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 펜연필독약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정원가가 아니다. 텃밭지기다. 조그마한 터에 주로 먹을 것 위주로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어 거두어 들인다. 꽃을 심어 가꾸는 것은 다소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 몸에 들어갈 양식을 키워내는 것이지, 꽃을 보며 즐기는 마음의 양식을 키우지는 않고 있다. 다만 내 몸에 들어갈 양식들도 꽃을 피운다. 사과꽃, 배꽃, 매화, 블루베리꽃, 수박과 참외, 오이도 꽃을 피운다. 오미자, 복분자도 꽃을 피운다. 열매를 구하는 것들은 꽃을 피워야 하기 때문이다. 열매가 아닌 잎을 주로 취하는 채소류는 꽃을 피우기 전에 수확을 거두는 경우가 많아 꽃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순수하게 꽃을 구경하기 위한 목적으로 키우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도 가끔씩은 내가 관리하는 텃밭이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원추리, 백합, 수선화, 수국도 조그맣게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이들도 꽃만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원추리는 이른 봄 새 잎이 났을 때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백합과의 식물은 땅 속에서 나무들을 해치는 벌레들을 내쫓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꽃을 피우면서도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식물들은 밭 곳곳에 조금씩 심어 놓았다. 때론 입이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해주는 식물들을 더 심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도 해 본다. 입과 눈을 골고루 즐겁게 해 주는 다양한 식물들을 조화롭게 가꾸어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이런 생각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을 때 우연히 가드닝 분야의 명저라고 할 수 있는 <정원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알게 됐다.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라 할 수 있는 카렐 차페크가 쓴 에세이다. 체코 작가라고 하면 프라츠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뜻밖에 카렐 차페크라는 이름을 새롭게 알게 됐다. 이 작가가 우리가 요즘 흔하게 쓰고 있는 '로봇'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극작가이면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카렐 차페크는 한편으로 정원가이기도 했다. "인간은 손바닥만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카렐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며 느낀 감상을 위트 넘치는 필체로 펼쳐 보인다. 마치 <나를 부르는 숲>의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는 것처럼 얼굴에 웃음을 짓게 만드는 책이다. 그 속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담겨 있어, 때로는 진중한 사색에 빠지게도 한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으며, 정원가도 텃밭지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특히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고백은 100% 공감한다. 건강하고 좋은 흙에서만이 건강한 꽃과 작물을 키울 수 있다. 최근 흙이 아닌 공장식 배양액으로 작물을 키우는 스마트팜에서는 해당되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점차 흙에서 자라나는 것보다 이렇게 실내 공간에서 흙 없이도 자라는 작물의 비율이 높아져 갈 것이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해 외부 환경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작물은 물론이거니와 꽃도 키우기 어려운 환경이 되고 있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가면서도 변화무쌍한 기후라는 제약을 벗어나 연중 일정한 양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날이 뜨거워지면서 에어컨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 이는 다시 날을 더 뜨겁게 만드는 악순환이 일어나듯, 우리의 먹을 것을 일정하게 확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은 다시 농사를 더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 가꾸는 이야기를 통해 흙의 소중함도 다시 일깨울 수 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년 7월 20일 가끔 비 23도~31도


작은 밭을 가꾸면서 가장 겁이 나는 것은 뱀과 벌이다. 눈에 잘 보인다면 피하거나, 막대기나 약품 등을 사용하여 쫓아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뱀과 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어디서 마주칠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게 한다. 하지만 밭 일을 하면서 두려움에 떨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애쓰는 것은 아니지만 뱀과 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즉 생각을 안 하면 된다. 물론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에 자꾸 코끼리가 떠오르듯(정치권의 프레임 싸움), '뱀과 벌을 생각하지 마'라는 생각조차 없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밭 작업을 할 때는 실제 이런 생각조차 없다. 특히 올해는 지금까지 밭에서 뱀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아 더 그렇다. 지난해의 경우엔 봄에 두 번 정도 마주쳤는데 말이다. 



하지만 약을 치지 않는 밭에, 두더지가 쏘다니는 밭에, 꿩이 알을 낳는 밭에, 뱀이 없을 리는 없었다. 기어코 뱀과 마주쳤다. 풀을 베고 농기구를 정리하러 우물가로 가던 중 어른 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 뱀이 복분자 나무 밑으로 쏘~옥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아이쿠야! 살짝 기겁을 하고 복분자 나무에서 쫓아내려 막대기로 휘휘 저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한참 복분자를 따야 하는데 뱀이 있다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뱀을 본 이후로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혹시 뱀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먼저 긴 막대기나 예초기로 휘휘 저어본다. 뱀이 실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관념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 온다. 물론 뱀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존재를 잘 관찰해서 대처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뱀이 실재하느냐 실재하지 않는냐 보다 더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관념이다. 머릿속에서 뱀이 떠나지 않는 한 뱀은 존재한다. 물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뱀에 대한 걱정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뱀이 없는 것은 아닐텐데도 말이다. 


관념과 실재 사이. 밭 일을 하며 마주친 뱀이 남긴 흔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2020년 시작했던 시즌1이 2024년 시즌3로 마무리. 시즌1은 'K크리처의 탄생'이라는 찬사 속에 흥행에 성공. 기존의 좀비와 같은 전염성에 비롯된 동일한 형태의 크리처가 아니라, 개개인의 욕망에 따라 가지각색의 괴물이 나타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시즌2는 수호대와 안전캠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갈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뚜렷한 목표 없이 갈등만을 보여주어 실망을 많이 주었지만, 시즌3의 떡밥일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도 안겨줬다. 


2. 매몰비용의 오류! 시즌2까지 본 것이 아까워 시즌3까지 보았지만...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떡밥이라 표현되었던 시즌2의 이야기가 시즌3에서 마무리는 되었지만,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무리 된 이야기들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여전하다.


3. 시즌2와 시즌3의 빌런이라 할 수 있는 편상욱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그저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좀 더 강한 육체를 욕망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육체를 발판으로 다른 목표가 있는 것일까. 현수(송강)에게 자신의 편에 서라고 말해왔지만, 도대체 그 편에 서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 시즌3의 주요 등장요소라 할 수 있는 신인류라는 것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감염이 되어 괴물이 되고, 다시 진화하여 신인류가 된다는데, 은혁을 통해 보여지는 신인류는 감정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괴물이라는 과정 속에서 욕망이 사라지고 신인류가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류가 괴물이 되어 신인류로 살든, 그냥 인류로 살든 별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궂이 괴물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그저 괴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 그만일 듯 싶은데....


4. 이상하게 시즌3를 보면 촬영장 모습이 떠오른다. 극에 집중하여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못하고, 지금 이 장면이 어떻게 촬영이 되고 있을까 하는 상상이 머릿속을 채운다. 등장인물들이 죽을 때마다 나타나는 신파적 요소가 너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일까, 오히려 더 어색해진 CG때문일까, 다양한 괴물보다는 일대 일에 가까운 대결 구도 때문일까. 아무튼 드라마를 보면서 자꾸 머릿속에 촬영장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별난 경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두 번째 은퇴 번복작. 51억엔이 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역대 최고 제작비가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원작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제목과 극 중 한 부분에서 소재로 등장할 뿐, 내용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소설처럼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2. 이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의 총결산처럼 보인다. 이제 정말로 은퇴작이 아닐까 싶다. 극의 곳곳에 그가 자주 등장시키는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특히 와라와라라는 작고 귀엽고 엄청 많은 숫자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시그니처가 아닐까 싶다. 이번 와라와라는 이승에서 아이들로 태어나는 캐릭터다. 


3. 어머니를 화재로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간다. 이곳에서 이모를 새엄마로 맞이하게 된 마히토는 새 삶에 적응하기 힘들다. 고택에선 말하는 왜가리가 나타나고, 왜가리가 그를 다른 세상으로 유혹한다. 마히토는 실종된 새 엄마를 찾아 왜가리와 함께 이승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 모험을 펼친다.


4. '새 술은 새 부대에' 이번 영화는 마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주인공 마히토가 새엄마를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생각된다. 시대적 배경인 1930~40년대 군국주의로 팽배한 지금의 시대를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결의가 느껴진다. 극 중에서는 앵무새로 표현되는 군국주의 무리들의 방해를 뚫고 기존 세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가자는 은유로 가득해 보인다. 비록 그 새로운 세계가 혹여 악의-주인공 마히토가 돌로 자신의 머리를 자해하는-가 있다 하더라도, 그 상처(자해로 얻게 된 머리의 깊은 상처)마저 품고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가득 차 보인다.     


5. 개인적으론 이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애니는 큰 감흥이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만, 마음을 흔들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느껴졌다. 그럼에도 판타지 세계와 모험을 통해 새롭게 변하는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잔잔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몬드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이제야 읽었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못 읽고 지나간 게 벌써 몇 년. 책도 시절인연이 있는가 보다. <아몬드>는 2016년 제10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2020년 일본서점대상 번역소설부문 아시아권 최초 1위도 달성했다. 손원평 작가는 그 이후로도 <서른의 반격><프리즘>으로 이 부문 1위와 2위를 수상했다. 또한 <침입자>라는 영화의 각본과 감독이기도 하다. 


2. 소설은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으로 태어난 윤재라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어렸을 적 미아가 되어서 중국인 가정을 시작으로 여러 가정을 거치며 불운한 성장기를 지나온 곤이라는 아이와의 우정, 그리고 윤재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변화를 가져오게 만든 도라라는 아이와의 사랑이 그려진다. 알렉시티미아는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가 선천적으로 작게 태어나면서 감정 표현에 서툰 증상을 일컫는다. 제목 아몬드는 편도체를 은유하고, 이는 감정의 또다른 표현이라 여겨진다.


3. <아몬드>는 윤재의 변화와 성장을 담은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감정 표현에 서툰 아이가 비극적 사건을 겪고 나서,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점차 감정을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과정은 소위 '정상'이라 표현하는 평범한 이들에게 정말 당신은 그 감정으로 타인과 충분히 공감하며, 그들과 무엇인가를 나누고 있는 지를 묻게 만든다.


4. <아몬드>라는 소설을 읽게 된 것이 시절인연이라 말하게 된 것은, 윤재의 성장이 꼭 생성형AI의 진화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윤재를 휴머노이드 생성형 AI라고 가정해도 이야기가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아서다. 현재의 AI 기술로 윤재와 같은 사고를 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가 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그리고 생성형AI의 진화는 인간의 감정마저도 읽어 내고 반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를 감정에 두고 있는 많은 상상들이 철회되는 시기가 올 것만 같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게 만드는 것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이 가져오는 행동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우정 등 콕 집어서 무엇이라고 엄격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개념이 생명이나 목숨의 위협마저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이런 행동이 인간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괴물'이라 불렸던 윤재가 인간답게 느껴지고, 타인의 감정에 반응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들이 '괴물'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