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21세기 교양강좌를 듣다 너무나 억울한 느낌이 들어 글을 써봅니다.

휴대폰 세계 최대 생산업체는 핀란드의 노키아라는 곳입니다. (참고로 삼성이 3위, LG가 4위라고 하는군요) 이 노키아의 부회장은 취미가 오토바이 모는 것인데요, 한번은 50km 규정속도에서 75km로 달리다 과속으로 걸렸다는군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물어야 할 벌금이 무려 1억원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과속 한번 했다고 범칙금이 1억이라니요? 우리나라야 재벌회장이 과속을 하든 배추장사를 하기 위해 트럭을 모는 상인이 과속을 하든 똑같이 6만원(? 맞나요)이니 얼마나 평등한 사회입니까? 하지만 핀란드는 그 사람의 수입이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벌금의 정도가 달라진다는군요? 과연 어떤 곳이 상식이 통하는 사회입니까?

법률 중에서 사회법이라는 것은 불공펑한 적용을 통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반면 시민법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이 되죠. 우리는 정규교육을 통해 시민법만을 배우고 자라왔습니다. 사회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자라난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노키아의 부회장이 내는 벌금에 대해서도 혹시나 너무하다고 생각할련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동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회법의 하나인 노동법은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내기 위한 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노동법을 통한 정당한 파업행위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공익의 손해를 감내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정부나 기업, 언론의 홍보가 한몫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관용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될줄로 압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정서로서는 이해를 넘어 관용까지 필요할듯 싶습니다)바로 우리와 똑같은 노동자들에게 말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항공사가 파업을 해도 트럭운전사가 파업을 해도 국민들이 모두 응원을 합니다. 2시간 거리를 10시간이 넘게 자동차를 운전하더라도 말이죠.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것은 정보의 차단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OECD 국가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노동법을 바꾸겠다는 약속을 해야했습니다. 어떤 부분을 바꾸어야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공무원은 노동자가 아닌 나라는 몇개국이나 될까요?

아참 그러고 보니 또 서글픈 한 예가 생각나는군요. 미숙아가 태어나는 경우 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한달만 이 곳에서 생활을 하게되면 병원비가 적어도 1천만원 이상이 나옵니다. 만일 몇개월 입원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의사에게 서약서를 쓰고 아이를 퇴원시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아이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돈만 있다면 아이는 살아날 수 있었겠죠. 계급이 없어진 평등한 사회이지만 똑같이 인큐베이터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아이가 한 아이는 죽음을 또 한 아이는 새 생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부해야 합니까?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2년간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하는 비용은 국가가 전부 책임진다고 하는군요. 고작 2년이지만 우리에겐 2년이나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정말 함께 잘 살기 위해선 많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수많은 정보들을 모아서 그것을 우리의 삶에 맞게 분류하고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겠습니다. 이 힘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닐겁니다. 그저 상식대로 양심대로 행하기만 하면 될테니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비양심적으로 굴러가는지 한번 생각해보니 이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듯 싶네요. 그래도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밝은 빛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탄핵 찬성과 반대자의 집회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어도 아무 충돌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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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민의 누드가 나온다며 시끌벅적했던 영화다. '한국에서의 청순한 이미지와는 달리' 라고 알려졌지만 벗은 몸이 꼭 야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레짐작하곤 한다. 그리고 배우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오버하곤 한다. 벗은 몸과 이미지 굉장히 끌리는 화두다.

2.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 펼쳐진다. 영화 속 화면에 펼쳐진 설국은 '러브레터'의 풍경과 닮아 있으면서도 조금 다르다. 눈을 한아름 이고 있는 산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로서는 사실 영화의 이야기나 구성 등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 덮힌 산, 흐날리는 눈송이, 다리가 푹푹 빠지면서도 눈 속을 걸어가는 여인. 그곳이 일본땅이든 한국땅이든 또는 알프스이든 꼭 가보고 싶다.

3. 왜 나는 그토록 눈에 미쳐하는가? 눈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끌어당기는가?

4. 눈은 욕심이 없다. 자신이 내려서야 할 곳을 골라서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새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다 바꾸어 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풍경을 끝끝내 고집하지는 않는다. 햇볕을 받으면 자신을 녹여 원래의 세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햇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선 꽁꽁 언 얼음이 되어서 차디찬 마음으로 세상에 미련을 남긴다. 그 차디찬 마음에 사람이 또는 차가 미끄러져 다치곤 한다. 그러나 얼음은 투명한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따뜻한 곳에선 녹아내리고 차가운 곳에선 투명한 눈은 그 차갑디 차가운 손으로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때론 성난 폭설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도 하고, 내린듯 안내린듯 살포시 내려와 어느새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눈. 바람과 친구가 되어 함께 내릴땐 거부하고 싶고 혼자서 천천히 내릴땐 손으로 받아주고 싶은 눈....

5. 사업에 실패하고 죽음을 각오한 채 찾아온 온천마을, 그러나 중년의 남자는 죽지 않는다. 자신의 연인을 눈 앞에서 잃으면서도 꿋꿋이 살아온 게이샤의 청순한 사랑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게이샤는 비로소 죽을 힘을 얻는다. 죽음으로써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눈물을 삼키면서도 견디고 살아야 한다는 남자의 말은 실은 자신을 향한 말이었을 게다.

눈이 따뜻한 햇볕에 녹듯 죽음도 그렇게 따스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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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엔리오 모리꼬네 음악. 실은 이 두사람이면 영화를 볼 가치가 충분하지가 않나? 더더군다나 피아니스트라는 제목이 말하듯이 음악에 관련된 영화라면 모리꼬네의 실력이 여실없이 드러날 것이고.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이드(1900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는 여객선 무도회장 피아노위에 버려져 있다 배의 석탄꾼에게 발견된다. 그리고 평생을 배에서 피아노를 치며 지낸다. 누구한테 한번도 배우지 않았던 피아노이지만 8살(?)때 그냥 아름답게 친다. 30이 넘은 나이에 딱 한번 뭍으로 발을 내디디려 하지만 끝내 다시 발길을 돌려 배로 돌아온다. 그리고 배가 폭파되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재즈를 만들었다며 기고만장해 있는 피아니스트와의 피아노 연주 대결이다. 서부시대 건맨들의 총싸움이나 춘추전국시대 칼잡이들의 대결같이 목숨을 걸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실은 이 대결이라는 것이 도시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끝없이 자기 확장을 해야만 하는 도시 말이다) 영화 전체를 흐르는 바다와 도시의 대조. 가장 인상적인 화면은 뉴욕의 고층빌딩을 뒷 배경으로 배 위에 혼자 남은 주인공이 깡통을 차며 나아가는 장면이었다. 그의 쓸쓸함이 고층빌딩의 불빛으로 인해 더 적막감을 드러낸다.  

항상 바다위에 떠 있으면서 바다의 소리(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는 격려의 소리다)를 듣기 위해 뭍으로 오르려 했던 주인공은 끝없는 도시의 풍경에 짓눌려 끝내 되돌아선다. 도대체 도시의 끝은 어디인가? 배위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가 희망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그 희망의 소리 '아메리카'를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희망을 찾았는가? 그렇다면 왜 또 다시 배에 오르는가?

영화는 마치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를 옮겨놓은 것 같다.

빌딩숲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본다.

 이셋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영화속에선 한번도 도시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풍경은 이 노래가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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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나무 투쟁기 - 새로운 숲의 주인공을 통해 본 식물이야기
차윤정.전승훈 지음 / 지성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교과서인지 중학교 교과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회관계를 협동, 경쟁, 갈등 으로 구분했던 것 같다. 분명 교과서 속의 관계는 이렇게 3가지로 구분되어 있지만 우리가 줄기차게 교육받아온 것은 경쟁사회라는 것이었다. 끊임없는 순위매김 속에서 남들보다 한단계라도 앞서기 위해 잠을 줄여야 하고, 그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살아남으면 되는 것이다.

그 살아남는 과정이 이 책의 신갈나무를 통해서 드러난다. 봄에 싹을 틔우고, 인고의 기나긴 세월동안 가지를 뻗고, 잎을 냈다 거둬들였다 하는 사이 나이를 먹고 마침내 자손을 퍼뜨린다.(그 과정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신비함을 오히려 부추기도 한다. 신비감이란 비이성적인것이 과학적 사유라는 이성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근사한 아이러니인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나무의 삶은 왜 그리도 고달픈가?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끝내 다른 나무에게 생명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열한 생존경쟁. 책은 마치 나무도 이러할진대 사람이라고 다를소냐 하며 인생의 쓴 맛을 인생의 참 맛인냥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 나무로부터 배울게 있더라도, 환경에 순응해가는, 때론 투쟁하는 모습만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란 환경을 바꾸는 족속이며,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만을 강요하거나 그것이 인생이라고 자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가 경쟁을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우리는 공존을 가져올 수 있는 그 어떤 사회체제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싹을 틔우기 위해 땅속에서 꿈틀대던 신갈나무의 씨앗과 같다.

투쟁을 넘어 공존을 향해 가지를 뻗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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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노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현실에 울분을 토하고 있을즈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대학 동창생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군요. 오늘 야근이지만 두말않고 조문을 가기로 했습니다. 밤차를 타고 포항이라는 먼 곳으로 말이죠.

동창생인 그녀는 저에게 절실한 친구는 아닙니다.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던 아이로 그녀의 형편을 조금 알고 있을뿐입니다. 그 조금 아는 사실이 저의 몸뚱아리를 그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이혼을 한  상태이지요. 아버지는 일본에 가 계시고, 어머니는 경상도 상주에서도 산골 깊숙한 곳에서 혼자 목축을 하고 계셨죠. 10년전쯤 얘들끼리 모여 MT 비슷하게 그곳으로 놀러 간 기억이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비포장도로를 거침없이 달려가시는 아주머니의 운전솜씨에 흠뻑 반하기도 했었습니다. 여장부 같았죠.

그녀에겐 오빠가 한명 있었습니다. 다운증후군인 오빠는 97년도에 돌아가셨죠. 아마 그녀의 어머니는 이때부터 조금씩 무너지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아주머니는 2001년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위암이라는 것이 그래도 생존률이 높은 편입니다. 저의 사무실에서도 위를 절개하고 살아계시는 분이 두분이나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수술을 거부하셨습니다. 내가 수술을 하지않고 담배를 자유롭게 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당신의 고집으로 인해 병원에서 쫓겨나시고 나서 수술이 아닌 호스피스 개념의 치료를 행하시는 의사를 찾게 됐습니다. 환자의 편안함을 중시하는 그 의사를 신뢰하고 자신의 몸을 모두 맡기신거죠. 하지만 그런 의사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서울의 병원에서 좌천당해 포항으로 내려가게 됐지요. 아주머니는 그 의사를 따라 포항으로 내려오셨답니다. 당신과 의사는 단순히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 그 이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아주머니는 어느날 딸에게 이런 말을 하더랩니다.

"얘야, 삶이 지겹다"

그 말을 내뱉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딸의 심정은요?

몸이 저릿해옵니다. 발인을 꼭 보고 화장한 아주머니의 유골이 상주집에 앉히는 것을 보고 오고 싶었지만 일요일 출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 또 밤차를 타고 이렇게 서울로 올라와서 글을 써봅니다.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져 는군요)  저는 밤차 속에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직 교통사고의 후유증이라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펐지만 제 머릿속에는 '지겹다'라는 말이 계속 맴돌더군요. 그리고 갑자기 저의 20년 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며 삶을 지겨워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하신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숙연해집니다.

암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살고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삶은 그렇게 애착이 가는 그 무엇일겝니다. 그런데 그 애착을 아무런 미련없이 끊어버린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죽음 앞에서 그렇게 덤덤할 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녀는 굳건히 버티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피가 그녀에게 흐르는 모양입니다.

집착하진 않더라도 지겨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집니다. 죽음 앞에서 용기있더라도 친구처럼 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처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 절대 비굴하게 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편안히 가소서. 그리고 남아있는 이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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