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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 한 명품 중독자의 브랜드 결별기
닐 부어맨 지음, 최기철.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저자 닐 부어맨은 한때 명품중독증에 걸렸다. 사람을 대할 때면 그 사람이 무슨 옷과 신발, 가방 등을 걸치고 있는지로 캐릭터를 판단했다. 자신 또한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브랜드의 종류를 바꿔가며 스타일을 연출했다.

그러나 어느날 이런 자신이 허망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접하게 됐다. 행복해지기 위해 명품을 구입했지만 행복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자꾸 더 불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브랜드 제품을 다 불태워버리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유명해지기 위해 별의별 짓거리를 꾸민다라거나 왜 태우느냐 그대신 기증해라 라거나... 비판을 넘어선 모욕적인 언사도 많았다. 물론 그의 행동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자 저자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다시 명품과의 이별을 철회하고 친하게 지내볼까.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허망함을 느꼈을까 하고.

그 과정에서 광고라는 것의 속성을 접하게 된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 했으니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알게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현재 처한 자신의 상황을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고, 이상적인 모델이니 이미지를 통해 상품을 구입했을 때 자신도 그들처럼, 또는 그 이미지처럼 행복해질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광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환상을 쫓아 소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소비는 행복의 그림자일뿐 행복 그 자체는 아니였다. 쫓아가면 다시 달아나고 또 쫓아가면 한발자국 멀어져가버린다.

그래서 저자는 명품 브랜드를 다 불태워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만을 구입해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 또한 결코 만만치않다. 브랜드 없는 상품을 구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품을 사기 위해 벌어야 하고 벌기 위해선 일해야 하고, 그 스트레스는 명품으로 푸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보니 세상을 달라져 보였다. 덜 쓰고 덜 일하고 늘어난 시간은 가족과 보내거나 자기계발에 쓴다.

그런데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까. 소위 미래 산업의 하나인 디자인 시대를 거부하는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 말은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디자인이라는 것 또한 인간의 필요인가 아니면 헛된 욕망인가. 그러나 책을 잘 읽어보면 이 질문은 다르게 바뀌어야 한다. 디자인 또한 우리가 살아가며 필요로 하는 소중한 것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에 브랜드가 붙으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바로 그 과정에서 허영이 깃들고 욕망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영과 욕망이 자본주의를 힘차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영양분이 된다. 누구나 갖고 싶은 펜트하우스, 또는 보트에의 욕망말이다. 희귀하면 희귀할 수록 더욱 더 갖고 싶은 욕망이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

과연 우리는 그 욕망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날려버릴 수 있을까. 저자의 퍼포먼스가 부싯돌의 작은 불꽃이라도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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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 한 명품 중독자의 브랜드 결별기
닐 부어맨 지음, 최기철.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는 악마였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그래서 과감히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선언한다.

저자는 명품 중독증에 걸렸다. 어렸을 적 브랜드없는 신발과 옷 때문에 왕따 당한 경험이 그를 명품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프라다의 여주인공처럼 차츰 명품에 젖어든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날마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브랜드 로고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23쪽)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명품을 걸친다고 해서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은 한낱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은 물론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적용하는 나의 가치 기준이 알맹이 없는 허망한 것들이라는 자각의 순간이 내게 닥쳐오고야 말았다....나는 누가 뭐래도 행복했어야 마땅하다... 이런 저런 친구도 많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직업도 있고, 유명 브랜드의 명품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허무함을 느낀다. 속았다는 생각이든다. 환상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41쪽)

그래서 그는 과감히 명품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마치 담배를 끊듯, 술을 끊듯 한번에 확실하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브랜드제품을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에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걸 왜 태우냐? 차라리 기증하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쇼맨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저자는 그래서 갈팡질팡한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하며 후회도 든다. 그러나 차츰 자신이 옳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 속 제품을 사면 그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광고는 불안감이라는 것 때문에 먹혀들고 효과를 낸다... 광고는 자기들이 광고하는 그 물건을 가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불안감을 조장한다.(44쪽) 

상품을 사람들의 정서나 느낌과 연결시키면 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버네이즈는 깨달았다. 사람들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에 대해 파악하면 전혀 엉뚱한 물건을 갖고 싶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88쪽)

사람들이 브랜드 제품을 구입함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하는 정서적 욕구 대신 해로운 정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브랜드는 사람들에게 탐욕, 대인기피증, 열등감, 질투심 등을 초래할 수 있다. (152쪽)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절정의 행복을 맛보기도 하지만 슬픔의 나락으로 추락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그 양극단의 중간쯤 된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또한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는 결국 일종의 만족감입니다. (173쪽)

그 만족감을 위해 사람들은 브랜드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 만족의 순간을 찰나에 그치고 만다. 보다 새로운 보다 좋은 것을 찾도록 만드는 광고들에 휩싸여 불안감만 커지게 될 뿐인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구에 의해서 소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욕구라는 것은 감성적인 브랜드 광고에 의해 교묘히 만들어지고 조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10쪽)

소비문화는 오늘날의 대량소비사회에서 강조되는 소유가 곧 존재라는 강박관념과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의 사회문화적이고 경험적이며 상징적이고 이상화된 측면을 통해 가장 잘 조망해 볼 수 있다... 이상화된 이미지의 뉘앙스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들은 결국 물질적인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중심주제에서의 변형에 불과할 것이다.(248쪽)

명품중독증은 현대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비문화란 곧 환경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불필요한 소비를 용인하면서 각 가정 내 불필요한 등 끄기 운동을 통해 환경파괴 문제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은 정상이 아니다.(300쪽)

그러나 사람들의 이성이나 도덕, 윤리에 호소한다 하더라도 감성적 측면에서 이미 마케터들에 의해 점령당한 소비자들은 그 행동을 쉽사리 바꾸지 못한다.

비록 대중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우려를 갖는다 할지라도 이 우려는 그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에 대한 감정적 애착마저 끊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는 못하다는 말이다. (304쪽) 그 무언가로 인해 소비자들은 원가의 수십 배가 넘는 과도한 가격이 책정된 제품을 계속해서 구입한다. 그것은 바로 브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적 애착이다. (308쪽)

그래서 저자의 행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명품 브랜드의 화형식. 이것은 그냥 쇼가 아니다.

소비를 위해 노동하고, 노동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소비해야하는 끝없는 악순환은 불합리하다. 노동의 강도가 클수록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또 그만큼 더 노동해야만 하는 이와 같은 조건을 마르쿠제는 불행의 도취라고 불렀다.(315쪽)

마르쿠제에 있어 진정한 자유란 경제로부터의 자유, 일상의 생존경쟁으로부터의 자유, 그날그날의 생계유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삶이 불가능한 이유는 소비에 대한 감정적 의존 때문이다. (314쪽)

소비자로서의 자유를 행사한다는 것이 BMW나 벤츠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바람직한 소비 습관은 다름 아닌, 꼭 필요할 때만 소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박함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325쪽) 우리는 더 단순한 형태의 삶으로 하향 이동해야 한다. 소비를 줄이면 자연스레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도 감소할 것이다. 그렇게 획득된 시간적 여유를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제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우리가 복잡한 삶을 사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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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란 말 그대로 정의하자면 죽지않는 새다.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죽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어디있겠는가마는 사람은 이런 헛된 꿈을 꾼다. 불사에 대한 꿈은 사람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생명체에게로도 향한다.

석양의 붉은 빛에 물든 구름이 마치 불사조 같았다. 불사조라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저 이미지를 불사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구름은 정형적이지 않다. 시시때때로 그 모습을 변화시킨다. 고정되지 않은 것은 수만가지 고정된 것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름이 만들어낸 저 새는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영원하다는 느낌을 건넨다. 사라졌다가 또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것이가. 그래서 불사라는 이름을 얻는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으려 집착한다. 어딘가에 꼭 영원히 머물것 처럼 행동하고, 그러기 위해 애써 노력한다. 그렇게 끝까지 지키려 한 그것은 그래서 영원히 나의 것이던가.

사진을 찍고 시간이 조금 흐르니 불사조는 어느새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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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을 알아챈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 생명을 갖은 것들은 모두 수확을 준비하고 있다. 된서리와 무더위를 이겨내고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한해가 다 가기 전에 말이다.

그래 한 해가 다 가고 있다. 난 어디서 꽃을 피우고 어디서 열매를 맺고 있을까. 서늘해진 바람에 마음도 시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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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는 이 검둥이를 보면서 맨 처음 떠오른 말은 개 팔자가 상팔자였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잠이 오면 잠을 청하고, 때 되면 주어지는 밥을 설렁설렁 먹을 수 있으니 상팔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군다나 살생을 금지하는 절간에서 살다보니 복날 걱정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렇게 사진을 찍듯 절 구경 오는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초리 정도 귀찮을 뿐일 것이다.

한때 사람이 먹지않고 자지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의 웬만한 갈등은 다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즉 상팔자라고 할 수 있는 기 전제조건조차 사라져버린다면 모두가 상팔자가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세상살이 힘든 것의 대부분은 먹는 문제가 아니던가. 자유가 아니던가.



그런데 최근 재패니메이션 '최후의 여전사 벡실'을 보면서 이런 상상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2067년 안드로이드 개발에 열중하던 일본이 유엔연합에서 떨어져나와 10년간 쇄국정치를 하다 미국의 첩보원들이 일본에 침투하면서 그 비밀의 베일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안드로이드화하는 것을 인간 진화의 최종목표로 바라보는 일본 내 한 집단의 광기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참뜻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여기서 자칭 자신을 신이라 부르는 박사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살 수 있는 불사의 존재가 됐으니 행복한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감정의 격랑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니 불행으로부터 벗어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드로이드 마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상팔자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면서도 사람의 기본적 생활을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써야 하는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뜻할 것이다. 그러니 상팔자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누가 이런 상팔자를 타고 태어날 수 있을까.

그냥 꿈 깨고 낮잠이나 실컷 청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인생의 낮잠을 즐기는데는 허허로운 마음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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