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원히(?) 죽지않는 전사들의 이야기. 샤를리즈 테론의 남성미(고정관념이나 편견적 의미가 아닌) 물씬 나는 액션 영화. 이야기와 액션, 감정의 선 등이 잘 버무러졌다. SF나 액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적극 강추.


2. 불멸의 존재를 그리는 영화는 많다.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결코 행복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겪은 세월의 무게를 같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등등의 이유를 든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도 없이 결코 끝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결코 행복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3.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넘치는 건 시간이니 쫓겨가며 할 일은 없다. 정주하는 삶을 살까.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까. 한 가지 일에 정진할 것인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볼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영화 [올드 가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이들이 전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린다. 그렇다면 불멸의 존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4. 샤를리즈 테론은 지쳤다. 소위 '엿 같은 세상'이다. 아무리 세상이 나아지라고 정의를 위해 싸워왔지만 세상은 결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 이런 세상이라면 될 대로 되라지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정의를 위한 싸움은 멈출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불멸의 존재에서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말이다. 


5.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약품을 구입했을 때, 점원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오늘은 내가 당신의 치료를 돕지만, 내일은 당신이 길을 가다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워주면 된다" 샤를리즈 테론이 수천년의 세월을 전사로 살아오면서 목숨을 구해준 이들은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도록 힘을 써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후손들 또한 그런 일들을 해 나갔던 것이었음도 알게된다(나치 하에서 유태인의 목숨을 구한다거나, 핵 전쟁을 막는다거나 등등).


6. 인연과보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연으로 맺어진 존재이며, 그 인연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과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선한 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간혹 지켜보기도 하지만,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결국엔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그렇게 믿고 싶다). 어떤 행위든 그 행위로 인한 당연한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다. 영화 [올드 가드]는 이 인연과 과보를 이야기하고 있다. 샤를리즈 테론은 인연과보를 깨닫는 순간, 회의와 상실감에서 벗어나 다시 보다나은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7. 오늘 나의 조그만 일상의 행위가 소위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에서라도 말이다. 즉 나의 목숨은 유한하지만, 나의 삶의 흔적들은 끝없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불멸인 것이다. 나의 행위의 불멸의 영향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좋은 과보를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1회용품을 최대한 쓰지 않는 것 등등의 작은 일에서부터라도 말이다. 우리 또한 샤를리즈 테론과 같은 불멸의 전사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7월 12일 19도~25도 비(장마)


지난번 1시간 동안 쏟아붓듯 퍼붓던 비로 인해 토사류로 물바다가 됐던 약초밭. 옆밭의 배수로를 잘못 파놓은 탓이었다. 그전엔 어떤 비가 쏟아져도 끄떡없었으니 말이다. 실제 배수로로 물길이 생겼고, 그 물길을 따라 물이 쏟아져서 집의 사면에 흙이 다 쓸려내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주변 흙을 모아 물길을 막아 물이 넘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지난번 임시방편의 효과로 장맛비에도 잘 견뎌주던 배수로가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비의 양이 훨씬 많은 탓이었는지 암반 위에 있던 겉흙이 통째로 쓸려내려왔다. 흙을 잡아주고 있던 풀들도 그대로 흙과 함께 내려앉았다. 흙이 쓸려내려간채 바위의 표면만 남은 사면이 안타깝다.


정말이지 수단과 방법만 있다면 옆밭의 배수로를 다 메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쨋든 빗속에서 흘러넘치는 옆밭의 배수로 부분을 다시 보수하고, 토사로 막힌 약초밭 주위의 배수통과 배수로를 정비하니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고 흙이 마르면 쓸려내려온 토사를 옮길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 



느티나무 묘목을 심은 옆밭은 온통 풀밭이 되었었는데, 지지난주 제초제를 뿌려 풀을 온통 죽여놨다. 풀이 죽은 자리는 누렇게 변해 흉물스럽다. 오로지 돈으로 생각하는 묘목 하나만을 키우려는 인간의 욕심이 자연을, 생태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눈으로 확인하니 처참한 생각이 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처리하니, 배수로 하나만 하더라도 옆집에 대한 배려없이 그냥 만들어놓지 않았을까.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이 귀한 시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7월 11일 20도~30도 맑음


장맛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전에 수확할 것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벌레들의 습격을 받은 브로콜리가 "어서 빨리 따줘요" 하는듯 봉긋 고개를 내밀고 있다. 



시중에서 팔고 있는 브로콜리 마냥 예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큼직하다. 작은 꽃봉오리들이 피기 전에 수확해서 먹는게 좋다. 이제 막 필려고 하는 것이 수확 적기인 셈이다. 잎을 보면 알겠지만 벌레들이 무진장 뜯어먹었다. 수확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잘 견뎌주었다. 10개 중 오늘 2개를 수확했다. 데쳐서 초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 아니면 다른 볶음 요리에 잘게 썰어 넣어주는 것도 좋겠다. 


브로콜리 잎의 성분은 케일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영양소가 더 많은 것들도 있다. 쌈으로 먹어도 되고 녹즙으로 사용해도 좋다. 벌레를 먹어 건질게 많지 않지만 잘 씻어서 녹즙으로 쓸 생각이다. 


브로콜리잎이 케일보다 나을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서 그냥 버리는 것이 많다. 계몽, 혹은 홍보를 통한 지식의 전달이 요즘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쉽지 않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왜 어떤 거짓 정보들은 태풍처럼 사람들의 머리속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어떤 실용적인 정보들은 산들바람보다도 못한 것인지... 적확한 정보의 전달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7월 9일 20도~32도 맑음


황매실이 되기까지 참고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매실은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졌다. 벌레가 먹기도 하고 병에 걸렸는지 썩는 것도 생겼다. 아무래도 이젠 거두어들여야 할 때인가 보다. 



매화나무에 달렸던 매실의 70~80%는 결국 떨어지고 겨우 10개 남짓 건졌다. 그것도 벌레들의 가해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10개 남짓한 걸로 뭘 할까 고민하다 그냥 매실주나 조금 담가보기로 했다. 



매실에는 아미그달린이라는 독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독성은 풋매실이나 씨앗에 주로 있다. 식용을 하면 체내에서 시안화수소, 즉 청산으로 분해가 된다. 하지만 우리 몸에 해를 끼칠만큼의 용량이 되려면 수백개를 한 번에 먹어야 가능하기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예초 독성에 대한 걱정을 없애기 위해 매실의 씨앗을 제거하고 설탕을 조금 묻혔다. 날이 워낙 더워서 그런지 채 2시간도 되지 않아서 매실의 즙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매실즙이 생성되었기에 바로 소주를 부었다. 독주를 잘 먹는 편이 아니어서 25도 정도의 담금주를 사용했다. 매실즙과 소주가 섞여 은은한 노란색을 띤다. 향도 좋은 것이 바로 한 모금 마셔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래도 술이 익을때까지 기다려보자. 기다림만큼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없지만, 또한 그만큼 설렘을 주는 것도 없다. 이왕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자. 



10개 정도 심었던 감자도 캤다. 땅에 양분이 워낙 부족해서인지 알이 굵지않다. 10개 심었으면 최소 50개는 수확해야 할텐데.... 쩝, 이거 뭐, 거의 본전치기에 가깝다. 물론 심은 감자는 쪼개진 것이기에 온상태로 따지면 서너개 정도지만 말이다. 



수확한 만큼의 또다른 감자는 썩거나 굼벵이가 먹거나 햇빛을 봐서 푸르게 변해 먹을 수가 없다. 굼벵이 피해를 줄이기 위해 토양소독을 하기도하는데, 궂이 토양 속 미생물까지도 죽여가며 흙을 혹사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냥 굼벵이랑 나눠먹은 셈 치자. 벌레랑 나눠먹은 것들도 많은데 말이다. ^^; 


혹시나 내년에도 감자를 심을 생각이라면 땅을 기름지게 만들 필요는 있겠다. 잘 먹여야 잘 크지 않겠는가. 풀들을 키워서 잘라낸 것들로 땅을 뒤덮고, 겉흙이 소실되지 않게 하면서 풀이 썩어 퇴비가 된다면 점차 땅은 땅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 과정에도 기다림은 필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호접몽은 '물아일체'로도 읽히지만, '인생무상'으로도 해석된다. 나비꿈에서 깨어나서 정신을 차린 내가 진짜 나인지, 원래 나비인데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이때 '나와 나비가 모두 하나'라 여기면 물아일체요, '모든 것이 꿈이로다'로 생각하면 인생무상이 되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가상공간 속의 나를 진짜로 알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각기동대]를 비롯한 수많은 기억에 관한 영화는 기억이 바로 나라는 것을 말해준다. 


시골 교사를 자청한 수혁 부부에겐 비밀이 있다. 아내가 밤이면 접신 또는 빙의가 되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되고, 위험하다면서 밤에는 집에 자물쇠를 채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몇일 후 하필 집에 화재가 나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 부부는 죽고 만다. 형구는 이 사건을 수사하다 마을 사람을 수상히 여긴다. 마을 사람이 모인 곳에서 수사를 하려던 형구는 어찌하다 만취가 됐는데, 깨어나보니 형사로서의 형구는 사라져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게다가 아내와 아들 둘도 없어지고, 독신의 처지로 바뀐 것이다. 형구는 자신이 형사인지 선생님인지 혼란에 빠진다.


[사라진 시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찌보면 명확해보이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아귀가 맞지 않는다. 아무리 짝을 맞추어보려해도 이야기는 술술 새나간다. 물론 이런 틈이 많은 이야기가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주지만, 이야기 자체가 견고하지 못하다보니 감동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도대체 형구는 형사였는지, 선생인지 답을 주지 않는다. 아니, 답을 구할 보기조차 없다. 


요즘 드라마 소재로 자주 쓰이는 평행세계인 것도 아니요, 다중인격을 소재로 사용한 것도 아니요, 전생과 이생의 이야기도 아닌데, 형사와 선생이라는 두 인격이 공존하고 있어 혼란만 야기한다. 마치 삼인성호 마냥 주위의 사람들이 형구를 형사였다 선생으로 만든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영화 속 도구들은 형구가 정신분열에 걸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하지만, 이 또한 <메모지>가 실재 존재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맞다. 이 <메모지>가 문제다. <메모지> 탓에 아귀를 맞출 수가 없다. 


정말 호접몽 처럼 형사로서의 삶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한낱 꿈이었을까. 하지만 꿈이면 어떤가. 결국 나비로 있을 때는 나비로, 사람으로 있을 때는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꾸려가면 되는 일임을. 형사로서의 삶이 사라졌다 한들, 지금 선생으로서의 삶을 터벅터벅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영화는 [사라진 시간]을 찾지 말고 지금 현재의 시간을 살라하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