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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너무 이상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금전주의에 몰입된 현실적 상황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릴리 프랭키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도쿄타워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그의 인생역정은-어머니를 자꾸 떠올리게 만들어서- 그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왔다. 릴리 프랭키라는 작가의 이름만으로 서슴지 않고 책을 읽어갔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과연 이렇게 솔직한 글쓰기가 있을까.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또는 정반대로 가볍게 생각한다고 해서 과연 나의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무력하고 회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은 일면 냉소적으로 비쳐지면서도 진실되다.

<대마농가의 신부>는 웃는라고 정신을 못차렸다. 약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대마를 제공하는 농촌 총각의 결혼도전기이기도 하다. 왠만한 도시의 갑부보다도 더 부자인 농촌총각의 공개 구혼. 여기에 그리 예쁘지 않은, 또 젊지도 않은 여자가 시골로 향한다. 람보르기니라는 스포츠카를 싸구려 차 몰듯이 운전하는 시골 총각과 그의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웃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그냥 2분 정도 정신없이 웃었다. 그 상황이 왜 이리 웃긴 것일까. 한쪽엔 희망을 품고, 한쪽엔 불안을 간직한 처녀의 신세도, 예쁘지 않은 여자를 구하려는 총각의 마음도 웃음을 유발하는 한편 뭔가 쌉싸름한 맛을 풍긴다.

<사형>은 정말 노골적이다. 흔히들 강력 범죄가 터지면 "다 사형시켜버려야 돼"라고 서슴지않고 말하는 사람들의 상상을 그대로 소설로 옮겼다. 그 정도를 극에 달하도록 해, 아무리 가벼운 범죄라고 사형에 처하도록 만든 미래사회. 과연 인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세상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그의 상상력이 놀랍다. 책을 훔쳤다는 이유로 사형을 목전에 둔 젊은이의 모습이 위태위태하다.

<둥근파꽃>은 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신적 사랑이라든가, 부부간의 정이라는게 과연 진정일까?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 같다. 육체적 접촉을 통한 사랑만큼 강렬한 것은 없다는 생각, 그것은 오히려 찰나적이기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오사비시 섬>은 그야말로 삶의 태도에 대한 극단적 제시를 보여준다.

아무려나 상관없는 이곳에서 아무려나 상관없는 일을 아무려나 상관없이 해온 나 자신의 한심함을 꾸짖었다. 정말로 아무려나 상관없을때, 사람은 아무려나 상관없게 된다.(102쪽)

그래서 삶으로부터 도피한 사람들이 오사비시 섬으로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가지 삶의 양식을 배운다.

슬슬 일 좀 하고 술 한 잔 하고 절구질하고, 오직 그것뿐인 섬이다. 하긴 그건 어디서나 다 마찬가지지만.(140쪽)

하긴 다 마찬가지 아니던가. 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당신은 릴리 프랭키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장하고, 숭고한 척 하는 사람들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다. 물론 이건 한방으로 족하다. 실은 다 마찬가지인 것 같으면서도 아니기 위해 사람들은 발버둥치니까.

<리틀 베이비 나띵>은 삶의 전환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쓰레기장 옆에 쓰러진 여인.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운 사람. 성적인 매력 앞에 두근 거리는 세 청춘.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못하는 세 청춘. 한 친구의 집으로 여자를 데려오고 나서도 이들은 갈등에 쌓인 채 아무런 행동의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다가 여자의 거침없는 면을 보면서 이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차원을 뛰어넘어 삶의 변화를 택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야하다. 하지만 야하기 이전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청춘들에 공감을 먼저 하게 되면서 슬픔에 빠진다. 삶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질듯 하면서도 또한 그 반대이기도 하다.

진짜 어려운 일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머릿속과 입 끝만으로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 몸뚱이를 움직여 생활 그 자체를 바꿔나가는 수밖에 없다. (중략)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서는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귀찮은 건 둘째 치고 몹시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사회의 흐름에 흡수되어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 인간이 되는 것이.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되기 쉬운 약해빠진 인종이라는 것을 아플만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174쪽)

<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는 전쟁통에 오른발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다.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왼쪽발의 엄지발톱을 다친 것이 몹시 아프다.

할 일도 없고 죽지도 못하고 내내 생각만 굴리고 있을 뿐인 채 휘고의 발톱만은 그로부터 몇번이고 재생하였다. (226쪽)

큭, 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만 죽도록 하다가 아무런 생활의 변화는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당장 사표라도 쓸듯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다가도 실상 퇴근 후 술로 달래는 사람들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을 엿볼 수 있다. 꿈만 꾼 채 아무런 노력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바로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이다. 소설은 이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의 너덜너덜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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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화의 특성은 한마디로 도전으로 표현될 수 있다.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에 대한 도전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열에 들뜨게 만든다. 좌절과 실패는 양념일뿐 메인 요리는 아니다. 도전과 성과라는 줄거리를 맛있게 만들어주는 고추이자 마늘인 것이다.

록키 시리즈는 이런 기본적인 구도를 줄곧 지켜왔었다. 물론 록키 발보아 또한 마찬가지다. 빠바밤~ 빠바밤~ 이라는 음악과 함께 록키의 훈련 장면이 보여지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도전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뻔한 이야기임에도,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기 때문에 동일시가 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선 이것 이외에도 시간이라는 양념이 추가된다. 아들이 장성한 나이먹은 록키. 아내는 3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록키. "나이를 먹으면 회한만 커진다"는 그의 말은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 인생이란 상대에게 얼마나 강한 펀치를 먹였는냐가 아니라 내가 두들겨 맞았어도 쓰러지지 않고, 혹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 속에 있다고 말하는 록키는 그야말로 서구 개척자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어찌 카우보이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이겠는가. 쓰러지지 않고 걸어가야만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명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원하던 길이었는지가 문제일뿐.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는 야수를 끌어내 이윽고 한바탕 놀게 만든 후 스러지도록 한 록키의 권투 장면은 반복된 스포츠 영화의 전형이다. 오히려 이 영화가 빛을 발하는 것은 엔딩 타이틀이 오르는 그 짜투리(?) 장면 속에 녹아 있다. 일반인들이 록키가 뛰어오르던 계단을 오르며 록키처럼 함성을 지르고 새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진 엔딩 타이틀 속의 작은 화면들은 환희로 가득차 있다. 영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지 그 작은 화면을 통해 깨닫는다. 사람들은 괴로움을 피하고, 쾌락만을 좇는다고 생각했던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사람들은 도전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도전이 결과에 상관없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록키가 그렇듯 힘차게 계단을 뛰어올라 세상을 향해 고함을 친다. 그러나 진정 그 고함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해 삶의 힘이 되어준다.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의 매력은 메인 요리보다 오히려 후식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다랗고 가파른 계단을 두려워않고 뛰어오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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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혼란스럽다. 도대체 소설 속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연극 대본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소설은 크게 현실과 대본, 그리고 대본 속 연극(또는 극 중 극)이라는 세 가지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 뒤얽혀 있다. 현실에서는 빌딩 숲 사이 카페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젊은 여자가 죽고, 극 중에선 극작가가 죽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이것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 각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범인은 누구일까 곰곰히 쫓아가다보면 현실 속 범인과 극본 속 범인을 헷갈리게 된다. 아니 범인이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니 줄거리를 요약해 보겠다는 생각은 포기한다. 다만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만 잠깐 이야기해보려 한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때의 연극은 희노애락이 함께 녹아있는 터전이라는 뜻일테다. 그 속에서 웃고 울고있는 우리는 각자가 배우인 셈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선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이 연극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각자 허구의 삶을 연기하며 살고 있는 배우이며, 인생은 바로 그런 허구들로 이루어진 연극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남들에게 보임으로써 예뻐진다. 여자만이 아니다. 남자도 그렇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제2의 자신, 밖에서 본 자신이라는 존재를 완성해가는 것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 연기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소설, 드라마, 게임. 전에 없을 정도로 허구가 소비되고 있는 이 시대. 자신을 허구 안의 등장인물로 간주하는 것이 큰 오락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일찍이 그것은 은밀한 재미였다.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을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당당하게 타인이 되기를 원한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예전의 대스타에서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사람으로 바뀌면서부터 자기도 히로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245쪽)

그래서 도시를 바라보면 상점이나 카페 등의 벽은 유리가 되어 서로 보이고 보는 것에 탐닉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자신을 연기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의식하고 집 안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요구되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배우는 당신들이기도 해요. (367쪽)

세상은 보여지고, 또 보는 것으로 관계되어진다. 그속에서 우리는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한다. 연기는 거짓이다.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지요. 보신을 위해, 허영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무관심, 질투,회유, 자비, 상식, 변덕. 이 중 어떤 것이라도 거짓말을 할 이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지요.(76쪽)

보여진다는 의식은 늘 허구를 갖고 있다. 내부 정원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쌍방에게 연기를 강요한다. (390쪽)

그렇다면 이렇게 거짓 연기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까.

사람의 마음과, 뭔가를 달성하는 동기라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이렇지 않았을까 상상하거나 어거지로 끼워맞추거나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는 것이 고작입니다.(337쪽)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한 거지.(240쪽)

그래서 인생이란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토록 원했지만 가질 수 없는-그렇다, 지금 우리처럼. 그야, 현실이란 그런 게 아닌가. 대부분의 인생은 사람이 그렇게 오래도록 원하기만 하고 인생 쪽에서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350쪽)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가삿말은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표현하는 또다른 말일 것이다. 가면은 내가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바뀐다. 또 내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사람에 따라서도 바뀐다. 마치 중국 사천 지방 특유의 경극인 변검술을 익힌 사람들처럼 말이다. 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니 한명이라도 존재할 수 있으려나. 그래, 그 가면들을 인정한다면 세상은 또 타인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거짓을 없애자고 칼을 휘둘러 허영과 그림자를 물베듯 베려 허우적대지 말고, 차라리 그 수많은 가면들을 인정하는 것은 어떨까. 비록 그것이 이해가능한 수준을 넘어설지라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이 더욱 견고해질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향한 그 가면에 집착하지 않되 그 가면을 벗고 다른 가면을 쓰지 않도록,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람 또는 그 환경 앞에선 흐뜨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닐까. 가면을 쓰고 최대한 멋진 연기를 펼친다면 박수를 받으며 퇴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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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엘리자베스 뉴턴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간단한 놀이에 관한 실험을 벌였다. 두 무리의 사람들에게 각각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주었다.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25개의 노래가 적힌 목록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노래의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듣는 사람은 두드리는 사림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노래의 제목을 맞혀야 했다. 120개의 노래 중 듣는 사람들은 겨우 2.5퍼센트. 즉 단 세개의 노래밖에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험 결과가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듣는 사람이 노래의 제목을 예측하기 전에 두드리는 사람에게 상대방이 정답을 맞힐 확률을 짐작해보라고 했더니 50퍼센트라고 대답했다.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확률은 마흔 번 가운데 한 번에 불과했음에도 가능성을 반반으로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드리는 테이블을 두드릴 때 머릿속에서 노랫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귀에 들리는 것은 조금 이상한 모스부호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딱딱 소리뿐이다. 두드리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멜로디를 알아맞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일반 정보(노래의 제목)를 알게 되면 두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테이블을 두드릴 때 그들은 맞은편에 앉은 듣는 사람이 음악이 아닌 단순하고 단절된 몇개의 타격음밖에 듣지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저주다. 일단 무언가를 알고 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듣는 사람의 심정을 두번 다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의 저주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아예 일찌감치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메시지를 받아들여 변형하는 것이다.

<스틱> 칩 히스, 댄 히스 지음, 웅진 윙스, 2007.6 -중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지식의 저주에 휩싸여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상대방의 몰이해만을 서로 이야기하는 세상. 자신에게 눈을 돌려 혹시 자신이 지식의 저주에 씌어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상대방을 무식하다고 깔보고 또는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것이 꼭 지식의 저주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식의 저주로부터 탈출하듯 상대방과 접점을 찾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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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스토리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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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일본 소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 기억해야 겠다.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식 그 자체의 재미와 함께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흥미 두 가지 모두를 잘 잡아나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소설은 4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물원의 엔진, 새크리파이스, 피쉬스토리, 포테이토칩.

동물원의 엔진은 한밤중 동물원 늑대 우리 앞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남자와 이를 지켜보는 세명의 남자들의 이야기다. 왜 이 남자는 늑대 우리 앞에서 자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 최근 일어난 시장 살인사건과 늑대의 우리 탈출이 얽혀 들어간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세상에 대한 냉소로 가득차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로 둘러싸인 세상, 또는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바로 동물원 우리와 같다고 했을 때, 과연 이 우리로부터의 탈출은 유토피아일까. 소설은 탈출해봤자 별거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예상치못한 위험에 직면하거나 무기력증에 빠질 뿐이다. 이것은 늑대와 늑대 앞에 있는 남자가 말해주고 있다. 반면 우리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안전하면서도 그나마 달콤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 우리 앞 남자를 지켜보던 주인공을 포함한 세남자들이 우리 안의 생활 또한 별볼일 없다고 말해준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어쩌겠냐고.

그런데 세번째 소설 새크리파이스를 보면 또다른 느낌을 건넨다. 20여년전과 현재, 그리고 30여년 전과 10년 후.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오가며 세상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보여준다. 노래 한 곡이 어떤 인연의 끈을 타고 흘러가 세상을 구하게 되는가 하는 사연이 정말 극적으로 펼쳐진다. 세상은 준비된 자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슈퍼영웅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구하게 된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사건을 계기로. 그런데 작가의 시선이 흥미롭다. 세상을 구한다고? 그래서 뭐 어쩔건데라는 듯 소설 속 주인공을 바라보는 것 같다.

두번째 새크리파이스는 본업은 빈집털이범이면서 부업은 탐정인 구로사와라는 남자가 행방불명인 사람을 찾아 오지 마을에 들어가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옛날옛적 산적들로부터의 피탈을 피하고자 이루어졌던 이상한 풍습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풍습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따갑다.

풍습이란 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무엇을 숨기려고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지. 공포나 죄책감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욕망 같은 거. 그런거야. 그런 것들을 어영부영 얼버무리려고 풍습이라든가 설화라든가, 그런 게 생기는 거 아닐까.(74쪽)

정보라는 건 진실의 정도나 증거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요에 반응하는 거야.(130쪽)

소설을 읽고나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너무나 당연시받아들이고 있는 풍습 또는 제도에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다. 정말 이것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유효한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회의하는 것,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작가는 이런 것에서도 장난을 친다. 그래서 소설은 즐겁다.

마지막 단편 포테이토칩은 범상하지 않은 듯, 또는 약간 모자라는듯, 하지만 마음만은 너무나도 착한 빈집털이범에 대한 이야기다. 야구선수 오자키의 집을 털려다 문득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우연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 하지만 정작 이야기의 중심은 핏줄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여유롭다. 콩소메맛을 먹고 싶었지만 무심코 집어먹은 소금맛 포테이토칩도 괜찮다고 깨닫는 주인공 여자친구 오니시의 심정과 똑같다.

절망으로 빠지지 않은 세상에 대한 냉소. 그렇다고 장밋빛 희망으로 넘쳐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저 SO WHAT일뿐. 즐거울수도 슬플 수도 있다. 때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희망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돌고 우리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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