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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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아무튼 모모에게 가 보게!"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모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 혹은 현학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력이 있는 것도,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들어주는 능력만 있었을 뿐인 모모는 마을 사람들에게 '열쇠'같은 존재였다.

빠르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당신도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는가?


저자, 미하일 엔데는 남부 독일에서 초현실주의 화가인 에드가 엔데와 역시 화가인 루이제 바르톨로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나치 정부로부터 예술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아 가족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부모의 예술가적 기질은 엔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글, 그림, 연극 활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엔데의 예술가적 재능은 그림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학, 연금술, 신화에도 두루 정통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특히 컸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즈음, 발도르트 학교에서 수학하다 아버지에게 징집 영장이 발부되자 학업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나치의 눈을 피해 도망다녔다.

이후 뮌헨의 드라마 학교에서 잠깐 공부를 더 하고서는 곧바로 진짜 인생이 있는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연극배우, 연극 평론가, 연극 기획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목차

1부 모모와 친구들

제1장 어느 커다란 도시와 작은 소녀

제2장 뛰어난 재능과 아주 평범한 싸움

제3장 폭풍 놀이와 진짜 소나기

제4장 말 없는 노인과 말을 잘 하는 청년

제5장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와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


2부 회색 신사들

제6장 똑떨어지는 엉터리 계산

제7장 모모는 친구들을 찾아가고 한 명의 적이 모모를 찾아온다

제8장 많은 꿈과 몇 가지 의혹

제9장 열리지 않는 좋은 모임과 열린 나쁜 모임

제10장 맹렬한 추격과 느긋한 도주

제11장 악당들의 모략

제12장 모모, 시간의 근원지에 가다


3부 시간의 꽃

제13장 그 곳에서의 하루, 이 곳에서의 한 해

제14장 너무 많은 음식과 너무 짧은 대답

제15장 기기를 다시 찾았다 잃다

제16장 풍요 속의 궁핍

제17장 크나큰 두려움과 더 큰 용기

제18장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

제19장 포위된 이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0장 뒤를 쫒던 자들을 뒤쫒기

제21장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끝



어느 커다란 도시와 작은 소녀


내려다보면 원형, 타원, 반원 모양이 가득한, 계단식으로 겹겹이 이루어져 있는 관중석이 있는, 돌로 지어진 이 곳을 사람들은 원형극장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원형극장에서 모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누구의 아이인지, 몇 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린 아이임은 분명했다.

말라깽이에 칠흑같이 새까만 고수머리를 한 여자아이는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랗고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원형극장에서 살게 되었고 떠날 생각이 없어보이는 모모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허름한 극장터를 집처럼 꾸며주었다.


모모가 사는 원형극장에는 여느 때처럼 마을 사람들이 찾아온다.

꼭 놀러오는 것만은 아니다. 복잡하게 얽혀진 실타래를 풀기 위해 오기도 한다.

모모에게는 뛰어난 재능이 있는데 바로 '들어주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얽혀진 실타래란 다툼, 언쟁을 의미한다.

크게 싸움이 일어나면 일단 싸움의 주인공들은 어느새 모모 앞에 앉아있다.

어린 아이가 이렇다 저렇다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간에 가만히, 가만히 말할 때까지 기다리곤 말문이 열리면 가만히, 가만히 듣는다.

사실, 왜 싸웠는지 자초지종을 듣고 나면 별 것 아닌 싸움들이 많다. 책 속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사람들이 있다, 정작 그게 얼마나 상대방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는지도 모르고.

또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는 경우도 있고.

이유 없는 싸움의 유형은 많고도 많다.

참 아이러니한 건 이렇게 싸우고도 조금 지나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왜 그렇게 싸웠는지 뒤돌며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 속에 응어리가 가득 찼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한편으론, '내 이야기 좀 (네가) 들어줘.'라고.


모모는 이 세상 모든 것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도 귀 기울여 듣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모만큼 잘할 수 있는지 한번 직접 시도해보길 바란다.


회색 신사들의 맹렬한 추격과 느긋한 도주


"20년 전부터 하루에 한 시간씩만 저축하셨더라도 당신은 지금 2,628만 초의 재산을 갖고 계실 겁니다. 매일 두 시간이면 그 곱절인 5,256만 초가 되고요. ……"

"아주 간단합니다. 저축한 시간을 5년 동안 찾지 않으시면, 저축하신 시간만큼의 이자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재산은 매 5년마다 갑절로 불어나는 거지요. 아시겠어요? 10년 후면 원래 액수의 네 배가 되고, 15년 후면 여덟 배, 이런 식이 됩니다. 만약 20년 전부터 매일 두 시간씩만 저축하셨더라면, 당신은 예순두 살이 되는 해, 그러니까 저축을 시작하신 지 40년 되는 해에는 저축하신 양의 256배가 되는 시간을 마음대로 쓰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것을 계산하면 269억 1,072만 초가 됩니다."


마을에 나타난 회색 신사들.

회색 신사들은 회색 연필을 꺼내 아낄 수 있는 시간과 이자를 계산한 다음 거울에 숫자를 쓰며 저축하라고 종용한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없이 시간을 쓰기 시작했고 죽자 살자 일만 했으며 어느새 모모는 마을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빨리, 빨리'를 재촉하는 세상이 되어버림과 동시에 모든 것이 차갑고 딱딱하게 변해갔다.

물론, 우리는 버리는 시간 없이 일을 하며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발전하고 발전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면 결국은 회색 신사에게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쉴 틈 없이 일하던 분이 갑작스레 병이 나거나 세상을 떠날 때를 보며 느낀 것은 일도, 자기계발도 중요하지만 오롯이 나만을 위한 휴식도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침구 속에 퐁당 뛰어들 때는 잘 때를 제외하곤 거의 누운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반강제적이긴 하지만) 아프면 무조건 누우며 휴식부터 취한다.

잠도 줄여가며 일도 열심히 하고 자기계발에도 전념하는 분들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 분들 보면 나 또한 1분 1초 아껴가며 사는 게 답이라 생각했는데 꼭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시간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오롯이 자신이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부여한 뒤, 나머지 시간을 금같이 여기며 살아가면 된다.

모두가 제각각인만큼 정답인 삶은 없으니깐.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끝


"그 병은 어떤 병인데요?"

"처음에는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해. 허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지. 한 마디로 몹시 지루한 게야. 허나 이런 증상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게 마련이란다. ……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아. 웃음과 눈물을 잊는 게야. 그러면 그 사람은 차디차게 변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지경까지 이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어. 회복할 길이 없는 게야. 그 사람은 공허한 잿빛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게 되지. 회색 신사와 똑같아진단다. 그래,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그 병의 이름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란다."


호라 박사님과 거북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모모.

이들은 어느새 회색신사들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회색신사들은 자신의 목숨줄과 같은 시가를 뺏기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방해꾼인 모모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앞에서 말한 것과 연결지어 말하자면 우리가 너무 '몰두'하는 상황이 되면 (대부분 그렇지 않지만) 일부는 한순간에 푹 꺼지기도 한다. 그것은 의욕일 수도 있고 기쁨, 재미 등일 수도 있다.

회색신사와 열심히 싸웠던 모모는 결국 시간을 되찾게 된다.

꽃들의 구름은 천천히 사뿐사뿐 내려앉았고 꽃들은 눈송이처럼 얼어붙은 세상 위로 떨어졌으며 눈송이처럼 살며시 녹아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원래 있었던 곳인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이전과 같이 흐르게 되었고 모든 것이 활기를 띠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타게 찾았던 모모의 친한 친구인 베포 할아버지를 골목길에서 만나 둘은 원형극장으로 향하게 된다.

언제 와있었는지 관광 안내원 기기, 파올로, 마시모, 프랑코, 니노, 릴리아나 등이 그들을 맞았다.

끝은, 결국 새로운 시작이었다.



새해의 첫 책은 꼭 『모모』로 올리고 싶었다.

작년을 재독의 해로 정해놓고선 다시금 읽고 싶은 책들을 펼치고 싶었는데 새로운 책들을 읽고 아프기도 해서 재독했던 책들이 극히 적다.

그래서 올해는 꼭 재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렇게 펼쳐든 새해 첫 책이 바로 『모모』다.

(올해는 꼭 임시저장글에 묵혀둔 글들을 하나씩 끄집어내기로 다짐했기에 독서 그리고 재독에 관한 것부터 글쓰기에 관한 것까지 차근차근 써 볼 생각이다.)


『모모』를 처음 읽었을 때가 눈이 많이 내리던 한겨울이었다.

중학교 때, 도서실에서 독서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지난 번에 봤던 책을 마저 읽고 나니 이십 여분 정도 남았었다.

그렇게 다음 책을 고르기 위해 서가를 둘러보다 눈에 띈 책이 바로 『모모』였다.

끌리듯 손에 집어들었던 『모모』는 읽는 순간 빠져 들었고 야속하게 종소리가 울려 다 못 읽게 되자 다음 주까지 기다리진 못하겠고 집에 가서라도 꼭 읽어야겠다 싶었다.

그리곤 곧장 도서실에서 대여하였고 집에 가자마자 그 날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모모와 회색 신사와의 접전은 두 번은 더 읽었는데 그 때 그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살자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되었고 그 다짐은 어느새 무색하게 치열한 이십 대를 보내게 되었다.

(솔직하게) 뒤돌아 생각해보면 나는 회색 신사에게 시간을 빼앗겼지 않았나 싶다.

정작 나를 돌보지 못하였다. 즉,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늦었다고 할 때가 정말 늦었다는 것이 맞으니, 이제는 그 순서가 바뀌었다.


앞서 말했듯이, 일도 자기계발도 열심히 사는 게 맞다.

하지만 정작 놓치지 않는 것이 있는지 꼭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 또한 고려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면 정말, 엄지 척이다!


발목까지 쌓일 정도로 폭설이 내려 마당에 쌓인 눈 때문에 삽질하다 허리를 살짝 삐끗했는데 이제야 괜찮은 듯하다.

1월 1일이 되고 곧장 올리고 싶었던 리뷰였는데 10일이나 지난 지금 이제야 올린다.

(묵혀있는 글들 중에 올리고 싶은 글들이 많으니 내일도 하나 더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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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3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모옆에 말린 장미 노란색이였다고 믿고 싶은 1人[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 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 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하나님 덕분에 추억속에 있던 모모를 소환해냄 ^0^

하나의책장 2021-01-13 22:43   좋아요 1 | URL
저도 정말 좋아하는 구절이에요:)

그리고 사실 책 옆에 있는 장미는 빨간 장미였어요🌹
플라워박스를 만들고선 남은 장미를 조그마한 화병에 옮겼는데 마침 택배가 와서 나갔다가 손에 쥐고 있으니 마당의 옥외마루에 잠깐 올려놓았거든요.
그런데 그 잠깐사이에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꽃이 얼어버렸어요.
빨간 장미도 순간 얼어버리니 구겨진 양피지마냥 변해버리더라고요🥺
 

기억이 실제보다 아름답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를 아프게 했던 기억이 억울하거나 아프게 남지 않고 따뜻하게 남아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지난 디제이들의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얘기하자니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만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실제는 어땠는지 모르나 나에게 남아 있는 디제이들의 따뜻한 기억들을 끄집어내 보는 것뿐이다.

라디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게 우리 일상이기 때문에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면 뭐라고 답할까. 그래도 그들은 또 고민하고 고민하겠지. 좀 더 새롭고, 뭐 좀 재밌는 걸 원하는 것 역시 그들의 일상이니까.

매력적이었던 존재가 뜨겁게 얽히고 나서는 어떻게 식어버리는지 몇 가지 경험들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아직은 멀리 있어서,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어서, 더 매력적인 것들을 그냥 그 자리에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일 아닐까. 볼 때마다
설레고, 언젠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막연한 희망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다행히도 라디오에 도착하는 수많은 사연들은 ‘나는 오늘로 시작한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내 얘기,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은 애기, 누군가는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들이 넘쳐난다.
......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어린 시절의 일기 같은 솔직하고 따뜻한 얘기들, 그 수많은 얘기들을 떠올려보다가 지금, 다시 또생각났다. 나는 그래서, 라디오가 좋았다. 라디오가, 참 좋았다.

그런데 결국, 라디오는 가족이다. 그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지금까지 경험한 바 없는 것 같고, 없을 것 같고, 없는 게 분명하다. 우리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들, 라디오에는 분명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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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의 소재 중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건 날씨 얘기를 할 때다. 날씨 얘기를 뻔하고 흔하지 않게 쓰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웬만하면 소재로 선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정말 꼭 해야 할 날씨 얘기 같은 것도 있다. 태풍이 왔을 때,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을 때, 폭설이 내렸을 때, 너무 더울 때, 미세먼지가 심할 때, ‘날씨가 이러니 조심하시라‘는 얘기 대신 조금 더 특별하게 날씨 얘기를 전하기 위해 고민한다.

답 안 나오는 뻔한 위로보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더 큰 위로라 믿는다. 그날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흘려준 눈물이 그녀에게 힘이 되었기를.

같은 시간에 라디오를 듣고 있는 청취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문자를 보내거나 어플에 접속한 사람들의 수는 집계되지만 그 숫자가 전부는 아니니까. 모든 경우를 모두 만족시키는 표현은 없다는 것도 안다. 실은 그래서 모든 얘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내 글이 디제이의 말로나갈 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거나 화가 되면 안 되니까.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니지만 중요하다. 여전히 세상의 많은일들은 숫자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취율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청취율이 잘 나와야만 내가 하고 있는 프로그램, 디제이,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매일 들어주는 사람들을 오래 만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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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라디오는 글이 더 중요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조금더 버라이어티를 추구하게 된 요즘 라디오의 경우, 명백하게 말해 의미심장한 방송의 오프닝이나 몇몇 에세이 코너들을 제외하고는 ‘글‘의 개념보다는 ‘말‘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디제이가 할 말을 글로 써주는 거니까.
디제이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디제이의 캐릭터가 정확할 때 더 쉽게 글을 쓸 수 있었다.
그가 할 법한 얘기들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쉬워지니까 말이다.

시작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무리하는지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디제이의 인사가 그렇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일을 마무리하는 태도에서도 말이다.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이미 끝인사를 정하듯, 어떤 인연들의 끝을, 어떤 일의 끝맺음을 미리 준비해야 어떤 마지막 순간들을 조금은 단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그렇더라도 세상에 쉬운 마지막이란 건 없을 테지만 말이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게 되든 그 프로그램의 타깃이 되는 청취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공감하려고 애쓴다. 사람 사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공감하게 되지만 그래도 더 공감해 보려고 한다. 오히려 어떤 피디는 너무 많이 공감한다는 것이 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얘기한 적도 있다. 그런데 20년 라디오 작가 생활 중 유일하게 여전히 이해불가능한 일이 바로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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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0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2021년 신축년 새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연하장 요기 놓고 가여

┏━━━┓2021년
┃※☆※ ┃새해★
┗━━━┛
복많이 받으세요~

하나의책장 2020-12-31 15:24   좋아요 0 | URL
scott님도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그래서 라디오
남효민 지음 / 인디고(글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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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버스를 타고 갈 때 혹은 운전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라디오를 듣게 된다.

일부러 라디오를 챙겨 듣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TV를 보거나 유튜브 혹은 SNS에 올라오는 영상을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교통정보를 주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라디오는 내게 있어서 '향수'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저자, 남 효민은 20년 경력의 라디오 작가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두 시의 데이트】, 【꿈꾸는 라디오】, 【푸른 밤】, 【오늘 아침】, 【오후의 발견】, 【펀펀 라디오】, 【FM 데이트】 등의 프로그램을 거쳐 지금은 TBS의 순수 음악방송 【아닌 밤중에 주진우입니다】와 MBC 캠페인 【잠깐만】에서 디제이와 사람들의 말을 쓴다.

그녀는 말한다. 가능하면 할 수 있을 때까지 좋아하는 것들을 돌보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어쩌다 보니 매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매일 글을 써요?"


사실 방송 원고는 작가의 글이지만 디제이의 말이기도 하다. 디제이의 말이지만 작가의 글이기도 하다. 글이지만 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말을 글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매일 쓸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지만, 사람은 누구나 매일 말을 하니까.

…… 그래서 매일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우리 디제이가 오늘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를 생각한다.


라디오 작가를 하면서, 저자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매일매일이 다르기에, 라디오의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 또한 하루하루 색다르다.

쉼 없이, 매일 듣는 라디오이기에 어떻게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것인지 모두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그래서 라디오


하루 24시간 중에, 가족과 함께 얼굴을 마주 보는 시간이 고작 37분.

그런데 라디오 프로그램은 최소한 1시간, 대부분은 2시간이다.

……

진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실은 더 다정하고,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거다. 그러니 라디오 애청자들을 '가족'이라 부르는 건 전혀 무리가 없는 일이지 않을까.


유튜브를 보면, 어느 정도의 구독자가 쌓이면 유튜버들은 구독자들의 애칭을 곧바로 정하곤 한다.

라디오는 어떨까?

라디오는 청취자들에게 '가족'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앞서 책 속 내용을 언급했듯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함께 공감하고 웃고 슬퍼한다.

즉, 라디오는 청취자들과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교감하고 소통한다.

그래서인지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들에게 '가족'이란 애칭을 정한 것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라디오는 정보 전달, 그 이상으로 우리네 삶을 전달하기도 한다.

사연을 듣다 보면 오롯이 공감되어 같이 웃기도 하고 같이 슬퍼하기도 한다.

글 초입에 라디오는 내게 있어서 '향수'라고 말하였는데 라디오를 듣거나 떠올리기만 해도 예전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다.

학원 수업을 끝마치고 혹은 학교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거의 라디오와 함께였다.

학원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면 항상 기사님께서 트시는 라디오가 똑같은 채널이다보니 삼십 분은 꼬박 들을 수밖에 없었고 학교 수업 마치고 버스 타는 길에도 버스에서 나오는 라디오가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 라디오에 사연을 두어번 보냈었는데 실제 선정되어 사연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나는 연상을 잘하는 타입인 것 같다.

어떤 노래를 들으며 그 길을 걸어갔을 때, 이후 그 노래를 들을 때면 그 길이 생각나는 것 같이 나는 특히 '소리'와 관련된 연상을 잘하는 타입인 것 같다.

청각에 예민한 것이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겠는데 라디오도 마찬가지이다.

참 신기한 것이 어떤 곳을 지나갈 때면 그 때 당시 들었던 라디오 사연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렇듯, 라디오는 내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같은 존재이다.


이 서평도 쓴 지 꽤 되었는데 다듬을 게 특별히 없는 것 같아 그대로 올려본다.

요새는 라디오를 많이 듣지는 않지만 들어야 할 때가 생기면 자연스레 KBS 클래식 FM만 듣는다.

이제는 각자 취향을 존중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니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요를 거의 듣지 않는다.

팝과 클래식만 듣는다고 하면 좀 안 좋게 보이는 것 같아서 잘 말하진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팝과 클래식만 주로 들었다.

클래식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함께 듣다 버릇하다 보니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라 자주 듣는다.

팝도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집에 있는 CD들이 대부분 팝 위주라 그 때부터 들었던 것이 너무 익숙해 지금 내 플레이 리스트의 8할은 무조건 팝송이다.

내가 워낙 팝송만 듣다보니 막내동생도 자연스레 팝송을 듣게 되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들어서인지 지금도 굉장히 즐겨 듣는다. (이게 다른 말로 습관의 무서움이기도 하다;)

사실, 내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워낙 빠르게 시대가 급변하다 보니 존재했던 것들 중에서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말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들이 사진 한 장으로만 남겨진 추억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래도 그 중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라디오'이다.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문득 오늘은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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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7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저도 케이방송 클래식 청취자 1人 주말에 특집으로 해주는것도 좋고 연주자들 나와서 곡 설명하는것도 좋고 오페라 뮤지컬 유명한 부분 배우들 즉석실황하는것도 좋고요 너튜브가 찾아주는것보다 이렇게 아날로그 프로그램이 너무 좋아서 지난 방송까지 챙겨들어요.^.^

하나의책장 2020-12-28 22:44   좋아요 1 | URL
우와, scott님도요? 전 자주는 아니어도 간간히 듣고 있어요. 뭔가 scott님과 공통분모가 꽤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굿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