야 올려본다.

필사도 함께 하고 있는데 버릴 문장이 하나도 없다ෆ



Women have sat indoors all these millions of years, so that by this time the very walls are permeated by their creative force, which has, indeed, so overcharged the capacity of bricks and morrar that it must needs harness itself to pens and brushes and business and politics.


여성들이 수백만 년 동안 방 안에만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제 벽에 여성들의 창조력이 모두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방 안의 벽돌과 시멘트가 여성들의 창조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계에 다다를 정도이므로, 이제 여성들은 펜과 붓을 사업과 정치에 써야 할 것입니다.​


현대로 넘어와서야 많이 누그러지긴 했으나 지금도 여성 차별은 존재한다.

하물며 과거에는 어땠을까?

역사서를 펼친 그녀는 여성이 문학 창작에서 그간 소외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무리 능력이 대단한들 사회적 환경이 여성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불리하기 때문에 같은 선에서 출발했다 해도 결국은 남성만큼 우대받지는 못했을 것이란 결론에 다다른다.

19세기 초는 여성이 슨 작품들이 서가의 한 칸을 채웠을 정도로 많이 발전한 시기였다.

특징이라면 이들은 대부분 소설을 썼는데 제인 오스틴의 회상록 일부를 보면 이에 대한 이유를 확인해볼 수 있다.

중산층이었기에 가족으로부터 빈번하게 방해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경험 부족이 곧 작품의 한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One can only show how one came to hold whatever opinion one does hold. One can only give one's audience the chance of drawing their own conclusions as they observe the limitations, the prejudices, the idiosyncrasies of the speaker. Fiction here is likely to contain more truth than fact.


사람들은 자신이 지니게 된 의견의 결과물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청중들은 연설자의 한계, 편견, 특이점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해야 합니다. 특히 소설에 있어서는 사실보다는 진리가 더 많이 담겨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Women have served all these centuries as looking glasses possessing the magic and delicious power of reflecting the figure of man at twice its natural size.


여성들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두 배로 확대하는 마법과 매혹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돋보기 역할로 남성의 모습을 비춰주었습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글쓰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느 쪽으로도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물질적 풍요로움도 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자기만의 방」을 읽어보면, 버지니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두 가지 조건으로 돈과 자기만의 방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로 돈은 경제적 자유를, 자기만의 방은 시공간적 자유를 의미한다.

맞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꿈을 펼치려면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만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을 테니깐.



Perhaps it was the middle of January in the present year that I first looked up and saw the mark on the wall. In order to fix a date it is necessary to remember what one saw.


아마도 올해 1월 중순쯤, 나는 처음으로 눈을 들어 올려 벽에있는 자국을 보게 되었어요. 날짜를 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The mark was a small round mark, black upon the white wall, about six or seven inches above the mantelpiece.


이 흔적은 작은 원 모양의 흑색 표식이었고, 벽난로 위로 6~7인치 정도 높이에 있었어요.


How readily our thoughts swarm upon a new object, lifting it a little way, as ants carry a blade of straw so feverishly, and then leave it.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쉽게 새로운 대상으로 옮겨가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마치 개미가 한 조각의 짚을 열심히 들어 올려 옮겨두는 듯하다 금방 놓아버리듯 생각합니다.


That is the sort of people they wereㅡvery interesting people, and I think of them so often, in such queer places, because one will never see them again, never know what happened next.


그들은 정말로 흥미로운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을 자주 생각하곤 해요. 정말 이상한 곳에서까지 그들을 떠올리는데,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고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곧 영감이 될 수 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이 또한 인생이란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So long as you write what you wish to write, that is all that matters. 당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한, 그것이 전부입니다.


드물긴 해도 간혹 독서나 공부를 하지 않거나 필사를 하지 않는 때도 있다.

그러나 7살 때부터 지금까지 365일 빼먹지 않고 해왔던 것은 바로 일기 쓰는 것이다.

꼬박 써 온 일기이다 보니 그 양이 엄청나다.

그 날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깊은 인상을 준 무언가에 대해 쓰기도 해 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 간 글들이 가득하다.


나름 내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지만 확언할 순 없는 것 같다.

대학교 때, 한창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 빠져 있었다.

그리곤 울프의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을 투영시켜 바라보기도 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진정한 자립은 결국 나 자신을 완벽하게 알고 파악하는 것이 첫 걸음이다.

울프도 이를 알았기에 글을 통해 진정한 자립의 의미를 전하고자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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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25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여성비하 발언을 날리는 일부 사이비 정치인들은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부류인 듯, ㅠㅠ
 
노량 : 최후의 바다
박은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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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만일 원수들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을 심판하는 마지막 전투가 펼쳐진다!


저자, 박은우는 역사팩션 작가이자 스릴러 작가로, 『전쟁의 늪』, 『명량』, 『청계산장의 재판』 등을 출간했다.

암살의 위기에 빠진 이순신이라는 기발한 소재를 스릴러 장르에 담은 『전쟁의 늪』을 펴내면서 본격적인 이순신 소설을 집필했다.

이어서 출간된 『명량』은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라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번에 집필한 『노량』은 그의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노량해전의 전말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열한 격전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는 스릴러 소설 『청계산장의 재판』으로 한국콘텐츠진흥원 스토리공모대전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와 계약되어 현지에서 드라마로 제작 중이다.





이순신 장군의 최대, 최후 해전인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냈으며 왜군, 명군 모두 피하고 싶을 만큼의 큰 전투였다.

1597년 10월 17일 직산 전투, 1597년 10월 26일 명량 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가세가 기울여졌고 가망 없는 전쟁에 철수하려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다이묘들은 남해안에 왜성들을 짓고 수비하기에 이르렀다.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공세를 가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진 못 했다.

그러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게 된다.


정권을 위임받은 고다이로와 고부교들은 다이묘들에게 공식 철수하라고 명했는데, 적의 전력을 온전히 보내줬다간 재침략을 당할 수도 있거니와 7년 동안 조선 곳곳을 잔악무도하게 유린한 대가를 돌려줘야 했다.

조명연합군이 이 소식에 사로병진책을 세워 공세를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98년 12월 초, 고니시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연락선만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해달라며 뇌물을 보냈는데 이에 이순신은 사신을 죽이려다 참았지만 진린은 일본군 4명이 탄 고니시의 연락선 1척을 허용하며 포위망을 통과하게 했다.

이에 격노한 이순신이 추격을 명해 한산도까지 추격했지만 결국 연락선을 놓쳤다.

한편 연락을 받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고니시의 사위), 부산의 테라자와 히로타카에게 남해 창선도로 소집령을 내린다.

이로 인해 순천의 일본군, 창선도의 일본군 사이에 조명연합군이 도리어 포위된 처지에 놓이게 된다.


1598년 12월 15일 늦은 오후,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출전하게 된다.

진린과 등자룡은 이순신이 선물한 판옥선 2척에 나눠 타고 출전했으며 그 뒤를 사선, 호선들이 뒤따랐다.

당시 함대를 서쪽의 순천왜성을 위장공격하려는 극소수의 위장함대, 동쪽의 노량해협을 포위하려는 본함대와 복병함대로 나누었다.


1598년 12월 15일 늦은 밤, 이순신의 위장함대가 서쪽의 순천왜성을 무너뜨릴듯 포격하며 상륙할 것처럼 위장했다.

이에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이 연락선이 나간 것을 알아 구원군이 오기 전에 순천왜성을 끝장내려는 것으로 해석해 봉화 수준이 아닌 산을 불태우며 당시의 긴급함을 알렸다.

창선도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조선 수군이 노량 쪽을 막지 않고 순천 쪽으로 갔다고 해석하며 노량해협을 신속히 통과하기로 결정한다.


1598년 12월 16일 오전 0~2시

일본 함대가 창선도를 출발해 노량해협을 통과하자 조선 복병 함대가 기습 포격하며 해전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이 순천 쪽에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일본 수군은 당황하였다. 수 척의 일본 함선이 격침될 쯤 시마즈는 복병 함대의 수가 적음을 파악하고 이들을 포위하려 했다.

그러자 죽도 부근에 매복하던 명나라 함대가 합류했다.

진린의 판옥선은 도독기를 높이 올리고 북을 치며 진격했으며 등자룡의 판옥선은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돌격했다.

조선 복병 함대는 기습 외에도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명나라 수군을 호위하는 임무 또한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함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공격하였다.

전면전도, 다시 되돌아가기도 불가했기에 시마즈는 빨리 전진하기를 선택한다.


1598년 12월 16일 오전 2~4시

일본 함대가 관음포까지 전진했을 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 본 함대가 등장하며 일본 함대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조선 본 함대는 첨자찰진(삼각형의 돌격형)으로 경상우수사 이순신(무의공)을 선봉장으로 어린진(전방이 두터운 방어형)으로 전진하던 일본 수군의 옆면에 등장해 파고 들어 지휘부 쪽을 위협하자, 지휘부의 수호를 최우선하는 일본 함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

때마침 부는 북서풍을 이용해, 조명연합군이 화공(불화살, 신기전, 불 붙은 짚섬)까지 가했다.

순천왜성 쪽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위장함대에 속은 것을 알고 군영을 철수해 배를 출발시켰다.


1598년 12월 16일 오전 4~6시

일본의 선봉대가 불능에 빠졌을 무렵, 시마즈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 방향으로 포위망을 벗어나자고 총공세를 명령한다. 이에 아직 전력이 보존 된 중위-후위 병력들이 빠르게 돌진했다.

때마침 등자룡의 판옥선이 명나라 아군이 잘못 쏜 포에 의해 불이 났다. 일본 함대가 여기로 공격을 집중하자 결국 등자룡이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버린다.

명군 파총 심리가 등자룡의 배를 구하러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일본군은 진린의 판옥선에도 달려들었으나, 이순신의 본 함대가 또 다시 진린을 구원하였다.

명나라 수군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의 본 함대는 일본 수군 중앙을 파고들던 첨자찰진에서 점차 포위진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근접한 일본 함대에 포격을 가하며 포위망을 조이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야간이었기에 전함식별 및 조준이 어려워 평소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화포발사를 해야 했고, 근접전/백병전도 자주 발생했다.


1598년 12월 16일 오전 6~8시

명나라 수군 방향으로 돌파가 무산된 상황에서, 바닷물의 방향이 바뀌었다. 야간이라 방향을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 수군은 바뀐 물의 방향을 따르면 다시 노량해협을 지나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관음포 앞바다의 파도는 관음포 만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일본 수군은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조명연합군은 관음포 입구에 정렬해 입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포위섬멸하려 하고, 일본 수군 역시 죽기살기로 관음포를 다시 나가기 위해 최후의 발악으로 달려든다.

순천왜성의 고니시는 해가 밝은 뒤 시마즈의 구원함대가 대패하는 것이 보이자 먼 바다로 도망쳤다.


1598년 12월 16일 오전 8~10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대장선 방향으로 탈출하려 하는데 이순신을 비롯해 전라좌수군이 직접 돌파를 시도하는 선박들을 추격해 포위한다.

일본군 선두의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장선이 결국 반파되자 일본군 후방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군이 관음포를 또 빠져나와 난전이 발생하였고 덕분에 시마즈 요시히로도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 난전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무술년 9월에서 11월까지의 기록으로, 픽션이 가미된 소설이다.

기적과도 같은 승전이나 다름없었던 명량 대첩 이후, 군사와 물자가 부족했던 실정이었다.

당시 이순신은 백성들이 안심하고 바다를 통행하며 생산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결과적으로 군량이 충족되니 부족한 군사를 빠르게 모을 수 있었다.

이는 오롯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왕과 조정 대신들에게는 눈엣가시였으리라.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 할지라도 그 이후에는 쓸모없는 존재 혹은 두려움의 존재로 기피되기 때문에 숙청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던 시대였다.

다행히 명의 황제 신종이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내리는 동시에 중국에서 파병한 수군총사령관인 도독 진린과 같은 계급인 대명수군도독으로 임명했으니 아니꼽더라도 왕과 조정 대신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전란의 원흉인 풍신수길 사망하자 본국으로 귀환을 준비하는 왜군.

구원병으로 왔지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명군.

승리를 바라지만 그만큼 자신보다 그 위치가 높아질까 경계의 날을 세우는 조선의 왕.

오롯이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에게 있어서 모든 이들이 나름의 의미를 가진 적이라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송군관이 총에 맞았다!"

이순신이 송희립을 찾아보려는 순간 총탄 한 발이 그의 왼쪽 가슴을 뚫었다.

감았던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 속에 여러 얼굴들이 나타났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병사들이 귀를 가져다 댔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아라."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될 수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었다.


으레 버릇이 되어 픽션이 가미된 역사소설을 보게 될 때면 꼭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본 후 책을 펼친다.

결말을 알기에 영화 「명량」은 봤지만 「노량」이 작년에 개봉했어도 보질 못했었다.

작년에 여행을 다녀오며 사진으로 남겨두었던 거북선과 푸르르게 펼쳐진 바다를 다시 보고 나니 감사한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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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2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기선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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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정리하다 오랜만에 펼쳐본 더클래식 시리즈, 영어공부 겸용으로 구매해 잘 읽었었다.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어 있어도 내용이 많게 느껴지지 않아 오랜만에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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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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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장정리하다 오랜만에 펼쳐본 더클래식 시리즈, 영어공부 겸용으로 구매해 잘 읽었었다.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어 있어도 내용이 많게 느껴지지 않아 오랜만에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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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합본 한정판)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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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저자, 이민진은 전 세계에서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이다.

경계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시선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으로 복잡다단한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며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을 잇는 작가”라는 찬사 속에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했으나, 건강 문제로 그만두게 되면서 오랜 꿈이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4년부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08년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으로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두 번째 장편소설 《파친코》는 작가가 역사학과 학생이었던 1989년에 ‘자이니치’라 불리는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후 2017년 출간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집필한 대작이다.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과 함께 4년간 일본에 머물며 방대하고 치밀한 조사와 취재 끝에 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4대에 걸친 가족사를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일본 버블경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다룬 이 책은 출간 즉시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뉴욕타임스》, 《USA투데이》, 아마존, BBC 등 75개가 넘는 주요 매체에서 앞다투어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고,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33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오른 《파친코》는 계속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이민진 작가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한국인 디아스포라 3부작’의 완결작이 될 세 번째 장편소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영도라는 어촌에서 나고 자란 늙은 어부와 아내에게는 아들 훈이가 있다. 아들을 셋이나 낳았지만 몸이 약한 큰아들 훈이만 살아남았다.

이후 성인이 된 훈이는 양진과 혼인한 뒤 딸 선자를 낳게 된다.

세상에서 훈이만큼 딸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도 드물었다. 훈이는 자식을 웃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토록 선자를 예뻐하던 훈이가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겨울에 결핵으로 죽게 된다.

듬직한 남편이자 아버지를 잃은 양진과 선자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슬픔은 잠시 가슴에 묻어두고 다음 날 아침 젊은 과부가 된 양진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


"오빠 아이를 가졌어예."

"확실해?"

"예, 그런 거 같아예."


"선자야……"

"아내와 세 아이가 있어. 오사카에."

"내가 널 잘 돌봐줄게. 하지만 너랑 혼인할 수는 없어. 이미 일본에서 혼인신고를 했어. 일이랑 얽혀 있는 문제가 있어."


그렇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저런 사람이 미혼일 리가 없잖아.

한수가 바닷가에서 제 몸을 원했을 때 마음대로 탐하게 내버려 두었으니, 혼인 없이 아이만 낳게 되면 자신은 평생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다.

숲속 흙바닥에서 남자와 몸을 섞었으니 난잡한 저 때문에 어머니의 평판도 떨어질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 뱃속에 있는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 같은 진짜 아버지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선자는 고민 끝에 단호하게 한수와 갈라지게 된다.


어느 날, 목사 이삭이 양진에게 물었다.

선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오사카로 데려가면 안 되겠냐고.

자신이 몸이 아파 결혼을 안 했던 것이지만 결혼하게 되면 선자는 물론이고 선자의 아이 또한 사랑으로 품을 것이라고.

양진은 이삭의 계획을 선자에게 말했고 선자는 그 사람의 아내가 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삭과 혼인하게 되면 하숙집, 어머니, 선자 본인 그리고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낙인만큼은 주어지지 않을 테니깐.

오히려 좋은 집안의 훌륭한 사람의 성을 아이에게 물려주게 될 테니깐.

그렇게 선자는 이삭을 따라 오사카로 향하게 된다.




💭

대부분 파친코를 드라마로 먼저 접했을 것이다.

나는 책을 보고 이후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만약 책도 드라마도 보지 않았다면 책으로 꼭! 먼저 보길 추천한다.

읽는 내내 괜스레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도 없지않아 있었는데 특히 선자와 한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참 안쓰러웠다.


"야쿠자는 일본에서 제일 더러운 사람들이에요. 폭력배들이에요. 상습범들이라고요. 가게 주인들을 협박해요. 마약을 팔아요. 윤락가를 지배해요. 무고한 사람들을 해쳐요. 최악의 조선인들이 모두 이런 폭력단 일원이라고요. 내가 야쿠자에게 돈을 받아 공부했는데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난 절대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지 못할 거예요. 엄마가 이렇게나 어리석다니."

"어떻게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만들 수 있겠어요? 엄마가 날 더럽혔어요."

"난 평생 일본인들한테 내가 조선인 핏줄이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조선인들이 화가 많고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속임수를 쓰는 범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요. 평생 이런 소리를 견뎌야 했어요. 난 백이삭처럼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절대 목청을 높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 핏줄은, 내 핏줄은 조선인 핏줄이에요. 게다가 이제는 내가 야쿠자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내가 어떻게 하든 절대 이 피는 바꿀 수 없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어요. 어떻게 내 삶을 망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리 경솔할 수가 있죠? 어리석은 엄마와 범죄자 아버지라니. 난 저주받았어요."


파친코는 일본인들에게 국민 도박 기계로 불린다. 즉, 도박이 아닌 놀이로 분류되어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정착해 정식 직업을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보니 입에 풀칠이라도 했기에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파친코는 야쿠자가 운영한다는 인식이 강해 파친코 사업을 천시하는 일로 치부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떠났지만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요새 뉴스 보는 것이 참 불편하기만 하다.

국방부에서 장병들의 정신교육 책자인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에 독도를 영토 분쟁 지역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후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사과하며 전량 회수하기로 했다지만 보고도 믿기질 않아서 순간 국방부의 고위급들이 친일파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문득 국가유공자 한 분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잊혀지지만 않으면 된다. 이름 석 자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데 그저 잊혀지지 않게 기억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이따금씩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

역사가 기억하는 이름들과 함께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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