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신동이라 불렸던 모짜르트. 그의 생애를 다룬 예술 작품들은 많다.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영화 '아마데우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짜르트라는 이름 이외에도 살리에르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천재를 뛰어넘을 수 없는 2인자의 시기와 설움을 잘 드러낸 이 영화는 천재를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모짜르트의 특이한 웃음으로 표현된 천재성은 기행과 아울러 슬픔까지도 묘하게 스며있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영화 아마데우스와는 다르다. 뮤지컬은 아마데우스와 그의 아버지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주의 보호 아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아마데우스의 능력을 펼쳐보이도록 해 주고자 했던 아버지와 틀에 갇힌 삶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음악을 펼쳐보고자 했던 아마데우스의 충돌이 뮤지컬을 끌고 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자간의 갈등이 왜 그리도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는지를 충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만 화려한 가발과 의상, 무대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기쁘게 해준다는 것이 위안이다. 귀에 익숙한 남작부인 신영숙의 '황금별'은 소름을 돋게 만들고, 대주교 역의 민영기가 부른 '모차르트를 찾아라', '어떻게 이런 일이' 등은 가슴을 확 뚫어준다.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어린 모짜르트도 아쉬움이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어린 천재 모짜르트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그가 즐거워하거나 반대로 좌절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대비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영화 아마데우스의 강렬한 웃음 소리가 마음 깊숙히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으리라.  

오이디푸스.엘렉트라.카인 콤플렉스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때론 족쇄가 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이런 가족간의 상처를 드러내고자 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아 그 상처가 좀처럼 애달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재성을 지닌 아이를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아버지와 여리고 여린 아들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가끔 짐처럼 느껴졌던 이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상처로 비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하기에 아버지를 잃은 모짜르트의 눈물 또한 모호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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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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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젼을 켜면 흔히 접하는 게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다. 각 방송사별로 얼마나 많은 맛집들이 소개됐는지 헤아려보는 것은 바보같은 일일지도 모를 정도다. 오죽 했으면 "방송국에 소개 안된 집"이라는 이름을 내건 식당들이 생겼을까. 

그런데 곰곰히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맛집 소개 못지않게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이 여행과 관련된 프로그램이다. 예능의 선두주자로 우뚝 올라선 '1박 2일'을 비롯해 '패밀리가 떴다'도 그 기본 컨셉은 여행지 소개에 있지 않은가.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의 실제 촬영지를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맛집과 여행지가 함께 소개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여행 프로그램 나레이션을 맡았던 김C의 경우엔 그 덕분에 광고까지 하지 않던가.  

여행 프로그램의 매력은 여행지 자체의 정보와 함께 간접 경험만으로도 탈출감.해방감을 통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되풀이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겁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과 다른 자연환경. 문화. 사람들을 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영화 '아바타'를 3D로 접하는 순간,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나 주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속 풍경과 외계 생명체들을 입체적인 모습으로 대하는 순간 내가 지금 여행을 떠나고 있는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아바타가 다시 보고 싶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와 똑같다. 한번 가봤던 곳이라도 다시 둘러보고 싶은 여행지가 있듯이 말이다. 다만 관객인 나와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욱 안전한 기분으로 여행을 만끽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어려움과 불편 없이 신세계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니까.(다만 고생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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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땅에 딛는 것에 있다. 

하늘을 날고 물위를 걷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우리는 그것이 기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 속의 기적들을 깨우치고 그 기적에 감사하며 한발 한발 걸어가는 것에 있지 않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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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2010-03-1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끝내 주네요^^
 
파라노말 액티비티 - Paranormal Activit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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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통제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의식주에 대한 해결은 통제영역의 확장을 위한 기본 전제였으며, 이것이 해결되기 시작하면 통제는 그야말로 경계를 잊기 시작한다. 시공의 확장도 바로 통제 영역의 확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점과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도 이런 측면의 일부일터다. 일기예보도 마찬가지다. 로봇이란 것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인간의 통제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른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다. (물론 초자연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통제의 바깥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애를 쓴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원작 영화를 보고 한눈에 반해 저작권을 산 후 결말만 자신의 뜻대로 고쳐 찍었다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면 마지막 2~3분 정도의 결말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어떻게 사람이 귀신에 들리는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문이 스스로 닫혔다 열리고, 알지 못할 발자국이 찍히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끌려나가고... 어찌보면 다소 황당한 내용들 뿐이다. 하지만 다큐를 찍듯 리얼타임으로 찍힌 화면과 빠르게 돌린 화면 덕분에 생생함을 얻는다. 이 영화의 장점은 오직 이것뿐이다.  

주인공인 여자가 결국 귀신에 들리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결말짓는 영화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세상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라고 주장하기 위한 증거물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꽤나 지루한 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거의 대부분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것은 꽤나 힘을 얻는다.(우린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것이 긍정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눈에 보여줌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또 무슨 경우일까)  

그러나, 이것은 영... 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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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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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다른 작품들, 특히 '검은집'과 '천사의 속삭임'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푸른 불꽃'에까지 손을 뻗게 만들었다. 개인들의 사건 뒤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던 사회적 맥락까지 파고 들었던 두 작품들에 비해 푸른 불꽃은 개인적 느낌이 더 강해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푸른 불꽃이 흥미로운 것은 범죄자의 입장에서 그 심리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17살 고등학생이 2건의 살인사건을 완전범죄로 꾸미고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를 가진 힘만이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야. 애당초, 힘 이외에 효과가 있는 해결방법이 어디 있다는 거지? 132쪽 

슈이치는 의붓 아버지의 횡포로 동생인 하루카와 어머니를 잃을까 조마조마해 한다. 변호사의 도움을 빌려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위에서 도와 줄 사람도, 사회 시스템에 기댈 구멍도 없다고 느낀 슈이치는 결국 아버지를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살인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친구였던 다쿠야에게 들키고 만다. 다쿠야는 그것을 빌미로 돈을 달라는 협박까지 해온다. 한번 살인을 저질렀던 슈이치는 다시 완전범죄를 꾸민다. 오직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겠다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살인을 정당화 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살인자의 마음을 철저하게 괴롭히는 것은 신에 대한 외경도, 또한 양심의 가책도 아니다. 더구나 세상에 대한 체면이나 소문 따위는 쓰레기통에나 들어갈 시시껄렁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주의 톱니바퀴처럼 마음을 옭아매는 것은 단지 사실일 뿐이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그 사실에서는 평생 도망칠 수 없다. 는 걸로 괴로워 한다.  

슈이치의 친구인 다이몬과 노리코는 그를 이해하고 그의 거짓된 알리바이를 지켜주려 애쓴다. 범죄를 계획하던 슈이치에게 다이몬은  
 

분노는 3독 가운데 하나야. 한번 불을 붙이면 분노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르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말지. 361쪽 

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슈이치는 끝내 그 불꽃에 자신까지 타버린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분노에 대해서도 우린 분노의 불꽃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분노를 삭여야만 하는 것일까. 정당한 분노란 없는 것일까. 때론 분노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까.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리고 어디까지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슈이치가 동경한 정의를 가진 힘은 그저 망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분노를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또는 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과연 슈이치는 좋은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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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조인스 닷컴에서 보고 주문할려고 알라딘에 왔더니....알라딘 회원이시네요. 반갑습니다.

하루살이 2010-01-1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우연이. 정말 반갑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